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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미래를 여는 나의 집 § 원문보기 글쓴이: pinetree
1939년 7월 중일전쟁에 동원된 조선인 중 첫번째 전사자가 나왔다. 故이인석, 당시 언론에서는 그의 죽음을 지원병 최초의 꽃으로 미화했다. 다음 날엔 그의 가족까지 찾아가 남자가 전쟁에서 죽은 건 마땅한 일이라는 인터뷰까지 받아냈다. 무고한 전쟁 희생자가 하루 아침에 전쟁 영웅이 되는데 조선 문인들도 큰 역할을 했다. 문단의 큰 별에서 친일로 변절한 시인 주요한(1900~1979)은 병사의 죽음을 이렇게 기렸다.
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 폐하 만세를 목껏 부르고
대중의 풀 밭에 피를 뿌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
역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뿌려지는 피다
반도의 무리가 님께 바친 처음의 피다.
침략전쟁의 희생자를 영웅으로 만든 일등 공신, 그들은 누구일까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친일파 특집 3부작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은 일제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참전을 선동했던 친일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데 지금 방금 보신 주요한은 우리 시험에도 자주 나왔던 불놀이 라는 시를 쓴 시인이잖아요.
류근/시인: 그렇죠, 우리나라 자유시의 효시로 알려져서 우리 때는 교과서에 까지 실렸던 시인데,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우에
스러져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우는 밤이 또 오건 마는---1919.02.<불놀이>中 주요한
이렇게 나가는 나름 상당히 유려한 시예요. 그랬는데 불과 25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지금 돌연 일본을 님이라고 부르고 지원병이 죽어가면서 흘린 피에 대해서 저런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진짜 황당하고 참담합니다.
이윤석/방송인: 그리고 참 이 부분도 마음이 아파요. 사실은 아무 죄없는 조선 청년이 전쟁터에 끌려가서 죽은 거잖아요. 그런데 그 죽음을 애도하기는커녕 지원병 최초의 꽃이다 이건 누가 봐도 원통하고 한 맺힌 죽음인데 그걸 아름답고 고귀한 죽음인양 포장을 하고 있어요.
심용환/역사작가: 이인석은 아내가 있었대요. 결혼을 했던 거죠. 아내의 얘기에 따르면 이인석의 꿈은 선생님이었대요. 전쟁에서 돌아와서 선생님이 되어야지 라는 꿈이 있었는데, 아내가 맨날 기다렸을 것 아네요. 살아서 돌아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고 했는데, 전사는 남자의 당연사, 이건 거의 조작기사 처럼 가짜 뉴스가 나왔는데, 나중에 이 기사를 아내가 본 거예요. 아내의 말이 뭐냐 하면, “남편이 죽었는데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냐며 울분을 토했다는 거죠.
이윤석: 그건 당연지사죠.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저는 이런 사례를 보고 사실 크게 놀라지는 않았어요. 독일도 마찬가지였어요. 히틀러가 점점 권력이 세지고 커지니까 아 그러다가 진짜 유럽의 통합이 되는 거 아니냐 라고해서 결국 편을 바꾸어서 히틀러를 지지했던 문인들이 있었죠.
신주백/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소장: 비슷한 현상이 조선에서도 있었어요. 37년도에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나서 38년 10월에 일본군이 중국 본토를 공격할 때 상해 임시수도 남경 그리고 남쪽에 있는 무한을 점령하는데 이때부터 조선의 지식인들이 많이 전향을 합니다. 그리고 40년 6월에 나치가 프랑스 파리를 점령하잖아요. 더 많은 지식인들이 전향을 해요. 이런 식으로 전쟁의 상황에 따라서 많은 지식인들이 시대 상황을 읽고 재빠르게 태도를 바꿔나가는 시점이다 라고 보시면 돼요.
다니엘: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그런 거는 비겁하잖아요.
신주백: 왜 그렇게 한국 말을 잘 해요~ 제가 지금 당황했습니다.
류근: 아무튼 진짜 먹물들의 한계, 먹물들의 비겁성이 잘 들어나죠. 그런데 주요한은 해방 이후에 장관까지 지낼 만큼 승승장구 하면서 오랫동안 잘 나가는 사람이었는데~ (1960년 부흥부 상공부 장관 역임).
최원정: 장관을 했어요?
류근: 근데 지금으로서는 판단 미스가 분명하지만 당시에는 일제가 영원할 거라는 판단을 한 거 같아요. 그러니까 저런 식으로 덮어놓고 노골적으로 조선 병사의 죽음을 찬양하고 나선 거죠.
심용환: 머리 좋고 공부 많이 했잖아요. 남들보다 정세판단이나 시세판단이 빠른데~ 가장 적극적인 사람이 누구냐 류근 시인과 같은 직종에 속한 사람~ 문인들이 앞장서서~ 필력을 이용해서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이죠. 이걸 어떻게 보십니까
신주백: 그런 문인들도 있는데~ 같은 직종이지만 다를 수도 있잖아요. 지금 말씀하신 문인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한 사람 있었어요.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 앞에 나서서 조선의 젊은이들을 말과 행동으로 전쟁터로 이끌었던 문인이 한 분 있었습니다.
다니엘: 누구죠?
신주백: 바로 이 사람입니다.
류근: 춘원 이광수, 친일 문학계의 거두,
신주백: 사실 친일 문학계 라고도 말하지만 더 크게 얘기하면 식민지 시대 조선의 대표적인 지식인입니다. 동경삼재(東京三才) 라는 말이 있어요. 일본에 유학을 갔던 천재 3명을 말하는데 임꺽정의 작가 벽촌 홍명희, 그 다음에 3.1운동 조선독립선언서의 초안을 만들었던 육당 최남선과 함께 같은 급에서 놀던 사람이 춘원 이광수입니다. 조선인의 심성구조를 누구보다도 문학적으로 잘 표현했던 사람, 조선의 젊은이들의 미래를 누구보다도 많이 걱정했던, 당시는 독립운동가 라고 볼 수 있죠. 독립운동가 였던 사람이 바로 춘원 이광수다.
이윤석: 일종의 스타 지식인 같은~
신주백: 네, 요즘 같으면 언론에서, 인터넷에서 난리가 난 지식인이죠. 2.8 독립선언서에 관여하고 그 멤버들을 대표해서 상해로 가서 임시의정원 결성에 참여하고 또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서 중국으로 건너오자 그의 비서 역할을 하고 또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간행에 결정적으로 관여한 사람이 바로 춘원 이광수 였습니다.
이윤석: 그러면 그 계열을 잘 갔으면 안창호 선생의 뒤를 잇는 독립운동가 이자 많은 존경을 받는 천재 문인 애국자로 역사에 남을 수 있었는데~ 아, 어쩌다가 친일이라는 늪에 빠진 걸까요?
심용환: 독립신문 발행인을 했으니까 정보에 빠를 것 아녜요. 국내외 정세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데~ 이게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의구심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여하튼 민족지사로서, 독립운동가로서, 문인으로서, 많은 활동을 하다가 생각이 바뀌어가는 거죠. 과연 조선의 독립이 가능한 거야? 일제가 쉽게 무너질 것 같애~ 이런 생각을 했던 거 같고 결론은 조선은 안된다 일제가 영원할 거니까 난 이제 방향을 바꾸겠다 라고 했던 거 같애요.
