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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비(白碑)민간인학살지 순천 동천 추모행사(冤魂碑설치)
주최: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사회적공론회미디어 투쟁단
후원단체:광주전남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광주여성회.(사)우리민족).통일WHO.(사)사단법인우리민족.광주시민단체협의회.전국농민회총연맹 순천시농민회.전국농민회보성군농민회.광주전남추모연대.21C광주전남대학생연합.광주교육희망네트워크.광주진보연대.전남진보연대.국민주권개헌행동.
순천교(별칭: 장대다리)와 동천 제방은 봉기군과 경찰 사이에 최초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1948년 10월 20일 순천 경찰과 인근 지역에서 지원 나온 경찰, 우익 청년단원 수백 명이 봉기군을 저지하기 위해 광양 삼거리와 동천 제방에 방어선을 구축하고서 공방전을 벌였으나, 봉기군에 격퇴 당하였다. 더욱이 광주에서 진압하러 내려온 4연대 지원 병력이 봉기군에 합류해 버림으로써 더욱 수세에 밀렸다. 결국 경찰의 상당수가 전투 중에 사망 또는 부상당하거나, 일부는 피신함으로써 순천읍내를 봉기군이 장악하였다. 이곳은 봉기군과 경찰 사이에 최초로 본격적인 접전장소이자 봉기군이 순천을 점령하기 위한 교두보였다.
장대교의 강물은 그날의비극을 아는지 무심하게 흘러가고있다.
冤魂碑
박성훈교수의 추모의노래
여순 10.19사건 관련 답사지 순천 외곽지역 답주암면 오산리 오산마을 당산나무순천시 오산마을은 ‘주암면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익세력이 강한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암면 인민위원장과 전남유격대 부사령관을 역임한 김용길의 처가 동네였으며 그는 한때 이곳에 살았다. 그는 이곳을 중심으로 동조세력을 모으고 이른바 ‘오산회의’를 주재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눈치 챈 주암면 지서주임 황영환(별명 황몽뎅이)은 김용길과 친분이 있는 이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마을앞 당산나무 앞에서 10여 명을 집단 학살하였다. 오산마을은 시도때도 없이 들이닥친 진압군경들의 식사를 제공하느라 주민들의 고초가 매우 심했으며 주암면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지역이다
월등 양지멧골
농곡마을 앞산은 황전과 월등 두 면의 청소년을 위한 배움터 월전중학교가 자리한 곳이다. 중학교의 오른쪽에는 깊지 않은 완만한 능선이 있는 골짜기가 있는데 여순사건 진압 과정에서 집단학살이 이뤄졌다. 두 면의 주민들이 앞뒤로 희생되어야 했다.
12연대 진압군들이 좌익 협력자를 색출한다고 한다고 들어와 당시 지서에 있던 신월리와 계월리 주민 등 40여명을 1948년 11월 26일[10.26.음] 이곳 양지멧골로 끌려와 집단 학살 당했다. 당시 주민들은 다른 마을 주민처럼 조사받고 바로 풀려 나올 것으로 생각했었다고 한다. 희생자:김복종(유족 김효수. 아들) 권성옥(유족 권종국.아들)
상검마을 뒷산의 빨치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노획한 문서에 이름이 나왔다고 하여 황전면민 50여명이 1949년 8월 4일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희생자:고재옥(유족 고화석.아들), 최경식(유족 동생 최용식)
학구
순천시 서면의 학구는 구례-남원과 승주-주암-광주, 순천-광양으로 통하는 순천 북부의 주요 관문이었으므로 여순사건의 참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10월 21일 봉기군의 지휘부는 병력을 세 개의 부대로 재편하여 한 부대는 광양 방면(동), 다른 한 부대는 벌교 방면(서), 그리고 나머지 부대는 학구 방면(북)으로 진격시켰다. 봉기군의 원래 목적은 구례와 남원을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울러 동쪽으로는 광양의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서쪽으로는 보성 화순을 거쳐 광주로, 학구 방면 병력은 정세를 보아가며 구례-남원-전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21일 밤 11시 30분경 학구 방면으로 진출하던 약 1천명의 봉기군은 학구에서 제4연대 1개 대대와 마주쳤다. 4연대 진압군은 3연대와 12연대의 병력과 합세하여 봉기군의 북상을 저지하였다. 증강된 진압군의 화력이 봉기군을 압도함으로써 봉기군 일부는 투항하거나 일부는 순천과 광양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봉기군은 학구전투에서 처음으로 패배함에 따라 기세가 크게 꺾였으며 이때부터 전세가 역전되어 봉기군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학구 전투는 진압군과 봉기군의 상황 반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서면 판교리의 노은 고지, 기동마을 보아구지
