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12(월) 경남 함양을 찾아 지리산 칠선계곡과 덕유산 화림계곡 물이 흘러 남강이 흐르는
선비의 고장으로 많은 관제급재를 한 훌륭한 인물들을 배출했고 그 배경엔 많은 서원이 있던
고장을 문화 탐방했습니다.
함양 상림은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1962년 12월 3일 지정되었다. 일명 대관림(大舘林), 선림(仙林)이라고도 한다.
1,100여년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어 "천년의 숲"이라고 불리고 있다. 함양상림공원의 유래는 신라 진성여왕때 고운 최치원 선생이 천령군(함양군의 옛명칭)의 태수로 있으면서
백성을 재난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조성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이다. 400여 종의 수목이 있어서 식물학상으로도 좋은 연구 거리가 된다.
봄 꽃,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으로 예부터 유명한 곳이다.[1] , 공원 주변에 연꽃단지와 위천천의 맑은 물로 년중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공원이다 .
저 멀리 덕유산을 품고 함양시내로 흘러 상림공원을 이루는 아름답고 산책할 수 있는 공원 둘레길도~~~
신라 최치원은 유불선 통합을 주장했던 신라 최고의 천재 이며,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6두품의 천재
[토황소격문]으로 당나라 전역에 이름을 떨치다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6두품의 한계는 여전히 그의 발을 붙들고…
이후 최치원은 은둔을 결심하고 경주의 남산∙강주∙합천의 청량사∙지리산 쌍계사∙동래의 해운대 등에 발자취를 남기다 말년에는 해인사에 머물며 열정적으로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남긴 마지막 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에 따르면 908년까지 생존했던 듯하다.
그 뒤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고 신선이 되었다고도 한다.
저 멀리 남쪽으론 지리산이 함양시가를 품은 명산!!!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잠시 동심으로~~~
공원 주변에 연꽃단지와 위천천의 맑은 물로 년중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공원이다 .
많은 관광객이 공원을 둘러보고 자연을 즐길 수 있ㄴ는 곳으로 잘 조성된 공원입니다.
최치원선생이 숲 조성의 종료를 선언하는 표시로 금호미를 숲속 어딘가에 걸어두며,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
효부가 이 숲을 찾게 되면 금호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 전해와 금호미를 찾는 사람은 신선이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학사루는 최치원이 함양태수를 지낼 때 이곳에 자주 올라 시를 읊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짐작된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학사루에 올랐다. 그때 고향이 남원인 유자광(柳子光, ?~1512)이 함양에 놀러왔다가 써서 걸어놓은 현판을 보고
“어찌 이 따위가 여기에 시를 걸 수 있는가”라고 호통치며 현판을 떼어 불태워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유자광은 속으로 분을 삼키고 보복의 그날을 기다렸다
유자광은 학사루에서 일어난 이 현판사건은 1498년 발생한 무오사화의 불씨가 되었다.
함양초등학교에 있는 500여 년 된 느티나무 노거수(老巨樹)로 김종직(金宗直)이 함양 현감 재임시 옛 함양 객사(客舍)의 학사루(學士樓:경남유형문화재 90) 앞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김종직은 아들을 낳았는데 5살 어린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자 아들에 대한 애통한 마음을 느티나무를 심어 가꾸며 달랬다고 전해진다.
나무 크기는 높이 21m, 둘레 2.64m이고, 가지 길이는 동서(東西) 23m, 남북(南北) 26m이다.
군민의 종은 상림공원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여 덕유산자락과 함양군내를 조망할 수 있는곳에 자리해
함양군의 자랑이랍니다.
군민의 종 전망대에서 저 멀리 펼쳐진 덕유산/남덕유산 자락을 잠시 잡아 보았습니다.
