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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길림시 동단산 출토 금동면구 (금동가면)
2~3세기 부여의 유물로 추정된다.
① 동명(東明) : 활동연대 미상
동명은 중국의 기록에서 부여의 시조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에 따르면 북이(北夷) 탁리국(橐離國) 왕의 시비(侍婢)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달걀크기 만한 기운에 감응하여 아기를 잉태하였다. 이후 시비가 아들을 낳자, 탁리국왕은 그 아이를 죽이려고 돼지우리와 마굿간에 버려두었으나 그때마다 돼지와 말들이 입김을 불며 아이를 보호하였다. 결국 탁리국왕은 그 아이를 하늘의 아들이라 여겨 그 어머니에게 돌려보내 기르게 하였으니,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으며, 그로 하여금 소와 말을 기르게 하였다. (『논형』 길험편)
동명이 활을 잘 쏘자, 탁리국왕은 그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동명이 남쪽으로 달아나 엄호수(掩淲水)에 이르렀는데, 그가 활로 강의 수면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널 수 있게 해주었다. 이윽고 물고기와 자라들이 흩어지는 바람에 동명을 추격해오던 병사들은 강을 건너지 못했다. 이로 인하여 동명은 도읍을 정하고 부여(夫餘)의 왕이 되었다. (『논어』 길험편)
동명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나, 그 내용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는 편이다. 예컨데 어떤 기록에서는 동명이 고리(高離)라는 나라에서 나와 시엄수(施掩水)를 건너 부여의 왕이 되었다고 하였고,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 인용 『위략』) 또 어떤 기록에서는 동명이 색리국(索離國)에서 나와 엄사수(掩㴲水)를 건너 부여의 왕이 되었다고도 하였다.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 동명이 자신이 살던 나라에서 달아나 남하해서 나라를 세웠다는 동명설화는 훗날 고구려와 백제의 시조 인식관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여겨지며, 특히 고구려의 주몽설화는 동명설화를 벤치마킹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내용이 흡사하다.
부여의 노인들은 스스로를 "옛날에 망명해온 사람들(古之亡人)"이라 칭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 이는 부여의 시조인 동명이 북쪽의 탁리국에서 도망쳐와 남쪽에서 부여를 건국한 일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부여왕이 사용하는 인장에는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부여에 예성(濊城)이라 불리는 고성(古城)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부여는 본래 예맥(濊貊)의 땅이라 하였으니,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 이는 동명이 탁리국에서 남하하여 예족의 땅에 부여를 건국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동명이 출자했다는 탁리국의 위치는 제1송화강과 눈강이 만나는 송눈평원으로 추측되는데, 그 일대에 분포한 백금보-한서 문화 또한 탁리국의 고고학적 흔적으로 추측된다. 그보다 더 남쪽인 제2송화강 일대의 서단산 문화에서는 기원전 3세기에 이르러 기존의 돌널무덤이 움무덤으로 변모하는 등 새로운 세력 집단의 등장을 암시하는 고고학적 흔적이 발견된다. 송호정은 돌널무덤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서단산 문화를 부여의 선주민 집단인 예족의 문화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에 출현하기 시작한 움무덤 문화를 부여 세력의 문화로 파악하여 이를 동명 세력이 탁리국에서 남하하여 예족의 땅에서 부여를 세웠다는 『논형』의 기록과 결부시켜 해석하였다. 이후 기원전 2세기 초반에 길림 일대를 중심으로 한나라 대 부여의 고고학적 흔적으로 생각되는 포자연 문화가 발견되기 시작한다.
한편 서기 3세기까지의 부여의 중심지는 서단산 문화 이래로 부여의 문화와 한대(漢代) 문화의 요소가 많이 발견되고 있는 제2송화강 유역 길림시의 용담산(龍潭山) · 동단산(東團山) 일대로 비정된다. 특히 동단산 일대에서 발견된 남성자(南城子) 성지는 당시 부여의 궁성으로 추측되는 유력한 유적지이다.
