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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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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와 마주하기-서: 시 읽기 현장 1)
김준현
백지:
백지(白紙)를 공간으로 인식할 때 흰색은 텅 빈 것입니다. 무의 상태-부재를 증명합니다. 이 공간에 존재(활자)를 채워 넣어야 하는 것이 모든 작가의
숙명입니다. 종이 위에서 채도가 다른 흰 물감을 존재로 인지하는 화가들의 작업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글자가 견인하는 의미와 소리의 영역에서 색
또한 폭력적인 구분 속에 묶인 하나의 단어-의미에 불과할 뿐입니다. 빨강, 주황, 파랑, 노랑, 보라. 이렇게 써놓아도 우리의 눈은 다만 이토록 흰 종이와 이
하는 흑의 다양한 모양새를 통해 시시각각 의식으로 전환되는 글자들을 볼 뿐입니다.
면벽행위 :
2020년 《문학동네》 100호 특별부록집으로 나온 책 <아뇨, 문학은 그런것입니다>에서 진은영 시인이 쓴 산문「기침, 종이, 죽음, 또 기침」의 두 구절
을 가져옵니다. “문학을 해서 다행이다.펜, 종이, 영혼만 있으면 된다. 어쩌면 영혼이 안 필요할 수도 있다. 끄적거리고 있는 흰 종이 위에서 찾아내면 되니
까." "나는 세계로부터 아주 멀리 떠돌다가 종이에 닻을 내리기라도 하듯이내가 곧 써내려갈 흰 종이 뒤에 숨겨져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살았던 집과 거
리, 그들의 삶과 죽음을 문득 생각한다."여기서 흰 종이는 세계를 가리고 있는 막(膜)인 동시에 작가 개인의 영혼 옮기기에 선행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살았던 집과 거리, 그들의 삶과 죽음'에 닿을 수 있는, 말 그대로 '종이 한장 차이'로 마주할 수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면벽행위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인연-생각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그러니 활자로 응집되어뜻이 되려는 것들을-속가(俗家)의 인연을 뜻 아닌 것으로 두어 세계의 바깥쪽-무(無)의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모습은 허망”(凡所有相皆是虛妄)하다고 했던『금강경』의 한 구절을 생각할 때 지금 현재 이 세계의 형상은 언젠가 사라질 것-무로 돌아갈 것 - 지금 여기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바라보았을 때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이 절대적 허무 앞에서 영혼을 준비하지 않은 채 쓰는 자들에게 이 흰 세계-무엇을 말하는
순간 사라지는 침묵의 형상이란 무엇일까요?
깜지 :
중학생들이 '깜지'라는 벌을 받는 것
을 본 적이 있습니다. '깜지 쓰기'는 종
이를 오로지 글자만으로 빽빽하게 채워
캄캄하게 만들어야 하는 작업입니다.
'잘못했습니다. '2)
하나의 문장이 띄어쓰기도 없이 반
복되며 종이를 가득 채우는 것을 보며
이 세계에서의 노동 행위란 더는 무엇
도 쓸 수 없는 상태의 어둠죽음에 다
다른 자가 결국 종이 한 장이라는 드넓
은 가능성을 잊고 단 하나의 문장에 사
로잡혀 살다가 끝에 다다르는 구조적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징조 :
최근 몇 년간 시인들의 데뷔작을
중심으로 유독 흰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1) 〈백지와 마주하기〉-서序는 근 몇 년간 젊은
시인들의 작품에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 '흰색' 및
‘흰 이미지'를 주된 소재로 한 시 읽기의 현장을 가상
으로 구상하여 만든 기록입니다. 옆에서 옆으로 건너뛰는 말하기의 환유적 속성으로 인해 흰색을 배후로둔 채, 단어에서 단어로 사유가 비선형적nonlinear으로 전개됩니다.
2)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잘
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 종이 전체가 시커멓게 될 때지 반복되는, 이유도 인과도 잊어버릴 정도로 지속되는 죄의식의 세뇌 외 손 운동은 청소년들에게는 새로운 체벌의 유형일지도 모릅니다.
3) 장혜령, 「백」, 「눈의 손등」(2017년 문학
동네 신인상 수상작) / 이다희 「백색소음」(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한여진 「검은 절 흰꿈」(2019년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작), 김지연
「애도캠프」(201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수상작)
마치 눈처럼 사라졌어.
