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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空)의 사람 이세종과 맨 사람 예수
― 이세종의 ‘나눔의 삶’을 중심으로
송 기득
읽을거리 : 마태 20, 1-14 : 사도행전 2, 44-45 : 4, 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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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가 사는 동안 이세종 선생을 직접 만나지 못했다는 게 못내 한으로 남습니다. 저는 23살에 유 영모 선생을 만났고, 25살에 함석헌 선생을 만나서 제 생각을 익혔는데, 이세종 선생과도 만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습니다.
그분이 난 게 1880년이고 돌아간 게 1942년이라면 62년을 산 셈인데, 그분이 돌아간 해에 저는 겨우 10살이었습니다. 그분을 만날 수 없게 된 것은 운명이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동광원』(東光園)에서 맡아 운영했던『송등원』(松燈園)에 입원한 해가 1956년(23세)이었는데, 거기에서 처음으로 ‘이세종’(李世鍾) 선생에 관하여 조금 들었을 뿐입니다. 그분은 ‘기인’(奇人)으로서 ‘동광원 정신’의 터전을 닦은 ‘성자’(聖者)였다는 정도였습니다. 그 뒤 제가 29살 때 겨울거지방랑이 끝난 후, 왠지 이세종 선생의 ‘기도처’를 찾아보고 싶어서 혼자 이곳 등광리(登光里)에 들렸는데, 그 땐 이곳은 초라한 ‘토굴’이었습니다. 동리에 들려서 생가도 둘러보았습니다. 이 집에서 “예수의 사람”이 나왔구나 생각하니, 감회가 깊었습니다. 그때 마침 이상복 장로를 만나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금 기억되는 바는 겨우 몇 가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선생은 아파도 약을 쓰지 않아서 자신도 지금껏 약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 선생은 풀 한포기의 생명도 사랑해서 채소를 심으려고 밭을 만들 때 거기에서 뽑은 풀을 다른 곳에 옮겨 심었다는 것, 특히 흉년에는 한 밤중에 몰래 동리의 가난한 집을 돌면서, 식구들을 헤아려 매주와 소금을 알맞게 나누어주었다는 것, 그리고 금식하면서 기도생활에 열중하고 성경을 많이 읽었다는 정도의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교수로 있던 1990년대 초에, 함께 공부했던 ‘연구모임’의 사람들과 전국성지순례 차 남원 지지리(知止里)와 광주 귀일원(歸一園)을 거쳐 이곳 등광리에 들렸습니다. 생가와 기도처를 둘러보았는데, 그 때는 기도처가 돌집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저는 동료들에게 “이공”의 뜻을 아는 대로 설명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지금도 등광리 기도처를 ‘성소’(聖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1월 어느 날, 너무나 뜻밖에도 여기[이세종의 수도처]에 묶고 있는 한영우 장로와 호신대학(湖神大學) 하동안 교수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2013년 3월 15일에 열리는 ‘이세종과 이현필의 추도모임’에서 설교[강연]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멀리 화순 도암에서 일부러 순천까지 와서 부탁을 하는데, 두 분의 성의에 감동한 나머지 저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하겠습니다.”고 대답해버렸습니다. “이제야 이세종선생의 혼이 깃든 ‘성소’를 다시 찾을 수 있겠구나.” 하고 기뻤습니다. 나는 동광원을 생각할 때마다 이세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에 관해서 책도 읽고 이야기도 들었지만, 그가 살아 있을 때 직접 만나서 그분의 사는 모습과 그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분에 대한 내 이야기가 훨씬 생동감을 지닐 터인데, 아주 서운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을 이세종선생의 기일(忌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이세종탄신133주년기념모임”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세종의 정신과 행동거지는, 그를 따르려는 사람들, 특히 동광원공동체에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마치 예수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계속 살아 있듯이 말입니다. 이세종이나 예수는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죽음’이란 없습니다. 그들에겐 오직 ‘오늘의 부활’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이세종과 예수의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예수에게 그렇게 하듯이, 이세종이 죽은 날을 기리는 것보다, 이세종이 낳은 날을 기리는 것이 훨씬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이세종 탄신133주년기념모임”이 될 것입니다. 온 세계에 걸쳐 예수의 낳은 날을 기리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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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강연의 주제를 “비움(空)의 사람 이세종과 맨 사람 예수”로 잡고, ‘예수의 눈으로’ 이세종을 되돌아보기로 합니다. 그의 삶과 생각을 다 다룰 수는 없어서 그의 ‘나눔의 삶’을, 예수의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사상”을 중심으로 뜻매김해볼까 합니다. 