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산서원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 번지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도산서당은 1561년(명종 16)에 설립되었다.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농운정사와 부전교당 속시설인 하고 직사(下庫直舍)도 함께 지어졌다.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0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1572년에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다. 2년 뒤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전교당과 동 · 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 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본산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조목(趙穆)을 종향(從享)했다. 1792년(정조 16) 정조 임금이 치제(致祭)를 내리고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시행하였다. 1796년(정조 20) 시사단 (試士壇)을 세우고, 1819년(순조 19) 장서고(藏書庫)인 동광명실(東光明室) 건립하였다. 1870년(고종 7)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서 제외되었으며, 1930년(경오년) 서광명실(西光明室) 중건(增建)하였고 1932년(임신년) 하고 직사(下庫直舍) 이건 하였다. 1969년 본 서원을 중심으로 임야 및 전답 19 필 324.945㎡이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 · 증축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정신적 고향으로 성역화되었다. 1977년 도산서원관리사무소가 설치되고 관리운영조례를 제정 공포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
이용시간 하절기 09:00~18:00
동절기 09:00~17:00
휴일 연중무휴
입장요금 : 성인 2천원(65세 이상 무료)
도산서원(陶山書院)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선비인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현재의 도산서원은 퇴계가 생전에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영역과 퇴계 사후에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도산서원 영역으로 크게 나뉜다. 서원 전체 영역의 앞쪽에 자리잡은 건물들은 도산서당 영역에 속하고, 그 뒤편에 들어선 건물들은 도산서원 영역에 속한다.
도선서원은 두 영역으로 구성되었다. 서원 전체 영역의 앞부분은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한 도산서당 영역이고, 뒷부분은 이황 사후에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도산서원 영역이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조영하기 훨씬 전부터 학문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칠 건물을 지었다. 1546년 퇴계가 마흔여섯 되던 해에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경상도 예안 건지산 남쪽 기슭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고, 1550년에는 상계의 퇴계 서쪽에 3칸 규모의 집을 짓고 집 이름을 한서암(寒棲庵)이라 하였다. 그 후 전국 각지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자 1551년 한서암 동북쪽 계천(溪川) 위에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짓고 제자들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는 퇴계종택(宗宅)이 있다.
도산서당은 계상서당이 좁고 또 제자들의 간청이 있어 집 뒷산 너머 도산 자락에 지었는데, 도산서당이 완성된 뒤에도 퇴계는 계상서당에서 도산으로 왕래하였고, 이곳에서 별세하였다. 퇴계는 1557년 쉰일곱 되던 해에 도산 남쪽의 땅을 구하고, 1558년 터를 닦고 집을 짓기 시작하여 1560년에 도산서당을 낙성하였고, 이듬해에 학생들의 숙소인 농운정사(隴雲精舍)를 완성하였다.
도산서당터를 찾은 기쁜 심정을 퇴계는 시 몇 편으로 남겼고, 도산서당을 짓고 난 다음 해인 1561년 11월에는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썼다. 이 시에 붙인 '도산잡영병기(陶山雜詠幷記)'에는 서당 주변의 경개(景槪)를 비롯하여 퇴계가 「도산잡영」을 읊은 동기 등이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서 퇴계는 "처음에 내가 퇴계 위에 자리를 잡고, 시내 옆에 두어 칸 집을 얽어 짓고, 책을 간직하고 옹졸한 성품을 기르는 처소로 삼으려 했더니, 벌써 세 번이나 그 자리를 옮겼으나 번번이 비바람에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시내 위는 너무 한적하여 가슴을 넓히기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옮기기로 작정하고 산 남쪽에 땅을 얻었던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현재 도산서당 일곽에 있는 건물로는 도산서당·농운정사·역락서재(亦樂書齋)·하고직사(下庫直舍) 등이 있는데, 모두 간결하고 검소하게 꾸며져 퇴계의 인품을 잘 반영하고 있다. 기타 시설물과 자연 경관으로는 유정문(幽貞門)·열정(洌井)·몽천(蒙泉)·정우당(淨友塘)·절우사(節友社)·천연대(天淵臺)·운영대(雲影臺)·곡구암(谷口巖)·탁영담(濯纓潭)·반타석(盤陀石)·부용봉(芙蓉峯) 등이 있는데, 이 모든 이름들은 퇴계가 손수 붙여 성리학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도산서당은 3칸밖에 안 되는 작은 규모의 남향 건물이다. 서쪽 1칸은 골방이 딸린 부엌이고, 중앙의 온돌방 1칸은 퇴계가 거처하던 완락재(玩樂齋)이며, 동쪽의 대청 1칸은 마루로 된 암서헌(巖棲軒)이다. 건물을 남으로 향하게 한 까닭은 행례(行禮), 즉 예를 행함에 있어 편하게 하고자 함이고, '재(齋)'를 서쪽에 두고 '헌(軒)'을 동쪽에 둔 것은 나무와 꽃을 심을 뜰을 마주하며 그윽한 운치를 숭상하기 위함이었다.
