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댓글'하늘 담은 못에 피어난 천 년 연꽃'으로 못의 절반이상이 뒤덮인 부운지. 십수 년 전 못 바닥을 긁어내다가 못 아래 가라앉아 있던 천 년 전의 연 씨를 발견했는데, 그 연 씨가 발아(發芽)하여 다시 잎을 틔우고 천 년의 세월을 건너 피어난 연꽃으로 뒤덮여 있는 못이 바로 부운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 부운지를 발아래로 두고 있는 봉우리에 '나왕대(羅王臺)'가 있다. 나왕대는, 달리 '부운대(浮雲臺)'라고도 불린다. 마을을 굽어보는 봉우리에도 연꽃무늬 받침대인 나왕대가 놓여 있었는데, 물론 후대에 이르러서 설화를 바탕으로 다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은 두번의 생을 살았다. 전생과 현생을 신라 땅에서 살았다. 전생은 모량리(부운촌)에서 살았고 현생은 서라벌 왕경에서 살았다. 그런데 김대성이 전생을 살았던 곳은 구체적으로 어디일까? 삼국유사 대성효이세부모조에 나오는 전생의 김대성이 牟梁里의 가난한 여인 慶祖의 아들이라 하였다. 그리고 일연은 모량리 뒤에 註를 달아 '一昨 浮雲村'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모량리(牟梁里, 一作 浮雲村-현재의 운대리로 추측하기도 한다)의 가난한 여자 경조(慶祖)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편편하여 성처럼 생겼으므로 이름을 대성(大城)이라고 하였다. 집안이 궁색하여 길러내기가 어려웠으므로 부자 복안(福安)의 집에 품팔이를 하였는데 그 집에서 밭 몇 묘를 나누어주어 의식(衣食)의 밑천으로 삼았다. 이때에 덕망 있는 중 점개(漸開)가 흥륜사에서 육륜회(六輪會)를 배설코자 복안의 집에 와서 권선을 하였더니 베 50필을 시주하였다. 점개가 주문으로 축원하기를, “신도님네 시주를 좋아하시니 천신이 언제나 보호하시리. 하나를 시주하면 만 갑절을 얻으리. 안락을 누리고 수명을 길게 되리라” 고 하였다.
대성이 이것을 듣고 뛰어들어와 그의 어머니께 말하기를, “내가 문간에서 중이 외우는 소리를 들으니 하나를 시주하면 만 갑절을 얻는다고 하더이다. 생각건대 우리가 전생에 일정한 적선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가난한 것입니다. 이생에서 또 시주를 않다가는 오는 세상에서 더욱 가난할 것이니 내가 품팔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시주하여 후생의 과보를 도모함이 어떠리까?” 라고 하매 어머니가 “좋다!” 고 하여 점개에게 밭을 시주하였다.
얼마 후 대성은 세상을 떠났다. 이날 밤 국상 김문량의 집에 하늘의 외침이 들렸다. '모량리에 살던 대성이란 아이가 네 집에 태어날 것이다.' 집안사람들은 매우 놀라서 사람을 시켜 모량리를 조사하게 했다. 대성이 과연 죽었는데 그날에 하늘의 외침이 있었던 날이었다. 그 후 김문량의 아내는 임신해서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왼손을 꼭 쥐고 펴지 않더니 7일만에야 폈는데 손바닥에 ‘대성’이라고 새겨진 금간자가 있었으므로 이름을 대성이라 하고, 모량리의 어머니를 모셔다 함께 봉양했다.
이제 장성하니 사냥을 좋아했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 곰 한마리를 잡았는데 그날 밤 산 밑의 마을에서 유숙했다. 그날 밤 꿈을 꾸는데 곰이 귀신으로 변해 시비를 걸어 말했다. "어찌하여 네가 나를 죽였느냐? 내 환생하여 너를 잡아먹으리라." 대성이 두려움으로 용서해 달라고 청하자 귀신은 물었다. "그럼 네가 나를 위해서 절을 세워 주겠느냐?" 대성은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꿈에서 깨어보니 땀이 흥건히 나서 자리를 적시었다.
