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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것은 마치 사람의 얼굴나를 찾는 길이 곧 나라를 찾는 길이라고.
곳에는, 어림잡아 백이십여 호가 넘는 집들이 집촌을 이루고 있었다.
산중도 아니요, 들도 아닌 비산비야의 난양지지, 따뜻하고 양지 바른 터에 처음으로 들어온 한 헌조, 어질고 덕망 있어 이름이 높이 드러난 할아버지의 자손들이 그곳에서 오 대, 십 대, 그리고 몇 백 년씩 살아오며 같은 조상의 가지로서 동족 마을을 이룬 것이 집성 반촌이라면, 고리배미는 제 각기 이 마을에 들어온 내력이나 성씨가 서로 다른 각성바지 이 사람 저 사람들이 무간하게 섞여 사는
산성촌 민촌이었다. 물론 이 중에는, 고리배미에 맨 먼저 자리를 잡아 대대로 살면서 거의 삼십여호 가까운 일가붙이를 데리고 있는 집고 있고, 그보다 한 발 나중에 들어와 이
십여 호 되는 집, 또 그보다 더 이만큼 중간에 정착하여 여남은 가호가 생겨난 집들도 있었지만, 그들을 빼고는 많아야 예닐곱, 아니면 너댓 집들이 같은 성씨 로 형제 분가하거나 혹은 아재비, 조카를 부르면서 살았다. 그리고 그 나머지들은 그야말로 각동박이, 한 성씨에 한 집씩이고 기껏해야 늘어나서 두 집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수효가 많다고 해서 집안을 내세워 텃세를 한다거나, 한 집만 산다고 얕잡아 업신여기는 일은 별로 없었다.
"외나 우리 동네는 타촌서 들은 사램이 더 잘되는 디 아닝가. 기양 보따리 하나만 달랑 들고 들와도 얼매 안 가서 심 짚고 일어나잖등게비."
"먼 짓을 허든지."
하는 말이 꼭 빈말만은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조상을 묻지 않았다. 그래서 '부지소종래'라 하여, 자기가 비롯되어 온 곳을 모르니, 그 자신의 근본이 어디에 있으며, 조상은 누구인지, 또 어떻게 살아왔는지, 집안 내력을 도무지 모르는 사람들이 산다고, 고리배미는 반촌으로부터 하시를 받았다. 비록 그곳이 판박이 천민인 무당이나 백정, 갖바치들이 사는 수악한 마을이 아니라 할지라도, 상인, 상민, 상한, 상놈, 상것, 상사람, 나라에 매인 종은 아니지만 그 신분이 낮아서 곤궁하고, 가지가지 불리는 이름도 많은 상민들이 살고 있거나, 향교 출입을 할 수 없는 신분인 중로들이 살고 있는 곳은 민촌이라 하였다.
중로는 중인이다. 그들은 양반 다음가고 상민 위에 있는 사람들이라, 행세는 할 수 없었지만 천한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실리에 밝았다. 그래서 오직 공리와 효용에 가치를 두고, 자신이 가진 기술로 생업을 삼아 재물을 모았다. 이 세상에 재물보다 확실한 기둥은 다시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모은 재물로 그들은 많은 전답을 사들였다. 물론 모든 중로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부자는 민촌에 많다."
는 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고리배미에는, 이 중로와 상민들이 서로 어우러져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신분의 구분은 있어서, 그들은 아무리 허물없이 이웃하고 살아도, 쓰는 말만은 마구 섞지 않았다. 그 사는 형편이나 나이와는 상관없이 중로는 상민에게 '하게'나 '하소'로 말을 놓았고, 상민은 중로에게 '합니다', '하지요'하며 말을 올려 했다. 지금이야 옛날 같지 않아서, 그런 신분을 정하여 옮도 뛰도 못하게 만들었던 조정도 망하고, 이제는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피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 겉옷 밑에는 여전히 오래 오랜 세월 동안 묵고, 가라앉고, 엉겨붙은 관습이 소금 버캐 켜켜이 자욱한 몸뚱이처럼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치 새로 난 철도가 마을 뒷산 고리봉의 저 뒤쪽으로 벋어 지나가듯이, 개화 개명이라는 새 문물은 마을 바깥 저 뒷등허리로 저희끼리 지나가고 있을 뿐. 이 마을 안 고리배미는 예전부터 나 있는 길을 그대로 끼고 앉아, 변함없이 걸어서 다니는 사람들 모양 어제 살던 대로 오늘도 살고 있는 것이다.
양반들이야 민촌이라고 웃든지 말든지 여기서는 여기서대로 그런 것을 가리면서, 중로는 체신과 실속을 챙기려 하였고, 상민은 자신들이 쇠백정 도한이, 고기 잡는 어한이, 소금 굽는 염한이에 들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스스로 위로하였다. 이는 삼한이라고 하여 몹시 천대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갯가에 났드라면, 도한이는 몰라도 어한이, 염한이 중에 하나가 되ㅇ을 거잉만, 우리 같은 상놈이 무신 근본이 있어야 말이제. 떨어진 디서 기양 목심 부지허고 살었을 거잉게. 앙 그렁가? 불행 중 다행이여, 농사 짓는 디서 나서 농사 짓고 상게 말이여."
"옘병하고 앉었네, 도통을 헐랑가, 지 땅이라고는 단 한 볼테기도 없음서 머이 그렇게 다행이냐, 다행이."
"긍게나 말이다. 아이고, 옘벵이나 엄벵이냐, 천지에 깔린 땅 도지 받어서 다머에다 쓴다냐."
"논 사지."
"그놈 도지 받으먼?"
"밭 사고."
"또 그놈 받으먼?"
"첩 딜이고."
"핫따, 어뜬 놈 좋겄다. 비오리 지금 살잉가?"
"한 삼십 안되이까?"
"넘었지맹."
"넘어? 아이고, 아까워라."
거개가 농사일을 하는 이 마을에서 제 논 가진 집은 얼마 안되지만, 그래도 남부럽지 않게 농사를 크게 짓는다고 소문난 사람은 엄서방, 엄병곤이었다. 그는, 경술국치 이전에, 자못 위세가 당당하던 오수역 역리 엄구용의 손자로 나이 오십이 벗어진 사람이다.
고리배미 토박이인 병곤은 키가 땅딸막하고 어깨에 살이 올라 바라진 체구에 목이 굵고 짧은 외양이 좀 훤칠하지 못한 것이 흠이지만,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기호성은 대단하여 그의 몸에는 늘 팽팽한 바람이 차 있었다.
거기다가 이곳에서 대를 물려 살아온 집안인지라 일가붙이도 넉넉하여 삼십여 가호나 되는 그는, 사위도 그다지 고단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주로 이 마을의 동편쪽에 모여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엄씨네를 두고 '동엄'이라고 하였다. 이 동엄의 머리에 앉은 것이 병곤인 셈이었다.
그들 일가 중에는 병곤의 논을 부치고 있는 집도 몇 있었다. 그러니까, 아까 '염병' 소리 끝에 '옘벵'이냐 '엄벵'이냐고 한 말은, 엄병곤의 이름을 두고 빗댄 말이고, '비오리'는 마을 어귀 삼거리 주막의 매초롬한 술어미이다. 그리고 둘러앉아 한 마디씩 한 것은, 매안 원뜸의 소작인들이다.
엄병말고는, 농사 지어 자기 앞 가리면서 곳간에 찬 바람 나지 않을 만한 서너 집을 제하면, 그저 근근이 굶지나 않을 정도의 논 뙈기에 온 식구 목구멍을 의탁하는 사람들과, 그나마도 없어서 소작을 짓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같은 일가붙이인 엄병곤의 논을 부치는 엄씨 들이나, 매안에서 소작을 얻는 사람들은 그래도 나았다. 이도 저도 못하여 동척에 소작 계약을 한 여러 집은
"차라리 동냥아치가 낫다."
고 말라 붙은 한숨을 모질게 쉬었다.
앞앞이 사는 형편도 다르고, 모양도 다른 고리배미 사람들은, 대개는 농사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 외에 다른 생업을 가진 경우도 많았다.
이 마을의 한쪽 끝에 사는 부칠은 나이 오십의 나무꾼인데, 그는 오직 한 가지, 나무를 하고, 그것을 장에 내다 파는 나무장수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지게 하나 짊어지고 산중으로 들어가서, 소나무 가지를 낫으로 쳐내 동이로 묶어 나뭇짐을 만들거나, 가을이면 발치에 수북히 쏟아져 쌓이는 마른 솔잎을 갈퀴로 긁어 가리나무 다발을 만들거나, 혹은 나뭇간에 쟁일 장작단을 만들어, 장날이면 부칠의 아낙은 머리에 이고 사내는 등에 지고, 읍내로 나갔다.