그에게, 유키는 snow와는 다른
단어였다. 그는 snow를 눈으로, 유
키라는 단어를 죽음과 아름다움 사
이의 것으로 기억했다.
(중략)
여자의 등은 눈처럼 희었다. 남자
는 다다미 바닥에 웅크린 여자의 목
덜미를 보았다. 새벽녘에 여자의 붉
어진 이유가 부끄러움 때문인지, 추
위 때문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단단
하게 뭉친 눈의 따뜻함에 대해 생각
했다. 백지白紙라는 흰 손의 손등
을, 뒤집어도 손등뿐인 흰 꽃잎의 배
면을 생각했다.
*
일본 사람들은 생각하다라는 단
어로 사고하는 것과 느끼는 것 양쪽
모두를 표현했다.
- 장혜령, 「눈의 손등」부분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문학
동네, 2021)
“새의 날개를 닮은, 고요히 물결
치는 백白의 입구로 들어가라" 그녀
가 말했다. "그것이 너의 내부다. 너
의 문장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은 희었고 내 앞에서 슬픔처
럼 부드럽게 벌어지며 열렸다. 나는
걸었다. 빛의 계조를 따라 어두운 흰
빛에서 밝은 흰빛으로, 점점 더 밝은
흰빛으로.
- 장혜령, 「백」 부분 (『발이 없는 나
의 여인은 노래한다』, 문학동네,
2021)
언어가 언어라서 함의하고 있는 고통이 스스로를 향하건 타자를 향하건 언어는 존재 자체로 구제불능인 병적상태-중증 환자-수동태입니다. 이토록 오랜 시간 인간의 입과 인간의 손에서 쓰이며 닳고 지친 육체가 된 언어를 사로운 언어로 교체하고자 하는 동력으로 부터 시가 온다고, 거칠게 가정해 봅니
다.
여기서 언어가 놓일 자리 - 언어를 놓기 이전의 상태 즉 텅 빈 지면을 언어로 보존하고자 하는 모순되는 욕망은 가능한 걸까요? 배려라고 불러야 할까요? 혹은 시로서의 존엄(尊嚴)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가 여백(때에 따라서는 행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상 언어와 언어 사이의 휴지 상태-언어가 도약하는 순간 잠시 의미의 바깥쪽으로부터 비롯되는 휴지상태를 이른다고 할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언어의 존재를 통해서만 감지할 수 있는 언어의 부재 상태를 '희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쥐어야 하는 손바닥으로 상징되는 욕망의 바깥-반대
편에서 “손등”은 무해하고 무력한 상태입니다. “유키”와 “snow"가 공동의 영역에서는 하나의 뜻을 공유하지만 한 개인에게는 딸의 이름이자 그 딸이 함
의하고 있는 “죽음과 아름다움 사이의 것”이라고 할 때 생기는 그 간격의 무해함입니다. 사고하는 것과 느끼는 것이 (최소한 언어상에는 분화되어 있지
않은 일본 사람들의 언어 - 세계관 속에서 경계를 만들어 감각을 분할하는 일과 경계를 없애고 결코 나눌 수 없는 생각-감정의 덩어리를 이야기하는 것의
차이를 인지할 수 있습니다. (덩어리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후 '백색소음'과 관련하여 이어서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그 두 언어-두 세계의 사이가 만들어낸 공백 상태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보편-공동의 언어 속에 폭력이 구조화되어 있다고 할 때 여기에서 빠져나온 한 개인이 보존하고 있는 단어란 폭력적으로 들이치는 폭설 속에서 단 하나의 눈송이이고자 하는 힘입니다. 비록 그것이 끝내 세상 어딘가에 닿아 사라진다고 해도요.
처음 산 단 하나의 눈송이(사이토 마리코, 봄날의 책 2018) 사람의 손을 타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커피 얼룩과 한 손으로 돌리다 떨어뜨리며 생긴 펜의 흔적과 손때 등등- 흰 책의 숙명일까요? 새로 한 권을 더 샀습니다.