판교리는 서면에서 가장 큰 골짜기인 청소골 안에 분지처럼 되어 있는 마을이다. 1948년 10월 21일에 서면 학구에서 진압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봉기군들이 청소골을 통하여 백운산으로 들어가면서 마을 청년들 중 일부를 짐꾼으로 동원하여 빼앗은 식량들을 짊어지게 하였다. 사건이 진압된 초기에는 백골 부대(12연대로 추정)가 마을과 가까운 노은 고지(현 일성 레미콘 회사의 위 자리)에 주둔하였다. 그런데 당시 서면지서주임 안경덕에게 밉보인 마을 주민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뤘어야 했고, 특히 입산자 가족들을 중심으로 피해가 컸다.
□ 노은 고지
노은재는 월치재라고도 부르는데 판교리, 청소골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백골부대가 주둔하였다. 1949년 11월 20일[음]에 부대 주둔지와 가까운 골짜기에 서면 각 마을 구장들과 전 서면면장, 면직원, 철도청직원 등 11명을 집단 학살한 다음 소나무를 심어 위장을 했다. 그 부대원의 제보로 시신을 찾았다. 당시 시신을 묻었던 사람이 한청 소속 청년들이었던 것으로 보아 가해자는 경찰로 추정된다. 희생자:정기영(전 서면 면장, 유족 정재종.아들) 희생자:박병구(유족 박영규.아들)
□ 기동마을 보아구지
기동마을로 들어가는 보입구를 말하는데 좌익 활동을 하다가 입산한 송광섭(호적명 송정섭), 박성규, 이기택의 세 가족들이 잔인하게 희생된 곳이다. 송광섭(30초반)의 가족은 조부모와 어머니에게 직접 구덩이를 파게 한 후 총살하였고, 박성규씨(28)의 가족들은 아들이 입산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동생(박봉규) 부자를 맞뺨치기를 하게 한 후에 총살하고 어머니도 총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입산 후 행불된 이기택(25)의 가족도 부모, 3살 먹은 동생 등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참사가 백골부대에 의해 행해졌다. 희생자:송정섭(유족 송기충. 아들)
구랑실재(순천시 서면 흥대리)
구랑실은 평범한 산골마을이었으나 이른바 부역자를 가려내어 처벌하는 과정에서 진압 군경에 의해 무고한 민간인들이 참혹한 비극을 겪은 곳이다. 당시 진압군들은 봉기군으로 가장하여 마을 주민을 시험한 후 봉기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살상하고서 그 희생자들을 전과로 보고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순천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던 보도연맹원들을 집단적으로 처형한 곳이기도 하다. 구랑실 골짜기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곳이어서 시신이 쌓인 골짜기라는 의미로 ‘송장골’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구랑실 학살지는 여순사건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비극의 현장이다.
주령골(광양시 덕례리 산 382-1, 순천-광양 경계지)
주령골은 흔히 덕례리 골짜기, 반송정, 반상쟁이 등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은 경찰측이 1948년 11월 광양읍에서 좌익세력으로 지목되어 체포된 7~8명을 불법적으로 즉결처분한 곳이며, 여순사건 기록사진에 나와 있는 광양 출신의 서울대생 김영배도 이곳에서 희생되었다. 또한 1951년 1월 백운산의 빨치산들이 야음을 틈타 광양 읍내를 습격한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빌미삼아 경찰측은 부역 혐의로 유치장에 갇혀있던 민간인 약 100명을 이곳으로 끌고와서 총살하였다. 주령골은 6·25전쟁 전후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어간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순천농림중학교 (현 순천대학교)
순천농림중학교(현 순천대학교)는 1948년 10월 22일 진압군경이 순천 읍내를 공격하면서 숙영지로 이용하였으며, 경찰사령부 임시본부가 설치된 곳이다. 순천이 진압된 후 가까이 있는 순천 북교에 집결한 읍민 가운데 ‘부역’ 혐의자로 지목된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취조하거나 처형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처형된 경우가 많아 무고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였는데, 당시 강당 뒤편의 논두렁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한다.
