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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짊어지신 이
마 8:5-17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 8:5-17 /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다;눅7:1-10, 요4:43-54]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였다. 한 백부장이 와서 자기 하인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으니 낫게 해달라고 애원하였다. 예수께서는 7) `그래, 내가 가서 고쳐 주마' 하고 대답하셨다. 8) 그러자 백부장이 말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집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이 다만 이 자리에서 `나으라' 하고 말씀만 해도 제 하인은 나을 것입니다. 9) 저도 지휘관 밑에 있고 제 밑에도 부하들이 있어 제가 이 사람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하인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저는 주님이 `병이 나으라' 하고 말씀만 하시면 그 병이 나을 줄 압니다.' 10) 그 백부장의 말에 감탄하신 예수께서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온 땅에서 나는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본 일이 없다. 11) 이 백부장과 같은 많은 이방 사람들이 세계 여러 곳에서부터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늘나라에 들어가 앉을 것이다. 12) 그러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을 위해 하늘나라가 마련되어 있는데도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땅을 치며 통곡을 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백부장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라.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하인의 병이 나았다. 14)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막1:29-34,눅4:38-41]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가셨을 때였다. 마침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앓아 누워 있었다. 15) 그러나 예수께서 그 여자의 손을 잡으시자 곧 열이 내려서 일어나 예수께 대접하려고 ㄱ) 식사 준비를 하였다. 16)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귀신 들린 사람 여럿을 예수께 데려왔다. 예수께서 말씀으로 모든 귀신들을 쫓아내시자 병자들이 다 나았다. 17) 이것은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ㄴ) `여호와의 종이 우리의 온갖 질병을 대신하여 앓고 우리가 당해야 할 고통을 대신 당하였다.' (ㄴ. 사53:4)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실 때 나병환자를 만나 치료하시고, 가버나움에서는 중풍 병에 걸린 하인을 위해 찾아온 백부장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를 찾아온 백부장(5-6) 예수님께서 복음전도의 중심지였던 가버나움에 돌아오셨을 때 한 백부장이 찾아와 간구합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당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은 1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백인대의 지휘관으로 현재 중대장 정도에 해당되는 계급입니다. 당시 상황으로 보면 종은 일종의 집안 물건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인격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백부장은 자신의 위치와 체면, 신분의 상관없이 예수님께 나아와 자신의 하인을 치료하여 줄 것을 간구합니다. 백부장의 이런 고백은 비록 그 상대가 하인이라고 할지라도 평상시에 그를 사랑으로 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보신 백부장의 믿음(7-13) 백부장의 청에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스스로 무지하며 어느 곳에 있든지 주님의 말씀이면 모든 문제들이 해결 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도 상하관계에서 명령을 하기도 하고 복종하기도 하는데, 예수님의 한 말씀이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였지만 이방인 백부장은 말씀 앞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백부장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 하인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러나 비록 “그 나라의 본 자손들”처럼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벧후 2:17; 유 1:13).
예수께서 행하신 치유(14-17) 당시 유대 사회의 열병은 어떤 병의 증상이 아니라, 그 자체를 하나의 병으로 취급하였습니다(요 4:52). 그래서 랍비들의 강령인 할라카(Halacha)에서는 열병을 앓는 자들과의 접촉 자체를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미시고(3), 열병을 앓고 있는 베드로의 장모에게도 손을 내밀어 주셨고 귀신들린 자들과 모든 병자들도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예언의 성취이기도 합니다(사 53:4).
적용: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는 말씀처럼, 당신은 어떤 믿음으로 체험한 것이 있습니까?
죄인의 마음속에는 죄악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라곤 죄악된 것뿐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하나님의 복음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되면 우리의 삶은 거룩한 것으로 일관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1:16)고 명령하십니다.
< 설 교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
마 8:5-13 / 정필도목사
어떤 가정에 두 아들을 둔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항상 아버지에게 달라는 것이 많았습니다. “학비를 주세요. 양복 사 입게 돈 좀 주세요. 구두가 필요해요.”라고 요구합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아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오늘은 포도원에 가서 일을 좀 하라고 했더니 “예!”라고 대답은 해놓고, 실제로는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을 해도 형식적으로 하는 척만 하거나 적당히 했습니다. 그러나 작은아들은 아버지에게 달라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작은아들에게 필요한 것이 없냐고 묻자, 아버지가 주신 것이 많아 부족한 것이 없고,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작은아들은 형님이 아버지 말씀대로 하지 않아 아버지가 속상해하는 것을 아니까 아버지가 말하지 않아도 포도원에 가서 땀 흘려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작은아들의 태도를 본 아버지는 감동을 받고 그 포도원을 전부 작은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작은아들이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 아들 중에 어떤 아들이 지혜로운 아들이라고 생각합니까? 큰아들은 미련하고, 아버지에게 근심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에게 기쁨이 되지 못하고, 달라고만 합니다. 그러나 작은아들은 참으로 지혜롭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항상 기쁘게 하니까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아버지가 엄청나게 큰 포도원을 주시며 축복을 하였습니다.
잠언 23장 24~25절을 보면 「24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즐거울 것이니라 25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라고 하였습니다. 바르게 살고 지혜로운 자식을 둔 아버지는 얼마나 기쁘고 즐거울까요? 우리가 부모님을 기쁘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참 효도인 줄 믿습니다.