부여(夫餘)라는 명칭이 중국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확인되는 사례는 『사기』 화식열전에서 "무릇 연(燕)은 발(勃, 발해) · 갈(碣, 갈석)의 사이에 있는 도회(都會)이다. (중략) 북으로 오환(烏桓) · 부여(夫餘)와 이웃한다"라고 한 것이다. (『사기』 화식열전) 이를 통해 보건데 부여는 최소한 진(秦)·한(漢)시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3~2세기 무렵에는 존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부여에 대한 기록은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한나라 대에 이르러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한편 부여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지만, 그 중 유력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바로 지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이다. 예컨데, 부여와 마찬가지로 북방에 존재하던 족속이었던 선비나 오환의 경우에는 그 명칭이 그들이 본래 거주하던 선비산 · 오환산이라는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부여의 경우에는 본래 그 거처가 녹산(鹿山)이라 하였다. (『자치통감』 진기19 효종목황제 上之上) 그런데 녹(鹿=사슴)을 퉁구스어로는 '부위(buyu)'라 하며,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바로 "부여"라는 것이다. 부여는 『사기』와 『삼국지』·『후한서』·『진서』 동이전 등을 비롯한 중국 측의 기록에서는 대체로 부여(夫餘)라고 표기되나, 한국 측의 기록과 『삼국지』·『진서』 의 본문 및『자치통감』 등에는 주로 부여(扶餘)라 표기된다.
② 부여왕 : 1세기 경 재위
이름을 알 수 없다. 건무 25년(49)에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고 이후로도 사신을 보내 해마다 통교하였다.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
③ 부여왕 : 2세기 경 재위
이름을 알 수 없다. 천관우의 경우처럼 간혹 그의 이름을 시(始)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공감하기 어렵다고 본다. 영초 5년(111)에 부여왕이 보기 7~8천명을 거느리고 낙랑을 노략질했다가 후에 다시 한나라에 귀부하였다.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 이 사건을 다른 기록에서는 부여가 단순히 "새(塞, 변경)를 침입했다"(夫餘夷犯塞殺復吏)고도 서술하였다. (『후한서』 안제본기) 당시 고구려의 북쪽에 위치한 부여가 고구려 남쪽에 위치한 낙랑군을 공격하기는 어렵다는 점 때문에 이를 현도의 오기로 보는 견해도 있고, 혹은 이도학의 경우처럼 이 시기에 낙랑군이 이전에 평양에서 요동 지역으로 옮겨갔다고 보기도 하지만 이를 따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후 영녕 원년(120)에 부여왕이 아들[嗣子]인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궁궐에 이르러 조공해왔으며, 이에 한나라 안제가 인수(印綬)와 금채(金綵)를 주었다.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 건강 원년 (121) 가을에 고구려왕 궁(宮, 태조왕)이 수천 기의 병력을 이끌고 현도군을 공격해오자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로 하여금 2만에 달하는 병력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지원하도록 하였으며 5백 명의 목을 베었다. (『후한서』 동이전 고구려조)
영화 원년(136)에는 부여왕이 한나라의 경사(京師)에 와서 조알해왔으며, 이에 한나라 순제가 황문고취(黃門鼓吹)와 각저희(角抵戲)로써 그를 대접하였다. 이후 연희 4년(161)에 사신을 보내 한나라 조정에 조공해왔다.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 여기서 보이는 부여의 왕이 위구태의 아버지인지, 혹은 위구태나 그의 후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④ 부태(夫台) : 2세기 경 재위
앞서 등장했던 부여왕 혹은 그의 아들인 위구태의 자손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영강 원년(167)에 부여왕 부태가 2만의 병력을 이끌고 현도를 노략질하자 현도태수 공손역(公孫域)이 이를 격파하여 1천명의 목을 베었다.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 희평 3년(174)에 이르러 부여가 다시 한나라에 글을 올리며 조공하였다.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
하북성 만성현의 중산정왕 유승묘에서 출토된 금루옥의(즉 옥갑)
부여의 왕들은 중국 한나라와 친분관계를 맺으며 옥갑을 가져다 왕의 장례에 사용했다.
