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의 유민인 신라가
최초로 고구려에게 봉지를 받은 곳이 현 타클라마칸 인근일 것이란 주장은 자주 했지만...
요렇게까지 똑같을 줄은 몰랐습니다.
뭐 대단한 걸 찾아온게 아니고...그냥 기본 검색만 했습니다.
신라와 당나라의 "나당전쟁"과...토번(티벳)과 당과의 전쟁이 똑같습니다.
제 생각엔...이 티벳의 전 명칭인 "토번"은...궁예가 세운 "태봉"과 같다 보여집니다...투르판(들판=평양=우루무치?)"과 관계가 많고여...
신라 왕자(?) 궁예가...철원(채달목분지)에서 기병을 해서...고구려 유민들을 확보해서 신라를 압박하고...
동남아 백제 유민국 후백제를 치고
티벳과 아랍 동남아를 다 차지하고 있던 통일 사로(사라센)신라의 북부영토를 확보하는게
후고구려의 역사같고...
이로인해 당나라는 시원지인 서역에서 서돌궐(서고구려=후엔 서 당나라=사탄)등의 오스만국 등으로 분열되어...서역의 역사는사라집니다.
그래서 동쪽으로 수도를 옮겼던 당나라는...서쪽을 잃는 것이며...현 시안을 중심으로 황하유역의 경략에 치중할 수밖엔 없어 집니다.
그래...
자신들의 원 고향인 천축국(동유럽)의 불교 성지를 순례키 위해 삼장등이 경을 받으러 원숭이(손오공)를 데리고 가는 겁니다.
상식적으로...당나라가 당시 세계 최 강국였는데...서역의 야만 오랑케들에게 ..오히려 경을 줘야지...경을 받아올 이유가 없었는데도...
서역(천축)으로 가야 하는 이유입니다...고향이니께여...
동서고금 막론하고 모든 제국은 자신들의 종교...내지는... 종파를 강요하는 법이거든여...
그래...서역과 교역을 위해선 궁예의 토번(태봉?)에 아부를 떨어야 했던 겁니다.
때론, 몇 번 쳤다 깨진게 태봉(토번)이전의 신라와의 나당전쟁같습니다.
이로인해 신라도 서역에서 여러 아랍 분국들로 분해되어 사로신라(서신라)는 역사서에서 사라집니다.
서역에만 한정된 로마니...사라센"이니로 서양에선 인식하게 됩니다.
신라는 스키타인 건 이재 정설이니 새삼스럽고...
스키타이가 유라시아 동북에서 서양으로 간 종족임을 감안하면...서양인들이 스키타이라 한 건...
중 북주유럽만을 이름이 아닌...동쪽에서 온 전체 흉로를 말하며...고구려등의 삼국 전부를 이르며...말갈,료나라 전체를 통칭한 언어라 봅니다.
바이킹도 이들입니다...북(배)쪽 견융(개=늑대)족이자...북고려(부여)이기에...배킹(바이킹)일까 합니다.
키타이가 조금이라도 서양인 주도왕조가 있었다면...
동양은 모두 서양의 황조인 키타이의 속국이니...빛은 서쪽에서 동쪽으로~~~라 했을게 뻔한 전근대 서양 제국주의자들이
주뎅이를 잠자고 다물고 있다가...
그나마 북유럽의 바이킹만은 지들 조상이겠거니..허고 발굴했다가 ...
완벽한 몽골로이드들의 유골이 나오는 바람에..또다시 뻘쭘해 져서 주뎅이들을 다물고...흐지부지... 후속발표 없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러시아는 중국을 키타이(키당)이라 하는 겁니다.
신라니..고구려니..말갈이니..연연이니...료나라니...요런건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이 전체가 다 한 덩어리의 문화권으로 시대와 왕조만 다를 뿐입니다.
환국(환고려)와 훙료(환웅나라=훈누=훈노르=한요나라)...조선(선비)로 불리우던...세계의 전통적 황제문명권을 그들은 "키타이"라 부른겁니다.
고려,고구려,귁그(투르크)...견융...칸,탄,한(하)...등은...모두 키타이(키탄=기당)란 말과 근원적으론 통하는 말입니다.
밑에 김선생님이 올리신 그 라마승들 사진있져...전에도 누차 말씀드렸듯이...정확히 로마 카톨릭 사제들의 복장과 같습니다.
장식만 쬐~~~금 다릅니다.
십자가의 원형도..불교의 그 만자 문양의 약식입니다.
만자로 확실하게 표시된 초기 십자가들이 그를 입증합니다.
로마 카톨릭도...라마교의 성지인 토번(태봉=전 신라)와 통한단 애깁니다.
티벳이 세계의 중심이라 했던 건...