이로부터 그는 사냥을 금하고 곰을 위하여 장수사(長壽寺)를 곰을 잡았던 자리에 세웠다. 이로 하여 마음에 감동되는 바 있어 자비로운 결심(悲願)이 한결 더하여 곧 이생의 양친을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서는 석불사(石佛寺)를 세워서 신림(神琳), 표훈(表訓) 두 스님을 청하여 각각 살게 하였으며, 부모의 소상들을 성대히 세워 양육한 은혜를 갚았다. 한 몸으로 두 세상의 부모에게 효도를 한 것은 또한 드문 일일 것이니 어찌 착한 시주의 영험을 믿지 않겠는가!
대성이 장차 석불을 조각코자 큰 돌 한 개를 다듬어 석불을 안치할 탑 뚜껑을 만드는데 갑자기 돌이 세 토막으로 갈라졌다. 대성이 통분하면서 잠도 들지 않고 있던 차에 천신이 밤중에 강림하여 다 만들어놓고 돌아갔다. 대성은 막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쪽 고개로 내달려가 향나무 불을 피워서 천신을 공양하였다. 이 때문에 이곳을 향 고개(香嶺)라고 하였다. 저 불국사의 구름다리나 돌탑이나 돌과 나무를 새기고 물리고 한 기교는 동방의 여러 절들로서는 이보다 나은 데가 없다.
모량리는 지금 건천읍에 모량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러나 모량은 신라 당시 건천과 서면일대를 지칭하던 모량부를 지칭하는 지명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오히려 모량리 뒤에 주로 기록한 부운촌이 김대성이 전생에 살았던 마을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그럼 현재 부운촌이란 지명이 남아있을까? 바로 경주시 서면의 운대리가 바로 그곳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이 雲臺里이지만, 그 속에는 浮雲이란 이름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
모량리는 지금 건천읍에 모량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러나 모량은 신라 당시 건천과 서면일대를 지칭하던 모량부를 지칭하는 지명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오히려 모량리 뒤에 주로 기록한 부운촌이 김대성이 전생에 살았던 마을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그럼 현재 부운촌이란 지명이 남아있을까? 바로 경주시 서면의 운대리가 바로 그곳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이 雲臺里이지만, 그 속에는 浮雲이란 이름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
浮雲은 신라 善德女王(眞德女王이라고도 한다)이 이곳의 산세가 마치 봉황이 날아들 것 같이 아름답고 또 그 산 아래 맑고 깨끗한 호수가 있으므로, 유람차 행차하여 하루를 즐겼다고 하는데, 훗날 이를 기념하여 앞산에 연꽃 무늬의 받침대를 받침 羅王臺라는 기념대를 세웠다고 한다. 또한 여왕께서 행차할 때 기이하게 채색된 구름이 하늘에 떠 있었기 때문에, 나왕대를 浮雲臺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마을 이름도 '부운' 또는 '雲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浮雲 : 雲谷 雲谷里라고도 하며 나왕대 밑에 있는 마을로 운대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불국사, 석굴암을 창건한 金大城이 태어난 마을이다. 浮雲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어떤 이는 진덕여왕이라고도 함)이 이곳의 산세가 마치 봉황이 날아들 것같이 아름다우며 그 산 아래에 맑고 깨끗한 호수가 있어서 유람차 행차하여 하루를 즐기고 간 곳이라고 한다. 훗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앞산에 연꽃무늬의 받침대를 받친 나왕대라는 기념대를 세워 일명 羅王臺라고 불렀다 한다. 또 여왕이 행차할 때 기이하게 채색된 구름이 아름답게 떠있었다하여 일명 浮雲臺라고도 이름한다.
