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산꾼이 때마다 가는 산찻아 신불산 만길능선 따라 신불평전 억새밭 넘어 영축산 중아능선을 또 다시 다녀왔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본능을 가지는 것이 있는지 본능도 없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천진난만한 백지상태로 태어나는지 철학자는 지금도 대립한다. 삶에서 항상 두가지 측면은 늘 존재한다. 인간은 항상 자연스러운 균형을 유지해야지 어느 한쪽으로 비중을 높이면 반대쪽에서 문제가 없기를 바랄수 없다는 것이다. 이 흥정에는 끊임없는 관심이 요구되는 것이므로 대가를 치르기 위해 일생동안 늘 고통과 안식을 가르는 짓을 하는 것이 인생의 대립인지 모른다. 그러기에 우리의 선택은 본성적인 감정은 우리에 관한 단편적 사실이상 이기에 위험하고 안전하다는 것을 다른 것으로 대치할수 있는 위치의 선택을 가질수는 없다.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버린다는 선택은 없다. 자신의 감정이란 항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쉽사리 결정하는 경우는 어려운 이유는 자신의 것이기에 가지는 애착은 그렇게 버릴수 없는 대립을 가지는 것이다. 사적이라는 것은 항상 자신의 비밀속에서 존재하는 것이기에 늘 고민을 하고 간직하는 소중한 가치를 저울질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마치 주식을 팔지 말지 기다릴지 하는 것처럼 마음의 대립은 늘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평생을 후회의 그늘로 가는 경우의 복잡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정해진 산길을 가는 산꾼들처럼 사는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대립은 인생의 크나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은 지난 감정을 대변한다.
사람은 동물적으로 보면 동물의 한종류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동물적이고 생물적으로 보는 동물학으로 인간들을 나타내는 것은 종교적이나 인류학으로 보는쪽에서는 다르다. 우리가 아는 이기심이나 이타심은 종교적으로 보면 이기심은 욕심이고 이타심은 자기성찰로 가는 길이라 한다. 그러나, 이기심을 동물학적으로 보면 유전자 보존이나 발전 에서는 도움이 되느나 같은 종의 소멸이나 발전이냐는 생존에 관한 것이 된다. 초기에 생육이 느린 인간이나 코끼리 같은 사회개체가 발달된 종은 어미나 이모같은 동급의 보호자가 이타심이나 보살핌으로 종족을 보존하지만 개미나 벌같은 종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모자라거나 부상당한 개져는 스스로 소멸의 길로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같은 생각도 어느 일부분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우린 늘 대립의 길로 간다는 것이다. 유전자 보존을 위해 이기심이 나은지 이타심이 해로운지는 동물학으로 연구하지만 철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본성으로 나타내기에 무어라 결론은 부족하고 결정하는 것은 어렵다. 연구란 계속되는 것이고 철학이란 계속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기심을 바라고 하는행동은 대부분은 모르고 한다는 것이다.
이기심을 바라지만 그것이 해로운지 나은지는 지나고 나도 모르는 경우나 자주 바뀌어 지는 것이 인간들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항상 대립하는 것은 서로가 얻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인간이 가지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구속이란 인간이 받는 가장 원초적인 갈등이다. 구속에 대하여 아는 분들은 대부분 사랑이란 이름으로 변하는 손간이 가장 문제이다. 사회가 정한 법칙이나 규칙을 위반하면 사회가 주는 사랑의 보살핌으로 주는 혜택이 구속이다. 격리 시키는 이유는 사회가 베푸는 조건을 위반하고 싫어하고 사회가 정한 선과 악의 선택중에서 악을 택하면 사회가 베푸는 사랑이란 보살핌을 구속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인간은 성숙하면 사회의 독립을 할려는 첫걸음이 타자에 대한 이타심으로 사랑이라는 선택으로 서로가 가지는 가장 높은 신이 베푸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자연이나 신이나 절대적인 것들이 행하는 것이다. 인간이 사랑을 베풀때는 신이 되는 착각에 빠진다. 새로움을 창조하고 새로움을 가지는 순간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지는 것을 느낄때 신이 되는 착각을 행하는 기분이다. 사랑을 주고 배우자를 만들고 자식을 만들고 가정이라는 것을 창조하는 순간은 신이 되는 것이다.
가정을 만드는 순간 가족을 구속이라는 테두리를 자신의 법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사랑의 탈을 쓴다. 가족 구성원은 가장의 지위에 따르고 가족법에 거부하기가 힘들다.