단지, 지형적으로만 높고 중심이라서 그런게 아니라...이 일대 특히 요동(우루무치 인근)이 세계의 중심 교역로여...
여길 장악한 제국이 세계의 황제국이기 때문이라 보입니다.
특히나 이 티벳은...과거 바다였단 설이 눈에 띱니다...지금보다 훨 큰 호수들 천지요...
타클라마칸도 호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니...이 곳이 황해가 맞아 보이며...
이곳 황해의 천산일대 고지대들이 산해경의 해내경이 맞아 보입니다.
중세이전의 상고대엔... 엄청 살기가 좋았다 보입니다.
진의 유민인 신라는 현 타클라마칸 서남부 정도에서 시작해 유라시아 남쪽을 다 잡았던 사레센였고...
왜와 남명(북인도 티무르국)과 많이 혼합되긴 했지만...현 티벳인들이 궁예의 "태봉국"의 후예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우리 영토를 차지하려는 당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한 전쟁(→ 삼국통일).
나당전쟁 /나당전쟁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신라까지 당나라 영토에 편입시키려고, 663년(문무왕 3)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라 칭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이라고 했다. 신라는 고구려 유민(遺民)들의 부흥운동을 배후에서 부추겨 당군에 대항하게 하고, 백제 지역에 주둔한 당군을 공격하는 양동작전을 구사하면서 정면 대응했다. 670년 3월 고구려 유민군 1만 명과 신라 군대 1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먼저 당군을 공격함으로써 나당전쟁이 개시되었다. 이후 신라는 백제지역에 주둔한 당군을 공격하여 80여 개의 성을 빼앗기도 했다. 당의 장군 설인귀(薛仁貴)가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지역으로 향하였으나 도중에 신라 수군에게 격파당했다. 671년 당군과 말갈군이 압록강 남쪽 깊이 쳐들어와 다음해 7월에 평양을 점령한 다음, 곧이어 8월에는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점령하면서 신라를 위협했다.
674년초 당 고종(高宗)은 신라가 고구려 유민군을 배후에서 도와주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해버렸다고 하여 문무왕 대신 그의 아우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으로 삼고, 수십만의 군대를 보내 신라를 치게 했다. 675년 9월에 설인귀가 신라의 숙위학생(宿衛學生)이었던 풍훈(風訓)을 향도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천성(泉城)에 쳐들어왔으나 실패했다. 또 그해 9월말 당은 이근행(李謹行)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20만 군을 매초성(買肖城)에 주둔케 하고 총력을 기울여 신라에 대한 공세를 취했으나 신라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크게 격파당했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군마 3만 380마리와 3만여 명분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당군과 신라군은 그후에도 크고 작은 전투 18차례를 벌였고, 676년 11월에는 기벌포(伎伐浦:금강 하구) 앞바다에서 설인귀가 이끄는 수군과 신라의 수군 사이에 마지막 격전이 벌어졌다. 여기서도 신라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결말이 나면서 나당전쟁은 끝이 났다(→ 기벌포 해전). 당나라는 그해 안동도호부을 요동으로, 웅진도독부을 건안성(建安城:지금의 개평)으로 옮기면서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갔다. 신라는 676년 나당전쟁의 승리로 임진강에서 함경남도 덕원을 연결하여 실질적으로 이남의 영토를 차지하면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삼국통일
티베트 [Tibet, 티벳]출처: 한국어 위키백과목차명칭역사티베트 신화선사시대티베트 왕국(토번)몽골과 청나라 이후2008년 티베트 반중국 시위지리와 생태기후주민문화종교언어요리관련 항목주석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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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의 자치구는 티베트 자치구를 참고한다.
티베트 망명정부가 주장하는 티베트의 영역
중국 정부가 정한 티베트 영역
티베트 자치구
인도가 악사이 친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지역
중국이 티베트 자치구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지역
그 외의 티베트 문화 영향권
1912년에 달라이 라마 13세가 제정한 티베트의 기이다. 현재는 티베트망명정부가 국기로서 사용하고 있으므로, 중국은 '분리주의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티베트 내의 게양을 금지하고 있다.티베트(티베트어: བོད 보드, 중국어: 西藏 시짱[*])는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고원 지역으로, 토착 티베트인들의 고향이다. 평균 고도는 약 4,900m이며, 지구상의 육지에서 가장 높은 곳이어서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린다.
티베트는 현재 중국의 일부(시짱 자치구; 西藏自治區)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일부가 인도에 포함되기도 하며, 대만에서는 공식적인 자국의 영토로 주장하기도 한다. 티베트의 주권과 관련하여,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티베트 망명 정부는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가 된 시기와 티베트가 중국에 합병된 것이 국제법상 효력이 있는 것인가에 대하여 이견이 있다.