7세기 (신라 여왕기): 산세와 호수가 아름다워 왕실의 유람지가 됨 (부운대, 나왕대 지명 발생) ↓ 8세기 (경덕왕기): 이 지역(모량리 부운촌)을 배경으로 김대성 전생 설화가 형성됨 ↓ 13세기 (삼국유사): 일연이 신라 시대 고기(古記)를 참고하여 '일작부운촌'이라 기록함 ↓ 17세기 (동경잡기): 경주부 서쪽 45리에 '부운대'가 실재하며 신라 왕이 놀던 곳이라 기록됨 ↓ 19세기 (경주읍지): 경주부 서쪽 45리에 '부운대'가 실재하며 신라 왕이 놀던 곳이라 기록됨 ↓ 20세기~현재 (금오승람 및 운대리): 선덕여왕의 구전과 함께 '부운대', '부운지'라는 지명이 그대로 생존함.
결론적으로 '부운(浮雲)'은 신라 당대(최소 7~8세기)부터 왕실과 주민들 사이에서 실제로 널리 쓰이던 지명임이 확실하며, 그것이 문헌과 구전을 통해 오늘날까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우리에게 김대성 설화의 '실제 무대'를 가리켜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 행정구역상 '모량리'는 경주시 건천읍에 속해 있다. 하지만 신라 시대의 '모량(모량부)'은 지금처럼 작은 마을 단위가 아니라, 신라 6부 중 하나인 '점량부(혹은 모량부)'에 속한 매우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광역 지명이었다. 건천읍 모량리부터 서면 운대리, 아화리 일대까지가 모두 신라 시대에는 '모량'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 들어가 있었다. 따라서 현재의 건천읍 모량리와 서면 운대리는 역사적으로 같은 문화·지리권이었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할 때 본문에 '일작부운촌(一作浮雲村)'이라고 주석을 달아놓은 것은, 당시에 존재하던 여러 전설이나 이전의 기록(모본)들을 꼼꼼히 비교·대조했다는 뜻이다.
일연 스님이 참고한 대표적인 신라 시대 모본으로는 《삼국사기》 외에도 《향전(鄕傳)》이나 고기(古記), 혹은 사찰의 창건 연기설화(緣起說話) 등이있다. 13세기 집필 당시 이미 "어떤 기록에는 부운촌이라 되어 있다"고 적은 것은, 당시 기준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신라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문헌적 근거가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1669년(현종 10년) 경주의 기록인 《동경잡기》를 비롯해 조선 시대의 《경주읍지》 등 관찬·사찬 기록에 '부운' 혹은 '부운대'가 명확히 지명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편찬한 지리지에 불교 설화색이 짙은 《삼국유사》 속 지명이 그대로 이어져 실렸다는 것은, 이 지명이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실제 경주지명'이었기 때문이다.행정구역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지역의 구릉(대)이나 물줄기(지)의 이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지명의 보수성'을 잘 보여준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부운(浮雲)'이라는 한자 표기 자체가 신라 시대의 고유어 지명을 한자의 뜻이나 음을 빌려 표기(향찰·이두식 표현)한 것일 가능성도 크다. 신라 시대의 '모량(牟梁)'이 '돌방(돌이 많은 곳)' 혹은 '새벌' 같은 고유어의 한자 표기였던 것처럼, '부운' 역시 신라 시대에 불리던 특정 고유어 마을 이름이 한자로 고착화되어 전승되었을 확률이 높다.
이 기록들을 분석해 보면, '부운대'라는 공간이 단순한 불교 설화(김대성 전생)의 무대를 넘어, 신라 왕실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유서 깊은 장소였음이 드러난다.
《동경잡기》 승지(勝地) 조의 "在府西四十五里"라는 기록은 조선 시대 경주부 관아(현재 경주시내)를 기준으로 한 거리이다. 조선 시대의 1리는 약 400m 내외로 계산하므로, 45리는 약 18km 안팎이 된다. 현재 경주시청이나 대릉원 부근에서 서면 운대리까지의 직선·도로 거리가 대략 17~19km 사이인 것을 감안하면, 《동경잡기》 속 부운대가 지금의 서면 운대리 부운대와 완벽하게 일치함을 지리적으로 증명한다.