⑤ 위구태(尉仇台) : 2~3세기 경 재위
앞서 등장했던 부여왕의 아들 위구태와는 동명이인으로 생각된다. 『삼국지』에서는 요동에서 군벌인 공손탁(公孫度)이 세력을 일으키자(189) 부여왕 위구태가 요동에 옮겨 속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 이를 『후한서』에서는 부여가 본래 현도에 속했다가 한나라 헌제(189~220) 때에 요동에 옮겨 속했다고 표현하였다.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
당시에 이르러 고구려와 선비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졌고, 부여는 그 사이에 끼어있는 형국이었다. 공손탁은 이를 알고는 고구려와 선비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종녀(宗女)를 부여에 시집보냈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 이를 위구태가 현도군 대신에 요동군과의 관계를 강화한 것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위구태는 요동 일대의 군벌로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공손씨 정권과 손을 잡고 점차 강성해지는 고구려와 선비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비슷한 시기인 황초 연간(220~226)에 본래 한나라 때 이후로 부여에 신속하였던 읍루(挹婁)가 과중한 조세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부여가 읍루를 수차례 토벌하였는데, 비록 읍루의 인구는 적었으나 지형이 산험했을 뿐 아니라 그 인국(隣國) 사람들이 읍루인들의 활과 화살을 두려워한 탓에 능히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
이처럼 여러 악재가 겹치고 있기는 하였으나, 『삼국지』가 편찬된 3세기 경까지만 하더라도 부여는 여전히 강국으로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는 이른바 동이(東夷) 지역에서도 가장 평창(平敞)하면서도 오곡(五穀)이 잘 자라는 평원 지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고구려는 그 인구가 3만호였으나, 부여는 8만호에 달하였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 그 경제력과 인구는 상당한 편이었고, 『위략』에서는 부여에 대하여 "그 나라는 매우 부유하며 선세 이래로 파괴당해 본 적이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 인용 『위략』)
부여는 중국과도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본래 부여는 그 왕이 죽어서 장례를 치를 때마다 현도에 부탁하여 옥갑(玉匣)을 가져다가 사용했다고 하였으며,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 『삼국지』에서도 대체로 부여인들에 대하여 "키가 크고 강하며 용맹하면서도 근엄하고 후덕하여 노략질을 하지 않는다"라 묘사하는 등 긍정적인 서술이 많은 편이다. 이는 중국인들이 요동군과 현도군 일대를 자주 공격했던 고구려인들을 흉폭하고 노략질을 좋아했다는 식으로 서술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⑥ 간위거(簡位居) : 3세기 경 재위
간위거는 위구태의 아들이다. (『태평환우기』 부여국조) 위구태가 죽은 후에 그 뒤를 이어 부여의 왕이 되었다. 같은 기록에서는 그의 이름을 위거(位居)라고도 표기하였으며, 그가 죽자 아들인 마여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
⑦ 마여(麻餘) : 3세기 경 재위
마여는 간위거의 아들이다. 간위거에게는 적자가 없었고, 얼자인 마여만이 있었는데, 위거가 죽자 여러 가(加)들이 함께 마여를 왕으로 세웠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
이 때에 우가(牛加)의 형(兄)의 아들의 이름도 선왕인 간위거와 비슷한 위거(位居)였는데, 대사(大使)가 되어서는 재물을 잘 베풀어 국인(國人)들이 그를 따랐으며, 해마다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경도에 이르러 조공하였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 정시 연간(240~248)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하러 왔다가 현도태수 왕기를 부여에 보내자, (242) 위거가 대가(大加)를 보내 성 밖으로 나가 마중하며 군량을 보태주었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 이후 계부(季父)인 우가(牛加)가 두 마음을 품자, 위거가 작은 아버지와 그 두 아들을 죽이고 그 재물을 적몰하였으며, 사자를 보내 부렴(簿斂, 재산목록)을 관(官)에 보내어 보고하도록 하였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
마여가 왕이 되었을 당시에 활동했다는 위거는 비록 왕족이 아닌 제가(諸加) 출신의 인물이었으나, 그 직위가 대사에 이르러 국인들에게 재물을 베풀어 환심을 사기도 했고, 혹은 대가를 보내 왕기를 맞이하는 등 외교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또한 아마도 나라에 반역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숙부인 우가(牛加)를 제거하고 그 재산을 적몰하는 등 사실상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 처럼 묘사된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 따르면, 대사(大使)는 부여의 관등 중에서도 아마도 대가(大加)의 호칭으로 생각되는 마가(馬加) · 우가(牛加) · 저가(猪加) · 구가(狗加) 등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지위였다. 그는 대사의 지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우가(牛加)의 조카인만큼 유력한 대가(大加) 층에 속하는 인물로서 강력한 권한을 휘둘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박대재는 "현도태수 왕기를 파견하여 부여에 이르자 (부여의) 왕인 위거가 대가를 보내 맞이하였다"(遣玄菟太守王頎詣 夫餘王位居遣大加郊迎)는 또다른 기록(『태평어람』 인용 『위지』)을 근거로 하여 위거가 재산을 뿌려 국인의 환심을 얻어낸 후, 간위거의 얼자로서 귀족들에게 옹립되어 기반이 약했던 마여를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후에 다시 마여가 왕위에 올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아직 가설에 그치고 있지만 꽤 흥미로운 일면이 있다.
