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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와 함께 청주로 누님면회와 추석전에 고향으로, 또 안성 처가산소로 성묘를 다녀왔다.
** 누님면회는 대개 아내와 추억여행 기간에 다녀오곤 했었는데 이번 달 추억여행은 광주의 박형종형님 부부와 함께 다녀와서 청주에 들릴 여유가 없었다.
덕분에 오늘 청주의 누님을 찾아보고 난 후 추석명절도 며칠 남지않았으니 고향 선산과 처 부모를 모신 안성의 고삼까지 다녀오기로 계획을 세운다.
** 시간상 일정표 : 오전 7시 40분 경, 집에서 출발 ~ 영동고속도로 ~ 8시 45분, 양지 톨게이트 통과 ~ 17번 국도로 청주 행 ~ 10시, 청주 "첼로병원" 도착 ~ 누님 면회 ~ 11시, 첼로병원 출발 ~ 11시 45분, 진천 매형님 댁 도착 ~ 11시 45분, "이안 통 석갈비" 식당에서 중식 ~ 12시 30분, 식사 끝 ~ 앞의 마트에서 선물구매 ~ 오후 1시, 고향산소 도착 ~ 성묘와 밤줍기 ~ 2시, 6촌 댁(큰집) 방문 ~ 2시 10분, 4째 아우 댁 방문 후 곧바로 안성으로 ~ 3시 10분, 안성 보개면의 조병희친구 댁 방문 ~ 함께 포도원으로 ~ 신기팜 포도원에서 포도구입 후 다시 친구집 들려서 하차 후 출발 ~ 5시, 처 부모님 산소 성묘 ~ 5시 15분, 산소출발, 귀로에 ~ 송전, 용인, 신갈, 수원 ~ 저녁 7시, 집에 도착, 모든 일정완료.
** 하늘은 맑았다.
* 파란색 고유의 가을하늘에 가끔씩 떠있는 하얀구름이 운치를 맘껏 뽐내는 하늘이다.
어제 매형과의 통화에서 10시까지 첼로병원에 도착하면 된다는 약속에 집에서 7시 40분 경에 출발한다.
* 오늘이 월요일.
수도권의 월요일 날 고속도로는 역시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다.
1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야 양지ic를 벗어나서 17번 국도로 들어설 수 있었다.
8시 45분, 양지ic 앞의 4거리
* 17번 국도 역시 백암까지는 지체와 정체의 연속이었으나 백암 4거리를 지나서 부터는 차량이 드물다.
늦었다는 생각에 과속페달을 밟아서 진천을 지나고 오창을 지나 청주 첼로병원에 도착하니 정확히 10시.
* 그러나 아직 누님은 로봇재활실에서 나오지 않은 상태.
우리가 먼저 1층의 카페에 들어가서 조금 기다리니 매형이 누님의 휄체어를 밀고 카페로 들어오신다.
누님과 카페에서 즐거운 환담을 나누는 시간
** 더 좋아진 누님의 모습에 안도와 반가움이 내 마음을 뿌듯하게 한다.
지난 번 만났을 적에는 약간 근심어린 안색이었는데 오늘은 화색 이외에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제 화장실 출입만 하시면 집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 비록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누님의 상태가 좋아진 탓인지 내눈이 시릴 정도로 마음이 매우 좋았다.
그러나 시간은 어김없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 우리를 갈라놓는다.
** 누님!
아직은 아닙니다.
좀 더 버티고 생기를 찾고 건강을 찾아서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좀 더 긴 시간 웃음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이제 겨우 팔십을 넘기셨을 뿐입니다.
지금 팔십나이는 이제서야 황혼길에 접어든 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안도하고 인정할 그 시기까지 버티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 누님과의 만남은 겨우 50여분, 그 시간들이 지나간 후 다음을 약속하면서 헤어져 누님은 병원에서의 다음코스로, 우리는 진천 매형댁으로 온다.
매형댁의 뒷모습과 앞의 모습
* 매형댁은 진천읍 읍내리 173번지(내 머릿속 기억의 옛 주소)
아주 옛날 나의 첫 기억으로는(1965년도에 누님과 결혼하면서) 읍내리 4구의 요지인 3거리 코너에 주택과 정미소와 제재소등이 어우러져 있는 함석지붕의(그 당시의 대세였다) 공장형 주택으로 뒷편으로는 텃밭과 양어장까지 갖춘 매우넓게 터를 잡고있었다.
