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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서구 노인복지관 마음 잇기 자원 봉사단* 단원수는 22분이다. 주로 전화로 상담한다. 독거 노인을 상대로 안부확인, 생활상태 점검, 정보제공, 말벗, 정서지원, 기타상담을 한다. 대구시에서 주는 70~80독거노인 명단을 봉사자 22명이 나눠서 관리 한다. 나는 남성 한명과 여성세분을 관리한다. 주 1회, 월4회이상 독거노인을 관리해서 변화나, 이상이 있는지 예의주시한다. 독거노인을 관리하는 것은 응급시 발빠른 대처를 하기 위함이다. 요즘 고령화사회에서... 고독사 방지기능도 한다. |
*수필과 지성 여름문학제*
대구교육대 평생교육원(상록관)
수필과 지성 창작 아카데미(12주간)
수필과 관련 문예이론, 작품 합평, 창작실기 등을 수업을 받는다.
현재 36기 수업 중
2024.7.13
수필과 지성 여름 문학제
대구교육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과지성 창작아카데미(주강 장호병 교수, 한국문협 부이사장)는 7월13일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봉황산방에서 수필과지성 여름문학제를 열었다.
대구교육대학교 교정에서 대형 관광버스 2대에 나누어 타고 출발하여 영천시 도유리 광주이씨 시조 묘역 광릉과 영천시 북안면 노계문학관을 탐방했다.
영상실에서 노계 박인로 선생의 ‘조홍시가’를 방종현 수필가가 시조창으로 불러 관심을 끌었다.
이날, 문학제가 열린 봉황산방에는 은종일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곽명옥 수필과지성 창작아카데미 회장, 신재천 영화감독, 방종현 대구문인협회 부회장, 문장작가회 여남희 회장, 한대곤 전 예총 예술대학장. 권정태 전 사진가 협회장. 이경은 KBS 대본작가 등 120여 명이 함께했다.
문성희 곽수연 사회로 진행한 문학제에서 이명지 작가의 수필 ‘낮술’을 수필극으로 설창환 등 8명이 공연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피날레를 촛불 기원으로 참석자 모두가 참여하여 하나가 되었다.
수필과지성 아카데미는 2006년 개교하여 18년 역사의 문학 산실로 800여 명이 수료하였으며 수료자 중 150여 명이 수필가로 등단하였다. 봄 가을 학기로 운영하는 수필과지성 창작아카데미는 현업에서 은퇴한 시니어들이 많이 수강하는 인기있는 강좌로 정평이 나 있다. 9월 5일 가을 학기 개강을 앞두고 있다.
*한끗차이* 한끗 차이/ 방종현 노인복지대학에 이름난 3총사가 있다. 군의원에 출마한 이력이 있는 황만보 씨와 36년 공무원으로 봉직하며 부면장(副面長) 을 끝으로 은퇴한 고주태 씨와 트리오중 마지막으로 초등학교 에서 37년 교편을 잡고 교감을 역임한 강만태씨다. 세 사람 중 성격이 활달한 호걸풍의 황만보 씨는 사업 수완이 좋아 벌어놓은 재산이 많아 돈도 제법 잘 써서 무리 중에 대장 격이다. 흠이라면 두 번이나 군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한 일이다. 군의원에 당선되어 의원님 소리들어보는것이 꿈이였을터 두 번째 출마했을 때 고작 두 표 차이로 낙선했다 하니 얼마나 속이 쓰렸을까. 더욱 기가 막힌 사연은 유권자 중 가까이 지내든 지인이 하필이면 투표날 외양간에 불이나 송아지 5마리를 잃고 경망 중에 투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중 복기를 해보니 그 지인이 투표장에 갔으면 지인 부부 아들 며느리 4표는 확실했다는것이다, 분명 자기한테 투표했을 테고 상대보다 오히려 자기가 두표차로 이겨 당선되었을 것이다. 땅을 칠 일이지만 자기는 그 선거에서 당선된 것으로 보고 더는 군의원에 출마할 꿈을 접고 마음의 군의원으로 남기로 했다. 고주태 씨는 공무원의 로망인 사무관에 진급해서 면장님 소리를 들어 보는 게 꿈이었을 테고 강만태 씨는 만년 교감 에서 교장선생님 소리 들어 보는 게 꿈이었을 테니 세 사람은모두 현직에 있을 때 공통으로 副 字 콤프렉스를 갖고 있는 셈이다. 어느 날 삼총사가 술자리를 했을 때이다. 세 사람은 나이도 70세 동갑이다. 황 낙선의원이 한마디 한다. “우리 거추장스럽게 말을 들지 말고 갑장이니 앞으로 말을 트도록 하자” 며 제안하자 “그거좋지 그럽시다” 며 황 부면장이 말을 받자 “그래 까짓 거 무거운거 들지 말고 놓아버립시다” 하고 강 교감이 거든다. 