옆의 책과 같은 운명이 될까 봐 이 책은 읽지 않습니다. 이것은 대상에 대한 보존의 욕망이지만 바로 그 '보존'의 욕망으로 인해 대상의 내면으로 일정 부분
이상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복사본의 존재 이유는 원본을 지키고자 함입니다. 박물관의 유리 속에 전시되어 있는 고서古書의 내면은 복사본에도 담겨
있으니 같은 걸까요? 복사본은 수단으로서만 존재하는 인간-디스토피아적 미래사회의 클론을 연상하게 합니다.
하나의 원본으로부터 양산되는 복사본들, 프린터 아래로 몇 장이고 나오는, 따뜻하고 잉크가 찍힌 지 채 1초도 자나지 않은 새 종이들-그들이 영혼이 없는 존재라면 어떻게 갓 낳은 달걀처럼 따뜻할 수 있을까요?
이 책은 2018년 초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녀왔습니다. 일본인이 한국으로 유학을 와 한국어로 쓴 시집을 지닌 한국인이 극동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에서 얼어붙은 바다를 보며 읽은 것입니다. 해양공원 앞에 얼어붙어 있는 바다 위를 걷는 사람들이 활자처럼 보이는 순간 그들이 시처럼 느릿느릿 전개
되어 가는 것을 그들과 같은 속도의 시선으로 읽으며 일본어로는 “ki”라고 하고 한국어로는 “나무”(「광합성」, 사이토 마리코 『단 하나의 눈송이)라고 하는 것이 뿌리 내리는 순간과 “통역할
필요가 없는 바다를 배면에 둘 수 있었습니다.
눈이 아닌 “눈송이". 한국어에만 있는 이 단어의 사용은 단·복수의 구분없이 쓰는 “눈”과 달리 “눈송이”를 수많은 눈송이 가운데 하나로서 고유하고 개별적인 것-개인으로 인지하는 방식입니다.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눈'에 주목하는 자의 시선은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다 집중해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났다는 마지막 언술에서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욕망-개인의 고유성이 삭제된 자리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한국, 일본, 조선, 일제라는 역사적 맥락의 바깥을 향합니다.
여기서 문득 흰색과 동일한 초성 ㅎㅅ을 공유하는 희생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봅니다. 내리고 사라지고 내리고 사라지는 순간의 반복을 거치다 보면 어느새 세상은 눈으로 덮여 있습니다. 흰색은 세상 전체의 풍경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색입니다: 북극, 남극, 시베리아,혹은 쓰는 자들이 마주하고 있는 종이 등등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눈 덮인 세상(혹은 유사현실)은 희고 무해하며 춥고 외로운 것들의 공동체입니다.
백색소음:
헤어드라이어, 비, 차 안에서 비, 샤워, 계곡 물, 진공청소기, 폭포: 아기를 위한 한 어플에 있는 백색소음(whitenoise)의 목록입니다. '음폭이 넓어 공해에 해당하지 않는 소음'이라는 사전적 정의와 흰색이 프리즘을 통과할 때 모든 스펙트럼의 빛을 보여준다는 데 착안해서 백색 (white)라는 명칭의 어원까지 함께 읽어 봅니다. 이 모든 소리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에게 효과적인 수면을 제공합니다. 의미를 동반하지 않고 규칙적이면서 동일한 주파수가 지속되는 소리가 공간을 채우는 동안 의식은 무의식으로 향합니다. 아래의 시는 그 반대의 상황-눈을 뜨는 것
으로부터, 이 희고 넓은 세계 속에서 형상을, 사물의 경계를, 각각의 선을, 세계를 인지하기 시작하는 자의 발화입니다.
백색소음/이다희
조용히 눈을 떠요. 눈을 뜰 때에는 조용히 뜹니다. 눈꺼풀이 하는 일은 소란스럽지 않아요. 물건들이 어렴풋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눈길로 오래 더듬으면 덩어리에 날이 생기죠. 나는 물건들과의 이러한 친교에 순응하는 편입니다.
벽에 붙은 선반에 대하여
나에게 선반은 평평하지만 선반 입장에서는
필사의 직립(直立)이 아니겠습니까?
옆집에서는 담을 높이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점점 높아지는 담에 대하여, 시멘트가 채 마르기 전에 누군가 적어놓는 이름에 대하여. 며칠째, 습한 날씨가 계속되고 투명한 문신 같은 이름이 피부에 내려앉습니다.
피부가 세상에 가장 먼저 나가는 마중이라면 나는 이 마중에 실패하는 기분이 듭니다. 나는 이 습기에 순응합니다.