[편집] 명칭
[편집] 역사
티베트는 중국과 인도의 사이에 위치해 있으나 히말라야 산맥과 티베트 고원에 둘러싸여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히말라야 산맥의 북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역의 평균 고도가 4900m가 넘어,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컬어진다. 티베트는 지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고립된 지역이다. [1]
[편집] 티베트 신화
티베트 신화는 진화론과 과거 티베트 지역의 상당부분이 바다였음을 알고 있었던 듯한, 관찰할 만한 신비로운 성격을 띠고 있다.
'먼 옛날 이 설역 고원은 바다였다. 바람이 일고 파도가 치니 거품이 일어나고 이 거품들이 쌓이고 쌓이자 육지를 형성하였다 …(중략)… 시간이 또 흘러 남해 바닷가 보따낙가산 관음보살은 변종으로 나타난 원숭이를 보고 그를 대륙으로 보내어 살게 했다. 원숭이는 불도를 지키며 얄룽계곡의 한 동굴에 살게 되었는데, 남자(수컷)원숭이는 '투' 였고, 여자(암컷)원숭이는 '초' 였다. …(나찰녀가 나타나 원숭이와 결혼한 내용. 중략)… 그 후 나찰녀와 원숭이 사이에서 서로 다른 성격과 외모를 가진 여섯 자식을 낳았다. 그 후손들은 점차 털이 줄고 꼬리가 짧아지면서 일어나 사람처럼 변하였고, 결국 사람이 되었다.
[편집] 선사시대
1만여 년 전부터 티베트 지역에서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있다.[2] 중국어와 고대 티베트미얀마어군은 티베트인들은 유목 생활을 하고 중국인들은 황하에서 밀을 재배하기 시작한 기원전 4,000년경에 분리되었다고 추측된다. 티베트인들은 약 500년경에 미얀마와 분리되었다.[3][4]
철기시대의 구릉지 마을과 매장지가 티베트 고원에서 발굴되었는데, 티베트의 고대 문서를 따라 샹슝(Zhang Zhung, 象雄)문화로 명명되었다. 이들은 뵌(Bön) 지역 문화의 기원으로 알려졌다.
[편집] 티베트 왕국(토번)
티베트민족과 한족의 마찰은 기원전 2세기 한나라의 서역 개척 무렵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티베트의 기록된 역사는 7세기초에 남리루쩬(囊日論贊)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냈음이 확인된다(중국 사서로 보면, 「신당서」엔 4세기 첸뽀(贊普, 토번 왕을 이르는 명칭) 라토토리넨쩬(拉托托日年贊)이 '줘떠투두' 로 기록되어 있다).[5] 티베트의 역사는 야루짱부강 계곡의 일부를 통합하여 왕국으로서 다스린 송쩬감뽀(松贊干布, 581 ~ 649년)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640년 당 태종의 조카인 웬쳉 공주(文成公主, 625~680)와 혼인하였다. 티베트의 군대는 663년 ~ 672년에는 동북방의 칭하이와 간쑤 지방의 토욕혼 왕국을 점령하였다. 670년 ~ 692년에는 당과 대비천 전투(669년)를 통해 타림 분지와 인접한 신장과 카슈가르시를 점령하고, 승풍령 전투(678년)에 승리해 지위를 확고히 하였으나 692년 중국 왕조 당나라의 장수 왕효걸이 이끄는 군대에 서역을 빼앗겼다. 당은 이 기세를 몰아 토번을 압박하고자 했으나 토번 최고의 명장으로 일컬어지는 가르친링(대비천, 승풍령 전투 승리시의 지휘관)에 의해 소라한산에서 패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티베트인들은 아랍, 동부 투르크와 동맹을 맺었다. 747년에는 당나라의 장군인 고선지의 원정으로 중앙아시아에 대한 티베트의 영향력이 약해졌다. 750년까지 티베트인들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거의 대부분 잃었다. 고선지는 751년 탈라스 강 전투에서 아바스 왕조와 칼룩스의 연합군에 패하였고, 중국의 영향력은 급속하게 줄어들고 티베트의 세력이 회복되었다. 티베트는 북부 인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고, 763년 안사의 난 때에는 당나라가 토번에 매년 바치던 공납을 중단한 것을 빌미삼아 그 당시의 첸뽀 치쏭데쩬(赤松德贊)이 다짜뤼공(達札樂宮)을 동정원수로 임명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의 도읍인 장안을 잠시 장악하기도 하였다.[6][7][8]
820년경의 세계. 티베트는 중국(노랑색) 남쪽의 짙은 녹색으로 표시되어 있다.821년 또는 822년에는 티베트와 중국은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두 나라의 국경에 대한 설명과 함께 양국 언어로 기록된 이 조약은 라싸의 조캉사원 앞의 돌기둥에 새겨져 있다.[9] 티베트는 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에서 왕국을 유지했다. 이 시기의 티베트는 토번(吐蕃)이라 불렸고, 티베트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200년 간 9대의 왕이 다스렸다.