셋은 오래전에부터 알아온 사이인듯 의기투합해 바로 하대를 하기 시작한다. 잔커니 권커니 술이 몇 순배 돌자 기분이 고조된 황 낙선의원이 또 한마디 한다. 화투판에 갑오나 여덟 끗 은 한 끗 차이로 별차이가 아니 다며 오늘부터 우리삼총사의 호칭도 한 끗 올리기로 하잔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두꺼비 눈을 한 강 교감이 왕방울 눈을 굴리며 의뭉스런 눈으로쳐다본다. 눈치 빠른 고 부면장이 손뼉을 치면서 반기며 한마디 거든다. “아 이 사람 강만태 교장선생님 오늘부터 자네는 교감에서 교장으로 한 끗승진한것이네!” 하며 “황 의원님 내 말이 맞지예” 하고 손을 비비며 리더인 황 낙선자에게 아부한다. “그렇고 말고지 이사람 고 면장” 하하하 삼총사의 웃음소리가 골목길을 메운다. 그 후로 복지대학에서 셋은 스스로 올린 직함이 대견한지 평소에는 넌지시 부르든 소리가 이제는 힘이 들어있다. “어이 강 교장 차 한잔 하시게” 하며 부르기도 하고 “고 면장 점심하러가세” 하는가 하면“ 황 의원 와 아직 등청하지 않는가” 하며 전화를 거는 둥 기고만장하다. 하모니카 반에는 원래 강 교장 혼자 수강했는데 나중 두 사람을 끌어들여 이제 삼총사가 모두 하모니카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두 사람이 하모니카 반에 오기 전부터 강 교장은 홍 여사와 같은 책상에 나란히 앉아 수강하는 짝꿍이다. 홍 여사는 말수가 조용하고 계란형 얼굴에 미인형으로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이고 행동이 조신해 뭇 할배들 선망의 대상이다. 홍여사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싱글이라 소문이 나 있다. 그런 홍 여사를 강 교장은 매일 볼 수 있고 거기다 수업시간엔 옆자리에 앉히고 독점하기에 하루하루가 즐겁다. 오늘 아침만 해도 복지관 나오면서 이 옷을 입었다가 저 옷을 입었다가 거울 앞에서 뭉싯 거리다가 마나님으로부터 한소리 들었다. “할배가 뭐 이리 갈롱 지기노?” 마나님이 눈을 홀기며 잔소리해도 강 교장은 개의하지 않고 옷매무새도 매만지고 머리도 늘 단정하게 빗고 나온다. 복지대학엔 수강 첫날 한번 자리가 정해지면 그 자리는 대체로 다른 사람이 앉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어느 날 강 교장이 조금 늦게 나온 날이었다. 오매도 불망인 홍 여사 옆에 황 의원이 떡 하니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거기다 수완 좋은 황 의원이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두 사람이 수업시간 내 키득거려 강 교장의 심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다. 수업이 끝나자 황 의원이 강 교장을 부른다. “어이 강 교장 고 면장 불러오게 홍 여사랑 같이 점심 하러 가세” 평소에는 복지대학 내 구내식당에서 2,000원 짜리를 사 먹는게 상례인데 이쯤 되면 괜찮은 식당에서 황 의원이 한턱을 내는 게 십상이라 속은 쓰리지만, 말없이 따른다. 식당에서도 황 의원의 구수한 입담이 좌중을 휘어잡는다. 황 의원의 농담에 손을 가리고 웃는 홍 여사가 여간 신경 쓰이지 않는다. 조금전 식당을 나서며 홍여사에게 은근한 눈길을 보냈는데 고개를 숙이는 품새도 전과 다른것같아 애가 탄다. 강 교장은 내심으로 이러다가 홍 여사를 황 의원한테 뺏기는 건 아닐까 봐 속이 탄다. 내일은 일찍 나와서 홍 여사 옆에 앉으리라 다짐해 본다. 2표 차이로 군의원에 낙선한 황만보 교감으로 정퇴한 강만태 副 면장으로 퇴직한 고주태 삼총사의 자충우돌 한 끗 올려서 군의원 교장 면장으로 특진 하셨군요! *^^* 우리 방종현 스승님은 다재다능 하신 분 입니다! |
*나는 친구를 사귀는 것을 좋아한다.*
