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성장 기세가 무섭다.
수치만으로 보면 국민소득 3백달러 수준인 후 발 개도국이지만, 잠재력까지 감안할 경우 중국의 최근 경제 추세는 가히 파죽지세라 부를 만하다. 중국 경제의 추진력은 심천 등 경제 특구라는 '강 력 엔진'에서 나온다. 심천 지역의 소득은 이미 6천달러를 넘어섰다. 세계 경제 10~15위권과 맞먹는 규모다. 심천의 거리 풍경은 홍콩의 빌딩숲을 방 불케 하리만큼 화려하다. 홍콩, 대만 등 중화 경제권과 가까운 이점에다, 정 부 차원의 기술적, 정책적 투자, 그리고 인근 농촌에서 쏟아져나오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되어 호황의 밑바탕이다. 대체로 심천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중국의 다른 지역 사람들에 비해 높 은 소득을 얻는다.
그렇지만 이들의 가족과 친지는 여전히 저소득 지역에 살고 있다. 끼니만 해결되어도 '행복해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들의 고 향과 일터 사이에 존재하는 문명의 간극이 여간 큰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 이러한 차이는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 이 문명의 간극을 읽을 수 있다면, 중국이 가진 잠재력과 가능성, 혹은 발전의 저해 요인과 그 해법의 단서들 을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를 짚어 보기 위해 한 가지 샘플을 설정했다.
중국 노동자가 명절 을 맞아 귀성하면서 빚는 풍경을 좇다 보면, 발전 지역과 미개발 지역 사이 의 문명 차이가 중국의 개방 구도 안에서 어떻게 융화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심천 경제 특구에 진출한 한국 봉제공장이 취재의 실마리 를 제공해 주었다. 이곳에서 어느 노동자를 만날 것이고, 그의 고향까지 동 행하며 중국과 세계의 조우에 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95년 1월20일 심천에 도착했다. 홍콩과 중국 사이의 국경은 무역하는 이 들로 언제나 붐빈다. 밀입국을 막기 위한 감시도 매우 엄격하다. 인민군 병 사의 매서운 눈초리가 강한 첫인상을 심어준다. 세관을 지나 역을 벗어나자 암달러상, 골동품상, 거지, '꽃'(!) 파는 아가씨 등이 길을 막는다. 호객이 매 우 끈질기다. 택시로 시내를 벗어나 30분쯤 달리면 경제 특구가 나온다. 이 곳은 출입증이 있는 사람만 드나들 수 있다.
특구에 들어서서 30분을 더 달 려 싸징에 도착했다. 이곳에 있는 마안산공단에 한국 봉제공장이 많이 진출 해 있다. 연락된 공장을 찾아 취재를 시작했다. 노동자는 대부분 17~25세 가량의 여성이었다. 주로 남부와 서부 지역의 호남성, 호북성, 귀주성, 사천성 농촌 출신이다. 이들의 임금은 평균 5백 위 안(1위안은 한화 백원 정도), 3백~1천2백위안까지 초보와 경력에 따라 차이 가 크다. 잔업, 철야, 휴일 근무 수당을 포함한 액수인데, 보통 근무 시간은 오전 8시~ 오후 7시이다.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한다. 임금의 절반 정도를 고향에 송금하고, 나머지를 가지고 생활하며 저축도 한다. 회사 인근에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공단 노동자들의 유일한 휴식처이다. 저녁이면 달리 갈 곳이 없어 연인들이 많이 몰려드는데,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쉽사리 진한 장면을 보여준다. 노천 당구대에는 남자 공원들이 게임을 즐기고 있다.
1월24일부터 춘절 휴가가 시작된다. 우리나라의 '설'에 해당하는 춘절은 중국에서도 최대 명절이다. 중국인은 명절이 되면 귀성 열기로 들뜬다. 중국 언론은 귀성 인파를 8억 정도로 추정한다. 이들의 귀성 일정은 한국의 경우 와 천양지차를 보인다. 고향으로 가는 일정만 따져도, 가까우면 보통 3~4일 정도, 먼 지역은 열흘이 훨씬 넘게 걸린다. 그러다 보니 정부가 공인한 휴일 은 6일이지만, 공장에서 20~25일 정도 휴가를 준다. 고향이 먼 노동자들은 몇달 전부터 여비를 모은 다음 아예 사표를 내고 귀성하기도 한다. 길이 멀고 고생스러운 데다가 여비만도 두달치 월급에 육박하는 처지여서 귀성 인파는 이곳 노동자의 30%밖에 되지 않는다. 기차표 구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침구를 기차역에 깔고서 1주일을 버티고도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고 한다.