읍내 나무전 거리에서도 그의 나뭇단을 알아 주었다. 어려서부터 나무 일로 뼈가 굵은 그는 이제 그 뼈에 바람이 스며들어 예사로
운 날씨에도 쉽게 속이 시리지만, 나뭇짐만큼은 여전히 바윗돌 같이 단단하고 무겁게 묶어 내는 때문이었다.
부칠과 이웃에 살면서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 온 모갑이는, 박달 방망이, 빨래 방망이, 홍두깨들을 깎아서 팔았다.
"에레서 팽이를 깎어도 말이여, 우리는 기양 대강 숭내만 내 갖꼬는 울둑울둑헌 대로 치잖이여, 왜. 근디 모갭이 이 사램이 깎어 논 것은 달르드라고. 맨드로 옴허니 태가 나서 아조 이뻤제잉."
그것은 부칠의 말만은 아니었다. 유난히 솜씨가 곰살가워 일 맵시가 남 다른 그의 손으로 만드는 것 중에 일품은 아무래도 나막신이었다.
보통 '나무께'라고 하는 이 나무 신은, 비 오늘 날 진흙 땅에서 신는 진신과 마른 날 신는 마른신 두 가지인데 어느 것이든 높은 굽이 달려 있었다. 이 굽이 서툴게 달리면 높이가 맞지 않아, 신고 나서면 뒤뚱거리고 걸음이 불안하여 넘어지기 좋았다. 그런데 모갑이의 나막신 굽은 맨땅을 디딜 때보다 오히려 더 상큼한 기분이 들게 알맞았고, 먼 길을 가도 다리가 아프지 않았으며 아무리 오래 신어도 굽이 쪼개지거나 빠지는 일이 없었다.
"사람만 양반 상놈이 있는지 아능가? 나무깨도 있네이. 어뜨케 달르냐고? 우선 나무가 달체. 개법고 보드람서도 단단헌, 좋온 나무는 양반신으로 가고, 상머 심 괭이 백인 마당발맹이로 심 좋게 막 생긴 나무는 상놈 신으로 가고. 근디, 외나는 어디가 달르냐먼 뫼양이여, 뫼양."
퉁퉁하니 뭉시르르하여 둔한 코빼기는 볼품이 없어 막신밖에 안된다. 동그스름하고 매끈하게 다듬어져 계란이 오히려 거칠게 느껴지는 뒤꿈치도 말할 것이 없지만, 그 뒤꿈치에서부터 쪼옥 곧은 선으로 유연하게 벋어난 선이 콧부리에 이르면서 날렵하게 위로 휘어 오를 때, 여기서 그 나막신의 모양과 품이 결정났
다.
"코빼기 멍청허먼 신 베려. 딴 거 다 잘해도 헛짓해 부리능 거이여. 자, 바라, 코빼기는 요러어케, 닭 대가리가 발등으로 고개를 홰애 돌림서 모가지 따악 쉭인 것맹이로 이뿌게 깎어야여."
그는 옆에서 일을 배우는 아들한테 번번이 일렀다. 그렇게 다 된 나막신의 신총에, 가늘고 검은 먹줄을 선명하게 두 줄로 그리기도 하고, 인두로 지져서 수를 놓듯이 고운 꽃잎이나 구름 무늬, 넝쿨 같은 당초문을 새겨 넣기도 하는
"모갑이 나무깨."
는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하나씩 가지고 싶어했다."
"갖신 부럽잖다."
는 말을 듣는 그의 나막신은, 그 결이 비단같이 부드럽고, 신었을 때 발을 오무려 감싸 주는 느낌이 안정되면서 편하고, 깎고 꾸민 모양이 발에 신기 아깝게 어여뻤다.
모갑이는 장날이면, 방망이, 홍두깨와 함께 한 죽, 두 죽, 솜씨를 다해 파 놓은 나막신을 어깨에 메고 읍내로 나갔다.
갖신이야 거멍굴 백정 택주네붙이 중에 갖바치가 있어 거기서 짓지만, 모갑이의 나막신도, 운혜, 당혜, 비단 입힌 갖신 못지 않게 가지고 싶은 물건이었다. 그러나 갖신이고 나무깨고 다 그만두고, 그저 짚신짝이라도 아쉽지 않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라은, 방물장수 서운이네였다.
그네는 마치 함을 지듯이 뚜껑에 손잡이가 달린 버들 가방을 등에 짊어지고, 낡은 무명 멜빵을 멘 채로 장날이면 읍내로, 아닌 날은 이 마을 저 고을로 찾아다니며 행상을 했다.
윤이 반들반들 나고 손때가 버들 속으로 깊이 배어 들어 투명하게 얼비치는 가방 뚜겅을 열어 세우면, 그 속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 있었다.
위짝 아래짝 칸에는 올망졸망 형형색색 여자한테 소용되는 용품들이 가득 차 있는데, 그 앙징맞고 영롱한 모양이나 색깔들이라니. 하얀 무명실, 다홍, 연두, 노랑, 남색 명주 푼사실, 꼰사실, 가위, 바늘, 골무, 그리고 쟁가랑거리는 은단추, 호박 단추, 앵두 단추, 막단추, 거기다가 참빗, 얼레 빗, 화각빗이며 빗치개에 귀이개, 그리고 비취 물빛 영락없이 흉내낸 사기 비녀와 검은 비녀, 술이 달린 노리개, 반지. 그 옆에 숨막히게 보얀 향을 뿜어 내는 분통이며 반드르르한 머리 기름병. 구리무 곽.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를 곱게 놓은 경대보와 매화 꽃 벙그는 비단 수저집, 바늘집, 댕기, 이런 것들이 빼곡 들어 찬 가방을 지고, 서운이네는 걸어서 걸어서 마을과 마을을 하염 없이 떠돌아 다녔다.
"참말로 나 다리 품 하나는 여한도 없게 팔었그만, 긍게 내 다리가 나 멕에 살링 거이제, 나 그런 생객이 들등마잉. 지가 갖꼬 나온 지 몸뗑이 사대육신이라도 저허고 진 인옌이 다 각각 달릉 거잉가아. 어쩡가. 아 왜 어뜬 사람은 손으로 먹고 살고 어뜬 사람은 발로 먹고 살아아. 또 어뜬 사람은 소리 하나로 살고. 그게다 지 몸뗑이허고 저허고 진 인옌이제잉."
젊은 날부터 방물장수로 나서서 한평생을 길바닥에서 햇빛 아래 돌아다닌 탓으로 이제는 정수리 머리가 버슬버슬 부스러져, 고시라진 옥수수 수염같이 되어 버린 서운이 할미는 그런 말을 했었다.
"그러면 외눈백이 곰배팔이는 머이고?"
이야기 듣던 노파가 한 눈을 찌그리며 말을 받았다.
"내 말이. 그렇게 그게 요상타고. 어뜬 것은 한펭상을 부레 먹고 또 그거이 나를 멕에 살리고잉, 어뜬 것은 그렇게 써 먹능 건 고사허고 달려 있도 안허냐고.
긍게 그 눈구녁허고는 무신 웬수 갚을 악연을 지었등게비지. 당최 그 몸뗑이에 는 달려 있고 싶도 안헌."
"아이고, 안 달린 것으로 웬수 다 갚었그만 그리여, 그런다먼."
"그렇게, 작고 크고, 잘 났고 못 났고 무신 원망을 말어야 히여. 그것다 지가 진 인옌이 모다 뫼아 갖꼬 사대육신 생게 났을 거잉게."
"사주 팔짜 낯바닥도 그렁 거이나 똑같겄그마잉."
"아이고오, 내 팔짜야아."
한숨을 쉬던 서운이 할미 곁에서 어린 서운이는 조작조작 걸어 다니며 놀고, 나이 젊은 서운이네는 시어미한테서 물려받은 방물 가방을 등에 지고 나섰다. 그 서운이도 어느덧 아홉 살이 되었다.
시어미가 다니던 길을 따라, 다니던 집을 찾아 다니고, 한 속처럼 그집에 필요한 물건을 꿰어 알게 된 서운이네의 머리 정수리도 벌써 먼지를 뒤집어쓴 당나귀 갈기처럼 빛이 바랬다.
서운이네는 가까이 매안으로부터 숲말, 밤두내, 수월, 덕평, 매내골, 풍촌, 어의 터, 황새터, 화정리, 계동을 고루고루 더터서 날짜를 가늠하여 돌았다.
