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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 문화 탐방 크루즈-이집트
여행지:이스말리아 수에즈운하, 카이로, 룩소, 샴웰세이크, 알렉산드리아
* 이집트 [Egypt]
아프리카 대륙 북동쪽에 위치한 나라
아프리카 대륙 북동쪽에 위치한 나라.
국기와 문장
수도는 카이로이다. 남북길이 1,055km 남쪽 국경선에 면한 동서 최대너비는 1,250km다. 동쪽으로는 이스라엘과 아카바 만, 홍해와 접해 있고, 남쪽은 수단, 서쪽은 리비아, 북쪽은 지중해로 둘러싸여 있다. 면적 997,690㎢, 인구 68,185,000(2003 추계).
1.자연환경
알카스르
이집트는, 경관의 지배적인 특징인 북류하는 나일 강에 의해 크기가 다른 극도로 건조한 두 지역으로 나뉜다. 보다 큰 사막지대인 서부 사막(앗사흐라알가르비야)은 와디(건천)가 없는 낮은 대지이며, 보다 작은 동부 사막(앗사흐라앗샤르키야)은 석회암과 사암층의 대지로 와디에 의해 널리 개석되어 있으며, 남동부에는 험준한 산들이 솟아 있다. 동부 사막의 북동부에 있는 시나이 반도에도 와디가 많다. 시나이 반도 남부 산지에는 해발 2,642m의 이집트 최고봉인 캐서린(카트리나) 산이 있으며 동부 사막의 홍해 구릉지대(이트바이)에는 해발 1,800m가 넘는 산이 많다. 나일 강은 이집트 영내에서는 중요한 지류가 없으며, 가파른 벼랑들 사이에서 대략 8∼16km 너비의 바닥이 평평한 유역을 따라 흐르다가 카이로 북쪽에서 부챗살 모양으로 갈라지며 삼각주 저지대를 이룬다. 이 삼각주는 길이 160km, 너비 240km로 인구가 조밀하고 연중 관개가 이루어지는 지역이다. 자연 식생은 지역에 따라 다르다. 건조한 서부 사막은 대체로 생명체가 없는 지역이지만, 수분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사막의 다년생식물과 풀이 자란다. 서부 사막보다 덜 건조한 동부 사막에는 이따금 비가 내려 몇몇 종류의 식물이 자랄 수 있는데 그중에는 타마리스크, 아카시아 및 수많은 종류의 가시관목, 작은 다육식물(多肉植物)들, 방향성의 약초들이 있다. 나일 강 유역과 삼각주, 그리고 산재하는 오아시스들에서 이집트 농업의 거의 대부분이 이루어지며 인구의 99% 이상이 여기에 거주한다.
이집트에는 겨울(11∼3월)과 여름(5∼9월) 두 계절만 있다. 겨울은 서늘하고 온화하며(알렉산드리아에서의 1월평균기온은 11∼18℃), 여름은 일반적으로 무덥다(카이로의 7월평균기온은 29℃). 연강우량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약 175㎜ 카이로에서 약 25㎜ 남부의 아스완 부근이 약 2.5㎜로 지역에 따라 편차가 심하다. 또한 홍해 연안 평야에는 강우가 거의 없다. 광물매장량은 보통 수준이며, 철광, 석유, 천연 가스, 석고, 인산염과 우라늄 등이 산출된다.
2. 국민
이집트 국민은 신체적인 특징상 상당히 동질적인 집단을 이루는데, 이는 셈족과 함족의 피가 섞였기 때문이다. 나일 강 삼각주의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상(上)이집트(즉 나일 강 상류 유역의 남부 이집트) 주민들보다 중동의 다른 지역 및 유럽과 더 많은 접촉을 가져왔다. 소수민족 집단으로는 나일 강 유역 남부의 누비아인, 동부 사막 남부의 함족 계통의 베자인, 서부 사막의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의 혼혈족이 있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럽인은 얼마 되지 않는다.
거의 13세기 동안이나 아랍어가 이집트의 문어이자 구어였다. 639년 아랍인이 침입하기 이전에는 고대 이집트어의 직계 언어인 콥트어가 종교와 일상생활에서 다 같이 통용되는 언어였다. 그러나 12세기까지는 거의 아랍어로 대체되었고, 콥트어는 콥트 교회에서 전례용(典禮用) 언어로만 존속하고 있다. 이집트의 공인 종교는 이슬람교이며, 국민의 약 90%가 이슬람교도인데, 대부분이 수니파에 속한다. 종교적으로 소수인 그리스도교도는 대부분 콥트교도들이다.
출생률과 사망률은 북아프리카의 평균수준이다. 연인구증가율은 세계 평균치보다 상당히 높은 편이며, 유아사망률 역시 높다. 국민의 2/5가 15세 미만이다. 정부는 신생아와 아동의 높은 사망률을 줄이기 위해 산모와 어린이를 위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수준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특히 학령아동의 건강 관리에 비중을 두고 있다. 입국이민이나 출국이민은 전통적으로 아주 적었으나 국외로 이주하거나 외국에서의 임시취업을 원하는 사람의 수는 꾸준히 늘고 있다. 인구는 비옥한 나일 강 삼각주에 크게 밀집, 카이로 도시주(都市州)를 포함한 하(下)이집트 지방에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거주한다. 그러나 전체 이집트인의 절반은 아직도 시골생활을 한다. 20세기 동안 도시화가 꾸준히 진행되어왔지만, 수치상으로 나타난 도시화의 일부는 시골의 성격이 많이 남아 있는 여러 부락들을 중소도시로 지정한 행정제도의 개편에 불과한 것이었다.
3. 경제
이집트는 부분적으로 자유기업을 인정하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가진 개발도상국이다. 국민총생산(GNP)은 인구증가율보다 더 높은 증가율을 보이고 있지만, 1인당 GNP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낮다. GNP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부문은 공업(석유생산 포함)이며, 그뒤를 농업, 공공사업과 방위산업, 무역과 금융이 잇고 있다.