새로운 만남 햇살 아래 걸어가는 길, 그곳에 나와 같은 발걸음, 미소 짓는 눈빛, 서로의 마음을 잇는 실타래. 공통의 관심사로, 대화의 씨앗을 심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우정의 꽃을 피워내리. 소소한 일상 속에서, 함께 나누는 웃음과, 가끔의 눈물도, 서로의 마음을 더 깊게 해.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진정한 모습으로 다가가, 친구의 이름을 불러보네. 이렇게 만들어진 인연, 작은 순간들이 모여, 우정의 나무가 자라나, 영원히 푸르른 삶을 이루리. 나는 친구를 사귀는 것을 좋아한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늘 신선한 자극이 된다.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나에게 큰 즐거움이다. 가요 교실에 가면 노래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웃으며 노래를 부르고, 컴퓨터 수업에서는 같은 관심사를 가진 동료들과 지식을 나눈다. 스마트폰 수업에서도, 자서전 쓰기 반에서도, 우리는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며 친밀감을 쌓아간다. 스포츠댄스와 에어로빅스 반에서도 리듬에 몸을 맡기며 자연스럽게 친구가 된다. 특히 봉사활동을 통해 만난 친구들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다.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나에게 많은 의미를 준다. 각 반과 활동에서 만나는 친구들 중에서도 특히 유독 끌리는, 더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나는 늘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데 주저함이 없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더 나아가고, 더 행복해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기회를 즐긴다. ☆☆☆☆☆ |
*座右銘(긍정적인 思考)*
긍정의 힘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의 삶은 밝은 빛으로 물들어 가죠. 매 순간 떠오르는 생각은 우리의 길을 정하고, 주어진 일 앞에서 "나는 안돼"라고 속삭이면, 무거운 짐이 되어 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있어"라는 희망의 노래를 부르면, 가슴 가득 자신감이 피어나며, 불가능하던 일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 그 경계도 우리의 생각 속에 존재하며, 생각의 씨앗은 모든 것을 창조하고 이루어냅니다. 오늘도 긍정의 빛으로 마음을 밝히고, 보람찬 하루를 보내야겠습니다. |
*이사* 나는 고향의 초등,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서 고등학교는 대구 누님 집에서 다녔다. 식사는 달성동 누님 집에서 하고 잠은 고성동 대한실업 사(자형의 고물상 숙직실)에서 잤다. 고등학교 3년 초겨울에 취업지도 교사를 따라 서울로 가서 을지로의 천광전자에 취업해서 뚝섬 성수동에서 하숙하며 출퇴근했었다. CEO의 갑질로 그만두고 1970년 말 고향에서 겨울을 지내고 1971년 2월15일(설날) 입대를 하였다. 고향 친구들과 34개월 여의 군 생활을 마치고 1974년 12월에 제대했다. 자형 소개로 제일공업사(자형 친구분)에 서기로 취업했다. 그때도 누님 집과 대한실업사에서 생활했다. 1976년 1월 29일에 아내(심외자)와 중매결혼을 하고 비로소 독립된 내 집이 생겼었다. 신혼생활은 행복했었다. 일찍이 사랑의 결실이 있었다. 아내가 딸을 임신 했다. 가장으로써 책임감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그때가 조카와 동업하고, 투자하고, 업종을 2번씩이나 바꾸고, 결별하고, 독립하고, 남구 대명동에서 서구 원대동으로 업장과 주거지를 이사하는 격변기라 할 수 있다. 1976년 10월 새로운 나의 직장은 원대신시장 입구 부근에 있는 종합 가전, 전기 판매장입니다. 간판은 공중전자(전주인것 그대로)입니다. 집은 진00 씨 문간방에 살았습니다. 얼마 후 가게 이층에 방이 비위서 이사를 왔습니다. 이층 계단이 가팔라서 아기들이 위험했습니다. 얼마 후 건물 주인(김00)이 우리한테 매매를 권했습니다. 우리는 가진 돈이 없어서 포기했고, 다른 사람이 건물을 매입했습니다. 전 주인 김00이 가게와 붙은 방을 썼는데, 이사 가고 우리가 이층에서 내려와서 가게와 붙은 1층 방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곳에서 딸이 4학년,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살았습니다. 길가라서 면학 분위기도 안 좋고 집도 좁고, 가게도 좁고 해서 원대오거리 원대학원(2층) 3층에 전셋집(조00 씨 집)을 3천만 원에 얻었습니다. 그곳에서 4년 살고, 그 집 큰딸이 이사 온다고 해서 길00 씨의 큰 한옥을 5천만 원에 얻었습니다. 4년여 후 집이 소방도로 개설로, 이주비 250만 원 받고 박00 씨의 3층 집을 전세 8천만 원에 이사했습니다. 이 집에서 4년여 살고 자가를 짓고 1997년 10월 말에 이사해서 오늘까지 28년째 살고 있습니다. |