⑧ 의려(依慮) : ?~285 재위
의려는 마여의 아들로, 마여가 죽자 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 의려가 재위에 있던 시절에 모용선비의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부여의 국세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강 6년(285)에 모용선비의 군주인 모용외가 부여를 공격하여 격파하자 의려는 자살하고 말았으며, 그 자제(子弟)들은 옥저(沃沮)로 달아났다. 이에 중국 서진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동이교위 선우영(鮮于嬰)을 파면하고 그 대신에 하감(何龕)을 동이교위로 삼았다. (『진서』 동이전 부여조)
당시에 부여가 입은 피해는 막대했다. 부여를 침공한 17세의 소년군주 모용외는 부여의 국성(國城, 수도)을 멸하였을 뿐 아니라, 1만명에 달하는 인구를 포로로 잡아서 돌아갔다. (『진서』 모용외재기) 모용외가 부여를 공격한 것에는 서진에 조공을 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부여를 미리 공각함으로써 주변의 위협을 제거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모용부는 한창 세력을 확장하면서 서진과 종종 충돌을 빚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부여인들을 약탈하여 얻는 경제적인 수익은 덤이었을 것이다.
⑨ 의라(依羅) : 286~? 재위
의라는 의려의 아들이다. (『자치통감』 진기3 세조무황제) 모용선비의 군주인 모용외가 부여를 침략하고 의려가 자살한 후, 이듬해(286)에 부여의 후왕(後王) 의라가 사람들을 거느리고 돌아와 옛 나라를 회복할 뜻을 밝히며 서진의 동이교위 하감에게 도움을 청하자, 이에 하감이 독우 가침(賈沈)을 보내 부여인들을 돕도록 하였다. (『진서』 동이전 부여조) 그러자 모용외 또한 장수 손정(孫丁)을 보내 기병을 거느리고 길을 막도록 하였으나 결국 손정은 패하여 죽었고, 이로써 부여는 다시 회복되었다. (『자치통감』 진기3 세조무황제)
이후로도 모용외가 부여의 종인(種人)들을 노략질하고는 중국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넘기는 일이 있었는데, 이에 서진 조정에서는 팔려온 부여인들을 관청의 재물로 사들여서 돌려보내는 한편, 사주(司州)와 기주(冀州) 일대에 부여인들에 대한 거래를 금하는 등의 조취를 취했다. (『진서』 동이전 부여조)
⑩ 현(玄) : ?~346 재위
346년에 이르러 전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끌려간 왕이다. 의라와의 관계가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부여는 비록 모용선비의 침략을 버텨내기는 하였으나, 말기에 이르러 크게 쇠락하여, 본래 녹산(鹿山)에 거점을 두었으나 백제(百濟)의 침입을 받아 부락이 쇠산해져서 전연[燕] 가까이 서쪽으로 거점을 옮겨야 했을 정도였다. (『자치통감』 진기19 효종목황제 上之上)
앞서 언급하였듯이, 부여의 본래 중심지인 녹산(鹿山)은 제 2송화강 유역에 위치한 길림시 일대의 용담산(龍潭山) · 동단산(東團山) 일대로 비정된다. 특히 동단산의 남성자 성지는 부여의 궁성일 것으로 거의 확실시되는 유력한 유적지이다. 그렇다면 부여가 3세기 이후로 백제의 침입을 받아 "연 가까이 서쪽으로" 옮겼다는 곳은 어디일지 의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길림시의 서쪽의 이통하(伊通河) 유역에 위치한 농안(農安)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통설에 가깝지만, 농안 지역에서 후기 부여의 중심지의 흔적은 아직 제대로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영화 2년(346), 모용외의 아들이자 전연의 왕이었던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慕容儁)으로 하여금 모용군(慕容軍) · 모용각(慕容恪) · 모용근(慕輿根) 등 3명의 장군 및 170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부여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결국 부여는 전연의 군대에게 패하였고, 그 왕인 현(玄)과 5만여 명에 달하는 인구가 사로잡히고 말았다. 모용황은 현을 진동장군(鎭軍將軍)으로 삼았으며 자신의 딸을 처로 삼게 하였다. (『자치통감』 진기19 효종목황제 上之上) 모용황의 이와 같은 조치는 부여 지배층을 회유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병도는 이로부터 부여가 실질적으로 멸망했다고 보았으나, 송호정은 이후의 기록에도 부여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들면서 부여는 이 시점에서 멸망하지 않았으며 이후로도 그 명맥을 유지했다고 보았다.