* 나와는 중학교 2학년 시절에 우리집안과 인연을 맺으면서 알게되었고, 또 나는 고등학교 시절 3년과 그 후 다시 2년 여를 누님댁에서 생활했으니 매우 깊은 인연을 갖고있었다.
* 그 후 내가 군에 입대하고, 또 군대 제대를 한 후는 누님댁으로 명절이나 아니면 가끔 찾아서 안부를 묻고 전했을 뿐이었으나 항상 동기간으로서 끈끈한 정을 이어온 것이었다.
* 옛날의 초라했던 집을 개량한 것은 1990년 대 이후로 작은 소읍도 도시화가 되면서 당시에는 큰 건물로 3층을 올렸지만 지금은 또 보잘것 없이 작은 건물같이 보여질 뿐이다.
* 윗 사진중 3캇은 살림집이 아닌 누님의 화단과 놀이터로 나머지 3층의 반 정도는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1층과 2층은 다른사람들에게 세를 놓았다.
* 누님이 병원에서 퇴원해서 집에와서 생활할 때에 불편할까 봐 옆의 놀이터 나가는 턱까지 편편하게 만들었다는 매형의 말씀에 늙은이들의 사랑이지만 매형의 누님에 대한 사랑의 한 토막을 느끼면서 가슴이 먹먹해 왔다.
그런 누님을 사랑하는 커다란 마음때문에 1개월에 1천만원씩의 돈이 병원비와 간병비로 지출돼도 전혀 어렵고 힘들다는 표정없이 아우들을 대할 수있는 것이다.
* 슬하에 2남 3여의 자식들을 두고있지만 모두 출가시키고 두 분만이 살고있는데, 요즘 세태에 따라서 명절이나 기제사등 구습을 누님이 환자상태로 있어서 장자와 상의를 한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주는데 그들이 제사는 자신들에게 오면 지내지 않겠다는 말에 서운했다는 말을 한다.
* 요즘은 아무리 뼈대있는 집안이라 해도 젊은이들의 생각이 우리세대와는 전혀 다르니...
관습도 재물도 소용없이 지금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을 나무랄 수도 없는 것이 이런세태가 현재 우리사회의 대세로 자리잡아 가고있으니 그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랴.
결국 우리세대가 지나고 나면 명절이나 제사에 대한 개념도 많이 바뀔 것이다.
* 누님댁의 주방창에서 창문밖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북방향이다.
3거리 로타리로 읍내리 4구에서는(옛날에는 다리건너 라고 불림, 1, 2, 3구는 다리 저편) 제일 요지.
* 예전에는 진천에서 5대 갑부소리도 들었지만 욕심없는 매형은 돈보다는 인연과 사람노릇을 더 중요시 여긴다.
그러기에 재산은 점점 줄어들었을 것이다.
물론 많은 형제들(12남매, 우리가 9남매, 모두 21명의 사돈)의 장자와 장녀의 맺음이었으니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식당에서의 시간들
* 매형댁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근처에 위치한 "이안 통 석갈비"식당으로 가서 점심식사.
점심은 이안통 정식으로 시켜서 먹는데 식사시간이라 그런지 식당을 이용하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 식사를 마치고 형님댁 바로앞의 남한강 마트에서 6촌 형님댁과 4째 아우집에 줄 선물을(과일상자) 사서 차에싣고 읍내에서 10여리 남짓되는 거리의 고향산소에 도착하니 오후 1시 경이다.
산소주변
* 오후 1시.
내 고향마을 바로 뒷산이 선산이고, 그곳에 선대들의 산소가 있다.
이곳으로 오면서 선산지기 4째 아우에게 전화를 하니 마침 오늘이 처제의 회갑이라 두 내외가 청주에서 연회에 참석중이라니 오늘은 고향에 왔어도 아우를 만날 수는 없구나.
* 숲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민가집 맨드라미가 빨갛게 피어있는 모습도 사진에 넣어보고...
마지막 민가에서 50여m 정도 숲으로 들어가면 바로 선영이 있다.
* 선영의 산소에 재배로 예를 올린다.
아무런 준비없이 왔기에 빈손으로 재배만 했을 뿐이다, 죄송한 마음 그득하지만 어쩔수가 없구나.
* 절을 마친 후 뒷편으로 가서 밤을 조금 줍는다.