퇴계는 서당의 동쪽으로 치우친 곳에 작은 연못을 파고, 거기에 연(蓮)을 심어 정우당이라고 하였으며, 또 그 동쪽에 몽천이란 샘을 만들었다. 샘 위의 산기슭에는 평평한 단을 쌓아 암서헌과 마주보게 하고, 그 위에 매화·대나무·소나무·국화를 심어 절우사라고 불렀다. 암서헌 대청에서 정우당, 절우사를 지나 낙동강으로 경관이 이어지게 한 것은 궁극적으로 자연과 합일하려는 퇴계의 성리학적 자연관을 잘 나타낸다.
퇴계는 도산서당 출입문을 싸리문으로 만들고 유정문이라고 하였으며, 주변에는 나무와 꽃을 심어 그윽한 운치가 느껴지도록 하였다.
도산서원은 퇴계가 세상을 떠나고 삼년상을 마치자 그의 제자들과 온 고을 선비들이 1574년(선조 7) 봄 "도산은 선생이 도(道)를 강론하시던 곳이니, 서원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서당 뒤에 두어 걸음 나아가서 땅을 개척하여 짓기로 하면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인 1575년 8월 낙성과 함께 선조로부터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았고, 1576년 2월에 사당을 준공하여 퇴계 선생의 신위를 모셨다.
서원으로 출입하는 정문은 진도문(進道門)이다. 진도문에 이르러 올라오던 길을 돌아서서 내려다보면, 남쪽으로 낙동강 물줄기를 가둔 안동호 일대로 시야가 넓게 펼쳐진다. 진도문 좌우에 세원진 동광명실과 서광명실에는 여러 문집과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광명실 건물은 모두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누각식으로 지어졌다.
도산서원 경내의 건물로는 제향(祭享)공간을 형성하는 상덕사(尙德祠)·내삼문(內三門)·제기고(祭器庫)·주청(酒廳) 등이 있고, 강학(講學)공간을 형성하는 건물로는 강당인 전교당(典敎堂)·동재인 박약재(博約齋)·서재인 홍의재(弘毅齋) 등이 있으며, 기타 부속 건물로는 동광명실(東光明室)·서광명실(西光明室)·장판각(藏板閣)·상고직사(上庫直舍) 등이 있다. 광명실은 장서고(藏書庫)로 임금이 하사한 서적, 퇴계가 보던 서적과 철폐된 역동서원(易東書院)에서 옮겨온 서적, 그리고 퇴계의 문도(文徒)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들의 문집을 모아둔 곳이다.
강학공간은 높게 조성된 기단 위에 서 있는 전교당을 중심으로, 앞마당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며 엄격한 좌우 대칭의 배치를 하여 규범을 보이고 있다. 전교당은 유생들이 자기 수양과 생도들을 교육하던 곳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에 대청마루와 한존재(閑存齋)라고 이름 붙인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교당에 걸린 '도산서원' 현판 글씨는 한석봉(韓石峯)이 임금 앞에서 쓴 것이다. 사당인 상덕사와 사당 일곽 출입문인 내삼문, 그리고 사당 주위를 두른 토담은 모두 '도산서원상덕사부정문및사주토병(陶山書院尙德司附正門及四周土屛)'이란 명칭으로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서원 일곽 서쪽에 있는 옥진각(玉振閣)은 유물 전시관인데, 퇴계 선생과 관련된 많은 유물이 진열되어 있다. 도산서원은 원래 예안군에 속하였으나, 지금은 행정 구역이 변경되어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속한다. 서원 일곽은 1969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1969년과 1970년에 대대적으로 보수되었다. 도산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곳의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도산서원
□ 추로지향비(鄒魯之鄕碑)
도산서원 입구에 작은 돌에 추로지향(鄒魯之鄕)이란 전서체 본문에 작은 행서체 관지가 있다. 공자의 77대 적손인 공덕성(孔德成. 1920— )박사 친필을 새긴 기념비이다
庚申十二月八日 敬詣陶山書院 拜退溪先生 講堂展仰遺規 益覺欽 刻石爲記 曲府孔德成
연민 이가원 선생이 쓴 비음(비음)이다.