단골이 된 집의 안방에 방물 보따리를 내려놓으면, 소식을 듣고 안사람들이 모여 오고, 혼기에 달한 처자를 둔 집에서는
"아무 만한 아무 것을 구해다 달라."
고 주문을 하기도 했다. 한 집에 길게 머무를 수 없어 마을의 집집을 꼼꼼이 도느라면 해가 저물기 일쑤였다. 여자가 사는 물건이란 한없이 섬세한 것이어서, 단추 한 개 사는 데 한나절 걸리는 것도 예사인, 아예 그럴 줄 알고 마음을 누그럽게 먹어야 한다.
"단초 한 개가 그거이 단초 한 개만이 아닝 거이다. 첨에는 서 푼짜리 단초 한 개로 시작이 되지마는 거그서 고리가 걸리먼 삼십 년 단골이 되는 거잉게. 그러고 그 한 사람만 나허고 걸리능 거이 아니여. 그 사램이 하늘서 떨어졌겄냐? 성지(형제) 있고 친척 있고 동무 있고, 그 동무는 또 동무가 있고. 그 사람덜하고다 연줄 연줄 거무줄맹이로 얽어지먼 그거이 대관절 ㅁ 멩이냐. 나는 그 생각을 잊어 부린 일이 한번도 없었니라. 방물 짐 이고 댕김서. 그렇게로 시방 나 대기든 질을 니가 또 댕길 수 있는 거이고. 장사는 내일을 바야 히여."
시어미는 며느리 서운이네한테 방물 가방 속에 든 앵두 단추 한 개를 지어 들며 말했었다. 저승꽃이 거멓게 번진 늙은 손의 두 손가락 사이에서, 영락없이 앵두 모양을 한 단추가 투명한 진홍으로 빨갛게 빛났다. 그것은 어린아니 조끼에 다는 단추였다.
"여그다 너를 걸어야 히여. 가문 좋고 문벌 존 사람은 거그다 저를 걸고, 재산이 많은 사람은 또 거그다 저를 거는디, 이도 저도 아무것도 없는 너는, 여그다이 단초 한 개에다 너를 걸어야 히여. 무신 교옹장 헌 넘의 껏, 체다보도 말어라, 넘의 껏은 암만 좋아도 다 쇠용없는 일잉게로. 니 꺼이나 놓치지 말어."
시어미는 그 빨강 앵두 단추를 서운이네 눈앞으로 바짝 들이밀며 오금박듯 말했었다.
"사램이 옷을 입는디. 옷고룸이나 단초가 없으면, 앞지락이 이렇게 벌어져 갖꼬 미친년이나 농판맹이로 요러고 안 댕기냐? 다 벗어지게. 그런 중도 모르고 헐레벌레 기양 댕기먼 어뜨케 되야? 꾀 벗제잉. 망신허고, 동지 섣달에 그러고 댕기먼 얼어 죽고, 그거이 먼 짓이겄냐. 옷고룸 짬매고, 단초 장구고, 앞지락 못
벌어지게 붙들어 걸어야제. 근디 그거이 쉽들 안헝 거이다. 니 인생 미친년 안되고, 꾀 안 벗을라먼, 요단초 한 개 수얼허게 보지 말어라. 이?"
한평생 동안 햇볕을 맞받고 다닌 시어미의 낯빛은 바짝 말라 물기 없이 검붉은 대추색이었다.
서운이네는 먼 길을 나갔다가 해 안에 돌아오지 못하면 캄캄한 밤길에, 쏟아지는 별무리를 등에 받으며 재를 넘기도 했다. 달빛 같은 호사를 어찌 바라랴.
별빛마저 두꺼운 구름 뒤에 숨어 버린 그믐밤의 지질리는 먹장 어둠 속을 허휘 허휘 걷기도 했다. 그러나, 그마저 여의치 않을 때는 할 수 없이 아는 집의 방귀퉁이에서 하룻밤을 묵고는 다음 마을로 가곤 하였다. 그런 밤이면, 쪼그랑망태가 다 된 서운이 할미는 새우처럼 마른 등을 잔뜩 꼬부린 채로, 칭얼거리는 손녀 서운이를 보듬고 잠이 들었다 깼다하며, 수숫대 울바자를 쓸고 가는 바람 소리에 늙은 귀를 기울였다.
온갖 잡살뱅이 물건을 저마다 등에 지고 팔러 다니는 도부꾼들은 서운이네말고도 이 마을 저 마을마다 얼마든지 있었다. 지금은 나랏님도 상투를 자른 지 오래라 하고, 보도 듣도 못하던 철갑차가 철도 위를 바람같이 시커멓게 내닫는 세상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다 하는 양반들은 으레 그런 일을 안하는 것으로 알아, 장날에도 몸소 장에 나
가는 법이 없었으니. 웬만한 것들은 눈썰미 야물고 매운 하인들이 재바르게 다니면서 충직하게 심부름을 하였다. 이처럼 사랑에서도 안 가는 장에를 안에서 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이 다 무엇인가, 기껏 샘길이나 문중의 집안 마실 정도가 출입의 전부일 것이다. 그러니 마을을 벗어나 어디 바깥에 나가는 일은 좀체로 없었다. 그렇지만 집안에서는, 하인한테 시켜서 사 오는 소소한 물건들말고도 언제나 필요한 것은 많았고, 또 정작 중요한 일을 당하여 사야 하는 물건들은, 하인이 알아서 사 올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럴 때 도부장수들은 요긴하게 이용되었다. 만일 집안에 당혼한 자녀가 있어 각종 혼수를 준비해야 할 때는 황아장수를 찾
았다.
장날이면 장에 벌린 황아전에서 비단을 팔고, 다른 날에는 청, 홍, 황, 색색깔 의 비단을 등에 지고 마을로 돌아다니는 이들은, 남자인 경우, 오래 다녀 단골이 된 집에 이르러서도 결코 덜퍽 안채로 찾아가지는 않았다. 내외의 법이 엄중한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랑채로 찾아가, 지고 온 비단을 내려 펼쳐 보였다. 또 멀리 해변과 섬에서, 말린 미역이나 멸치, 김, 톳, 마른 새우와 홍합, 자반 조기, 그리고 민어포, 상어포, 피문어 들을 둥덩산같이 수북하게 인 건어물장수들이 때 맞추어 찾아들기도 한다. 그들은, 지난번 들렀을 때 주문받은 마른 전복이나 해삼을 내놓고, 특별히 혼인에 쓰려고 부탁한 참문어를 잊지 않고 챙겨 오
기도 하였다.
문어 쌈지라고 하는 문어 대가리가 사람의 머리만씩이나 한 참문어는, 거기 달린 다리들이 모두 한 발이 넘는 길이인데, 보통 때는 좀체로 살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지만, 혼인의 초례청에서야 이보다 더 화려한 장식은 다시 없어서, 미리 주문을 하는 것이다.
몇 날 며칠을 두고 공들여 오라고, 집아에서 아주 솜씨가 좋은 어른이 모셔지기도 하는 이 문어발 오리는 일은 아무나 하지 못했다. 그렇게 오려 놓은 문어발에서는 온갖 형용 정교하고 아름다운 국화송이, 매화 송이가 참으로 제 줄기에서 금방 핀 것처럼 피어났다. 그러나 역시 가장 화려한 것은 봉황 오림이다. 금방 천공으로 상서롭게 솟구치며 날아오른 듯한 꼬리를 휘황한 깃털로 장식한 봉황은, 닭의 머리, 뱀의 목, 제비의 턱에 거북의 등과 물고기의 꼬리 모양을 두루 갖추고, 봉은 수컷, 황은 암컷으로 초례청에 마주서니, 그 화려한 자태는 봉황이 뿜어 낸다는 오색에 오
음의 소리가 그대로 곧 보이고 들릴 것만 같았다.
큰 물건을 팔아야 이문이 많이 남는지라, 방물장수, 도부꾼, 황아장수, 행상들은 크고 문벌 좋은 마을 쪽으로 자주 길을 잡곤 하였다.
그러나 도레도레 제 근처를 맴도는 것은, 엿 목판을 앞에다 메고 큼지막한 가위를 철걱 철걱 두드리는 엿장수, 흰 무리, 시루떡, 콩떡, 찰떡, 인절미, 무지개떡, 배피떡을 번갈아 머리에 이고 나타나는 떡장수들이었다.
고리배미 떡장수는 곤지어미였는데, 엿장수는 배암골 쪽에서 왔다.