농업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20%를 차지하지만, 농업 종사자는 전체 노동인구의 40%를 넘는다. 이집트의 가경지(可耕地)는 거의 전적으로 나일 강 유역과 삼각주에 한정되어 있으며 관개는 필수적이다. 1970년 아스완 하이 댐이 완공됨으로써 나일 강의 연례적인 홍수를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히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환금작물이 가경지의 약 3/4을 차지하며, 사탕수수·토마토·면화·수박·오렌지·양파·감자 등의 수확량이 가장 많다. 국내 식량작물로는 옥수수·쌀·밀·기장·호박 등이 있으며 대추가 특히 많이 재배된다. 인구가 급증하고 많은 농지가 환금작물의 재배에 충당되기 때문에 국내 소요 식량의 절반 이상을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목초지는 없지만 농장과 부락들에서 가축을 기른다. 흔히 볼 수 있는 가축으로는 물소·소·당나귀·양·염소 등이 있다. 닭·오리·비둘기 등이 사육되고, 시골에서 역축(役畜)으로도 이용되는 물소와 젖소로부터 우유를 얻으며, 당나귀는 운송용으로 널리 이용된다.
어업은 상당히 선진화되었다. 총어획고의 약 4/5가 민물고기이고 그 나머지가 바다물고기이다. 지중해 연안 어업은 아스완 하이 댐이 강물 매개의 영양소를 차단하는 바람에 쇠퇴했지만, 그대신 아스완 하이 댐 배후에 조성된 나세르 호에는 풍부한 어장이 형성되었다. 광업은 석유와 천연 가스의 채취가 주종을 이루며 제조업을 합쳐 GDP의 22%를 차지한다. 광업은 노동인구의 0.3%를, 제조업은 16%를 차지한다. 주요제품은 정유제품, 시멘트, 면직·모직의 직물과 의류, 밀가루 등이다. 고대와 중세의 기념물들, 온화한 겨울기후, 지중해안의 해수욕장과 휴양지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하다.
이집트는 산업의 약 70%가 국유화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5개년 계획을 세워 경제를 관리하며, 자유기업과 외국의 투자를 장려한다. 수에즈 운하의 소통이 1975년 재개되고 석유와 천연 가스가 생산되면서 경제는 호전되었으며, 외국의 자본 투자가 개발계획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총노동력은 인구의 약 1/4을 차지하며, 노동조합 활동은 합법화되어 있다. 높은 인구증가율 때문에 이집트는 계속 저개발의 진통을 겪고 있다. 국가의 예산 수입은 주로 세금으로 충당되는데, 세출이 세입을 초과하는 것이 보통이다.
철도망은 국유회사인 이집트철도에서 운영한다. 도로의 포장률은 70% 이상이다. 내륙수로는 총길이가 3,200km를 넘는데, 160km가 넘는 수에즈 운하를 제외하면 전부가 나일 강 수로이다. 수에즈 운하로는 해마다 2만여 척의 배가 지나다닌다. 정부 소유의 이집트항공에서 국제·국내 항공편을 제공한다. 수출은 주로 원유와 정제품 및 면직물과 면사로 이루어지며, 이집트의 최대수출국은 이탈리아이다. 수입액은 통상 수출액보다 훨씬 많다. 주요수입품은 식료품, 기계류와 전기기구, 수송장비, 화학제품 등이며, 주로 미국·독일·프랑스로부터 수입한다. 해외근로자들의 송금이 큰 폭의 무역적자를 줄이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4. 정치와 사회
이집트의 정치제도는 강력한 행정부에 의해 좌우된다. 6년 임기의 대통령은 국회의 지명을 받아 국민투표에 의해 선출되며(연임 가능), 국가원수와 군최고사령관직을 맡는다. 또한 부통령·총리·내각과 단원제 국회인 인민의회의 의원 454명 가운데 10명을 임명한다.
국회는 정부의 정책을 심사하고 승인하는 것을 주요임무로 하며, 국회의원은 5년 임기로 일반투표에 의해 선출된다. 이집트는 제한된 복수정당제도를 운영한다. 여당인 국민민주당은 충성스런 야당의 존립은 장려하지만 공산주의자들과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정당을 결성하여 정권 경쟁에 나서는 것은 금지한다. 1971년에 채택된 이집트 헌법은 최고사법권을 최고헌법재판소에 부여하고 있다.
사회복지제도는 대부분의 종업원을 대상으로 하며, 근로상해·실직·노령·사망·출산·신체장애·질병 수당을 지급한다. 또한 상당수의 무료 보건소도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집트는 위생조건의 열악, 영양부족, 만성적인 무기력증, 지방의 의료인 부족과 같은 보건상의 문제들로 계속 골치를 앓고 있다. 이집트국민의 평균수명은 남자 59세, 여자 62세이다.
일반 공립교육은 초등(6년)·예비(3년)·중등(3년)의 3단계로 되어 있다. 6∼12세의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시험에 합격한 학생은 계속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는다. 정부의 일반교육제도와 병행하여 이슬람교 기관들이 제공하는 교육제도가 있다. 알아자르대학교(970 설립)는 세계 유수의 이슬람·아랍 학문의 중심지이다. 교육 서비스의 확대에도 15세 이상의 주민 가운데 55%가 문맹자일 정도로 이집트의 문맹률은 여전히 높다. 이집트의 언론은 1973년 검열이 해제된 이후 비교적 자유롭게 정치·경제 문제들을 비판하고 있다. 전파 매체는 정부에서 관리한다.