그러나 제가 감히 이세종의 나눔의 삶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제게는 큰 광영이지만,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이세종의 행동거지가 어떠했든, 그는 ‘예수 따름이’로서 예수의 뜻을 온몸으로 실천한 사람인데, 그 경지에 가지 않고서 그분의 나눔 실천을 어떻게 말로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공중에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자칫 그분 말대로 “그의 말과 행동에 공(空)을 치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공과 같은 경지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그분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 공이시어! 선생을 제대로 나타낼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너그럽게 용서하시기, 두 손 모읍니다.” 여기에서 제가 소개하는 것은 전적으로 엄두섭의 『호세아를 닮은 성자』를 참고했습니다. 엄 목사의 노고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책의 이름을 『예수 따름이 이세종』이라거나, 『참 사람 이세종』이라거나 『비움(空)의 사람 이세종』이라고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세종의 삶은 예언자 ‘호세아’보다 ‘맨 사람 예수’에게 훨씬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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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생의 나눔의 실천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은 바로 그의 호(號)인 ‘이공’(李空)이란 말에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공사상’(空思想 )이 ‘나눔살이’의 철학적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제가 이선생에 대해서 처음 듣는 순간 그분의 호(號) ‘공’에 마음이 쏠렸습니다. ‘이세종 선생은 어째서 호(號)를 “이공”(李空)이라고 지었을까요? 엄두섭의 말에 따르면, 이세종은 “나는 세상에 공을 쳐버렸다.”는 뜻으로, 선생 스스로 지었다고 합니다. “세상에 공(O)을 쳐버렸다”니 무슨 뜻이겠습니까? ‘공’(空)의 뜻을 아는 것은 이세종의 삶의 정신과 실천의 뜻을 이해하는 데 ‘열쇳말’(key-word)이 됩니다. ‘공’이야말로 이세종의 처음(알파)과 나중(오메가)입니다. 아마 선생이야말로 우리나라를 통틀어 “공의 철학”을 일상에서 처음 펼친 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유 영모는 ‘공’을 ‘븸’이라고 씁니다. ‘비움’이란 말입니다. 또는 ‘빈탕한 데 맞혀 놀이’라는 말도 거기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공’을 우리말로 ‘텅비움’이라고 썼으면 합니다. “불교의 ‘공 철학’은 “공이 색(色)이요, 색이 공”(空卽色, 色卽空)이라고 하지만, 그 사상이 우리 일상살이의 자리까지 내려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세종은 우리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텅비움’(空)을 실천했습니다. 사실 그분에겐 ‘공’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의 실천하는 삶이 바로 ‘텅비움’이었습니다.
그분이 이 말을 예수와 하느님을 알고 난 다음에 고백했던 것이라면, “나는 이제부터 세속적인 욕망을 완전히 비워버리고, 예수의 뜻을 따라 살아야겠다.”는 결의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삶의 대전환’을 알리는 결단의 고백이었습니다. 이제껏 물질의 욕망을 좇는 삶을 비우고, 앞으로는 하느님과 예수의 뜻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의를 내보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예수쟁이들을 붙잡으러 다녔던 ‘사울’이 참회를 거쳐서 ‘바울’로 변신했듯이, 이세종도 ‘내적 혁명’을 통해서 ‘이공’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공의 “비움의 철학”은 그의 모든 행동거지에서 나타났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나눔살이’에서 제대로 드러났다고 봅니다. 흔히 ‘구제’(救濟)라는 말을 쓰는데, 이 말은 ‘배푼다’는 뜻을 지니고 있어서 이공에게는 어울리는 말이 아닙니다. 베푸는 일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감히 베푼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저 하느님의 것을 나누는 것뿐입니다. 그는 실제로 애써 번 돈과 재산을 송두리째 내놓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다 나누어주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자기비움’(空)의 행동실천(行動實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비움’(空)은 이른바 ‘무소유’(無所有)의 절정입니다. 지율스님의 말마따나, “가지고 있으면 소유이고, 나누면 무소유입니다.” 무소유사상은 자기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바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히브리전통사상이 밑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세종의 비움(空)이야말로 예수의 기본사상과 상통합니다.
