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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건축가
마 7:15-29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 설 교 >
권세 있는 가르침
마 7:28-29 / 김영규 목사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7:28-29)
가르침에 놀란 청중들
산상수훈의 마지막 말씀은 청중들의 반응입니다. 청중들은 주님의 가르치심에 크게 놀라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는지 영문 성경에 보면 이런 말들로 그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astound, awed, amazed(NIV), dumb founded, astonished(KJV), surprised, in admiration, were struck out of themselves, struck out of their senses. 놀라고, 감탄하고, 경외하고, 충격 받고, 정신이 나가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런데 이런 놀라움이 어디서 왔을까요?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을 듣는 데서 생겼습니다. 눈으로 보고 놀란 것이 아니라 귀로 듣고 놀랐습니다. 외적인 표적으로 놀란 게 아니라 마음의 깨달음 때문에 놀랐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고 놀라지 말고 순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혼 깊은 곳에서 감격하는 청중이 되시기 바랍니다. 비디오 시대에 산다고 무엇이나 보려고만 하지 말고,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연습도 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놀라워하던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진리를 듣는 감동이 여러분 속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은 어떤 점에서 청중을 놀라게 했을까요? 주님은 웅변을 배우신 적이 없습니다. 요즘 개그맨들처럼 요란한 몸짓이나 우스운 객담을 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저 평범하게 가르쳤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떤 점이 청중들로 하여금 감격하고 놀라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외적인 요인보다도 말씀에 담긴 내적인 요인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여러 주일을 통해서 산상수훈의 내용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듣고 어떤 깨달음을 얻었습니까?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깨닫고, 무슨 변화가 있었습니까? 과연 주님의 말씀 속에서 어떤 내용상의 특징을 발견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청중들은 주님의 말씀이 권세가 있다고 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했습니다. 과연 어떤 점에서 힘이 있고 능력이 있었을까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는 어떤 점이 다를까요?
인생의 큰 주제를 말씀하심
첫째로, 주님은 인생의 큰 주제를 다루셨습니다. 세상일에는 큰 일이 있고 작은 일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일이 있고 덜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일이나 덮어놓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사소한 가르침에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빈대를 잡고 벼룩을 잡는 것이 노동이냐 아니냐, 바늘을 옷에 매달고 다니면 노동이냐 아니냐 하는 따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크고 중대한 주제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천국, 영생, 하나님, 영혼...등등. 오늘 여러분은 어떤 말씀을 들으러 여기 오셨습니까? 오늘 우리는 귀중한 시간을 내서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여러 가지 일겁니다. 가족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끌려 나오신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갈 곳도 마땅치 않고 부인에게 잘 보이려고 그럭저럭 나오신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사업상 바쁜 데도 불구하고 크게 인심 써서 나와 주신 분도 계실 겁니다. 인격 수양 차 나오신 분도 있을 겁니다. 아무튼 오늘 이 시간에 무슨 얘기를 들어야 할까요? 여러분은 오늘 제가 어떤 주제로 설교를 할 것 같습니까? 평소에 하는 설교야 뻔하지 않습니까? 틀림없이 천국 얘기 할 것이고, 영생 얘기, 지옥 얘기, 하나님 뜻대로 살라는 얘기... 등등.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도 변함 없이 천국 얘기, 영생 얘기 할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오늘 정말 들어야 될 얘깁니다.
정말로 우리 인생에 무엇이 큰일인지, 중대한 일인지는 부딪쳐보지 않고는 모릅니다. 영생이니 천국이니 하는 얘기가 신간 남는 사람들의 따분한 말들 같지만 여러분이 죽음 앞에 놓여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의미가 달라집니다. 예수님 곁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던 한 강도는 주님에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2) 죽어가는 사람에게 다른 얘기는 다 필요 없습니다. 그에게 사업 얘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옷 잘 입고 큰 집에 사는 얘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심지어는 가족 얘기, 성공의 얘기도 잡담이 될 뿐입니다. 그에게는 오직 천국, 영생만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저는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어느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교회 기도실에 있는데 목이 칼칼하고 기침이 나왔습니다. 가래침이 나오는데 느낌이 이상해요.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뱉었더니 피가 계속 나오는 겁니다. 사람이 피를 보면 두려워집니다. 저는 그날이 죽는 날인 줄 알았어요. 그 날이 수요일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경건하게 지내고, 저녁 예배 시간에 맨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이 생에서의 마지막 설교로 알고 들었습니다. 그 때의 제 관심은 오직 영생과 천국뿐이었습니다. 천국 얘기를 좀 더 해 주셨으면...영생 얘기를 좀 더 해 주셨으면... 공부하는 얘기도 필요 없고, 가족 얘기도 다 필요 없어요. 오직 천국과 영생 만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주제였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인생사의 근본적인 주제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영생과 천국입니다. 예수님의 청중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나라가 망한 뒤에 수 백 년 동안 강대국의 지배 아래 고통받던 백성들입니다. 당시에도 로마의 억압과 수탈을 당하던 민족입니다.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독립이라든지, 식량 문제의 해결이라든지 하는 주제는 훨씬 매력 있고 관심 있는 주제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열심당원 시몬이나 가룟 유다 같은 제자들은 그런 목적으로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주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영생과 천국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더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일시적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한 끼의 식사를 더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근본적인 죽음 문제를 해결하는 일입니다.
죽음과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사는 것은 삶 자체가 찝찝한 일입니다. 좀 지저분한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입니다. 장날만 되면 어머니가 장사하는 시장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놀았습니다. 한 번은 튀밥 장사 앞에서 구경을 하는데 갑자기 배가 아파요. 큰 일 났습니다. 얼른 공중변소로 뛰어갔습니다. 옛날 공중변소는 요즘으로 말하면 거의 엽기적입니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까마득해요. 냄새가 코를 찔러 골이 아프고 저절로 눈물이 나옵니다. 아무튼 볼 일을 다 보니 시원했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큰 일이 났습니다. 종이가 없어요. 요즘 같은 화장지는 옛날에는 없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이 시멘트 부대나 신문지 조각이었는데, 사방을 둘러봐도 없습니다. 뭔가 재활용 할 게 있나 해서 둘러 봐도 없어요. 전후좌우를 둘러보니 사방 벽에 느낌표(!)들이 즐비합니다. 무슨 소린지 알 사람은 알 겁니다. 그날 집에 들어갈 때까지 하루 종일 찝찝했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사는 것이 그렇습니다. 뭔가 뒤숭숭하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습니다. 라이너마리아 릴케가 쓴 말테의 수기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릴케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다고 합니다. 노인들뿐만 아니라 거리를 거니는 젊은이들 속에서도, 심지어는 임산부의 태아 속에서까지 죽음을 본다고 했습니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면은 죽음을 안고 산다는 점입니다. 이 죽음은 우리 인생의 가장 기쁜 순간에도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 짓고 살아야 합니다. 죽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영혼이 어두운 채로 우울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에 내 삶의 가장 크고 중요한 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업입니까? 가정입니까? 건강입니까? 사랑입니까? 친구입니까? 학문입니까? 더 우선적인 주제가 있습니다. 천국, 영생, 하나님, 영혼... 우리의 생사 문제입니다. 주님의 청중들이 감동 받는 것은 이러한 인생의 근본적인 주제들에 관심을 갖고 사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진실성입니다
주님 말씀 두 번째 경이로움은 말씀의 진실성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사상가 볼테르는 성경을 가리켜서 한 세기 안에 자취를 감추어버릴 책이라고 악평했습니다. 오늘날 볼테르의 책은 얼마나 값나가는지 모르지만, 대영박물관이나 바티칸에 소장되어 있는 성경 사본은 값을 무한대로 쳐 준다 해도 팔지 않습니다. 어떤 책이든지, 사상이든지, 가르침이든지, 그 가치는 진실성 여부에 따라서 값이 매겨집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유일한 진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을 정금에 비유합니다. 금은 불변성과 순수성의 상징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항상 같은 효과를 지닙니다. 학문이나 철학은 시대에 따라 무수히 변합니다. 그것은 곧 그 학문이나 철학이 환전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거짓이 됩니다. 영원한 사상도 없고, 영원한 학문도 없고, 영원한 철학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최초의 성경이 3500년 전에 기록되어지고, 마지막 페이지가 2000여 년 전에 기록되어진 이래로 성경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모든 세상 종교의 경전이 바뀌고 개정되어도 성경은 개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이 성취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말의 진수성찬입니다. 말 못하고 죽는 사람은 벙어리 빼고는 없습니다. 정치인의 말, 종교인의 말, 학자들의 말, 대중들의 말... 그러나 진리의 말들은 별로 없습니다. 어제의 베스트셀러가 오늘은 무관심의 책이 됩니다. 변하고 변하는 것이 세상 풍조요, 사람들의 말입니다. 권세 없는 말, 무능한 말, 허무한 말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전한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단 한 말씀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인류으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고 있습니다.