[편집] 몽골과 청나라 이후
이후 티베트는 13 ~ 14세기에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1750년에는 청나라 건륭제의 팽창 정책으로 보호령이 되었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후,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정권은 완전한 독립을 모색하여, 1913년에 몽골과 상호승인조약을 체결하여, 두 나라가 협동하여 한인의 공화정권인 중화민국에 대항하기로 하였다. 몽골에는 러시아, 티베트에는 영국이 무기, 차관을 제공하는 등 외부의 지원이 있었으나, 영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당시의 제국주의 열강 속에서 몽골과 티베트를 독립국으로서 인정하는 나라는 없었다. 티베트는, 신해혁명의 소식이 알려진 1913년, 라사를 점거하였던 청나라 군대가 격렬한 시가전 끝에 물러났으나, 그 이후에도 중국국민당 등의 중화민국의 역대정권과 군사적인 긴장상태가 유지되었으며, 티베트 달라이 라마 정부의 실효적 지배영역내에서는 어떠한 중국의 기관도 설치가 승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1940년 달라이 라마 14세의 즉위식에 참석한 중국국민당의 사절단은 의식 후에도 귀국하지 않았고, 1948년에 강제로 퇴거되기까지 라사에 계속 머물렀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연합군의 일원이 되었고, 영국령 인도로부터 이주해 온 영국군에 의해 갼세, 라사와 카무 지방 각지에 통신기지가 건설되었다. 이 기지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무력점거하기까지 영국군의 무선기사에 의해 운영되었다. 하지만 티베트의 오랜 정치, 종교 합일의 농노 제도하에 국민들이 점점 고통받으며 불만을 갖기 시작하였다.[출처 필요]
청나라의 멸망 이후, 중화민국의 역대정권은 독립국으로서 존재한 티베트를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하였으나, 북경정권의 시대에는 군벌의 혼전, 남경국민정부 시대에는 대일전쟁으로 독립을 주장하는 티베트에 대하여 압력은 행사하였으나 본격적인 군사적 침략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1949년 중국공산당이 내전의 승리로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고, 티베트의 전 지역을 목표로 1950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군사행동을 시작하여 티베트를 점령하였다. 1951년 이후,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중화인민공화국]|중국]에 의해서 점령, 통치되고 있으며 많은 티베트인들이 정치적인 이유 또는 탄압을 피해 인도로 망명했다. 중국공산당정부는 티베트 국민에 대한 잔인한 탄압과 학살로써 티베트를 억압지배하였고, 1960년대에는 중국 전역을 강타한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3,700개나 되던 사찰은 13개만 남고 모조리 파괴되었다.
이후 시짱자치구(서장자치구, 西藏自治區)가 설립되어 티베트인들에 대한 자치가 허용되었다. 티베트의 중국 귀속 이후로 망명을 떠난 티베트 인들의 일부는 동화정책에 따라 티베트로 돌아와서 살고 있다. 한인의 이민을 실시하여 한족의 인구 비율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10] 최근 중국 정부는 포탈라 궁을 보수하는 공사를 시행하였고, 2005년에는 티베트로 연결되는 철도가 완공되었다.
[편집] 2008년 티베트 반중국 시위
이 부분의 본문은 2008년 티베트 반중국 시위입니다.
2008년 3월 10일 1959년 티베트 독립운동 49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티베트 승려(수도승) 600여명의 중국 정부에 대한 항의 시위로 시작되어 2008년 3월 14일 티베트 독립운동 시위대가 중국 경찰과 충돌하면서 유혈사태로 번지게 되었고, 중국 정부의 무력진압으로 사태가 격화되었다.
[편집] 지리와 생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티베트 고원에 위치하고 있다. 네팔과의 국경에는 에베레스트 산이 있다. 수도(중심지)는 라사(Lhasa, 拉薩)이다. 다른 지역으로부터 고립되었다는 특성 때문에 희귀한 동식물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최근 한족의 유입에 따른 지역 경제의 성장으로 티베트 특유의 환경은 위협받고 있다. 티베트의 70%는 초원이어서 주요 산업으로는 농업이 차지하고 있다.
[편집] 기후
고산 기후의 특징을 띠고 있다.
[편집] 주민
대체로 티베트인이 거주하고 있으나, 동화정책으로 인하여 한족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편집] 문화
[편집] 종교
종교는 티베트인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존중되는 문화의 한부분이다. 티베트의 주요 종교는 불교이며, 그리스도교 등의 다른 종교는 극소수로 존재한다.