물론 비움(空)은 수도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비워서 탈아(脫我)나 자기초월의 경지에 가는 지름길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세종 선생에게는 그런 수도자(修道者)의 면모가 뚜렷했을 것입니다. 그가 늦으막에 산당(山堂)에서 했던 명상과 기도의 삶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그의 ‘공사상’(空思想)은 ‘나눔의 실천’에 더 초점이 있었습니다. 하기야 선생에게는 생각이 곧 실천이고 실천이 곧 생각이었습니다. 생각과 실천이 곧 하나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을 소크라테스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고 했는데, 이세종은 글자그대로 지행합일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선 그의 ‘나눔의 삶’에서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그의 나눔의 철학은 근본에서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다.”는 이스라엘민족의 전통사상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예수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이세종에게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내 것(자기소유)이란 건 하나도 없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것을 맡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내 것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써서는 결코 안 된다.”는 생각이 이세종 선생에게 있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그의 베푸는 삶을 잠시 들여다봅시다. 엄두섭에 따르면, 이세종 선생은 40살 즈음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이미 부자였던 그는 자기의 소유를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재산 얼마를 면사무소에 가져다주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달라고 했는데, 그게 여의치 않은 것을 알고 자신이 직접 나누어주기도 했습니다. 친척들에게 땅을 주고 집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이발 도구를 사주어 자립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습니다. 나들이를 할 적에는 반드시 ‘나눔 돈’(구제비)을 챙기고 다녔습니다. 그는 불쌍한 거지를 만날 때마다 얼마의 돈을 주었으며, 자기 옷을 거지 옷과 바꿔 입기도 했습니다. 사경회에 참석 차 광주에 들른 그는 광주천변에 움막을 치고 있는 거지들에게, 그가 가져갔던 2-3일의 먹을거리를 몽땅 주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사경회 내내 굶다가 집으로 오는 길에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나눔살이는 선생에게는 죽을 때까지 일상사(日常事)였습니다. 선생은 말했습니다. “자기가 쓸 돈에서 떼어내어 구제해야 참구제이다. 먹을 것 다 먹고 입을 것 다 입고 쓸 것을 다 쓴 다음에 구제하는 것은 값없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그의 재산을 광주노회에 몽땅 바쳤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남은 것은 바가지 세 개뿐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다보니까, 그는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일부러 가난하게 살았고,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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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나눔의 삶’은 진정한 참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엄두섭에 따르면, 그는 “체격이 크고 기골이 장대하며 힘이 장사여서” 일을 잘 했다고 합니다. 그는 머슴살이를 열심히 한 나머지 상당한 돈과 재산을 모았습니다. 돈을 남에게 빌려주고 비싼 이자를 챙겼습니다. 색갈이를 놓아 재산을 불렸습니다. 흉년이나 ‘보릿고개’가 닥치면, 빌려주었던 벼나 보리의 배 이상을 받아 챙기는 수법으로 재산을 불려갔습니다. 제때에 빚을 갚지 못하면 집문서나 땅문서를 빼앗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땅을 100마지기쯤 가진 지주가 되었습니다. 흉년에는 가난한 농사꾼의 땅 50두락을 헐값으로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를 믿게 된 다음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그가 착취하고 수탈한 것을 갚아주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는 시골 농민들이 돈을 빌리려고 맡겼던 집문서나 땅문서를 원주인을 찾아 모두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빚 문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라버렸습니다. 이세종이 이 일을 결단한 것은, 그에겐 이미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다. 그러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니고 모두 하느님의 것이다.”는 사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이란 따로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의 것’, ‘이웃의 것’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그는 삭개오의 고백에 큰 감명을 받은 것 같습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으며, 착취한 것은 4배로 갚겠습니다.”(루가 19, 9) 이세종에게 이런 소유의 철학과 진정한 참회가 있었기에, 그의 나눔살이가 가능했을 터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세종은 분명히 ‘예수의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아니 ‘참 사람’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엄두섭 목사는 이세종의 ‘나눔살이’를 보고서 그때 사람들의 말을 빌려 ‘기인’(奇人)이라고 했는데, 엄밀한 뜻에서 이세종은 ‘기인’이라기보다 ‘예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 한 가지만 보아도 이세종은 예수의 삶과 생각을 그대로 본받아 살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예수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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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나눔’의 뜻을 어디에 두었을까요. 그는 그것을 한마디로 ‘나눔의 평등공동체’에서 찾았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에서 잘 드러납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고 말하면서, 그의 하느님나라가 지닌 경제적 의미 곧 “나눔의 평등공동체”를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뚜렷이 밝히고 있습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품꾼을 고용하려고 아침 일찍이 일감을 기다리고 있는 저자거리(인간시장)에 나갔습니다. 그는 품꾼들과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아홉 시쯤 나가서 일감이 없어 서성이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했습니다. 주인은 열두 시쯤 나가서 그렇게 하고, 오후 세 시쯤에도, 또 오후 다섯 시쯤에도 그렇게 했습니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맨 나중에 온 품꾼부터 차례로 불러서 약속한 대로 한 데나리온씩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일한 사람은 더 받을 줄 알았다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주인에게 항의했습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찌는 더위 속에서 땀 흘려 일했는데 어째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과 똑같이 주는 것입니까?” 이 항의는 정당합니다. 일꾼이 일한 만큼 품삯을 받는 것은 자본주의경제이론에서 보면 경제정의에 속합니다.
그런데 성서에는 포도원 주인이 ‘불공평하지 않았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포도원 주인이 준 한 데나리온은 실은 단순한 ‘품삯’(임금)이 아니라, 적어도 하루를 살 수 있는 ‘생계비’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한 데나리온은 하루를 살 수 있는 생계비[아니 생존비]였습니다. 일을 많이 하든 적게 하든, 아니 병이 나거나 일감이 없어서 일을 못하든, 사람은 적어도 하루를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사회주의경제학에서는 임금을 ‘생계비’로 생각해야 한다는 이론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제「포도원 품꾼의 이야기」에서 드러난 경제원리를 한마디로 간추려 정리하면, “힘닿는 대로 일하고 필요(수요)에 따라 나누어 가지는” 경제제도입니다. 이러한 경제 질서를 시쳇말로는 ‘공산주의’라고 부릅니다.