<이 전서(篆書) 추로지향과(鄒魯之鄕)과 가는 해서(楷書)는 공자의 77대 종손 공덕성 박사가 도산서원 원장 재임시에 쓴 것이다. 예로부터 예안과 안동을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일컬은 것은 멀리 중국의 공자와 맹자가 살고 있던 노(魯)와 추(鄒) 두 나라에 비한 것이며 이 말은 성인이 살고 있던 고장이란 뜻이다. 해서(楷書) 국역은 다음과 같다. "경신년 12월 8일 삼가 도산서원에 나아가 퇴계 선생 신위에 배알하고 강당에 올라 끼치신 원규를 읽고 흠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여 이를 돌에 새겨 기록한다. 곡부 공덕성은 쓰다>
경신년은 1981년으로 도산서원 방문 시 도산서원 원장으로 추대 받고 “추로지향”이란 휘호를 남겼다.
□ 시사단(試士壇)
도산서원을 향해 가다가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섬이 있다. 이곳의 이름은 ‘시사단’이라 한다. 본래 이곳은 백사장과 솔밭이 있던 강변이었으나 1976년 안동댐 건설로 물속에 잠길 위기에 처하자 바로 그 자리에 흙을 쌓아 올렸다 한다.
정조임금께서 퇴계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하여 1792년 규장각에서 공부하는 학자 이만수를 보내어 임금의 제문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다음날 이곳에서 어제로 과거 시험을 보게 하였다. 이특별 과거를 도산별시라 한다. 당시 시험 참가자가 7,228명이나 되어 도산서원에서 시험을 보지 못하고 시험장을 강변으로 옮겼다. 이 시험에서 답안지를 제출한 사람이 3,620명이었으며 여기서 시험 본 것은 한양으로 보내어 임금이 친히 급제, 진사, 초시 생원을 11명을 뽑아 시상하였다. 시사단의 비문은 당시 영의정인 번암 체제공이 지었다. 이를 기념하여 매년 도산서원에서 도산별시라는 백일장을 열고 있다.
• 곡구암(谷口巖)
옛 도산서당에는 문(門)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강 입구에 곡구암이고, 하나는 도산서당 문인 유정문(幽貞門)을 말한다. 곡구암 자리는 안동댐 건설 당시 매립하여 현재 도산서원 광장으로 조성된 관계로 지금은 강 입구에 표석만 세워져 있다.
• 운영대(雲影臺)와 천연대(天淵臺)
운영대는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의 준말로 주자의 시에서 인용하였고, 천연대는‘연비려천(鳶飛戾天) 어약우연(魚躍于淵)’의 준말로 시전(詩傳)에서 인용한 것이다. 천연대 암벽에는 이산해가 64세(1602) 때 쓴 천연대(天淵臺) 글씨가 암각되어 있다.
도산서원 서쪽 기슭에 천광운영대가 있다. 이황이 이것을 두고 시를 지었는데 이 시에 성리학적인 입장에서 바라본 연못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活水天雲鑑鏡光살아 있는 물과 하늘 구름 그림자 거울하여,
觀書深唯在方塘글을 봐 깊이 방당 있는데 비유하네.
我今得意淸潭上내 이제 맑은 물 위에 뜻을 얹으니,
恰似當年感歡長당년에 느껴 감탄이 긴 것 흡사하구나.
이 시는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의 시정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半畝方塘一鑑開 반 이랑 네모난 연못이 한 거울을 이루었으니,
天光雲影共徘徊 하늘 빛 구름 그림자가 함께 돌고 돈다.
