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特輯. 訓民正音 解例本 전래...
선대의 인류가 후대에 남긴 물건은 경우에 따라 한 국가가 뒤흔들리기도 할만큼 그 영향력이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세계 유산을 지정하는 전문 기구가 존재하는 것이고 각 나라마다 문화재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문화재청이라는 게 있는 것이죠.
그런데 70년 전 어느 한국인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유물의 정체가 공개되자, 중국이 발칵 뒤집혔다고 하는데요, 도대체 어떤 것이었길래 중국은 난리가 난 것일가요? 자세한 내용 내용을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은 현대에 들어 한국 문화의 중국 예속화를 시도하면서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한복·한식 등 한국 문화를 뭐든 자기들 것이라고 우기고 있고, 그 추악함은 하늘을 찔러 한국에서 반중 감정이 반일 감정을 넘어섰을 정도이죠, 특히 중국은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될 것에도 손을 댔는데요, 바로 한글입니다.
한글은 조선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었던 세종대왕이 창제한 것으로, 인류가 사용하는 전세계 7000여 개의 문자중에서 유일하게 창제년도와 창제자가 명백히 밝혀진 위대한 유산이죠. 우리 민족의 언어인 한국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자긍심, 그 자체로 성역과도 같은 부분이지만, 추악한 중국은 전 세계가 칭송하는 위대한 한글을 가만히 둘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은 중국어의 발음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훈민정음은 옛 한자를 베겨서 만들어졌다 등의 소리를 하며 빼앗으려 했죠. 하지만 위대한 세종대왕은 후대 중국이 몹쓸 행보를 벌일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한글이 빼앗기지 않도록 미리 경계를 쳐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글의 창제과정이 들어가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이었죠.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한글의 창제에 대한 여러 가지 구구한 추측이 난무했지만, 해례본이 발견됨으로써 한글이 어떤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가를 알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해례본이 발견된 시기는 1940년으로 당시 일본은 한국의 문화를 말살시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즉 한글의 창제 원리가 들어가 있는 해례본 역시 그 존재가 들키면 일본에 빼앗길 것이 분명했죠. 하지만 목숨을 걸고 해례본을 지킨 사람이 있었는데요. 그가 바로 문화지킴이라고 알려져 있는‘간송 전형필’입니다.
전형필은 문화지킴이이라는 칭호 그대로 24살 때, 오세창은 당시 전형필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우리 조선은 꼭 독립되네, 동서고금에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가 낮은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는 없고, 그것이 바로‘문화의 힘’이지,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의 문화 유적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 가려고 하는 것일세”이 말에 감명을 받은 전형필은 마음을 굳게 먹고, 당시 일본으로 유출되는 서화·도자기·불상·석조물·서적 등을 닥치는 대로 수집해서 자기 땅에 남기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렇다면 전형필은 어떻게 훈민정음 해례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일까요? 사실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견한 사람은 국문학 김태준의 제자였던‘이용준’으로 자신의 처가인 광산 김씨 종택 긍구당 서고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을 제일 먼저 발견했습니다. 이용준은 이 사실을 즉시 김태준에게 이야기 했고, 이용준과 함께 본가가 있는 안동으로 내려가 해례본을 직접 확인한 김태준은 경악을 금치 못했죠.
그들은 이 위대한 유산을 잘 보관할 수 있을만한 사람을 물색했고, 김태준은 당시 문화재 수집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던 전형필을 떠올렸습니다.
전형필은 김태준에게서 해례본 이야기를 듣자마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즉시 그 자리에서 은행으로 달려가 1만1천 원을 찾아와서, 1천원은 김태준과 이용준에게 사례금으로 주고 1만 원은 해례본 값으로 치렀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의 물가로 따지면 기와집 열 채 값에 해당되는 금액이었고, 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무려 30억 원에 해당되는 금액이었죠. 당시 전형필이 해례본의 가치를 얼마나 높게 봤는지 알 수 있는 일화입니다.
전형필은 이것을 사들이고 나서 광복이 될 때까지 이 해례본의 존재를 철저히 숨겼습니다. 한국 문화를 철저히 말살시키려고 한 일제강점기 말기에, 한글 창제 원리를 자세히 설명한 이 책이 드러났다면 좋지 못한 꼴을 당할 것은 당연지사이기 때문이죠.
이후 전형필은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피난갈 때 이 책을 먼저 챙겼고, 베개 밑에 두고 잠을 잘 정도로 애지중지하며 보존하였습니다.
지금까지 해례본이 이어져 내려온 것은 그런 전형필의 노력의 덕이며, 1956년에는 이 소장본을 바탕으로 사진을 촬영하여 만든 영인본이 제작되었습니다.
전형필은 영인본 제작을 위해 이 소장본을 흔쾌히 내놓았고, 그뿐만아니라 책을 한 장 한 장 해체하는 것까지 직접 했다고 하죠.
이후 해례본은 간송 미술관에 보관됐고, 그 사실이 알려지자 중국에서는 정부 인사를 파견까지 했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정세를 살폈다고 하는데요.
현재도 중국은 한글을 빼앗으려고 난리를 치고 있지만“ 훈민정음은 한자의 발음을 쉽게 표기 함으로써 자음을 정립하여 중국어를 통일하는 것이 목적이다”등의 헛소리를 해대며 발악을 해도, 해례본이 국보 70호로 지정되고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이상, 국제사회는 한국과 함께 중국의 추악함을 규탄할 뿐일 것입니다.
민족의 혼과 얼을 지켜내기 위해 절대 더 이상 한국의 문화재를 뺏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전쟁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지켰던 간송 전형필 선생님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카톡으로 날아든 자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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