5. 문화
이집트의 전통 의복
사회적·문화적인 전통이 아랍·이슬람의 전통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이집트 문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범세계적이며 서구의 영향을 많이 드러낸다. 서구의 충격은 현대 이집트 소설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주제의 하나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작가로 198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겸 시나리오 작가 나기브 마푸즈가 있다. 이집트의 현대극은 유럽의 수입판이다. 이 현대극의 발전은 세기의 변환기에 태어난 2명의 극작가 마흐무드 타이무르와 타우피크 알 하킴이 주도했다. 대중음악은 아라비아의 고전음악·민요·서양음악이 뒤섞여 이루어졌는데 무하마드 아브드 알 와하브는 작곡가겸 가수로서 이 분야의 발전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움 쿨숨은 거의 50년 동안 이집트뿐만 아니라 아랍 세계 전체에서 가장 훌륭한 성악가였다.
6. 역사
이집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문명의 역사를 가진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BC 2925년경에 상이집트와 하이집트가 통일되었는데, 이는 메네스 왕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통일로 인해 이집트 문명은 절정기에 들어섰고, 이후 약 3,000년 동안 본토 출신들이 계속해서 지배자의 위치를 이어갔다. 역사가들은 31개 왕조에 걸쳐 BC 332년까지 계속된 이집트의 고대사를 고왕국·중왕국·신왕국으로 구분한다. 피라미드는 고왕국의 유산이며, 오시리스 숭배와 조각의 세련미는 중왕국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제국시대와 유대인의 출애굽은 신왕국에 속한다(→ 이집트 미술 , 이집트 법 , 이집트 종교 ).
아시리아의 침략은 BC 7세기에 일어났으며,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이 이집트에 왕조를 세운 것은 BC 525년이었다. BC 332년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략으로 마케도니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시작되었으며, 이 왕조시대에는 이집트의 통치자들이 헬레니즘 세계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건립된 알렉산드리아 시는 헬레니즘뿐만 아니라 셈족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머지 않아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이 최고의 발전을 이룩하는 데 구심점이 되었다.
로마인은 BC 30∼AD 395년에 이집트를 점령했으며, 그후 이집트는 행정적으로 동로마 제국(뒤의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도들에 대한 관용령을 내림으로써 이집트의 공식 교회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아리우스·아타나시우스·오리게네스·클레멘스와 같은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활동 무대였다. 비잔틴 제국의 이집트 지배는 비잔틴 군대가 아라비아의 침략군과 3년의 무력 충돌 끝에 이집트에서 철수한 642년에 끝이 났다. 그후 200∼300년 내에 이집트는 아랍어를 사용하는 나라로 바뀌었고,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이집트는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 칼리프국의 일부였다. 그후 969년에는 파티마 왕조 칼리프국의 중심이 되었으며, 상당한 독립과 중요성을 획득했다. 1171년에 이어 이집트는 아바스 왕조의 지배로 귀속되었다.
아바스 왕조 칼리프국이 무너지고 맘루크들이 득세한 것은 1250년의 일이었다. 맘루크들은 아라비아 세계의 군대를 증강하기 위해 이용된 비아라비아·비이슬람의 노예들이었다. 그들이 이집트에 세운 왕조는 1517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이집트를 이슬람 세계의 동부 아랍어 사용권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때까지는 이집트의 아랍화가 거의 완성되었다.
1517년에 이집트는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되어 이스탄불(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다스리는 속주로 되돌아갔다. 맘루크 왕조 말기에 시작된 경제의 쇠퇴는 계속되었고, 그와 함께 이집트 문명도 쇠퇴했다. 1798년 프랑스군의 침략은 불과 몇 년 동안이었지만 이집트를 유럽의 정치무대로 끌어들이는 데 충분했다. 프랑스군이 떠난 뒤 이집트는 무하마드 알리의 수중에 들어갔다. 알바니아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알리는 오스만을 명목상의 종주국으로 하는 하나의 왕조와 제국을 일으켰다. 그와 그의 후계자들의 치부(致富)와 팽창주의 정책으로 인해 이집트는 영국에 막대한 빚을 졌고, 영국은 1882년 내란의 와중에 기회를 틈타 이집트를 점령했다(→ 색인 : 대영제국).
이집트는 1914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1922년 명목상의 독립을 얻고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1952년 쿠데타로 군주제가 타도되고, 가말 아브델 나세르가 2,000년 이상의 역사 속에서 최초의 이집트 본토 출신의 지배자로 떠올랐다. 그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잠시나마 시리아 및 예멘과의 연방 수립을 시도했으며, 아스완 하이 댐을 건설했다. 1956, 1967년에 이스라엘과 2차례 전쟁을 치렀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의 후계자인 안와르 엘 사다트는 나세르가 시행했던 강도 높은 사회주의 정책의 일부를 파기하려 했으며, 또한 이스라엘을 공격해(1973) 시나이 반도의 작은 영토를 되찾았다. 그후 중동평화회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가 1981년 10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밑에서 부통령직을 맡고 있던 호스니 무바라크가 그뒤를 계승하여 사다트의 평화주도정책을 계속했으며, 1982년 이집트는 1967년에 잃었던 시나이 반도에 대한 영유권을 회복했다.
7. 한국과의 관계
한국과는 1961년 12월 영사관계를 맺었으며, 이어 1962년 5월 카이로에 한국 총영사관이 설치되었다. 한국과 이집트는 국교를 수립하지 않았지만 문화협정(1968. 8)·항공협정(1979. 9)·전력기술협정(1985. 6) 등을 체결한 상태이며, 실질적인 경제협력을 바탕으로 하여 점진적으로 관계개선의 장을 열고자 노력하고 있다. 또한 197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건설업체가 이집트에 진출, 큰 성과를 올렸으며 앞으로도 건설분야의 시장개척은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두 나라의 통상현황은 1996년 대한수입 4억 7,359만 달러, 대한수출 8,668만 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1997년 현재 이집트에는 교민 173명, 체류자287명이 있으며, 한국-이집트 친선협회가 결성되어 있다.