선덕·진덕여왕 시기는 7세기 중엽으로, 불국사와 석굴암이 창건된 경덕왕 시기(8세기 중엽)보다 약 100년 앞선 시기이다. 즉, 김대성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그곳은 '부운(채색 구름)' 내지는 '나왕대'라 불리며 신라 왕실이 주목하던 상징적인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마을에 있는 저수지 이름이 ‘부운못’이고, 못 근방이 부운이라 불린다. 삼국유사에서 시작하여 조선중기의 동경잡기에서 후기의 경주읍지와 금오승람에까지도 浮雲이라고 적혀있다. 조선후기 기록인 경주읍지에 지명이 나온다면, 요즘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부운이란 지명이 8세기 전반(김대성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은 것이 8세기 중반이니까, 설화를 그대로 믿는다면 그의 전생은 8세기 초 또는 전반이 된다)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전해내려왔다는 것이 된다. 최소한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하던 13세기부터 지금까지 그 지명이 살아 내려왔다고 하는 것이 바르다. ‘一作浮雲村’이라는 주를 일연이 붙인 것이 아니고, 일연이 참고한 기록으로부터 그대로 따온 것이라고 한다면, 그 저본의 기록자가 살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졌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략 통일신라시대부터 부운이라는 지명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커진다. 사람들이 발붙이고 농사지으며 대물려 살아온 곳, 땅 이름이 가진 참으로 끈질긴 생명력이다. 사실 그 자체를 정확히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어쨌든 바로 이 마을이 김대성이 전생에 살던 곳으로 알려지고, 그렇게 오래도록 입에서 입으로, 또 기록을 통해 전해내려왔던 것이다. 이런 정도 만으로도 한 번쯤 찾아볼 가치를 충분히 가지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어느 학자도 경주시도 문화원도 운대리 부운촌에 대한 관심이 없다. 주변을 좀 더 정리하고 관광지로 개발한다면 아름다운 경치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유적지가 될 것인데 참으로 안타깝다.
첫댓글 '하늘 담은 못에 피어난 천 년 연꽃'으로 못의 절반이상이 뒤덮인 부운지. 십수 년 전 못 바닥을 긁어내다가 못 아래 가라앉아 있던 천 년 전의 연 씨를 발견했는데, 그 연 씨가 발아(發芽)하여 다시 잎을 틔우고 천 년의 세월을 건너 피어난 연꽃으로 뒤덮여 있는 못이 바로 부운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 부운지를 발아래로 두고 있는 봉우리에 '나왕대(羅王臺)'가 있다. 나왕대는, 달리 '부운대(浮雲臺)'라고도 불린다. 마을을 굽어보는 봉우리에도 연꽃무늬 받침대인 나왕대가 놓여 있었는데, 물론 후대에 이르러서 설화를 바탕으로 다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은 두번의 생을 살았다. 전생과 현생을 신라 땅에서 살았다. 전생은 모량리(부운촌)에서 살았고 현생은 서라벌 왕경에서 살았다. 그런데 김대성이 전생을 살았던 곳은 구체적으로 어디일까? 삼국유사 대성효이세부모조에 나오는 전생의 김대성이 牟梁里의 가난한 여인 慶祖의 아들이라 하였다. 그리고 일연은 모량리 뒤에 註를 달아 '一昨 浮雲村'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모량리(牟梁里, 一作 浮雲村-현재의 운대리로 추측하기도 한다)의 가난한 여자 경조(慶祖)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편편하여 성처럼 생겼으므로 이름을 대성(大城)이라고 하였다. 집안이 궁색하여 길러내기가 어려웠으므로 부자 복안(福安)의 집에 품팔이를 하였는데 그 집에서 밭 몇 묘를 나누어주어 의식(衣食)의 밑천으로 삼았다. 이때에 덕망 있는 중 점개(漸開)가 흥륜사에서 육륜회(六輪會)를 배설코자 복안의 집에 와서 권선을 하였더니 베 50필을 시주하였다. 점개가 주문으로 축원하기를, “신도님네 시주를 좋아하시니 천신이 언제나 보호하시리. 하나를 시주하면 만 갑절을 얻으리. 안락을 누리고 수명을 길게 되리라” 고 하였다.