힘닿는 대로 일하고 수요에 따라 분배하는 경제 질서를 공산주의라고 한다면, 그 원리의 기원은 역사의 예수에게 있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처음그리스도교공동체에서 잠시나마 실천되었습니다. 처음그리스도교공동체를 ‘원시공산주의사회’라고 부르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지내면서 모든 물건을공동으로소유하고…모든사람에게필요한대로나누어주었습니다.”(사도 2:44-45). “믿는 무리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누구 하나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했습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사도 4:32-35)
다음으로 예수가 내놓은 하느님나라의 경제 질서는 ‘땅의 공개념’(公槪念)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땅의 공개념’이란, 히브리인들의 성서에서는 ‘땅의 공유화’(公有化)를 뜻하는 말인데, 이것은 땅의 사유화에 대한 철저한 거부를 전제합니다. 땅의 공유화사상은 이스라엘의 전통개념이었습니다. ‘땅은 야훼[하느님]의 것’이라는 그들의 통념이 바로 그것입니다. 땅은 야훼 하느님의 것이라는 말은, 땅은 모두의 것이므로 개인은 혼자 땅을 가질 수 없다는, 곧 사유권의 부정을 뜻합니다. 예수가 내놓은 땅의 공개념은 사람들을 소유[물질]의 예속에서 해방시키려는 데 그 본뜻이 있습니다. 소유는 사람의 사람다운 삶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경우에는 사실 땅뿐이 아닙니다. 모든 것에 대한 ‘무소유’가 예수의 기본 정신입니다. 그는 제자들을 보낼 때, 아무것도 갖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두벌 옷도 가지지 말고, 지팡이나 신발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돈주머니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철저한 무소유를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무소유는 저절로 가진 사람에 대한 비판과 저주로 나타났습니다. “너희 부유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루가 6:24-25).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섞여 사는 세계가 아닙니다. 예수는 그리스도교에서 지향하려고 하는 ‘보편성’ 따위와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는 철저하게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서 이들의 해방을 겨냥했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예수의 민중편향성이며 민중당파성입니다. 예수는 말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저희 것이다”(마태 5:1). 하느님의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새롭게 열리는 세계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역사의 주체라는 말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일체의 소외계층을 가리킵니다. 정치 쪽에서 주변화하고 이데올로기 쪽에서 예속화한 계층인데, 우리는 이 계층을 ‘밑바닥사람’ 곧 ‘민중’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민중이 하느님의 나라 곧 새 세계를 이룩할 역사의 주인(주체)이라는 것이 예수의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소유할 하느님의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이 해방되는 세계일 뿐더러, 그 해방을 이루어낼 주체가 바로 가난한 사람들 곧 ‘민중’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가 저절로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는 말했습니다. “부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생태로 보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진 사람들은 이 말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가진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 곧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했습니다. 예수는 그것을「부자 젊은이와 나눈 대화」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고 묻는 부자 젊은이에게 예수는 말했습니다. “그대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하느님나라를 실현하는 데 나와 함께 나섭시다.” 이 말을 들은 젊은이는 그의 소유가 아까워 그냥 돌아갔습니다.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한걸음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투신하라는 예수의 이 요청을 남미 해방신학자들은, ‘마음의 가난’(마태 5:1)이라는 말의 해석으로 삼습니다. 가진 사람들이 이러한 ‘마음의 가난’을 가질 때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가난의 의식화’라고 부릅니다.
예수의 경제원리가 “힘닿는 대로 일하고, 필요[수요]에 따라 나누어 가지는” 데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예수의 경제 질서가 철저한 소유의 평등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에게는 그의「달란트 비유이야기」나「열 므나 비유이야기」가 가리키듯이,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을 쓰더라도 남의 소유를 마음대로 착취하고 수탈해서 사회의 극단적인 양극화를 낳게 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시장경제원리’ 따위는 결코 용납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가 바라던 하느님나라는 ‘적어도 사람들[민중]이 밥을 먹고 살만한 사회’라는 데 본뜻이 있습니다. 중국 후진타오 주석이 바랐던 ‘샤오깡사회’(小康社會)와 상통합니다. “그래서 “주기도”에는 “일용할 먹을거리를 주소서.”를 첫 바람으로 일러주고 있습니다.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의 복됨은 소유의 평등이 이루어지는 하느님나라를 가지는 데 있으며, 가진 사람[부자]들의 구원은 그들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데 있다고 말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수는 소유의 평등이념이 실천되도록 가르쳤을 뿐 아니라, 아예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예수는 집을 떠난 뒤에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과 농촌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하늘나라의 도래를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와 그의 무리들을 ‘떠돌이선포자’라고 부릅니다. 예수는 그의 방랑살이에서 제대로 먹고 제대로 잠을 잘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데나 쓰러져 자고 닥치는 대로 먹었을 것입니다. 너무 배가 고플 적에는 남의 밀밭에 들어가 안식일인데도 밀을 잘라먹었습니다. 성경에는 제자들만 먹었다고 했지만, 예수도 함께 먹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도 배가 고프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니까요.