-1921년 상하이에서 귀국한 이광수는 그 이듬해 민족개조론이란 논문 한편을 발표한다. 그는 이글에서, 조선민족은 거짓말을 잘 하고 용기와 결단력이 부족한 고질적인 병폐를 갖고 있다며 조선이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된 이유를 민족성 탓에 돌리는 입장을 보인다. 민족주의자들은 충격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 때부터 이광수에 대한 변절자 라는 꼬리표가 붙기 시작한다.
다니엘: 충격적이고 말이 안되잖아요. 자기 민족인데~ 자기 얼굴에 침 뱉기잖아요.
이윤석: 다니엘이 와 있는데서 저걸 보니까 제가 부끄러워요.
다니엘: 그런데 거짓말 잘한다? 한국 사람들 되게 솔직하잖아요. 너 왜 이렇게 살쪘어? 엄청 대놓고 얘기해요.
이윤석: 지나치게 솔직할 때가 있어요.
다니엘: 너무 솔직할 때가 있어요. 거짓말 잘한다는 말이 그거 자체가 거짓말이지.
이윤석: 같은 민족이고 워낙 당대 이광수는 최고의 지성인 아녜요. 그런데 왜 이렇게 까지 했을까 하는 의아심이 들어요.
신주백: 그러니까 실제로 이광수가 저 사람 변했어 라는 논란에 휩쌓일 때 자기가 그런 얘기를 해요. 나는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이런 발언을 한게 아니다 순수하게 고쳐야 될 민족성을 얘기했을 뿐이다.
이윤석: 그런데 제가 좀 불편한 것은 전형적인 피해자 탓하기를 들고 있고 또 하나는 지적하는 것들이 내용이 사실이냐를 한번 따져 봤어야 되고 만약에 사실이더라도 그게 일제 침략의 이유가 되느냐 그건 또 다른 문제거든요.
신주백: 그렇게 잘 따져 봤으면 그런 논리가 나왔겠어요. 이 선생님 지적이 맞아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문장을 읽었을 때 그런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이윤석: 주관적 의지는 나는 순수했어요 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거지만 조선인의 문제점을 일본인이 보는 시선에서 그대로 그걸 바라 본거나 마찬가지거든요.
다니엘: 그러니까 결국은 편을 바꾸게 되고 이제 힘에 대한 숭배를 하게 되는 거잖아요.
신주백: 그런데 민족개조론을 발표한 일년이 지난 경우에 동아일보 신년 사설에 민족적 경륜 이라는 논설을 씁니다. 여기에 일본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우리의 정치적 실력을 양성해야 된다 라는 발언을 해요 그러니까 일년전보다 더 나아간 발언을 한 거죠.
이윤석: 그럼 점점 본심이 드러나는 거 같애요.
심용환: 이 때는 초보적 단계라고 봐도 좋은 정도구요. 진정으로 그가 위대한 친일파로 거듭나는 건 30년대로 들어갑니다. 37년에 중일전쟁이 터졌잖아요. 그때부터 우리나라가 미곡 공출 강제로 당하죠. 물자 착취 당하죠. 나중에 인력까지 끌려가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 싯점에는 소위 말하는 난 친일파야 라고 확실히 보여줄 때인데 그때가 언제 부터인가 하면 1938년에 육군특별 지원병제도를 만들어서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인을 전쟁에 끌고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43년이 되면 아예 징용령이란 걸 선포해서 군인들을 동원하는데 이때가 그 동안 준비해 왔었다 나 이제 정말 일본을 위해서 봉사할 거야 모든 태도가 이때 다 드러납니다.
류근: 이광수가 남긴 방대한 어록과 글만 봐도 그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보내야겠다는 결의가 막 느껴집니다. 군대생활 마치고 돌아오는 날은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는데 이같은 새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2300만명이 모조리 통과해야 할 필연 당연의 과정인가 합니다. 한 마디로 천황께 바쳐서 쓸데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읽는 제가 다 부끄럽습니다.
신주백: 군대 갔다와야 일본인 된다. 일본은 조선인을 동원할 때 법에 입각해서 동원했습니다. 야, 너 안가? 총칼을 드리대고~ 가! 이렇게 한 적은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오늘날에도 와! 우리는 그거 합법적으로 했어 라고 말을 당당하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법이 제국주의의 법이었고 조선인을 동원하기 위한 법이었다 라는 관점이 빠져 있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동원을 했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나, 군대에 왔어 그냥 어영 부영 떼우지 뭐 이런 사람은 응하지 않았을 거란 말이죠. 자발적으로 충성하는 사람, 천황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원했을 건데 그런 사람은 갑자기 군대 가서 그런 정신구조가 생기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거는 군대에 들어가기 전에 어떤 특정한 과정이 있어야 되는데 그게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황국 신민화 교육이 되겠습니다. (황국신민화교육-신사참배강요, 황국신민선서 제창 강요 등 조선인을 일왕의 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
최원정: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완전히 개조하겠다. 민족을 완전 말살시키겠다 의도였잖아요.
이윤석: 일본은 겁이 났을 것 같애요. 이미 3.1운동때 조선인들의 독립정신이나 항일의지를 확인했기 때문에 전쟁의 장기화로 조선인을 쓰긴 써야 되는데 총을 주기는 뭔가 불안하고 총을 안주기에는 명분이 없고~
신주백: 일본의 입장에서는 병력이 갈수록 부족해 지는 상황에서 조선인을 동원해야 겠는데 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일본이 어떤 제도를 취하느냐 하면 소대, 중대, 대대, 연대로 조선인만의 부대를 만들지 않는다. 조선인끼리 뭉쳐놓으면 자기들 끼리 과격한 반란을 꾀할 거 아니냐 3명이서 5명씩 분산시킨다. 그런 다음에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한 정신개혁, 신성개혁을 의도했던 것이죠. 그게 황국신민화 교육인 거죠.
심용환: 말이 황국신민화 교육이지 노예를 만드는 것이죠.
신주백: 그렇죠, 노예죠.
류근: 그러니까 황국신민이니 내선일치니 해가면서 조선인의 저항정신을 말살시킬려고 나온 제도 아닙니까. 그런데, 진짜~ 거기에~ 문인들이 앞장서서~ 선전을 하고 있다는 게~
심용환: 하여튼 맹활약을 많이 한 거 같애요. 왜 그러냐 하면 역사연구자들 사이에서 정말 많이 인용되는 이광수 어록이 있습니다. 핵심 세 가지만, 3위 부터 보여드릴 게요.
3위 조선인은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
최원정: 저게 어떻게 가능해요?
이윤석: 저게 친일파가 아니라 진일파, 진짜 일본인이 되고파 아녜요?
심용환: 2위를 보여 드릴게요.
2위 나를 식민지 토인이 아닌, 폐하의 적자로서 일본을 조국으로 삼을 기회를 달라
최원정: 저를 일본인으로 삼아주세요~ 애걸 복걸 하는 거네요~
심용환: 1위는 저도 보고서 놀랐어요.