엿장수만이 아니라 다른 장수들도 많이 들어왔으니, 그 중에는 체장수, 상고는 사람, 테 매는 사람이 있었고, 또 얼마큼 있다가는 소금장수가 이 마을을 찾아오기도 하였다.
그들을 맨 먼저 맞이하는 것은 마을 초입에, 성성한 바람 소리를 내며 검푸른 구름머리를 이루고 있는 솔밭, 적송 숲이었다.
한결같이 행색이 남루하고 찌들어 보이는 이 장사꾼들은, 세 갈래로 갈라진 마을의 어귀에서 동네 쪽으로 들어서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솔밭의 모정에서 한숨을 돌리며 일단 다리를 쉬었다. 그리고 곰방담배를 꺼내 물거나, 여름 같으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솔바람 소리를 듣기
도 하였다. 물론 그냥 지나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랬다.
이 솔밭은 고리배미의 장관이요, 명물이었다.
마을을 둘러보아 눈에 띄는 명승이나 정취로이 바라볼 만한 무슨 풍경 하나도 없이, 그저 둥실한 고리봉 아래 평평한 마을이 해바라지게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고리배미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말발굽 모양으로 휘어져 마을을 나직히 두르고 있는 동산이 점점 잦아내려 그저 밋밋한 언덕이 되다가 삼거리 모퉁이에 도달하는 맨 끝머리에, 무성한 적송 한 무리가 검푸른 머리를 구름같이 자욱하게 반공중에 드리운 채, 붉은 몸을 아득히 벋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성황당이 있었다.
"민촌에 아깝다."
고 이 앞을 지나던 선비 한 사람이 탄식을 하였다는 적송의 무리는, 실히 몇 백 년생은 됨직하였다. 이런 나무라면 단 한 그루만 서 있어도 그 위용과 솟구치는 기상에 귀품이, 잡목 우거진 산 열 봉우리를 제압하고도 남을 것인데, 놀라운 일이었다, 수십여 수가 한자리에 모여 서서 혹은 굽이치며, 혹은 용솟음치며, 또 혹은 장난치듯 땅으로 구부러지다가 휘익 위로 날아오르며, 잣바듬히 몸을 젖히며, 유연하게 허공을 휘감으며, 거침없이 제 기운을 뿜어 내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것은 오직 고요히, 땅의 정과 하늘의 운을 한 몸에 깊이 빨아들여 합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붉은 갑옷의 비늘이 저마다 숨결로 벌름거리고, 수십 마리 적송은 적룡의 관능으로 출렁거려 피가 뒤설레는데, 제 몸의 그 숨결로 오히려 서늘한 바람을 삼아 사시 사철 소슬하게 솔숲을 채우는 이곳을 두고, 고리배미 사라들은 그저
"솔 무데기."
라고만 하였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정자는 그만두고 모정 하나 없이 그냥 소나무 아래 무심히 앉아 쉬고 놀고 하던 것을, 바로 바짝 그 옆에서 주막을 하여 돈냥이나 모은 비
오리어미가, 손님을 더 끌어 볼 욕심으로 궁리를 하다가 모정을 세웠던 것이다.
껍질만 벗긴 기둥목 소나무를 생긴 그대로 써서 네 귀퉁이에 박고, 송판으로 몇 조각 마루를 들인 뒤에, 볏짚으로 손바닥만한 지붕을 덮는 이런 일은 어려울 것도 없어서, 솜씨 좋은 마을 목수 도식이가 사람 하나 데리고서 한 며칠 뚝딱, 뚝 딱, 하더니, 아주 사나흘 뒤에는 말끔히 마쳐 놓았다. 그것이 십여 년 전 일이었다. 관연 모정을 세운 것은 잘한 일이어서, 마을 사람들한테 좋은 일 했다고 치하
도 받고, 그 덕에 한 걸음이라도 더 하는 사람들에게 술도 더 많이 팔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을에 찾아드는 장사꾼들말고도, 오고 가며 이 길목을 지나가던 길손들까지도 솔 바람 소리 성성한 적송의 무리 속에 조촐하게 세워진 순박한 모정에 눈이 가면 저절로 걸음을 멈추곤 하였다. 그래서 비오리네 주막은 종종걸음을 치게 부산하여졌던 것이다. 우선 이곳은 길이 좋았다. 이 근동 사방을 에워싼 크고 작은 뫼들의 물결과 주름 갈피에 박힌 여러 마을에서 물곬같이 흘러나오는, 남원 읍내 쪽으로 가자면 이리로 빠지지 않을 수 없
는, 꽤 오래된 길이 구불구불 하얗게 벋어 오다가 평평하게 화악 퍼지면서 둥그러미를 이룬 곳이 고리배미였다. 길은, 마을에다 한 짐의 땅을 넉넉히 부려 놓고는 다시 홀가분한 줄기로 읍내를 향하여 흘러갔다. 거꾸로, 남원에서 북행을 하재도 마찬가지여서, 아래쪽 삼동네는 물론이고 더 먼 곳에서도 이 마을 앞을 지나야 역이고 원이고 갈 수가 있었다. 그래서 자연히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해지고, 웬만한 짐바리를 실은 마소라도 비좁지 않게 걸음을 떼어 놓는 길이 저절로 닦여지게 된 것이다. 지금이야 머지않은 곳에 정거장이 생겨나고, 마을을 싸고 있는 고리봉 뒤자락을 가르며 철도가 놓이는 바람에 예전 같지는 않았지만, 그러기 전만 하여도 마을 앞 갈림길 솔밭 옆의 비오리네 주막은 밤낮으로 흥청거렸었다.
"아이고, 그 오살 노무 철동가 머싱가 날라먼 요 앞으로 나제, 멋 헐라고 존질 놔두고 대가리 홰액 틀어 갖꼬 죄며을 허고는 저 지랄을 허고 절로 가, 개기를, 잘 오다가."
이제는 딸 비오리한테 술청 일을 다 넘기고 뒷전이나 살피는 비오리어미가 손님이 뜸한 날이면 손님 대신 주막의 평상에 우그리고 앉아 하는 말이었다.
생김새가 매초롬하고, 몸매가 호리낭창한데다가, 저 혼자 서거나 앉아 있어도 감기는 듯한 태가 있는 비오리는, 그렇지만 온몸에서 파르스름한 찬 빛이 번져 났는데, 한창 나이가 되면서 물이 오르던 열아홉 스무 살 때는 새침한 얼굴에 도화색이 발그롬하여, 인근 사람들 입살에 어지간히 오르다가 결국 남의 집 소
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몇 해 못 지나, 어느 봄날, 고리봉에 진달래 애터지게 붉은데 꼭 제 어미 그만한 나이 때 모양으로, 작은 보퉁이 하나를 가슴에 보듬고, 다시 고리배
미로 돌아왔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비오리는 제 몸뚱이 저 혼자서 오고, 맞아주는 어미와 집이 있다는 것이며, 비오리어미는 모가지가 실내끼 같은 젖먹이 비오리를 등에 업은 채, 올 데 갈 데가 없어 막막하게 떠돌던 끝에 고리배미로 들어왔는데,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비오리어미를 내쫓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그네는, 누더기가 다 된 헌 옷 보따리 하나에 애기 하나 업고 고꾸라져 주저앉은 마을 앞 솔밭 옆에 그대로 터를 잡은 것이다. 그것이 벌써 삼십 년 전 일이었다.
"애기 이름? 가이내년이 이름은 무신 노무 이름. 애깅게 기양 애기, 그러먼 되제."
"그런 이름이 어딨다요?"
"어딨어. 여그 있제."
"커도 애기여? 나중에 인자 안 크간디?"
"크먼 큰애기고."
"하이고매."
"다 쓰잘디 없는 짓들이여. 이름 있으먼 멋 히여, 불르기 조먼 대답허기만 귀찮제. 상놈의 이름은 안 불릴수락 존 거이여. 멀 알도 못험서. 아조 없으먼 더 좋고. 왜 그런지 알어?"
"일이나 시길라먼 불릉게 그러겄지맹. 이뿌다고 씰어 줄라고 부를랍디여?"
"아네. 성도 귀찮시러. 부모한테 받응 거잉게 엇다 띠어 내불도 못허고 자석한테로 물려쥐기는 해야겄지마는. 머 써먹을 디가 있어야 생광시럽제. 나 그렁 거멀라고 있능가 모르겄데잉. 산에 낭구는 이름도 성도 없어도 잘만 크등만."
"왜 이름이 없어? 도토리나무우, 상수리나무, 옻나무우."