예수는 ‘떠돌이’로서 지팡이도, 배낭도, 돈[주머니]도 없이 다녔으며 심지어 신발조차 신지 않았습니다. 맨발이었을 것입니다. 이 세종선생도 맨발로 다녔지 않았습니까. 예수는 두 벌 옷도 챙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어울려 다니는 무리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타일렀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둥지가 있는데,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예수의 고백은 그의 무소유의 삶을 잘 드러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유의 나눔을 강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세종이 집을 떠나서 움막에서 홀로 지내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전도를 했다는 것도, 예수의 ‘떠돌이살이’와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이것은 예수처럼, 선생의 ‘무소유의 삶’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는 거지와 옷을 바꿔 입는 것은 보통이었습니다. 엄두섭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거지가 되려고 했다.” “이공의 행색은 거지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육식을 하지 않았고, 생선도 먹지 않았다.” “그의 주식은 쑥범벅이었다.” “그는 헌 누더기 옷으로 만족했다.” “겉치레(外飾)는 하느님을 능멸하는 일이다.” “그는 지나치게 검소했다.”는 것입니다.
이세종의 거지꼴을 보고 아이들까지 놀렸습니다. 심지어 ‘비렁뱅이’니 ‘문둥이’니 하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어른들은 ‘미친놈’이라고 욕을 했습니다. 그때 이공이 했던 말이 감동스럽습니다. “내 몸은 문둥이가 아니지만 내 마음 속에는 문둥이가 있으니, 하느님께서 아이들을 통해서 이것을 알려주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비렁뱅이는 아니지만, 하느님께 맨날 빌어먹고 살고 있으니 아이들의 말은 옳은 것이 아니냐.” 그 무렵 교회에서는 ‘아단’이라고 비난했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정말 예수에게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먹어야 산다. 예수가 나의 힘이다.”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요한복음서(6 : 52-59)에는 예수의 말로서 “너희가 내 살을 먹지 않고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 세종은 그 말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의 힘은 예수의 살을 먹는데서 왔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단순하지만 놀라운 해석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세종은 예수의 떠돌이 면모를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세종의 자기 믿음과 생각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행동일 가능성이 큽니다. 선생은 ‘역사의 예수’를 공부할 기회가 없었을 테니까요.
6
예수는 골고루 나누어 가지는 경제이념을 실제로 수행했는데,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다”는 이른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야기’가 그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가 실제로 그런 기적을 행했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사실이라고 증명하려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이 기적이야기의 중요성은 예수가 먹을거리를 실제로 나누었다는 사실이며, 그것은 동시에 그가 벌인 하느님나라운동의 하나였다는 사실입니다. 먹을거리를 함께 나누어 먹는 일, 그것을 ‘민중신학’에서는 “밥상을 같이 한다.”고 말하며, 그것을 지향하는 모임을 ‘밥상공동체’라고 부릅니다. 그런 뜻에서 예수의 ‘오병이어의 이야기’는 예수의 ‘밥상공동체’가 하느님나라의 경제적 의미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복음서저자는 예수의 나눔공동체를 “최후만찬의 이야기”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가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행한 일이 떡과 술을 함께 나누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소유의 평등한 분배가 우리의 사람살이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이란 존재의 근본조건입니다. 그것은 삶의 조건이며 인간조건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골고루 먹을 수 있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서로 골고루 나누는 길밖에 없습니다. 로마제국의 식민통치의 수탈 현장에서 굶주린 민중에게는 먹을거리의 나눔이 그대로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침략으로 송두리째 망가져버린 이스라엘민족공동체를 회복하는 하나의 길이기도 했다는 데 더욱 그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나눔의 공동체를 이룬 데는 단순히 먹을거리만의 나눔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평등은 소유의 평등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 걸친 사람의 평등을 아우릅니다. 이것을 일러 ‘열린평등공동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온갖 사람의 차별, 이를테면 성(姓), 계층, 신분, 종족[민족, 국가], 지식, 교육, 직업, 지역, 종교에 걸친 모든 차별을 넘어선 평등공동체입니다. 이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예수의「결혼잔치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나눔의 평등뿐 아니라, 사람이 누려야 할 모든 인간평등을 함축합니다.