1위 조선놈 이마 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 만큼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
최원정: 저게 문인이 쓴 문장 맞아요?
다니엘: 나도 조선놈 이라고 하고 일본인 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 이거는 진짜 기분 나쁜 데요.
최원정: 아름다운 어휘를 쓰는 문인에게서~ 이마빡이니 하는 저런 표현이~
이윤석: 표현 자체가 좋지가 않아요. 3위 같은 경우는 장기 이식론, 2위 같은 경우는 국적구걸론, 1위는 일본피 수혈론, 뭔가 표현이~
최원정: 시대의 지성인 이광수를 필두로 해서 본격적인 친일경쟁이 문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데~어떤 문인들이 어떤 발원을 했는지 함께 보실까요.
주요한[마쓰무라 고이치]-지금 시국이 요구하는 것은 행동이요 희생이요 무조건의 헌신이며
동아의 성전이 조선에 구하는 것은 땀과 피와 살과 생명이오(1941.03.신시대)
김동인[히가시 후미히토]-내 몸은 이제부터 내 것이 아니오, 가족의 것은 아니요
황공하옵게도 폐하의 것이며, 자율지원의 학병제로 일본인적 애국심의 강도를 다루는 저울이다 (1944.01. 매일신보)
최남선-오늘날 대동아인으로서 이 성전에 참가함은 대운 중에 대운임이 다시 의심없다. 어떻게 든지 참가하고야 마는 최고 명령을 받고 있다 (1943.11. 매일신보).
최원정: 자, 지금 보신 주요한, 김동인, 최남선의 발언들을 들으셨습니다. 정말 누가 들어도 다 아는 대표 문인들인데, 아니 김동인은 지금도 동인문학상을 언론사에서 기리면서 하잖아요?
심용환: 그것도 폐지하자는 운동도 하고 그래요.
이윤석: 말 그대로 충성경쟁 인데~
최원정: 아~ 입이 안다물어지네요.
이윤석: 이게 만약 오디션 이라면 공동우승이예요. 우열을 가릴 수가 없죠.
다니엘: 내 몸은 이제 내 것이 아니예요~
이윤석: 내 몸을 왜 자꾸 폐하 거라고 하지요? 죄송하지만 내 몸은 내 꺼예요. 참 웃기네~ 너무 기분이 나쁘고~ 또 전쟁을 대운이라고 표현하고~ 전쟁은 불운이지요.
신주백: 일본의 관료들이나 장군들의 특징이 대운(大運) 이라는 단어를 항상 썼어요. 1차 세계대전 때도 대운이라고 했고 만주 침략 때도 대운이라고 했어요.
심용환: 그 단어를 거기서 갖고 왔구나~
류근: 전쟁을 성전(聖戰) 이라고 하는 것도 웃기죠~
신주백: 당시에 자기들에게는 절호의 좋은 기회로 해석을 했어요.
심용환: 어쩔 수 없이 했다 그때 상황인 이걸 보면서 어쩔 수 없이가 아니었다는 걸 확실하게 아셨으면 좋겠어요.
다니엘: 어쩔 수 없다 라는 말을 썼을 때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협력한 것과 자발성을 띠고 충성한 것은 달라요.
최원정: 다니엘씨 앞에서 우리가 좀 창피해 질려고해요. 우리 민족의 친일 문인들이 저런 모습을 보였다는게~
다니엘: 절대 그럴 필요가 없는게~ 독일도 마찬가지였어요.
최원정: 독일도 그랬어요?
다니엘: 독일도 그랬죠. 예로 1950년대 생의 한 가운데 라는 소설을 쓴 여자 작가가 있었어요.
심용환: 루이제 린저~
다니엘: 맞아요. 루이제 린저 라는 사람인데요. 1935년에 이런 얘기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충성을 다해 몸을 바치는 성스러운 이 땅의 감시자, 위대한 지도자(히틀러)의 비밀을 지키는 파견인들, 우리는 감시한다. 우리는 승리 아니면 죽음을 택할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충성스럽기 때문이다.-1935년 <젊은 세대>-
심용환: 너무 충격이다!
류근: 그런데 우리도 나중에는 저런 친일 충성경쟁이 어디까지 가냐 하면 얼마전 우리 방송했던 가미카제 까지 갑니다. 여기서 이제 누가 등장할까요?
최원정: 우리 그때 한번 들었잖아요~ 미당 서정주~
류근: 미당 서정주가 등장을 하죠.
伍長頌歌
미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그대는 우리의
가미카제 특별 공격대원—1944 <매일신보>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제가 자살공격까지 감행했을 때 전 세계가 야만성과 반인륜성에 경악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일본 작가들 마저 거기에 대해서 언급을 자제하고 있는데~ 하필이면 조선의 시인 서정주가 이런 시를 쓴 거예요.
심용환: 왜 이런 지식인들, 문인들을 세워서 이런 행동을 시켰을까 라는 걸 따져 볼 필요는 있어요. 이유는 뭐냐 쉽게 말하면 이거죠. 조선인들 중에서도 엘리트들이 있잖아요. 전문대학을 나왔다든지 대학생 이라든지 이런 엘리트들을 데려오는 거예요. 일본의 전쟁에 파견하는게 일본의 입장에서는 유리 하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들을 쉽게 데려올려면 쉽게 말하면 그 친구들의 롤 모델한테 발언을 시키면 끌고 오기가 쉬운 거잖아요. 그런데 이광수와 최남선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에요. 당대 최고 문인에 지식인이고 엘리트고 일본 유학 갔다 오고 말도 잘해 글도 잘 써 논리적이야 내가 해봐서 아는데 말이야 내가 젊었을 때 이러면서 쫙~쫙~풀어주면 결국은 유학생들이나 젊은 학생들이 결국 이게 길이구나 내가 저 길로 가면 되겠지 이런 전략적이고 치밀한 어떤 친일행위였다는 걸 우리가 놓치면 안될 것 같애요.
류근: 유산균 음료 광고할 때 노벨 의학상 수상자 나오는 것처럼 똑 같은 얘기죠.
이윤석: 진짜 광고 효과만점이죠. 솔깃할 수 있어요,.
심용환: 지금 생각나는데~ 일부에는 그런 강연을 하고 다니니까 믿을 수 없다. 현장에서 항의하는 사람도 있고 개인적으로 어떤 유학생은 단도를 들고 와서 이광수!! 나와 하면서 막 휘두르다 끌려 나오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격렬한 반응도 있었다고 해요.
이윤석: 그래도 결기가 살아있는 조선인도 있었네요.
심용환: 그런데 문제는 그게 소수고 점점 지원병이 늘어나고 협력자가 늘어나고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죠.
신주백: 차별을 벗어나는 방법의 하나로 일본의 지배를 인정하고 징용을 가자 야 우리가 일본인이야 너희는 우리를 믿을 수 있어 증명하는 식으로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을 벗어날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 이광수씨 처럼 아니야 독립을 해야 차별을 벗어날 수 있어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던 거죠.
최원정: 많이 헷갈렸겠다~
류근: 지금 젊은이들은 한번도 독립된 국가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식민지 청년들이잖아요.