여순 사건 관련 순천 시내지역 답사
■ 낙안면 신전마을
신전마을은 여순사건 이후 민간인들이 집단적으로 처참하게 희생된 곳이다. 1949년 음력 8월 16일 밤, 진압군이 들이닥쳐 마을 사람 중에 국군에 입대한 사람이 있는가를 물은 뒤 없다고 하자 ‘빨갱이 마을’이라며 32가구를 불태웠다. 뿐만 아니라 진압군들은 이른바 부역자로 구분된 사람들을 모두 한 집에 몰아넣은 후 집 밖에서 총을 난사하고 집을 불태워버렸다. 당시 희생자는 어린이로부터 노인 및 병환 중인 환자까지 모두 22명이었는데 4세 이하의 어린이가 3명이나 되었다. 진압 군인들이 학살을 자행한 이유는 빨치산과의 교전에서 패배한 분풀이와 빨치산의 연락책이었다는 한 소년(당시14세)을 치료해주고 먹여주었다는 것이었다. 여순사건을 전후하여 곳곳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이루어졌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 순천역
순천역은 여수의 봉기군이 인근 지역으로 진출한 첫번째 지역이었다. 통근 열차와 차량에 나누어 탄 1천여 명의 봉기군은 1948년 10월 20일 09시 30분경 순천역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순천에 파견 나와 있던 홍순석 중위가 지휘하는 중대 병력의 합류로 더욱 사기가 올라 광양 삼거리와 동천 제방에 배치된 경찰을 잇달아 물리치고서 시내로 진격하였다. 따라서 순천역은 여순사건 봉기군의 확산과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이며 순천읍 공격의 중요 거점이었다. 현재의 역 건물은 1960년에 세워진 것이므로 여순사건 당시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장소는 그대로이다.
■ 동천과 제방
순천교(별칭: 장대다리)와 동천 제방은 봉기군과 경찰 사이에 최초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1948년 10월 20일 순천 경찰과 인근 지역에서 지원 나온 경찰, 우익 청년단원 수백 명이 봉기군을 저지하기 위해 광양 삼거리와 동천 제방에 방어선을 구축하고서 공방전을 벌였으나, 봉기군에 격퇴 당하였다. 더욱이 광주에서 진압하러 내려온 4연대 지원 병력이 봉기군에 합류해 버림으로써 더욱 수세에 밀렸다. 결국 경찰의 상당수가 전투 중에 사망 또는 부상당하거나, 일부는 피신함으로써 순천읍내를 봉기군이 장악하였다. 이곳은 봉기군과 경찰 사이에 최초로 본격적인 접전장소이자 봉기군이 순천을 점령하기 위한 교두보였다.
■ 순천경찰서
순천읍과 승주군 일원을 관할하던 순천경찰서는 여순사건으로 가혹한 시련을 겪었다. 당시의 경찰서는 현재의 시티관광호텔 자리이다.
1948년 10월 20일 오후 3시경 경찰서 건물을 접수한 봉기군은 이곳을 본부로 정하고, 옥상에 인공기를 게양하였다. 봉기군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있던 2백여 명의 구금자를 석방하였다. 봉기군은 곧바로 각 기관을 차례로 접수하고, 경찰과 우익 세력의 검거에 나섰다. 미처 피하지 못한 경찰들은 체포되는 대로 학살당했는데 70여 명의 경찰관들이 순천경찰서 앞마당에서 집단적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지리에 어둡고 연고자 없는 다른 지역 경찰서에서 지원나온 경찰의 피해가 더욱 컸었다. 희생자 중에는 양계원 순천경찰서장과 이정렬 광복청년단 단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경찰서 인근의 여관 에 숨어 있다가 봉기군에게 체포되었는데,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후 잔혹하게 총살되었다. 이 밖에도 애양원을 운영하던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희생된 곳이기도 하다.