갈등은 가장은 사랑이고 구성원은 구속이라는 개념의 차이로 반목을 가지는 것이다. 사랑과 구속은 끝임없는 대립으로 끝이나면 이별이고
계속되면 서로는 멍에를 지는 것이다. 자연은 무어라 하지않고 바라만보면 때가 되면 이루고 지나가는 것 뿐이다. 가장 좋은 사이나 좋은 교육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만보는 것이다. 하늘은 땅에게 무어라 하지도 않는다. 땅은 하늘이 행하는 것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 뿐이다. 가장 좋은 관계는 편안함을 주는 것이다.
책을 자주 읽다보면 어느 내용이든지 이론이든지 철학이든지 모두가 비슷하고 각자의 주장도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호기심의 발동인지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인간의 특성인지 책제목과는 다른 '짐승과 인간' '메리 미즐러' 의 책과 '동물은 생각한다' 는 '리하르트 디비트 프레히트' 의 책은 동물의 사고를 인간과 비교하는 것을 희망하고 읽다가 그만두었다. 내용도 난해하고 동물은 단순하고 지루한 철학적 개념을 인용하는 어지러운 고차원 철학적 책이었다. 동물에는 두 부류가 있고, 하나는 인간이라는 동물은 이 이론을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이론때문에 고통받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구분하지만 침팬지의 같은 종인데 마치 물고기와의 차이같이 멀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지배계급이기에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생명체이고, 동물은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한다. 인간은 자기위주로 만드는 문화이기에 지구에서 먼저 태어난 종도 미개하고 자기위주의 이론으로 정리한다.
지구에서 10 만년 정도의 유지를 하는 종이 1억 5천만년이나 존재한 공룡이나 다른 종들의 진화를 운운하고 지구에 있는 동물들을 사육하고 멸종하는 짓을 마음대로 하고 산다. 어느 개체는 보호하고 어느 개체는 사육하여 이용하는 짓은 생존에 어떻게 진화하는 지는 알수없다. 지구의 존재에서 미비한 약한 인간이 영장류라는 종으로 얼마나 유지될지는 모른다. 인간들도 각자의 특성이 있듯이 개들이나 소들도 각자의 개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개나 소로 분류하는 편안함을 가지고 인간위주의 만능사고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동물들이 오래존재할지 또 다른 종이 지구를 지배할지는 알수없다. 아메바처럼 개체분리를 하는 종은 소멸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대립은 동물들도 인간을 우리가 생각하는대로 느끼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인간과 동물의 대립은 누가 만들었을까? 고대부터 인간은 잡식성이 었다. 아마 오래전에는 밀림에서 채식으로 존재하였는지 모른다. 인간과 동물은 같은 계열이고 같은 곳에서 자연과 같이 존재하였다. 동물과 대립도 없고 그냥 지나치는 동물과 동물의 존재로 유지 되었다. 인간과 같이 묻힌 동물들의 사체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서 같은 사회에서 지금과 같이 사육이 아나라 가족 이었는지 모른다. 태초에 신앙이란 우리가 즐겨하는 곰과 호랑이 신화처럼 존중과 동질성으로 모셨는지 모른다. 지금도 깊은 원시부족들은 동물이나 먹을 것에게 경외심을 가지고 감사의 표시나 제단에 모시는 일을 자주본다. 인간이 인간중심의 사고로 인간의 종교인 기독교나 지배층의 자리보존과 군림하는 문화로 육식을 하면서 점점 낙원을 잃고 살생과 제단에 동물의 사체를 바치는 인간 위주의 삶이 나타나고 부터 지옥과 전쟁과 갈등으로 정복의 사회로 발전되었다 한다. 인간들은 지구의 동물들을 하나 둘 멸종의 선택으로 다양한 종들을 소멸시킨다.
인간의 사회와 문화라는 탈을 쓰고 동물과 자연의 영역을 사라지게 하고 있다. 모든 것은 인간의 관점으로 판단하고 맹목적으로 동물이나 식물이나 무지의 개념으로 단순한 관점으로 편안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사육되는 단순한 종의 번식만 바라고 육식으로 삶을 유지하는 단순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 지구의 모든 동식물은 인간외는 존재의 영역을 사라지게 하고 있다.
기독교나 여타 종교는 인간위주의 사고와 동식물을 지배하고 다스린다는 이념으로 단순한 믿음을 복음처럼 위장하고 매도한다.