신주백: 태극기 조차 구경해 본 적이 없는 세대인데~
최원정: 그랬을까요, 진짜?
신주백: 태극기를 전혀 못봤다 이것 그냥 보자기에요. 디자인이 특이한 보자기~ 1919년 싯점에 어린이 였거나 막 태어난 사람이 일본의 특별지원병이나 징병예상자가 되는 경우에는 3.1운동이 갖고 있는 민족적인 결기, 의지 이런 걸 확인할 길도 없고 내가 태어나서 보니까 세상은 이미 갇혀 있고 식민지 지배가 너무나 당연한 이런 세상에서 사는가 보다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이런 세상에서 시라든지, 앞선 화면에서 봤던 그런 주장들을 봤을 때 그것에 대해서 저항의식을 얼마나 갖겠습니까
이윤석: 특히 뭔가 마음이 약해지고 불안한 상황이면 더 잘 넘어갔을 것 같애요. 저의 경우도 평소는 안그러는데 일도 안풀리고 마음도 우울하고 그러면 누가 와서 그러잖아요. 눈빛이 참 맑으시네요. 도에 관심이 있으세요? 평소에는 관심이 없는데 저 관심이 참 많았어요!
심용환: 서정주가 훗날 일제가 그렇게 빨리 망할줄 몰랐다. 내 그래서 했다 그랬는데 얘기를 종합해 보면 태어났더니 일제시대예요. 30년 넘게 지배 그러니까 희망도 그런데 전쟁에서 일본이 전투는 잘 하는 것 같애. 이거 밖에 없나 나도 몰라 이걸로 한번 승부를 보자 이런 식의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지 간에 결론은 그냥 일본의 명령대로 갈 수 밖에 없는 거죠.
신주백: 그렇게 젊은이들은 아까운 목숨을 가서 바치라고 권유를 해서 충성을 했던 이광수인데 그런데 1945년까지 이광수가 일제에 의해서 감시를 당했다는 거예요.
최원정: 누가요?
신주백: 춘원 이광수가~ 일본한테~
이윤석: 감사(感謝)를 받은게 아니고 감시? 왜요 왜요 이렇게 까지 당해요?
신주백: 일본이 조선인을 궁극적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건 어떻게 알 수 있냐하면 일본이 패전하고 본토로 돌아가고 나서 일본에서 조선총독부에 근무했던 정치파트, 군사파트, 경찰파트 근무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회고를 내고 집담화를 해요. 그 집담화를 녹음을 하는데 한 관료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조선총독부에 접근하려는 이른바 친일파를 우리는 의지할 수 없었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끝까지 안믿은 거죠.
이윤석: 경계하고 있었군요.
최원정: 독립운동하다가 친일로 변절한 놈, 두번 배신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이건데~ 이광수 입장에서는 나름 일제를 위해 앞장을 섰는데 정작 일제가 믿지 않았다~
최원정: 모욕적인 일 아녜요?
이윤석: 일제는 이광수가 배신할 줄 알고 감시원을 부쳤는데 배신을 안한 건데요~ 그러니까 배신할 줄 알았는데 배신을 안하는 배신을 한 거잖아~
다니엘: 헷갈려요~
최원정: 인간적으로 너무 짠하다~그렇게 결론 내리고 싶네요.
심용환: 일본은 주도면밀합니다. 문인들을 세워서 조선의 엘리트 청년들을 현혹하는 일을 한다고 하면 반대편에서는, 그걸로 만족하지를 않아요. 보다 더 체계적으로 황국신민 육성해야돼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교육제도를 체계적으로 운영하는게 아마 최고일거예요. 그렇죠? 교육이 갖고 있는 힘이 무서우니까요. 자, 그러니까 당연히 문인들 못지않게 교육계에도 친일파들이 있었겠죠. 개중에 혹시 생각나는 분이 없습니까?
류근: 아주 많아요. 너무 많아요.
심용환: 그러면 줄여 드릴게요. 여성~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박사입니다.
최원정: 감이 오죠. 정답은 영상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1941년 이화여전 교장이었던 김활란은 야마기 카쓰란 (天城活蘭)으로 창씨개명을 한다. 친일단체 임원을 맡으며 부인들이나 여학생들을 상대로 징병, 학병 동원연설을 활발히 한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 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우리는 아름다운 웃음으로 내 아들이나 남편을
전장으로 보낼 각오를 가져야 한다.
만일의 경우에는 남편이나 아들의 유골을
조용히 눈물 안내고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가져야 한다.--<신시대> 1942.12.—
최원정: 저 분이 그래도 나름 1930년대 초기에는 농촌계몽운동도 많이 했다고 저는 알고 있는데~ 전시체제에 들어가니까 친일로 변절을 하는군요~
심용환: 보통인물이 아닙니다. 교육계에 여성계에 상징적인 존재였구요.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올리기 위해서 노력도 굉장히 많이 했고 이런 종합적인 부분에서 여성 지식인 여성 교육인 여성 리더였던 인물이 이제 이런 행동을 하게 되는 거죠.
이윤석: 훌륭했네요.
심용환: 정말 훌륭한 사람이죠.
류근: 심지어는 여성계의 스승이라고 까지 하잖습니까.
다니엘: 이것 보니까 나치시대에 독일의 청년 교육제도가 생각나요. 독일에 NS 유겐트 라는게 있었어요 (히틀러 유겐트 (NS-Hitler-Jugend)-독일 청소년에게 나치즘 교육을 위해 설립된 단체 히틀러 우상화 교육이 주목적). 청소년재단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거의 20년대부터 애들을 13세부터 의무적으로 여름 캠프에 보내요. 거기서 그냥 보이 스카우트 처럼 즐겁게 지내다가 중간 중간에 묘한 군사훈련이 들어가요. 묘한 군사훈련 들어가고 나치사상이나 독일 민족의 우월성에 대한 교육도 같이 시키면서 이미 어렸을 때부터 미래의 군인들을 키우는 의미로 만들었다는데 어린 아이들은 사실 그런 걸 아예 모르잖아요. 제 할머니가 전쟁이 벌어졌을 때 여섯살이었거든요. 그런데 아직도 가끔씩 되게 놀라운 발언들을 하세요. 그때는 독일에서 테러범 얘기 나오고 IS테러 직후, 그때 할머니랑 통화했을 때 할머니가 한 마디 하시더라구요. 히틀러가 있었으면 테러범들 싹 없앴을 텐데—그런 얘기를 하는거예요. 그런데 할머니 원래 완전 반대하시거든요. 반대하시고 절대 그런 사람 아닌데~ 그게 어렸을 때 교육을 통해서 받았던 히틀러에 대한 강한 지도자 인상, 범죄없는 세상, 약간 이런 식으로 사상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런 발언이 나오는 것 같애요.
이윤석: 교육이란 게 무섭네요~
최원정: 젊은 학생들의 정신을 지배한다는 건 그들의 미래를 장악한다는 건데~ 지금 그 얘기 들으니까 소름이 확 끼치네요.
