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을 잃은 정순왕후의 슬픔이 서린 남양주 사릉리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는 정순왕후의 무덤 사릉(思陵)에서 비롯했다.
사릉은 정순왕후가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공경함이 발랐다’는 구절에서 나온 이름이고, 한편으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한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기도 하다.
계유정난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단종과 영도교에서 18살에 헤어진 후 82세에 세상을 뜰 때까지 평생 남편을 그리워하며 지낸 정순왕후의 아픈 사연과 삶이 서린 곳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는 정순왕후의 무덤 사릉(思陵)이 있는 곳이다.
사릉은 생각 사(思)자에 무덤 능(陵)자를 쓴다.
정순왕후가 남편인 단종과 헤어져 64년간 오로지 ‘단종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공경함이 발랐다’하고, ‘지나간 일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한다’라는 뜻으로 사릉이라 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으로 17살과 18살의 어린 왕과 왕비는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 사연을 따라가 본다.
남양주 사릉
나무도 임을 향해 가지를 뻗었다
사릉에 가면 주변에 소나무가 아름답게 서 있다.
소문에 의하면 이 소나무는 양무장군의 묘인 준경묘(濬慶墓)가 있는 삼척에서 가져와 심은 금강송이라 한다.
금강송은 아름드리 곧게 자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사릉 주변의 소나무는 모두 한곳으로 향하고 있다.
곧게 위로 자란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이것은 18살에 홀로 되어 영월에 있는 임을 그리다가 여생을 마친 정순왕후의 심회를 알고 나무들이 단종이 있는 영월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운에 살다간 왕비의 슬픈 사연을 소나무도 알았을까?
그 때문에 1999년 사릉에서 재배된 묘목을 단종의 무덤인 영월 장릉에 옮겨 심어서 단종과 정순왕후가 그간의 그리움을 풀고 애틋한 정을 나누도록 했다.
이 소나무를 사람들은 정령송(精靈松)이라 했다. 죽은 영혼이나마 함께 하기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이다.
삼촌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사건을 계유정난이라 한다.
그때 단종의 나이 17살 그리고 왕비의 나이 18살이었다.
혼인해서 4년을 살았고,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왕비는 영월로 떠나는 단종을 영도교까지 나와서 배웅했다.
당시 궁궐의 여인이 나올 수 있는 곳이 이곳까지였다 한다.
영도교에서 헤어진 두 사람은 이승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영도교를 일러 ‘영원히 이별하는 다리’라 부르기도 했다.
정순왕후는 이후 신분이 격하되어 관비로까지 전락했다.
신숙주가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니, 얼마나 치욕스럽게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세조는 자신이 한 일이지만 신숙주의 언행에 너무 놀라 “신분은 노비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정순왕후는 혼자된 왕실의 여인들이 사는 정업원에서 생활했는데, 스님이 되어 머물렀다는 얘기도 있다.
세조가 집을 지어주고자 하나 끝까지 사양하고 시녀들이 동냥을 해 온 밥으로 끼니를 이었다.
생계를 이으려고 제용감에서 심부름하던 시녀의 염색 일을 도와 자줏물을 들이는 일을 했다.
훗날 정순왕후가 염색을 하던 골짜기를 자줏골이라 했고, 샘물은 자주동샘(紫芝洞泉)이라 불렀다.
그때 정순왕후가 단종의 억울한 죽음에 명복을 빌며 빨래를 하면 자연히 자주색으로 염색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렇게 임을 잃은 지 64년이 지난 82세에 세상을 떠나 지금의 사릉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