오늘날 소위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 중에는 지혜로운 사람도 있고, 미련한 사람도 있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밤낮 복을 달라고 기도를 많이 하지만, 그의 삶을 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바로 미련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서 삽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과 함께해 주시고 축복을 주시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서 사는 그리스도인인 줄 믿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을 평생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집사, 장로이고 수십 년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아느냐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만 하면 생각만 해도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다 주실 줄 믿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밤낮 복만 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창세 이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5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고 합니다. 창세기 5장 21절을 보면,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에녹이 이렇게 살았을 때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는 축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에녹의 이야기를 하면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아주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는 백부장입니다. 이 직분은 로마 군단 소속 장교의 호칭으로, 약 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통솔, 지휘하는 중대장급의 중요한 계급입니다. 백부장이 하는 일은 점령한 땅의 치안을 유지하고, 반란 폭동을 제지하고, 식민지 백성을 지배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로마 군인들은 아주 잔인했다고 합니다. 난폭한 기질을 가져서 이스라엘 백성과는 늘 충돌을 하고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별히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중요한 지역을 맡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버나움이라는 국경에 인접한 지역으로, 아주 중요한 무역로입니다. 그래서 이곳의 치안유지가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식민정책은 그 식민지 백성들에게 얼마의 자치성을 인정해 주는 대신, 군대를 주둔시켜서 군대가 치안을 유지하고 반란을 사전에 예방하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할 때, 백부장이 핵심이 되어 독자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데, 거기에 지휘관으로 있던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입니다. 이 백부장은 그렇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백부장들은 아주 무자비한 통치를 시행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파견된 부대의 지휘관은 황제의 대리인이며, 그에 맞는 권한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대단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을 보면 이 백부장이 그 하인을 아주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 하인은 그의 아들이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이해가 되는 해석은 이 충성스러운 하인은 백부장이 전쟁을 할 때도 수행을 하고, 어디든지 함께 하는 사람으로, 얼마나 충성스러운지 이 백부장에게 많은 은혜를 끼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백부장이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하인이 병들자 예수님께 찾아와서 고쳐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라고 예수님께서 이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만난 사람 중에 제일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극찬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백부장은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8~9절에 「8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순종하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백부장의 태도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놀라시며,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이 백부장의 믿음은 참으로 위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을 왜 기뻐하실까요?
첫째,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정비례합니다. 믿음이 좋아질수록 순종을 잘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죽도록 순종하고, 자원해서 기쁨으로 순종합니다. 순종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36절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순종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뜻대로 순종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행함이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고 하셨을 때,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다 버리고 떠났습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만 쫓아갔습니다. 날마다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을 때에도 순종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4장 17~22절을 보면 「17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신실함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100세가 되었고, 부인이 90세가 되어서 아이 낳기가 불가능함에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신실하시고,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니까 우리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하나님께서 그대로 이루실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에는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이고, 이삭의 자손에서 메시아가 오리라고 한 약속이 반드시 지켜질 것을 믿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9절을 보면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종만 하면 되고,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전지전능하시니 그 아들을 살려서라도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한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했던 것이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십니까?
제가 82년도에 수영로교회를 개척한 지 7년이 되었을 때, 장로님들이 안식년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사례비를 넉넉히 주시고 미국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박사과정 공부도 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몇 달을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산에서 전화가 왔는데, 어느 성도가 제가 미국 어느 교회에 부임을 해서 설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정 목사도 미국에 가더니 변했다면서 실망하고 운다는 것입니다. 저는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누군가가 거짓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순박하고 너무나도 순수한 성도들이 거짓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믿은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7년 동안 충성한 나를 믿지 않고 거짓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은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이 믿을 수 없는 목사가 되었으니 저는 실패자입니다.’라고 울면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주님께서 ‘너는 나를 믿어주었느냐!’라고 책망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 같이 부족한 죄인도 성도들이 믿어 주지 않을 때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완전하신 우리 주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하는 생각이 떠올라 하나님께 너무나 죄송해서 눈물 흘리며 회개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때로는 의심하고 걱정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이런 간증과 설교 말씀을 녹음해서 부산으로 보냈을 때, 성도들이 그 설교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 이후로 저를 이렇게 믿어주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주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신실하시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고 반드시 책임지십니다. 그러니 의심하거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 아니라 순종하는 자에게 약속한 모든 복을 받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백부장처럼 기쁨으로 순종할 준비를 하고, “말씀만 하옵소서!”라는 태도로 살면, 우리 주님이 감동받으실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기쁨으로 순종할 마음을 가지고 살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생각만 해도 이루어지는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마 8:5-13 / 이정익 목사
오늘 본문에는 한 백부장이 출현합니다. 그는 로마 군인이었고 이방인이며 지배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백부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이 그를 만나시고 감격해 하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성경에는 백부장이 여러 명 나옵니다. 마태복음 27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모습을 지켜본 백부장이 “그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라는 백부장은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선행자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어느 날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이 있습니다. 그는 하인이 중풍 병에 걸리자 예수님을 찾아가 하인을 고쳐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러면 네 집으로 가자”고 하셨지만 그는 “수고하실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 말씀만 하시면 나을 줄 믿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종은 마침내 고침을 받았고 예수님은 그 과정에서 그의 믿음에 감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백부장은 전인적인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하인이 중풍 병에 걸려 꼼짝 못하고 누워 죽어가고 있을 때 예수님을 찾아가 하인을 고쳐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참 아름답고 인간애가 있는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도 이 모습에 감동하셨습니다. 당시는 오늘같이 인권을 말하고 노동자를 배려하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하인은 말하는 농기구처럼 말없이 일이나 하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더구나 백부장이면 로마 관리이고 지배자요 군인인데 하인의 존재감이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종이 병들거나 죽으면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그 종을 위하여 예수께 직접 찾아가 고쳐 달라고 호소를 합니다. 로마의 군인 장교가 체면불구하고 하던 일을 중단하고 친히 가서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살아있는 믿음을 보게 됩니다. 진정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열심히도 있고 뜨거움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에는 이같이 섬기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이 백부장처럼 말입니다.