"에라이, 그러먼 사람 보고는 씨리둥 사라암 그런당가? 그럼사 좋겄지, 오직이나. 우리가 산에 나무 허로 가서 너 이름이 머이냐, 안 그러고, 너 무신 성짜 쓰냐, 안 그러고, 양반이다, 쌍놈이다, 안 그러고, 딱 생김새 바서 그거 한나로 씰거잉가 안 씰 거잉가 정허디끼. 사람도 사람 볼 직에 본성만 봄사 누가 마대?"
하고 말하던 비오리 아비는, 걱실걱실한 생김새 그대로 성질도 별로 조인 데 없던 도부장수였었다.
이름 이야기를 몇 번인가 하다가 흐지부지되어 그냥 '애기'라고 부르던 비오리와 비오리어미를 남겨 두고, 그 아비는 별 것도 아닌 일로 그만 어이없이 생목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때 일찍이 부모 동기를 잃어버리고 저 혼자 때갈로 크던 비오리어미는 세상에 핏줄이나 연고라고는 머리에 쇠똥 갓 벗어진 딸년 비오리 밖에 없었다.
"죽은 사람 이얘기 허먼 멋 히여. 기양 그렇게 생긴 사람이지 머. 너 맹이로 생겠능가아, 누구맹이로 생겠능가아."
열아홉이 되도록 '애기'라고 부르는 딸이 한번은, 저희 집 술청에 들러 탑탑한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도부장수의 뒷등을 이만큼 벗긴 곳에 앉아서 무슨 생각에 잡힌 것처럼 바라보면서
"울 아부지는 어뜨케 생겠능고."
하고 혼자말로 묻는 말에 어미가 한 대답이었다.
비오리는, 제 아비가 도부장수라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혼자서 짐작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큰집 작은집도 없능가?"
"내가 말은 들었는디. 늑 아부지는 에레서부터 그러고 등짐 지고 댕겠다등만.
어디 한 간디가 붙어 살어야 그렁 것도 챙계진디이. 나는 가본 일도 없고, 찾도 못해. 말만 들어 갖꼬 알 수가 있간디? 머 재 넘고 물 건네 어디라고 그러등만, 조선에 재 너고 물 건네는 디가 어디 한두 간디냐?"
"긍게, 어머이허고는 장에서 만났당가?"
"내가, 장에 있는 주막에서 기양 심바람도 허고, 정지꾼맹이로 불도 때고, 그륵도 싯고, 빨래도 허고, 그러고 있는디, 늑 아부지를 만났제. 그 주막에를 늘 댕겠잉게."
"아부지가?"
"잉."
"아부지 이름은 머이간디?"
"본쇠."
"본쇠..."
입 속으로 그 이름을 되받아 뇌어 보던 비오리는, 두 팔로 깍지를 낀채 괴고 앉은 무릎에 턱을 받친 그대로 한참을 있었다.
"나 울 아부지 한 번만 봤으먼."
그 말에 비오리어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무슨 생각을 저만치 밀어내듯이, 번지는 소리로 말끝을 흐렸
다.
"어디 가서 바. 없는 디."
"큰아부지라도, 작은아부지라도, 누구 아부지 피이고 탁인 사람 한 번만 봤으먼. 그런 사람 만나먼, 이어어케 손 한번 대 보먼 아부지 살 같을 것맹이여."
"살."
"잉."
막걸리를 마시던 술청의 도부장수는 어느결에 일어나 가 버리고, 저무는 주막의 됫박만한 방에 비스듬히 마주앉은 두 모녀는, 말이 없이 그냥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양반, 상놈은 다른 것이 아니라, 못 배워 모르면 그것이 상놈인 것이다. 근본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라도이 세상에 났으면 낳아 준 부모가 있고 또 그 부모의 부모가 있지 않으냐. 헌데 그 가닥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 가닥을 놓쳐 버리면 그것이 곧 상놈이니라. 곧 선조의 유래를 모르고, 제 아버지, 어머니가 누구인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누군지를 모르고, 그 위 상대도 모르고, 지금의 자기가 있게 된 그 말미암음을 모르게 되면, 상놈이라고 한다.
자기의 선조가 미약하고, 향고 출입을 못하면 양반이라고 할 수 없지마는, 그렇다 하더라도, 자기 조상에 대해서 잘 알게 되면 모르고 사는 것하고는 다르지. 아무리 미천한 사람이라도, 자기 조상에 대해서 잘알면, 어디서 어떻게 무슨 가닥으로 무슨 파가 갈려 나왔는지, 또 그 가닥들은 어디서 살고 있는지. 지금은
무엇을 허는지 챙겨 볼 수가 있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자연히 서로 연락도 되고, 출입도 넓어져 견문이 생기고 아는 사람도 많아져서, 사는 힘을 얻을 수 있으니. 사람은 어쩌든지 제 조상줄을 놓치며 안된다."
언젠가 주막에 들러 목을 축이던 매안의 사람이 어떤 젊은이를 상대하여 하던 말이 귀에 남았지만, 비오리나 그 어미는, 어느 누구 단 한 사람도 찾아볼 만한 붙이라고는 없었다.
그런 중에도, 남 다르게 태깔이 고와지는 비오리를 위하여 비오리어미는 황아 장수한테서 옷감을 끊어 놓기도 하고, 방물장수 서운이네 한테서 시집가는 데 필요한 바느질 용품이며 하얀 분백분을 사두기도 하였다.
"나는 어머이 탁ㅇ다고 넘들이 그러든디."
"아이고오, 몸썰난다. 나를 탁에서 무신 존 일이 있다고 나를 탁에."
"어머이가 머이 어디가 어찌간디?"
"그런 소리 말어라. 당최 허들 말어. 이? 너는 인자 말 헐만 헌 디서 말이 나먼 기양 치워 불란다. 고온 때 가시기 전에."
하던 비오리는, 스물한 살이 되던 해, 꽃심이 진분홍으로 피어나는 복사꽃 가지 아래로, 남의 소실이 되어 집을 떠나갔다.
남원 읍내에서 꽤 큰 한악국을 하는 진의원을 따라간 것인데. 공교롭게도 그는 마흔두 살로, 비오리 나이의 꼭 두 배였다.
"고리배미 솔밭 주막에 큰애기가 그렇게 이쁘다고 소문이 자자허든디."
맨 처음 그가 주막으로 찾아왔을 때 한 말이었다.
그는 흰 두루마기를 떨쳐입은데다가 머리는 상투를 쳐버리고, 발에는 하얀 백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때는 막 봄이 무르익으려 할 때여서 주막 옆구리의 솔밭 언저리에 저절로 벙그는 각시복숭아꽃 숨결 터지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었다.
남의 중매도 더러 심심찮게 하는, 방물장수 하던 서운이 할미가 그날 따라 일부러 맞춘 것처럼 같은 시간에 주막으로 놀러 나왔는데, 아는 사람이라고 진의원을 반가워하였다.
그네는 진의원에게, 방물짐을 막 며느리에게 넘기게 되었다는 이야기며, 그간 댁에서 신세 많이 졌었노라는 것을 말하고, 앞으로 며느리의 방물도 많이 팔아 주시라고, 한 가지 이야기를 할 때마다 고개를 꼽박, 꼽박, 하면서 숙이곤 했다.
서운이 할미는 비오리어미와 나이도 비슷하고 처지도 닮은 점이 있어 다른 사람보다 서로 더 허물없이 지내왔었다.
두 노파는 둘 다 영감이 없었고, 기대고 살 만한 남정네나, 아들이 없는데다
한쪽은 과년하여 시집 보낼 딸이 있고, 한쪽은 며느리가 혼자되어 갓난이 하나 품에 안은 과부가 되었는데, 그 모습이 자신의 젊었을 때 같아서 비오리어미는 서운이네한테 마음을 많이 써 주곤 했다.
"마은 살이 넘었잉게 벌쎄 메느리는 봤제잉. 그래도 자개가 의원이고 약국도 헝게로 녹용으로 인삼으로 존 약은 다 혼자 먹고, 속상헐 일 벨라 없이 살어 놔서 사람 땅땅히여. 인심도 무던허고, 나보고 말 잘해 돌라고 그러등만."
며칠 후에, 서운이 할미가 조심조심 눈치보는 척하면서 옆에 앉은 비오리한테 들으라고 말했다. 비오리어미는 속으로 반은 접어 넣고 밖으로 반은 펼쳐 보이 는 소리로
"마흔이며, 호박이 노랑물이 막 들라고 헐 땐디."
하고 미심쩍은 듯 입맛을 다셨다.
