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존재에게 불안과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폭력은 물리적 힘으로 상대방을 가해자의 자아에 예속시키는 행위라고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폭력 또한 다양한 진화의 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개인과 집단을 둘러싼 폭력의 현실을 현상학적으로 관찰해 보면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성장하는 개인사에도 명료하게 드러난다. 특수한 사실이 아니라 보편적인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나 자신을 통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적(敵)의 발생은 이러한 폭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조부모가 키운 내가 경주의 부모님에게 양도된 것은 강원도 횡성의 두메산골에 있던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부잣집 머슴살이 집은 방 한 칸이 다였다. 후에 독립한 부모님은 남의 셋방살이로 들어가 몸으로 할 수 있는 날품팔이나 공장에서 노동으로 가족 생계를 유지했다. 새벽 잠결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이웃에게 쌀을 빌려오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일 년에 한 번씩은 더 싼 셋방으로 리어카를 몰고 다녔다. 두 분 다 새벽에 일찍 일하러 나가면, 상보로 덮여진 밥상 위에 모인 파리들을 물리치고 밥을 먹었다. 저녁에는 고주망태인 아버지를 둘러매러 골목으로 향했다. 술이 다소 깨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언쟁이 주먹으로 넘어갔다. 어머니의 머리채가 벽에 부딪히고 피가 흘렀다. 말리는 우리 형제들은 사력을 다했지만, 오히려 그 폭력이 전가될 뿐이었다. 저녁 밥상은 이미 마당으로 던져진 상태였다. 그것은 일상이었다.
훗날 아버지는 군인 시절에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점령한 청와대의 뒷문에서 보초를 섰다고 한다. 그리고 말하셨다. “내가 그 때 줄을 잘 섰으면 한몫 잡았을 것”이라고 했다. 혁명군의 한 명이었다. 그때는 명령에 따른 일이었기 때문에 면죄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군인에게 쩔쩔매던 시민들 앞에 군림하던 무용담도 곧잘 나왔다. 군대에 대한 회상에는 맨몸으로 사회를 나왔을 때,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는 한탄이 묻어 있었다. 개발독재시기 폭력은 그렇게 가정으로, 학교로, 회사로 흘러들어갔던 것이다. 내가 태어난 것은 1965년이었으니까 폭력이 재생산 되던 전두환 정권 때까지, 아니 현재도 하나의 관습법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반장이었던 나는 아침 조회 때 화난 담임선생님이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나갔다. 주먹이 날아왔다. 그리고 팔다리를 다써가며 권투를 하듯 두들겨 팼다. 70여 명의 동급생이 보는 앞에서 한 10분 정도는 맞은 것 같다. 그리고 분이 다 안 풀렸는지 교무실로 돌아가면서 따라오라고 한다. 교무실에서 무릎을 꿇고 사태의 원인을 들었다. “너는 장물아비다.” 나는 총무가 자기가 쓰던 자전거를 싼 값에 사라고 해서 용돈을 모아 샀다. 그것은 훔친 것이었다. 상습범이었다. 그는 소년원에서 일 년을, 나는 독립 운동가이셨던 교장선생님의 도움으로 구속이 되지는 않았다. 경주경찰서를 들락날락하면서 여기는 올 곳이 못되는 곳임을 알았다. 세월이 흘러 경주의 한 골목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혹시나 ‘그때 왜 나를 그렇게 때리셨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선생님의 모습이 초라해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흰 장갑을 끼고 수업을 하시던 수학 선생님이 계셨다. 졸업 무렵, 동기생 몇 명은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경주박물관 앞의 선생님 사택을 찾았다. 선생님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그리고 전공(戰功)으로 죽인 베트콩의 머리를 잘라 들고 다녔다. 살아 있는 포로를 전차로 밀어 죽인 일 등. 자신은 그 피 묻은 손을 어린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싫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쳤다. 그로 인해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았다. 물론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주먹을 휘두른 적은 없었다. 다만 선생님에게 한 번 맞으면 수십 미터는 날아간다는 소문이 무성할 뿐이었다. 훗날 나는 왜 그 선생님을 보면 냉랭한 살기가 느껴졌는지를 이해했다. 학교 또한 총과 대포만 없는 전쟁터였던 것이다.