말씀의 진실성은 불변하는 효능에도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거리에서 점잖은 신사 한 분이 길을 가다가 멈추었습니다. 길에서 장난치고 노는 네 명의 소년들을 붙들고 열심히 설득합니다. 교회로 데려 왔습니다. 그리고 매주일 성경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1932년 이 교사의 은퇴식 겸 생일 축하 파티가 열렸습니다. 거기에서 네 통의 축하 편지가 낭독되었습니다. 첫째 편지는 중국에 가 있는 선교사에게서 왔습니다. 둘째 편지는 연방은행 총재에게서 온 것입니다. 셋째 편지는 현직 대통령의 비서실장에게서 온 것입니다. 넷째는 대통령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대통령을 지낸 후버의 편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간 네 명의 소년들이 모두가 훌륭한 지도자로 성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시대, 어느 환경, 어느 사람에게나 불변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말씀의 진실성을 믿는 사람들은 말씀 중심의 삶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실천합니다. 주일학교에 개근한 세계 기록을 보면 놀랍습니다. 미국의 조지아주 어거스타 장로교회의 몰간 부인은 45년간 개근했습니다. 2340주일을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말씀을 배우고 가르쳤습니다. 필라델피아에 사는 파우어즈라는 사람은 56년 간 2936주일을 개근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쳤습니다. 평생을 두고 배우고 다시 읽어도 새로운 것이 성경입니다.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234장에 보면 “나의 사랑하는 책”이란 찬송이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읽어 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1절) 이 찬송을 부를 때에 실감이 나지 않는 분들이 있지요? 첫째는 어머님이 안 믿으셨기 때문에 성경을 배운 기억이 없습니다. 둘째는 어머님이 교회는 다니셨지만 나이롱 신자라, 무릎 위에 나를 앉혀 놓고 성경을 가르쳐 주신 기억이 없습니다. 기왕에 지나간 것을 어쩌겠습니까? 이제는 자식 대에나 이 찬송을 부르면서 눈물 흘리게 해야지요. 성경 진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어머니 시대에 들은 말씀이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요, 우리 자녀들의 시대에도 그대로입니다. 능력도 그대로요, 감동도 그대로요, 생명력도 그대로요, 기쁨과 지혜도 그대로입니다. 성경은 진리입니다. 불변합니다. 부지런히 배우고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6:6-9)
말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세 번째 驚異로움은 말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그대로 능력입니다. 생명력으로 나타납니다. 삶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죄를 이기는 능력이 됩니다. 악한 영들을 분별하고 이기게 합니다.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게 만듭니다. 형통하고 복된 삶이 됩니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스탠 피터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인트 폴에 있는 햄린 대학교에서 이학사 학위를 받았고, 워싱턴 주립대학교에서 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던 사람입니다. 학부 시절에는 풋볼 선수로 뛰어서 체육 장학금을 받기도 한 건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23살 되던 해에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차를 운전하고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에 마주오던 트럭과 정면충돌을 했어요. 앰뷸런스에 실려서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미네소타에 있는 메이오 병원입니다. 의사들의 말에 가망이 없다고 합니다. 턱이 박살나고, 왼쪽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머리에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오른쪽 팔과 다리가 마비되었습니다. 한 달 동안 혼수상태가 지속되었습니다. 의사들이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어머니가 매달려 기도합니다. 형님이 목사였는데 함께 매달려 기도합니다. 드디어 한 달 만에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완전 기억 상실증입니다. 과거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두 달 반 만에 휠체어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완전히 외계인입니다. 말도 못하고, 읽을 수도 없습니다. 식구들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사진들을 보아도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發音 연습을 다시 했습니다. 땀을 흘려 가면서 보행 연습을 했습니다. 초등학교 일학년 책을 갖다가 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아프고 전신이 욱신거립니다. 낙심이 됩니다. 참다못해 책을 집어 던지고 보행 연습기를 타고 집 주의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어머니 방의 벽에 붙은 그림 하나를 보았습니다. 어떤 수염이 많은 사람 하나가 커다란 바위 앞에서 괴로워하면서 엎드려 있는 그림입니다. 저 사람이 누구냐고 어머니께 물었습니다. “얘야, 이 분은 예수님이시란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라는 곳에서 기도하셨단다” 전에는 예수님이 먼 나라에 있는 낯선 사람처럼 들렸는데, 이제는 가까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자신을 얘기하고, 그 분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듣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성경을 읽는 중에 하나님 말씀이 마음에 들려왔습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 “오직 한 가지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빌3:13-14) 그렇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렸으니 앞만 보고 달려가자! 점점 자신을 가지고 노력을 했습니다. 구구단을 외우고 걷는 연습을 했습니다.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만 2년 만에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게 되었고, 공부는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치게 되었습니다. 계속 정진하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에서 교육심리학 석사과정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개인 병원을 차리고 신경 장애자와 언어 장애자와 학습 장애자를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과거를 잊어버린 자신에게 과거를 찾는 노력은 무의미했으며, 오직 성경 말씀을 따라서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하는 말씀대로 나아간 것이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면서 불가능한 장벽들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믿고 행하는 자에게 능력입니다. 그래서 권세가 있습니다. 세익스피어의 희곡과 같은 문학적인 감동이 아닙니다. 인생을 뒤집어 개조하는 능력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진 죄를 들춰내며, 영혼을 수술해 냅니다. 이 말씀으로 병고침을 받습니다. 귀신들이 쫓겨 갑니다. 이 말씀이 인생길을 바로잡아 주며, 이 말씀이 삶의 용기와 힘을 줍니다. 영혼을 만족케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15:16)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4: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23:29)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받으십니까? 바로 목전에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내게 주시는 약속이요, 계약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은 그대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는 명령입니다. 병을 치료하는 말씀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말씀입니다. 죽은 자를 살려내는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믿어 날마다 그 능력을 체험하면서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석 위에 세운 집
마 7:24-29 / 이필재 목사
옛날에 동경에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일입니다. 모든 건물들이 다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빌딩 하나는 아무 손해가 없이 그대로 보존되었습니다. 그 빌딩은 라이트 씨라고 하는 미국인이 건축한 빌딩이었는데 그는 언젠가는 동경에 대지진이 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그것에 대비해서 아주 튼튼한 기초를 놓아서 건축한 빌딩이었습니다. 처음 빌딩을 짓을 때 그 건축 과정을 보고 많은 사람이 비난을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불필요한 경비를 그렇게 많이 들여서 필요 이상의 기초 공사를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대지진으로 인해 이 건축가는 큰 명성이 쌓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살아오면서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건축 지식을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이런 방면에 피해가 하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상당한 경험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날림 공사’라고 하는 말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특별히 지나간 1990년대에 대한민국 전체가 불안했습니다. 사방에서 뭐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다리도 무너지고 백화점도 무너지고 집도 무너졌습니다. 어느 건축가가 발표했습니다. 앞으로 아파트 공사한 것도 더 무너질 건물들이 많으니까 우리가 여기에 대비해야 된다고 신문에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 오래된 아파트는 재개발법으로 헐고 다시 짓는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건축 예화로 반석과 모래를 비교해서 알아듣기 쉬운 설교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캘리포니아에서 오래 살았는데 지형적 특징이 해변이 많습니다. 끝이 없는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어 자연히 바닷가에서 여러 가지 축제가 많이 열립니다. 그 중에 하나는 모래성을 쌓는 대회를 하는데 사람들이 수만 명씩 나와서 구경합니다. 모래를 가지고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드는데 어떤 사람은 짐승의 모양을 만들기도 하고 성 모양을 만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꽃을 만들기도 하고 물고기를 만들기도 하고 끝없는 바닷가에 자기가 좋아하고 자신 있는 형상으로 모래성을 쌓아서 끝없이 만들어놓는데 너무너무 아름답고 보기 좋고 큰 축제입니다. 저도 여러 번 가봤는데 어떻게 모래를 가지고 그렇게 똑같이 만들어놓는지 고래를 만들어놓은 것을 보았는데 금방 헤엄쳐 나갈 것처럼 예술적으로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쁘게 잘 만들어놓았다고 해도 파도가 한번 와서 쓸고 지나가면 흔적도 없이 다 사라지고 맙니다. 모래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그 재료가 돌멩이였다면 파도가 백번이 아니라 천 번이 쳐도 형태를 그대로 보존할 텐데, 모래로 쌓았기 때문에 만약 이것을 만드는 도중 비라도 한줄기 쏟아져도 다 망가지고 부서집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라도 구절이 나오는데 창수는 고였던 물이 별안간 터져 나오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고 했던 이 반석의 뜻을 먼저 우리가 살펴보겠습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반석이라는 단어가 아주 많이 등장합니다. 또 그 반석의 뜻이 무엇인지도 성경 자체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석이라 함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이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집을 건축하는 자를 지혜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 가운데 나타나는 반석과 하나님의 관계는 수없이 많이 나오는데 특별히 시편에서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시편 18편 2절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편 19편 14절로 보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술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또 시편 31편 3절을 보면 “주는 나는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시편 42편 9절에 보면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시편 144편 1절에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렇게 수없이 많은 성경구절로 반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성전 건물이 모리아 산에 황금빛 돔으로 건축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사 지내던 자리로 이곳을 중심해서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건물 안에 뭐가 있는지 사람들이 궁금해서 모두 다 들어가 봅니다. 커다란 반석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그 반석이 곧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신약에 나타난 반석의 의미,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여기서 말한 반석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를 말합니다. 바울 서신에 나타난 반석의 의미는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이것은 구약 출애굽기 17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사막에서 목이 말라 죽을 뻔 했습니다. 그때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하고 원망했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내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어디서 내가 물을 가져다가 이 많은 백성에게 먹이겠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얼마 안 있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심각한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지팡이로 네 앞에 있는 반석을 치라.” 쳤더니 거기서 물이 쏟아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갈증을 면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다 갈증을 면했습니다. 그런데 이 출애굽 사건을 바울 시대에 와서 해석하기를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니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에 반영된 반석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반석 위에 집을 건축한다는 의미는 구체적으로 우리 삶에 어떤 반영이 가능한 것인가? 몇 가지 길이 주어져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특별히 산상보훈의 마지막 결론부분으로 큰 의미가 부여됩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계속해서 예수님이 설교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산상보훈의 복음을 총정리 하는 결론 부분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몇 가지 해석이 나옵니다. 교회의 기초는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실 때 주신 깊은 주의사항이 있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출현입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면서 너희를 미혹케 하리라.” 이것이 현실적으로 나타나서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종교적 혼란을 가져왔는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는 생각하지 말고 우리 대한민국만 보아도 이 문제가 얼마나 신앙에 손해를 끼쳤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 이단 문제 연구를 가장 열심히 하는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하고 왔습니다. 이단에 대해서 이분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열심히 수고하시는 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흥회에 가서 들은 말인데 지금 한국에는 이단성 교주가 60명이 넘는답니다. 이 교주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그리스도화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기독론이라고 하는 것을 공부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공부하는 과목입니다.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예수 외에 어떤 누구도 메시야로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주가 있는 모든 공동체는 그 모임이 비록 교회 간판을 걸고 기독교 간판을 걸었다고 하여도 소용없습니다.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서 반석이란 바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십자가에 달린 그분 그 외에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에베소에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교회는 그의 몸이라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에 “교회의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라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쉽게 생각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어떤 이름을 갖다놓는 집단은 모두 다 이단으로 정리하시면 아주 간단합니다. 이단성 교주들이 이름도 다양하게 붙여 우리를 유혹합니다. 참 아버지, 진리의 어머니, 새벽 별, 우레의 아들, 땅의 어머니, 하나님의 둘째 아들, 어린 종, 마지막 종, 대천부님, 구천상제, 심판주, 여호와이레천부, 감람나무 등 60가지를 다 말하려면 시간이 없으니까 여기서 그치겠습니다. 이런 것들은 그 당시에는 뭐가 되는 것 같지만 모래 위에 집을 건축한 것이라서 비가 나고 창수가 나면 소리 없이 다 사라지는 것이 기독교 2000년의 역사였습니다.
그 다음에 신앙생활의 기초도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예수를 믿고 살아갑니다. 이 과정을 신앙생활이라고 표현합니다. 신앙생활을 예수 믿는데 두지 않으면 비가 오고 창수가 날 때 다 무너지고 맙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문학적 표현의 질문으로 설교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고 갔느냐? 그런 사람을 보려면 다른 데 가야된다. 왕궁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이 말씀을 해석해봅시다. “너희가 무엇을 얻으려고 교회에 왔느냐?” 이것입니다. 교회는 본질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그 본질적 가치를 떠나서 다른 것에 초점을 맞추면 비가 오고 창수가 날 때 다 없어지고 맙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나오는 것은 다른 목적이 하나도 없습니다. 영혼의 요청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나서 그 복음의 능력으로 삶의 풍성함을 누리고 내게 주시는 구원의 은총과 사명적 순례를 가기 위해 우리가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매우 다양합니다. 오랜 목회생활을 하면서 제가 겪었던 사건만 해도 수없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제가 이 교회에 찾아온 것은 사실 이런, 이런 바램이 있어서입니다. 목사님이 이것을 위해 저를 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목적을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어휴! 저는 그 것을 들어드릴 수도 없고 들어드려도 안됩니다. 그것은 복음의 정신이 아닙니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어느 교회든 찾아다니고 하지 마십시오. 실망스럽겠지만 제가 확실하게 답변하는 것입니다. 조금도 다른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요청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이권을 제안하는 때도 있습니다. “목사님, 이렇게 해주시면 제가 10퍼센트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십시오.” “목사를 망치려면 그런 제안을 하십시오. 당신은 이 교회 오지 마시고 그런 제안도 하지 마십시오. 어디 가셔도 그러지 마세요.” 이렇게 목적이 따른 교회 출석은 바람이 불고 비가 나고 창수가 나면 다 무너져 버리고 없어집니다. 주님을 찾아오는 것은 주님을 위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다른 목적으로 하면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미국의 이민자 목사님 가운데는 이런 예화가 하나 생겼습니다. 목사님이 이민 가서 목회를 하다 보니까 잘 안 된다 말입니다. 이민자들은 스트레스가 많고 안되는 게 많지 않습니까? 한국에서는 그래도 괜찮게 나가던 사람이 공항에 내리자마자 금방 무식한 사람이 되어버리니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습니까? 그래서 이민 사회의 교회가 좀 어지러워지고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민자들을 위한 훌륭한 목회를 내가 할 수 있을까?’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발한 아이디어가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할 필요 없이 나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면 그것이 이민자다.’ 맞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 마음을 살펴보니까 이민을 와서 사는 게 참 재미없단 말입니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친구들도 만나도 길만 걸어가도 행복하고 쳐다만 봐도 재미있었는데 이민 오니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단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재미있는 교회를 하자.’ 