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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은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의 궁궐이다.
1405년(태종5) 경복궁의 이궁으로 동쪽에 지어진 창덕궁은 이웃한 창경궁과 서로 다른 별개의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하나의 궁역을 이루고 있어 조선 시대에는 이 두 궁궐을 형제궁궐이라 하여 ‘동궐’이라 불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고 광해군 때에 다시 짓는 과정에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法宮)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창덕궁은 응봉자락의 지형에 따라 건물을 배치하여 한국 궁궐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 더불어 비원으로 잘 알려진 후원은 각 권역마다 정자, 연못, 괴석이 어우러진 왕실의 후원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와 한국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동궐도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 형식으로 비단 바탕에 그린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궁궐 건축 그림이다. 순조 30년에 불타버린 환경전과 순조 34년에 중건된 통명전 경복전 건물은 없고 터만 그려져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제작 연대는 1826년 ~ 1828년 경으로 추정된다.
돈화문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1608년에 중건된 문으로 400년이 넘은 우리의 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년(태종 12)에 건립된 규모와 품위를 함께 갖춘 우리의 보물이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금천교
금천교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明堂水)위에 설치되어
있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禁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
서 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御溝)물가에는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
를 설치하였고, 여기에 금천교를 설치하여 궐내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금천교를 지키고 있는 조각들의 표정이 너무 앙증맞다.
상의원처럼 임금의 옷이나 궁궐 내 소요되는 각종 재물을 공급하는 관청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관리사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진선문
'선한 말을 올린다'는 의미와 훌륭한 사람을 천거한다'는 뜻을 지닌 인정전 앞뜰의 서쪽문이다.
정청
정무를 보는 관청이란 뜻으로 정청은 이조와 병조에 속해 있으며 인사업무를 처리하던 관청이다.
호위청
임금의 호종과 호위를 맡은 관청이다.
상서원
상서로운 기물을 맡은 관서란 뜻으로 옥새 등을 관리하던 관청이다.
인정문
인정문은 '어진 정치'라는 뜻으로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문은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이다.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로,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천장은 천장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단청은 가장 소박하게 꾸몄다.
인정전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궁궐전각으로 세워져 당당해 보이는데, 월대의높이가 낮고 난간도 달지 않아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인정전 내부
인정전 안에는 정면에 임금님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과 곡병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는 병풍이 있다.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으며 이는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임금이 중앙에서 사방을 다스리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을 볼 수 있다. 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 인정전의 실내바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고 전등, 커튼, 유리 창문 등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문물이 들어오면서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향실
향을 보관하던 방이다.
선정문
선정전 내부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전각의 내부 바닥은 원래 네모난 벽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가 깔려 있다. 정면 중앙에는 어좌가 자리하고 그 뒤에는 일월오봉병이 둘러쳐져있으며 천장에는 보개를 설치하엿다. 현재 창덕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이곳은 보정당이란 후궁 건물이 있던 곳으로, 연산군 때 장녹수가 지냈던 곳이며, 조선 후기에는 영조 임금께서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요휘문
'밝게 빛난다'는 뜻을 지닌 대조전으로 향하는 문이다.
어차가 출입할 수 있도록 개조된 희정당의 남문인 정문 현관으로, 화려하게 단청을 한 멋스러운 돌출 현관이
자리하고 있다.
남문에서 바라본 희정당 안뜰이다.
침전에서 편전으로 바뀌어 사용된 곳으로,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궁궐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 2)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희정당 내부에는 붉은 카펫바닥에 유리 창문, 천장에는 샹들리에 전등과 서양식 가구등 서양식으로 꾸며졌으며, 동서 벽면 상단에는 해강 김규진이 그린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 그림이 걸려 있다.
희정당은 팔작지붕으로 여러 개의 돌기둥들이 떠받들고 있는 누마루 집으로 지어진 전각이다.
선평문
선평문은 '화평을 세상에 펼친다'는 뜻으로 대조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대조전
대조전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으로 정면 9칸, 측면 5칸의 제법 규모가 큰 전각이다. '대조(大造)'란 '큰 것을 만든다'는 뜻으로 이는 장차 왕조의 대통을 이어나갈 왕세자를 생산하는 집이란 의미로, 왕비의 생활공간인 동시에 임금과 왕비의 침전이기도 하다. 대조전에서는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익종)이 탄생하였으며, 성종, 인조, 효종, 현종, 철종, 순종이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대조전의 현판은 효명세자의 아버지 순조의 어필이다.
흥복헌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 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했다.
양구일구
수라간
대조전의 서문을 통과하면 근대식 오븐과 수도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주방인 수락간이 나온다.