"노랑 호박, 잘 익으면 그것같이 해먹을 껏 많고도 맛나까? 깎어서 호박 오가리 해 놓고, 눈 펑펑 쏟아지는 날이먼 호박떡 해먹고, 누렇게 조청맹이로 풀어서 호박죽 쒀 먹고, 또 있제잉. 호박 범벅도 맹글어 먹고, 아이고, 맛나라. 그것뿐이여? 늙은 호박은 약에도 좋잖이여?"
"노랑 호박 한 뎅이 갖꼬 아조 물고를 낼라고 작정을 했그만이."
"나이는 좀 있제. 말이사 바로 말이지만. 그런디 차라리 이런 자리가 실속 있고, 사람 점잖고 갠잖다고오. 솔직이 이짝 헹펜도 있는디이"
"헤기는, 나이 마흔이먼 쉬염도 지댄허니 지룰라고 허고, 이자 어른 가락을 뺄라고 헐 때지."
"진의원이 거 할량이라고. 놀 찌 알고, 여자 애낄 찌 알고. 왜, 약도 잘 짓고, 글도 많이 허고. 유식허잖여?"
진의원은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비오리에게 하루는 금방 시집가게 생겼는데 아직도 애기냐고, 이름을 하나 지어 주겠노라 하였다.
그래서 얻은 이름이 비취 비 자, 달 월 자, 비월이었다.
"꼭 너한테 맞는 이름이다. 너는 비취로 깎은 달이로다."
고 몹시 흥겨워하던 그는
"저만한 적송 속에 초당이 서 있는데 이름이 없을 수 있느냐."
하면서, 하루는 좁으장한 현판을 하나 만들어 가지고 왔다.
"못 쓰는 글씨지만 손수 썼다."
하는 현판에는 '송풍정'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잔 재미가 많았던 그는, 비오리에게 소리선생을 하나 붙여 주기도 했다. 남원 권번 출신인 소리선생은 비오리를 데리고, 요천수가 푸른 비단 띠처럼 흘러가는 흰 모래밭으로, 또 요천수에 발을 담근 암벽 위에 날아갈 듯 서 있는 정자 금수정으로, 같이 다니면서 소리를 가르쳐 주었다. 그저 소리 맛만 보는 것이지 테머리를 하고 덤벼들어 배우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선생이나 제자나 심심파적
으로 하는 셈이었다.
두어 해를 그렇게 보내고는, 어찌 되었든 다시 고리배미로 돌아온 그네에게 나은 것은 '비월'이라는 이름과 검푸른 적송 숲의 모정에 걸린 숭풍정의 현판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돌아온 그네를 보고 수군거리면서 그냥 부르기 쉽게 비오리, 비오리 하고 불렀다.
"비오리가 왜 못 살고 왔당가?"
"그 속이야 누가 알어? 팔짜겄지."
"술에미 딸이라고 첩으로도 안 쳐 주었으까?"
"모르고 데리갔간디? 첨부텀."
"아니, 무신 흉악헌 소문도 있기는 있등만."
"흉악이라니?"
"아이고, 내 입으로 욍기든 못허겄어."
사람들 귀가 쫑긋 일어섰다. 고리배미로 돌아온 비오리는 한동안 덧문을 깊이 닫고 그림자 얼씬도 하지 않은 채, 죽은 듯이 지냈다.
"무던히 울었드라대."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내외간의 정이란 것이 열 살 줄에는 몰라서 살고, 스물 줄에는 좋아서 살고 서른 줄에는 정신없이 살고, 마흔 줄에는 못 버려 살고, 쉬흔 줄에는 서로 가여워 살고, 예순 줄에는 등 긁어 줄 사람이 필요해 산다."
고 하더라만. 첩이라 하는 것은 본디 맹랑하여 그 어디에도 들지 않는 모양인가. 홀로 무색하게 돌아온 비오리를 두고 고리배미 사람들은 샘가에서, 동네 사랑에서 모이기
만 하면 수군거렸다.
"왜 저러고 왔이까잉?"
"말도 말어. 나도 어디서 들은 소린디. 저렇게 태깔도 곱고 목청도 좋은 비오리를 마흔 넘은 중늙은이 진의원이 기양 덤썩 물어갔어니. 살진 암캐 물어간 호랭이맹이로 아 통으로 씹어 먹어도 비린내 한나 안나고, 눈에다 넣어도 아픈지 모리게 이뿌지 않겠능가? 진의원 따라간 그날부텀 진의원 물팍이 비오리 요대기
고, 진의원 품속이 비오리 베람박(바람벽)이여. 오직허먼 심지어 약을 지을 때도 보듬고 앉아서, 한 손으로는 버들가지맹이로 낭차앙헌 비오리 허리를 감고, 남은 한 손 갖고 마지못해 보도시."
"옘병을 허등게비."
"너 같으먼 앙 그러겄냐?"
"그렇기도 허겄어."
나무장수 부칠이가 하릴없이 맞장구를 치고 말자 나막신 깎아 파는 모갑이는 이야기하는 사람 앞으로 무릎을 당겨 앉으며 물었다.
"그런디 왜 더 못 살고 기양 와?"
"왜는 왜여? 진의원 마느래 땜이 그렇제."
"마느래?"
"옳제, 투기를 했등게비구나?"
"투기라도 기양 머 첩의 년 머리 끄뎅이나 조께 잡우댕기고, 세간살이 뿌수거 시끄럽게 해 놓는 정도가 아니라, 아조 제대로 했능갑서."
"어뜨케?"
"진의원이 왕진가는 날을 지달르고 있다가잉, 그 마느래 수족 같은 예편네 몇 이서 작당을 해 갖꼬는, 불문곡직 달라들어 질질질 끄집어다 비오리 꾀를 활씬 벳겨서, 터럭이라고는 다 쥐어뜯고 뽑아내 민둥이를 맹길었다대."
"어, 독헌 년들."
부칠이와 모갑이는 머리를 털었다.
"거그서 끄쳤드라먼 그래도 낫었을 것을."
"더 헌 짓이 있었어?"
"하문에다 박달방맹이를 쑤셔 박었드래."
"다들이질...허는...?"
너무나도 끔찍하고 엄청난 말이라 사람들은 더 이상 무어라 덧붙이지 못한 채 모두 얼굴이 흙빛으로 질려, 서로 눈길을 피하며 우물쭈물 하였다.
"진의원이 돌아와서 울어도 쇠용이 없고, 광생당 한약국에 있는 온갖 약재를 다 써서 고쳐 볼라고 해도 이미 될 일이 아니였드라대. 아 저 중국으로끄장 사람을 보내서 약재를 구해다 써 봤당만그리여. 옆에서 본 사램이, 진의원 정성이 하도 가련해서, 하늘이 다 무심하다 싶드랑만..."
동네 사랑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샘가에 모여 앉은 아낙들은 또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비오리가 못 쓰게 된 것까지는 같은 내용이었으나, 그렇게 누더기로 만든 사람이, 진의원의 '마느래'가 아니라 바로 비오리를 소실로 데려간 진의원 자신이
었던 것이다.
"아니 암만 질같(길가)에 꽃이라도 맘에 있어 꺾었으먼 애지중지 허든 못헐망정 그 지경으로 모질게 짓뭉개서 사람 구실도 못허게 맨든당 거이 말이나 되야? 허이구, 참. 세상에나 제대로 앉을 수도 없능갑드라고."
배추거리를 다듬던 아낙이 퍼르르 성질을 돋우었다.
"샛서방을 봤능갑대."
"잉? 비오리가?"
"진의원이 분을 못 참고 기양, 연놈을 잡어 족치다가 미친디끼 비오리한테 달라들어 쥑일라고 작정을 험서, 못 헐 짓 없이 맹글어 부렀능갑등만. 그때 비오리 안 죽은 거이 천행이라든디?"
"암만 그렇다고 소위 의원이람서 사람의 낯가죽을 쓰고 그럴 수가 있어?"
"아이고매. 찢어 쥑인대도 헐 말 없지 머. 일부종산디."
"첩도 일부종사 해양가?"
"아, 첩은 머 벨 거이여? 여자로 났으먼 헐 수 없능 거이제."
"어이. 수악허다. 참말로."
아낙들은 쌀을 씻고, 배추거리를 다듬으며, 물을 긷는, 저 할 일을 다 마친 뒤에도 샘가에서 일어설 줄을 몰랐다. 그러나 어느 하루는 떡장수 곤지어미가 새 말을 물어 왔다.
"이런 경천동지를 헐 일이 있능가이? 아이고머니나, 그, 비오리 샛서방이 긍게 진의원 아들이었드라네. 진의원이 벌쎄 마흔 넘었잉게로 그 아들도 한 스무나뭇 이짝 저짝 안되ㅇ겄다고? 이런 말 욍기는 내 입이 더렁가?"
