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작가 한강씨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이자 첫 아시아 여성 수상자로 자리매김했다. 기념비적 소식에 11일 보수, 진보할 것 없이 주요 10대 일간지의 사설은 모두 한씨의 수상 소식에 대해 썼다.
또한 대다수가 한씨의 작품성에 대해 적어도 한 줄씩이나마 언급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해당 사설은 마지막 문장까지 한씨가 어떠한 작품을 썼고, 어떠한 작품세계를 지닌 작가인지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즉, 해당 사설만 봐서는 왜 한씨가 이번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셈이다.
이어 사설은 한씨의 2016년 맨부커상 수상과 2023년 메디치상 수상을 언급했으나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평가는커녕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언론 다수가 사설에서 인용한 "역사의 트라우마에 맞서는 동시에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시적 산문"이라는 스웨덴 한림원의 선정 이유 또한 언급하지 않았다.
사설은 한씨의 수상에 대해 다른 주요 언론이 한씨의 작품성을 호평한 것과 달리 "한강 자신의 문학적 역량이 가장 크게 작용했겠지만, 한국을 노벨문학상 수상 국가 반열에 올리기 위해 한국문학번역원과 대산문화재단 등이 번역 지원을 통해 우리 문학을 꾸준히 세계에 알려온 공도 컸다"라며 번역 지원을 강조했다.
강천석 조선일보 고문은 "'5·18' '4·3'을 피해자가 섰던 자리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시선에 불편해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라며 "그건 하늘을 높이 나는 새의 눈을 가진 또 다른 작가를 기다리면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의 12일자 칼럼은 더욱 충격적이다. 강 고문은 해당 칼럼에서 한씨의 주요 작품인 <채식주의자>도 <소년이 온다>도 도중에 읽다가 말았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강 고문은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정리되지 않는다. 작가를 기다려야 한다"라며 "그런 뜻에서 6·25는 지금도 종결을 기다리는 전쟁이다. 최인훈의 '광장' 등 몇몇 작품이 거론되지만 이 비극의 전모를 담기는 그릇이 작아 보인다"라고 뜬금없이 한국전쟁을 언급했다.
제아무리 읽고 또 읽어봐도 강 고문이 해당 칼럼에서 주장하는 바는 대체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다. 국가폭력이라는 비극적 과거사를 피해자의 관점에서 조명하는 것이 불편한 독자라면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의 입장에 공감한다는 얘기인가. 가해자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하늘을 높이 나는 새의 눈"을 가진 작가가 할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한씨를 바라보는 조선일보의 시각이 변하지 않았다면 조선일보는 한씨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인해 피해자의 시선에서 4·3 항쟁과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한씨의 작품이 두 사건에 대한 보편적인 한국인을 대변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그러한 관점이 세계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걸까. 한씨의 수상을 둘러싼 조선일보의 사설과 칼럼을 살펴보면 그러한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지난 2017년, 한씨는 미국 <뉴욕타임스>에 "미국이 전쟁을 말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며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한국 사람들의 목숨은 개의치 않은 채 한반도에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조선일보는 칼럼을 통해 "누가 그에게 북핵과 한반도 전쟁 위기에 대해 한국인을 대변할 자격을 주었나"라며 "그의 글은 한국인들의 생각을 미국과 세계에 잘못 전할 우려가 있다"라고 비판했다.
한씨를 바라보는 조선일보의 시선은 지난 7년 동안 얼마나 변했을까. 만약 변하지 않았다면 조선일보는 피해자의 자리에서 4·3 항쟁과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한씨의 작품이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인해 두 사건에 대한 보편적인 한국인의 관점을 대변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그러한 관점이 세계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걸까. 한씨의 수상을 둘러싼 조선일보의 사설과 칼럼을 살펴보면 그러한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