問渠那得淸如許 저것에 묻노니 어찌하여 이처럼 깨끗한가,
爲有源頭活水來 근원으로부터 맑은 물 흘러오기 때문이네.
• 열정(列井) 洌井 맑은 우물
도산서당
-퇴계 선생이 직접 설계함.
-도산서당 지을 때 용수사 법련 스님이 일을 도맡아 함. 용수사는 퇴계가 12살 때부터 인연을 맺은 절이다. 부친과 숙부 여러 집안 어른들이 모두 용수사에서 공부를 함.
-과거 준비 시키는 서당 / 마음 공부시키는 서당
• 유정문(幽貞門) : 공부는 첫걸음부터 곧고 바르게 하라는 뜻.
• 정우당 : 더러운 진흙에 뿌리를 두지만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물을 맑게 하는 연꽃을 ‘맑은 친구’라 함.
• 절우사 : 선생께서 매화, 대나무, 국화, 소나무를 몸소 심어 가꾸시면서 자연을 벗삼아 즐기시던 화단이다. 절개 높은 친구.
• 몽천 : 어리석고 몽매한 심성을 밝게 깨우쳐 준다.
• 역락서재 : 역락서재는 서당의 제자들을 위한 기숙사로, 퇴계의 제자 정사성이 서당에 입학할 때 그의 아버지가 지어서 기부한 건물이다. 이 건물의 이름은 퇴계가 <논어>의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라는 구절에서 따와 지은 것으로 현판도 퇴계의 글씨이다.
퇴계는 역락서재뿐만 아니라 서당의 방과 대청에도 각각 완락재(玩樂齋), 암서헌(巖棲軒) 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 완락재(玩樂齋) : 작은 온돌 방. 방바닥과 사이를 두고 책을 쌓아두게 하였다. 완락재는 주희의 <명당실기>에 ‘즐기며 완상하니 이 몸이 다하도록 싫증나니 않을 만하다.(樂而玩之 足以終吾身而不厭)’에서 취한 것. 퇴계는 이 완락재에서 거처하였다.
• 암서헌(巖棲軒) : 주희의 <운곡시>에 나오는 ‘바위에 기대어 조그마한 효험이라도 바란다.(岩栖冀微效)’라는 구절에서 취한 것.
• 농운정사 : 서생들이 묵는 곳. 학생들 공부 열심히 하라고 건물 모양도 공부 工자로 지었다 함. 흔히 ‘공자방(工字房)’이라 부른다.
마루가 두 곳에 있다. 한쪽은 주로 공부할 때 쓰는 시습재이고, 다른 한쪽은 쉬기도 하고 자연을 완상하기도 할 때 쓰는 관란헌이다.
- 관란헌(觀瀾軒): '관란'이란 '여울목(瀾)을 본다(觀)' 는 뜻으로 <맹자>의 '물을 구경하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여울목을 보아야 한다'는 글에서 취한 것이다.
• 지숙료 : 자는 방
• 옥진각 : 유물전시관. 퇴계의 사상과 학풍, 문학과 예술세계 등이 6개의 주제별로 전시되어 있다.
-청려장
• 진도문(進道門) : 서원 입구의 문이며, 보통 외삼문 (外三門)으로 부른다. ‘도에 나아가서는 물러서면 안 된다(進道若退)’라는 뜻으로, 주자가 지은 근사록(近思錄)에서 나온다. 진도문 처마 아래에는 작은 북을 매달고 있다.
서원에는 서원의 입학 자격과 유생의 생활 규칙을 쓴 원규(院規, 학교 교칙)을 정하였다. 서원의 유생들은 군역과 노역이 면제되는 혜택을 받았다. 원규를 어기는 유생이 있으면, 먼저 발견한 유생이 북을 치며, 유생 모두 힘을 합하여 문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논어 「선진편」에 있는, “이제 우리 무리가 아니다. 너희는 북을 치며 공격해도 좋다(子曰, 非吾徒也, 小子, 鳴鼓而攻之, 可也)” 라는 내용을 따른 것이다. 전교당 안 벽에는 원규의 내용을 새긴 현판을 걸어두었다. 서원에서 가장 엄격하게 지켜졌던 금지 사항 네 가지를 소개하였다.