한편 북한과 이집트는 1963년 8월 국교를 수립하고 이어 상주공관을 설치했으며, 그동안 무역협정(1957. 12, 1987. 10)·문화협정(1958. 11)·과학기술협정(1969. 10) 등을 체결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교역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않으며, 1980년대부터 이집트가 실리외교에 치중하자 실질적인 교류는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이집트 날씨 한국의 겨울인 12월에서 2월 동안 일일 최고온도가 20도 내외로 가장 여행하기 좋은 시기입니다. 이집트의 여름은 3월에서 11월까지이며, 이 시기에는 이집트가 대부분의 지역에 걸쳐 덥고 건조한 편입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를 포함해 지중해 가까운 연안지역은 1년 내내 온화하고 좋은 날씨를 가지고 있어 언제라도 여행하기 편합니다. 기온은 일교차가 나는 편으로 낮에는 무더웠다가 밤이 되면 온도가 많이 떨어져 쌀쌀하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은 사막지대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19.1℃ 20.7℃ 23.7℃ 28.2℃ 32.4℃ 34.5℃ 35.4℃ 34.8℃ 32.3℃ 29.8℃ 24.1℃ 20.7℃ 8.6℃ 9.3℃ 11.3℃ 13.9℃ 17.4℃ 22.6℃ 21.5℃ 21.6℃ 19.9℃ 17.8℃ 13.9℃ 10.4℃ 23.0℃ 25.4℃ 29.0℃ 34.8℃ 39.3℃ 40.7℃ 40.8℃ 41.0℃ 38.5℃ 35.1℃ 29.6℃ 24.7℃ 5.4℃ 6.8℃ 10.7℃ 15.7℃ 20.7℃ 22.6℃ 23.6℃ 23.5℃ 21.5℃ 17.8℃ 12.3℃ 7.7℃ 18.3℃ 19.2℃ 11.2℃ 23.6℃ 26.5℃ 28.2℃ 29.6℃ 30.4℃ 29.4℃ 22.7℃ 24.4℃ 20.4℃ 9.3℃ 9.7℃ 21.0℃ 13.5℃ 16.7℃ 20.2℃ 22.7℃ 22.9℃ 21.3℃ 17.8℃ 14.8℃ 11.2℃ 23.8℃ 25.7℃ 25.0℃ 28.9℃ 32.8℃ 37.0℃ 38.3℃ 38.0℃ 34.1℃ 30.1℃ 27.6℃ 22.7℃ 13.4℃ 13.9℃ 13.7℃ 17.7℃ 24.1℃ 26.1℃ 26.7℃ 26.6℃ 26.0℃ 22.8℃ 18.7℃ 15.9℃ 20.6℃ 20.9℃ 23.0℃ 26.9℃ 27.6℃ 31.4℃ 32.6℃ 33.0℃ 30.6℃ 28.5℃ 25.7℃ 22.4℃ 9.6℃ 9.9℃ 12.3℃ 16.1℃ 20.7℃ 23.5℃ 24.8℃ 25.0℃ 23.2℃ 19.7℃ 15.5℃ 11.9℃ 이집트는 카이로 부근 룩소르 및 아스완 부근의 유적보호와 관광자원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유적 중 유명한 것은 피라미드이다. 이집트인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고, 양자의 분리는 죽음이지만, 사자(死者)는 영혼이 머무는 곳인 시체가 멸하지 않고 공물(供物)을 받을 수 있다면 죽은 자도 저승에서 계속 산다고 믿어 피라미드를 건조했다. 시체를 미라로 만든 이유라든가, 또는 사자의 영원한 집인 분묘를 정비한 이유가 모두 이러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카이로에서 룩소르 사이에는 퀘나, 아비도스, 덴데라 등의 멋진 신전을 가진 작은 도시들이 있다. 나일강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른다. 총 길이는 6400킬로미터 정도. 이집트의 남북 길이가 1200킬로미터 정도니 5분의 1이 채 안된다. 이집트는 나일강의 하류부분이다. 또하나 신기한 것이 나일강은 상류보다 하류의 폭이 좁다.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강들은 하류로 내려갈 수록 지류를 만나 폭이 넓어지는데 나일강은 주변이 다 사막이라 지류가 없어서다. 또한 엄청난 열기로 인해 물이 점점 증발하고 또 여기저기서 퍼다 쓰가 때문이다. 그래서 하류로 갈 수록 물이 줄어든다.