믿음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 안에 깊이 들어갈 때 가능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를 받았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참 제자가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자연인인 나는 불가능합니다.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내 이익을 위해 남에게 한 치 양보도 못하는 이기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 따로 행동 따로 일 때가 많습니다. 말은 쉽게 하는데 행동은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주님의 제자가 될 때 가능해집니다. 나는 감히 그런 일을 할 수 없고 무능하지만 내가 주 안에 있을 때 내 안의 믿음의 힘이 나로 하여금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만듭니다. 이렇게 이 백부장은 자기 하인을 위해서 인류애를 발휘하였습니다. 이 백부장은 동정심만 가지고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믿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 사랑
이 백부장은 주님도 사랑했습니다. 이 백부장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표현이 아주 극적입니다. 백부장이 주님을 찾아가 “내 종을 고쳐 주십시오.”하고 간구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럼 네 집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때 백부장이 대답합니다. “주님 그렇게까지 수고하실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내 종이 고침 받을 줄 믿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최고의 믿음이고 신뢰이고 표현이고 고백입니다. 그 고백 속에는 “당신은 메시야이며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얼마나 찡한 고백이고 뜨거운 표현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감격하시고 놀라시고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젊은이들은 이 사랑의 표현을 참 잘합니다. 어떤 때 보면 너무 헤플 정도입니다. 길거리에서도 껴안고 입 맞추고 아무 거리낌 없는 모습에 어른 세대들이 당황하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른 세대들은 사랑 표현에 아주 서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생각해 보니 좀 마음의 고여 있는 생각을 표현하며 살아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됩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도 표현하며 고백하는 삶이 좋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도 표현하며 고백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신앙고백이고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얼마나 좋아하셨습니까! 사도바울은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이제부터 나는 주님만 알기로 작정하였노라.”고 표현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얼마나 분명하고 확신 있는 신앙의 표현이고 고백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백부장의 고백과 표현에 예수님이 아주 만족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중심 메시지
이 본문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3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메시야이심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3년 공생애 초기에 들어섰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가 누군지 모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처음에는 태어나고 자라고 제자를 선택하신 후 산상수훈을 통해서 제자들을 훈련하십니다. 그런 후에는 열심히 다니시며 각종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8장만 보아도 1절에서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5절에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십니다. 23절에서 바다의 바람을 잔잔하게 하시고 28절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며 9장 1절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18절에서 혈루병자를 고치시며 27절에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이 병자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원초적인 병들 즉 신적 권능이 없이는 고칠 수 없는 병들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병자들을 모두 깨끗이 고치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병자들이 눈을 뜨고 일어나고 깨끗케 되며 귀신이 쫓겨났습니다. 그 말은 “예수는 메시아다.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말입니다. 복음서에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메시아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내가 예수를 만나 병을 고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병을 고침은 내가 예수를 만나면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복음은 내가 예수를 알고 그 예수를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아이시고 나의 구원자 되심을 알고 믿고 고백하는 삶이 복음의 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많은 기적을 행하신 이유는 기적을 위함이 아니고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원초적인 질병 자들 즉 나면서부터 눈먼 자, 앉은뱅이, 나병환자들을 고치신 것입니다. 그 시대는 그런 원초적 질병 자들을 고치는 사람은 메시아뿐이라고 믿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먼저 된 자를 향한 경고”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 제사장들, 서기관들은 그 시대의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믿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기득권을 주장했습니다. “우리만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하나님은 우리만의 하나님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기득권의식 때문에 남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방인을 우습게 여기고 교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대목에서 로마의 백부장을 등장시켜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동안 “우리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고 공개적으로 과시하며 살아가던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에게 진정한 믿음이 뭔가를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너희들이 평소 믿음이 있다고 큰소리 쳤지만 과연 너희 중에 이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있느냐”하며 꾸짖으신 것입니다. 이사야 29장 13절에도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으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여기서 먼저 믿은 사람들의 형식적인 믿음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또한 오늘날 오래 믿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믿음생활을 오래할 때 발생하는 한 가지 폐단이 바로 이 믿음의 형식화입니다. 이것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그토록 신랄하게 책망하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먼저 믿은 사람들의 형식적인 믿음을 고발하십니다.