이것이 목회 철학으로 정해 졌습니다. ‘이민 생활은 날마다 짜증나고 쫓기고 스트레스 받고 좌절감, 실패감, 그래서 가정마다 이혼을 많이 하게 되고…. 이거, 안되겠다. 이걸 치료할 수 있는 길은 아주 재미있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얼마나 아이디어가 좋습니까? 그래서 교인들은 와서 재미있다고 느끼고 갈 수 있도록 주일마다, 계절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연구해서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교인은 점점 안 나오는 겁니다. 나오던 교인들도 안 나오는 겁니다. “뭐 이런 교회가 다 있어?” 하면서 안 나오는 겁니다. ‘이상하다! 재미있어서 많이 나올 것 같은데…….’ 어떤 때는 교회에서 회의를 하는데도 목사님은 재미에다 철학을 맞췄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에서 회의를 할 때 커피만 마시면 점점 정신이 말똥말똥해져서 싸움만 한다. 우리 맥주를 마시도록 하자!” 재미있게 하느라고 맥주를 박스로 갖다 놓고 회의를 했습니다. 나중에는 교인이 다 없어지고 8명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래도 목사님은 그 생각을 버릴 수가 없어서 주일 예배 간단히 보고 8명 데리고 할 것이 없어 사택에 데려가서 “사치기 사치기 사뽀뽀”를 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끝이랍니다. 비가 오거나 창수가 날 때 교회 오는 목적이 본질적 가치에서 벗어나면 그런 것은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제 믿음으로는 교회는 교인들이 오히려 십자가를 져야 하고 지어주어야 합니다. 다소 싫어하면서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믿음의 정열이 있을 때 거룩한 목표를 향해 교인들이 뜨거운 마음을 열려 거기에 혼신으로 몸을 바치고, 그런 교회로 사람이 오는 것이지 재미있는 데다 철학을 둔다면 교회에 와서 무슨 재미를 느끼려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몸을 바치는 길이요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교회는 그래야 한다. 본질적 모습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저는 세미나를 늘 그렇게 합니다. 지금 우리 갈보리교회도 교회 안팎에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다 십자가를 번쩍번쩍하게 메달아 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께서 나를 위해서 저 고통의 십자가를 지셨으므로 나도 주님을 위하여 내가 줄 수 있는 십자가를 지겠다는 마음의 각오를 항상 새롭게 하기 위해서 걸어놓은 십자가입니다. 주님 말씀 반석 위에 집을 건축해야만,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교회 본질적 모습에 충성할 때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모든 공동체도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닐 때 영원하지 않고 다 무너집니다. 우리가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말합니다. 가족 관계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피차가 다 하나님의 자녀와 형상이라고 하는 관계 속에서 가족을 바라보지 않으면 오히려 만남이 괴로울 뿐인 사람이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경제 능력이 결혼의 조건이 되었다면 그 가정은 경제 능력에 비가 오고 창수가 터지는 날 무너져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얼굴이 조건이 되었다면 늙으면 창수가 터져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현대 사회는 무너진 가정이 훨씬 더 많은 겁니다. 제가 처음으로 휴스턴에 목회하러 갔을 때 제가 빌려서 예배드리는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나를 데리고 유명한 몇 곳을 관광시켜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집 앞에 가서 차를 세우고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집을 바라보세요.” 어마어마한 저택이었습니다. “이 집은 석유 부자로 텍사스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의 집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도깨비 집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안 들어가고 이렇게 구경할 뿐입니다. 사람이 한명도 못삽니다. 이 석유 재벌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떤 삶의 가치를 가르쳤느냐 하면 어떻게 하면 재벌 가문을 유지하느냐에 대해 철저한 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삶의 가치를 많은 재산을 유지하는 것에다 두고서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어느 날 이 재벌은 집안에서 피살당해 죽었습니다. 수사관들이 도저히 밝혀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휴스톤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철저히 믿고 있는 것은 아들이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이 집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터지니까, 누구다 쳐다보며 살고 싶어 했던 저택이 흉가로 변해 집안이 다 망하고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래 위에 건축했기 때문에 무너짐이 심하리라.” 내 삶의 기초는 무엇이며, 교회의 기초는 무엇이며, 국가 공동체와 인류의 기초는 무엇인가에 따라 번영하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국가 공동체에서 삶의 철학이나 생활의 우선권의 가치를 어디에 두었느냐에 따라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영원한 튼튼한 반석이 되고 그렇지 아니한 것이 결정됩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 하나님의 심판 역사를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었을 때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로 심판하시니 무너졌습니다. 인간의 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힘의 건축을 했을 때 하나님은 인간 힘의 상징인 바벨탑을 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을 잊어버리고 향락의 건축을 쌓았을 때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치셨습니다. 이 세상도 똑같습니다. 누가 로마가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누가 징기스칸이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알렉산더가 멸망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습니까? 다 무너졌습니다. 20세기의 역사를 보면 공산당은 칼 막스의 철학을 복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이다. 계급을 없애고 평등하게 살며 먹고 사는 것을 똑같이 만들자. 얼마나 훌륭한 구호인가? 그래서 지금까지 이 세상을 지배해 왔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내쫒자!” 그래서 공산당들이 교회를 내 쫓고 칼 막스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여서 건설한 것이 사회주의 국가들이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칼 막스가 말한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복음은 정 반대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평등하게 만들자. 이것이 유토피아다.” 예수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 “그러면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너에게 더하실 것이다.” 정반대의 철학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세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칼 막스의 철학을 따라간 사회주의 국가는 다 망했습니다. 우리와 가까운 북한을 생각해 보세요. 남한은 현재 5만개의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데 북한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내쫓았습니다. 일부러 내쫓은 겁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가장 훌륭하게 해결한다고 말했던 사회주의 국가가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가장 어렵게 만드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북한의 GNP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지금 2만 달러를 넘어간다고 말하고 있는데 북한의 GNP는 천이 안 됩니다. 16분의 1, 20분의 1이 되어 버렸습니다.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하지 말라.” 다 주신 겁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렇게 살면 이 모든 것을 더해주실 것이다.” 다녀 보세요. 전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초로 국가 이데올로기를 삼은 나라는 다 잘삽니다. 다 훌륭합니다. “잘 짓고 잘 짓세 우리 집 잘 짓세 만세 반석 위에다 우리 집 잘 짓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류가 사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살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으라.”라고 했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날 때 무너짐이 심할 것이다. 무너지지 아니하는 것은 기초를 반석 위에 놓는 곳이니라.” 그 기초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말씀입니다. 국가도 개인도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하면 영원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오늘 약속되는 말씀입니다. 무너지지 아니하는 집을 건축하는 지혜로운 삶의 소유가 오늘 교회 나오신 여러분에게 축복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그 길을 걸었던 민족은 어떤 결과를 얻었으며 그 길을 배척했던 민족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가 현실을 보면서 잘 짓고 잘 지을 수 있는 만세 반석 위의 우리 집이 될 수 있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기초한 나 자신의 인생과 가정, 교회와 국가가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고 싶은 자는 여호와를 찾으라. 이 말씀으로 돌아오라.”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반석위에 세운 집
마 7:24-29 / 류영모 목사
I. 산상보훈의 결론
오늘 설교 제목을 「반석위에 세운 집」이라 잡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이 제목이 성경적으로 옳은 제목이 아니다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반석위에 세운 집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으로 할 것인가 이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을 때에 어느 것이 옳은지 가슴속에 큰 과제를 가지고 말씀을 함께 경청하십시다.
마태는 예수님의 5편의 설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설교가 마태복음 5장 6장 7장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 말씀하신 고귀한 말씀이라 하여 산상복음, 산상수훈이라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로마 압제에 시달리고 종교에 실망하여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와 제자들에게 희망을 선포하십니다. 이 세상에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너희들이다. 너희들은 참으로 복된 존재로다. 복되도다. 선포하셨습니다.
마태에게 있어서 산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장소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똑같은 복음서이지만 누가에게 있어서 산은 예수님이 늘 기도하던 자리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마태는 산이 오늘의 교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상보훈은 교회설교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교회 나올 때 마다 하나님의 자녀된 내가 얼마나 복된 존재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듣기 위해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래서 복된 존재로 이 땅에 살아가기 위해서 예배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산상보훈의 시작과 핵심은 팔복의 말씀으로 시작되어졌습니다. 팔복의 말씀은 동사가 없는 감탄문입니다. 마카리오스. 복되도다. 너는 복되도다 하는 선언을 우리가 수없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주재를 다루며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이어온 산상보훈의 결론 오늘 본문입니다.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비유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두 종류의 건축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두 종류의 건축자는 지옥이냐 천국이냐 하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에 임페리얼호텔이 있습니다. 이 호텔은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로이드라이프라는 사람이 세운 건물입니다. 오래전에 이 건물이 지어질 때에 2년동안 기초작업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비용을 들인다, 너무 시간을 끈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수년의 골조공사가 끝난다음 다시 내장공사가 완전히 끝마치는데에 또다시 2년이 걸려서 세운 건물입니다. 1952년 동경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에 동경에 있던 모든 건물들이 무너지고 부서지고 초토화 되어지는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이 임페리얼호텔만큼은 그 안에 있는 물건하나 손상되지 않고 온전히 서 있을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금년을 "우리민족 선진화의 원년으로 삼자"고 역설했습니다. 제가 어는 신문에 사설을 쓰면서 바로 그것이다. 한국교회도 어게인 1907를 마친 이 해가 선진화의 원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120년동안은 한국교회가 싹이 나고 자리를 잡는 기간이었다면 이제는 건강하게 세워질 수 있는 제2의 출발과 도약할 수 있는 한국교회 건강의 원년, 선진화의 원년이 되자고 사설을 썼습니다.
세계에서 고층빌딩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뉴욕의 맨하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비롯하여 하늘을 찌르는 빌딩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 섬이라고 할 수 있는 조그마한 도시에 어떻게 엄청난 빌딩들이 들어설 수 있는 비밀이 어디에 있을까? 많은 건축가들은 뉴욕 도시는 그 지하가 거대한 암반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모든 빌딩들을 견딜 수 있고 빌딩들이 건강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기본이 중요하고 기초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건축과 비유입니다. 하나는 모래 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II. 「그러므로」의 문제
오늘 본문은 24절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 "그러므로"는 앞에 어떤 내용을 받았다는 얘기입니다. 어떤 내용을 받았을까요?
첫째 마태복음 5장 6장 7장 산상보훈 전체의 내용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24절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나의 이 말이란 팔복으로 시작되었던 산상보훈,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가르치신 모든 내용을 이제는 너희들이 다 들었으므로 그런 얘기입니다.
둘째 산상보훈 전체라기보다는 24절 바로 앞에 나오는 내용을 받는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앞에 있는 진짜와 가짜는 열매로 안다는 교훈이 나옵니다. 21절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했을 때에 그 엑센트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 강조점이 어디에 있을까요? 여하에 따라서 산상보훈의 교훈은 대단히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했을 때 "내 아버지"에 엑센트가 있을 수 있습니다. "뜻대로"에 엑센트가 있을 수 있습니다. "행하는 자"에게 엑센트가 있을 수 있습니다.
"행하는 자"에 강조점이 있다고 봅시다. 산상보훈의 말씀이 아무리 귀하고 귀해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실천하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듣기만 하고 말씀을 행하지 않으면 멸망받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실천을 강조한 본문이다. 결론이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뜻대로"에 엑센트가 있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이 땅에서 행하고 실천하고 살아보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너희들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 나라 천국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내 아버지"에 엑센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땅에 뜻이 많지만 내 아버지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생각대로 살고 네 계획대로 살고 네 비전을 마음대로 만들어서 살아가면 안된다. 그것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네 멋대로 살지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디에 엑센트가 있다고 판단되어지십니까? 가장 많은 주석은 "행하는 자"에 엑센트를 두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우선, 성경 전체의 교훈에 비추어 볼 때 큰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는 행함을 보면 안다는 것이지요. 또한 이 설명은 마태복음 전체 맥락에서 볼 때 큰 문제가 없습니다. 마태는 여러 곳에서 의를 행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5장 6장 7장 산상보훈에서는 권세있는 가르침을 가르쳐주신 예수님께서 8장부터는 권세를 행하시는 것입니다. 가르침과 행함은 마태복음의 두 기둥과도 같습니다.
III. 두 종류의 집
"행하는 자"에 엑센트를 두면 본문은 두 종류의 집에 관한 비유로 이해되어집니다. 제가 처음에 설교제목으로 잡았던 반석위에 세운 집 제목에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게 볼 때 첫째 이 세상에 볼 때 집 짓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세상 모든 사람들은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집은 사치품이 아닙니다. 필수품입니다. 여흥이나 오락을 위해 짓는 것이 아닙니다. 필수품입니다.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취미나 여가선용이나 악세사리나 보약이 아닙니다. 주식이요 필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어떤 집을 지었느냐에 따라서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집을 짓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집을 짓습니다. 어떤 집을 짓느냐 여하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심판을 받게 될 것이지요. 몇 층 짜리 집을 지었느냐. 어떤 모양의 집을 지었느냐. 잘 지었느냐 못 지었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천국의 바로메타가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절 21절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립 서비스만 하지 말고 입으로만 하나님 그러지 말고 네가 하나님 앞에 보여줄 열매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무엇을 행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매주일 마다 들었던 설교의 열매를 가지고 이번 주일 예배를 드리느냐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22절은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때에 주님의 충격적인 대답이 들려옵니다.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아니하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주님이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산상보훈을 설교하신 예수님 그 말씀대로 "행할 것"을 마지막 결론에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집 짓는 문제는 종말론적인 문제라고 본 것이지요. 얼마나 열심히 집을 지었느냐가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모래위에 지어진 집, 반석위에 지어진 집, 거기에 따라서 얼마나 땀을 흘리고 얼마나 수고했느냐에 따라서 부실공사가 되기도 하고 건강한 집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IV. 건축자 비유
엑센트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데에 두면 이런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경 전체에 비추어 볼때에 마태복음의 사상에 비추어 볼때에 큰 문제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설교했고 또 그 설교를 듣고 모든 사람들이 감동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상의 교훈과 설명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살펴보면 이런 설명에 문제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놀랍게도 두 종류의 집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 건축자 사람에 대한 비유라는 것을 한번만 읽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이 행동, 실천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이 아닙니다. 업적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묻는 것입니다. 집이 어떻게 지어졌느냐. 10층 짜리 빌딩을 지었느냐. 원두막 한 채를 지었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24절에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사람이야기 이지요.