지구의 모든 것들은 소멸하면서 어떤 원소로 변하여 어떻게 윤회하고 탄생되는지는 모른다. 전생에는 나무였는지, 물고기 었는지, 소나 말이나 돼지 였는지 모르지만 조상의 유전자 형성에 어떤 도움을 주어서 자손으로 환생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간은 죽음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인간이 만든 하나의 이론이다. 또 다른 원소로 사라지고 또 다른 원소로 결합하여 태어나는 것이다. 지구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같은 원소의 일부이고 형제이다.
나만 의식이 있는 것이 아나라 지구의 모든 종들은 의시과 삶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인간은 늘 삶과 죽음의 대립에서 살아간다.
삶이나 죽음이나 아는 것이 없지만 그것들이 현실에서 존재하는 것에 가장 민감한 부분이라 어쩔수 없는 인간의 기본이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경험한 임사 체험에 대하여 이따금 지나가는 이야기료 흘러가는 소리로 치부하지만 사실은 인류의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경험의 증거가 여러가지의 과학적 연구가 한창이다. 임사체험을 한 사람의 공통점은 몸과 정신이 분리되어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이야기 한다. 이는 그 경험이 초월적이거나 영적인 체험의 본질에 대해서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임사체험을 한 의학박사들도 대다수가 그 경험이 인생을 바꾸는 긍정적인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그만큼 한 개인의 태도, 신념, 가치, 행동을 영구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경험을 한 대부분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삶에 대한 더 큰 열정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더욱 자비로워지고, 가진 것에 감사하고, 더 이상 실패에 대해 두려움이 없어 지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고 삶을 받아 들이며 건전한 위험을 감수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삶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은 그들이 삶의 기회를 더 잘 활용하며, 무언가 를 즐길 때도 거기에 과하게 집착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영성이 강화 되었다 한다. 다만 이것이 종교적으로 독실해 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 자연계, 우주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그리고 어떤 헹태로든 신성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한다. 자신이 경험한 것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신이라 부르는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빛을 이야기 한다. 이는 특정 종교의 신이 아니라 모든 것을 연결하는 자비로운 힘 이나 에너지가 아닐까 한다. 가장 흔한 비유는 그 존재가 대양의 파도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소유물, 부, 권력, 명성, 명예와 같은 물질적, 세속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 줄고, 그 결과 남에게 이타심을 베푸는 힘이 커졌다는 것이다. 지금도 의학의 연구는 계속된다. 인생이란 단절은 없다고 한다.
우주는 연결되고 모든 것은 대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도 악으로 연결되고, 삶도 죽음으로 탄생으로 연결된다. 과거는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것이다. 원인은 결과가 되고 다시 원인이 되는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반복의 연속이다. 인간의 삶이란 다른 것 같아도 본질은 늘 그대로 이다. 날마다 다르다 하지만 늘 일상은 그대로 이다. 힘이 없어면 모든 일은 항상 정글의 법칙대로 약육강식이다. 명나라 3대황제 영락제는 성군이라 하지만 조카를 죽이고 정권을 찬탈했다. 조선도 세조는 세종의 아들이지만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했다. 청나라도 마찬가지로 왕권을 찬탈하고,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 이다. 왕권은 찬탈하면 항상 대립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역적이란 가장 크나큰 삼족을 멸하고 능지처참을 당하는 조선의 법보다 중국은 더하다 못해 역적의 근거를 아예 초토화 시켜버린다. 반경 100리안의 가옥이나 동네를 없애 버린다. 항상 반역은 명분이 있어야한다. 중국의 첫번째 역성혁명은 무왕의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멸하는 것이 장차 중국의 선례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현실이 되었다. 조선도 성리학을 정립하면서 역성혁명으로 왕조를 세웠지만 반역은 절대불가의 일로 치부되었지만,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으로 왕조를 무너뜨렸다. 대립이란 충忠효孝가 기본이 조선의 국법도 각자의 선택으로 만드는 시대변화 이다. 요즈음은 정권을 국민이 만드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지만 편가르기 시합장이 되어 버렸다.
인간이 겪는 사유는 단순히 순서대로 하는 것인가? 인간이 가지는 사유는 확률적인 사고
는 도달힐수 있는 것을 전제로 여정을 열어내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사유는 도달되지 않는 것은 순서대로 오지 않는 것이기면서 늘함께하는 것들이라 한다. 모든 것은 시차가 있고 감정이 있고 경험에 따른 세계의 차이가 변하기에 늘 변하는 것이 사유의 전달이 되는 것이다. 무언가 순서대로 일어나지도 않고 순서대로 인식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수도 없고, 표현되는 것을 전부 이해하기는 어렵다.