[성지순례 칼럼] 이집트를 알아야 이스라엘을 알 수 있다
흔히 성지라고 한다면 성경에 나오는 지명을 생각하거나 또는 성경의 사건들이 있었던 곳이라고 알고 있다. 우리는 먼저 성지라는 개념을 정확히 정립하여야 할 것이다. 기독교 성지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사 죄에 빠진 우리를 구하시려 하신, 구원 사역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지도 성경에서 언급이 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바로 전하기 위한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에 성지가 될 수 있으며, 그 성지는 한국에서도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다만 성경의 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원 사역 현장이 중동 지역, 특히 팔레스틴 지역에 많기 때문에 그곳으로 성지순례를 가는 것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 앞으로 성지순례를 하는 데 있어 여러 가지 문제를 풀어가는 기초가 될 것이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민족의 고향이다. 야곱의 아들 요셉에 의하여 이집트로 소위 이민을 간 야곱의 자녀들, 즉 요셉의 형제들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한다. 이집트의 크고 작은 풍속과 문화가 이스라엘 속에 녹아 들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을 알려면 이집트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집트에 가는 것일까? 그렇지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이집트의 종교를 이슬람교라고만 생각하지만, 실은 예수님 사후인 주후 60년경부터 기독교 복음이 전파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기독교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 된 것이다. 초대 교회 기독교의 역사에서 이집트를 제외하면 기독교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초대 교회 세계에서 이집트는 기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른다. 우리는 배워야 한다. 이집트의 기독교에 대하여 말이다. 이집트를 중심으로 하는 초대 기독교의 일파를 콥트 기독교라 하는데 ‘콥트’라는 단어의 어원은 고대 이집트어로 이집트를 나타내는 단어가 와전되어 붙여진 ‘아이큐프티스’에서 유래한다. 이 콥트 기독교는 공관복음서를 기술한 마가 요한에 의하여 선교되었다고 전승되고 있으며, 마가 요한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하였고,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마가 교회에는 최초의 목회자 이름으로 마가 요한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바자 지중해를 바라보는 해변에 마가 순교 기념탑이 있다. 이곳에서 이방인들에 의하여 순교한 그의 유해는 산산조각이 나 전국에 뿌려졌으나, 후대 그를 추모하는 성도들에 의해 수거되어 지금은 카이로의 마가 기념교회 지하 무덤에 있다. 그러나 그의 유해 중 일부는 중세에 베니스가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는 시기에 상인들이 훔쳐서 베니스의 마르코성당 지하에 묻고, 그곳의 수호성인으로 섬기고 있다. 동방 정교회의 일파인 콥트교는 이슬람 사회인 이집트에서 여전히 소수파이지만, 그들은 원시 기독교 시대의 정신을 엄격하게 지키고자 하는 확고한 정신성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어, 그들을 통해 초대 교인들의 예배 모습을 추정하여 볼 수 있다. 이집트에는 아기 예수님의 피난을 갔었던 여정을 따라 ‘예수님 피난여정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믿어야 할지 모르만 심지어 아기 예수님의 족적이라고 하는 바위를 보관하고 있는 교회도 있다. 다만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이곳 이집트에서 예수님 가족 일행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집트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선포되었음을 기억나게 한다.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미츠라임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사 19:25). 이집트가 나사렛, 예루살렘, 베들레헴과 같이 명성을 얻게 되는 것을 우리들은 보고 느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에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를 알게 하는 역사의 현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집트를 미쯔라임이라고 한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아랍어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아랍어로는 이집트를 “미쎄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말은 같은 셈어 계열에 속하는 성경 히브리어의 미쩨르와 연관이 있다. 히브리어로 미쯔라임은 “두 개의 미쩨르”, 즉 “두 개의 이집트”를 의미하는데, 이는 지리적으로 북쪽의 하 이집트와 남쪽의 상 이집트를 한꺼번에 지칭하여 불렀기 때문이다. 역사시대에 들어서 고 왕국시대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수도인 멤피스를 그곳 신전 이름을 따라 “훗트-카-프타(Hut-ka-Ptah)”, 즉 “프타의 영혼의 신전”이라고 불렀다. 신 왕국시대에는 멤피스를 “히-카-프타(Hi-ka-Ptah)”로 불렀고, 그 예로 주전 14세기 아멘호텝 3세와 4세의 외교 문서인 아마르나 편지에서도 멤피스가 아카드어(Akkadian)로 “히-쿠-우프-타(Hi-ku-up-ta)”로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주전 8세기경 이집트가 그리스 세계에 그 존재를 알리기 시작하면서 그리스어로 “에-기-프토스”로 발음되었고, 이 그리스 말이 라틴어로 에깁투스, 즉, 이집트(Egypt)로 발전된 것이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이집트에 있는 기독교를 콥트 기독교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콥트라는 말이 옛 이집트를 말하는 것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이 명칭은 이집트의 라틴어식 이름인 에깁투스의 아랍어식 발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후 640년 아라비아 반도 출신의 이슬람 세력인 무슬림들은 이집트를 점령하여 카이로를 건설했는데, 그들은 이집트를 “다르-알-깁트”, 즉 “이집트인들의 고향”이라고 불렀다. 점령 당시 이집트는 비잔틴 제국의 한 식민지로서 국교가 기독교였던만큼 이집트 기독교인들을 “깁트”로 부르게 되었고 나아가 “콥트”로 발전된 것이다.