26절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 이야기입니다. 집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산상 보훈의 결론은 내 인생의 업적이 무엇이냐를 묻는 업적을 가지고 심판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의 기초가 무엇이냐를 묻는 본질적인 질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본질을 경험했느냐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기초를 바꾸었느냐는 것입니다. 돈 위에 집을 짓고 명예 위에 집을 짓고 세상의 욕망 위에 집을 짓는 내 인생의 기초가 예수로 바뀌어진 경험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존재가 달라진 경험이 있느냐를 묻는 것이지 얼마나 잘 지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엑센트 논쟁과 마찬가지로 24절, 26절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 어디에 엑센트가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여기 "행하는 자"에 엑센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 말을 듣고" 앞부분에 엑센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6절 역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했을 때에 이게 무슨 뜻일까요? 아니한다. No. 이 말이 어디에 걸릴까요? 앞에 걸릴 수도 있고 뒤에 걸릴 수도 있고 전체에 걸릴 수도 있는 내용입니다. 원문적으로 그렇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하는 것을 앞에 걸면 "나의 이 말도 듣지 아니하고 네 멋대로 행하는 자" 이런 뜻이 되겠지요. 뒤에 걸면 "나의 이 말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 이런 뜻이 되겠지요. 이 부정문이 전체를 받는다고 보면 기초가 잘못된 인생,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말씀의 기초가 무엇인지 모르는 인생, 그래서 그 행함이 허무한 인생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네가 열심히 살았느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 행함이 하나님의 뜻이었느냐. 그 행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었느냐. 네가 가진 인생의 목적과 비전이 바른 것이었느냐. 이걸 묻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아무리 주여 주여 주의 이름을 팔아도, 주의 이름으로 세상을 심판하고 책망하는 선지자 노릇을 해도,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어도 그 기초가 잘못되었으면 너의 삶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지요. 예수 믿지 않고 아무리 세상에서 올바른 삶을 살았다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공로가 되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보증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 산상보훈의 결론은 인생의 반석, 기초를 묻는 심판입니다. 실천하고 행하라는 말이 아니지요. 두 종류의 집, 신앙의 성취와 업적을 묻는 질문이라고 쉽게 생각하게 만든 찬송이 한곡 있습니다. 주의 말씀 듣고서 준행하는 자는 반석위에 터 닦고 집을 지음 같아
이 찬송이 오늘 본문을 잘못 해석하게 한, 이 찬송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선입견을 가지고 이 본문을 읽게 만든 잘못이 이 찬송에 있다는 것이지요.
주의 말씀 듣고서 행치 않는 자는 모래위에 터 닦고 집을 지음 같아
후렴 잘짓고 잘짓세 우리집 잘짓세
이 찬송이 오늘 본문에 우리로 하여금 선입견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잘 지으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지혜로운 건축가가 되라는 것입니다. 네 인생에 본질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산상보훈의 시작은 복되도다. 자기 자신이 복덩어리인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은 내 인생의 기초, 반석이 예수되셨음을 발견하고 감격하는 것이지요. 몇 층 짜리 빌딩을 짓느냐, 어떤 집을 짓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기초를 바꾸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늘 내 인생의 기초를 두고 열심히 살라는 문제가 아니라 내 인생의 목적이 성경적이냐 비전이 하나님의 뜻에 맞느냐 하나님의 뜻을 아버지의 뜻대로 내가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V. 반석
한소망교회가 16년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맨손 맨몸 맨땅으로 무릎꿇고 빈 들판에 돗자리 한 장 깔면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는 기쁨을 얻으리라 생각하고 시작했던 교회가 16년동안 이만큼 성장되었으면 한국교회가 꾸준히 마이너스 성장할 때에 한 교회가 세워졌다고 하면 제로 베이스에서 이만큼 교회가 세워지고 이만한 예배당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한국교회에 도전이 되고 귀감이 되고도 남을만 하지요. 또 꿈땅에 비전채플 건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가진 어떤 꿈이라 할지라도 신앙적인 어떤 비전이라 할지라도 그건 모두를 담아낼 수 있는 큰 그릇이 될 것입니다. 이 교회동안 기초가 무엇이냐. 얼마만큼 열심히 짓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비전이 제대로 되어 있느냐. 기초가 제대로 되어 있느냐. 다시 한번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예루살렘을 올라가시다 말고 문득 방향을 돌리셔서 헤르몬산에 오르셨습니다. 헤르몬산에 오르기 직전에 가이사랴 빌립보에 갔더니 그 동리 사람들의 비전이 다 로마에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잘 살고 나라가 부흥되고 로마를 통해서 세계가 정복되어지고 우상의 탑이 위용을 자랑하며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로마 황제의 신상이 그 도시를 지나는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도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선지자 중에 한 사람입니다.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야의 아들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동리 사람들에게 메시야는 따로 있습니다. 로마 황제가 메시야입니다. 이 도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은 따로 있습니다. 로마 황제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들은 생각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너무 기뻐하시며 가슴깊이 숨겨두었던 교회의 비밀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여기 이 본문에서도 반석이 무엇이냐. 기초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베드로가 반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반석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할때에 베드로의 이름이 반석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위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것이지요. 로마 천주교회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1대 교황입니다. 교회는 교황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살펴보면 베드로는 "페트로스" 작은 돌멩이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반석이라 할 때 "페트라" 큰바위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랭귀지 게임이지요. 베드로란 한 인물에 세운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겠다고 그러시니 베드로가 앞을 가로막으면서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그때 가차없이 "사탄아 물러가라." 이렇게도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이렇게도 쉽게 사탄에 오염될 수 있는 베드로위에 교회가 세워진다고 하면 한 인간의 인품위에, 한 인간의 성품위에, 한 인간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이 땅의 모든 교회라고 한다면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오실 때까지 이 교회는 역사 앞에 도도히 흘러가며 인류의 구원의 방주가 될 것입니다.
베드로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게 아닙니다. 개신교에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고백의 터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고 보는 것이지요. 많은 복음적인 개신교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고백의 대상이 누구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의 내용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예수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만이 영원한 반석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반석은 그리스도시니라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도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라는 한 인간이 인생의 기초가 달라졌느냐. 너라는 한 인간이 인생의 반석이 달라졌느냐. 너의 비전이 삶의 목적이 성경으로부터 온 것이냐. 너의 가정의 가치가 자녀를 교육하고 함께 가정을 꾸려나가는 모든 가치가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느냐. 기초가 예수이냐. 예수로부터 그 목적이 온 것이냐. 한소망교회 공동체의 가치가 비전채플을 세우는 이유가 또 비전채플을 세우는 이유의 목회 철학과 원리와 목회 실천이 성경적이냐.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이냐. 그 말씀을 듣고 말씀을 행하는 바로 그 가치에서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의 기초를 묻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복된 존재인지 그 복된 존재가 내가 나를 보기에도 실망스럽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예수님이 나를 복되다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존재가 달라졌습니다. 신분이 달라진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그 존재가 이 땅을 살아갈 때에 복된 열매는 저절로 맺혀지게 되는 것이고 그 복덩어리들이 모일 때에 가정은 아브라함의 가문 새로운 복된 가문이 되는 것이고 그들이 교회 공동체를 이룰 때에 그 공동체는 그 반석을 예수 위에 터 닦고 집을 지어 이 땅을 이끌어 가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VI. 무리가 듣고 놀라니
본질을 간파하는 이 말씀을 듣고 듣는 이들이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산상보훈이 끝난 다음에 이 말씀을 들은 무리들의 소감이 마지막 마태복음 5장이 끝나고 6장이 끝나고 7장의 모든 결론이 끝난 다음에 28절 29절은 "듣는 무리들이 놀라니"라는 말씀으로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는 권위있는 자와 같도다. 권세있는 자와 같도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다. 수천년 동안 내려왔던 구약의 율법과 계명을 한 마디로 이렇게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한 마디로 간파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하나님이다. 권세있는 자와 같도다. 무리가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농군학교 청년시절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고구마 하나가 머리통만합니다. 고구마 간식을 주는데 여섯토막 여덟토막을 내어도 됩니다. 그 고구마를 들고 얘기를 합니다. 고구마가 왜 이렇게 커 진줄 아느냐구. 고 김용기 장로님이 젊은 청년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나는 고구마가 잠자는 걸 보지 못하고 충격을 준다. 아침에 이슬을 먹고 이놈들이 푹 퍼져 잠들어 있으면 호미를 들고가 흙을 푹돋워 주면서 손으로 잠자는 고구마를 툭툭 건드려 준답니다. 빗자루로 고구마를 슬슬 쓸어주면서 충격을 준다는 것입니다. 충격을 받으면 고구마가 긴장을 해서 커진답니다. 한번 충격을 받을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커진답니다. 그래서 고구마가 머리통만해졌다고 설명하는 걸 들었습니다.
지난 이천년동안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모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듣고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는 모든 사람들이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불이 되어서 추하고 더러운 우리 인생을 불살라 버립니다. 그 말씀은 칼이 되어서 세상에서 받았던 신앙생활하면서 받았던 더러운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수술해 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방망이가 되어서 세상에서 닫혀졌던 자기인간의 가치로 꽁꽁 얼어붙었던 고드름처럼 싸늘하게 식어있는 심장을 때려 부수는 방망이 역할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물이 되어서 세상 살아가다 찌꺼기들 더러운 먼지들을 씻어내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빛이 되어서 내 인생의 갈길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고 또 그 말씀은 빛이 되어서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이 충격은 세상의 충격을 이기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충격을 받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상의 어떤 핍박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날 위해 죽었으니 나 예수 위해 죽을 수 있다고 한다면 순교는 최고의 영광, 최고의 면류관인줄 알고 오늘도 순교의 피는 흘러갔고 내일도 순교의 피는 흘러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실패와 좌절 가운데 넋두리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격을 받은 자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없다고 말할 때에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어둡다고 애기할 때에 예수 안에서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희망을 선포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유혹과 도전 앞에 당당히 자기를 지킬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아브라함이 이 말씀에 충격을 받고 복덩어리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이 말씀에 충격을 받고 민족을 구원했습니다. 자기 비전에 열심히 살아가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을 넘어가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비전이 바뀌어집니다. 삶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인생의 철학이 달라집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인생에 기초를 묻고 있습니다. 너는 이미 복덩어리가 되었도다. 너는 반석위에 집을 짓게 될 거야. 걱정하지 말아라. 이 세상에 고난도 있을 거야. 바람도 불거야. 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고 창수는 땅에서 쏟아지는 것이고 바람은 사방에서 불어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도 위기가 있고 땅에서도 위기가 있고 사방에 인생의 위기가 있지만 너는 망하지 않는다. 오늘이 네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 할찌라도 너는 하나님 앞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이 너를 결코 삼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모래의 한계
마 7:24-29 / 김동호 목사
살아계셨으면 만 100세가 넘으셨을 저희 선친은 시대에 잘 맞지 않는 멋쟁이셨습니다. 영하 15도 20도의 추위에도 바지 주름이 서지 않는다고 내복을 입지 않으셨던 분이고, 그 당시에도 휘겨 스케이트와 테니스를 치셨고 유도도 3단으로 연세가 드셔서도 실력 발휘를 종종 하시던 어른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구도 꽤 치셔서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당구치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이 같이 당구를 시작하면 거의 예외 없이 한국 사람이 빠르답니다. 한국 사람이 100점을 치면 대개 일본 사람들은 50점대에서 낑낑대고, 우리 한국 사람이 200점정도 칠 때 쯤 되면 겨우 100여점을 칠만큼 일본인들은 보편적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뒤진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거의 예외 없이 500점은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보다 먼저 친답니다.
한국 사람들은 당구를 배울 때 대개 성격이 급해서 꼼꼼히 기초부터 잘 배우려 하지 않는답니다. 어느 정도 기초가 되면 더 이상 배우려하지 않고 그냥 대충 감으로 치려고 하는데, 그 감이 아주 뛰어나서 일본 사람들은 좀처럼 따라 오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처음부터 기초를 중시 한다는 것입니다. 더디 가는 한이 있어도 기초를 꼼꼼히 배우고 훈련한다는 것입니다.