진짜 총칼이 난무하는 전쟁터를 맛본 것은 역시 군대였다. 나는 대학 입학 후 휴학 상태에서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라는 인제·원통이 있는 12사단에 배속되었다. 훼바라는 비무장지대 바로 아래 연대에서 근무하다가 철책으로 이동했다. 비바람 치던 스산한 밤, 초소마다 고참들이 험한 말로 위협하는 소리를 들으며 막사에 배치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지옥을 맛보았다. 매일 일어나는 구타로 감옥과 다름이 없었다. 저녁에 철책에 투입되기 전에 소대장의 묵인 하에 반드시 화장실 뒤에 가서 M16 개머리판으로 가슴을 두들겨 맞았다. 위의 계급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때렸다. 한 번은 고참의 뒤에 소총을 자동으로 겨누고 갈기고자 했다. 그러나 철책 모퉁이로 돌아가는 바람에 표적을 놓쳤다. 3초만 늦었더라면 수류탄으로 자폭한 내 영혼은 철책 위로 떠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제대 무렵, 동기들이 한 부대에 모였다. 재교육하고 사회로 나간다. 논산훈련소에 같이 훈련 받았던 동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옆 사단에 배속되었다. 훈련소 침상 맞은편에 있던 동기다. 운도 빽도 없어 철책까지 같이 왔다. 폭력에서 시작해 폭력으로 끝난 논산훈련소. 그는 수색대에 들어가 지뢰를 밟고 죽었다. 그의 시신은 나뭇잎에 몇 점 붙고 날아가 버렸다. 돼지고기를 사서 화장을 했다고 한다. 그날부터 일주일 동안 동기들과 소주로 날을 세웠다. 불면의 밤들을 보내고 사회로 나오며, 군대는 지상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정당한 존재의 허무함, 국가는 개인에게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생명이 물건으로 취급받으며, 폭력으로 유지되는 국가는 도대체 왜 존재하는가.
복학을 했다. 노동운동이 한참이던 80년대 후반이었다. 경찰과 대학생들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다. 6월쯤 과대표가 불법으로 교내에 들어온 경찰이 던진 돌에 맞아 두개골이 함몰되었다. 학과 학생회 전원이 서장의 사과를 받으러 익산 경찰서에 가서 항의하기로 했다. 경찰서 정문에서 들어 눕기도 했다. 그때마다 소위 닭장차에 실려 시내 외곽에 던져졌다. 전교생이 사회단체들과 연대했다. 나도 참가했다. 하루 종일 대치하다가 화염병이 날아가던 저녁 무렵 전투경찰에 잡혔다. 경찰서의 내무반으로 먼저 끌려갔다. 나무봉이 부러질 정도로 두들겨 맞고, 군화발로 차이고 짓밟혔다. 온몸이 부서진 것 같았다. 나는 전방에 있을 때 가졌던 수류탄이 있으면 경찰서를 폭발시키고 싶었다. 유치장에 며칠 갇혀 있다가 석방되었다. 가을 찬바람이 불자 시나부로 눕기 시작했다. 집중적으로 얻어맞은 머리가 혼돈 상태가 되기 시작했다. 휴학을 했다. 일 년 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몸의 고통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자살을 결심했다. 그러나 용기가 없어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몸을 고치는 데에 30년이 걸렸다. 지금도 그 후유증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사회를 병영국가라고 한다. 그것은 병든 상태를 말한다. 시민의 건강을 무너뜨리는 병든 사회다. 분단 이후 이 사회는 거대한 정신병동이 되었다. 전쟁이라는 지옥을 경험한 백성들은 한반도라는 병동에서 서로를 할퀴고 물어뜯었다. 그 대상은 일차적으로 어린이·여성·학생들 같은 약자다. 폭력과 평화는 풀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것일까.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발하는 사마라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한 도시의 시민이 집단적 실명에 걸려 붕괴되어가는 사회를 그린 소설이다. 가둬진 병동에서 일어나는 폭력, 뛰쳐나온 자들을 죽이는 국가의 폭력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존재의 한계를 보여준다. 불안한 심리는 폭력으로 둔갑한다. 보다 근원적 불안이라면 종교와 철학적인 인문사회를 지향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과 국가가 한 몸이 된 이 사회는 먼저 신체에 대한 폭력을 자행한다. 그리고 심리적 자기방어의 철책을 두르게 한다. 사르트르의 명제를 빌린다면, ‘폭력은 본질에 앞선다’고 할 수 있다. 적은 폭력으로 잉태된다. 자기보호본능을 역이용함으로써 평온을 갈구하는 자아를 먼저 분열시키고, 세계마저 분열시킨다. 프랑스의 인류학자이자 철학자인 르네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희생제의는 신의 은총을 받기 위한 것이기 보다 집단 내부의 갈등과 폭력을 없애기 위한 장치로 본다. 이 땅의 어버이들, 여성, 청년, 학생들은 희생 공물 즉, 공희(供犧)에 다름이 아니다. 거대한 폭력이 한 순간 폭발하지 않도록 내부의 무수한 작은 폭력으로 그 에너지를 분출시킴으로써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다. 자본과 국가의 폭력성을 은폐시키기 위한 눈먼 자들끼리의 폭력이다. 맹목적인 교육과 권력의 주구가 된 언론은 사람들을 더욱 눈멀게 한다. 일치와 화합을 위한 종교마저도 성스러움을 가장하여 자신의 폭력성을 은폐하며, 그 씨앗을 곳곳에 뿌려댄다. 여러 성자들이 비폭력과 불살생을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쓴 교의의 제일 핵심으로 삼았던 이유가 이제야 이해된다.
(원문: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25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