나일강의 전체 중 오직 1/5만이 이집트 지역을 통과한다. 나일강의 배수유역은 300만㎢에 달한다. 나일강의 원류는 열대 우림인 우간다 지역의 빅토리아 호수 근처에 비가 많이 오지만, 이집트는 거의 비가 오지 않는 광야 지역이다. 오늘날에는 아스완 댐의 영향으로 홍수기인 7-8월을 제하고는 연중 일정한 양의 물이 흐르지만 그 이전에는 갈수기에 초당 방류량이 120㎥, 그리고 홍수기인 7-8월에는 약 75배인 초당 9,000㎥에 달하는 등 연중 수량의 차이가 매우 심하다. 또한 범람 지역과 나일강 하류의 삼각주의 토양에 대한 심층적인 조사 결과 연평균 1㎜의 충적토가 쌓인다고 한다. 나일강의 물은 7월 초부터 서서히 불어나서 8월 중순 최고 수위에 달했다가 그 후 줄어들기 시작하여 11월 말부터 갈수기에 이르면 1-2월에는 최저 수위에 도달하게 된다. 나일강은 이 지역의 유일한 수원지이자, 해마다 7-10월의 범람으로 새로운 흙을 실어다 주고, 나아가 유일한 교통로로서 이집트 전역을 통일할 수 있는 수단이다. 또한 나일강은 지중해로 흘러 내려오면서 해변에 거대한 삼각주를 형성하여 넓은 농경지에서 일찍부터 농경 및 목축이 가능 만들었다. 이집트는 대부분이 광야이지만 나일강변과 특히 강 하구의 삼각주 지역에는 해마다 여름철 강의 범람으로 쌓인 퇴적토로 인하여 조성된 기름진 경작지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도시와 국가가 일찍부터 형성된 것이다. 이집트는 예로부터 나일강 유역을 따라 전체 국토를 양분했었는데, 상 이집트가 나일강 상류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하 이집트는 지중해 쪽의 삼각주 지방을 차지하는 지역이다. 이 두 지역의 경계는 현재 카이로 남쪽 20km지점의 멤피스(Memphis)이며, 두 지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이집트 고 왕국 시대부터 멤피스는 정치적·종교적 수도로 발전되어 왔다. 이러한 두 개의 이집트 개념은 고대 히브리어에서 이집트를 미쯔라임, 즉 두 개의 미쩨르로 표기한 데서도 그 유래를 잘 찾아볼 수가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상 이집트는 22개, 그리고 하 이집트는 20개의 주로 구분되어 있으며 멤피스는 하 이집트의 첫번째 주다. 주전 3000년경 상 이집트 세력이 하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역사상 최초의 통일 이집트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 후 이집트의 모든 왕들은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상징물들을 이용하여 그들의 왕권을 표기하기 시작하였다. 이집트의 농경지는 삼각주와 나일강변을 따라 양쪽에서 띠 모양으로 형성되었다. 이 면적은 전체 100만㎢ 중에서 3%인데 오늘날 이곳에 전체 인구의 96%가 거주하고 있다. 삼각주는 전체 면적이 22,000㎢이며 이 지역은 흙과 물과 태양이 1년 내내 충분하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농작물도 경작이 가능한 낙원 같은 곳인데, 이곳이 바로 성경에서 자주 언급하고 있는 고센 땅이다. 삼각주 지방의 중요한 고대 도시들의 유적은 해마다 나일강의 끊임없는 범람으로 인한 퇴적층의 증가와 농경지 개발로 대부분 파괴되거나 땅 속에 묻혀버렸다. 상 이집트와는 달리 이곳에는 석재가 귀해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흙벽돌로 지어졌기 때문에 잘 보존되지 못한 점도 있지만 나일강의 범람으로 인하여 파괴되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거나 아직도 땅 속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약 20여 군데의 유적지에서 이집트 왕조 시대와 그리스-로마 시대에 건설된 도시들의 유적이 발굴되었고 그 흔적을 볼 수가 있다. 이러한 흔적을 찾아서 순례를 하는 것이 성지순례이다. 그러다 보니 성지순례를 통하여 화려한 그림이나 건물은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부서진 잔해 속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찾을 수 있다면 성지순례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본다.
만리장성보다 1800여년 먼저 만든 노천 박물관들
도시마다 지역마다 웅장한 세계문화유산
5천여 년 전부터 약 3천년 동안 나일 강 유역에서 찬란하게 핀 고대 이집트 문명의 꽃이 지고 무려 2천여 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고대 이집트가 남긴 문명의 유산이 지금까지 이집트의 곳곳에 남아 있다. 이들 유산이 전 세계 여행자들의 발길을 이집트로 유혹하고 있다. 그리고 일단 이집트에 발을 들여놓고 나면 흠뻑 매료시켜 그들로 하여금 몇 번이고 다시 오게 한다. 이집트의 대표적 유적지로 고대·중세·현대가 어우러져 있고 유명한 이집트 박물관이 있는 이슬람도시 카이로, 신화의 요람 헬리오폴리스, 이집트의 상징인 세 피라미드로 유명한 기자, 세계 최대의 네크로폴리스 사카라, 피라미드 지대의 중심지 옛 왕도 멤피스, 인류 최초의 종교개혁의 무대 아마르나, 부활의 신 오시리스의 성지 아비도스, 사랑의 여신 하트호르의 성지 덴데라, 거대한 신전 유적과 파라오의 암굴무덤의 보고 룩소르, 아름다운 그레코·로만 신전의 에드푸와 콤 옴보, 누비아 유적의 아스완, 태양의 아들 람세스 2세의 땅 아부 심벨,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도시 알렉산드리아, 그림문자 히에로글리프의 도시 라시드를 들 수 있다.
이집트 일주, 문명의 흔적따라 떠나는 시간여행 역사 유적을 골고루 볼 수 있는 최적의 관광지 |
왕들의 무덤이 있는 룩소르 왕가의 계곡 <사진제공=이집트정부관광청>
죽은 자의 무덤인 테베 네크로폴리스의 벽화
이집트 카이로
기자 피라미드군, 맨 왼쪽부터 쿠푸왕, 카프레왕, 멘카우레왕 피라미드
이집트 하면 맨 먼저 생각나는 것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다. 그러니 누구나 이집트에 가면 이곳은 가야 한다. 이것을 안 보면 이집트를 갔다 왔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우리 여행단은 이집트 여행의 첫 일정으로 기자의 피라미드를 방문하였다.
기자는 카이로에서 먼 곳이 아니다. 옛날에는 카이로에서 꽤나 멀었던 모양이다. 시내를 한참 지나 피라미드를 먼발치에서 바라다 보면서 사막으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카이로 시내를 지나간다 생각했는데 갑자기 동내 한 가운데서 피라미드가 나타났다. 카이로의 도시화가 가져온 우울한 모습이다.
존재 사실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 피라미드
▲ 기자 피라미드군, 맨 왼쪽부터 쿠푸왕, 카프레왕, 멘카우레왕 피라미드 | |
ⓒ 박찬운 |
기자의 피라미드는 잘 알려진 대로 3기의 피라미드군이다. 이들 피라미드는 모두 고왕국 시기에 축조된 것이니 지금으로부터 45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제일 큰 규모인 쿠푸왕 피라미드(높이 146미터), 조금 작은 규모의 카프레왕 피라미드(높이 143미터, 현재는 136.4미터), 쌓다 만 미완의 멘카우레왕 피라미드(65미터)가 바로 그것들이다. 멀리서 사진을 찍어가며 쿠푸왕의 피라미드에 앞에 다가갔다. 한마디로 장엄하다. 4500년간 온갖 풍상을 겪어 왔지만 이 인류의 유산은 아직도 우리 앞에 서 있다.