현재 함양중고등학교 안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좌상이다. 대좌의 높이까지 포함하여 4m가 넘는 거대한 조각으로
불상 뒤의 광배(光背)가 없어지고, 불상의 얼굴과 오른손, 무릎 및 대좌(臺座) 일부가 없어진 상태이다.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1에 위치한 남계서원(灆溪書院)은 1552년(명종 7)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고,
1566년(명종 21년)에 '남계(灆溪)'라는 이름으로 사액되었다.
'남계'는 서원 곁에 흐르는 시내 이름으로, 서원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소실된 뒤 나촌(羅村)으로 터를 옮겼다가,
1612년(선조 43) 옛터인 현재의 위치에 다시 옮겨 중건되었다. 남계서원은 풍기 소수서원, 해주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이어 창건된 아주 오래된 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의 하나이다.
1564년(명종 19)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희안(李希顔)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1702년(숙종 28) 전치원(全致遠)과 이대기(李大期)를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1869년(고종 6) 훼철되었다가 그 뒤에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3칸의 강당, 3칸의 고사(庫舍) 등이 있다. 묘우에는 이희안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전치원·이대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하동 정씨 정여창 선생의 7대손 희운의 다섯째 아들이 분가하여 지은 집이다.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에 가까운 넓은 대지에 一자형 대문간채와 一자형 사랑채가 있고 역시 一자형의 안채가 동북향으로 서 있다.
승안사지 삼층석탑은 보물 제294호. 높이 4.3m. 승안사는『신증동국여지승람』에 “승안사는 사암산(蛇巖山)에 있다
이 석탑은 대체로 신라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받침 부분과 탑신 부분의 균형이 깨져 보인다
. 특히 받침 부분의 결구(結構)가 간략화된 반면 장식의 비중이 커진 고려 초기 석탑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승안사지 삼층석탑앞 계단으로 된 산을 오르면 정여창 선생 묘가 나온다.
정여창 선생의 묘 앞에 선 신도비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려 하자
자결을 시도했던 동계 정온 선생이 직접 글을 지었고 영의정을 지낸 이정영이라는 사람이 새긴 비석이라고 한다
정온 또한 이웃 고을인 거창 위천 출신으로 정여창을 흠모하며 사숙한 자로
일두에게서 비롯된 경상좌도의 학맥을 이어받은 사람이다
영남 사림파의 희생이 컸던 무오사화는 일두 정여창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스승이었던 점필재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사초에 실리면서
김종직을 비롯해 김일손, 정여창, 김굉필 등이 죽거나 유배를 당했다. 일두 정여창은 목숨을 건져 유배길에 올랐지만, 결국 함경도 종성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시신은 제자들이 수습해 두 달이 걸려 고향 땅 함양으로 돌아왔다. 개평마을에서 약 4km 떨어진 승안산 자락에 일두 정여창의 묘가
있다.
동계 정온이 쓴 신도비와 함께 문인석, 망주석, 석양 등의 석물이 봉분 앞에 세워져 있다. 묘역 주변은 승안사라는 절터로 삼층석탑과 석불입상이 남아 있어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정여창 묘역에 올라 바라본 승안사와 삼층석탑이 있는 승안사지의 전경을 담았습니다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으며, 함양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석불좌상으로 승안사지 3층석탑에서 2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으며
하반신은 땅속에 묻혀 있고 상반신만 드러나 있으며 오른팔은 파손되었다.
머리부분은 신체와 비례가 맞지 않으며 머리카락의 표현도 분명하지 않으나 코가 크고 일자로 다문 입이 특이하다.
어깨가 좁고 신체의 윤곽선은 거의 직선에 가까우며 선을 새겨넣은 듯한 띠주름식의 옷주름도 형식화된 고려시대 로 추정된다/.
남계천의 경관을 따라 여덟 곳의 굽이마다 정자를 두었다는 화림동 계곡은 함양지역을 정자의 고장으로 알려지게 했다.
덕유산 자락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화림동 계곡의 명소마다 장식하듯 자리 잡았던 여덟 정자 중에서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의 네 곳밖에 남지 않았다.