세 번째 주시는 메시지는 “구원의 개방성”입니다. 그때까지 구원은 선민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교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구원은 온 인류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는 점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도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도다.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자기들만 선민이고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들을 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즉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우리들뿐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착각하지 말라.”고 일타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도다. 이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에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리고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천국에 가서 두 가지에 놀랐다고 합니다. 하나는 천국에 올 줄 굳게 믿었던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고 또 하나는 천국에 오리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던 사람이 천국에 와 있어서 놀랐다는 것입니다. 이다음에 누가 천국에 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래 믿었다고 반드시 천국에 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백부장의 믿음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좋은 믿음을 유지하려면 몇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라봄”입니다. 사람마다 바라보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 목표를 바라보면 내안에 상이 그려지게 됩니다. 그러면 닮아가게 되고 나아가게 되고 도달하게 되고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비전이라고 하고 미션이라고도 말합니다. 믿음도 목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삶과 믿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십자가를 지셨고 끝내는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기준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믿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때 그 모습이 나에게서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2절을 보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목표가 있는 사람만이 늘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두 번째 법칙은 “의존”입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여기 백부장은 하인을 고치는 다른 방법도 있을 수 있습니다. 부대에 군의관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민간요법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 하인의 치료를 부하에게 맡겨둘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다른 방법을 다 거부하고 예수께로 자신이 직접 찾아갔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100%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 가면 반드시 하인이 고침 받을 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백부장은 마침내 뜻을 이루고 기적을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자기 힘으로 살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야곱이 그랬습니다.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빼앗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며 욕심을 냈습니다. 마침내 부자가 되었지만 원하던 평화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속이고 뺏고 원수 맺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나중에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밤새도록 천사와 혈투를 벌리게 되었고 야곱은 그때 모든 것을 다 내려놓게 됩니다. 이를테면 두손을 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으니까 형과 화해가 이루어졌고 비로소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 같지만 엄밀히 보면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인생을 살면 너무 힘들고 고달프고 어렵습니다. 야곱처럼 얻어도 기쁨이 없습니다. 결국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내가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평화는 언제 찾아오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을 때 찾아옵니다. 그렇게 내려놓을 때 내안의 나는 하나님을 의존하게 되고 그로 인해 상상하지도 못한 평화가 내안에 스며들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은 나는 축소되고 나를 비우며 다 내려놓는 삶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비우고 내려놓은 만큼 나는 하나님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또 “믿음”입니다. 저는 아무 준비 없이 신학교에 갔습니다. 기도를 왜 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힘들었고 피곤했고 그 시간이 지루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미래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고 암담하게 느껴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현실이 너무 힘들어졌습니다. 미래를 잃고 목적을 찾지 못한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삶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심각하게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이 길을 계속 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몸부림치며 심각하게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살아가다가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면 이렇게 금식기도 하고 밤새워 기도하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살아가다가 이렇게 금식기도도 해 보고 몸부림도 쳐 보는 이런 경험을 해 보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저는 그렇게 몸부림치며 기도할 때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내 신앙관, 인생관, 삶의 목적이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앞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뜨인 눈으로 살아가는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길이고 믿음의 방법인 것입니다.
신앙은 평소에는 별로 중요함을 모릅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 평안한 생활이 오래 지속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 때는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믿음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평안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신앙의 법은 날마다 하나님을 찾아가는 생활입니다. 그 삶이 일생동안 지속되는 삶 그것이 신앙의 법입니다. 그 삶속에서 내 삶이 익어가고 성숙해 가고 여물어 가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고백다운 고백이 나오고 진정한 사랑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여기 백부장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하인이 병들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주님을 찾아갔습니다. “내 하인이 죽게 되었으니 고쳐 주십시오.” “그럼 네 집으로 가자.” “아닙니다. 우리 집까지 가시는 수고하실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내 종이 고침 받을 줄로 믿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보지 못했노라(1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우리는 선민이니 당연히 천국에 간다.”고 믿고 장담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천만의 말씀, 어림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형식적인 신앙을 경고하십니다.
믿음의 좋은 군사로 거듭나기
마 8:5-13 / 양인순목사
오늘도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모든 성지가족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13년 성지교회의 표어는 “예수의 좋은 군사로 거듭나는 해”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사도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주시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은혜 안에 강해져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날마다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생활에 매지이 않아야 합니다. 항상 부르신 자를 기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아가는 지혜입니다.
한 해 동안 모든 성지 가족들이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기 위해서 3가지 실행지침이 있습니다. 첫째, 믿음의 군사로고 거듭나기입니다. 둘째, 기도의 군사로 거듭나기입니다. 셋째, 생명을 살리는 전도의 군사로 거듭나기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 주제인 믿음의 좋은 군사로 거듭나기입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전진하여 승리하는 믿음의 군사가 될 수 있을까요? 로마 군대장교를 통해 그 믿음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오늘 성경에는 예수님을 감동시킨 사람,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로마의 군대 장교인 가버나움의 백부장입니다. 그의 이름은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가버나움은 군단규모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군사적 요충지입니다. 백부장은 100명 정도의 군사를 거느리는 중대장 급의 장교입니다. 어떻게 해서 유대인도 아닌 이방의 군대 백부장이 주님을 감동시키고, 주님을 깜짝 놀라게 하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었을까요?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로 칭찬받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었을까요? 우리 모두 백부장의 믿음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약자를 사랑할 줄 아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한 백부장이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간구합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합니다.”(6절)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자기의 아들이 아파서 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 가족이 아파서 찾아 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데리고 있는 종이 중풍병에 걸려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로마 군대의 백부장은 상당한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젊은 예수님 앞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간곡하게 부탁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고백하는 장교 입장에서는 용기가 필요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의 통념을 깬 행동입니다.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하인은 노예와 같습니다. 노예는 주인의 재산에 불과합니다. 가치가 없으면 죽여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더구나 고치기가 힘든 중풍병이라면 희망도 없습니다. 이쯤되면 버리든지, 죽이든지 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주님 앞에 친히 나와 머리를 조아립니다.
