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군항포
북상한 장마전선이 중부권에 물 폭탄을 터뜨리는 가운데 우리 지역은 장마가 물러가니 더위가 몰려왔다. 팔월 첫째 화요일 일과를 마치고 교정을 나왔다. 와실에 들어 세탁기를 돌리고 저녁밥을 지어 먹어야 하나 그 일보다 먼저 날이 저물어 오기 전 산책을 나섰다. 연사에서 거제대로 횡단보도 건너편 버스 정류소에서 장목을 거쳐 외포로 가는 33번 버스를 타고 덕치를 넘어갔다.
하청 실전삼거리에서 매동을 지난 군항포 입구에서 내렸다. 하청면과 장목면이 경계를 이룬 곳이다. 장목에는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남해연구소가 위치한 데다. 남극과 해양자원을 탐사 연구하는 전초기지다. 군항포는 한국해양과학기술원과 가까운 포구다. 군항포는 인체 맹장처럼 진동만 외딴 곳으로 돌기된 작은 마을이다. 포구 입구에서 해양과학기술원 뒤 산기슭 임도를 따라 걸었다.
높이 자란 해송이 시야를 가린 데는 장목이었다. 장목은 거제 최북단으로 마산과 진해가 지척이고 거가대교가 가덕도에서 부산 강서 을숙도로 연결된다. 진해만에서 호리병처럼 잘록하게 홈이 파여 들어간 포구다. 장목은 면소재지로 김영삼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배출한 역사가 오래된 초등학교와 사립 중학교도 있다. 뭍에서 건너간 관리나 유배객이 묵었다는 장목진 객사도 있다.
인가가 없고 농지도 없는 산자락으로 개설된 임도인데 자동차가 지난 바퀴자국이 보여 의아했다. 해양과학기술원 후문과 가까운 곳에서 장문포 왜성으로 가는 길로 들었다. 아기 흑염소 한 녀석이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되새김질하며 나를 노려보며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근처 염소농장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야생에서 자란 어미 염소가 갓 젖을 떼고 홀로서기를 시키는 중인 듯했다.
찻길에서 임도 따라 돌아간 어느 지점 장문포 왜성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구는 우리 땅에 7년을 머물면서 남녘 해안 곳곳에 그들의 방식대로 독특한 왜성을 쌓아 조선군과 맞섰다. 거제만도 일운면 지세포진성, 사등면 견내량왜성 등에 이어 장목에도 구영리 영등포 왜성과 송진포 왜성에 이어 장문포 왜성이 남아 있다. 진동만 건너 진해 안골포와 웅천에도 왜성이 있다.
인가와 떨어진 산봉우리에 계단식으로 쌓은 석성이었다. 안내문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 거제에 주둔한 왜구가 쌓은 성이라고 했다. 난중일기에도 이순신이 장목으로 돌진하니 포구 양편 산봉우리에 누각이 있고 왜적이 숨어 나오지 않았다는 기록이 전한다고 했다. 허물어진 왜성 석축 앞에서 오백여 년 전 왜구가 이 땅에서 노략질했을 잔영이 떠올리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지난날 거제의 역사를 되짚어 보니 둔덕에는 고려 말기 폐위된 의종이 머나먼 남녘 변방으로 유폐된 패왕성이 있었다. 임진왜란 땐 거제 주민들은 왜구 등쌀에 못 견뎌 멀리 거창 가조로 집단 이주를 하기도 했더랬다. 정유재란까지 7년 전쟁이 끝나서야 거제의 선인들은 선대의 생업 현장으로 되돌아왔다 임진왜란 이후 당쟁의 소용돌이 중심에서 있던 송시열이 유배를 온 곳이었다.
옥포에서 임진왜란 최초 승전보를 전했다만 깊은 상흔도 있더이다. 장문포 왜성과 가까운 진동만 내해는 조선 수군이 왜적에게 대패했던 칠천량해전 현장이다. 임진왜란 당시 해상에선 연전연승하던 조선군 유일한 패전이 칠천량해전이다. 권율이 도원수가 되어 원균이 지휘하던 장수와 병졸들의 인명 피해가 너무 컸다. 그해가 정유년 칠월 백중으로 여름 달빛이 교교했을 칠천량이다.
장문포 왜성 앞에서 서성이다가 억새가 우거진 비포장 길을 걸었다. 아스팔트 찻길에서 군항포로 내려섰다. 한적한 포구에는 조업을 나가지 않은 어선이 몇 척 닻을 내려놓고 있었다. 포구는 낚시꾼도 없어 적막했다. 양식장 부표가 뜬 바다는 석양이 비쳐 윤슬로 반짝였다. 포구 저편은 칠천도로 옥녀봉 산자락이 흘러내린 어온마을인 듯했다. 막다른 포구에서 발길을 돌려 나왔다. 20.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