온갖 도굴로 만신창이가 되고, 기독교와 이슬람 교도에 의해 피라미드의 상당 부분이 뜯겨져 나가 그들의 사원 건축 자재로 사용되었지만 원래의 모습을 잃지 않고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피라미드는 구약 성경 출애굽기에서 요셉이 형제들의 배신에 의해 애굽땅으로 팔려 올 때 이미 완성된 것이었다. 모세가 출애굽의 역사를 만들 때도 물론 건재하였다. 예수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이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애굽땅으로 피난을 왔을 때도 이 피라미드는 그들 가족 앞에 당당히 서 있었다.
피라미드는 무엇일까. 파라오의 무덤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이견도 있다. 그것은 자연의 대재앙이나 전쟁, 전염병 등을 예고하는 예언적 건축물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통설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높이가 146미터, 밑변이 230미터이고 체적이 무려 250만 세제곱미터나 된다. 이것을 건조하는 데 약 600만 톤의 석재가 사용되었으며 어떤 돌은 무게만 15톤에 달한다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4500년 전에 이런 엄청난 돌들을 날라 이곳에 이런 대형 구조물을 만들 수 있었을까.
피라미드 건설에 사용된 그 모든 기술을 알아내는 것은 아직도 요원한 일이다. 다만, 피라미드에 사용된 화강석을 1000킬로미터 밖의 아스완에서 나일강에 뗏목을 띄워 이곳으로 옮긴 다음 통나무를 깔아 놓고 사람들이 끌고, 그 다음 모래산을 만들어 높은 곳으로 끌어 올렸을 것이라는 정도의 추측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눈으로 직접 확인한 바로는 피라미드에 사용된 화강석이나 석회암이 대단히 정교하게 절단되었다는 사실이다. 석회암이야 무른 돌이나 철기가 아닌 단단한 돌로 절단할 수 있다고 해도 화강석과 같이 단단한 돌은 어떻게 그렇게 정교하게 절단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아스완에 가서 보게 되는 미완의 오벨리스크에서 의문이 풀리지만 실로 대단한 기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라미드는 노예에 의해 만들어졌을까. 예전에는 이러한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것을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왜냐하면 피라미드의 건축이 워낙 고도의 기술력이 동원된 것이기 때문에 뜨거운 태양 아래 채찍을 당하며 목말라하던 노예들의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무리라는 것이다.
이제 많은 사람은 이 건축물이 놀라운 기술력을 가지고, 노동 조직력을 지녔으며 절정의 예술적 재능을 가진 엘리트 집단이 만든 작품으로 이해한다. 어떤 이들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나일강이 범람하면 연중 4개월은 사람들이 실업상태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파라오들이 이들에게 일거리를 주기 위해서 이런 대형 국책사업을 벌였다는 해석도 한다. 제법 괜찮은 해석이라 생각한다. 그때부터 케인지안 경제이론이 경제정책의 토대였다니 말이다.
도굴범 앞에서 난공불락은 없는 법
▲ 기자 피라미드 중 가장 큰 쿠푸왕 피라미드 | |
ⓒ 박찬운 |
기자 피라미드 중 가장 큰 쿠푸왕 피라미드
기자의 피라미드에 가면 대부분 사람들이 가장 규모가 큰 쿠푸왕의 피라미드 내부를 들어가보고 싶어한다. 나도 물론이다. 하지만 이곳은 경쟁이 심하다. 하루에 300명만 들여 보낸다고 한다. 여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와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여행사 프로그램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래서 아쉽지만 쿠푸왕 피라미드는 들어가보지 못하고 입구에서만 서성거리며 사진만 찍었다.
대신 가장 작은 피라미드인 맨카우레왕의 피라미드에 들어갔다. 입구에서 몸을 수그린 채 30~40미터를 내려가 미라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례실에 도착하였다. 밀실폐쇄 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사실 나도 이것을 순간적으로 경험하였다.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는 도중 갑자기 혈압이 오르며 갑갑함을 느꼈다. 더 이상 앞으로 전진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잠시 정지한 채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다행스럽게도 다시 몸과 마음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마 이러한 상태가 심해졌더라면 큰 위험에 직면했을 것이다.
들어가면서 피라미드의 벽감을 보니 단단한 화강석과 무른 석회암이 번갈아 나타났다. 그리고 장례실은 화강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화강석을 사용한 것은 무엇보다 도굴을 막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아마도 도굴범이 이 피라미드의 설계도면 없이 도굴을 한다면 필시 장례실로 추정되는 부분을 예측하고 돌을 깨 나가면서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번갈아 나타나는 화강석은 난공불락과 같은 존재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도 3기의 피라미드 전체가 도굴되었으니 도굴범 앞에서 난공불락은 없는 법이다. 그런 이유로 고왕국 이후 파라오의 무덤방식은 다른 방법으로 바뀐다.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파라오가 살아 있을 때 암굴을 파기 시작해 죽으면 시신을 미라로 만든 다음 암굴묘에 넣고 입구를 봉하는 방식이다. 석회암 동굴의 입구가 막히고 시간이 지나면 누구도 입구를 찾을 수가 없다. 이런 양식이 바로 신왕국 시절에 볼 수 있는 테베(룩소르) 서안의 지하 암굴묘이다.
도굴범과의 숨바꼭질에서 택한 방법이었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 역시 도굴범의 먹잇감이 되었다. 이제까지 유일한 예외가 바로 투탕카문(투탕카멘)의 묘다. 1922년 11월 4일 하워드 카터는 도굴되지 않은 유일한 파라오 묘를 발굴하였다. 이집트 고고학 사상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스핑크스의 코는 왜 문드러져 있을까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카프레왕의 피라미드 앞에 스핑크스가 있다.