백부장은 사랑의 사람입니다. 약한 자를 배려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권세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배려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강한 자가 약자를 돌보는 것은 어렵습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중풍병에 걸려 아무런 쓸모도 없고, 가치도 없는 하인을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믿음은 바로 약자를 사랑할 줄 아는 긍휼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있어 보여도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약한 자를 사랑합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말쟁이에 불과하다고 강조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마땅히 약자를 배려하는 사랑의 모습이 타나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단히 약자를 배려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남을 돕고, 구제하는 것도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작은이들의 벗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혼자 하려면 어렵습니다. 그 힘이 미약합니다. 그러나 작은 정성이라고 함께 모으면 큰 역사를 이룹니다.
24일에 사랑의 연탄나눔을 실시합니다. 강남의 빛과 그림자라고 하는 구룡마을에 가서 우리의 사랑을 나눕니다. 여러분도 직접 참여해 보십시오. 그리고 자녀들을 많이 보내십시오. 연탄을 나누는 것이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과 정성을 모아서 함께 나누면 세상이 훈훈해 집니다. 감동이 있는 세상이 됩니다.
우리가 한 끼씩 금식한 헌금을 주님께 드립니다. 바로 <사랑의 개안수술 헌금>입니다. 이미 여러분들이 동참하셨습니다. 우리의 작은 사랑의 정성이 모이면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생명의 빛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다음 주까지 기쁨으로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의 털모자뜨기 운동입니다. 이것은 3월말까지 진행합니다. 아프리카나 동남아 지역의 신생아들이 태어나면 저체온증으로 약 700만명이 죽습니다. 그런데 털모자를 씌워주면 체온이 2도정도 올라갑니다. 그러면 약 500만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이브더칠드런 이란 단체가 주관을 해서 이 운동에 두 번째로 동참합니다. 재작년에는 약 700개의 사랑의 모자를 전달했습니다.
백내장 수술을 하신 김병석 집사님께서는 70세가 넘으셨음에도 불구하고 12개의 모자를 뜨셨습니다. 최수호 집사님은 120개를 뜨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한 땀 한 땀 사랑의 정성을 모아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저도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 동참하려고 합니다. 목표는 두 개입니다. 우리의 정성을 모아 1000개를 목표로 합니다. 권사회, 여전도회에서 힘을 모아주십시오. 남자 성도님들도 도전해 보십시오. 좀 쑥쓰러워 보이지만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인데 쑥쓰러운면 어떻습니까? 그 모습을 주님이 보시면 얼마나 흐뭇해 하실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그리고 내가 본을 보인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방법은 제자훈련을 받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훈련을 통해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사람이 될 때 제자가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이구나. 예수쟁이구나’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한 믿음의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회적인 약자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배려하셨던 것처럼 작은이들을 찾아 우리가 받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약자를 배려하는 것이요, 우리가 받은 사랑을 그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백부장의 믿음이요, 주님을 감동시킨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우리 모든 성지가족들이 백부장처럼 약한 자를 배려하는 사랑의 믿음으로 성숙해지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겸손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사랑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이미 감동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백부장이 놀라운 말을 합니다. 8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8:8-9)
가서 고쳐주시겠다는 주님의 말씀 앞에 백부장은 겸손하게 말합니다. 주님! 내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나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겸손한 모습입니까? 100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백부장입니다. 얼마든지 권력의 힘을 가지고 예수님을 강제로 끌고 갈 수도 있습니다. 하인의 병을 고치라고 명령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서 고쳐주시겠다는 데도 손 사레를 칩니다. 감히 주님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죠. 부족한 목사인 저도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있던 일입니다. 한 나이 드신 여자 집사님이신데 절에 다니시다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얼마나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시던지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분입니다. 제가 대심방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한 달 전부터 금식하며 기도로 준비했습니다. 한 주 전에 집에 도배를 새로 했습니다. 집안 대청소를 했습니다. 제가 방에 들어가는 순간 큰 절을 하셨습니다. 얼마나 사모하는 마음이 크시던지요? 그 순간 제가 얼마나 황송했겠습니까? 아마도 그 집사님의 마음이 백부장의 마음과 비슷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목사가 심방을 하는데도 그토록 황송해 하면서 주의 말씀을 사모하셨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하물며 예수님이 자기 집에 방문하시겠다고 했으니 백부장이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그래서 감히 주님이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의 겸손한 모습을 보시고 주님이 또 한 번 놀라셨습니다. 처음에 찾아와서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한 것도 감동적인 일인데, 이렇게 겸손한 믿음까지 갖추다니..
한마디로 예수님은 감동 짱! 먹으신 것이죠.
믿음의 사람은 항상 겸손합니다. 2차 세계대전 말에 2개월 동안 재교육 명령을 받은 중위가 전보를 쳤습니다. “소집에 응할 수 없어 유감임. 누가복음 14장 20절을 참조하기 바람.” 육군성 사람들이 성경을 찾아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이어 육군성에서도 전보로 회신했습니다. “귀하의 전문에 관하여 마태복음 8장 9절을 참조하시기 바람.” 그 성경 구절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교만한 사람은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4:6)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패하게 하시고, 넘어지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누가 믿음이 좋은 사람일까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닫는 자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이런 겸손한 고백을 드리는 사람이 바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겸손으로 허리를 동여야 합니다. 날마다 교만이 싹트지 못하도록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입니다. 겸손한 자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요 교만한 자는 미성숙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백부장처럼 겸손한 믿음으로 무장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사랑의 사람이요 겸손한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 앞에 순종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가서 고쳐주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에 백부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8절)
로마의 백부장은 말씀의 권위를 믿는 자입니다. 주님께서 굳이 집에 오시지 않아도 말씀만 하시면 하인의 중풍병이 낳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말씀으로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병든 자를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풍랑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풍랑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풍랑 앞에 떱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제자들처럼 세상의 풍랑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 말은 주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말씀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어떤 능력과 권세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있는 능력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성령의 검 말씀으로 악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진리의 삶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등불입니다. 그 말씀을 확실하게 붙잡으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대로 순종하십시오. 주님이 가라하면 가고, 주님이 서라하면 설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신실한 믿음의 군사입니다.