한편 오늘날 학계에서는 부여를 침략했다는 "백제"에 대하여, 실상은 고구려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혹은 백돌말갈을 잘못 기록했다는 견해도 있다.) 과거에는 이를 백제가 바다를 건너 요서로 진출했다는 설과 연결짓기도 하였으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대부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백제가 요서 일대를 점유했다는 설은 고고학적으로나 문헌학적으로나 근거가 미약하기 때문이다. 설령 백제가 당시에 요서 지역에 진출했더라도, 요서 지역으로부터 당시 부여의 거점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농안 일대까지는 그 거리가 제법 멀 뿐 아니라 요서 지역을 차지하여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모용선비(전연)의 존재를 생각해 볼 때에 현실성이 떨어진다. 더욱이 백제가 요서를 경략했다는 기록(『송서』 백제전 등)에서는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를 차지했다고 하였는데, 고구려가 요동 일대를 온전히 장악하여 영역화한 것은 광개토왕 때(391~413)에 이르러서야 가능했으므로 그 시기도 일치하지 않는다.
이에 관련된 독특한 주장으로는 이도학의 견해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부여를 공격한 백제를 고구려의 오기로 보는 견해를 비판하면서 당시 만주 일대에 "백제"라는 이름을 지닌 별도의 세력이 있었으며 이 세력이 바로 부여를 공격한 백제의 실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 견해는 만주 일대에 위치하던 백제가 4세기 경에 한반도로 남하하여 오늘날 한강 유역에 존재하던 마한 백제국을 흡수하였다는 이른바 "정복국가론"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추측과 비약이 지나친 면이 있어 학계에서는 유력한 설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정복국가론 자체의 내용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부여를 공격한 백제라는 세력의 정체가 명확하지 않은 이상, 백제라는 이름을 지닌 별개의 세력이 만주 일대에 존재했다는 가능성은 조금은 생각해볼만한 여지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관련 기록이 매우 영세하여 그 실체를 명확히 알기 어렵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서 출토된 「모두루묘지명」
「광개토왕비문」과 「모두루묘지명」 등의 고구려 금석문에서는
5세기경 북부여 · 동부여 등의 미스테리한 자취를 희미하게나마 살펴볼 수 있다.