▲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카프레왕의 피라미드 앞에 스핑크스가 있다. | |
ⓒ 박찬운 |
기자의 피라미드에서 놓칠 수 없는 것이 카프레왕의 피라미드 앞에 서 있는 스핑크스다. 이 스핑크스는 이집트에서 발견된 많은 스핑크스 중 가장 큰 것이다. 길이 57미터에 높이가 20미터나 되는 이 초대형 조각상은 석회암 언덕을 깎아 만든 것이다. 그 역할이 무엇이었을까. 학자들은 세 피라미드를 보호하고 매일 아침 태양을 다시 탄생시키는 것이었다고 한다. 즉, 이것은 사자를 부활시키는 의미가 있다. 탄생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는 순환의 비밀이 스핑크스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스핑크스에 다가가 보면 코가 문드러져 있다. 이에 대해 많은 설이 제기된다. 나폴레옹이 이곳에 와서 대포를 쏘아 코를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대포를 쏘았으면 코만 문드러졌겠는가. 그리고 나폴레옹이 이집트 고대문명에 대하여 누구보다 관심을 갖고 수많은 학자들을 데리고 원정 길을 떠났는데 설마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다.
한가지는 분명하다. 스핑크스의 다른 곳은 비교적 성한 것을 보면 사람들이 코를 일부러 망가뜨렸다는 것이다. 정설은 후대의 기독교도나 이슬람 교도들이 스핑크스의 코를 파괴함으로써 그것의 생기를 끊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런 만행은 이집트 곳곳에서 발견된다. 어디를 가도 다른 곳은 멀쩡한데 코만 다친 조각상이 너무나 즐비하다.
고대 이집트의 신들① | ||||
고대 이집트의 신은 나일강 전역에서 섬겨지는 신과 작은 지역 단위에서 섬겨지는 신들이 있다. 그들 신들 중 유명한 신들 몇몇을 정리해 보자.
라(RA) 라는 태양으로 화신하는 신성한 빛이다. 종종 그는 머리 위에 태양을 인 매의 머리를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무트(MOUT) 아몬의 아내로서 그녀의 이름은 어머니와 죽음을 동시에 의미한다. 암사자의 몸으로 화신하는 이 여신은 종종 독수리 유골 형태의 머리 모양에 횐 색의 관이나 이중 관으로 쓴 여왕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세베크(SEBEK) 악어의 머리를 가진 신으로 약탈자이자 홍수의 신이다. 이 신은 콤옴보 신전에서 볼 수 있다. 세트(SETH) 폭풍과 폭우 그리고 사막의 신인 세트는 불특정 동물 머리를 갖고 나타난다. 그는 형제인 오시리스를 살해한 살인자로서 모든 것을 쳐부수고 파괴하여 무질서를 낳는다. 악의 화신이기도 하다. 아몬(AMON) 아몬은 '숨어있는 자'라는 뜻이다. 신왕국 시기에 테베의 수호신이었다. 한 쌍의 높은 깃을 세운 관을 쓴 머리 모양으로 나타난다. 아몬은 생명을 주는 대기의 주신으로 몸 색깔이 푸른색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아툼(ATOUM): 아툼은 '총체적이고 완전한 것' 또는 '존재하는 것이자 존재하지 않는 것'의 의미가 있다. 이 신은 태초의 에너지의 바다에서 깨어난 창조자로 종종 이중관을 쓴 파라오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프타(PTAH) 프타는 '건립자'라는 뜻인데 멤피스의 지배자이자 말씀의 신, 장인들의 신이었다. 그는 권력의 상징물을 들고 작은 모자를 쓴 미라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하토르(HATHOR) 이 신은 '호루스 집'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 여신은 종종 암소의 귀를 가진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머리에는 뿔이 두 개 나 있고 두 뿔 사이에는 태양이 있다. 기쁨과 사랑, 그리고 하늘의 여왕으로 간주된다. |
고대 이집트의 신들① | ||||
고대 이집트의 신은 나일강 전역에서 섬겨지는 신과 작은 지역 단위에서 섬겨지는 신들이 있다. 그들 신들 중 유명한 신들 몇몇을 정리해 보자.
라(RA) 라는 태양으로 화신하는 신성한 빛이다. 종종 그는 머리 위에 태양을 인 매의 머리를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무트(MOUT) 아몬의 아내로서 그녀의 이름은 어머니와 죽음을 동시에 의미한다. 암사자의 몸으로 화신하는 이 여신은 종종 독수리 유골 형태의 머리 모양에 횐 색의 관이나 이중 관으로 쓴 여왕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세베크(SEBEK) 악어의 머리를 가진 신으로 약탈자이자 홍수의 신이다. 이 신은 콤옴보 신전에서 볼 수 있다. 세트(SETH) 폭풍과 폭우 그리고 사막의 신인 세트는 불특정 동물 머리를 갖고 나타난다. 그는 형제인 오시리스를 살해한 살인자로서 모든 것을 쳐부수고 파괴하여 무질서를 낳는다. 악의 화신이기도 하다. 아몬(AMON) 아몬은 '숨어있는 자'라는 뜻이다. 신왕국 시기에 테베의 수호신이었다. 한 쌍의 높은 깃을 세운 관을 쓴 머리 모양으로 나타난다. 아몬은 생명을 주는 대기의 주신으로 몸 색깔이 푸른색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아툼(ATOUM): 아툼은 '총체적이고 완전한 것' 또는 '존재하는 것이자 존재하지 않는 것'의 의미가 있다. 이 신은 태초의 에너지의 바다에서 깨어난 창조자로 종종 이중관을 쓴 파라오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프타(PTAH) 프타는 '건립자'라는 뜻인데 멤피스의 지배자이자 말씀의 신, 장인들의 신이었다. 그는 권력의 상징물을 들고 작은 모자를 쓴 미라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하토르(HATHOR) 이 신은 '호루스 집'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 여신은 종종 암소의 귀를 가진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머리에는 뿔이 두 개 나 있고 두 뿔 사이에는 태양이 있다. 기쁨과 사랑, 그리고 하늘의 여왕으로 간주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