[편집] 티베트 불교
불교는 인도로부터 전래되어 7세기에 국교의 자리로 차지하였다. 이 불교가 티베트의 특유의 문화인 티베트 불교로 발전한다. 티베트 불교는 바하라야나(Varjrayana)의 독특한 형식을 따른다. 티베트의 불교는 티베트에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몽골, 네팔, 부탄, 라다크, 등의 국가들에서도 행해진다. 티베트인들은 부처의 가르침에 아주 작은 의문조차 품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통치 이후 열렬한 종교 활동에 의문을 품은 중국 정부에 의해 불교는 정치화되었다.[11]
[편집] 언어
티베트인들이 쓰는 언어는 티베트 문자로 되어 있는 티베트어이다. 티베트 문자는 부탄의 공용어인 종카어에서도 사용된다. 티베트어는 티베트 고원과 부탄에서도 사용되고, 네팔의 일부와 인도 북부의 시킴 지역에서도 사용된다. 티베트어는 일반적으로 시노-티베트어족(Sino-Tibetan)의 티베트미얀마어군에 분류된다. 티베트말에는 다양한 방언이 있으며,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티베트와 다른 히말라야의 언어들은 종종 불분명하다. 티베트어의 다양한 방언을 고려하면, 티베트어족은 티베트 고원에 걸쳐 약 6백만 명이 사용하며, 약 15만 명의 망명자들이 사용하고 있다.
티베트 문자는 인도의 데바나가리 문자에 기원한다.[12]
[편집] 요리
이 부분의 본문은 티베트의 요리입니다.
티베트는 고산지대이기 때문에 식물이 별로 자라지 않아 주로 야크를 이용하는데, 특히 야크의 젖으로는 우유, 치즈 등을 만들 수 있다.
신라=로마...마케도니아...마고국...마고지나=마고신라...모두 마한과 관련이 있어 보이고...고구려를 마한의 족속이라 한 건...이쪽을 예기한 것이고...고구려를 동이요 옛 조선의 족속이라 함은...동이 구려족과 통하는 민족임을 뜻하고...고구려를 흉로라 하고...북이(北夷=부예?)...뭔~로부 뭔~로부...의 5부 명칭이 계루부만 빼곤 다 로(노)자가 들어감을 보면 통한다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고구려 신라 모두...료나라의 명칭을 자주 쓴 것이며...이 료(요)자는...례(리)와 통하고...동이,북이..의 이(夷)자와 통한다 하겠으며...이게 유라시아 서남방에선...라"로 발름되며...서북에선 노르(만)으로 발음됐다 보이니...전 세계가 항상 같이 돌아같단 얘기 같습니다.
신라(사로)의 화랑들은...삭발을 했다지여..?...로마의 지도층인 시저니..이집트 족속들이니... 이분들도 상당수가 삭발머립니다...그리스완 좀 다릅니다...빤쓰도 않 입고 올림프스를 딸랑거리며 달리던 그리스 원주민들이...로마(마한)이훈 동이 고려와 똑 같은 복장을 합니다...이건 급격한 문명이식인 걸로 보면 로마응 흉로의 왕조 마한이며...신라(사로)의 영향을 엄청 받은 나라일까 합니다.
당은 원래 현재의 터키 이서쪽이나...서돌궐(서 궤크 트르크=서고구려) 정복후 파미르 이서에서 동고구려와 자웅을 겨루다...티벳일대를 중심으로 아랍과 동남아의 백제(페르샤)영토를 잠식한 신라와...둘이 연합해 고구려 백제를 쳤다 보입니다...고로 당의 중심지는 동고구려 함락후는 현 중원 중부지방이 돼며...티벳을 토번이 잘라 막으면선...서역을 잃고 쇠락한다 보여집니다...신라는 오히려 티벳을 중심으로..백제의 땅인 양자강 이남을 모두 경략하고,,,아랍까지 경략한 사라센이라 보입니다.
원조 요동으로 보이는 평양성(우루무치)를 중심으로...그 서북의 카자크 알타이 북쪽 이르티쉬가 발하쉬호 방면으로 빠지는 길이 요동,요서요...이 길로 역대 제국들과 거란들의 침략방어가 있었으며...우루무치 북부의 배해(보하이) 동북 몽골알타이 하무도(아무하?)는...말갈과 동호가 침략을 자주 했었고...중심의 맨 윗쪽 러시아 알타이는...말 그대로 제국들이 말 한 그 성산인 거대한 천지호수가 있는 원조 백두산이요...금과 보석의 산지라 하겠습니다...그래..알타이(금산)입니다.