대충 감으로 200점과 300점 정도는 칠 수 있는데 500점은 그것으로는 안 된답니다. 기초가 튼튼하여야만 칠 수 있는 점수랍니다. 당연히 200점에서 300점 까지는 우리 한국 사람들이 대개 앞서 가지만, 대부분의 우리 한국 사람들은 거기서 끝나고 500점은 일본 사람들이 먼저 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이야기 입니다.
우리나라 경제는 그동안 초고속 성장을 해 왔습니다. 저는 50대 중반의 나이입니다. 그런데 제가 살아온 50년 동안 저는 세계 최빈국에서 아직은 좀 모자라지만 그래도 선진국이라고 하는 OECD 국가의 삶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이렇게 단기간에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는 아마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국민소득 10,000불 달성 기록이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국민소득 10,000불을 달성한지가 벌써 여러 해 되었는데 아직도 우리나라는 거기서 제 자리 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10,000불 까지는 그 어느 나라보다 빨랐는데, 10,000불에서 20,000불로 올라서는 데는 영 실력 발휘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저희 아버지로부터 들은 당구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기초를 등한히 하고 경제와 정치를 요령과 수와 감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우리나라와 사회를 이끌어 왔던 시대정신이 있었다면 그것은 원칙이 아니라 요령이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 사회에 팽배했던 사상이 있었다면 그것은 ‘꿩 잡는 게 매다’라는 말과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꿩 잡는 게 매다’라는 말은 일반 사회에서만 통용되던 말이 아니라 부끄럽게도 교회에서까지 통용되던 말이었습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쓰던지 간에 교회가 수적으로 부흥하면 된다는 뜻에서 통용되던 말이었습니다.
공부를 하든, 운동을 하든, 음악을 하든, 미술을 하든, 사업을 하든, 정치를 하든, 목회를 하든, 무엇을 하든 끝까지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하려면 기초가 튼튼해야 하고 기본이 탄탄해야만 합니다. 원리와 원칙을 중히 여기고 무슨 일을 하든지 감과 요령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동안 기초와 기본 그리고 원리와 원칙을 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감과 요령으로 초고속성장을 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요령은 IMF 전까지 통하였습니다. 그 이상의 발전은 그것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었습니다. 작고 낮은 집은 기초를 튼튼히 파지 않아도 대충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크고 높은 집은 기초를 튼튼히 하지 않고는 절대로 지을 수 없습니다. 전에 예배당을 지을 때 보니 지하를 10m도 넘게 파고 건물의 기초를 공사하는데 공사비와 공사기간의 상당부분을 할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작은 판자 집 하나를 지을 때 설계는 거의 필요 없습니다. 대충 생각하고 열심히 뚝딱 거리면 대충 비 가리고 살 수 있는 판자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크고 아름답고 안전한 집을 지으려면 훌륭한 설계도가 있어야만 합니다. 크고 아름답고 안전한 집을 설계하는 설계사는 건축의 원리와 원칙에 통달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집을 짓는다면 백발백중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크고 아름답고 안전한 집을 건축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라면 건축의 원리와 원칙에 통달하고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리고 설계대로 성실하게 시공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것은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이고, 정치도 마찬가지이고, 신앙도 마찬가지이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 동안 우리나라는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보다 쉽습니다. 빠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생에는 반듯이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는 것과 같은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승부는 거기서 납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그 때마다 무너집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더디고 힘들어도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날 때 승부가 납니다. 그는 세상의 환경과 여건이 나쁠 때 더 실력 발휘를 합니다. 그는 더딘 것 같으나 결과적으로 보면 빠릅니다. 200점 당구에는 더뎠지만, 고수인 500점 당구는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른 말씀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것을 말씀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저는 이제 50대 중반입니다. 50대 중반인 제가 요즘 깊이,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은퇴입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를 언제 은퇴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은퇴하여야 할까?’ 제 은퇴가 이제 10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잘 준비하여 좋은 은퇴를 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저를 위하여 좋고, 여러분들을 위하여 좋고, 그리고 우리 사랑하는 높은 뜻 숭의교회를 위하여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정년 은퇴를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것은 제가 정년 은퇴하기 전에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모든 면에서 자리가 잡히고 건강한 교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은퇴 한 후에 교회가 흔들린다면 그것은 건강하지 못한 교회입니다. 제가 은퇴 한 후에도 교회가 까딱 없이 튼튼한 교회가 되어야만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제 기도의 제목은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면 천안에 너무 크지 않은 수련원을 지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면 그곳에 아주 좋은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세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수련원과 학교를 위하여 몇 백 명 정도 들어가는 채플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채플을 이용해 그곳에 교회를 개척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개척을 제가 직접 나가서 하면 좋겠고 거기서 정년 은퇴를 하였으면 제일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은퇴 후 죽을 때까지 할 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은퇴 후 교회에 이런 저런 면으로 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일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 일을 오래 동안 생각하고 찾고 있었는데 최근에 거의 확정적으로 생각을 굳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식과 법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학교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식과 법을 정리하고, 그것을 교재화하고, 훈련과정과 코스를 만들고 어린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훈련하고, 청소년들에게 가르치고 훈련하고, 청년들에게 가르치고 훈련하고, 신학생들에게 가르치고 훈련하고, 목회자들에게 가르치고 훈련하고, 장로들에게 가르치고 훈련하고, 정치인들에게 가르치고 훈련하고, 경제인들에게 가르치고 훈련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훈련하는 학교를 만들고 그 학교의 훈장 노릇을 죽을 때까지 하다가 하나님 앞에 가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와 교회를 모래 공화국이 아닌 반석 공화국이 되게 하는데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쏟다가 하나님 앞에 가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 청어람 교육관과 천안에 지어질 수련원이 그와 같은 교육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센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예수를 믿어 오면서, 이제까지 목회를 해 오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의 반석이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혼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었습니다. 그런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창세기는 하나님의 정신, 하나님의 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2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신’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신’은 하나님의 정신과 하나님의 혼을 의미합니다. 영어로 'spirit of God'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spirit of God'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저는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혼을 불어 넣고 주고 싶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반석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혼을 불어 넣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을 가르치고 훈련시킬 수만 있다면, 저는 그것이 세상 모든 사람을 반석위에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세상의 모든 것 다시 말해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예술, 교육 그리고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앞으로 더 많이 연구하고 정리하고 개발하여야 하겠지만, 확실하게 정리되는 개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Lordship과 정직과 용기와 민주와 사랑과 나눔(노블리스 오블리제)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예수님은 반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이 고백이 없다면,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모래위에 세운 집과 같아 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있는 힘을 다하여 사람들에게 이 고백을 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훈련할 것입니다.
요 몇 주 계속해서 설교를 하였습니다만 저는 정직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원칙과 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정직만 해서는 못 산다’고 우리를 속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 증거 하지 말라’시며 정직하라 말씀하십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천번 만번 옳습니다. 선진사회의 기본은 믿음입니다. 신용입니다. 정직을 훈련하고 연습하지 않고는 절대로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정직을 가르치고 훈련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나라는 결국 무너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좀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며 정직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면 내 사랑하는 우리 조국을 정말 세상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삶의 기본이 되고 원칙이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정신 중에 하나는 사람을 귀히 여기는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 보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고 사람에 대하여 예를 갖출 줄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인격을 존중하시어,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가 문을 열어야만 들어오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참으로 폭력적입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함부로 무시하고 자기의 고집을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이 문제가 아주 심각합니다. 사람들에게 민주와 평화를 가르치고 훈련하여야만 합니다. 이 훈련이 되지 않으면 가정의 평화와 사회의 평화가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평화 없이 세상은 절대로 발전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5장 1절에 보면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식은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섬기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식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노블리스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잘못된 풍조가 있습니다. 잘못된 사회주의 성향이 강합니다. 사회주의적인 평등개념이 정의로 인식되지만 그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원리가 아닙니다. 그럴 듯 해 보이지만 그것은 다 같이 다 바보 되고, 다 같이 다 약해지고, 다 같이 다 가난해 지자는 것입니다. 노블리스를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존경받을만한 진정한 노블리스를 키워야만 합니다. 노블리스의 오블리제를 감당할 줄 아는 근사한 노블리스를 키워야만 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돈 몇 푼만이 아닌 인격적으로 약자들이 강한 자들의 섬김과 도움을 받는 나라를 훈련하여야만 합니다. 사람들은 저의 신학과 철학을 고지론과 청부론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저의 청부론과 고지론의 핵심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입니다.
4월 달부터 시작되는 바른교회 아카데미에서 이와 같은 주제들을 다루고 훈련할 것입니다. 5월 달부터 시작되는 신학생들 포럼에서 이와 같은 주제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훈련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교육과 훈련을 우리 교인들에게 확대해 나갈 것입니다.
교육과 훈련을 받는 사람들의 삶이 변하기까지 욕심을 내고 헌신하고 투자할 것입니다. 기도하며 매달려 이 일을 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변하면, 그리고 하나님의 원리와 원칙이 진정한 의미의 성장과 성공의 엔진이라는 것이 증명이 되면 사람들이 모두 다 이 훈련을 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옛날(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이와 같은 원칙을 고집하였던 가나안 농군학교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줄지어 지원을 하고 훈련을 받았듯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원리만 고집하지 않고, 가장 발전된 훈련프로그램을 적용하는 학교를 세우고 거기에 올인을 하고 싶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 동안 우리는 모래의 철학과 사상위에 우리나라를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철학은 모래의 철학이요 사상입니다. 교회까지도 ‘꿩 잡는 게 매’라며 기본과 원칙을 무시하고 목회를 해 왔습니다.
교회와 세상이 모두 다 모래의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교회와 나라를 반석 위에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하여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부르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그와 같은 교회가 되기 위하여 교인인 여러분들이 먼저 여러분의 삶을 반석 위에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반석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식과 원칙의 증인들이 되어 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역의 전도사들이 되어 주셔야 할 것입니다.
한번 왔다 가는 짧은 인생, 밥이나 먹다가 죽는 것은 너무 억울합니다. 너무 바보 같습니다. 정말 인생을 걸만한 일에 우리의 생명을 걸고 헌신하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잘 했다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반석 위에 세워지는 교회
마태복음 7: 24-27 / 안창국 목사
오늘은 우리 새비전교회가 창립된 지 1년이 되는, 첫 돌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파가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 교회들을 다방에다 비유하기도 합니다. 다방 수만큼이나 교회수가 많다는 것입니다. 밤에 고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면 빨간 십자가 네온사인이 수없이 많다며 한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도 무분별하게 세워지는 교회들이 꼭 좋아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점점 더 추악해지고 패역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그나마 교회가 늘어가는 것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곳곳에 전화방이니 남성 전용휴게방이니, 룸살롱 등이 얼마나 많이 늘어가고 있습니까? 가는 곳마다 퇴폐업소들이 즐비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타락한 길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여기저기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 속에 교회가 많이 생겨난다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지요.
문제는 교회가 많이 생겨나기는 하는데 교회다운 교회가 없다는 것이 문제지요. 교회는 많은데 갈만한 교회가 없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세상에서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는 교회가 없는 것이 문제란 말입니다. 이 수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생명력을 가지고 그 역할을 감당한다면, 서로가 순수하게 하나님께서 각 교회에게 부여하신 사명과 비전을 제대로 감당한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바뀌겠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겠지요.