대성이 이것을 듣고 뛰어들어와 그의 어머니께 말하기를, “내가 문간에서 중이 외우는 소리를 들으니 하나를 시주하면 만 갑절을 얻는다고 하더이다. 생각건대 우리가 전생에 일정한 적선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가난한 것입니다. 이생에서 또 시주를 않다가는 오는 세상에서 더욱 가난할 것이니 내가 품팔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시주하여 후생의 과보를 도모함이 어떠리까?” 라고 하매 어머니가 “좋다!” 고 하여 점개에게 밭을 시주하였다.
얼마 후 대성은 세상을 떠났다. 이날 밤 국상 김문량의 집에 하늘의 외침이 들렸다. '모량리에 살던 대성이란 아이가 네 집에 태어날 것이다.' 집안사람들은 매우 놀라서 사람을 시켜 모량리를 조사하게 했다. 대성이 과연 죽었는데 그날에 하늘의 외침이 있었던 날이었다. 그 후 김문량의 아내는 임신해서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왼손을 꼭 쥐고 펴지 않더니 7일만에야 폈는데 손바닥에 ‘대성’이라고 새겨진 금간자가 있었으므로 이름을 대성이라 하고, 모량리의 어머니를 모셔다 함께 봉양했다.
이제 장성하니 사냥을 좋아했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 곰 한마리를 잡았는데 그날 밤 산 밑의 마을에서 유숙했다. 그날 밤 꿈을 꾸는데 곰이 귀신으로 변해 시비를 걸어 말했다. "어찌하여 네가 나를 죽였느냐? 내 환생하여 너를 잡아먹으리라." 대성이 두려움으로 용서해 달라고 청하자 귀신은 물었다. "그럼 네가 나를 위해서 절을 세워 주겠느냐?" 대성은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꿈에서 깨어보니 땀이 흥건히 나서 자리를 적시었다.
이로부터 그는 사냥을 금하고 곰을 위하여 장수사(長壽寺)를 곰을 잡았던 자리에 세웠다. 이로 하여 마음에 감동되는 바 있어 자비로운 결심(悲願)이 한결 더하여 곧 이생의 양친을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서는 석불사(石佛寺)를 세워서 신림(神琳), 표훈(表訓) 두 스님을 청하여 각각 살게 하였으며, 부모의 소상들을 성대히 세워 양육한 은혜를 갚았다. 한 몸으로 두 세상의 부모에게 효도를 한 것은 또한 드문 일일 것이니 어찌 착한 시주의 영험을 믿지 않겠는가!
대성이 장차 석불을 조각코자 큰 돌 한 개를 다듬어 석불을 안치할 탑 뚜껑을 만드는데 갑자기 돌이 세 토막으로 갈라졌다. 대성이 통분하면서 잠도 들지 않고 있던 차에 천신이 밤중에 강림하여 다 만들어놓고 돌아갔다. 대성은 막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쪽 고개로 내달려가 향나무 불을 피워서 천신을 공양하였다. 이 때문에 이곳을 향 고개(香嶺)라고 하였다. 저 불국사의 구름다리나 돌탑이나 돌과 나무를 새기고 물리고 한 기교는 동방의 여러 절들로서는 이보다 나은 데가 없다.
<삼국유사 대성효 이세부모(大成孝二世父母)조>
모량리는 지금 건천읍에 모량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러나 모량은 신라 당시 건천과 서면일대를 지칭하던 모량부를 지칭하는 지명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오히려 모량리 뒤에 주로 기록한 부운촌이 김대성이 전생에 살았던 마을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그럼 현재 부운촌이란 지명이 남아있을까? 바로 경주시 서면의 운대리가 바로 그곳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이 雲臺里이지만, 그 속에는 浮雲이란 이름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
모량리는 지금 건천읍에 모량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러나 모량은 신라 당시 건천과 서면일대를 지칭하던 모량부를 지칭하는 지명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오히려 모량리 뒤에 주로 기록한 부운촌이 김대성이 전생에 살았던 마을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그럼 현재 부운촌이란 지명이 남아있을까? 바로 경주시 서면의 운대리가 바로 그곳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이 雲臺里이지만, 그 속에는 浮雲이란 이름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
裙室은 月城金氏 성을 가진 어느 이가 마을을 개척하었다 하며, '능말'이라 하다가,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龍岩山의 모습이 마치 옛날 여인들이 입던 한복 치마처럼 생겼다고 하여, '군실' 또는 '裙谷'이라 하었다고 한다.