첫째, 서원의 책은 문 밖으로 갖고 갈 수 없다.
둘째, 신분이 약한 하녀는 들어 갈 수 없다.
셋째, 술을 빚어서는 안 된다. / 네번째, 형벌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 비뚤게 쓰여진 도산서원 현판
이전에 선조가 그 당시의 명필 한석봉에게 명을 해서 도산서원 현판을 쓰게 하였는데. 이 때 선조가 생각하기를 만약 내가 도산서원 현판이라고 한석봉이에게 가르쳐 주면, 놀래서 붓이 떨려 글씨가 잘 안 되리라 싶어 가르쳐 주지 않고, 도산서원 네 글자를 거꾸로 한 자 한 자 불렀어요. 그래 한석봉이는 영문도 모르고 받아 쓰는 게라. 맨 처음에 원(院)자를 쓰고, 다음에 서(書)자, 다음에 산(山)자, 그리고 인제 마지막에 도(陶)자를 쓰게 했어. 한석봉이는 원, 서, 산자를 쓰고 나서 도자를 임금이 부르니까 아하 이거 내가 도산서원 현판을 쓰는구나. 딱 알아챘어요. 그래 고마 놀래가 붓이 떨려서 마지막 도(陶)자를 비뚤게 썼어요. 그래가 도산서원 현판에 글씨가 약간 삐뚤지.
-내 고향 전통 가꾸기(1984,안동군)
• 전교당 : 서쪽 온돌은 1칸으로 한존재(閑存齋)라 하는데, 서원의 원장이 거처하면서 원생들의 수업을 감독하던 곳이다. 방과 대청 벽면은 전체가 여닫이문으로 되어 있는데, 분합문으로 들쇠에 걸어 들어올리면 방과 대청이 하나로 통하게 되어 있다. 대청 전면 3칸은 문짝을 달지 않고 개방하였으나 측면과 뒷면에는 각 칸마다 2짝의 여닫이 창호를 달았다.
-정료대 : 뜰아래 불을 밝힐 수 있게 한 곳. 돌기둥 위에 올려놓은 반원형의 돌 위에 솔가지나 기름통을 올려놓고 불을 밝히던 것으로 밤에 치르는 제례때 사용되었다.
• 박약재(博約齋)는 전교당 앞 동쪽에 있는 건물로, 서원의 원생들이 기숙하던 곳이다. 강당과 함께 강학 공간의 중심을 이루는데,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동재라고 부른다. 이때 서쪽에 위치한 건물은 서재라고 부르는데, 동재에 기숙하는 원생이 서재의 원생보다 선배가 된다. 박약 (博約)은 공자의 학문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박문약례 (博文約禮)의 줄임말로, 학문을 널리 배우고 예의를 익힌다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박약은 논어 옹야편 (雍也篇)에서 나오는 말로서, 군자는 널리 배우고 예를 지킨다 (君子, 博學於文, 約之以禮) 라는 뜻이다
• 홍의재(弘毅齊)는 박약재와 마주보고 있는 건물로서 강당에서 바라볼 때 오른쪽에 위치하며, 서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서재라고 불린다. 홍의는 논어 태백편 (泰伯篇)에서 증자가 한 말로, 선비는 넓고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士, 不可以不弘毅) 라는 뜻이다.
• 장판각 : 장판각, 광명실에 보관되었던 판각과 고문서를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였다.
• 상덕사 : 제향 공간. 서원 제일 뒤쪽에 위치하며 주위를 담장으로 둘러싸고 앞쪽에 정문인 내삼문을 두어 일곽을 이루고 있다. 퇴계 이황과 제자 월천 조목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월천은 15세에 퇴계의 문하생으로 들어와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퇴계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스승을 대신하여 서원에서 원생들을 훈육하였고, 퇴계의 문집 발간과 도산서원 건립에 심혈을 기울였던 제자이다. 1614년(광해군6) 퇴계의 제자 중 유일하게 상덕사에 배향되었다. 주향위로 정면 중앙에서 남향으로 퇴계의 위패를 모시고, 종향위로 동쪽 벽에서 서향으로 월천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2002년부터 시대 조류에 맞게 여성 참배를 허용하고 있다.
도산서원 안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