*내집을 짓다* 딸이 고3, 아들이 중3, 일 때 우리가 전세로 살던 한옥집이 소방도로 개설로 이사를 가야만 해서 부근에 6m소방도로가에 작은 3층 집을 통으로 8천만 원에 전세로 얻었었다. 1층은 창고, 2층은 부부 살림집, 3층은 아들과 딸 방으로 했다. 그 집에서 4년 반을 살았다. 1995년 연말쯤에 집값에 거품이 빠지면서 매매도, 전세도 가격이 25% 정도 내렸다. 해서…. 우리도 내 집 마련을 부부가 상의했다. 1990년도에 수성구 파동에 전원주택지 90平을 구매한 곳이 있는데~ 아내는 원대동에. 집을 짓자고 했다. 5월에 4m 골목길 안에 있는 작은 한옥(40평)을 평당 200만 원에 사서 50만에 철거하고 건축업자를 선정해서 우리가 원하는 구조, 재료로 지정해서 계약했습니다. 平당 150만 원(150만×55) 해서 8,250만 원,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9월 말쯤에 완공이 되었다. 5월에 전세로 살고 있던 집 주인(박00)에게 10월 초에 이사 가겠다고 얘기를 했었다. 주인은 세를 8천만 원에 우리보고 놓고 나가라고 합니다. 전세 기간이 9월 말이니 만기 되면 그때 전세금 주시고, 임대는 우리도 협조하겠다 했다. 임대 포스터를 동네 골목 여러 곳에 붙이고, 부동산에도 부탁했습니다. 부동산 사장도 현시세는 올 전세로 6천만 원이라고 합니다. 집 보러 세 팀이 왔었다. 주인과 상의하라고 연결해 주었고, 나는 만기가 가까이 오니 염려가 되어서 빨리 세놓으시라고 재촉했었다. 염려가 현실이 되었다, 만기는 되었는데 주인은 돈이 없다고 하면서 우리한테 세놓고 나가라고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다. 이사 날이 잡혀서 10월 말에 전세금도 못 받고 자가로 이사를 갔다.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한해가 지나고…. 1998년 2월에 전세금 반환 소송을 했다. 3월에 판결을 받았었다. 5월 말일까지 원금과 이자 5%를 주라는…. 박00은 4월 말에 8천만 원을 갚는다. 돈이 없어서 이자는 못 준다고 하면서.... 양심이 없는 인간입니다. 자기 집에 살면서 자식 혼사 땐 당연하게 청첩장 줘서 내가 두 번 다 참석 했는데…. 차후에 우리 혼사에 한번을 겨우 참석 했었다. 그때 자가로 이사한 후 27년을 이 집에서 살았고, 딸, 아들 결혼 시키고 그 후 15년을 부부 둘이 신혼 같이 살고 있습니다. |
*광화문 태극기 집회*
박근혜 대통령 불법 탄핵 반대 집회 무려 2년을 한 달에 3번 이상씩 다녀왔습니다. 2번의 혹서기와 혹한기를 길바닥에서 목청껏 외쳤습니다! 2010년 3월 1일에는 서울역, 남대문, 대한문, 광화문, 동대문, 청와대 앞 일대 전부에 150만 인파가 운집했습니다. 각 단체가 구역, 구역마당에서 평화적 집회를 했죠! 내 평생 그렇게 많은 인파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모든 공중파 방송은 태극기집회 인윈을 2만~3만이라고 떠들어대면서 촛불 집회는 150만이라고 방송했습니다. 내가 본 촛불집회 인원은 광화문 광장 가운데 몇백 명뿐이었는데….우리 태극기 집회 인원에게 포위되어서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나는 그날 밤 10시에 회차 하기로 했는데 동료 3명이 차를 못 찾아와서 사람 찾는다고, 그 빗속을 4시간을 헤맸답니다! 2년을 시위에 참여 했지만, 눈에 띄는 성과도 모르겠고, 피로감만 극심히 쌓여서 그만둔 지 오래됐습니다. 다행히 윤 대통령이 당선되어서 한숨 돌렸습니다. 좌파들은 참으로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나라야 망하든지 말든지 이념을 신봉하는 자들이죠! 우리 모두 애국합시다! 박근혜대통령 탄핵무효 |
*백년두레 봉사단* 대구 서구 비산동 인동촌 노인복지관 백년두례 자원봉사단 발족 ※내가 다니는 복지관이 네군데... 네곳 다 자원봉사 지원을 했다. 자그마한 봉사 활동이지만 나름 만족한다 중년에는 적십자봉사 8년, 지역 주위환경 개선 봉사등, 연장선상에서... |
*원대금고 노래교실*
원대새마을금고 노래교실이 개강했다.