오늘 백부장의 믿음은 바로 사랑이요 겸손이요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주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주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리고 칭찬 받는 믿음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주님께서 백부장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 믿은 대로 될지어다. 내 믿은 대로 될지어다” 그 순간 하인의 중풍병이 치유됐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백부장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을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예수의 좋은 군사로 거듭나는 한 해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믿음의 방패를 가져야 악한 마귀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승리의 깃발을 흔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믿은 대로 역사하십니다. 먼저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잘못된 고정관념의 못을 빼야 합니다. 고정관념은 고장난 관념입니다. 과거의 패배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낮은 자존감, 열등감, 수치심, 죄책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잘못된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믿음의 생각으로 채우십시오. 나는 할 수 없어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풍랑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십니다. 모든 질병을 치유하십니다. 죽은 자도 살리십니다. 모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지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말씀 앞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만선의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백부장의 믿음을 회복하십시오. 그리고 전능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그물을 던지십시오. 주님께서 풍성하게 채우십니다. 우리의 모든 질병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로마 백부장의 신실한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좋은 군사로 거듭나는 비결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다함께 찬양드립니다. <전능하신 나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없네
우리의 모든 간구도 우리의 모든 생각도 우리의 모든 꿈과 모든 소망도
신실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괴로움 바꿀 수 있네
불가능한일 행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니 그를 이길 자 아무도 없네
주의 말씀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져 오늘 그가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 보라
주의 말씀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물 던져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 없네 ♬
♬ 주님 말씀 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주님 말씀 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곳에 나있길 원합니다 이끄시는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
네 믿은 대로 되라
마 8:5-13 / 김양인 목사(목양제일교회)
오늘 본문은 가버나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복음서에는 가버나움이 자주 나오는데, 이는 갈릴리 지역의 여러 도시 가운데 하나로서 공생애 동안 예수님의 선교본부가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한번은 주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오셨을 때, 한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흔쾌히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시자, 백부장은 대답하기를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고, 백부장에게 이르시기를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고 하셨더니, 그 시로 하인이 나았습니다. 오늘은 백부장의 간청을 들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고 평가하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상대방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실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믿음이 좋은 사람처럼 행동했으나 그것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꾸며낸 것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리새인들을 일컬어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처럼 믿음이 없으면서 경건한 척 외식하는 사람은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셨을 때,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눅 21:3-4)고 하셨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헌금의 액수를 보지만, 주님께서는 헌금을 바친 사람의 형편을 감안하여 경중을 평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바리새인에게 존경을 나타내고 세리를 깔보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사람의 겉모습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믿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에게서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으며, 그것도 유대 민족을 지배하기 위해 주둔해 있었던 로마 군대의 장교였습니다. 선민의식이 강한 유대인들은 그러한 백부장을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국적이나 인종이나 사회적 위치 따위를 보시지 않고 그의 중심에 믿음이 있는지 여부를 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갖추고 있는 세상적인 조건을 보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인지, 재산이 많은지 적은지, 학식이 얼마나 되는지, 젊은지 늙었는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따위를 보시지 않으며 다만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십니다.
예수님께서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입니다.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던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일로 유대인들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대적하는 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 …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 5:40, 42)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겸손한지 교만한지를 보십니다. 교만한 자는 자기 역량을 의지하고 자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자기의 부족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진실한지 거짓된지를 보십니다. “내 모습 이 대로 주 받으옵소서” 그렇게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은혜를 입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하나로 요약하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문제에 귀결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님께서는 백부장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겸손과 진실함을 귀하게 보시고 그의 믿음에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요즘은 기독교인 가운데 복음을 순수하게 믿기보다는 성공이나 번영을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구원의 복음을 기복의 복음으로 변질시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 이 같이 증거했습니다.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지(마 1:21), 이 땅에서 성공하고 번영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산상수훈 가운데 팔복의 가르침을 읽어 보면, 여덟 가지 복 가운데 세상적인 성공이나 번영을 약속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
이 가르침 속에는 천국 백성이 가져야 할 가치관과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주님의 인정을 받으려면 팔복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이 있는 사람을 위해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 사실은 성경이 일관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오직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긍휼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한이 없으십니다. 천지만물의 창조주시므로 우리의 형편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하등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선민 이스라엘 자손이라도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공생애의 초기에,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시고 성령이 충만하시어 고향으로 가셨을 때였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며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고 오히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고 하면서 배척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능력을 행치 않으셨습니다.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는 표현은 믿음이 없는 자들을 위해서는 아무 능력도 행하실 마음이 없으셨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그런 자들을 위해 능력을 행하시면 마음을 열고 믿을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하여 또 다른 이적을 보여 달라고 계속해서 요구할 뿐입니다. 