현 아프칸 고갯길과 페르가나계곡길은...대군의 주요 공격로가 아닌...배후 급습용 도로요...상인들의 지름길이요...신라가 사라센(사로신라)를 경략하는 주 도로라 하겠습니다...신라가 이 티벳길을 당에 터 주면서 동고려는 전세가 기운다 봅니다...요동만 철저히 지키면 됐는데...배후와 남부 해양 침공로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이젠 김선생님께서 제 잡설에 좀 동의를 해 주시나 봅니다...위구르(위나라) 패망 후...고구려에게 받은 영지인 신장지구에서 출발한 신라가...그 자리의 원 주인인 한성백제를 누르며 성장하다가...급기야 서백제인 비류백제(페르샤)까지 서쪽 당나라와의 연대로 확보하지만...얼마 못 가 아랍쪽(페르샤)은 빼앗끼는 겁니다...마찬가지로...한성백제(티벳과 양자강 하류)는 비류백제(페르샤)까지 통치했으나...고구려가 그 통로인 요동과 페르가나 아프간 고갯길을 점령하곤...각개분해 당합니다...백제가 남조에 조공을하며...고구려가 가는 길을 막아 오랫동안 조공을 못했음을 사과한다 한 게 그겁니다..
제말은 천산의 동쪽과 서쪽은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되기 상당히 힘들다는 뜻입니다..동시대에 한성백제와 비류백제가 함께 존재했다는 것이 가능한 얘기인가요?... 고구려가 그 길목을 막기 전에는 어떻게 경영을 했을까요?... 백제의 양세력이 양쪽에 포진할 수 있는 것인지?...
천산 동서쪽은 당나랍니다...천산은 타클라마칸 중동부입니다...???...천산을 말함이 아니고 히말라야의 연장선인 파미르의 연장인 카자흐알타이 까지의 남북라인에서...중간에 동서로 뻣은게 천산입니다...저는 천산과 파미르가 접하는 그 부근과 그 남서쪽의 아프간 가는 길을 이르는 겁니다...티벳에서 중아앙나 아랍으로 가는 길을 이릅니다.
제 이야기는 천산의 동쪽과 서쪽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언기나 투르판에 중심도시가 있으면, 이곳에서 유라시아 전체를 통솔할 수 있는 위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글어스로 이녕(이닝)계곡을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람니다. 언기 옆에는 개도하가 흐릅니다. 마침 개성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언기는 실크로드의 중심지입니다. 언기에서 우르무치를 경과하게 되면, 발하쉬호 북동쪽에 있는 준가르-게이트를 지나가게 됩니다.
이르티쉬의 상류라 함은...이리하를 이른 겁니다...이르티쉬의 중국어발음이 이리하 아닌가여...?...우르무치 북단에서 카자흐 준가르분지로 흐르는 그 강을 말씀하시는것 맞으시져...?..줄기 하나는 서쪽 발하쉬호로 들어가고...원 줄기는 러시아 북쪽의 북해까지 가는 그 이르티쉬가 시작되는 우루무치 인근여...혹시나...틀렸을까 조심스러워 집니다...ㅡ. .ㅡ
이리티쉬와 이리하는 수원지가 전혀 다릅니다. 구글어스로 확인해보세요. 이리티쉬는 알타이산 나카스 호수에서 발원합니다. 이리하는 천산 서쪽으로 흐르는 강입니다. 이리티쉬와 이리하는 우루무치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루무치는 천산 동쪽에 있어서 이리하와는 물의 흐름이 정 반대입니다.
언기에서 개도하를 따라 서쪽으로 계속 추적하면 해발3천미터의 고개를 넘어가면 중국령 이녕(이닝) 지구입니다. 이곳에 이리하가 흐르고 발하쉬호로 물이 흘러갑니다. 이녕은 카자흐스탄이나 키르기즈스탄으로 편입되어야 맞는데 어떻게 신강성에 편입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즉 이녕과 오루무치 사이에는 큰 산이 가로막혀 있습니다.
그곳은 어떤 중앙의 부위로 설명이 되어야 할 것 입니다... 근데, 개성이라는 말은 성문을 열다라는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성을 연다는 것은 성의 측면에 위치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 그리하여 개성은 중앙보다는 조금 측면으로 위치하는 것이 합당치 않을 런지요?... 바다와 가까운 부분도 그렇습니다..
첫댓글 그러고 보니...티벳의 국기가...군국주의 시대때의 왜놈들 추장늠 깃발과 유사하군여...왜놈들은 이들과 어떻게든 관계 있습니다.
대만이 현 티벳이 자기들 나라라고 공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도...이유는 아예 없었던게 아닙니다.