기타 치는 노래 강사 이원규가 2년여를 하고,
김수진 강사가 왔다.
나는 회장을 맡았다.
5년을 채못하고….코로나 - 19로 문을 닫았다.
금고 판촉활동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 이 날에 목놓아 크게 우노라 설마 설마에 망한나라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목숨으로 살려 놓으니 나라 곳곳에 암약하던 빨갱이들 때문에 6.25까지 당하고도 정신 못차린 국민이여! 지금의 대한민국 몰골이 1975년 패망한 월남보다 더 심각하다 해도 침묵.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예고된 전쟁이고 다음 전쟁은 대한민국이라 해도 침묵을 넘어 천하태평인 국민들 '망해봐야 망한줄 알겠는가'라는 호소도 지금의 국민들 귀에는 쇠귀에 경 읽기다. 알면 병이라고 했듯이 지금의 대한민국은 국가 멸망 징조 7가지를 모두 갖췄다. 일찌기 인도의 간디는 나라가 망할 때 나타나는 징조를 이렇게 꼽았다. 첫째-노동 없는 부, 둘째-양심 없는 쾌락, 셋째-인격 없는 지식, 넷째-도덕성 없는 상업, 다섯째-인간성 없는 과학, 여섯째-희생 없는 믿음, 일곱째-원칙 없는 정치다. 인류 사회에서 모든 악덕은 되풀이되는 이 일곱 가지 실수들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을 놓고 제대로 한번 따져보자. ● 노동없는 부 대한민국 은 급속도로 발전한 경제 못지않게 국민들 삶과 교육 또한 큰 발전을 했다. 때문에 먹고 노는 한이 있어도 3D업종 일은 못하겠다는 캥거루 족이 풍년인 나라가 됐다. 대부분 기업의 힘든 일이나 3D업종은 외국인 노동자들 몫이됐다. 일을 해야 할 젊은이들은 일확천금을 거머쥐는 환상에 빠져 영끌, 코인 광풍 등에 허우적 거린다. 땀 흘려 일한 만큼의 부가 아닌 로또형 부를 노리는 8월의 배짱이들이 수두룩 하다. 무엇보다 노동의 표상인 노조들까지도 이권카르텔이 형성될 정도로 강성노조들이 바글거린다. 오죽하면 건폭이 생겨나고 귀족노조들이 생겼겠는가. 대한민국 경제는 노조가 말아 먹는다는 비판 반성 안 하면 나라 망한다. ● 양심 없는 쾌락 이 문제는 이미 사회문제가 된지 오래다. 마약이 바이러스처럼 번지고, 이로인한 사회적 병폐까지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마약 운전, 묻지마 폭행, 묻지마 살인들이 백주대낮에 버젓이 일어나 무고한 국민들을 해친다. 얼마전 우리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태원 할로윈 사고도 이런 사회적 영향 때문일 것이다. ● 인격없는 지식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전교조 교육의 피폐 중 눈에 띄는 것이 우리사회 인격이 사라 졌다는 사실이다. 머리에는 먹물들이 가득 가득 담기긴 했어도 대부분 입시공부. 즉 인격수양은 내팽개친 채 그냥 외우는 주입식 공부만 했으니 어디서 인격을 찾겠는가. 인격은 개가 물고 간지 오래고, 그 인격을 뒷받침하는 도덕과 예의까지 실종된지 오래다. 싸가지 없는 정치, 자신 밖에 모르는 인성, 일등만 살아남는 사회, 왜곡된 역사를 가르키는 전교조 교육, 여기에다 삼강오륜까지 전당포에 저당잡힌 나라가 됐으니 머리에 지식만 채우면 뭐 하는가. 노벨상 수상자가 없는 나라(김대중은 공작에 의한 것).더 이상 말이 필요 없지 않은가. ● 도덕성 없는 상업 한탕주의자들의 활개로 바가지는 때만되면 바이러스처럼 번지기를 수십년. 온갖 불량상품으로 국민의 건강은 알바 없고 돈만 챙기면 된다는 악덕 업자들. 전세사기, 보이스피싱, 부동산 사기 등 도덕성이라곤 벼룩 간보다 못한 금수같은 인간들은 돈만되면 도덕성 같은 것은 엿바꿔 먹은지 오래다. ● 인간성 없는 과학 과학은 매일 매일 눈부신 발전을 한다. 인간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과학이 발전하는 것은 당연히 박수받을 일이다. 하지만 그 과학이 인간을 해치거나 살상을 목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반드시 막아야 할 일이다. 그런데 지금 북한의 김정은은 매일같이 미사일을 쏘아대고 핵으로 위협을 가한다. 문제는 이런 미치광이를 보고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주사파 종북세력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더 큰 문제는 정당들 조차 김정은엔 찍소리 못하면서 반대로 윤석열 정권을 씹어댄다는 것이다. 