<慶州風物地理誌>
浮雲은 신라 善德女王(眞德女王이라고도 한다)이 이곳의 산세가 마치 봉황이 날아들 것 같이 아름답고 또 그 산 아래 맑고 깨끗한 호수가 있으므로, 유람차 행차하여 하루를 즐겼다고 하는데, 훗날 이를 기념하여 앞산에 연꽃 무늬의 받침대를 받침 羅王臺라는 기념대를 세웠다고 한다. 또한 여왕께서 행차할 때 기이하게 채색된 구름이 하늘에 떠 있었기 때문에, 나왕대를 浮雲臺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마을 이름도 '부운' 또는 '雲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慶州風物地理誌>
浮雲臺 : 在府西四十五里. 如鳳凰臺而差高. 俗傳. 羅王所遊處也
부운대는 경주부 서쪽 45리에 있고, 봉황대와 같고 높이에 차이가 있다. 민간에 전하기를 신라왕이 놀던 장소라고 한다.
<東京雜記 卷之一 勝地條, 1669>
浮雲 : 雲谷 雲谷里라고도 하며 나왕대 밑에 있는 마을로 운대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불국사, 석굴암을 창건한 金大城이 태어난 마을이다.
浮雲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어떤 이는 진덕여왕이라고도 함)이 이곳의 산세가 마치 봉황이 날아들 것같이 아름다우며 그 산 아래에 맑고 깨끗한 호수가 있어서 유람차 행차하여 하루를 즐기고 간 곳이라고 한다. 훗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앞산에 연꽃무늬의 받침대를 받친 나왕대라는 기념대를 세워 일명 羅王臺라고 불렀다 한다. 또 여왕이 행차할 때 기이하게 채색된 구름이 아름답게 떠있었다하여 일명 浮雲臺라고도 이름한다.
<慶州風物地理誌(金載植․金基汶, 1991, 普宇文化財團), p.589>
浮雲臺 : 在府西四十五里. 如鳳凰臺而差高. 俗傳, 羅王所遊處.
부운대는 경주부 서쪽 45리에 있고, 봉황대와 같고 높이에 차이가 있다. 민간에 전하기를 신라왕이 놀던 장소라고 한다.
《경주읍지(慶州邑誌) 勝地, 1932》
浮雲臺 : 在府西四十五里. 如鳳凰臺而差高. 俗傳, 羅王所遊處.
부운대는 경주부 서쪽 45리에 있고, 봉황대와 같고 높이에 차이가 있다. 민간에 전하기를 신라왕이 놀던 장소라고 한다.
<金鰲勝覽 勝地, 1936>
이 사료들을 시대순으로 엮으면 다음과 같은 완벽한 전승의 궤적이 완성된다.
7세기 (신라 여왕기): 산세와 호수가 아름다워 왕실의 유람지가 됨 (부운대, 나왕대 지명 발생)
↓
8세기 (경덕왕기): 이 지역(모량리 부운촌)을 배경으로 김대성 전생 설화가 형성됨
↓
13세기 (삼국유사): 일연이 신라 시대 고기(古記)를 참고하여 '일작부운촌'이라 기록함
↓
17세기 (동경잡기): 경주부 서쪽 45리에 '부운대'가 실재하며 신라 왕이 놀던 곳이라 기록됨
↓
19세기 (경주읍지): 경주부 서쪽 45리에 '부운대'가 실재하며 신라 왕이 놀던 곳이라 기록됨
↓
20세기~현재 (금오승람 및 운대리): 선덕여왕의 구전과 함께 '부운대', '부운지'라는 지명이 그대로 생존함.