신주백: 독일의 나치 교육과 비슷한게 일제도 황국 신민화 교육을 통해서 그런 식으로 교육을 했습니다. 김활란 같은 분은 교육자 였으니까 교육자로서의 권력이 있고 교육자로서 어떤 존경심이 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전달하려는 힘이 훨씬 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권력을 이용해서 사람과 물자를 동원하는데 많은 노력과 활약을 했다라고 볼 수 있죠. 그 중에 대표적인게 애국금차회란 조직을 만들어요. (愛國金釵會-1937년 8월 20일 조직된 친일단체, 금비녀 금가락지 등 장신구와 국방헌금 헌납), 금비녀 라든지 금가락지를 모아서 일본의 전쟁승리를 위해서 국방헌금을 내기로 합니다.
이윤석: 우리가 1998년에 외환위기 때문에 금 모우기 운동을 했잖아요. 나라를 한번 살려보겠다고 그런데 그때는 정반대 의미의 금모우기 운동을 한 셈이네요. 그러니까 나라에 금도 바치고 금쪽 같은 아들도 바치고 일제의 입장에서는 감격스러웠겠어요.
신주백: 1944년에 큰 눈병을 알아가지고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잘못하면 시력을 잃을 수도 있겠다 이렇게 말을 하니까 순간적으로 했던 말이 있습니다. 남의 귀한 아들을 사지로 나가라고 말했는데 장님이 되도 난 억울하지 않다 당연한 형벌 아니냐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그렇게 얘기 했다고 해요. 평소에 그가 자신의 출세나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 타인을, 어린 제자들을 희생시켰던 그분의 속에 어떤 죄책감, 이런게 발동해서 나온 발언이 아닐까.
류근: 정식 죄의식은 과연 있었을까요?
심용환: 저도 지적하고 넘어가야 된다고 생각되는게 김활란 여사를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얘기를 하면서 사과했다는 식으로 주장하거든요. 이 거는 반성이라고 치더라도 사적인 자기의 고백인거지 공적인 고백이나 반성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건 잘못된 것 같애요.
최원정: 이런 죄의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일과 영달을 위해서는 한번 질끔 감았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용서받기가 어려운 거 같습니다.
신주백: 사실은 교육계에서 그렇게 학생들을 동요하는 행동은 어떻게 보면 전쟁을 위한 행위이니까. 긴장감이 전제되어 있고 딱딱 할 수 있잖아요. 그런 부분이 사람들에게 다가 갈 때는 저항적으로 다가 갈 수도 있고 피동적으로 다가 갈 수 있는데 그걸 자연스럽게 부드럽게 넘어가게 하는 방법이 하나 있죠. 그게 음악입니다. 음악을 통해서 사람을 자발적으로 동원하게 하거나 저항감을 무마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죠.
심용환: 일본이, 쉽게 말하면 일제의 영향이 미치는 모든 곳에 음악을 틀었어요. 곳곳에, 학교, 길거리, 집회장, 다방, 심지어 전쟁터에다가도 음악을 틀었다고 합니다. 기미가요 같은 것을 튼 경우도 있었고 그게 아니면 일제의 그런 활동들을 찬양하고 선전하고 이런 것들을 음악으로 계속 표현을 했던 것이죠.
다니엘: 음악은 약간 광고랑 비슷한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애요. 그러니까 우리가 계속 무의식적으로 듣다가 솔직히 나이 들어도 80세, 90세에도 어렸을 적 들었던 음악이 다 생각나잖아요.
이윤석: 어르신들이 치매에 걸려도 말을 못하는 경우는 생기지만 노래는 기억을 할려고 굉장히 노력을 한데요. 그만큼 직접적인 힘이 있는 것 같애요.
최원정: 마법 처럼 주문을 걸듯이 막 생각을 주입해서 이때 사람들의 영혼을 다스리는 거죠.
류근: 우리 어릴 때가 유신치하 아닙니까. 그때 정말 관제 노래가 엄청났어요. 진짜 거리에서 극장에서 동네 마을에서 까지~
신주백: 새벽에 일어나면 마을이장 집에서 스피커로 틀어주잖아요. 새벽종이 울렸네~노래,
류근: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이윤석: 여기서 잠깐 이 노래를 다 아실 거예요. 하나 둘 셋 넷~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 그런데, 다니엘에게는 생소한 노래가~
류근: 진짜 간드러지게 부른다. 이윤석씨가~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남인수(1918~1962)씨인데~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였잖아요? 당시 다방에서 노래들이 나오는데 대부분이 남인수의 노래가 많이 나왔다 라고 있을 정도로 최고의 인기가수인데, 일제가 가만 놔두었겠습니까? 이때 와서 남인수한테 출병을 선동하는 노래를 부르게 했대요. 어떤 노래인지 일단 듣고 한번 얘기 나눠봅시다.
자, 음악 스타트~ 헐서지원(1943년)-박시춘 작곡, 조명암 작사
반도의 핏줄거리 빛 나리라 한 핏줄
한나라 지붕 아래 은혜입고 자란 몸
이 때를 놓칠쏜가 목숨을 아낄쏜가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최원정: 어쩌면 감정을 애틋하게 실어서 이런 노래를 부를 수가 있죠?
이윤석: 인기가수가 부른 노래잖아요? 젊은이들이 들으면 남들도 다 혈서를 써서 군대지원하고 있지 나만 뒤쳐졌나 진짜 이런 생각을 할 법도 돼요.
다니엘: 히틀러 정권도 사실 노래 문화로 어떤 음악을 통제했었어요. 그러니까 자기 한테 도움이 되는 노래가 음악만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허락했는데 그런데 아직까지는 그런 노래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2차 대전 끝나고 나서 우리는 법적으로 금지시켜 버렸어요. 지금도 신나치들이 부르는 노래가 있는데 독일에서 그런 노래 부르면 사실 징역 3년까지 해당이 돼요. 밖에서 소요하는 거나 인사하는 거나 비슷하다고 보면 되는데, 독일국가 보면 우리가 이런 가사만 있어요. –단결과 정의와 자유, 조국 통일을 위하여! 1절과 2절은 금지되어 있어요. 지금 우리 국가는 3절만 허용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1절과 2절을 보면 독일은 제일 우월한 민족이다. 독일 여자 독일 와인 독일 노래만 갖는다. 이런 내용만 나와 있기 때문에 지금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어요.
신주백: 독일 국가가 그렇다는 것이죠?
다니엘: 독일인의 노래 라는 제목인데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국가는 그 노래의 3절이에요.
이윤석: 1, 2절은 못부르게 하고, 독일은 음악쪽도 친나치 부분이 정리가 거의 완벽하게 되었네요.
다니엘: 최대한 그렇게 할려고 하고 2차 대전 후에는 우리가 노래 사실 잘 불렀어요. 독일 사람들이 음치가 많이 있는데 노래 부르는 문제가 잘 없어요.
류근: 그런데 사실은 나치를 찬양하는 노래를 금지시킨 거잖아요, 그죠? 그 시대 다른 것까지 금지시킨 것은 아니잖아요?
다니엘: 그건 아니죠.
류근: 우리도 어떤 문제가 있냐면 일제 시대 때 친일 했던 음악가들의 대중가요를 금지시키잖아요. 사실 부를 수 있는 노래가 거의 없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트로트들이 60% 이상은 친일 작곡, 작사자들이예요.