완전한 이해나 완벽한 소통은 힘들 것 같다.
그러나, 현재는 많은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는
단일해법을 찾는다. 이분법적인 사고로 간단한 전달의 결과를 미리 정해버린 고정의 법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다. 사유는 예측할 수 없는 것, 도달할 수 없는 것들이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 탐구하는 과정이고, 행동이나 괸계를 맺는 방식의 재구성을 찻는 여정일 뿐이다. 삶이란 항상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것이나 무언가 완성하고 이루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단지 여정의 사유만 있을 수도 종종 나타나는 것이다. 사유의 불확실성은 회피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늘 불안의 원인도 아닐수 있다. 삶의 본질은 없는 완성이나 행복도 아니고 살아있는 동안의 여정과 추구, 도전과 노력과 종착점이 없는 계속되는 순간의 연속이 아닐까?
인간은 끝임없이 타자와의 갈등으로 살아간다. 타자란 타인이나 다른 세계이고, 어떤 만들어지지 않는 모든 허상들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가부장이 주권자 이던 시기 혹은 왕이 곧 주권자 이던 시기나 신이 주권자로 간주되든 시기나 모두는 대행하는 자가 주권자로 지배하던 시기였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항상 하는 생각속에서 찻는 것들은 항상 타자의 것이지 자신의 존재라는 것은 자신의 내부를 끊임없이 파열이키는 폭력이자 있음을 찻는 투쟁일 뿐이다. 마음에 담아있는 먼저 어떤 하나는, 그것이 그대로 있지 않고 분열하고 쪼개지고 찟어지고 시시 때때로 나타나는 폭력일 뿐이다. 하나로 보이는 모든 것들 안에는 이미 그것이 아닌 것, 그것과 맞서는 것, 그것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것이 자신에게 늘 폭력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타지는 사람일 수도, 동물일 수도, 심지어 유령일 수도, 이해 할 수도 없는 것, 불쾌하고 섬뜩한 것, 반복되는 악몽이나 동일한 자신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표현하는 우리는 당연히 하나 일수는 없다. 우리가 아는 세상에는 너무 많은 세계가
있을지 모르지만, 누가 우리가 아는 세계는 존재할수 없다. 이미 존재하지 않거나 아마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는 자신의 존재는 늘 타자와의 동일성을 고수하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야 만족할 려는 이중적인 것들 뿐이다.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도 지배하는 끝없는 불완전성, 무한하여 정의할 수 없는 완결되지 않는 가상의 이미 존재하는 것들은 폭력적으로 다가오기만 할 뿐이다. 자신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을 넘어서, 한 순간은 늘 두가지 상태가 공존하는 존재에 지배하고 사로잡는 폭력은 내적 필연성이다. 인간은 늘 갈등하고 가상의 것에 대립하고 시달리는 중생인지 모른다.
인갼은 스스로를 복잡하게 얽매이게 만드는 본질이 있는지 모른다. 하루에 수많은 기억의 방에서 시도때도 없이 나타나는 생각처럼 히루에 세끼 식사 (사실은 두끼정도 먹었는데 농업의 경작으로 노동의 강도 때문에 두끼가 점심點心을 낮에 먹음) 를 먹는 외에 수시로 먹는 것에 오욕중 식욕을 가지는 본능을 만들었다. 생각하지 않어면 존재도 부족하듯이, 먹지 않어면 삶의 기본도 없어진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타자의 것을 섭취하게 만들어 공존하는 체계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모든 생물은 단지 본질만 습취하고
그 본성을 가지고 단순하게 사는 도인인지 모른다. 인간보다 어찌보면 삶에는 더욱 진솔한지 모른다. 어떠한 다른 불손한 방법을 잊고 사는 지구의 생태유지에 적응하는 도인들이다. 인간들이란 생각과 사유와 타자에 대한 각자의 결단을 가지는 특성때문에 먹는 것은 다양한 것들에 의존한다. 먹지못하는 것이 없고, 먹는 것의 단순화도 없고, 먹어서 안되는 불문율도 스스로 만드는 다양한 복잡성을 가지는 유일한 생물이다. 불을 쓰고, 도구를 쓰고,
기구를 이용하여 습취하고, 먹어서 안되는 것도 먹어야하는 위험도 가지는 신의 영역으로 가는 짓을 서슴없이 하는 위험한 존재이다. 먹는 종류도 지구의 모든 생존하는 생물만큼 많은지 모른다. 결국은 절대로 하지알아야 하는 동족의 신체까지 먹는 기희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인간은 스스로 만든 복잡성에 오늘도 고통을 감수하는 즐거움을 가지는허울에 살아가고 있다. 끝없이 오르는 식사비용과 사치로 얻는 만족으로 장난같은 허영으로 만드는 음식의 모양 변질과 조미료에 길들여지는 복잡성에
다양한 세계의 재료까지 욕심을 내는 무지의 극치로 인한 결과는 뻔하다. 결국은 스스로 먹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가련한 존재는 늘 고통받는 것이다.
