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진객 최 건 차
진달래와 목련이 활짝 피어나는 걸 보니 겨울이 물러가고 있나 보다. 중부 내륙의 한 가운데 위치한 수원에 사는 나는 새벽녘 봄맞이를 하러 마을 앞산으로 향했다. 냉기가 서린 산길에 들어서는 중에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있다. 숨을 몰아쉬며 진달래 나무가 무성한 외진 언덕에 이르니 곱게 핀 진달래가 수줍은 듯 청량한 자태로 반긴다. 꽃향기를 맡으려 다가서려는데 숲속에서 뭔가가 바스락거린다. 자세히 살펴보니 멋지게 생긴 장끼 한 마리가 이제 겨우 잠을 깬듯한 표정으로 빤히 쳐다본다.
조심스럽게 ‘어이 너 참 멋들어지게 생겼구나!’라고 인사를 건네자 알았다는 듯이 주춤주춤 하다가 다른 데로 휙 가 버린다. 기분이 좋아 내킨 김이라는 호기로 산 아래로 난 영동고속도로의 구름다리를 건너 의왕 쪽 산으로 옮겨갔다. 산등성이에서 이목리 쪽으로 방향을 잡고 내려가는데 산기슭 묵은 논두렁 가에서 건장한 몸체의 노루가 멀끔히 바라보고 있다. 오랜만에 보게 된 숲의 진객이라 자세히 지켜보려는데 금세 뛰어가버린다. 아쉬움을 접고 살짝 얼어있는 해묵은 다락 논둑길을 사박사박 걷는데 이십여 미터쯤 앞 웅덩이에서 이상한 물체가 서성이는 게 보인다.
거리를 좁혀 가 보니 또 다른 노루 한 마리가 물을 먹으려다가 귀를 쫑긋 세우고 멈칫거린다. 또 도망가버리면 허망해질까 싶어 어서 물을 마시라는 신호로 고개를 끄떡여주었다. 녀석은 크고 까만 눈빛으로 내게 마주하는 듯하더니 몸을 휙 돌려 뛰어가버린다. 요즘엔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산에는 노루가 보이지 않고 산토끼와 꿩도 자취를 감추고 있다. 저들은 사람들의 관심이 적은 곳으로 옮겨다니며 숨어 사는 것 같다. 오늘은 어려서부터 좋아하는 노루를 오랜만에 보게 된 각별한 날이다. 숲속의 진객을 가까이서 바라보고 나니 뭔가 상서로워지는 느낌이다. 다음날 새벽에 노루가 물을 마시러 내려 오지 않겠나 싶어 기대하며 가 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며칠 후 이른 새벽에 또 동네 앞산으로 향했다. 속삭이듯이 하는 기도와 낙엽이 밟히는 바스락거림 정도인데 가까운 숲에서 꿔〜꿩 꿩하고 적막을 깨트린다. 한동안 듣지 못했던 청아하고 우렁찬 소리가 반가우면서도 너무 일찍 잠을 깨웠나 싶어 미안한 마음이다. 봄을 맞아 새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부화시킬 준비를 하려는 것 같다. 1980년대 초까지도 꿩이 많았고 산토끼는 물론 노루도 가끔 보였던 아늑한 산이다. 그런데 주변이 개발되면서 까치들과 길고양이들이 판을 치는 곳이 돼버렸다.
봄이면 장끼가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지른다. 이는 침입자나 포식자에게 안식처가 발견되지 않게 엉뚱한 데로 유도하기 위한 나름의 방편이라는 것이다. 북한산과 도봉산을 등반할 때면 꿩과 산토끼는 보이지 않고 들개와 길고양이들을 보게 된다. 쉼터에서 점심을 먹을 때면 이것들이 먹을 것을 내어 달라고 가까이 다가와 치근대며 주위를 맴돈다. 측은하게 보여 음식물을 던져주게 되는데, 국립공원을 관리하는 당국에서는 먹이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다. 등산객들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개체 수가 늘어난 들개들은 먹이가 없으면 사람을 공격하는 맹수로 변한다는 것이다.
요즘 산간에는 멧돼지가 왕성한 지배자다. 웬만한 산에서는 떼를 지어 다니며 등산로가를 마구 뒤집어 놓고, 가끔은 눈에 띄게 몰려다닌다. 추수기에는 저들 나름의 가족 단위로 떼를 지어 내려와 밭농사, 논농사 가릴 것 없이 다 익은 곡식을 마구 먹어치우면서 쟁기와 같은 주둥이로 뒤집고 갈아엎는다. 농민들의 생계에 피해가 늘고 있지만, 자연보호와 동물 애호라는 정책 때문에 농민들은 속이 타들고 있다.
길고양이들은 더 사악한 존재다. 은밀하게 접근하여 산토끼와 꿩은 물론 나뭇가지에서 잠자고 있는 멧비둘기를 마구 잡아먹는 포식자들이라서 퇴치되어야 할 일급 대상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도 위험이 되는 멧돼지와 얼핏 노루처럼 보이지만 몸체가 약간 더 작고 색깔이 탁한 고라니의 개체 수가 늘고 있다. 멧돼지와 고라니는 산간의 농작물을 해치고 있어 주민 수가 점점 줄고 있는 농촌사회의 골칫거리다.
포식자가 없었던 한라산에도 노루들을 잡아먹는 통에 들개들을 없애려 애를 쓴다고 한다. 이런 판국이라 어디서든 노루가 시원스럽게 뛰어가는 것을 볼 때면 숲속의 진객이로구나 싶어 아끼고 싶다. 노루는 경사진 산마루나 숲속에서 나무순이나 열매를 따 먹으며 평화스럽고 멋있게 사는 짐승인데 개체 수가 현저하게 줄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에 저지대에서 서식하는 고라니는 번식이 왕성하고 농작물에 피해를 주고 있다. 고기 맛으로도 노루는 고급스럽고 고라니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산들은 숲이 울창해 보기에 좋고 등산로도 잘 되어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이런 환경인데 이전에 사랑을 받던 까치가 사납고 못된 짓을 해대는 불량자로 변신했다. 도심 공원이나 야산에 떼를 지어 살면서 까마귀를 공격하고 음식쓰레기 봉투를 찢어발기며 더럽히고 있다. 더욱이 잘 익어 상품성이 좋은 과일만 골라 쪼아 먹고 통신기기나 전선을 쪼아 교통체계와 통신에도 장애를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이것들을 보자니 우리의 인생사를 숲속에 사는 조수들도 따라 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202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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