10여년 전에 산 전체에 들어선 참나무와 잡나무들을 모두 베어내고 다른 수종으로 식재를 했지만 밤나무에 치여 식재한 나무들은 흔적도없고 밤나무만이 여기저기 자라나서 밤밭이 되었다.
* 산속 땅위에 알밤들이 즐비하게 떨어져 있지만 동네주민들이 주워가질 않는지 그대로 썩어가고 있다.
밤을 조금 줍는 동안에도 산속 모기들이 맨살이라고 보이는데는 소리도없이 물어대는데 금새 팔뚝이나 얼굴등이 붉어져 온다, 특히 아내는 살집이 무른 탓인지 더 발진이 심하다.
* 결국 떨어져 있는 알밤은 아깝지만 모기들의 극성을 더 견디지 못하고 한줌으로 만족해 하면서 나올 수 밖에..
4째 아우집
** 산소에서 내려와서 6촌 큰집에 들린다.
장손이신 6촌형님(정지창)은 2011년도에 69세의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고, 이곳에는 형수님 홀로 장가도 못간 외아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모두 1남 4녀)
* 큰집이기에 명절 때는 들려서 인사를 하지만 지금은 형님을 볼 수없는 한이 내 마음속에 항상 갖고있다.
형님은 나보다 8살이 위인 81세, 옛날에 맹호부대원으로 월남파병원이었는데 그 당시에 고엽제 중독으로 매우 고생을 하다 가셨고 지금은 형수님 홀로 지내는 것이다.
* 바로옆의 4째 아우네 집에 들려서 선물상자를 내려놓고 또 아우네 집에서 고구마와 다른 농산물들도(사전에 아내와 전화로 연락) 차에싣고 그곳을 떠나서 다음 행선지인 안성으로 향한다.
** 안성 고삼면에 있는 빙부모 산소에 들리기 전에 아내가 친구인 조병희씨 댁에 먼저 들리자고 해 고삼으로 가는 중에 있으니 그러자고 해서 조병희씨 집에 먼저 들린다(아래사진)
조병희씨 주택의 이모저모
* 조병희씨는 아내와 함께 한 사무실에서(경기지역본부)농협생활을 한 절친으로 처음부터 결혼을 하지않고 홀로살고있는 친구로 사진에서 보듯이 황토방 집을 짓고 집안이고 밖이고 온통 꽃 등과 함께 친구하면서 살고있다.
아내와의 매우 친한 친분에 우리자식들도 "이모" 라는 호칭으로 자식들과도 어린시절부터 가까이 지내는 사이.
* 우리가 왔다고 반기면서 그냥가지말고 포도원에 들리자고 제안해 포도원으로 간다.
나야 두 친구들이 워낙 반가워하고 또 나도 전부터 자식같이 이모 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으니 틈은 없다.
* 집에서 10여리쯤 떨어져 있는 포도원으로 안내를 받아서 간곳이 "신기팜" 이라는 곳.
조병희씨와는 잘 알고 지내는 사람으로 언니 아우로 통한다.
그곳에서 포도를 싫컨 먹기도 하고 또 각자 한 상자씩 사서들고 포도원을 나와 다시 조병희씨를 집에까지 태워다 준 후 우리는 고삼면으로 향한다.
빙부모님 산소
* 예를 올린 후 이곳 산소로 올 때 조병희씨 집에서 산소 주변에 심는다고 가져온 국화꽃을 기념으로 심는다.
** 오후 5시 15분 경.
빙부모 산소에서 오늘의 마지막 일정을 마무리하고 귀로에 오른다.
황혼을 벗삼았지만 올라오는 길은 오늘도 역시 지체와 정체의 반복이다.
* 송전에서 남사로 갈까? 용인방향으로 갈까? 망설이지만 오늘 역시 용인 방향이 낙점된다.
그리고 천. 서리도 지나기 전에 지. 정체는 심해진다.
* 겨우겨우 용인을 지나고 신갈을 지나서 북수원의 지지대고개를 통과해서 집에 도착하니 어둑어둑 어둠이 빛을 잡아먹는 시간으로 7시가 지난다.
** 추석명절을 4일 앞둔 날.
명절날에는 이제 남아있는 가족중 제일 어른이신 두 숙모님들을 찾아봐야 하기에 오늘 사전에 시간을 내어 누님과 6촌, 고향산소를 먼저 찾은 것이다.
* 대가족 집안의 장손으로 생활해 나가는 것이 길들여진 지도 몇 십년을 지내왔지만 내게 주어진 숙명이기에 즐겁게 알고 기꺼이 행할려고 노력한다.