믿음은 무슨 신기한 이적을 보아야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이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음부에 떨어져 불꽃 가운데서 고통하던 부자가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청은 거절당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부자는 포기하지 않고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고 하자,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라고 대꾸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말하기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가서 천국과 지옥을 말해 준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 같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만약에 무슨 신기한 것을 보면 믿게 된다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을 보고서도 믿지 않은 자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믿음이 없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기적을 본 자들은 구경꾼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천국 잔치에 참석한 자들이 아니라 구경삼아 온 자들이므로 잔치의 진수를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의 이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믿음의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으나 주님께 인정받은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호소를 들으시고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셨으나 그는 대답하기를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명령 앞에서 중풍병이 복종하여 떠나갈 것이라고,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백부장의 대답을 들으셨을 때 예수님께서 기이히 여기셨습니다. 곧 놀라움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선민의 자부심을 가진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인 백부장의 입에서 이런 믿음의 고백이 나왔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님들, 주님의 이적을 체험하기 원하시거든 백부장처럼 여러분의 믿음을 주님께 나타내 보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눅 4:) 나아만은 아람나라의 군대 장관이었고, 사렙다 과부는 시돈나라의 가난한 백성이었으니, 둘 다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두 사람은 다 믿음으로 파격적인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 살았던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는 그 같은 은혜를 받은 자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우리 믿음을 주님께 나타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곧 주님에게서 우리 믿음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셨을 때, 백부장은 대답하기를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백부장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는 것이 너무나 송구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그들과 한 자리에 있는 것조차 피했습니다. 이방인과 사귀는 것 자체가 부정한 일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이런 유대인의 규례를 알았으므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는 것이 주님께 대한 큰 결례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백부장의 이 같은 언행은 그가 예수님을 위대한 랍비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친히 그의 집에 오실 것도 없이 말씀으로도 얼마든지 명하시면 중풍병이 복종하고 그의 하인에게서 떠나갈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하신 사람이시며 동시에 완전하신 하나님이라고 증언합니다. 이사야 7장 14절에 예언하기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했는데, 마태복음 1장 23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가리켜 임마누엘이고 했습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독생자이신 것을 증언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하신 요한복음 1장 18절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자기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하셨으며,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고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은 이런 구절로 시작합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1장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창조의 주역이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시며, 그가 인성(人性)을 취하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사도 요한처럼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었을 때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다”(요 20:28)라고 고백하였고, 주님께서는 그의 신앙고백을 받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서를 저술한 목적에 대하여 “30)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수많은 이적을 행하신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한번은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시므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는데, 그만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겁에 질려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하고 외쳤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하시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며 서로 말하기를 “이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했습니다.
공생애의 초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안식일에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는데,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꾸짖어 이르시기를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즉시로 나왔습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이 다 놀라 서로 말하기를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보리떡 다섯 개로 장정만 오천 명이나 되는 큰 무리를 배불리 먹이고도 남은 부스러기를 거두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이처럼 병을 명하시니 병이 복종하고 떠나갔으며, 바람과 물결을 명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 졌으며, 귀신을 명하시니 귀신이 항복하고 떠나갔으며, 이적의 떡으로 무리를 먹이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낸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구원 받는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는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대속을 위해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으나 무덤에 장사되신지 삼 일만에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며, 때가 되면 하늘 구름을 타시고 강림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인정받는 믿음이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영원히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이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올 때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믿음을 나타내 보일 때 백부장의 간구를 들어주신 것처럼 우리 기도에도 응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지만, 믿음이 없거나 반신반의하는 사람에게는 마치 계시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백부장과 같이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와 능력을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순수하고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기이히 여김을 받고 “이 땅의 기독교인 가운데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는 인정과 함께, “네 믿은 대로 되라”하시는 응답을 받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번동의 백부장
마 8:5-13 / 김정호 목사(번동교회)