결론적으로 '부운(浮雲)'은 신라 당대(최소 7~8세기)부터 왕실과 주민들 사이에서 실제로 널리 쓰이던 지명임이 확실하며, 그것이 문헌과 구전을 통해 오늘날까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우리에게 김대성 설화의 '실제 무대'를 가리켜주고 있는 것이다.
경주 서면 운대리의 '부운대(부운지)' 일대는 김대성의 탄생지(전생의 모량리 부운촌)일 가능성이 역사·지리적으로 매우 높다.
역사학계와 지명 연구가들 사이에서도 이를 단순한 우연이 아닌, 신라 시대 지명이 구전과 지형을 통해 오늘날까지 복원된 강력한 증거로 보고 있다.
현재 행정구역상 '모량리'는 경주시 건천읍에 속해 있다. 하지만 신라 시대의 '모량(모량부)'은 지금처럼 작은 마을 단위가 아니라, 신라 6부 중 하나인 '점량부(혹은 모량부)'에 속한 매우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광역 지명이었다.
건천읍 모량리부터 서면 운대리, 아화리 일대까지가 모두 신라 시대에는 '모량'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 들어가 있었다. 따라서 현재의 건천읍 모량리와 서면 운대리는 역사적으로 같은 문화·지리권이었다.
'부운촌(浮雲村)'과 '부운대(浮雲臺)'가 일치한다.
《삼국유사》 저자 일연 스님은 모량리를 설명하며 작은 글씨(분주)로 '일작부운촌(一作浮雲村)', 즉 "혹은 부운촌이라고도 한다"라고 명확히 기록해 두었다.
경주 서면 운대리(雲臺里)의 옛 이름이 바로 '부운대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부운지(저수지)'와 '부운대(구릉)'라는 지명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문헌 속 '부운(뜬구름)'이라는 독특한 명칭이 실제 지형과 마을 이름으로 천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삼국유사》에 대성이 품팔이를 하던 부자 '복안(福安)'의 집과 그에게 받은 '수무(數畝, 몇 이랑의 밭)'가 나오는데, 이 부운대 구릉 주변의 야산과 들판이 설화 속 가난한 대성이 어머니를 모시고 품팔이를 하며 살아가던 배경과 지리적으로도 잘 부합한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할 때 본문에 '일작부운촌(一作浮雲村)'이라고 주석을 달아놓은 것은, 당시에 존재하던 여러 전설이나 이전의 기록(모본)들을 꼼꼼히 비교·대조했다는 뜻이다.
일연 스님이 참고한 대표적인 신라 시대 모본으로는 《삼국사기》 외에도 《향전(鄕傳)》이나 고기(古記), 혹은 사찰의 창건 연기설화(緣起說話) 등이있다.
13세기 집필 당시 이미 "어떤 기록에는 부운촌이라 되어 있다"고 적은 것은, 당시 기준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신라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문헌적 근거가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1669년(현종 10년) 경주의 기록인 《동경잡기》를 비롯해 조선 시대의 《경주읍지》 등 관찬·사찬 기록에 '부운' 혹은 '부운대'가 명확히 지명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편찬한 지리지에 불교 설화색이 짙은 《삼국유사》 속 지명이 그대로 이어져 실렸다는 것은, 이 지명이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실제 경주지명'이었기 때문이다.행정구역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지역의 구릉(대)이나 물줄기(지)의 이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지명의 보수성'을 잘 보여준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부운(浮雲)'이라는 한자 표기 자체가 신라 시대의 고유어 지명을 한자의 뜻이나 음을 빌려 표기(향찰·이두식 표현)한 것일 가능성도 크다.
신라 시대의 '모량(牟梁)'이 '돌방(돌이 많은 곳)' 혹은 '새벌' 같은 고유어의 한자 표기였던 것처럼, '부운' 역시 신라 시대에 불리던 특정 고유어 마을 이름이 한자로 고착화되어 전승되었을 확률이 높다.