. 더구나 최근의 화재로 가장 큰 규모의 농월정 마저 자취만을 남기고 있어 아쉬움이 더하다. 남아 있는 가장 큰 정자인 동호정은 소나무에 둘러싸인 2층 누각으로
굵은 나무를 그대로 사용한 듯한 기둥과 커다란 통나무의 한 면을 각을 파 자연스럽게 만든 계단의 모습이 특이하다.
단정한 모습으로 물가에 자리하는 군자정을 지나 계곡과 바위가 그림처럼 어우러지는 경관의 거연정은 화림동계곡 정자의 백미다.
구름다리를 건너 다가가는 정자의 2층 누각 위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아름답다
선비문화탐방로
,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팔작지붕 2층 누각형태의 농월정은 조선 선조 때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낸 바 있는 지족당 박명부(1571~1639)가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건물로 몇 차례 중건을 거쳐 1899년 완성됐으며, 지난 2003년 5월 화재로 소실된 바 있다.
지난 2003년 화재로 소실됐던 함양 농월정이 마침내 12년 만에 복원돼 16일 준공식을 가졌다.
남덕유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화림동계곡물과 무릉도원의 넓은 바위가 ~~~
농월정에서 시작하여 거연정까지 함양 선비문화 탐방로를 걸어며~~~
동호정은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몽진을 도와 공을 세운 동호 장만리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9대손으로 가선대부오위장을 지낸
장재헌 등이 중심이 되어 1895년 건립한 정자이며 1936년에 중수가 있었다.
동호정은 함양군 안의면에서 26번 국도를 따라 전주방향으로 7km 정도의 거리에 국도와 연접하여 위치하고 있다.
동호정은 남강천 담소중의 하나인 옥녀담에 있으며 화림동 계곡의 정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화림동계곡 함양 선비문화 탐방로가 끝나는 거연정 출구입니다.
거연정은 고려시대 말기 전오륜(全五倫)의 7대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전시서(全時敍)가 1640년경 서산서원을 짓고
그 곁인 현 거연정 위치에 억새로 만든 정자를 처음으로 건립하였다.
1853년 화재로 서원이 불타고 이듬해 복구하였으나 1868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원이 훼철되었다.
1872년 전시서의 7대손인 전재학(全在學), 전민진(全愍鎭) 등이 억새로 된 정자를 철거하고 훼철된 서산서원의 재목으로 재건립하였으며
1901년 중수하였다. 봉전마을 앞을 흐르는 남강천의 암반 위에 1동으로 건립되어 있다.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산31번지에 있는 논개의 묘역.
전라북도 장수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이곳 방지마을 옆 속칭 탑시기골에 있다. 높이 1.2m, 지름 5.4m, 길이 5.3m에 달하는 대형 분묘가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1년 후인 1593년 6월29일 진주성이 함락된 후 성 아래 바위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한 날을 추모하고 충절의 정신을 널리 선양하기 위하여 매년 음력 7월 7일에 유림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논개의 묘 바로 위에 남편 최경희의 묘가 있습니다.
논개는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 주달문이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장수현감이었던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1593년 최경회는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어 싸웠으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28일만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제2차 진주성 싸움).
593년 7월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논개의 얼이 있는 진주 촉석루와 장수군에 논개의 생가가 있답니다.
논개의 생가지는 장수군 장계면인데 함양군 서상면에 묘소가 자리하게 된 이유는 진주성에서 서상까지 몇칠 동안 운구를 하다보니
시신도 부패가 되고 또 서상에서 장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도적떼가 많이 출몰하는 험준한 육십령고개(해발734)를 도저히 넘을 수 없어
이곳에 안장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전해지네요.
함양을 문화탐방후 논개묘역을 뒤로하고 한국의 명산 앞에 보이는 지리산을 향해서 고속도로를 달려
오늘의 답사를 마쳤습니다.
동무들 깊어가는 가을에 건강한 나날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