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길이 뚫렸고 신축 건물이 솟았다.
바로 '대한민국'의 모습이었다.
이 지구 상에서 한국인과 비슷한 DNA를 갖고 있는 민족이나 국가를 찾기는 어려웠다.
거의 유일무이한, 매우 독특한 국가였다.
길이 뚫리고 큰 건물이 생길 때마다 우리의 삶은 조금씩 편리해 졌다.
하지만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킨 건물과 도로 때문에 '내비'가 없으면 운전이 힘들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내비'에 의존하다보니 사람들은 점점 더 길을 모르게 됐다.
세상은 좋아졌지만 방향, 지리, 숫자, 전화번호, 주소 등을 기억하는 뇌 기능은 점점 퇴보했다.
역설이었다.
작금은 첨단 '디지털 시대'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최신 앱들과 제품들.
사람들의 삶은 매우 편리해 졌고 이 기기들로 인해 의사소통도 더욱 빈번해 졌다.
그런데 첨단 디지털 시대에 사람들은 점점 더 고독해졌고 우울증 환자들은 급증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이 편리해진 것은 맞지만 매우 복잡해 졌고 두통이 심해졌으며 마음의 평화가 사라졌다.
복잡하고 다양한 기능들을 익숙하게 쓰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첨단 때문에 오히려 머리가 아팠다.
아파트 현관문, 사무실 출입문, 컴퓨터, 휴대폰, 통장과 각종 인증서, 수 많은 홈페이지, 게시판, 각종 앱의 비번 등등 수많은
'패스워드'를 암기하는 것도 이젠 버거워졌다.
그것만을 따로 적어두고 관리를 해야할 판이다.
심각한 '패러독스'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
이젠 그 광속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았다.
청소년들은 그 속도를 즐길지도 모르지만 '불혹'만 지나도 따라잡기가 힘겹다.
하물며 '지천명' 이후의 세대들에겐 두말해 무었하겠는가.
남녀노소에 관계 없이 격랑에 편승하여 치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나이가 젊어도 급격한 조류에 밀려 떠내려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마디로 핑핑 도는 세상이다.
그래서 '디지털 디바이드', '디지털 푸어'라는 말도 생겼다.
이래저래 마냥 편안한 마음으로 한가롭게 먼 산만 바라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한번 휩쓸려 떠밀리면 다시 복귀하기 힘든 세상이었다.
이런 격변기에 누군가가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이는 자신의 노하우를 활용해 책을 내고 강의를 하며 돈을 벌었다.
각종 학원도 넘쳐났다.
변화와 흐름을 일찍 꿰차고 준비한 사람들이었다.
박수를 보낼 만했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디지털 시대의 '길라잡이'가 되어준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는가.
처음부터 디지털 웨이브에 관심이 많았던 어린 학생이 있었다.
바로 내 아들이었다.
한솔이가 중학생이 되면서 우리는 이런 시대적 변화와 흐름에 관한 대화를 자주 나눴었다.
"나눔과 섬김의 정신으로 네가 잘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조건없이 사람들을 돕는다면 그게 바로 가장 고귀한 사랑의 실천이다"
이런 얘기를 여러번 전해 주었다.
아들도 "그런 역할을 한번 시도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세상과 본격적으로 소통하기 시작했다.
남들이 가려워했던 분야, 애타게 찾고 있던 정보, 매우 답답했던 문제들에 대한 솔루션을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의 게시판에 하나씩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 1-2년간은 하루에 몇 십 명, 몇 백 명이 들어와서 아들이 정리해 둔 각종 정보들을 보고 갔다.
어떤 이는 "고맙다"는 댓글을 남겨두기도 했고, 어떤 이는 말없이 살펴보기만 했으며 또 다른 이는 통째로 자료를 퍼갔다.
3년차 쯤 되었을 땐 하루에 1,500 - 2,000명 정도가 들어와서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고 갔다.
엄청난 숫자였다.
수확체증의 법칙이었다.
친구들이 대입시에 몰두하느라 밥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공부에 매진할 때, 아들은 모르는 사람들의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한 자료를 준비해서 올리느라 때로는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기도 했었다.