■ 순천북국민학교
일제강점기인 1939년 4월 20일에 매곡심상소학교로 개교하였다가, 1940년 4월 1일에 순천북공립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1945년 8년 15일에 순천북국민학교가 된 순천북초등학교도 여순사건의 병화를 비켜나가지 못했다.
여순지역이 재탈환되자 진압군경은 계엄 상태에서 가장 먼저 봉기군과 이에 가담한 부역자를 철저하게 색출하는 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대부분 봉기군과 좌익세력은 산악지대로 도주했기 때문에 소수의 봉기군 잔류자와 지방좌익세력과 소극적인 민간인협력자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1948년 10월 23일 오전에 진압군경은 순천읍민을 순천북교로 나오게 하였다. 일부 기록에는 약 5만 명의 읍민을 순천북국민학교 교정에 집결시켰다고 하나 당시 순천읍의 인구가 이에 미치지 못함으로 미루어 과장된 숫자라 할 것이다 .(일부 기록에는 23일에 2천명, 24일에는 600여명이 조사받고 있었다고 한다)
경찰・대동청년단・학련생 등은 먼저 40세 이하의 남자 중 군용팬티를 입은 자, 머리가 짧은 자를 봉기군 및 ‘부역자’로 지목하고, 그 다음 각 동네별 지방유지, 우익인사가 ‘부역자’를 지적하였다. ‘부역자’는 제1급(인민재판 적극 참여자), 제2급(소극적 참여자), 제3급(애매한 자)로 분류되어 처벌 혹은 재심사를 받았다. 이 중 경찰은 악질적이라고 판단한 12명(22명?)(박찬길 검사 포함)을 10월 25(24일?)일 순천농림중학교의 운동장 모퉁이에서 총살하였다. 일부 목격자는 북교 교정에서도 한편에서 바로 총살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증언한다.
순천북교는 진압 이후에도 한동안 경찰 부대의 주둔지가 되었다. 10월 15일 오후 9시 내무부에서 여순방면 반란군 진압 작전 상황 발표를 했는데 여기에 ‘ 순천지구경찰부대는 순천북 국민학교를 본거로 하고 치안 회복과 폭도 수사에 전력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 순천남국민학교
한말인 1906년 4월 1일에 사립 승명학교로 개교하여, 1911년에 순천공립보통학교로 인가받고, 1938년에 순천남공립심상소학교, 해방 이후 순천남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꾼 순천남초등학교는 순천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중심학교인데, 이 학교 역시 여순사건의 병화를 입어야 했다.
봉기군이 순천역에 도착한 20일 아침 남교 김경호 교사가 경찰서로부터 반란 연락을 받고 바로 휴교 조치를 하여 피해를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진압군이 들어오면서 3연대와 12연대는 전투사령부를 순천남교에 설치하였다. 전투사령부는 작전 상황에 따라 농림중학교, 법원 등 주요 건물을 택해 옮겨지고 있었다. 당시 진압군은 남교와 경찰서에 마이크를 설치하여 모든 읍민을 이곳에 모이게 하여 부역자 색출에 나섰다. “읍민 여러분, 우리는 대한민국 국군입니다. 읍민 여러분께서는 모두 남국학교 운동장으로 모이십시오. 만일 집에 남아있는 사람은 부역자로 간주하겠습니다.”는 내용이었다.
■ 호남은행(현 조흥은행)과 사거리
경찰서와 군청 사이의 호남은행 사거리는 여순사건의 주요 현장이었다. 호남은행 비켜 맞은 편에는 법원(지금의 삼성생명 자리)이 있었고, 법원 앞에는 조그마한 광장이 있었다.