옆의 아내가 많은 도움을 보태기에 더 즐겁고 가벼이 할수도 있는 것이다.
또 앞으로도 마다않고 내 일을 해 나갈 것이다, 즐겁게...
2023년 9월 29일, 나의 추석명절
*** 2023년도의 추석명절은 양력 9월 29일(금)
** 들녁의 오곡백과가 무르익어서 풍년가를 부르고, 가을 수확으로 인한 풍족함으로 여겨지는 가을 명절.
우선 추석에 대한 지식백과를 짧게 인용해 본다.
정의
음력 팔월 보름을 일컫는 말. 가을의 한가운데 달이며 또한 팔월의 한가운데 날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연중 으뜸 명절이다. 가배(嘉俳), 가배일(嘉俳日), 가위, 한가위, 중추(仲秋), 중추절(仲秋節),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고도 한다. 가위나 한가위는 순수한 우리말이며 가배는 가위를 이두식의 한자로 쓰는 말이다.
어원
추석(秋夕)을 글자대로 풀이하면 가을 저녁, 나아가서는 가을의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라는 뜻이니 달이 유난히 밝은 좋은 명절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추석’이란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용어라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추석 무렵을 중추(中秋) 또는 월석(月夕)이라 하는데, 『예기(禮記)』에 나오는 조춘일(朝春日), 추석월(秋夕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추석날 밤에는 달빛이 가장 좋다고 하여 월석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중엽 이후 한자가 성행하게 된 뒤 중국인이 사용하던 중추니 월석이니 하는 말을 합해서 축약하여 추석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중추절이라 하는 것은 가을을 초추(初秋), 중추(中秋), 종추(終秋)로 나누었을 때 추석이 음력 8월 중추에 해당하므로 붙은 이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추석 [秋夕] (한국세시풍속사전)
** 나라에서도 29일이 추석날이고, 양 3일(28일~30일)이 정식으로 정해진 명절휴일이나 10월 1일이 군국의 날로 공휴일이고, 10월 3일이 개천절로 공휴일이어서 중간에 끼인 10월 2일을 임시공휴일로 정해 9월 28일부터 10월3일까지 연달아 6일동안을 이번 추석명절의 공휴일로 정했다.
* 아마 나라에서 10월 2일을 임시공휴일로 정하지 않더라도 기업체나 근로자들의 요구로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지않고 놀게 될 것이니 나라에서 소비촉진도 하고 관광소비도 일으킬 목적으로 정했을 것이다.
* 우리 직종같이 격일제 근무를 하는 업종들이야 어쩔 수가 없을 것이지만 나라 전체를 생각해 보면 아주 잘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어차피 9월 달에는 짝수일이 내 근무일이니 28일과 30일, 그리고 10월 2일은 근무를 해야하는 것이고, 추석 당일인 29일은 휴뮤일로 쉬는 날이다.
* 이런 일정들을 미리 파악하고 지난 25일에 청주로 누님면회와 고향에 들려서 선영에 예도 올리고, 처 부모님 산소에도 들려서 예를 올리고 왔던 것이다.
추석 당일에는 현재 우리가족의 어른이신 두 숙모님들을 찾아봐야 하기에 고향쪽은 미리 다녀온 것.
** 예전같이 우리집에서 제사를 지낼 적에는 집안이 북적북적 가족들로 넘쳐났지만 이제는 명절제사나 기 제사모두 올리지 않기로 형제들 간에 약속이 되어(2018년도 설 명절 당시) 제를 올리지 않으니 찾아오는 가족이나 친척들도 오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는 심정으로 변했다, 제일 염려되던 것이 현실화 된 것이다.
* 가족들도 눈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당시에 내가 제를 올리지 않기로 형제간에 의논할 때 제일 걱정하던 부분이 바로 가족간에 마음이 멀어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는데 지난 몇 년간을 보면 염려가 현실로 꼭 맞았다.
* 그렇게 자주 만나던 가족들이 1년에 한번 만나기도 어렵게 되었으니...
더구나 남들은 때때옷 입고 부모님을 찾아뵈니, 처 부모 친척들간에 왕래를 하면서 차례음식 나누고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명절 기분이 왕성한데 우리 가족들은 왕래는 커녕 제대로 안부전화를 안하는 실정으로 변했으니 누구를 탓 할것이며, 또 탓 한들 무슨소용이 있을 것이냐.