인간성이라고는 빈대 코딱지 만큼도 없는 인간들이 지금 대한민국 정치권에 수두룩 하다. 아마 북한 김정은이 핵미사일을 쏘면 윤석열 정권 때문이라고 쏘아댈 인간들이 있을 것이다. ● 희생 없는 믿음 희생 없는 종교가 맞을 것이다. 종교인들의 부의 축적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또 한번 필요한 시점이 됐음을 경고하고 있다. 명색이 종교지도자라 하는 사람들이 주사파와 손을 잡고. 종북들과 놀아난다. 일부 신부들이, 목사들이, 스님들이, 심지어 수녀들까지 종북의 수렁에 빠져 있으니 어쩌면 좋겠는가. 나라가 위기에 빠져도, 공산화로 가고 있어도, 정치권과 사법부가 붉게 물들어도 의로운 분노를 표출하는 종교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 겨우 한사람 전광훈 목사 혼자서 목숨건 투쟁을 하는데 나서지 않는 목사들이 뒤에서 비난한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 즉 희생은 하기싫고 그저 기도만 하면 다 되는 논리로 자신의 침묵을 합리화 하는 종교 지도자들. 과연 기도만으로 이런 위기를 막을 수 있을까. 그것은 대한민국의 근대 역사가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과연 대한민국이 공산화 되면 기도하는 종교인들은 괜찮을까. 이 궁금증에 답해보라. ● 원칙없는 정치 지금 대한민국 정치는 원칙이 무너진지 오래됐다. 덩달아 기준도 파열됐고, 심지어 당헌 당규까지 걸레가 되다시피 했다. 원칙 보다는 불법과 조작이 판치는 정치는 이미 국민들 눈에서 멀어졌다. 원칙으로 돌아가라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19대, 20대, 21대 국회가 낙제점을 받고도 조금의 반성도 없다. 이제는 신성한 국회에 주사파를 넘어 간첩이 설쳐될 날도 멀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것의 일차적 책임은 정치인들에게 있다 하겠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꼬라지를 보고도 4년 마다 찍어주고 후회하는 짓을 무지한 국민들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하지 않고 세비만 꼬박 꼬박 타가는 국개들에 화난 국민들이 "특권을 내려 놓아라" "국회의원 숫자를 줄여라"하지만 22대 국회도 이미 결과는 나타났다. 21대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공천 파동이 잘 증명하고 있다. 실종된 원칙은 영원히 여의도 정치권으로 돌아 오지 않을 것이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 국민이여 깨어나라! 국민이여 일어나라! 국민이여 소리쳐라! 갈수록 좌파들은 득세하고 우파들은 지리 멸렬하는구나! 전교조가 젊은 새대들을 다 망쳐 놓았다! 국민들이여! 각성하라!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 우리 모두 애국 합시다! |
*달성공원*
정 문
달성공원
달성공원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 사상 가장이른 시기에 나타난 형식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첨해왕, 15년(261)에 달벌성을 쌓고 나마극종을 성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에 병합된 뒤에는 군사 요지로 중요시되었으며 그 후 고려 공양왕 2년(1390) 토성에 석축을 더했다. 조선조 선조 29년(1596)에 석축을 더하고 경상감영을 이곳에 둔 일이 있다. 서벽은 주로 흙으로 축조되었고 주의 길이는 1,300m 높이는 4m 안팎이다. 면적은 126,576㎡(38,289평) 원래는 토성으로 삼한시대 달 불성이었다. 1596년 상주에서 경상감영이 이전해 왔으며 머지않아 현재 경상감영이 있는 곳으로 옮겨진다. 1905년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1971년 달성공원 동물원이 개장했다. 비산동, 내당동, 원대동, 대신동, 달성동, 고성동 주민들은 줄여서 "달공"으로 부른다. 대구의 옛 지명인 달구벌, 달구하, 달불성 등이 다 여기서 나왔을 정도로 알고 보면 대구광역시의 뿌리이자 본류라 할 수 있는 곳이다.