예수의 결혼잔치 이야기에 보면, “거리에서 만나는 대로 아무나 데려온” 사람들을 잔치자리에 함께 앉게 하는데, 이 자리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자유인과 노예가, 귀족과 천민이, [종교의례 상으로] 깨끗한 사람과 더러운 사람이 나란히 앉아서 잔치음식을 함께 나눕니다. 이것은 예수의 ‘철저한 평등사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잔치 상에 나란히 함께 둘러앉는 것은 모두 평등하게 ‘사람’으로 인정받고 ‘사람’으로 받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사람으로 받들어 섬기는 일이 밥상을 함께 함으로써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여기에 ‘열린밥상공동체’가 지니는 중요성이 있습니다. 예수의 나눔은 사람을 사람으로 받들고 섬기는 일의 하나입니다. 예수의 나눔사상과 그 실천도, 알고 보면 모두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려는 데 그 뜻이 있었습니다. 저는 예수의 하느님나라를 시쳇말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라고 옮깁니다. 그리고 예수의 하느님나라운동은 “사람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는 운동”이라고 풀이합니다. 요한복음에 있는 최후만찬이야기에는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섬기고 받들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의 평등공동체는, 예수가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둘러 앉아 밥을 같이 먹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 밥상에는 세리도 있었고, 창녀도 있었고, 여성도 있었고, 어린이들도 있었고, 이방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가운데 특히 세리나 창녀는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밖에 눈먼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신체장애우도 있었을 것이고, 한센병환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신의 저주를 받아 병에 걸렸다고 하여 모두 ‘죄인’으로 몰렸던 주변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때 여성은 불결한 존재로서 재산의 한 목록에 지나지 않았으며, ‘어린이’는 율법을 아직 배우지 않았다고 해서 사람 축에 넣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는 이처럼 사람으로 취급 받지 못했던 민중과 함께 밥상을 같이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예수가 얻은 별명이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창녀]의 벗”이며,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를 즐긴 놈”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렇듯 밥을 함께 나누면서 서로 사람으로 받들고 섬기는 ‘사람평등공동체’를 가르쳤으며, 동시에 그것을 하느님나라 운동의 하나로 실천했던 것입니다.
7
예수의 ‘나눔공동체사상’의 근본 바탕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예수의 ‘사람 봄’(인간관)에 있습니다. 예수는 사람을 모두 ‘하느님의 아들-딸’( 子女)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존엄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누구나 받들어 섬겨져야 합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세상, 그것이 바로 예수의 ‘하느님나라’입니다. 예수는 그런 세상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운동을 벌였고, 마침내 십자가형틀에서 참혹하게 살해되었습니다. 특히 그때 가난한 사람들,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 여성이나 어린이들은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모두 ‘죄인’으로 따돌림을 받았는데, 예수는 이들도 ‘하느님의 아들-딸’ 곧 ‘사람’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실제로 그들을 사람으로 받들고 섬겼습니다. 예수의 ‘나눔살이’는 사람을 섬기고 받드는 데 근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죄인’으로 몰려 따돌림을 받는다고 해도, 그도 어디까지나 사람으로 받들어 섬겨져야 한다는 예수의 ‘인간화사상’을 잘 드러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한센병환우를 치료했던 일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의 하느님나라운동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문둥병자를 고쳐 준 다음에, 그의 몸을 사제에게 보이라고 합니다. 사제의 확인증이 있어야 그가 쫓겨난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센병환우에게 참다운 구원은 단순히 병이 낫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가 쫓겨난 고향이나 집으로 돌아가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그를 ‘죄인’으로 몰았던 사람들과 함께 사는 일이었습니다. 예수가 치유하는 궁극의 목적은 바로 이 ‘인간복권’(人間復權)이란 점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의 인간화운동은 아주 철저했습니다.
이처럼 예수의 하느님나라운동은 사람이 골고루 함께 먹고 살 수 있는, 그러면서 동시에 사람이 사람으로서 받들어 섬겨지는 ‘사람평등공동체’를 실현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사람이 사람과 함께, 사람답게 사는 공동체라는 뜻에서, 사람 사이의 공동체 곧 ‘인-간 공동체’(人-間 共同體)라 부릅니다.
이세종의 ‘나눔살이’는 아무래도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서 반드시 사람으로 받들어 섬겨야 한다는 예수의 정신과 그 뜻을 실천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선생의 나눔살이는 분명히 예수가 실천한 ‘인간존중사상’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선생에게 이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를 배반한 그의 아내에 대한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선생은 자기를 버리고 두 번씩이나 남자를 골라 떠나버린 아내를 찾아가 친히 돕고 격려하면서, 마침내 그 아내에게 예수를 믿게 함으로써, 아내가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했습니다. 아마도 선생이 아내에게 했던 일은 인류 역사상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선생의 ‘아내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윤리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하겠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사람으로 받들고 섬겼던 예수의 ‘인간화사상’(人間化思想)을 따른 데서 나오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이것은 동학의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의 ‘사인여사천’(事人如事天) 사상과 상통합니다. 하늘을 섬기듯이 사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동학의 1대 교주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는 반상(班常)이 뚜렷한 차별사회에서 사람의 평등성을 깨닫고, 몸종 하나는 딸로, 하나는 며느리로 삼았다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내에게는 큰 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엄두섭에 따르면, 이세종은 “사람만 섬기고 받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산천초목과 금수곤충에 이르기까지 만물을 사랑했습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을 경외하고 사랑했습니다.” 길가에 있는 잡초도 안전한 곳으로 옮겨 심었고, 산길을 가로질러 뻗어간 칡넝쿨이 밟혀 꺾이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는 생명을 몹시 사랑해서 이나 빈대도 죽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는 송등원에 입원해 있을 적에 그 덕(?)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입원실에 쥐가 하도 난리를 쳐서 “쥐를 잡읍시다. 환우들이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쥐 잡는 일이 지옥 가는 일이라면 내가 대신 가겠습니다.” 고 제의했습니다. 그러다가 송등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는 자연보호의 원조였고, 환경운동의 효시였습니다. 그에겐 자연사랑과 사람사랑이 둘이 아니었습니다. 이세종 선생의 ‘나눔살이’는 사람을 받들고 섬기려는 마음,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서는 결코 이루어지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 새종은 예수보다 한 수 위였던 같습니다.