최원정: 그리고 1900년대 초반에 나왔던 많은 가곡 동요들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고 유명한 곡들이 워낙 많은데 혹시 여러분들 중에 좋아하는 곡이 있으세요? 옛날 가곡이나 옛날 동요가 떠오르는 곡들?
이윤석: 글쎄 너무 많은데, 동요 얘기하면 저는 어렸을 때 제일 많이 들었고, 제일 많이 불렀던 노래가 있죠.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 노래만 하면 눈물이 나요~
다니엘: 얼마 전에 독일방송 어린이 합창단이 한국을 방문했어요.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했는데 제가 사회를 봤거든요. 근데 그 아이들 하고 서울시 어린이합창단과 같이 했는데 서로 서로 동요를 불러준 거예요. 독일 어린이들이 고향의 봄을 불렀고 서울시 합창단은 독일 민요를 불렀어요.
류근: 고향의 봄은 국민 동요 처럼 돼버렸죠.
최원정: 어려서부터 많이 듣고 또 제 아이한테 들려줬던 노래가, 엄마가 섬 그늘에 굴~따러가면~
신주백: 그게 사실 자장가인데~
류근: 사실 안부른지 오래 됐어요, 나쁜 노래예요, 이 노래,
신주백: 지금 류 시인님이 말씀하신대로, 나쁜 노래죠. 이 선생님이나 최 아나가 부른 노래도 나쁜 노래죠.
이윤석: 나쁜 노래라구요? 내가 부른 고향의 봄이?
최원정: 어떤 의미에서요?
신주백: <고향의 봄>, <섬집 아기> 친일 작가가 만든 노래입니다.
이윤석: 고향의 봄이요? 엄청 많이 불러 왔었는데~
신주백: 저 또 불러 왔고 저도 제 아이한테 섬집아기를 부르면서 재웠던 적이 있죠.
최원정: 우리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긴 있어요?
다니엘: 아리랑만 남은 거 아녜요?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 섬집 아기를 작곡한 이흥렬은 모두 일제 찬양에 앞장섰던 친일 음악인이다. 하지만 친일 음악계에서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람은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고 군국 가요를 가르치는 일에 앞장섰던 음악가 현재명이다. (현재명 (1903~1960, 음악가)-일제에 부응 찬양하는 음악 연주 창씨개명에도 적극 동참, 친일인명사전 등재), 그의 뚜렷한 친일 행적으로 현재명의 대표곡이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곡으로 꼽힌 희망의 나라로는 최근 일제 찬양곡 일지도 모른다는 논란에 휩쌓여있다.
심용환: 이 나라가 발표한 시기가 1931년이에요. 1931년은 일본이 만주침략을 하죠. 그때 이 노래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의심적은 거죠. 이 중에서 굉장히 이 노래가 친일 노래라는 것에 대해서 유달리 슬퍼하시는 이윤석씨~ 불러 보시죠.
이윤석: 왜요? 가사가 정말 좋아요~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 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산천 경개 좋고 바람 시원한 곳 희망의 나라로~
심용환: 정확하게 외우고 계신데~ 가사를 보여 드리면서 이야기를 계속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뭐가 문제가 있습니까?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 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 ‘산천경개 좋고 바람 시원한 곳 희망의 나라로’ 바다 건너 물결 건너~언더라인, 저편 언덕에, 저편 언덕, 언덕, 언덕, 여기가 핵심 키워드가 됩니다. 이 언덕이 대륙을 얘기하는 겁니다. 31년에 만들어졌잖아요.
이윤석: 아! 대륙?
신주백: 일본의 입장에서는 대륙인 거죠.
최원정: 주체가 일본이군요.
이윤석: 배를 저어가자 하는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인 거예요?
심용환: 그렇죠, 그렇죠, 여기서 생각하는 희망의 나라 라는 것은 일본이 꿈꾸었던 희망을 얘기하는 거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희망이 아니라는 것, 그걸 우리가 집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다니엘: 충격적이네요.
신주백: 당시 1930년대 조선이나 일본의 신문에 ‘만주붐’, ‘만주드림’ 이라는 단어가 등장해요. 만주는 희망의 땅이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주를 해야되는 우리가 아메리칸 드림을 이야기 하듯이 당시는 만주드림이라는 단어를 썼어요. 그래서 만주에 이주하는 열기가 나니까 붐이 일어났을 거아녜요. 그래서 그걸 만주붐 이라고 했어요.
심용환: 올해 한 지방 행사에서 지자체장께서 3.1운동 100주년 행사에서 우리가 친일문화를 청산해야 된다 라고 연설을 한 거예요. 행사가 끝난 다음에 이 노래(희망의 나라로)를 부른 거예요.
최원정: 광복절에~
심용환: 광복절에, 그래서 논란이 됐던 적이 있었는데 그분을 뭐라고 하고 싶진 않은데 뜻하지 않은 촌극이 발생했다 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거죠.
이윤석: 그러니까 그 행사장에서도 의도는 좋았는데 결과가 안좋게 된건데~그런데 특히 광복절이니까 우리나라를 되찾은 날이니까 끝까지 변하지 않고 저항한 분들도 있을 거 안에요. 그분들이 만든 노래를 부르는게 훨씬 더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네요.
류근: 언뜻 기억나는 음악가가 없다는게 우리의 비극이예요. 일제시대 활동했던 대표적인 음악가들 지금 현재명 나왔죠, 홍난파 나왔죠, 빼고 나면 사실 없어요. 현실적으로 이건 비극입니다.
다니엘: 한 단계를 더 올려야 될 거 같애요. 제가 알기로는 애국가도 친일파가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최원정: 애국가를 만든 안익태 선생님이 친일파~?
다니엘: 안익태 선생님은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베를린에서 활동을 했거든요. 그런데 그때 까지만 하더라도 히틀러 정권이 엄청 노래와 음악을 통제했어요. 그런데 그때 심지어 음악활동 했었다는 데에 그게 좀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어요.
신주백: 그때 유행했던 대표적인 안익태 곡이 만주 환상곡이잖아요. (안익태, 1906~1965, <애국가> 작곡-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에서 지휘하는 등 친일행위논란, 2009년 친일인명사전 등재), 안익태를 일본어로 하면 에키 타이 안인데 1941년부터 44년까지 베를린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일본하고 독일이 안익태의 활동에 대해서 동의하거나 후원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거죠. 왜 그러냐 하면 당시는 2차 세계대전 때잖아요. 일본하고 독일하고 이탈리아가 같은 편일 때이기 때문에 그 부분에서는 일본의 동의와 묵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활동이었다 라는게, 그래서 그 부분이 문제가 되는 거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안익태 활동이 그 싯점에서 왜 그렇게 나타났느냐를 생각해 보면 전쟁상황과 맞물려 있는 거예요. 안익태도 분명히 1937년 이전까지 조선인으로서 심성 내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전쟁 상황에서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조선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가 버린 과정에서 음악으로서 그걸 드러냈다 라고 봐야 되는 거죠.