그 자리에 있던 방물장수 서운이네는 곤지어미 말에 고개를 갸웃하였다.
"진의원으 아들이라먼 나도 본 일이 있는디?"
"어뜨케 생겠등고? 말 딛기로는 즈그 아배를 탁에서(닮아서), 매꼼허고 내노라 허는 할량이라든디. 놀 찌 알고."
"나도 머 방물 짊어지고 그 집이 갔다가 실쩍 지내감서 봐 갖꼬잉. 잘은 모르겄는디, 기양 시악씨맹이로 뵈이등만, 얌전허게."
"얌전헌 강아지 부뚜막에 올라앉은단 말, 듣도 못 했능가?"
한량이 되었든 숙매이 되었든, 진의원의 아들이 제 아비의 첩과 농탕치게 어우러졌다는 말은 고리배미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만고에 한량인 진의원 아들이 색태 자르르한 비오리를 보고 그만 앞뒤 분별을 잃었다는 말도 있고, 젊은 비오리가 매일 늙은이처럼 소리선생이나 데려다 주는 진의원한테 별 마음이 없이 시들어가던 중, 어처구니없게도 아들한테 반하여 사생결단 목을 매고 그를 홀렸다는 말도 있었느나, 누가 직접 본 일이 없으니, 진위를 어찌 알리. 그러나 이미 그 이야기는 맹렬하게 불이 붙어 걷잡을 수 없도록 온 마을 고샅 고샅 번져 나갔다. 전에 비오리가 진의원의 마누라에게 도륙을 당하다시피 했다, 하는 말이 돌 때
"나도 님의 마느래지만 본마느래 권세가 그렇게 대단헌 거잉가. 첩도 사램인디, 어뜨케 차마 그 지경을 맨들 수 있당가."
하고 편역을 들었던 아낙도, 이번에는 한 마디로 잘라서
"참, 상종 못 헐 개상년이로그만."
해 버렸으며. 거꾸로 비오리가 샛서방을 보아 진의원이 물고를 낸 것이라는 말이 돌았을 때 역시
"사람이 지 분수를 알아야제, 암만 돈이 많다고 나이 생각도 안허고, 젊으나 젊은 첩을, 자식보다 에린 것을 데꼬 살라고 욕심 내다가 낭패를 본 거이제 머. 아 호강도 좋지만 새파랗게 젊은 년이, 어디 먹고 입는 호강만 갖꼬 살 수 있간디?"
하면서 은근이 두둔해 주었던 사람도 이버 소문에 대해서만큼은
"더러운 년."
이라고 거두절미 단호히 매도하였다.
"추접시러서 어디 고리배미 산다고 말 허겄능가?"
"이래 놓으니, 양반들이 민촌것 민촌것 험서나 우리를 하시하고, 사람 취급도 않는 거이라고."
"헐 말 없지 머."
"개 뒤야지 한 가지로, 에민지 애빈지 구분도 못허고 그저 아무케나 들러붙어서, 인륜도 없고, 도리도 없고, 못 헐 짓이 없응게."
아무리 술파는 계집이라지만, 한 동네에 머리 두고 같이 사는 것이 창피하다고, 아낙들은 솔밭 삼거리 주막집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으며, 남정네들도 발길을 끊었다. 동네의 풍속을 더럽힌 년의 집인탓이었다.
"그 주막 술은 구역질이 나고 던지러서 못 먹겄다."
그런데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고리배미 토박이로 이 마을에서 남부럽지 않게 농사를 많이 지으며 어른 행세로 자못 위세를 떨치고 있던 엄병곤이, 이 소문을 듣고는 노발대발하며
"진상을 가려서,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본때를 보여 조리를 돌리라."
고 했던 것이다. 지금껏 웅성웅성 뒷소리만 하고 있던 사람들은 삽시간에 벌떼처럼 일어나 금방이라도 주막집으로 쳐들어갈 것처럼 사납게 흥분했다. 그러나 결국은 그리하지 못하였다.
부칠이와 모갑이를 비롯하여 떡장수 곤지어미와 방물장수 서운이네, 그리고 비오리를 진의원에게 중매했던 서운이 할미 등 몇 사람이 우선 작당을 하여 선발대로 노기등등 몰려가자, 뜻밖에도, 반항할 줄 알았던 비오리가 선뜻 덧문을 열어젖히며 방으로 들어오라 하였다. 그리고는 술상을 내왔다.
"내가 신세 처량하게 소박을 맞고 왔더니, 입에 못 담을 소문들이 제멋대로 돌았능갑습디다잉. 태생이 비천헝게 누가 지내가다 매급시 한대 쥐어박어도 말 못 허고, 아닌 말로 때려도 변명 못허고... 사램이 어디 독(돌)으로 쳐야만 아픈 거잉가요. 말로 치먼 멍이 더 깊제. 주먹으로 한 대 맞은 멍은 날짜 가먼 풀리지
만, 말로 맞은 자리는 죽을 때 끄장 풀리덜 않고 원한이 되능 거 아닝교? 내가 고리배미로 돌아온 그날부텀 알게 모르게 떠돌던 말, 그게 다 헛소문이요. 나는 날마동 그 말매를 맞고 살었소. 이 멍을 다 어쩌실라요? 안 그래도 서러운 인생, 죽기 전에 풀어 주실라요? 예?"
허기 쉬운 넘으 말이라고 그렇게 막 허능 거 아니그만요잉.
비오리가 하도 찬찬하게 변설을 하매. 우우하니 몰려갔던 사람들이 도리어 무 색하게 공연히 방바닥만 문대여 만지작만지작 하는데, 서운이 할미가 중매 선 연고로, 남들 앞에서 비오리를 씻어 주려고 짐짓 물었다.
"아니 땐 귀뚝에 연기 나라는 속담도 있지마는, 왜 무단히 그런 숭악헌 소문이 다 갖꼬 생사람을 잡는당가. 참말로 그런 일이 없었어?"
"없당게요."
비오리는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서운이 할미 얼굴에 이윽고 미심쩍으나마 안도의 빛이 번지는데, 곁에서, 나이 그 중 많은 부칠이가 머뭇머뭇 무슨 말을 얼른 꺼내지 못해 움찔거린다.
"그런디 말여, 자네는 그렇게 확실히 월백 같고 설백 같지만, 동네에는 또 동네법이 있잉게로. 풍행이 난잡헌 것 아니란 징명을 헐라먼, 저 그 동엄에 어른한테로 조께 같이 가야겄는디, 어쩌까잉. 거그가서 자네가 직접 발명을 해 보소. 시방 자네 오기를 지달르고 지실 거잉만."
그러자 비오리가 하얀 이를 싸악 드러내고 웃었다.
갑작스러운 그 웃음에 등골이 쭈뼛해지며 놀란 것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동엄 어른네 마당으로 가능 것은 에럽잖으나, 징명은 에럽겄소잉? 버얼 건 대낮에 사람들 다 둘러선 마당에서 멍석을 깔어 놓고 머엇을 어뜨케 징명을 허까요? 암만 해도 그 징명을 헐라먼 동엄 어른보톰 하나씩 번을 갈라 나를 봐 얄 거잉게 요리 오시얄랑갑소. 이번 일은 내가 절단난 것 아니랑 것만 아시먼,
다른 말은 다 뜬소문인 것도 자연히 알게 되실 것 아닝가요?"
하도 막 대고 하는 말이라 듣는 쪽이 오히려 민망해진 사람들이 서로 면구스러운 눈치만 보는데, 비오리는 썩 한 무릎을 내앉으며 팔을 쑥 내밀더니 모갑이 손을 나꾸어 잡는 시늉을 했다.
"누구, 아재가 몬야 징명을 해 보실라요?"
모갑이가 악연하여, 잡히지도 않은 손을 뿌리친다.
"이 사램이 시방 누구 망신을 줄라고 작정을 했능가?"
얼굴은 물론 목덜미 손등까지 벌겋게 물드는 모갑이를 보고, 눈시울에 핏기가 오른 비오리는
"이판사판, 나도 죽냐 사냐요."
하더니만 고개를 숙이고 투두두둑, 눈물을 떨구었다.
"동엄 어른도 징명을 헐라먼 이리 오시라고 허시요. 내가 해 디리께."
그 말을 던지면서 비오리는 훌떡 일어나 술청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구슬픈 목소리로 천역덕스럽게 흥타령 한 대목을 길게 토해 냈다.