8
지금껏 보아온대로 이세종은 그의 호처럼 “비움”(空)을 살았고, 바로 그것으로 하여 하늘이 낸 “예수의 사람”이라고 부르기에 넉넉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멀리 예수를 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는 ‘이공’의 삶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세종은 ‘이공’이 되었지만, 예수는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진짜 예수가 아니어서 그리스도교는 예수와 무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그리스도교신학의 그리스도론에, 그리고 오늘의 그리스도교 교회에 ‘실제의 예수’가 살아 있을까요? 그러나 예수는 이공과 같은 사람에게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서 부활한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오늘의 부활”입니다. 이공은 ‘오늘의 예수’임에 틀림없습니다.
여기에서 예수와 이세종의 마지막에 대해서 언급할 게 있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예수는 로마제국에 항거한 정치범으로 십자가형틀에서 참혹하게 살해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대속자’로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해석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의 핵심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종의 가르침들을 보니까, ‘대속론’을 강조했다는 대목이 별로 없습니다.
이세종은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무렵, 완전히 집을 떠나 여기저기 떠돌다가, 산속 깊이 들어가 작은 움막을 치고 아내와 함께 칩거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서너 달 동안 일체의 음식을 사양하고 ‘공기’만 마시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942년 겨울이었습니다.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엮은 사다리상여에 누더기 옷을 걸친 채 관(棺)도 없이 그대로 땅에 묻혔습니다. 그의 시신이 하도 깡말라서 그를 “가죽 성경”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아내는 남편 곁에서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했습니다.
예수와 이세종은 죽은 모습은 달랐지만, 끝까지 마음과 뜻과 정성과 생명을 바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삶에 성실했습니다. 그 기간이 예수는 비록 한해 남짓 혹은 한 해가 채 못 되게 살면서 하느님나라운동에 목숨을 걸었지만, 이 세종은 30여년을 나눔과 수도의 삶을 ‘온몸으로’ 살았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삶과 사람됨의 ‘스승’으로 드높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를 세계 4대 성인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이 땅에 하느님나라 곧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실현하려는 ‘사회변혁자’였습니다. 이세종 선생에게 ‘성자’ (혹은 ‘성인’)란 칭호를 붙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제 생각 같아서는, 선생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누가 나를 성자라고 하는가.” 하고 호통을 칠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선한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다.” 할 것 같습니다. 하기야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가 말했듯이, 사람에게서는 성(誠)이 곧 성(聖)입니다. 사람에게 성실하다는 것은 곧 거룩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뜻이라면 예수나 이세종은 모두 ‘거룩한 사람’ 곧 ‘성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치고 성인이 아닌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일상을 살고 있더라도 나름 다 성실하게 살고 있다면, 모두 ‘성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이세종 선생에게 ‘성인’이라거나 ‘성자’라거나 하는 호칭을 붙이는 것은 무방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를 ‘성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번 깊이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9
끝으로 저는 한 가지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제껏 이세종 선생과 예수의 연관성을 물어왔는데, 이세종 선생은 ‘역사참여’에 대해서는 어떠했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이세종 선생은 일제강점기를 살았는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탄압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졌을까요? 여기에 대해 엄두섭 목사는 그의 저서에서 뚜렷하게 다루고 있지 않아서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친일(親日)은 하지 않았을 터이고, 그렇다고 반일(反日)을 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나라에 내는 세금은 먼저 내야 한다.”고 하면서 세금을 면사무소에 먼저 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은 일제에 동조했다는 증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자기 임무를 착실히 수행하려는 자기 성실성의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일 일제에 항거했다면 독립운동자금이라도 내야 했었는데, 엄두섭 목사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세종에게 ‘역사의식’이 있었는가에 있습니다. 그분이 전 재산을 광주노회에 바쳤다는데, 그때 한국의 그리스도교교회는 거의 “한일기독교연맹”에 속해 있어서 일본에 동조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심인물이 신학자 정경옥 박사였는데, 그때 “광주중앙교회” 담임목사였습니다. 