동물원
호랑이를 비롯 25종 90마리의 포유류, 비단잉어 등 2종 940마리의 어류, 타조 등 59종 435마리의 조류가 있는 동물원이기도 하다. 달성공원 동물원은 대구 유일의 동물원이다.
최재우동상
동학의 창시자
성곽산책로
관풍루
즐거운 점심식사
해설사
허위 순국비
허위는 이상용보다 앞선 시대의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885 을미의병, 1907년 정미의병 등에 창의한 의병대장
1908년 10월 21일 순국했다.
달성 서씨 유허비
달성 서씨 유허비가 달성공원에 세워진 것은 달성 일때가 본래 서씨문중 땅이였기 때문이다.
이상용 구국비
이상용은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로 1932년에 순국했다.
石齋(석재) 徐丙五(서병오) 藝術碑(예술비) 전경
서침나무
세종때 조정에서 서씨세거지인 이곳이 필요하니 정부에 헌납하면 그 대신 다른 곳의 넓은 땅과 큰 벼설을 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오자 서침선생은 "그런것은 원하지 않는다" 대신, 이지역 사람들의 '환곡을 좀 감해달라'고 하여 성사시켰다. 이 나무에 '시침나무' 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훌륭한 선비를 기리고자 하는 대구시민 들의 마음의 발로 이다.
한국 최초 어린이 헌장비
한국 최초의 문학비 민족시인 이상화(나의 침실로) 시비
죽농 서동균 예술비
(사군자의 대가)
나다운 삶을 위한 치유 글쓰기 반
비원 자서전 교실 반원들의 유일한 야외 수업 날이다. 방종현 선생님, 김윤숙 선생님, 허은진 팀장님, 강명조 반장, 이돈구 반원, 정정화 반원, 손선상 반원, 이달우 반원, 이소선 반원, 이두례 반원, 이정수 반원, 조왕연 반원
달성공원에 10시 모여서….해설사의 안내로 한 바퀴 돌면서 유적의 유래와 뜻을 새기는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우한폐렴(코로너-19)* 코로나19(COVID-19)는 2019년 말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처음 보고된 이후 전 세계로 확산한 호흡기 감염병입니다. 이 질병은 SARS-CoV-2라는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하며, 주로 호흡기 비말을 통해 전파됩니다. 코로나19는 가벼운 증상에서부터 중증 폐렴, 급성 호흡곤란 증후군(ARDS), 다발성 장기부전, 사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증상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주요 증상 발열, 기침, 호흡곤란, 피로, 근육통, 미각 또는 후각 상실, 인후통 ☆ ☆ ☆ ☆ ☆ 2020年 2 月 20日경에 몸컨디션이 많이 다운되어 있었습니다. 26일에 동네 식당에서 친구들과 친목회 모임을 하고 집에 왔는데 몹시 피곤하더라고요. 감기, 몸살인가 하고 집에서 며칠 쉬었죠. 매스컴에서는 연일 전국별 확진자 발생 수가 발표되고 위험, 경고 사항이 방송되고 있었습니다. 열나고 목 아프고 기침은 없지만, 온몸이 아프기 시작하고 피곤하며 식사를 할 수업도록(미각이 점점 떨어짐) 입맛이 없었습니다. 3월 2일에 서구보건소에 부부가 검사신청을 하니 3일 오후 2시에 예약이 되어서 대기 하고 검사를 받았습니다. 5일 12시에 부부 다 확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기관에서는 비상식량과 의약품을 지원하면서 격리 조치를 하였습니다. 6일에 저는 영주시에 있는 병원, 아내는 경대병원에 가라는 통보가 왔길래 같이 보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몇 차례 각각 가는 통보가 있었지만, 거절했죠. 밥은 도저히 안 넘어가서 식빵 토스터와 오렌지 3개로 하루를 버텼습니다! 9일에 대구의료원에 부부가 호송되어서 나는 6층 아내는 7층에 입원 했습니다. 중증 환자 중에 사망자도 속출했습니다. 아내는 한 달, 나는 한 달 반을 갇혀 살면서 집중 치료를 받았죠! 초창기인 그때는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대단했죠! 다중이용시설이 전면 통제되고 각종 모임과 행사가 중단됐습니다. 계속되는 검사로 힘이 들었습니다. 음성 두 번 받기가 그렇게도 힘들었습니다. 4월 23일에 연이은 두 번째 음성판정을 받고 24일 집에 돌아오니…. 딴 세상을 만난 듯 감회가 무량했습니다. 아내와 얼싸안고 울었습니다 주위에서는 완치자라도 옆에 얼씬도 안 했습니다! 몇 달간은 외출도 삼가고 두문불출했죠. 대구의료원 |