단순한 생물의 삶을 배워야한다.
우리가 하는 생각은 가장 권위적이고 파괴적이고 해로운 것이다. 생각은 지나간 것이고 고정된 것에서 안위와 편안한 것을 가지려하기 때문이다. 생각은 자신을 파괴하고 생각은 마음을 망가뜨린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스승이 되어야하고 동시에 제자가 되어야한다. 현재라는 것은 항상 불안하기에 직시하기를 두려위한다. 스스로 자신의 전체영역을, 개인의 의식이자 곧 사회의 의식인 것을 온전히 자각해야한다.
나는 오직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나 자신을 관찰할 수가 있다. 모든 삶은 타자와어 관계이기 때문이다. 구석에 앉아서 나 자신에 대해 명상하는 것은 헛된 짓이다. 나 자신은 혼자서는 존재할수 없다. 나는 사람들과, 사물들과, 관념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타자들에 관한 이해는 그저 추상적일 뿐이다. 나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실제 속에서, 되고싶은 모습이 아니라 지금있는 그대로의 나를 볼줄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에 관한 지식은 언제나 지나간 과거의 것이다. 과거에 짖눌린 생각은 슬픔과 고통만 준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에 지금부터 자신에게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없이 지금 이순간 살아 숨쉬는 움직임을 즐겨야 한다. 우린 늘 과거의 틀에 박혀 반복된 짓을 하고 지내기에 새로운 지금을 삶 전체를 온전히 민감하기 위해 몸과 정신사이에 분리가 없는 하나의 통합된 지금의 움직임을 알아야 한다. 세상에 가장 어려운 것이 단순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무슨 이미지를 품고 지식을 가지고 수다를 떠는 것은 모든 것을 가로막는 짓이다. 조건화 되어 있는 존재를 벗어나는 지금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순수한 상태를 즐겨야한다.
우리가 반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살아있고자 하는 욕망과 감각적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갈망 때문이다.
우주 전체를 살펴보면, 밀물과 썰물처럼 모든 곳에서 거대한 흐름과 멈춤이 반복된다. 비전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주기성의 법칙은 자연계만 아니라 우주가 사라지고 태어나는 거대한 순환, 브라흐마의 낮과 밤이나 위대한 숨결의 내쉬고 들어쉼 역시 같은 것이다.
"태초에 그 안에서 일어난 첫번째는 그 '욕망' 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마음 ' 의 최초 씨앗이었다. 현자들은 지혜로써 마음을 탐구하여, 이 욕망이 '존재'와 '비존재' 를 잇는 고리임을 발견하였다." 욕망은 바로 창조로 이끄는 감정 그 자체의 의인화이며, 순수한 추상적 상태에 머물던 유일자를 창조 활동으로 이끈 최초의 충동이다. 욕망은 우주 전체에도, 개개인에게도 윤회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다. 하나의 욕망은 무수한 갈래로
뻗어 나가, 생각하는 존재를 지상 세계에 묶어두고 그를 끝없이 다시 태어나게 만든다.
" 욕망의 사슬에 묶인 이는, 그것을 스스로 끊어내기 어렵다. 욕망의 즐거움을 바라지 않은 이, 흔들림 없는 자는 그 욕망을 떨쳐내고 열반에 이른다. " 북방불교 경전 우다나바르가의 욕망에 가르침이다. 욕망은 칭조의 핵심이다. 욕망의 가장 큰 대립은 욕망이다.
안개 깔린 억새평전 구절초 기다리고
억새들 언제나 반기는 신에 무엇을 하느냐?
신불산 묵은 만길능선 그리오래 가던 산우
지금은 모두 산야에 묻어두고 때마다 오르며
그리운 것은 부질없는 욕심 인가?
안개나 구름이나 억새나 구절초나 산에 있건만 산꾼은 마냥 지나가는 바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