류근: 요즘 논란이 많은데 최근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베를린에 안익태가 머물렀던 집이 일본의 유럽첩보망의 책임자였던 에하라 라는 사람의 집이었다는 거예요.
신주백: 유럽에서 전쟁이 있을 때에 그런 음악활동이 가능했다는 것은 특별한 보호가 있지 않는한 불가능한 거에요. 굉장히 합리적인 의심인 거같애요. 제가 아주 사소한 일인데 얼마전에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가서 자료를 찾다가 놀라운 걸 하나 찾았는데 30년전인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일본이 어느 정도의 정보력을 갖고 있었냐 하면 당시 일본과 독일이 적이었습니다. 동맹이 아닙니다. 적국 독일에 조선인 활동상황이란 정보보고서가 나와요. 조선인 누가 무얼하고 있는지 알아요. 1941년인데, 그런데 1944년 이 싯점에 안익태의 활동을 일본이 몰랐을까요. 반역적이었으면 안놔두었겠죠.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았다면 그가 그렇게 공공연하게 만주 환상곡을 연주하면서 돌아다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죠.
심용환: 1930~40년대 나치가 문인이나 예술가에게 다 충성 편지 써라 이거 싸인 안하면 다 활동금지 하던 시기였거든요. 이때에 여기서 자유롭게 활동했다면 말이 안돼지~
최원정: 애국가로 시작해서 희망의 나라로 끝났던 그 광복절 행사는 무어가 되는 건가요?
이윤석: 진짜, 많이 불렀어요.
최원정: 독일 국가는 앞 1,2절은 삭제했다면서요? 많은 논란 때문에~
다니엘: 우리는 가사가 논란이 되었던 것이고 애국가는 만든 사람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저거는 일단 의심부터 해야죠.
류근: 제가 나온 고등학교가 나름, 민족학교를 표방하고 있는 학교인데, 서울 오산학교출신인데요. 그 교가 가사를 춘원 이광수가 썼어요. 그래 가지고 이걸 바꿔야 되는 거 아니냐 해가지고 동문들 끼리 아주 논쟁이 심했는데~ 이 가사를 쓴게 춘원이 친일을 하기 전에 쓴 가사고 이미 백년 이상을 불러온 가사니까 일단 존치하는 것으로 하자고 유보를 했거든요. 그런데 이건 교가잖아요. 국가는 다르잖아요. 우리한테 지금 세계적인 음악가가 없는 것도 아니고 이걸 바꾸자 라고 하는 움직임들도 요근래 일어나고 있어요. 얼마전에 국회에서 심포지엄까지 했다고 하는데~
이윤석: 그런데 그 동안 그 노래와 애국가와 함께 울고 울었던 추억이 너무 컸어요. 스포츠 행사할 때도 올림픽 할 때도 불렀고 월드컵 때도 불렀고 오늘도 어디에선가는 부르고 있어요. 그런 노래를 갑자기 한 순간에 떼어 놓는다는 것 저는 결코 쉽지 않은 감정적인 상처는 있지 않을까.
심용환: 갑자기 자르자는 게 아니라 한 십년 동안 공론화 과정을 거쳐서 자라나는 세대들을 위해서 새로운 추억을 심어주면 되지 지금까지 그렇게 감격해 부르다가 일본식 안익태 이름 에키 타이 안 이게 계속 떠오르는데 그걸 어떻게 불러요.
다니엘: 저도 구 부분이 사실 마음에 걸리는데요. 어떻게 보면 타협으로 생각하자면 애국가를 버리지 말고 유지하되 우리가 교육을 시키면서 인식이라도 하자 친일파가 만들었다 라고 인식하고 알고 있고 아 이거 친일파가 만든 노래인데 어떻게 하지 그러면서 이런게 사실 조국이 떠오를 때 감동의 순간을 깰 수 있다라는 거지요~
류근: 특히 한일전 할 때 애국가 부를 때 나는 어떤 모멸감 같은 걸 느껴요.
신주백: 독일 같은 경우 지금 다니엘이 이야기한 사례는 매우 특이한 거 같애요. 한국 같으면 다 바꾸자 라고 할텐데 1, 2절만 안부르고 3절만을 부르는 이런 식의 선택제를 하는 것은 독일 나름의 숙고의 과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어떠한 섬세한 분별을 필요로 하는데 섬세한 분별을 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공론화 과정과 논의과정이 전제되어 있지 않으면 안돼죠. 사실, 한국 사회는 자유로운 논의를 하기가 쉽지 않은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단되어 있는데다가 더구나 한국전쟁의 경험을 겪다 보니까 친일문제가 이념 갈등으로 전환되어 논의가 이루어져요.
최원정: 흔히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고들 하는데 친일문화예술은 3대를 혼란스럽게 하는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런 친일문화예술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너무 깊숙히 파고들고 있고 너무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런데 그런 모든 것들이 일제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거든요. 독일 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니엘: 보통 한국 어르신들과 얘기하다 보면 항상 나오는 얘기가 뭐냐면 독일은 사과했는데 일본은 안그렇다 라고 얘기하는데 저도 그걸 처음엔 받아들였다가 요즘에 파고 들어가니까 아, 독일도 과거청산이 완벽하지 않았다는 걸 많이 알게 되었어요. 일단 독일 내부적으로도 그렇고 사실 68혁명 까지만 하더라도 독일에서 과거청산이 아예 안됐었던 상황이었어요.
신주백: 그렇죠,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게 바로 그 지점이예요.
다니엘: 독일는 사실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대량 학살했던 것에 대한 완벽한 사과를 하긴 했지만 예를 들면 강제노동을 시켰던 사람에 대한 배상은 2000년대에 들어와서 그때부터 했었거든요. 그런 부분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애요.
신주백: 과거 청산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항상 독일을 먼저 언급하는데 독일은 그런데 일본은 왜 이래 이런 비유법을 많이 쓰잖아요. 그런 독일을 한국인들에게 잘못하면 완벽한 걸로 미화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게 사실 그렇지 않은 측면도 있다. 우리도 친일문제를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친일문제에 대한 진상규명이나 친일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을 아는 것도 중요하고 동시에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주체는 누구냐 우리잖아요. 거기에 핵심은 오늘 문제에 관련된 문제는 제가 볼 때에는 공론화 과정에 대한 어떤 숙의민주주의랄까요. 다양성을 이야기 하면서 서로간에 주체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짜내면서 해나가면 어떨까 그래서 합의되는 과정,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 예를 들면 어떤 중학교부터 교과서를 가지고 그 중학교 구성원들이 합의한다든지, 이런 식의 과정이 우선 더 필요하다.
최원정: 실제로 지금 많은 학교에서 그런 작업들이 있더라구요. 예를 들면 친일인명사전을 도서관에 비치하는 것에 대해서 학부모들이 반대하고 학생들이 찬성하고 학부모와 학생들간에 토론회가 열리는 것들도 있더라구요.
류근: 그런 건 바람직한 거지요.
신주백: 저는 그게 갈등이라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류근: 지금 어떤 학교보니까 일제시대 향나무 라고 수천 그루 수만 그루를 막 뽑아내고 하는데 이런 건 사실반대입니다.