*펜데믹이 지나간 휴유증* 완치 후 귀가하고 며칠 후 경대병원에서 항체 연구 참여자를 모집하는데 응하겠느냐기에 부부가 참여했죠. 백신 맞기 전후해서 혈액검사로 항체형성 과정을 상세히 체크하더라고요. 10여 차례(4차 백신접종) 1년여를 추적 검사해서 데이터를 종합하고…. 연구를 완성했습니다. 보통 백신 접종 횟수가 늘어날수록 항체가 많아졌습니다. 생애 가장 혹독하게 경험한 전염병이었습니다. ☆☆☆☆ 코로나-19 발발의 원인은 미스터리일 수 있지만, 바이러스는 사회가 만들어놓은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는 점에서 감염병의 확산은 인간 행위와 사회경제적 산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감염병 전문가 스노든(Frank M. Snow den) 교수는 ‘감염병은 인간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강조한다. ‘대전환’의 수식어가 따라붙을 만큼 단기간의 팬데믹에 도달한 코로나19는 감염 발생 이전과 이후의 세계를 확연하게 구분하였고, 질병의 문제를 넘어 사회경제·정치·문화·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백신의 보급으로 우리는 이제 겨우 터널의 맞은편에서 희미한 불빛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지만,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와 민주적 자유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방역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지만, 전시 상태와 비교해도 무색하지 않을 만큼 인류는 이미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렀다. 감염에 대한 트라우마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생채기를 내고 있어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백신은 화학적 결합물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더 어려워 보인다. 사회가 온전하게 작동하지 않을 때 정치의 역할과 기능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동체의 치유 능력이 복원되기 전까지 국가의 능동적 대처는 더 필요하고 시급하다. 코로나19 이전의 세계와 이후의 세계가 같을지는 회의적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주제에 비견될 만큼 혼란스러운 질문은 코로나19 이후의 우리 존재 방식이다. 팬데믹 이후 우리는 과거의 우리일까? 아니면 완전히 다른 우리일까? 혹은 우리는 달라진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까? |
*가장 힘들었던 일*
2020년 2월 20일경부터 피곤하고 밥맛이 없어서….
25일부터는 식빵과 오렌지 한 개씩으로 식사를 대신하고 있었는데 매스컴에서는 연일 우한 폐렴 얘기로 떠들썩했습니다.
딸이 코로나 검사 받아 보라고 성화를 부려서 서구보건소에 신청을 했습니다.
3월3일 오후에 검사를 받고 대기 중 2020년 3월 5일 부부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비상식량과 의약품을 지원 받아 생활 중 3월 9일에 대구의료원에 부부가 입원하였다.
아내는 한 달!
나는 45일 동안 입원 했었다.
몸은 괜찮은데 마음이 무척 힘 들었었다.
*나의 행복했던 시절* 나의 행복했던 시절을 꼽자면 아내와 결혼한 신혼초(6개월), 내집 마련해서 입주했을때 70세 이후~현재 이다. 신혼초에는 누구나 좋을 때고, 난 결혼 한지 얼마 안돼어서 동업 결별, 이직, 업장 변경, 이사등으로 바쁜 격변기를 보내고 있을때이다. 그후 20연이 지나고 내집 마련했을 때가 참 행복 했었다. 그리고 70세 이후는 행복한 노후생활이 너무 즐겁다! |
*나의 버킷리스트* [가장 하고 싶은 일] 2026년 1월 29일이 우리 부부 금혼식이다! 그떄 세계 일주를 꼭 해보고 싶다. 내 나이 76세, 아내 75세 니까 가능하다고 본다. 기대가 크다! [가지고 싶은 물건] 건강한 행복 [내가 가장 아끼는 것] 내 아내 심외자 딸 조성희 사위 조영득 손녀 조희영 아들 조성옥 며느리 박지영 손자 조대희 손자 조장희 손자 조정희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보물들이다. [지금까지 수고한 나에게 보내는 편지] 너무 이기적이지는 않았는지? 남을 조금은 배려하면서 살아왔는지? 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하였는지? 지금까지 큰 과오 없이 인생을 살아왔는지?. 대체로 그런 모양새인 것같다. 조왕연 참 수고가 많았다. 애썼다. [앞으로 나에게 보내는 편지] 조왕연! 아직 살아갈 날이 얼마일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서 가족을 사랑하고 자손들에게 든든한 언덕이 되어라 동반자와 함께 건강한 신체로 사는 날까지 행복한 노년을 보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