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마리 참새가
벌거벗은 나무에서
둥지와 아기 새들에 대해서
정답게 속삭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순간, 나는 잃었던 믿음을 되찾았습니다.
새들도 미래의 가정에 대하여
도란도란 즐겁게 얘기를 나누는데,
나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어찌 의심할 수 있을까요.
진흙더미 속에서 피어난
예쁜 백합 한 송이를 보았습니다.
순간, 더없이 화려했던 솔로몬의 영광이
내 맘에 떠올랐습니다.
우리를 이 모든 것보다 훨씬 더 귀히 여기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내 영혼이 날개를 치며
주님을 찾아 솟아올랐습니다.
나는 영혼의 비단옷을 입고
생명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 루이스 A. 보일, <참새와 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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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일은 모든 한국교회가 교회연합주일로 지킵니다. 분열과 갈등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연합과 일치라는 단어를 마음에 새겨봅니다. 처음 믿음의 공동체가 세워졌을 때의 모습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행 2:43-47)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었지요. 삶의 배경도 출신도 다른 이들이 너나없이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스스럼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모습에서 교회는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내 분열과 갈등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그들을 하나로 엮으신 부활의 예수님은 온데간데 없고 출신성분을 따지고, 자신들의 문화를 고수하면서 생긴 갈등들입니다. 이런저런 복잡한 이유들로 인해 분열의 위기에 봉착한 교회를 보다 못한 사도 바울은 사랑으로 하나 될 것을 강조하게 되지요. 그럼에도 교회는 역사 속에서 갈등과 분열로 점철되어 지금은 여러 종파들로 나뉘어졌고, 교파와 교단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아졌습니다. 다양성이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같은 하나님을 섬기지만 서로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독선과 아집이 주류를 이룹니다. 그런 세상에서 연합과 일치를 외치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 연합과 일치의 정신을 ‘에큐메니칼(ecumenical) 정신’이라 부릅니다.
‘에큐메니칼’은 문자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지구별이라는 곳에서 한 데 모여 살고 있습니다. 서로 생각과 문화와 종교와 관습이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그러나 우린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합과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의 근거를 우린 온 인류를 하나님의 사랑 안에 묶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선물로 주신 것은 사랑과 평화입니다. 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는 화해자의 사명이 주어집니다(고전5:11-21). 우리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분열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은 매우 서글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린 세상에 만연한 분열과 갈등을 고착시키는 일에 일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겐 수많은 갈등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치를 이루려는 에큐메니칼 정신이 필요합니다. 우린 온 세상의 일치를 위해 먼저 교회일치운동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 되게 하시는 일은 성령의 일, 나누고 분열시키는 일은 사탄의 일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복무해야 하는 지는 너무나도 자명하지요?
에큐메니칼 정신의 시작은 생명에 관한 애틋한 시선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생명이 소중하듯 너의 생명도 소중하고,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도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생명으로 여길 때 차이보다는 일치를, 이기심보다는 넉넉한 사랑을 내어주려 할 것입니다. 참새와 백합을 보며 옷깃을 여미었던 시인 루이스 A. 보일의 마음을 제 마음에 고이 심어봅니다. <2024.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