보론 : 이후의 부여
부여는 5세기 대에 이르러 고구려의 금석문에 등장하기 시작하는데,「모두루묘지명」에서 "북부여"가 등장하고, 「광개토왕비문」에서는 "북부여" 뿐 아니라 "동부여"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북부여는 대체로 길림시 일대에 위치했던 본래의 부여를 지칭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285년과 346년에 부여가 모용선비의 공격을 받아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면서 점차 고구려의 영향권에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두 고구려 금석문에서는 모두 북부여에 대하여 고구려 왕실의 시조인 추모성왕이 출자한 곳으로 묘사하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 보건데 고구려인들은 북부여를 시조가 태어난 신성한 땅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모두루묘지명」에서는 광개토왕~장수왕(4세기 말~5세기) 대에 "북부여수사(北夫餘守事)"를 지냈다는 모두루(牟頭婁)가 언급된다. 그에 따르면 모두루의 선조인 북부여대형(北夫餘大兄) 염모(冉牟)가 북부여 땅에 침입해온 모용선비를 무찌르는 공을 세웠으며, 모두루 또한 그 공덕을 입어 북부여수사가 되었다. 비문에 결손된 부분이 많아 그 내용의 대부분은 판독할 수 없어 정확한 시기를 추론하기는 어렵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최소한 4~5세기 즈음에 북부여가 고구려에 속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만 부여가 완전히 멸망했다기 보다는 고구려의 세력권 내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광개토왕비문」에서는 고구려 영락 20년(410)에 이르러 광개토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했다고 하였다. 광개토왕이 지휘하는 고구려의 군대는 당시 동부여의 중심지로 여겨지는 여성(餘城)에까지 이르렀는데, 비문의 내용이 훼손되어 뒤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이 시기에 동부여는 고구려에 항복하게 된 것 같다. 이후 광개토왕이 다시 돌아가려 하자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 비사마압로(卑斯麻鴨盧) · 타사루압로(椯社婁鴨盧) ·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 ▨▨▨압로(▨▨▨鴨盧) 등이 자청하여 광개토왕을 따라왔다. 이들의 이름 뒤에 붙은 "압로(鴨盧)"는 동부여의 수장층을 이르는 말로 생각된다. 이후로 동부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장은 멸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보이는 동부여의 정체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다. 노태돈의 경우에는 북부여가 곧 부여이며, 동부여는 부여의 왕인 의려가 285년에 모용외의 침공을 받아 자결하고 그 자제(子弟)가 옥저로 망명했을 적에, 부여족의 일파에 의해 옥저가 위치한 동해안-두만강 일대에 세워진 나라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자면 고구려의 입장에서 북쪽에 있었던 부여를 북부여라 칭하고, 고구려 동쪽의 옥저 지역으로 이주한 부여족의 일파를 동부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송호정 등의 연구자들은 옥저와 두만강 일대가 일찍이 고구려의 영향권에 있었다는 점과 고고학적으로 볼 때에 두만강 일대에서 딱히 부여와 관련된 유물을 찾기 어렵다는 점을 근거로 동부여가 두만강 일대에 위치한다는 종래의 설을 부정하였으며, 아마도 부여의 동쪽 지역에 예맥족의 또다른 지파가 이주하여 세력권을 형성하면서 이를 동부여라 칭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특히 송호정은 북부여 또한 부여의 입장에서 볼 때에 북쪽 지역에 있었던 탁리국으로 보기도 하였다.)
이후 『위서』에서는 457년에 우전(于闐) · 부여(扶餘) 등 10여 국이 북위에 조공해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위서』 고종기) 이후로 또다시 한동안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494년에 이르러 부여왕(扶餘王)이 고구려의 문자명왕에게 처자식과 함께 나라를 들어 바치며 항복해왔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이는 그동안 고구려의 세력권 하에서 명맥을 유지해오던 부여 세력이 완전히 멸망했다는 점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부여가 멸망한 그 근본적인 원인은 물길(勿吉)의 침략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위서』 열전 고구려조에 따르면, 고구려의 사신인 예실불(芮悉弗)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504년에 북위에 파견되었는데, 이 때에 본래 부여에서 나는 황금을 조공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부여가 물길(勿吉)에게 쫓기는 바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한편 그와는 별개로 북부여(北扶餘)의 후신을 자처하는 두막루(豆莫婁)라는 나라가 존재하고 있었다. 『위서』 열전 두막루조에서 두막루의 위치에 대해 "옛 북부여가 있던 땅"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또한 『신당서』 열전 유귀조에서는 두막루와 동일한 세력으로 보이는 달말루(達末婁)가 스스로를 "북부여의 후예"라 말하였으며, 또한 "고려가 그 나라를 멸망시키자 사람들이 나하(那河)를 건넜고 그로 인하여 그 곳에 거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박대재, 「부여의 왕권과 왕위계승 : 2~3세기를 중심으로」, 『한국사학보』 33, 2008
송호정, 『처음 읽는 부여사』, 사계절, 2015
이도학, 『백제 고대국가 연구』, 일지사, 1995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천관우, 『인물로 본 한국고대사』, 정음문화사, 1988
[출처] 중국 문헌에 보이는 부여의 왕들|작성자 원한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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