고3 수험생, 그 금족같은 시간에 모르는 이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렇게 헌신하는 아들을 보면서 나는 매번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러면서 따뜻하게 격려했다.
아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런 삶이 '손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나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했다.
"인생의 호흡을 길게 갖고 멀리 보며 가자"
점수도, 대학도, 취업도, 남들보다 더 특출난 스펙도 중요하지만 자신만의 분명한 소신과 철학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용기있게
걸어갈 수 있는 뚝심과 비전이 더 소중하다고 일렀다.
사내의 인생은 그래야 한다며 격려도 했고 심심한 위로도 건넸다.
진심이었다.
전국의 모든 수험생들과 학부모들이 목숨을 걸었던 수능도 끝났고 드디어 뚜껑이 열렸다.
아들은 in 서울도 못했고 명문대에도 진학하지 못했다.
'부산 해양대'에 가기로 했다.
남들이 보면 초라할지 몰라도 나는 진심으로 기뻤고 뜨거운 축하를 보내주었다.
한솔이가 고교생활 3년 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그의 삶의 모습 그리고 남들과 달랐던 풍성한 컨텐츠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빠이자 인생의 선배로서 아들에게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진정으로 아들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2012년 2월 17일.
드디어 한솔이의 블로그를 방문했던 사람들이 누적으로 1,000,000명을 돌파했다.
백만 명이 큰 의미일 수도 있고 별것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아들 옆에서 20년을 지켜보며 기도했던 애비로서 오늘처럼 기쁜 날은 별로 없었다.
한국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솔이가 자기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가며 '디지털 길라잡이' 역할을 했다는 것이 정말로 대견했고 자랑스러웠다.
뭔가가 갈급했던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했고, 그들에게 흔쾌하게 도움을 주었던 아들의 삶이 향기롭다고 생각했다.
SKY에 입학한 것보다 내겐 더 크고, 더 멋졌으며 더 아름다운 발자국이었다.
자랑스럽기 그지 없었다.
아들은 이제 곧 부산으로 떠난다.
며칠 전엔 '산본 로데오거리'에서, 어제는 '신림동 순대타운'에서 우리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리고 네 명이 막걸리로 힘차게 건배했다.
나는 가족들에게 잔소리를 거의 안 하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가끔씩 당부를 전하긴 했었다.
'순대타운'에서도 2가지를 당부했었다.
첫째는, 죽는 날까지 '정직'하게 살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인생길을 가다가 두 갈래 길을 만나면 반듯하고 넓은 길이 아니라 후미지고 구불부불한 길을 과감하게 선택하고,
그 길에서 너희들만의 가치관과 배려의 정신으로 야무지게 삶을 엮어가라는 내용이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목적은 자아살현, 사업보국, 입신양명, 출세와 명예 등등 다양할 수 있지만 결국은 '행복'일 터였다.
그런데 이 '행복의 파랑새'는 움켜쥐는 순간 질식해서 죽는 법이다.
네가 앞으로 어떤 길을 가든지 늘 열린 마음으로 살며 정직하게 승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게 바로 남자의 삶이 아니던가.
행복은 나를 지속적으로 비우고 낮출 때 비로소 찾아온다는 것을 늘 가슴판에 새긴 채 항상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다.
스펙에 목숨을 걸지는 말자.
그대신 사람을 이해하고 도우며 사랑하는 길에 진력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3월부터 시작되는 너의 캠퍼스 생활.
아빠도 30여 년 전에 청운을 품고 대학문을 들어서던 때가 생각난다.
그 흥분과 떨림이 아직도 내 가슴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아들의 멋진 대학생활을 기대하며 너의 앞날을 축복한다.
힘내라.
그리고 힘차게 비상하렴.
100만 명을 넘어선 기념비적인 날에 너에게 격려와 감사를 전하는 마음으로 글 한 편 썼다.
사랑한다.
MY SON.
2012년 2월 17일.
열정과 헌신으로
속이 꽉 찬 예비 대학생을 생각하며 심야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