사실 이 주변에도 교회가 많습니다. 상가마다 교회가 들어서 있습니다. 이곳에 처음 교회를 개척하려고 할 때 잠깐 주춤했습니다. 물론 이 곳은 이미 교회가 있었던 자리입니다만 조금은 망설여지더라구요. 그러나 우리 새비전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된다면, 이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교회가 된다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명과 비전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 교회로 자라간다면 교회는 세워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튼 이 세상에는 수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교회들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보다 우리는 우리 교회가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로 세워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두 종류의 집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 집은 반석 위에 세워진 집이고, 한 집은 모래 위에 세워진 집입니다. 이 두 집은 누가 보더라도 차이가 있습니다. 누구나 집을 반석 위에 세우는 것이 좋은 집이라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것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집을 든든하게 짓는 것은 아닙니다. 이 주변에도 요 근래 많은 집들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공사 현장을 지나치면서 집이 지어지는 것을 살펴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집은 든든하게 지어지고 있어서 들어가 살고 싶은 집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집은 너무 부실하게 지어지는 것이 보여서 그런 집에서는 살기 싫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집을 짓는 사람들이 부실하게 짓고 싶어서 짓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모두 다 집을 든든하게 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집을 든든하게 짓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세워가는 데 있어서 누구나 교회다운 교회를 꿈꿉니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로 세워져 가는 것은 아니더란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 새비전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진 집처럼 교회다운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이 세상에 꼭 필요한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오늘의 본문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교회가 반석 위에 세워진 든든한 하나님의 교회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두 집은 무조건 서로 다른 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두 집을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가 바른 교회로 세워지기 위한 좋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1. 먼저 이 두 집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1) 집이라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집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삼대 요소를 일컬어 의식주(衣食住)라고 이야기 합니다. 입는 것과, 먹는 것과 살 집이 필수적이라는 것이지요. 모래 위에 세워졌건, 반석 위에 세워졌건 그 집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필요한 필수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어떤 집을 짓던 그것은 필수적 필요에 의해 세워진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필수적 요소입니다. 제가 고등학교에서 「윤리」라는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데 윤리 교과서에서도 “종교생활 윤리”라는 과가 있습니다. 거기에서도 인간은 종교적 성향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은 나름대로 종교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려운 일을 겪으면 하나님, 신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작년 미국 뉴욕에서 발생한 9.11테러가 발생한 직후에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급속하게 늘었다고 합니다. 위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 메들린 머리 오헤어라는, 미국의 무신론학회장을 지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반대입장을 펴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소원대로 재판정에서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는 판결이 났습니다. 이때 이 오헤어라는 여사는 “Oh, my God!”이라고 외쳤습니다. 이 장면이 미국 언론에 대서특필된 적이 있습니다. 무신론학자가 재판에서 이기니까 하나님을 찾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은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 역시 이 땅에 필수적인 기관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원하셨습니다.
(2) 집은 둘 다 완성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집 다 완성되었습니다. 반석 위에 짓던, 모래 위에 짓던 두 집 다 모두 완성된 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외형적으로 볼 때는 완성된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두 집 다 똑같은 설계도를 가지고, 똑같은 자재를 가지고 지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을 경우에는 두 집은 외형적으로 볼 때 똑 같았을 것입니다. 홍수가 나고 태풍이 불어치기 전까지는 전혀 구별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즘 집들을 얼마나 예쁘게 짓는지 모릅니다. 아주 그림 같은 집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예쁘고 좋아 보인다고 해서 그 집이l 좋은 집은 아닙니다. 영국엘 가보니까 일반 가정들이 사는 주택들이 대개 50년, 100년 된 집들이 많더라구요. 겉으로 볼 때는 굉장히 낡아 보입니다. 런던 시내의 빌딩들도 수백 년 된 낡은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런던 시내를 지나다니면 마치 수백 년 전으로 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그 집들에 들어가 보면 집이 튼튼합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 반석 위에 세워진 집. 두 집 다 완성되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어떤 집이 잘 지어진 집인지 분별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크고, 화려하고, 프로그램도 훌륭하고, 재정적으로도 풍부하고, 좋은 시설과 많은 성도수를 자랑합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들은 초라해 보입니다. 성도도 별로 없습니다. 상가를 얻어서 간신히 예배를 드리는 데에 만족합니다. 일꾼이 부족하고 인적 자원이 부족하니 다양한 프로그램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모든 교회는 교회로서 세워져 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나름대로 교회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어느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인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모두가 기도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예배에도 잘 참석합니다. 집사가 되기도 하고, 교사로 섬기기도 합니다. 외형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외형만으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 종교적 의식, 습관이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외형이 교회다운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2. 또한 이 두 집은 서로 다른 점도 있습니다.
(1) 먼저 이 두 집은 짓는 과정에서 달랐습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에는 그저 두 집이 하나는 반석 위에, 하나는 모래 위에 세워졌다고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6장을 보면 동일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누가라는 제자가 기록하고 있는데 48절에, 마태복음에서는 기록하지 않은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柱礎)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49절,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자, 두 집의 차이를 알겠습니까?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 그리고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 반석 위에 지은 사람은 깊이 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래 위에 지은 사람은 그저 “흙 위에” 집을 지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석 위에 지은 사람은 주초(柱礎), 즉 주춧돌을 두고 기둥을 세우며 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모래 위에 지은 사람은 “주초 없이” 집을 지었습니다.
아마 집 빨리 짓기 경시대회를 했다면 모래 위에 세운 사람이 이겼겠지요. 그러나 집을 짓는 데에는 빨리 짓는 것보다 든든하게 짓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무튼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집을 짓는데 더 많은 노력과 수고가 있었고, 더 많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개척하고 빨리 성장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러다보니 진리 아닌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인간적인 방법들을, 성경적이지 않은 방법들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기초를 다지는 일에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저는 교회가 빨리 성장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왕이면 빨리 성장하면 좋겠지요. 그러나 나는 빨리 성장하기보다는 제대로, 기초를 세워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골로새서 2장 6, 7절을 한 번 볼까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뿌리가 든든히 박혀 있는 나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뿌리를 깊이 박고 있는 나무는 웬만한 가뭄에 말라죽지 않습니다. 즉 그만큼 뿌리를 깊이 박는 것, 기초를 든든히 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말씀이지요.
(2) 반석 위에 세워진 집은 역경에 강합니다.
결정적으로 제대로 된 집과 대충 지어진 집은 역경이 오면 알 수 있습니다. 비가 엄청 오는 장마나 태풍이 몰아치거나, 강추위와 무더위가 오면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려움 속에서 더 찬란히 드러납니다. 또한 참된 교회인지 아닌지는 그 교회에 역경이 찾아올 때 알 수 있습니다. 든든하게 세워진 교회 공동체는 어려움이 닥쳐오면 함께 기도하고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더욱 든든해집니다. 마치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제대로 되지 못한 교회는 어려움이 찾아오면 서로 비난하고, 나뉘어져서 교회가 금방 두 갈래, 세 갈래로 갈라져 버립니다. 평안할 때에는, 모든 것이 안정적일 때에는 그 진가를 알 수 없습니다. 다 같아 보입니다. 다 훌륭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가치는 어려움과 고통, 위기가 찾아올 때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청년들의 신앙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남자는 군대를 가봐야, 여자는 시집을 가봐야 진짜 신앙인인지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어려움이나 위기, 생활의 급격한 변화와 좋지 못한 환경 속에서 그 신앙의 진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이아몬드 식별법을 아십니까? 다이아몬드를 물 속에 넣어보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 수 있답니다. 가짜 다이아몬드는 물 속에 집어넣으면 그 찬란했던 빛이 사라진답니다. 그런데 진짜 다이아몬드는 물 속에 집어넣어도 그 영롱한 빛이 찬란하게 빛난다는 것입니다. 진짜는 어려움 속에 들어가 봐야 알 수 있습니다.
(3) 반석 위에 세워진 집은 기초가 튼튼합니다.
일본 도쿄에는 임페리얼이라는 호텔이 있다고 합니다. 이 호텔을 지은 사람은 미국의 건축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라는 사람인데 이 호텔을 지으면서 라이트라는 이 사람은 기초공사를 하는데 무려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기초공사 2년, 나머지 공사 2년. 그래서 합 4년 만에 호텔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이 호텔은 무리하게 돈을 많이 들여서 지은 건물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호텔이 지어진 뒤 52년이 지난 후에 동경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 대지진 때에 그 안에 있는 것이 하나도 손상되지 않고 견고하게 서있었던 건물은 이 호텔 하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기초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47절에서도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반석 위에 세운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면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 교회는 말씀의 기초 위에 든든히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이제 일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우리 새비전교회는 아직 초창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어디에 우리 교회의 초점을 맞추어야 할까요? 반석 위에 세워진 든든한 집처럼, 반석 위에 세워진 든든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 기초를 든든히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그 뜻이 분명하게 나타나있는 말씀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너무 많이 알고 있지만 행하지 않는 것이 요즘 그리스도인의 문제점입니다. 알기만 하는 그리스도인은 위험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비전, 사명을 읊어대면서 그 사명과 비전과 상관없이 교회가 이끌어져 간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명과 비전에 충실한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올 한 해도 깊이 파고, 주초를 놓는, 기초를 든든히 다지는 귀한 한 해가 되길 기대합니다. 그것이 지난 한 해를 지나고 두 번째 해를 맞는 우리의 초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 여러분을 다지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명과 비전으로 우리 새비전교회의 기초를 단단히 다지는 귀한 해가 되도록 우리 모두 함께 말씀 앞에 무릎 꿇고, 자신을 드리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반석위에 지은 집
마 7:24-27 / 임영수 목사
신학자 윌리엄 버클레이는“건축 재료는 인생과 비슷한 데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성된 인생을 제공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재료를 제공해 주시는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사용해서 자신의 인생을 지어 내야만 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버클레이는 “하나님은 인생의 재료로서 우리에게 재능과 능력을 가진 우리자신을 제공해 주시고, 아름답고 풍성한 세계를 다시 우리와 더불어 함께 살아갈 동료를 제공해 주시며, 그리고 ‘이러한 재료들을 다루어 가치 있는 인생을 지어 내어라’고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성된 제품이 아니라 재료를 제공해 주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제공해 주시며, 우리가 무엇이든지 혼자서 할 수 있도록 격려하며 힘이 되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침이다.”고 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삶 속에서 폭풍과 홍수가 반복하여 우리를 덮친다.”고 했습니다. 안셀름 그륀 은“이것이 우리 인간 실존의 일부분이다.”고 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신 인생의 재료들을 가지고 삶 속에서 반복하여 일어나는 폭풍과 홍수 가운데서 잘 견디어 낼 수 있는 집을 짓는 사람이 있고, 폭풍과 홍수가 덮칠 때 도저히 견디어 낼 수 없는 집을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전자는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며, 후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집은 꿈속에서 항상 우리의 의식 상태를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집이 무너진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폭풍과 홍수가 덮칠 때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삶이란“자기 본질에 맞지 않게, 거슬려 사는 사람의 삶”을 뜻 합니다. 이렇게 자기 본질에 맞지 않게 사는 사람은 의식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리석다는 것은 무딘, 우둔한, 바보 같은 사람을 뜻합니다.
자기 본질에 맞지 않게 사는 사람의 몇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 지나치게 타인 지향적 입니다.
* 지나치게 외형 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 허구적인 이념이나, 사상에 쉽게 사로잡힙니다.
, 허세가 많습니다.
* 거짓, 불의로 재산과 명예, 권력의 기반을 쌓아 갑니다.
* 생의 궁극적 가치보다는 인기, 대중적인 칭찬에 자신의 생의 기반을 쌓아 갑니다.
* 폐쇄적이고 자기 개선이 없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삶을 사는 사람은 쉽게 상처를 받고, 좌절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매우 작은 시련도 견디어 내지 못하고 주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생의 기초가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생의 기반을 모래 위에 세웠기 때문입니다.
맞게 사는 사람은 삶 속에서 폭풍과 홍수가 반복하여 덮칠 때 넉넉히 지탱해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집을 지을 때 그 기초를 반석위에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의 몇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 그는 자기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습니다.
자신의 내적 상태와 조화를 이루어 갑니다.
* 그는 언제나 궁극적 가치를 소중히 여깁니다.
* 그는 허세적인 자랑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 그는 본질을 소중히 여깁니다.
* 그는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고 받아 드립니다.
* 그가 지향해 가는 생의 목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습니다.
성서에서는 자기 본질에 맞게 살아간, 즉 그의 집을 반석위에 지은 모범적인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요셉입니다.
요셉은 자기의 꿈에 귀를 기우리며 살았습니다.
심리학에서 꿈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말씀하시는 내면의 소리와 일치합니다. 요셉은 자기가 다른 형제들보다 사랑을 더 받는다는 이유로 막내인 자기를 비방하고, 증오하고, 거부한 형들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루우벤의 권유로 그들은 요셉을 구덩이 속으로 던져 넣기만 하고 결국에는 지나가는 상인에게 요셉을 팝니다. 상인들은 요셉을 이집트로 데려가 바로의 경호 대장인 보디발에게 팔아넘깁니다. 그 곳에서 요셉은 모든 일에 성공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형들의 질투가 요셉에게 해를 끼칠 수 없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고 팔아버렸어도 형들은 요셉에게 실재로 상처를 입힐 수가 없었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하나님 손 안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악의에 찬 형들의 힘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에게 해를 끼치고 싶어 했으나 실제로는 그것이 요셉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길이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관리인으로 임명되었을 때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유혹하며 요셉과 잠자리를 같이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 자신과 일치된 상태에서 보디발의 부인이 결정하도록 하지 않고 자기 양심에 따라 결정 하였습니다. 부인은 요셉을 모함하여 감옥에 넣었습니다. 다시금 운명이 요셉에게 등을 돌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감옥에서 계속 자기의 본질인 양심을 성실히 따랐습니다.