우리는 어렵사리 동행을 구했다. 리충(25) 리구양(32) 팡이유(18) 수롱짠(21) 네 사람은 사천성 북부 농촌 마을에서 온 같은 고향 사람들인데, 귀성 행로 취재를 허락했다. 리충은 고향 리룽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열여덟살에 결혼해 남편과 네살 바기 아들이 있다. 대처로 나온 지 3년, 월급은 4백50위안 정도이다. 첫 귀 향길이다. 리구양은 리충의 마을 친구로 돈 벌러 나온 지 2년 되었다. 월급 은 6백50위안 정도. 1남2녀를 두고 있는데, 중국의 1가구 1자녀 정책 때문에 벌금을 많이 물어야 했다. 둘째 딸 낳고는 1천2백위안, 막내 아들 얻고는 2 천위안을 물었다. 아들을 얻기 위해 낸 벌금을 갚으러 특구로 나온 것이다. 팡이유와 수롱찬도 비슷한 동기로 고향을 떠났다.
싸징 터미널에서 광주행 버스를 탔다. 이 지역의 버스는 위험하기로 이름 이 높다. 미니 버스는 20분쯤 달리다 갑자기 차를 세우고는 다른 버스에 승객들을 팔아버렸다. 새 버스는 손님을 가득 채울 때까지 아무 설명도 없이 마냥 기다렸다. 1시간 뒤 겨우 출발한 버스는 승객에게 다시 차비를 요구했 다. 운전사말고도 차장 3명이 동승해, 차비를 안 내면 폭력을 행사했다. 그래도 불응하는 사람은 고속도로 중간에 내려놓았다. 사람들은 묵묵히 눈치만 살폈다. 버스는 1시간쯤 달리다 승객을 엉뚱한 곳에 내려놓았다. 돈은 두 배가 넘게 냈건만 목적지에는 가지도 못했다. 그곳에서 다시 광주역으로 가는 버스를 물색했다.
새 버스에 오른 사람들은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다. 이 버스는 그나마 광주 외곽에 승객을 풀어놓았다. 2시간 거리의 광주에 가는 데 6시간 걸렸다. 광주역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넓은 광장을 까만 머리들이 빈틈없이 메 우고 있다. 흡사 이삿짐을 연상케 하듯 양동이, 냄비, 주전자, 식기 등을 들 고 등에는 이불을 메고 줄을 서있다. 5~10명씩 같은 고향 사람끼리 몰려다 니는데, 어찌나 단단히 밀착해서 줄을 서는지 한번 대열에서 벗어나면 도저 히 다시 들어갈 수가 없다. 간간이 기관총을 찬 공관원들이 도둑을 잡아 끌 고 가는 모습이 눈에 띈다. 갑자기 건장한 젊은이들이 나타나 '질서를 잡고' 지나갔다. 얼마 후 역무원들이 몽둥이를 들고 와서 다시 줄을 맞추었다. 죄 수를 대하듯 했지만 아무도 불만스러워하지 않았다. 밤 11시40분 개찰구를 열자 사람들이 열차를 향해 질주했다. 검은 화물차 였다. 텅빈 짐칸이었다. 천장에 30W짜리 전구 3개가 파리하게 빛을 뿜고 있 을 뿐이었다. 한 칸에 5백명 가량이 탔다. 앉을 틈도 없었다. 이 상태로 3박 4일을 달린다고 했다.
12시 정각, 차가 출발했다. 바깥 공기는 영하에 가까 운데, 문을 열고 달렸다. 난방 장치는 물론 없고, 사람들은 서로의 체온으로 견뎠다. 그래도 그들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먹지도 마시지도 눕지도 못하는 것이 큰 고역이었다. 한쪽 구석에 간이 화장실이 마련되었지만, 그 곳까지 가는 데 30분, 줄 서는 데 30분, 오는 데 30분이 걸렸다. 창 밖으로 호남성 농촌의 풍경이 보였다. 한국의 60~70년대 시골 풍경과 흡사했다. 벽돌로 지 은 2층집이 가장 흔했다. 도로에는 승용차가 드물었고, 낡은 트럭과 버스가 먼지를 뿜어댔다. 기차가 정거장에 서면 음식을 가득 실은 작은 수레가 새카맣게 달라붙는 다. 사람들은 내릴 수가 없기 때문에 좁은 구멍을 통해 음식을 샀다. 음식을 사는 것조차 전쟁에 가깝다. 1회용 도시락이 유행이었는데, 쓰레기는 무조건 창 밖으로 버린다. 아무도 그것을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광주에서 사천성 성도에 이르는 2천5백km 철길이 온통 쓰레기로 범벅이 되어 가고 있다.