* 명절때면 30여명 안팎으로 모이던 가족들이 이젠 자식들 조차 함께하지 못하는 명절로 변했으니 안타깝다.
그렇다고 장성한 아우들이나 조카들에게 잔소리를 할 수도 없는 현실이니 홀로 한숨이나 쉴 수밖에...
겉으로 들어낼 수도 없는 가족간의 문제이니 안타까움만 더 가슴을 후빌 뿐이다.
* 이번 명절에도 형제들 왕래라고 해야 3째 아우인 지균이가 지난 27일에 집에 들렸을 뿐이고, 친 자식인 아들도 손자만 달랑 데리고 28일에 우리집에 나타나서 한 나절 있다가 저녁에는 자기네 집으로 갔다.
내일은 처가(충남 예산)에 가야한다니 부모된 입장에서 그들이 하는대로 바라볼 수 밖에...
* 며느리는 지금 임신 초기라는 핑계로, 몸이 좋지않다는 말로 우리집에는 나타나지도 않았지만 친정에는 갈것이겠지, 요즘 우리사회의 세태가 본가보다는 처가에 더 많이 신경을 써야하는 환경으로 바뀌어가는 실정이니 그렇게 굶주리고 어려웠던 시절을 살아오고 회상하는 노년들의 세대에서도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그래도 손자 이재가 28일 날 우리 집에와서 놀았는데 할아버지를 알아보고 할부지, 할부지 하면서 재롱도 피우고, 따라다니고, 함께 어울리는 것이 자연스러워 진 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나도 신이나서 손자랑 함께 노는 것이 무척 좋았고, 간 후에는 금방 또 보고싶은 마음이 들었다.
* 손자가 할부지를 알아보고 부르니 너무 좋았다.
불과 30여분 함께 놀다 다시 회사로 들어가야 하니 아쉬운 마음이 많았고, 회사에 가서도 눈에 밟히듯이 어른거린다.
* 저녁에 일찍 퇴근하는 날이라 저녁 9시 경에 퇴근을 하니 아직 손자가 집에 있어서 또 함께 즐겁게 놀다 늦게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 그리고 오늘은 추석명절 당일.
작년에는 아들네 식구가 집에서 하룻저녁 잠을 잤는데 어제는 며느리가 오지않아 아들과 손자가 우리 집에 왔다 저녁늦게 돌아가고, 우리 부부 둘이서 쓸쓸한 추석명절 아침을 맞이한다.
** 오늘의 시간상 일정표 : 9시 50분, 집에서 출발 ~ 10시 40분, 부천 세림병원 도착 ~ 3째 숙모님 면회 ~ 11시, 병원 출발 ~ 12시 40분, 시흥시 "정담막국수"식당 도착 ~ 식사 ~ 오후 1시 50분, 식당 출발 ~ 2시 30분, 목감 2째 숙모님 댁 도착 ~ 3시 30분, 숙모님 댁 출발 ~ 4시 30분, 집에 도착, 일정완료.
** 대충 아침을 만들어 먹고난 후 숙모님들 찾아서 집을 나선다.
이제 집안의 손위 어른이 두 숙모님뿐이다, 물론 출가한 누님도 있지만...
그러나 누님은 며칠 전 성묘하러 고향갈 적에 들렸었고, 오늘은 두 숙모님들께 인사를 올리러 가는 것이다.
우리부부의 아침식사와 잠시 망중한
* 아침식사를 마치고 9시 50분 경에 집을 나선다.
집을 나서기 전에 4촌 여제 지홍이에게 전화를 걸어 숙모님이 혹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셨을까 전화로 확인하는데 진짜 지금껏 계신곳으로 알고있던 부평의 요양원이 아니고 부천 "세림병원"이라는 곳에 계신다고...
* 전화로 확인하길 참 잘했다.
며칠 전에 지균이 아우에게 듣기로는 3째 숙모님이 자신의 가족들과(내게는 4촌)선영의 산소에 들렸는데 비록 짧은거리지만(차량 정차 후 약 200m가량) 휄체어를 이용해 이동하는 숙모님이 걸어서 산소까지 올라갔다 내려오셨다는 말을 듣고 "대단하다, 이제는 많이 좋아지셨구나" 라는 생각을 했는데 당시에 무리를 하셨는지 잠시 요양원을 나와서 일반병원(세림병원)에 입원하고 계신다고 하고...