심용환: 류 시인님 말씀은 위에서 그만이 아니라 각자 그 질문이 있는 학생과 교사가 합의를 해서 문제를 풀어가면 건전하게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 라고.
최원정: 사실 그런 차원에서 다니엘이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서 많은 고민과 행동을 지금 하고 계신데~ 얼마 전에 보니까 욱일기를 도쿄올림픽에 사용하지 말라고 백악관 청원이 있었는데 같이 청원에 참여하시더라구요. 아이구~ 멋집니다 (Oppose Japan and the IOC’s decision to use the “rising sun flag in the Tokyo 2020 Olympics 일본과 IOC의 ‘도쿄 올림픽 욱일기 사용’결정을 반대합니다).
류근: 10만 4천명이 청원한 거, 저도 했습니다.
다니엘: 백악관으로 낸다고 해서 저도 솔직히 크게 희망이 없었어요. 그러나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어쨌거나 일단 가만히 있는 거는 아닌 것 같애요.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으니까 결과를 한번 기다려 봐야죠.
이윤석: (다니엘을 향해) 아름다운 청년입니다.
최원정: 오늘 친일파 3부작 특집답게 굉장히 뜨겁게 다뤄봤는데~ 만약에 류시인님, 시인님이 실제 일제 강점기에 활약하고 있는 아주 인지도 높은 민족지도자 시인이세요. 그런데 갑자기 조선총독부 관료가 와서 친일시를 쓰시죠. 안그러면 당신이 굉장히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협박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심용환: 돈도 많이 줄게~
최원정: 그렇죠, 돈도 많이 줄게~
류근: 근데 얼핏 생각나는 건데 윤동주 시인의 일대기를 기리는 동주 라는 영화에서 그 윤동주 시인이 옥사하기 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시를 쓰기를 원했고 시인이 되길 원했던 것이 부끄럽습니다. 그런 젊은이들이 양심을 위해서 죽어가는 데 하물며 영향력을 갖춘 시인이 친일시를 쓴다, 민족을 배신하고, 동포를 죽음으로 내모는 데 앞장선다---붓을 꺾고 죽어야죠.
심용환: 죽겠다!!
류근: 그런데, 사실은 이게 그 상황을 닥치지 않은 처지에서 말씀드리는 거지, 저도 참 부끄럽지만 막상 닥친다면 참 암담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런 질문이 성립되지 않는 그런 역사를 만들어야죠. 식민지 되면 안되는 겁니다. 붓을 꺾는 겁니다.
이윤석: 죽는 건 모르겠지만 붓을 꺾는 겁니다.
류근: 손을 못쓸 것 같애요, 안다면, 이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 안다면 적어도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그 일을 당하면 안되는 거죠. 나 살자고 누구를 죽일 순 없는 거지요. 그런 죽음을 극복한 구원의 장르입니다.
이윤석: 아, 정말 멋있다. 시인 맞아요!
최원정: 많은 분들이 지금 나라면 어땠을까? 고민에 빠졌을 것 같애요. 자, 친일파 특집 3부작 오늘 이렇게 마무리 하게 되는 돼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친일파 논쟁에 있어서 우리가 보다 냉철해 질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됐기를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로 찾아 뵙겠습니다 (KBS 역사저널 그날 청산되지 못한 역사, 3부작, 3편 “친일파의 명작 스캔들”에서 정리).
① 1937년 중일전쟁 이전에 1904-1905년 러시아와 일본이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가지고 전쟁을 했는데 여기서 일본이 이겼다. 세계는 일본의 승리에 깜짝 놀랬다. 세계는 러시아의 승리를 예견했는데 결과는 정반대, 이렇게 러일전쟁과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승승장구하자 조선의 지식인들은 식민지 조국을 버리고 힘이 센 나라 일본을 숭배하게 된 것이다. 지금이야 판단 미스가 분명하지만 당시에는 일제가 영원할 거라는 판단을 하였다.
② 식민지 시대 조선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동경삼재(東京三才) 라는 말이 있었다. 일본에 유학을 갔던 천재 3명을 말하는데 임꺽정의 작가 벽촌 홍명희, 3.1운동 조선독립선언서 초안 작성자 육당 최남선, 그리고 춘원 이광수다. 춘원은 조선인의 심성구조를 문학적으로 잘 표현했고, 조선의 젊은이들의 미래를 누구보다도 많이 걱정했고, 당시는 독립운동가였던 사람이 바로 춘원 이광수다.
③ 이광수는 2.8 독립선언서에 관여하고 그 멤버들을 대표해서 상해로 가서 임시의정원 결성에 참여하고 도산 안창호가 중국에 있을 때 그의 비서 역할도 했고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간행에 결정적으로 관여한 춘원 이광수, 그 계열을 잘 따라 갔으면 안창호 선생의 뒤를 잇는 독립운동가, 존경받는 천재문인 애국자로 역사에 남을 수 있었는데, 어쩌다가 그는 친일에 빠졌다.
④ 이광수는 독립신문 발행인으로 국내외 정세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고, 이게 두려움 때문인지 의구심 때문인지, 여하튼 민족지사로서, 독립운동가로서, 문인으로서, 많은 활동을 하다가 생각이 바뀌어갔다. 과연 조선의 독립은 가능할까. 그러다 일제는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다는 결론에 조선은 안된다 일제가 영원할 것 같다는 판단에 방향을 바꾼 것이다.
⑤ 1921년 상하이에서 귀국한 이광수는 그 이듬해 민족개조론을 발표한다. 그는 이 글에서, 조선민족은 거짓말 잘 하고 용기와 결단력이 부족한 고질적인 병폐를 갖고 있다며 조선이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된 이유를 민족성 탓에 돌렸다. 이때 민족주의자들은 충격과 분노했다. 이 때부터 이광수를 변절자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이광수는 그가 지적하는 것들이 일제 침략의 이유가 되는지 따져 보지도 않고 일본인의 시각에서 조선인의 문제점을 바라 보았다는 게 문제였다.
⑥ 친일 문인으로는 주요한, 이광수, 최남선, 김동인, 서정주가 있고, 교육계 친일에는 김활란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 여성박사, 1941년 이화여전 교장인 김활란은 친일단체 임원으로 부인들이나 여학생들을 상대로 징병, 학병 동원연설을 하였다. 1930년대 초기 농촌계몽운동도 많이 했는데, 전시체제에 친일로 변절하였다. 교육계, 여성계에 상징적인 존재였던 김활란,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향상을 위해서 노력도 많이 했다.
⑦ 음악에 친일파로는 홍난파, 이흥렬, 현재명이 있다. 이들은 다 당대에 유명한 음악가들이다.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저항한 분들이 만든 노래를 부르고 싶은데, 언뜻 기억나는 그런 음악가가 없다는 게 우리의 비극이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도 친일파라고 한다.
⑧ 흔히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고 한다. 친일문화예술은 3대를 혼란스럽게 하는 정말 어려운 문제다. 이런 친일문화예술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너무 깊숙히 파고들고 있고 너무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그런 모든 것들이 일제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 한번으로 족하다. 다시는 대한민국이 식민지가 되지 않도록 국민 모두가 영웅이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