특히, 이 제사장들으 모습이 로마시대의 관료들의 모습과 너무 유사합니다. 망토부터 모자까지... 이것들이 바로 고구랴의 전통이 아니었는지?... 고구려는 높은 언덕이라는 뜻이죠... 초원을 의미하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신라=로마...마케도니아...마고국...마고지나=마고신라...모두 마한과 관련이 있어 보이고...고구려를 마한의 족속이라 한 건...이쪽을 예기한 것이고...고구려를 동이요 옛 조선의 족속이라 함은...동이 구려족과 통하는 민족임을 뜻하고...고구려를 흉로라 하고...북이(北夷=부예?)...뭔~로부 뭔~로부...의 5부 명칭이 계루부만 빼곤 다 로(노)자가 들어감을 보면 통한다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고구려 신라 모두...료나라의 명칭을 자주 쓴 것이며...이 료(요)자는...례(리)와 통하고...동이,북이..의 이(夷)자와 통한다 하겠으며...이게 유라시아 서남방에선...라"로 발름되며...서북에선 노르(만)으로 발음됐다 보이니...전 세계가 항상 같이 돌아같단 얘기 같습니다.
신라(사로)의 화랑들은...삭발을 했다지여..?...로마의 지도층인 시저니..이집트 족속들이니... 이분들도 상당수가 삭발머립니다...그리스완 좀 다릅니다...빤쓰도 않 입고 올림프스를 딸랑거리며 달리던 그리스 원주민들이...로마(마한)이훈 동이 고려와 똑 같은 복장을 합니다...이건 급격한 문명이식인 걸로 보면 로마응 흉로의 왕조 마한이며...신라(사로)의 영향을 엄청 받은 나라일까 합니다.
이 '토번, 캄'이 '당나라'가 아닐까요?.... 당과 신라 백제는 해전의 기록이 있습니다... 바다를 끼고 얘기를 해야 설명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당은 원래 현재의 터키 이서쪽이나...서돌궐(서 궤크 트르크=서고구려) 정복후 파미르 이서에서 동고구려와 자웅을 겨루다...티벳일대를 중심으로 아랍과 동남아의 백제(페르샤)영토를 잠식한 신라와...둘이 연합해 고구려 백제를 쳤다 보입니다...고로 당의 중심지는 동고구려 함락후는 현 중원 중부지방이 돼며...티벳을 토번이 잘라 막으면선...서역을 잃고 쇠락한다 보여집니다...신라는 오히려 티벳을 중심으로..백제의 땅인 양자강 이남을 모두 경략하고,,,아랍까지 경략한 사라센이라 보입니다.
그리고...발해도 태봉도 몽골도..청(여진)도... 근본적으론 이 요동이 있는 현 우루무치의 공략에 목숨을 걸었으며...문화와 종족적으로도 통한다 하겠습니다.
신라와 백제의 위치가 어떻게 바뀌어 버렸네요..^^
원조 요동으로 보이는 평양성(우루무치)를 중심으로...그 서북의 카자크 알타이 북쪽 이르티쉬가 발하쉬호 방면으로 빠지는 길이 요동,요서요...이 길로 역대 제국들과 거란들의 침략방어가 있었으며...우루무치 북부의 배해(보하이) 동북 몽골알타이 하무도(아무하?)는...말갈과 동호가 침략을 자주 했었고...중심의 맨 윗쪽 러시아 알타이는...말 그대로 제국들이 말 한 그 성산인 거대한 천지호수가 있는 원조 백두산이요...금과 보석의 산지라 하겠습니다...그래..알타이(금산)입니다.
현 아프칸 고갯길과 페르가나계곡길은...대군의 주요 공격로가 아닌...배후 급습용 도로요...상인들의 지름길이요...신라가 사라센(사로신라)를 경략하는 주 도로라 하겠습니다...신라가 이 티벳길을 당에 터 주면서 동고려는 전세가 기운다 봅니다...요동만 철저히 지키면 됐는데...배후와 남부 해양 침공로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타클라마칸의 투루판은...세계의 패권을 가름하는 대 제국들의 전장판이며...이 곳의 유일한 대 통로는 원조 요동인 이르티쉬며...이 곳의 배후 지름길은 초기신라(사로)가 있던 티벳(태봉?)였던 겁니다.
어떤 제국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샛길로 이어지 지역은 거의 불가합니다. 정보통신이 발달한 현재도 그렇습니다.. 좌와 우가 다른 집단으로 봐야죠...
바~로 그것입니다..이젠 김선생님께서 제 잡설에 좀 동의를 해 주시나 봅니다...위구르(위나라) 패망 후...고구려에게 받은 영지인 신장지구에서 출발한 신라가...그 자리의 원 주인인 한성백제를 누르며 성장하다가...급기야 서백제인 비류백제(페르샤)까지 서쪽 당나라와의 연대로 확보하지만...얼마 못 가 아랍쪽(페르샤)은 빼앗끼는 겁니다...마찬가지로...한성백제(티벳과 양자강 하류)는 비류백제(페르샤)까지 통치했으나...고구려가 그 통로인 요동과 페르가나 아프간 고갯길을 점령하곤...각개분해 당합니다...백제가 남조에 조공을하며...고구려가 가는 길을 막아 오랫동안 조공을 못했음을 사과한다 한 게 그겁니다..