하지만 만약 손에 닿지도 않은 컵이 미끄러진다면 컵을 믿겠습니까? 미끄러짐을 믿겠습니까?
유일한 목격자로서 이 비밀을 어떻게 옮겨놓을 수 있을까요. 도대체 이 습기는 누구의 이름입니까.
눈꺼풀을 닫아도 닫아지지 않는 눈이
내가 사라지고도 내 곁을 지키는 잠이
오래 나를 지켜봅니다.
눈”을 뜨는 행위는 사실 '조용히'라는 부사가 없어도 소리 없이 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물건들이 어렴풋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바깥으로부터 밀려들어오는 이미지는 정교해져서 “눈길로 오래 더듬으면 날이 생기므로 어쩔 수 없이 대상은 존재 그 자체로 예각이며 보는 자에게 아픔이 될 소지-가능성입니다. 눈을 감고 있지 않는 이상 세계는 시각의 영역에서 인지될 수밖에 없고 이 하나의 감각이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을 압도합니다. 활자화되어 읽힐 수밖에 없는 시에서 주체로서의 화자가 지닌 시선의 힘은 무해하거나 무력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말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세계에서 주체와 대상은 결코 빈자리로 둘 수 없습니다. 반성하거나 의심하며 질문하는 일: “하지만 만약 손에 닿지도 않은 컵이 미끄러진다면/컵을 믿겠습니까? 미끄러짐을 믿겠습니까?"
“손에 닿지도 않은 컵이 미끄러졌다는 사실이 선행되면서 이 상황은 의심의 대상에서 벗어나 하나의 전제조건이 됩니다. '손을 가진' 주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주어 - 서술어 관계에서 새로운 주체-대상의 관계를 맺게 된 “컵”과 “미끄러
짐”의 문제입니다. 컵과 미끄러짐은 모두 “믿겠습니까?”라는 질문 앞에 서있습니다. 대상과 대상의 행위 중 한쪽만을 믿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었던가
요? 종교에서 '유일신'이라는 배타적 세계관은 하나의 제도적 장치가 되어 믿는 자들에게 주입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경우 '믿음'은 세계를 구성하는
단일한 논리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컵"도 “미끄러짐"도 주체 없이는 무엇도 할 수 없는 수동적인 상태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믿음에 앞서 우리의
눈부터 먼저 의심하는 게 일반적인 태도로 느껴집니다. 시는 참 이상해, 시는 아무리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라는 일부 사람들의 말 혹은 낙인 효과에 기대면 시인은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화자는 “유일한 목격자"이기에 그 어떤 증인도 옆에 둘 수 없는 외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니 독
자는 이해가 아니라 오로지 '믿음'만으로 수동태로서의 시에 다가갈 수밖에 없습니다. 의미 없이 지속되는 백색소음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의식에 의해
포섭된 뚜렷한 이미지들로부터 탈주하여 잠-무의식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통로입니다. 말(나)을 덮어버리는 소리(이불)입니다. 잠이 꿈으로 연결된다면 이미지들의 질서와 정교한 서사 등은 사라지고 언어는 의미를 갖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꿈 혹은 시에 해몽(解夢)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하 원문 참조)
첫댓글 https://naver.me/xYTFWMEu
진정한 백색 소음은 그 무슨 집중력을 높여 학습이나 업무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일그러지고 바스라진 기억의 무늬를 쓰다듬는, 무념인 듯하면서도 실은 자기 삶을 천천히 복기하는, 그런 생각의 골짜기에 흐르는 음악인 것이다.
https://naver.me/FMAJO8e2
이다희 시인님은 데뷔작 백색소음」을 쓰실 때 어떠셨나요?
A. 이다희 : 이 시의 화자가 제가 생각할 때는 계속 누워있는 사람이거든요. 처음 시작할 때부터 눈을 뜰때부터 누워있고 다시 눈을 감을 때까지 계속 누워있는 사람의 시선이라서
선반을 보면서 '선반의 모양과 내 모양이 비슷하구나.'라고 「백색소음」을 쓸때 얼핏 느꼈던 것 같아요.
내가 지금 누워있지만 뭔가를 버티고 있듯이 선반도 그런 상태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니까 그런 사연 같은 건 다 빠지고 "필사의 직립"이라는 단어가나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