1948년 10월 20일 봉기군은 그 앞에서 경찰관과 우익 진영을 조사하고 총살을 집행하였는데 그 시신이 사거리 일대에 널려 있었다. 그러다가 진압군이 들어와 호남은행 건물에 특별조사국을 설치하여 부역자를 가려내는 일을 맡았다. 이곳의 지하실은 고문실로 이용되었는데, 당시 순천 국회의원이던 황두연 의원도 이곳에 끌려와 고문을 받았다.
■ 미국인 선교사 크레인집
여순사건 당시 좌우대립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변명조차 하지 못한 채 무고한 희생을 치뤘다. 사회 지도층 인사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회의원 황두연과 광주지검 순천지청 박찬길 검사 사례는 사건의 비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황두연은 인민재판 배석자로, 박찬길 검사는 인민재판의 판사로 활약했다고 하여 취조를 받았고, 박 검사는 총살되었다. 물론 진압군경과 우익세력의 모함과 계획된 조작, 고문, 구타로 인한 살상이었다.
사건 직후인 21일 새벽 6시 국회의원 황두연의 신변을 염려한 박찬길 검사가 황 의원을 찾아와 설득하여 선교사 크레인집에 숨게된다. 얼마 후 14연대 소속 미 고문관 크레반 중위 등도 크레인 집에서 머물렀다. 미 고문관 2명(스트위트 M 그린바움 중위와 고든 모어 중위)은 업무차 광주에 출장갔다가 사건이 터지자 여수로 내려가라는 지시를 받고 내려와서 진압군의 작전을 주도하다가 봉기군에게 붙잡혔다. 총살 위협을 받던 그들은 14연대 통역관으로 일해 오다 봉기군에 합류한 유창남 상사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지고 크레인 선교사 집에 머물게 되었다. 뒷날 사건이 끝난 뒤 군법회의에서 유 상사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들 고문관의 도움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크레인 선교사 집에는 이밖에도 김상권, 김규당 목사(크레인 목사의 서기)도 함께 있었다. 황 의원은 23일 오후 진압군이 진주하자 크레인 집에서 나왔으나 자신 역시 ‘부역’ 혐의를 받아 호남은행(현 조흥은행)에 있는 군 특별조사국 지하실에서 인민재판의 배석 판사를 했다고 하여 몽둥이로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다행히 크레인 선교사가 송호성 전투사령관을 찾아 황 의원의 알리바이를 주장하여 풀려났으나 정부와 언론으로부터 ‘반란 가담’의 누명을 써야 했다. 황 의원이 국회로 나와 해명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1912년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평생을 한국에서 복음을 전하며 교육에 헌신해 왔던 존 크레인(구례인) 박사 부부가 살던 집은 매곡동 매산여고 뒤편 산기슭에 있다
■ 동순천역
전라선 구간의 동순천역은 ‘신역’인 순천역이 들어서기 이전까지 한동안 순천의 주요 관문이었다. 지금은 이용 승객이 줄어 역도 없어지고, 역 건물도 헐렸지만 그 흔적은 볼 수 있다.
1948년 10월 20일 아침 광양삼거리에서 경찰 병력을 물리친 봉기군은 죽도봉으로 이동하여 시내로 진격하는 봉기군을 엄호 사격하고, 이어 동순천역을 점령하고 이곳에 인민군사령부를 설치하였다. 23일 새벽까지 제2연대 1개 대대, 제4연대 1개 대대, 장갑차부대, 경찰부대로 증강된 진압군은 순천 주변의 산과 동순천역을 일시에 포위하고 박격포사격과 정찰기의 지원을 받으며 장갑차부대를 선두로 총공격을 개시하여 점령되었다.
■ 매곡동 학살지와 희생자 묘역
매곡동은 1910년대 순천에 개신교가 먼저 전파된 곳인데 아직도 선교사의 집(양관)과 선교 시설(기독진료소)이 남아있다. 해질 무렵 진압군이 들어와 당나무 아래 공터로 마을 주민을 모이게 한 다음, 이들을 이끌고 선교부쪽으로 이동하다 담장 옆 고랑가에 서게 한 다음[성서신학원 입구에서 5미터 아래지점]에서 26명을 집단 총살하였다. 이 가운데는 우영철(우부자집 막내 아들), 김 치과의 아들을 비롯하여 황종권 가족 8명도 들어있었는데 요행히 황종권과 그 조카인 황경숙,황하연은 총을 빗맞아 살아남았다. 황하연은 피를 많이 흘려 얼마 후 죽었다.