따라서 "신라 당시에도 실제로 쓰이던 지명"이 모본을 거쳐 일연의 귀에 들어가고, 그것이 조선 시대를 거쳐 오늘날 운대리까지 생생하게 살아남았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과학적인 추론이다.
이 기록들을 분석해 보면, '부운대'라는 공간이 단순한 불교 설화(김대성 전생)의 무대를 넘어, 신라 왕실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유서 깊은 장소였음이 드러난다.
《동경잡기》 승지(勝地) 조의 "在府西四十五里"라는 기록은 조선 시대 경주부 관아(현재 경주시내)를 기준으로 한 거리이다.
조선 시대의 1리는 약 400m 내외로 계산하므로, 45리는 약 18km 안팎이 된다.
현재 경주시청이나 대릉원 부근에서 서면 운대리까지의 직선·도로 거리가 대략 17~19km 사이인 것을 감안하면, 《동경잡기》 속 부운대가 지금의 서면 운대리 부운대와 완벽하게 일치함을 지리적으로 증명한다.
신라 왕실(선덕·진덕여왕)과의 연관성과 '나왕대(羅王臺)' 구전 자료 역시 전형적인 지명 유래 설화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매우 중요한 역사적 단서를 담고 있다.
민간에서 '신라 왕이 놀던 곳(羅王所遊處)'이라는 구전이 조선 시대를 거쳐 20세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고, 구체적으로 선덕여왕 혹은 진덕여왕이라는 특정 시기까지 명시되어 있다.
선덕·진덕여왕 시기는 7세기 중엽으로, 불국사와 석굴암이 창건된 경덕왕 시기(8세기 중엽)보다 약 100년 앞선 시기이다.
즉, 김대성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그곳은 '부운(채색 구름)' 내지는 '나왕대'라 불리며 신라 왕실이 주목하던 상징적인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삼국유사》에서 김대성은 전생에 왕실이나 귀족이 아닌, 아주 가난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런데 그 가난한 아이가 품팔이를 하던 배경인 '부운촌'이 실은 '신라 왕이 행차하여 즐기던 경치 좋은 명승지(부운대)' 주변의 마을이었다는 맥락이 성립된다.
신라 왕실의 유람지였던 곳에 훗날 불교적 靈異(신이한 현상)와 김대성의 환생 설화가 덧입혀지면서, 자연스럽게 《삼국유사》에 '모량리 부운촌'으로 기록되었을 시나리오가 매우 자연스러워진다.
이 마을에 있는 저수지 이름이 ‘부운못’이고, 못 근방이 부운이라 불린다. 삼국유사에서 시작하여 조선중기의 동경잡기에서 후기의 경주읍지와 금오승람에까지도 浮雲이라고 적혀있다. 조선후기 기록인 경주읍지에 지명이 나온다면, 요즘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부운이란 지명이 8세기 전반(김대성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은 것이 8세기 중반이니까, 설화를 그대로 믿는다면 그의 전생은 8세기 초 또는 전반이 된다)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전해내려왔다는 것이 된다. 최소한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하던 13세기부터 지금까지 그 지명이 살아 내려왔다고 하는 것이 바르다. ‘一作浮雲村’이라는 주를 일연이 붙인 것이 아니고, 일연이 참고한 기록으로부터 그대로 따온 것이라고 한다면, 그 저본의 기록자가 살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졌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략 통일신라시대부터 부운이라는 지명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커진다. 사람들이 발붙이고 농사지으며 대물려 살아온 곳, 땅 이름이 가진 참으로 끈질긴 생명력이다. 사실 그 자체를 정확히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어쨌든 바로 이 마을이 김대성이 전생에 살던 곳으로 알려지고, 그렇게 오래도록 입에서 입으로, 또 기록을 통해 전해내려왔던 것이다. 이런 정도 만으로도 한 번쯤 찾아볼 가치를 충분히 가지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어느 학자도 경주시도 문화원도 운대리 부운촌에 대한 관심이 없다. 주변을 좀 더 정리하고 관광지로 개발한다면 아름다운 경치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유적지가 될 것인데 참으로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