비류백제가(페르샤) 한성백제(남조)에 입조를 해야 하는데...고구려가 요동(우루무치 상단 이르티쉬강고개)에 이어...몇 않되는 지름길인 파미르 라인 고갯길 까지도 을 잘라 버린 겁니다.
제말은 천산의 동쪽과 서쪽은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되기 상당히 힘들다는 뜻입니다..동시대에 한성백제와 비류백제가 함께 존재했다는 것이 가능한 얘기인가요?... 고구려가 그 길목을 막기 전에는 어떻게 경영을 했을까요?... 백제의 양세력이 양쪽에 포진할 수 있는 것인지?...
천산 동서쪽은 당나랍니다...천산은 타클라마칸 중동부입니다...???...천산을 말함이 아니고 히말라야의 연장선인 파미르의 연장인 카자흐알타이 까지의 남북라인에서...중간에 동서로 뻣은게 천산입니다...저는 천산과 파미르가 접하는 그 부근과 그 남서쪽의 아프간 가는 길을 이르는 겁니다...티벳에서 중아앙나 아랍으로 가는 길을 이릅니다.
천산의 동서가 모두 당이된다는 것인가요?...
첨엔 그랬는데...발해(바이킹?)와 티벳을 점유한 신라(후의 태봉이자 고려가 흡수)가 파미르를 끊어...동쪽만 유지됐다 봅니다.
이리티쉬강은 좀 북쪽에 있습니다. 이리하 즉 언기에서 이녕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해발 3천미터입니다.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높이입니다. 동서 무역의 중심 통로는 이녕 계곡으로 보고 있습니다.
남쪽으로 이란부터 인도를 거쳐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China의 남쪽으로 제국이 가능하다는 것인가요?...
제 이야기는 천산의 동쪽과 서쪽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언기나 투르판에 중심도시가 있으면, 이곳에서 유라시아 전체를 통솔할 수 있는 위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글어스로 이녕(이닝)계곡을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람니다. 언기 옆에는 개도하가 흐릅니다. 마침 개성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언기는 실크로드의 중심지입니다. 언기에서 우르무치를 경과하게 되면, 발하쉬호 북동쪽에 있는 준가르-게이트를 지나가게 됩니다.
이녕 계곡에는 이리하가 흐르고, 준가르 관문은 좁은 협곡입니다. 그리고 천산 서쪽에 구글어스에 올려놓은 사진들이 정말 멋집니다.
이르티쉬의 상류라 함은...이리하를 이른 겁니다...이르티쉬의 중국어발음이 이리하 아닌가여...?...우르무치 북단에서 카자흐 준가르분지로 흐르는 그 강을 말씀하시는것 맞으시져...?..줄기 하나는 서쪽 발하쉬호로 들어가고...원 줄기는 러시아 북쪽의 북해까지 가는 그 이르티쉬가 시작되는 우루무치 인근여...혹시나...틀렸을까 조심스러워 집니다...ㅡ. .ㅡ
중앙아시아에서 '수백년전 지도'와 '지금의 지도'는 차이가 있습니다. 해당내용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이리티쉬와 이리하는 수원지가 전혀 다릅니다. 구글어스로 확인해보세요. 이리티쉬는 알타이산 나카스 호수에서 발원합니다. 이리하는 천산 서쪽으로 흐르는 강입니다. 이리티쉬와 이리하는 우루무치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루무치는 천산 동쪽에 있어서 이리하와는 물의 흐름이 정 반대입니다.
네..우루무치 한 참 북단인 건 압니다...근데 그 이리하는 서북의 저지대를 타는 이르티쉬와 다른 강이라는 말씀이시구여...지도 감사합니다...이선생님.
언기에서 개도하를 따라 서쪽으로 계속 추적하면 해발3천미터의 고개를 넘어가면 중국령 이녕(이닝) 지구입니다. 이곳에 이리하가 흐르고 발하쉬호로 물이 흘러갑니다. 이녕은 카자흐스탄이나 키르기즈스탄으로 편입되어야 맞는데 어떻게 신강성에 편입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즉 이녕과 오루무치 사이에는 큰 산이 가로막혀 있습니다.
그곳은 어떤 중앙의 부위로 설명이 되어야 할 것 입니다... 근데, 개성이라는 말은 성문을 열다라는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성을 연다는 것은 성의 측면에 위치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 그리하여 개성은 중앙보다는 조금 측면으로 위치하는 것이 합당치 않을 런지요?... 바다와 가까운 부분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