그는 죄수 생활을 하면서도 자유인으로 살았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하나님 손 안에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함께 갇혀 있는 사람들의 꿈을 풀이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이집트의 모든 마술사와 현자들이 풀 수 없었던 바로의 꿈을 해몽하기 위하여 그를 데리러 왔습니다.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몽했을 때 바로는 요셉에게 이집트 전체를 다스릴 권한을 주었습니다. 다시금 하나님께서 요셉을 질투하는 부당한 인간의 손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그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요셉에게 해를 끼치고 싶어 할수록 그것은 요셉에게 더 큰 명예가 되었다고 크리소스토모는 말했습니다.
안셀름 그륀은 말하기를 “요셉에게 견디기 어려운 많은 시련과 시험이 있었지만 그의 운명은 감옥에서 끝나지 않았으며, 하나님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불가침의 존엄성을 요셉자신에게 선사 하셨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드디어 그를 미워하고 괴롭혔던 형들까지도 용서하는 위대한 사람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에서 매우 값진 영적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미완성된 생을 허구와 거짓으로 지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 그의 인자하심, 선하심을 굳게 믿고 자신을 속이지 않고 진실의 기반위에 세워 가는 삶은 그 어떤 폭풍과 홍수에 의해서도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너져 내린다는 것은 그러한 시련들에 의해 상처 받고 좌절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의 시련가운데서 우리가 받은 깊은 마음의 상처까지도 값진 진주로 바꾸어 놓습니다. 값진 진주는 조개 속에서 많은 상처를 겪으면서 이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값진 진주로 바꾸어 놓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저의 생애에서 깊이 체험적으로 깨달아 오고 있습니다.
사람이 상처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 상처를 어떻게 다루어 가느냐? 가 중요합니다. 밖에서 입히는 상처를 자해로 받아 드릴 때에는 악순환만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을 객관화 시켜보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내어 놓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진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인생의 재료들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폭풍과 홍수에서도 무너져 내리지 않고, 지탱해 갈 수 있는 집을 지을 수 있을까? 또는 이미 잘못 지어져서 지탱해갈 수 없게 되었다면 어떻게 다시 지어갈 수 있을까? 라는 생의 물음은 우리 모두의 관심사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물음에 대해 “나의 말을 듣고 행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할 때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근거를 발견하게 되고 올바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사물에 대하여 올바른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실재를 올바르게 바라보는 사람, 사물과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는 사람은 더 이상 스스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도 더 이상 상처를 낼 수가 없습니다.
요셉의 경우 형들과의 적대관계도, 보디발의 부인이 한 모략도, 감옥도, 추방도 요셉에게는 상처를 낼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일을 그만두고, 반석위에 자신의 집을 지어가게 됩니다. 즉, 반복해서 상처를 입는 삶에서 벗어나 건강한 나 자신을 세워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폭우나 홍수도 바위위에 지은 집을 망가트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위에 자기 내면의 집을 세운 사람은 어떠한 상처로도 흔들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지와 경솔함과 부패로 모래위에 자기 집을 세운 사람은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집이 붕괴되는 것은 폭우 탓이 아니고 자신의 태만 탓입니다. 그는 태만으로 자신에게 손해를 입히고 상처를 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그릇된 삶의 표상들을 깨트려 버리고 올바른 표상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이 알게 모르게 그릇된 표상들을 많이 가지고 삽니다. 우리는 돈이나, 재물을 잃어버렸을 때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것들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표상, 즉 그러한 것들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러한 표상들은 우리의 우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물에 대해서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도 그릇된 표상을 많이 갖고 살아갑니다. 제가 고등학교 학생 시절에 저의 반에 다른 학생보다 키가 월등하게 큰 학생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학교에 등교해보니 키 큰 학생과 작은 학생이 심하게 다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아침 조회를 하기위해 들어오셨는데도 다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참다못해 두 학생을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싸우는 사연을 물었습니다.
키 큰 학생이 ‘이 친구가 등교 시간에 다른 친구와 둘이 자기를 따라오면서 자기를 비웃었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키 작은 학생에게 ‘그것이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학생이 ‘자기는 이 친구를 비웃은 것이 아니고 친구와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면서 웃었다’고 했습니다.
양쪽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선생님은 키 큰 학생에게 “네가 네 자신을 경멸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너를 경멸 할 수 없다‘는 훈계를 하신 후 두 학생을 자리로 돌려보냈습니다. 키 큰 학생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자기가 돈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모를 갖춘 사람은 자기의 미모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기를 좋아 한다 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허구적인 표상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러한 허구의 기반위에 생의 집을 지어가지 않게 합니다. 주님의 말씀, 특별히 산상수훈의 말씀을 읽고 깊이 묵상해가면 우리는 허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반석위에 우리 집을 세워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참된 인간으로 형성시켜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이라는 선물은 완제품이 아니고 미완성품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완성품으로 만들어갈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깊이 명심하여야 할 것은 우리는 우리의 생을 반석위에 지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모래위에 지어갈 때 폭풍과 홍수가 몰아쳐올 때 무너짐이 심하게 됩니다. 결국은 우리의 영혼까지도 파멸하게 됩니다.
끝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드립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마 7:24-27 / 박상훈목사
옛날 황해도 재령에 있는 동부 교회에 정찬유라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서 존경받는 훌륭한 장로님이셨습니다. 본시 그는 학교 앞에서 작은 문방구점을 경영하면서 어렵게 살았습니다. 가난하게 살다 보니까 그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십일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말씀을 듣는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내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십일조를 떼먹고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내 형편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래도 배가 고프고, 저래도 배가 고프다면 차라리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고 배가 고픈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때부터 그는 아예 굶을 각오를 하고서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차츰차츰 그의 형편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에게 물질의 복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느 정도 자금이 모였을 때, 그동안 하던 문방구점을 문을 닫고서 그 대신 건축자재 상회를 열었습니다.
때마침 건축 붐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서 자기가 살던 집을 신식으로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람에 그는 떼돈을 벌었습니다. 건축자재가 없어서 못 팔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황해도에서 몇째 가는 큰 갑부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기가 사는 허름한 집도 현대식으로 고쳐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집마당에 건축자재들을 잔뜩 쌓아놓았습니다. 그는 흐뭇한 심정으로 건축자재를 바라보던 순간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던가?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은 허름한 채로 내버려두고서 내가 내 집만 새롭게 고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새로 짓기 전에는 자기의 집을 절대로 고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는 즉시 그동안에 모아놓았던 모든 돈을 교회 건축헌금으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 당시 돈으로 3만 환이었습니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20억에 이르는 많은 돈이었습니다.
교회는 그 돈으로 새로운 교회부지 3만평을 산기슭에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현대식 건물로 예배당을 아름답게 지었습니다. 교인들은 그의 귀한 뜻을 기르기 위해서 예배당의 머릿돌에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정찬유 장로 기념 예배당."
그런데 웬일인지 갑자기 정장로님의 모습이 교회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는 그 교회에 다니지 않고, 멀리 떨어진 다른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목사님과 교인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부랴부랴 목사님과 교인들은 그의 집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장로님, 왜 본 교회를 두시고 일부러 다른 교회에 출석하십니까? 무슨 섭섭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동부 교회에 출석한 것은 그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교회의 주인이 바뀌어서 정찬유 장로가 지은 정찬유 개인의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더 이상 사람이 주인으로 앉아있는 교회에는 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저 조용히 돌아가 주십시오."
그제서야 목사님과 교인들은 그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즉시 예배당의 머릿돌에 있는 "정찬유 장로 기념 예배당"이라는 글씨를 깨끗이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예전처럼 본 교회 출석을 하면서 더욱 충성을 다했습니다.
분명 그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인간적인 의를 자랑하려고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인간적인 의를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들이 영광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들을 가리켜서,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어리석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적인 의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을 힘있게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를 가리켜서,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산상설교 가장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다시 한 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와 그들보다도 더 나은 의인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대조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서 하나의 비유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른바 두 집의 비유입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지혜로운 건축자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둘째로, 어리석은 건축자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셋째로, 지혜로운 자의 삶과 그 결과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서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생각하는 것, 우리의 말하는 것, 우리의 행동하는 것 등 우리의 삶 전체가 우리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세워진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후회 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반석이시요, 우리의 피난처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굳세게 붙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지혜로운 건축자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4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는 목수의 일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집을 짓는 데는 그 기초가 중요하고, 집의 기초는 반드시 반석 위에 세워져야만 그 집이 견고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뉴욕에 있는 한 섬 맨하턴에 가면 고층빌딩이 많이 서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을 비롯해서 얼마 전에 테러로 무너진 쌍둥이빌딩, 클라이슬러빌딩, 라디오시티빌딩 등 수십 층이 넘는 마천루들이 마치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습니다. 어떻게 그곳에 그렇게 높은 고층빌딩들이 수없이 들어설 수 있겠습니까? 맨하턴이라는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암석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집은 반석 위에 세워져야지 견고합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는 건축공구가 오늘날처럼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반석을 쫀다든지 또 거기에 구멍을 뚫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은 반석 위에 기초를 두어야만 견고하다는 사실은 언제 결정적으로 판명이 납니까? 큰비가 내릴 때입니다. 25절입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대나라에는 여름철에는 비가 오지 않습니다. 겨울철에만 비가 옵니다. 이른 비가 있고, 늦은 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이따금씩 큰비가 내릴 때가 있습니다. 큰비가 내릴 때는 단시간에 집중적인 비가 쏟아집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비가 내리다 보니까 그때는 땅이 그 많은 비를 흡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급류가 되어 반석과 반석 사이를 누비면서 흘러내립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창수가 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홍수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큰비가 내릴 때는 지중해 쪽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닥칩니다. 그러나 아무리 위에서는 비가 엄청난 양으로 쏟아지고, 땅에서는 창수가 나고, 옆에서는 바람이 세차게 분다 할지라도 끄떡하지 않는 집이 있습니다.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집입니다.
일본 동경의 황궁 앞에는 Imperial호텔, 또는 제국호텔이라고 불려지는 유명한 호텔이 있습니다.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에 의해서 세워진 호텔입니다. 이 호텔을 짓는데는 4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절반인 2년을 기초공사 하는데만 소모를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를 보며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왜 기초공사를 하는데 쓸데없이 그렇게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이느냐?"
그러나 그는 묵묵히 기초를 다지고 또 계속해서 다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4년 만에 제국호텔이 완공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가 지은 제국호텔은 돈과 시간을 무리하게 들여서 지은 건물이라고 좋지 않게 낙인찍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년 뒤에 동경 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그때 동경의 2/3정도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수십 만 명이 목숨을 잃거나 심하게 다쳤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 속에서도 유독 제국호텔만큼은 끄떡하지 않았습니다. 불과 유리창 5개만 깨졌을 뿐입니다.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안전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기초를 그만큼 튼튼하게 다졌기 때문입니다. 그 후 라이트는 건축가로서 신화적이며 전설적인 인물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인 견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반석은 궁극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반석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집은 심판 속에서도, 환난 속에서도 어엿이 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반석이 되시고, 우리의 피난처가 되셔서 우리를 굳세게 붙들어주시고 든든히 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다. 죽음의 사자가 애굽 땅을 지나갔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에는 어디에나 죽음이 있었습니다. 큰 울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집에는 아무런 일이 없었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그냥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자기 집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칠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인간적인 의가 있어서, 우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어서, 우리가 심판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어엿이 서는 것이 아닙니다. 반석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든든히 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지라도 어엿이 설 수가 있습니다. 반석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든든히 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어리석은 건축자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6절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어리석은 사람도 역시 집을 지었습니다. 그가 집을 짓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집을 지었을 것입니다. 잘 지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사는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반석을 피해서 반석과 반석 사이에 있는 땅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곳을 가리켜서 "모래 위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반석 위에 지은 집보다 외관상으로는 더 좋아 보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기초를 닦는데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투자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외관에 더 많은 신경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구제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도 했습니다. 또 열심히 금식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인 기초,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는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 곧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데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적인 의로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7절입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모래 위에 지은 집은 폭풍우를 견딜 수 없습니다. 반석과 반석 사이를 흘러가는 급류에 다 떠내려가고 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는 의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바벨탑처럼 결국은 다 무너지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모래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가리킵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는 전연 상관없는 삶, 인간의 의만을 소중히 여기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한 삶은 아무리 멋지고 훌륭하게 보이더라도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과감하게 그러한 삶의 방식을 떨쳐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젊은이가 속세를 떠나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서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떨쳐버리려고 해도 세상에 대한 미련이 그를 사로잡고서 놓아주지를 않았습니다.