그 이튿날 보이열 목사가 박기열, 박승규, 김00.이재만의 도움으로 집단 학살 당한 26명과 낙오되었다가 죽임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봉기군 1명의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모두 27구의 시신을 들것을 만들어 운반하여 선교부 땅이었던 밭에 길다란 구덩이를 판 다음 몇 무더기로 가마니로 싸서 묻었다. 우영철[우부자집 막내 아들]과 김치과의 아들의 시신을 가족들이 찾아감으로써 25구의 시신이 현재 묻혀있다. 당시 정인대 의사는 병원에서 페니실린 병을 갖고 그 안에 이름을 적어 넣어 시신안에 두었다고 당시 시신을 수습하였던 박기열 옹은 회고하였다. 묘지가 있는 곳은 삼풍 그린파크 2차 아파트 뒤편의 새로 지은 매곡등경노당 뒤편으로 10여년전에는 길다란 봉분이 마을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윗마을로 가는 작은 길이 나고, 다시 찻길이 나면서 묘지의 절반의 들어가고, 남은 부분도 많이 깎여 있다. 남은 묘지는 이웃으로 이사와서 그 내용을 알게 된 이명식 부부가 벌초도 하고, 근래에는 꽃을 심어 억울한 영혼을 달래주고 있다. 일가족이 몰살을 당한 황종권 목사의 누나인 황인엽이 인근에 살면서 이장을 시도했지만 이루지 못하고 작고했다. 경로당을 지으면서 포크레인 작업으로 유골이 나오자 내막을 아는 주민들이 말려서 보존될 수 있었지만, 주민들은 이장을 바라고 있다.
■ 조곡동 둑실마을
진압군이 들어온 후 순천북초등학교에서 협력자들을 분류한 후에, 적극적 가담자를 다시 순천경찰서 유치장으로 데려갔다. 1948년 10월 25일 경에 적극적 협력자로 분류된 71명을 아침에 트럭에 싣고 조곡동 마을의 뒷골짜기인 안골[지금의 금강메트로빌 자리]로 끌고 와서 총살한 후 불태우고 매장하였다. 그 뒤로는 계속 실려온 협력자들을 학살했던 곳이다.
■ 생목동 수박등 공동묘지
덕암동은 여순사건 발발 후에 봉기군 사령부가 설치된 순천철도국과 가까운 위치에 있어 피해자가 많았다. 당시 피해자들은 봉기군과 좌익세력에게 식량 제공이나 길 안내, 우익세력 지목 등의 부역을 했다는 혐의로 진압군에게 사살되었다. 그리고 부근에 있는 순고오거리쪽 장대다리 근처의 강둑에는 좌익 혐의로 처형된 시체가 많았고, 현 수박등[이수중학교 정문 오른쪽 부근,당시에는 공동묘지]의 평지에서 총살한 후에, 장작더미에 불태워 며칠동안 냄새와 연기가 자욱하였다고 한다.
순천을 탈환한 진압군은 ‘협력자’를 색출한다고 하면서 철도청 기관사 사무소에 근무하던 장환봉 등 3,40인을 순천열차사무소를 임시 감금실로 만들어 한 달 동안 구금하였다가 1948년 11월 생목동 뒷산의 수박등 공동묘지로 연행하여 총살한 후 장작불로 소각처리하였다고 한다.
첫댓글 폭염경보가 발령되었습니다.37도를 오르내리는 찜통더위속에서 원혼비를 설치하는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의 투쟁정신은 반드시 과거사기본법제개정을 이루어내어 진실규명의 초석이돨것입니다.백비민간인학살순례단의 학살지원혼비설치와 추모행사는 역사의등불이될것입니다.
동천의물길은 그날의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없이 흘러만가네요.슬프고 아픈역사 이제 정리할떄도 되지않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