월명사창에 슬피 우는 저 두견아
네가 울랴거든 창전에 가 울지
세상을 잊고 사자는데
앞에 와 슬피 울어
남의 심사를 산란하게 하느냐아
아이고 대고오 어허어어
성화가아 났네에 흐으으응
그날로부터 비오리는 술청에 나앉았다.
사람이 보이니 소문도 조금씩 누구러져 누가 더 이상 비오리한테 무슨 말을 캐묻지는 않았다.
비오리는 손님이 뜸하고 호젓한 날이면 모정에 혼자 나와 앉아 구슬프고 서러운 목으로 흥타령을 하였다.
적송의 붉은 몸뚱이를 부여 안은 소리는 한 굽이를 휘돌아 감으면서 푸른 머리 솟구친 공중으로 소리의 머리를 풀며 처창하게 올라갔다. 그리고, 그 소리는 마을 쪽으로 파고들어갔다.
"우리 동네 황진이 났네 그려."
"황진이는 무신 황진이. 비오리는 기양 풋소리 해 보는 거인디."
"아, 죽은 황진이 엇다 쓸랑가? 산 비오리가 낫제."
"비오리가 황진이 될라먼 말여, 저 호성암으 중 한 놈 호레야제잉."
"지적선사만헌 주이 있어야 호리제."
"앗다. 구색한 갖추먼 되ㅇ제. 멀 그리 까락까락 따져, 따지기를."
"긍케, 도 따는 사람들이 따으라는 도는 안 따고 떡만 달어 먹어서 저렇게 젤이 멩색도 없이 없어졌이까? 시방은 머 페사 다 되다시피 해버리지 않이여."
"거 빈 말은 아니네."
"오직허먼 호성안 중 떡 달디끼 헌다는 말이 다 속댐이 되었이까."
"아이고, 그 이얘기는 언지 들어도 재밌등만, 호성암이 그게 상댕이 큰 절이였 능갑드라고. 중들이 한 삼십 명씩 뫼아서 수도를 허는디, 해마동 오얼 단옷날이 되먼 떡을 맨들어서 잔치를 허는 전통이 있었드리야, 거창허게 떡을 해 갖꼬는 몬첨 불전에다 불공을 올리고는 어뜨케 되겄어? 부처님이 그 떡을 참말로 야몽
야몽 잡숫겄어? 결국은 중들 차지제잉. 근디 이 시님들이 욕심이 많아서 서로 한 볼테기라도 더 먹을라고 쌤이 난단 말이여. 수선시럽고. 그런디다가, 낮에 떡을 나누먼 불공 디리로 온 신도들한테도 다 나눠 줘얄 거 아니여? 글 안해도 아까워 죽겄는디. 그래 생각다가, 낮에는 아닌 데끼 점잖허게 그대로 놔 뒀다가, 해가 떨어지고 한밤중이 되먼 신도들이 다 간 뒤에 기양 막 뎀베들어서 서로 먹
을라고 헌단 말이여? 젊은 중들은 더군다나 한 입이라도 더 먹을라고 야단법섹 이여. 그래서 씰 거잉가? 그래 서로, 누구든지 공평허게 떡을 먹을라먼 어치게 헐 거이냐, 존 방안이 없겄능가, 궁리를 했드라네이."
"그래서 저울로 달어 먹기로 했그만."
"그렁게. 저울로 달어서 나누먼 머 털끄터리만치도 틀림이 없잉게. 그러기로 헌 담에는, 오월 단옷날 한밤중에 넘들은 다 자는디, 호성암 중들이 촛불을 써 놓고 두세두세 둘러앉어서 저울로 떡을 달고 있드라네. 도 ㄸ는 시님들이 허는 짓인디 얼매나 우숩겄어? 첨에는 그런 말이 배깥으로 안 나가고 비밀이 지켜진
뫼양이지만,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고, 소문이 한 입 건네 두 입을 지내갔네. 그리 갖꼬는 왁짜허니 나 버렀지."
"아 긍게, 저 노적봉 밑이 매안서는, 농사철에 비가 안 오먼, 산 밑잉게 물이 귀허잖이여. 서로 논에 물 댈라고 물쌤이 안 나겄능가. 서로 자개 논에 물 댈라고 넘으 논으로 들으가는 수통을 막고, 밤을 새워 지키고 그런단 말이여. 그러다가 니 물이니, 내 물이니 쌤이 나. 그럼서니 논에 물이 얼만큼, 내 논에 물이 얼
만큼 있다고 서로 재 보고 비겨보고 양보를 해라 마라, 그렇게 시끄럴 때, 옆으서 점잖게 한 마디 헌당만, 거 호성암 중 떡 달디끼 허능가?"
"왜 여그서도. 고리배미 나가시 걷을 때나 먼 일이 있어서 추렴헐 때 안 그런다고? 으레 욕심이 과헌 사람 나오고, 남달리 인색헌 사람도 나오고, 그러먼 한 마디 허제."
"호성암 중들 저울에 떡 달디끼 헐 수는 없느니이."
뒷목을 꾸욱 누르면서 사또 목소리 시늉을 하는 바람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한바탕 웃고 말았다. 어쩌면 은연중, 그 욕심 과한 사람과 인색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웃으면서 둘러앉아 하고, 재미나게 어울리던 시절도 옛날인 것만 같다.
둥그렇게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고리봉도 고리봉이지만, 이상하게 마을의 지형도 마치 초승달 두 조각을 동쪽과 서쪽에 맞물려 놓은 것 같은 모양이어서, 어찌 보면 동그란 보름달의 속을 도려낸 것도 같고, 아니면 가락지 같기도 한데, 누구는 그보다는 말발굽 같은 모양이라고 하는 이 고리배미의 각성바지들은, 고달픈 생업에 자신의 무겁고 헐벗은 세상을 의탁하며 오늘 하루, 내일 하루를 그런대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참혹하게 고달픈 것은, 동척의 농사를 맡아 짓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웬일인지, 자신이 농사를 짓고 있는 농사꾼이라는 생각보다는, 꼭 무슨 하루살이 농사 품팔이 같다는 생각이 들어 참혹한 중에도 불안이 가실 날이 없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어중"
이라고 인쇄되어 있는 종이에, 지문도 없이 닳아져 버린 엄지손가락을 눌러 인주 범벅이 되고 만 계약서 한 장. 이것은 참으로 낯선 문서였다. 지금까지 작인들은, 소작을 부치거나 뭇갈림을 할 때, 무슨 문서를 쓰고, 계약
을 하고, 지어 먹는 기간을 정하고 해 본 일이 없었다.
"네가 짓도록 해라."
고 말하면 그것으로 되었고, 한번 부치게 된 땅은, 웬만한 변동이 없는 한 짓던 사람이 그대로 짓는 것이며, 아무리 자주라 하여도 작인의 기득권을 가벼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를 물려 어느 한 집의 논을 부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동척은 달랐다. 연, 월, 일을 정한 기간 동안만
계약을 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그 규정이 까다로운데다가 소작료 또한 엄청나서 일년 내내 뼈가 빠지게 일을 하고, 가을이면 추수를 다한 다음에도 빈껍데기만 남게 되고 말았다.
소작계약서
귀사 소유의 이면 기재의 토지를 금반 본인이 경작의 목적으로 소작하도록 승인하여 주심에 대하여 하기 조항을 확약함.
1. 소작계약의 기간은 소화 년 월 일로부터 소화 년 월 일까지로 함.
으로 시작되는 이 계약서에 깨알같이 박힌 조항들은 글자를 모르고 고리배미 농사꾼에게는 당치도 않았다. 그러나 읽을 수 없다고 해서 몰라도 되는 것이 아니었다.
27. 본 계약에 관한 소송은 귀사 이리 지점의 소재지를 관할하는 재판소를 관할 재판소로 함.
에 살벌하게 적힌 것처럼 아차 잘못하면 재판소로 끌려 갈 판이어서, 동척 농사 맡은 사람들은 늘 전전긍긍, 가슴이나 손바닥에 예리한 칼날을 품고 사는 것같이 아슬아슬하였다.
거기에는, 본인 스스로 경작하는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써, 소작지 및 소작지에 관계되는 경계, 도로, 수로, 휴반(밭도둑), 물꼬 등 경작에 필요한 것은 본인의 비용으로 관리 수선하겠다는 약조로부터, 귀사의 허가 없이는 소작지의 경계, 지형 또는 토지의 주된 사용 목적이나 성질 등에 따라 전, 답, 과수원, 임야 등
으로 토지의 종류를 표시한 지목을 임의로 변경하지 않음은 물론, 가옥의 건축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