그 문제로 고심하던 그는 어느 날 수도원 원장님을 찾아갔습니다.
"원장님, 제가 속세를 떠나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떨쳐버리려고 해도 세상에 대한 미련이 저를 붙들고서 놓아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수도원 원장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그를 데리고 수도원 뒤뜰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었습니다. 원장은 그 가운데 한 나무 앞으로 갔습니다. 원장은 그 나무를 자기의 양팔로 꽉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원장은 자기의 몸을 몇 번 뒤척뒤척하더니 그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이 나무가 갑자기 나를 붙들고서는 놓아주지를 않네. 나를 좀 도와주게. 이 나무에서 나를 좀 떼어주기를 바라네."
그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그저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수도원 원장은 더 다급한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니, 젊은이! 무엇을 하고 있나? 이 나무가 나를 붙들고서 놓아주지 않는다니까 왜 그냥 그대로 서 있나?"
그는 마지못해서 수도원 원장을 그 나무에서 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무에서 원장을 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원장은 더 안간힘을 쓰면서 나무를 놓치지 않으려고 꽉 끌어안았습니다. 급기야 그는 원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장님, 그 손을 놓으세요! 나무가 지금 원장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원장님이 나무를 붙들고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제서야 수도원 원장은 손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 자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이제는 깨닫겠는가? 세상이 자네를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실상은 자네가 세상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라네. 자네가 붙들고 있는 그 손을 과감히 떨쳐버리게. 그것이 자네가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붙들고 있어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를 붙들었던 손을 놓으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손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내미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손을 굳세게 붙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지혜로운 자의 삶과 그 결과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매일 매 순간 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24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면에 어리석은 자는 누구입니까? 26절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똑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지혜로운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했습니다.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랐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들었습니다.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말씀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그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후회 없는 삶을 삽니다. 예수님이 그의 삶을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보덴(William Bode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1887년 미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큰 목장을 경영하는 대부호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그의 부모는 그에게 세계 여행을 시켰습니다. 그는 혼자서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를 둘러보면서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이러한 결심을 했습니다.
"나는 이 불쌍하고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내 한평생을 바치리라."
그런 뒤 그는 자기의 성경책 표지 안쪽에 이렇게 적어 넣었습니다.
"No Reserve."
지체하지도 않고, 다른 마음을 품지도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기의 결심을 확고하게 정한 것입니다. 그 뒤에 그는 미국의 명문인 예일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좋은 대학을 졸업한 그에게는 좋은 일자리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뿌리쳤습니다.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로 진학을 했습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할 때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슬람 선교를 위해서 모두 하나님께 헌금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차도 사지 않고 그저 검소하게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애굽으로 건너갔습니다. 이슬람 사람들의 선교를 위해서였습니다. 친지와 친구들은 그를 말렸습니다.
"왜 하필이면 그곳에 가서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느냐?"
그때 그는 성경 표지 안쪽에 또 한 마디의 말을 더 집어넣었습니다.
"No Retreat."
물러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후퇴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홀연히 애굽 땅을 건너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들에게 실천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애굽 땅에서 사역한지 네 달도 채 되지 않아서 그만 뇌막염에 걸려버렸습니다. 그리고 발병한지 한 달만에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자기의 성경표지 안쪽에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더 남겼습니다.
"No Regret."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친지들과 친구들에게 남긴 유서에서도 똑같은 말을 썼습니다.
"No Reserve, No Retreat, No Regret."
그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에서 후퇴하지 않고, 앞만 바라보면서 정진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짧은 일생을 살았지만 후회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입니까? 카이로에 있는 그의 무덤의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윌리엄 보덴(1887∼1913),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떠나서는 그의 삶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는 26세라는 짧은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후회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영접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25:21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짧은 생애가 짧을지 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들입니다. 결코 우리의 삶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후회 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힘있게 의지하십시다.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면서 기쁨으로 나아가십시다. 우리에게도 똑같은 예수님의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헌신하고 충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초점검
마 7:24-27 / 오정호 목사
본문은 주님의 산상수훈의 결론부분에 해당합니다. 주님은 지혜로운 인생, 열매맺는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본문의 집짓는 자의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지혜'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능지수, 학력, 처세술, 사업수완을 기준으로 얼마나 지혜로운가를 따지지만 주님은 진리가 삶속에 실천되느냐의 여부에 따라 지혜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십니다.
주님은 집 짓는 자의 비유를 통해 '지혜'를 명료하게 말씀하십니다. 팔레스타인의 우기(雨期)는 겨울입니다. 그 이유로 집은 주로 여름에 지었습니다. 집을 짓기 위해 땅을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습니다. 그러나 땅을 깊이 파는 것이 힘이 들기 때문에 대충 모래같이 부드러운 흙 위에 집을 지어버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겨울이 되어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없던 내(川)가 흐르고 지대가 낮은 곳에는 '와디'라는 물웅덩이가 생깁니다. 이렇게 되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당연히 무너지고 맙니다(26-27절). 반면 기초를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세운 집은 똑같이 바람이 불고 비가 오지만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25절).
우리는 인생건축가이며 말씀의 재료를 가지고 순종을 통해 믿음의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가 세운 인생과 믿음에 대해 테스트하실 때가 올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 성도들이 정성껏 드린 수재지원금과 함께 수재현장을 방문하여 수재민들의 어려움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습니다. 현장을 살피면서 수재현장을 통해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업이나 기초가 단단해야하겠다는 생각을 깊이 해보게 되었습니다. 작년 9월 11일 미국의 자부심을 상징적인 월드 트레이드 센터(WTC)가 공중납치당한 두 대의 비행기와 충돌하여 무너져내렸습니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은 빌리그래함 목사님의 설교와 회개운동을 통해 청교도정신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이전과 다르게 눈에 띄는 변화는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얻는 교훈은 '사람들은 역사를 통해 배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축이 흔들리고 땅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는 그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과연 내 인생과 가정의 기초는 튼튼한가?"
본문을 통해 우리의 인생과 신앙의 본질적인 기초가 재정립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지혜로운 자는 집을 반석 위에 세운다고 했습니다(24절). 여기에서 '반석'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인생의 안전지대를 의미합니다. 또한 신약에서의 반석은 '예수그리스도' 혹은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반석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참된 기초가 무엇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세상에는 자신의 가치관, 경험, 들은 풍월, 학설에 기초를 두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참고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지만 이러한 것들이 진정 인생의 반석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합니다. 가르치는 자는 자신의 학문을 인생의 반석이라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러한 것들이 자신의 인생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참된 반석을 지향하는 이정표는 될 수 있을지 모르나 반석 그 자체는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반석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반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삶에 어떤 기초를 점검해야 합니까?
1. 주님께 대한 신뢰의 기초를 점검하십시오.
주님께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미국 시카고 대 화재 때 많은 집들이 소실되고 재산과 인명피해가 컸습니다. 전도자 D.L 무디도 그 피해자 중의 한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신사가 무디에게 다가와 "당신의 재산이 다 타버렸다면서요?"라고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무디는 미소를 띄며 "제게는 아직 예수그리스도가 남아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손에 잡히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은 반석이 될 수 없습니다. 손에 잡히는 것은 불에 타버릴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물에 휩쓸려 가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영혼과 삶을 다스리시고 내 인생의 영원한 기초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가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실패자가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유행도 가치관도 변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해도 예수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만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할 때에 변하지 않는 본질, 나를 영원히 지탱할 수 있는 본질을 붙잡아야 합니다. 영원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안에서 자신을 재발견하고 주님 앞에 나의 신뢰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주님의 자녀다운 일입니다.
2. 사랑의 기초를 점검하십시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의 동기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업을 하든, 가르치는 일을 하든 모든 일은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미국 9.11 테러 때 건물에 갇혀 죽음을 앞둔 긴박한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이 마지막 가족들에게 보낸 전화메시지는 한마디였습니다. "사랑해" 우리는 언젠가 인생나그네 길을 마치고 떠나가야 하는데 왜 사랑한다는 말을 그렇게 아끼고 살아가야 합니까? 삶의 본질을 붙잡은 사람은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만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이 주일에 한번씩 만나는 아이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고 해도 평생 사랑한다는 말을 얼마나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많은 기도제목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진정 기도해야 할 우리의 기도제목은 한가지입니다. "주님,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를 할 때 주님은 우리의 나머지 부차적인 기도제목들도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모든 병의 근원은 사랑의 결핍입니다. 피조물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먹어야 하고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먹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돈이 없는 것 때문에 탄식하는 사람은 많지만 내게 사랑이 부족하다고 탄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랑을 연습하십시오. 사랑만이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이웃을 살릴 수 있습니다. 사랑의 성공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소망의 기초를 점검하십시오.
소망이란 다른 것은 다 없더라도 이것만 있다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열정과 힘을 다해 하는 모든 일들의 이유에 대한 해답이 바로 소망입니다.
우리 예수믿는 사람은 주님과 주님의 복음이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것은 다 잃어도 이것만 있으면 내 삶의 존재의미를 결코 잃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그 소망의 기초만 튼튼하면 충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이 소망을 전하십시오. 본문의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지혜로운 자의 반열에 동참하십시오. 변함없는 영원하신 주님과 주님의 진리를 반석 삼아 그 위에 인생과 신앙을 건축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오. 주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맡겨주신 자들에 대한 사랑과 소망을 점검하여 굳게 하여 우리 새로남 교회가 죽어가는 이웃을 살리고 이 민족을 복되게 하는 교회로 쓰임받게 합시다.
장경동목사
>비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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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구원도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 이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생각도 마음도 말도 행동도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삶을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가만히 보면 항상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대칭이 곧 균형이요 균형이 바로 수준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일변도로 말하지 말고 균형을 이뤄 이야기 해야 합니다. 구원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과 구원받지 못 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13:47-48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그물 속에 들어갔다고 다 그릇에 담 기우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칭은 한 점이나 직선을 사이에 두고 있는 두 점을 말합니다.
1.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대칭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요 집을 반석위에 지은자요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는 자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자요. 집을 모래위에 지은자요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무너지는 자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고 은혜로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로 된 것이다” 롬4:2-3“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 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약2:21 “우리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믿음과 행함 그것이 대칭입니다. 믿음이 곧 행함이요 행함이 곧 믿음입니다. 사람이 믿기만 하고 말씀대로 못 살아도 된다면 주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2.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의 대칭이 있습니다.
마3:10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 지우리라” 좋은 열매는 곡간에 들이고 나쁜 열매는 찍어 버리신 다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에 대해서도 주님이 구원을 이루는데 큰 역할 을 했다고 합니다만 요6:70“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마26: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 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라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가롯유다를 마귀라 하시고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고 하시고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균형을 이루십니다. 구원은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요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3. 알곡과 쭉정이의 대칭이 있습니다.
마3: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믿는 사람들이 다 알곡이면 예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모두 알곡인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창4:1이하의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예배라고 다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회개한 세리와 창기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회개하지 않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받으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알곡입니까? 쭉정이 입니까?
4. 슬기 있는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대칭이 있습니다.
마25:1이하에 슬기 있는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 두 종류의 사람들이 다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라면 신랑을 기다릴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믿고 교회당만 다닌다고 해서 다 구원받고 천국 가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데 기름은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너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5.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자와 한 달란트 받은 자의 대칭이 있습니다.
마25:14이하에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자는 착하고 충성된 종,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 하는 자요.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악하고 게으른 종, 바깥 어두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자라 했습니다. 나는 주님이 주신 달란트(물질, 재능)를 잘 사용하고 있는가? 달란트를 잘 사용하면 삶도 축복이요, 구원과 칭찬이 있습니다.
6. 양과 염소의 대칭이 있습니다.
마25:31이하에 양은 오른편, 염소는 왼편. 오른편에 있는 자들은 주님이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고 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주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랑을 우리도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너는 너 살고 나는 나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누군가를 도우며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눅16:30 “가로되 그렇지 아니 하나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눅13:4-5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부자와 나사로에 나오는 부자가 구원받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가 회개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회개하였으므로 구원받았습니다.
위의 말씀을 듣고 삶에 순종이 나오면 지혜로운 사람이요 순종치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바로 지켜서 좋은 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구원받은 알곡, 지혜로운 사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