그래서 애초에 생각하고 이동하려했던 장소(요양원)와 달리 부천 세림병원으로 향한다.
* 아직 수도권의 차량정체는 극심하다.
집에서 출발해서 약 50여분 정도 지난 10시 40분 경에 세림병원에 도착.
숙모님이 입원해 계시는 526호 입원실에 도착하니 숙모님이 우리를 기다린 듯한 얼굴로 반긴다.
* 얼굴모습이 지난 구정 때 뵈었을 적보다 좀 더 야윈 것 같지만 오히려 살집이 있는 것보다 더 좋아보인다.
산소에 다녀오는라 무리했느냐? 는 질문에는 답을 피하고 신장이 안좋아졌다고 말한다.
무리를 해서 신장에 이상이 생긴 듯하다.
* 약 20여분을 숙모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용돈 약간 드린 후 병원을 나와서 다음 코스인 2째 숙모님에게로 향한다.
* 그러나 숙모님 댁에 도착하기 전에 시간이 점심 때인지라 방문해서 번잡스럽게 하지말고 식사를 한 후 방문하자는 생각으로 이곳 근처의 우리 단골인 "산골 추어탕"으로 행했는데 오늘이 추석 날이라 문을 열지않았다.
그래서 맞은편의 국수집을 보니 문을 열었기에 그곳으로 들어간다(12시 40분 경)
* 명절날 영업을 하는 식당들이 그리 많으랴, 문을 열고 손남을 맞이하는 것도 감지덕지.
"정담 막국수" 슬로건과 여러 설명을 보면 쾌나 소문난 집 같은데... 손님도 제법 들어찼고...
* 직접 막국수를 뽑는지 기다리는 시간이 20여분 이상은 족히 되리라.
우리는 12.000원짜리 명태회 막국수를 시켰는데 먹으면서 맵고 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집으로 오면서,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도 물이켜서 많은 물을 마신다.
분위기나 정성스런 설명등은 좋았으나 생각보다 맛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 기다림과 식사시간이 약 1시간 10분 정도 소요.
오후 1시 50분 경에야 식당을 나서서 목감 숙모님댁으로 향한다.
* 2시 30분 경, 숙모님 댁 도착.
마침 홀로 식사를 하고 계시는데 반찬이 모두 상점에서 사온 반찬이다, 오죽하랴...
* 홀로 사시는 숙모님이 자식들(남매)이 왔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봤는데 오늘은 만나지 못했다.
지난 설 명절에는 만나서 매우 좋았었는데...
* 요즘은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 4촌 지간이지만 만날 수가 없다.
오늘같이 명절 날 제 어미를 찾았을 때 만나보게 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홀로 기대만 했군.
* 숙모님은 우리가 가면 매우 좋아하신다.
많은 조카들이 있지만 내 동생들이 그리 많은 정이 들지않았는지 이 숙모님을 찾는 동생들은 별로없는데 내가 가끔 안부 전화를 하게되면 "역시 네가 최고야 네가 최고!!!" 를 연발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내 마음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고씁쓸한 감정이 되는 것은 왜 일까? 착찹한 심정이다.
* 아마 동생들이 두 삼촌들을 생각할 때 살아생전에 자신들에게 잘 해줬던 막내삼촌에게 더 정이 가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상대의 잘 잘못을 떠나서 인척이고, 또 삼촌지간이기에 자신들의 할 노릇만 충실히 하면 된다는 생각이 평소의 내 지론이다, 그런 생각이 내가 갖고있는 생각이기에 안부전화도 가끔하는 것이고 또 명절이 되면 나 할 도리를 찾아서 웃 어른들이나 이웃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 우리고유의 추석명절.
먼 옛날, 우리들이 어렸을 당시 고향의 추억부터 시작해서 대 가족을 이끌고 지내왔던 지난 날들의 생각들을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잘 잘못을 찾아서 오늘을 행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가족사에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지금껏 후회하는 것이 조상에 대한 예를 올리는 제사를 멈춘 것이 항상 내 가슴속에서 통곡한다.
* 물론 우리 형제지간에 잘했던 부분과 좋았던 부분이 훨씬 많았던 것도 기억하지만 제사를 지내지 말자고 상의해서 결정한 것에 대한 후회는 아마도 내 평생 가슴속에서 응어리로 남아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되돌릴 수도 없고, 후회한들 소용없는 메아리 일 뿐이지만 한은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