27일 열차가 사천성으로 들어섰다. 밤 8시 목적지인 성도역에 도착했다. 68시간이나 걸린 긴 여행이었다. 성도는 사천성의 수도이자 내륙의 중심이 지만, 야경은 가로등이 없어 침침하기 짝이 없었다. 사천성은 해발 8백m에 위치한 거대한 분지이다. 예로부터 비옥한 토질 덕분에 하늘이 내린 땅으로 꼽힌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주위의 험한 산지 때문에 교통이 막혀 매우 낙 후했다. 주민들은 최근 진행중인 양자강 개발 계획에 기대를 걸고 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난푸로 가는 6시 첫 버스를 탔다. 난뿌까지는 10시간 걸렸다. 버스는 만원이어서 앉을 수도 없었고, 배기 가스가 새어 들어와 여 간 곤욕스럽지 않았다. 아침과 점심은 생략했다. 도로 사정은 열악했다.
오후 4시에 난푸에 도착했다. 여관을 잡고 나서 일행은 선물을 샀다. 난푸는 작은 읍으로 올망졸망한 상점이 많았다. 특히 거리에 폭죽 장사가 많았는데, 새해에 나쁜 귀신을 쫓는다는 폭죽은 종류만도 수십 가지였다. 29일, 드디어 고향에 가는 날이다. 아침 일찍부터 머리를 감고 무스를 뿌렸다. 중국에서는 요즈음 무스가 유행이라고 한다. 아침 7시에 버스에 올라 리룽을 향했다. 비포장한 산길은 아슬아슬했다. 중간에 진흙탕에 빠져 승객 들이 버스를 들어올리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모두 폐차되었을 낡은 차였다. 오후 1시에 리룽현에 도착해서, 다시 따잉진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4시에 팡이유가 내렸고, 얼마 후 수롱찬이 내렸다. 수롱찬의 어머니가 마중나와 있 었다. 전화도 되지 않는 곳이니, 며칠을 기다린 것인지 모른다.
오후 5시 따잉친에 도착했다. 리충과 리구량은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1시간쯤 걸으니 날이 어두워졌다. 산속 여기저기에 서 작은 불빛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산속에 이처럼 사람이 많으니, 중국 전체 인구가 어마어마할 수밖에. 달빛을 받으며 3시간 가량 산길을 걸으니 멀리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였다. 리충의 남편과 어머니였다. 감격의 재회, 3년 만의, 그리고 6일 동안의 귀행길이었다. 명절 동안 리구량의 집에서 묵었다. 토담을 두른 기와집이었다. 탁자와 침 대 생활을 하며, 옷을 두텁게 껴입고 난방은 하지 않았다. 거실로 쓰는 방에 흑백 텔레비전이 있었다. 술과 닭고기가 준비되었고, 온 가족이 탁자를 둘러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술을 먼저 마신 뒤 죽이 나왔다. 저녁을 마치자 물 통에 뜨거운 물을 붓고 온 가족이 발을 씻었다. 물이 귀하다 보니, 아버지가 세수한 물이 장남에게, 다시 차남에게... 그렇게 차례대로 닦는 것이 관행이 었다.
리구량이 안방을 내주었다. 천장에는 말린 돼지고기가 걸려 있고, 침 대 옆에는 오줌통이 놓여 있었다. 나무로 손수 짠 침대는 편안했다. 아침 마을을 둘러보았다. 조용한 산간 마을이었다. 안개가 아늑했고, 산비 탈에 일군 밭에는 야채가 그득했다. 대부분의 젊은이가 도시로 나가, 노인들 이 주로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정오가 되니 동네에서 폭죽 소리가 울려퍼 졌다. 리구량도 마당에서 폭죽을 터뜨렸다. 그리고 집 안으로 들어와 귀신을 모신 작은 제단에 음식과 술을 차려 놓고 한지를 태우며 기도했다. 제의가 끝난 뒤에는 가족이 모여 술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한담을 했다.
춘절 오후가 되어 리구량과 작별했다. 너무나 생소한 기행이었고, 또 아쉽고도 정겨운 사람들이었다. 이제 다시 보기 어려운 풍경을 시야에 가득 흡입하며 마을을 떠나왔다. 나침반을 남서쪽으로 맞춘 뒤 이제까지 온 길을 되짚어 중국을 벗어났다.
- 글&사진/ 송정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