경훈각
대조전 행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경훈각은 '경치가 훈훈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서편으로는 숙종의 어진을 모셔 두던 영휘당(永輝堂)과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때 사용하던 옥화당(玉華堂)이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원래는 2층으로 된 청기와 건물이었으나 두 차례에 걸친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 경복궁의 자경전 북쪽에 있던 만경전을 헐어다 지금의 단층전각으로 지은 것이다.
이동식 변기인 매화틀을 옮길 수 있는 작은 문이다.
대조전 뒤의 계단식 화계와 굴뚝은 다른 궁궐에 비해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
화계에 설치된 돌계단을 올라 꽃 담장 쪽문을 통하면 후원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
청향각
청향각은 '맑고 향기롭다'는 뜻을 지닌 대조전과 연결된 보조건물로 원래는 경복궁의 건물을 헐어 지은 건물이다.
경훈각 옆에 놓여 있는 굴뚝의 토끼문양은 달과 함께 여인을 상징한다고 한다.
영현문
동궁 영역인 성정각의 남문으로 '어진 이를 맞이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성정각
성정각은 왕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졌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으로 사용하였으나, 세자만이 사용하였던 전각은 아니였던 것 같다. 영조는 이곳에서 신하와 만남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정조는 중희당이라는 세자궁을 짓고 이곳을 편전으로 자주 사용하였다고 한다. 순조 역시 이곳에서 효명세자의 사부와 빈객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보춘정
성정각 동편에는 루가 붙어 있는데, 이곳에는 보춘정과 희우루(喜雨樓)란 현판이 남쪽과 동쪽에 함께 걸려 있다. 보춘(報春)이란 '봄을 알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희우(喜雨)란 '오랜 가뭄 끝에 오는 반가운 비'를 뜻하는 것으로 이들 모두가 세자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담고 있다.
희우루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기뻐한다'는 뜻을 지닌 성정각 동쪽 누각이다.
*한 때 내의원으로 사용했던 흔적으로 성정각 남쪽 행각건물에는 保護聖躬 調和御藥’이라고 쓴 편액이 그대로 걸려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 인정전 서편에 있던 내의원이 헐리면서 약재 도구를 이곳으로 옮겨와 내의원의 약방 건물로 사용했다.
관물헌
관물헌에서는 세자와 임금이 공부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정조는 이곳에 거처하며 독서를 하였으며, 순조는 왕세자의 공부 장소로 정하였고, 정조이후 임금이 머무는 공간으로 자주 이용하였다. 고종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유교의 경전을 강론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곳은 갑신정변(1884) 때 김옥균, 홍영식 등 개화당 세력이 고종을 모시고 청나라 군대와 대치하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터만 남은 중희당의 부속건물이던 칠분서 율랑과 삼삼와 육각정자다.
장낙문
'길이 즐거움을 누린다'는 뜻을 지닌 낙선재 정문이다.
낙선재
'선을 즐긴다'는 뜻을 지닌 낙선재는 헌종이 경빈 김씨를 맞아들이면서 자신의 처소로 수궁 경빈 김씨를 옆에 두고 편안하게 책을 읽고 서화를 감상하며 머물렀던 곳이다. 낙선재는 궁궐 내에 있는 집이면서도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낙선재 누마루 아래 빙결무늬는 화재 예방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누마루의 보름달 모양의 문은 너무 아름답다.
석복헌
'복을 내려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석복헌은 헌종이 후궁 경빈 김씨의 처소로 지어졌다. 錫福軒이란 당호는 당시 왕실과 조정의 최대의 바람이었던 왕세자를 얻는 것을 소망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왕세자 탄생을 갈망하는 왕실의 소망을 담고 있는 건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도 헛되이 헌종은 경빈을 맞은 지 2년도 채 못 되어 중희당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수강재
수강재는 석복헌의 동쪽 건물로 헌종은 당시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육순을
맞이하여 거처로 사용하도록 고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수강이란'오래 살고 건강하다'는 뜻으로
이 집에 거처하는 대왕대비의 장수와 건강을 염원하는 헌종의 효심의 담겨져 있다.
* 낙선재, 석복헌,수강재는 일제강점기 이후에 왕실 후손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일본에서 귀국한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와 고종의 막내딸인 덕혜옹주가 일본에서 귀국하여 생활하다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선원전
왕족의 유구한 계보를 뜻하는 것으로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시던 곳으로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추존왕 문조(익종), 헌종 어진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이 어진 들은 고종대에 경복궁 선원전으로 옮겨지고 지금은 비어 있다.
양지당
고상한 뜻, 즉 부모님의 뜻을 기린다는 의미로 임금이 선원전에서 제사를 모시기 전 머물렀던 곳이다.
출처: 창덕궁, 쏭내관과 함께하는 궁궐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