선생이 노회에 재산을 헌납한 것은 친일행위가 아니라, 자기재산이 공평하게 쓰이기를 바라서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분의 헌납동기와 일제와의 관계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세종 선생의 역사의식을 묻는 것은, 제가 그분을 “예수의 사람”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세종 선생이 일제의 식민탄압에 무관심하지 않았겠지만, 사실 그의 믿음살이는 예수의 사회개혁운동과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는 ‘역사변혁자’로 살았지만, 이 세종은 ‘수행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세종 선생이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피해 산 속에서 칩거했다는 것은 그가 일제의 식민정책에 반대했다는 것의 한 증거일 것입니다. 다만 그는 ‘예수를 믿는 일’에 충실했을 뿐,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혹여 그가 3·1운동에 참여했는지 모릅니다. 그때가 그의 나이 39살이었으므로, 아직 예수를 알지 못했을 때지만 그에게 그럴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이미 말해지만, 예수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하느님나라운동을 벌이다가, 고쳐 말하면 이스라엘민족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서 권력계층과 싸우다가, 마침내 십자가형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예수는 단순히 구도자나 수행자가 아니고, 사회개혁이나 역사변혁에 앞장선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나눔의 공동체”는 로마제국의 침략으로 하여 완전히 망가져버린 이스라엘공동체를 회복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살리려는 데 의미가 있었습니다. 단순히 가난한 계층의 “구제사업”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나눔의 공동체를 가르쳤지만, 이 세종은 몸소 빌어먹고 다니는 ‘거지방랑인’으로서 예수의 나눔을 몸소 실천하는 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예수는 고루 나누어 먹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권력자들과 싸웠지만, 이세종은 오히려 세상을 피해 입산수도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세종 선생의 ‘나눔살이’는 예수의 나눔사상을 일상살이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한 것이었지만, 일제의 탄압과 실제로 싸웠던 분은 아닌듯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예수에게서 볼 수 없는 “수도”(修道)에 열중했던 분입니다. 그는 예수를 바탕으로 한 ‘수행자’였고, 마침내 ‘도인’(道人)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그의 모든 선행은 예수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지만, 그 뜻을 실천하는 힘은 그의 삶의 현장에서 닦은 깊은 수행(修行)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세종의 수행살이는 예수의 사회참여 쪽 보다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수도원 전통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엄두섭은 이 세종을 가톨릭의 성프란치스코(1181,1182-1226)와 동일시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사실 두 사람의 삶은 비슷합니다. 선생은 하느님과 직접 만나서 영성을 기르고, 자기를 초탈하는 신비의 세계를 체험하고, 그래서 자신을 득도(得道)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치열한 ‘수행의 사람’이 아니었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두 분은 분명히 다른 데가 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수사출신이었지만, 이 세종은 ‘머슴’(쌍놈)출신이었습니다.
선생의 텅비움(空)의 삶은 큰 영향을 끼쳐, 특히 이현필 선생을 감화시킴으로써 오늘의 ‘동광원수도공동체’를 있게 한 ‘터전’이 되었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광원공동체는 수행의 진면목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공동체를 강의할 적에는 반드시 ‘동광원공동체’를 본보기로 듭니다. 오늘의 “귀일원”이 이공의 나눔살이의 산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동광원공동체는 순전히 우리나라 사람에게서 이루어진 것으로 우리나라에 길이 존속해야 합니다. 동광원은 우리나라의 영성(靈性)을 가늠하는 잣대이기 때문입니다. 동광원은 ‘엽전공동체’입니다. 저는 ‘마르크’(독일 돈)를 통해서 “한국디아코니아공동체”가 시작되었을 때, ‘엽전’을 통해서 이루어진 “동광원수도공동체”에서 배우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종교(그리스도교)가 “이공”(李空)을 냈다는 것은, 길이 남을 ‘역사의 정신유산’으로서 우리는 더 없는 긍지를 느낍니다. 더욱이 이공은 ‘나눔살이’에서 ‘오늘의 예수’이므로 그가 한없이 자랑스럽습니다. 우리는 이공의 후예로서 그의 나심 133돌을 기리는 자리에서 ‘텅비움’(空)의 사람’이 되도록 다짐해봅니다.
끝으로 몇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이 세종 선생의 나신 날을 택해서 “이 세종의 날”을 제정하고, 이공의 뜻과 삶을 기렸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종의 죽은 날을 기리는 것은 마치 제사를 지내는 것 같아 이공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공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를 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길이길이 살아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처럼, ‘이세종의 부활’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세종의 비움과 나눔살이”를 맨 사람 예수의 자리에서 짚어보았는데, 이것은 이 세종연구에 운을 띄우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후학들의 이세종연구가 이어졌으면 합니다. 제가 지금 주제를 내겠습니다. “이세종의 비움과 나눔살이가 자봅주의체제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다음 해에는 이 글을 읽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예고대로 오랫동안(2시간) 경청해주어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