어느 동네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사람이 새로 이사 오는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 동네는 사람이 살 곳이 못 됩니다. 사람들이 너무 예절도 모르고 이기적이고 싸움만 일삼습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저는 이 동네를 떠나기로 결심했지요.” 그러자 그 동네로 이사 온 사람이 그 말을 듣더니 또 한마디 합니다. “그렇습니까? 저는 이 동네 사람들이 가난하고 또 병에 자주 걸려 무척이나 고생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웃이 되려고 이사 오기로 결심했지요.” 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간단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좋은 이웃이 되려 하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내게 좋은 이웃이 되어주기를 바라느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바로 이 차이에 따라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실 자신은 좋은 이웃이 되려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만 내게 좋은 이웃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소위 나쁜 이웃만을 만나게 되겠지요. 하지만 나 자신이 먼저 좋은 이웃이 되려는 사람은 언제나 나에게 호감을 가진 좋은 이웃들이 되어 그들을 내 몸같이 사랑하며 섬기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도 좋은 이웃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의 삶을 살면서 이웃에게 최고의 사랑인 복음을 전해 줄 때 그날 천국에서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됨을 기뻐하는 잔치가 열릴 것입니다. 이 같은 좋은 이웃의 삶이 우리 모두의 삶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람들의 모습과 성격과 삶과 신앙생활은 천태만상입니다. 개성과 전통과 가치관이 각각 다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비판하려고 한다면 평생해도 다 못하고 죽게 될 것입니다. 내가 좋은 이웃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좋은 부모, 자녀, 성도, 어른, 청년, 가족, 일꾼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몸 된 교회에 내가 기도, 섬김, 찬송, 인사, 충성, 헌신하는 성도가 되려고 하면 모든 것이 은혜이고 기쁨이고 천국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비난과 비판만 하고 있다면 악순환이 될 것이고 그 곳은 바로 지옥이 될 것입니다. 오늘 백부장에 대한 말씀은 너무나도 잘 압니다. 무슨 설교를 할 것인지 다 짐작을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삶의 자리에서 백부장처럼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번동의 백부장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사랑의 사람입니다
본문 5-6절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백부장은 수하에 100명의 군사를 거느린 중급 지휘관입니다. 백부장은 유대인을 위해 회당을 건립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에게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백부장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부모나 혈육이나 가족이 아닌 일단 무시해도 좋은 하인을 위해 굳이 와서 예수님께 정중하게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하인은 사회 구조상 천민이었으나 백부장과는 특별한 사랑의 관계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병든 하인을 위해 체면과 만사를 제처 두고 이처럼 간청하고 있는 백부장의 인간성에 감동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자상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기에 로마인이면서도 유대인인 예수님에 대하여 선입관을 갖지 않고 큰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병든 하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가족은 물론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 중에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상대방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내고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자세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 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결코 위선이나 과장된 포장은 보이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고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다가오게 만듭니다. 그런 사람 주위에는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 모여 드는데 이유는 사람향기가 나고 마음부자이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달리던 길을 멈추고 잠시 쉼표를 찍어봅니다. 내 인생길이 어떤 모양인지 그리고 누구와 함께이었는지를 회상해 보면 미소도 지어지고 고개가 숙여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화가 나고 눈물이 흐를 때도 있습니다. 이 분들의 크고 작은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사람이 성공이고 행복은 쉽다’는 것을 “입의 방문”, “손의 방문” 그리고 “발의 방문”이 그 세 가지인데, “입의 방문”은 칭찬을 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용기를 주는 것이고 “손의 방문”은 편지나 전화로 진솔한 마음과 특별한 관심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의 방문”은 상대방이 병들었거나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찾아가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칭찬은 할수록 커지고 편지는 쓸수록 감동을 주며 어려울 때는 찾아갈수록 친근해집니다.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좋았던 기분도 망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명한 자는 긴 귀와 짧은 혀를 가지고 있다’는 영국속담처럼 성공한 사람들 주변에는 배려와 사람이 있음을 가슴 따뜻하게 전해주어 무척 감동을 했습니다. 행복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성공한 사람처럼 행동합시다. 성공한 사람 주위에는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사람의 향기가 나고 마음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신앙을 갖고 있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도록 노력하며 정직과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현명한 자는 긴 귀와 짧은 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입으로, 손으로, 발로 어렵고 힘든 사람을 방문하고 사랑하는 삶을 실천합시다. 사랑하면 전도합니다. 사랑 없는 전도는 결코 없습니다. 하인을 사랑한 백부장처럼 우리 주위에 어려운 사람 100명을 사랑하는 번동의 백부장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겸손의 사람입니다
본문 8절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 베풀어 줄 것을 요청하였을 때 세례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처럼 백부장도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해 드릴만 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감당치 못하다’는 영적, 도덕적 충족성이 몹시도 결여됨을 고백한 것입니다. 어떤 권위 있는 존재에 대하여 인간 스스로의 무가치함을 느낄 때 사용됩니다. 백부장은 분명 자신의 죄악됨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절대 거룩성을 인지했음을 반영하는 백부장의 겸손한 심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겸손한 영혼에게 예수님의 큰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향하여 겸손한 태도를 가지는 일처럼 신앙생활에 있어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첫째, 둘째……. 마지막까지 겸손해야 합니다. 한 순간이라도 교만하면 모든 것이 깨어집니다. 조금이라도 오만 불손한 마음을 지니면 모든 것이 더러워지고 와르르 무너지게 됩니다. 백부장은 로마 군대의 100명의 부하를 거느린 젊은 엘리트 장교입니다. 얼마든지 민족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교만할 수도 있었으나 그는 그 모든 계급장을 내려놓고 겸손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겸손이 그의 삶에 가득 차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 자장과 자하라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자장은 재주가 많고 성격도 적극적이어서 다른 제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꽤 높았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나서기 좋아하는 자장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가까이 사귀기는 원하지만 공경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자하는 성격이 자장과 정반대였습니다. 외유내강의 강직하고 의로운 성격이었으나 무척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어서 나서기를 싫어했습니다. 어느 날 공자의 다른 제자가 이 두 사람을 놓고 스승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장과 자하 중에 누가 더 현명합니까?” 그러자 공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장이 더 낫다는 것입니까?” 제자가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으니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과유불급’이라는 사자성어의 유래입니다. 그런가 하면 ‘계영배(戒盈杯)’라고 부르는 술잔이 있는데 이 술잔의 이름은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뜻입니다. 이 술잔은 특이한 이름만큼이나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술잔에 술을 70퍼센트 이상 따르게 되면 술이 모두 새어나가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하는 의미에서 이런 구조의 술잔을 만들게 되었다고 하는데 알려진 바로는 조선시대의 유명한 거상 임상옥이 계영배를 늘 가까이 두고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는 도구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인간은 조금만 가지고 누리면 넘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 갖추었어도 겸손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추하게 보입니다. 인간은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수도 없고 자격도 없고 교만해서도 안 됩니다. 살면 살수록 느끼는 진리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건강, 믿음, 가정, 물질, 은사, 직분……. 모든 것은 전적인 은혜이기 때문에 더 감사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더 높이시고 풍성케 하십니다. 겸손하게 살았지만 지금보다 더 겸손 합시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은혜와 축복을 주십니다. 겸손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절대적으로 겸손 합시다. 백부장이 겸손의 사람이었던 것처럼 여러분 모두가 이 시대에 번동의 겸손한 백부장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순종의 사람입니다
본문 9-10절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백부장은 예수님께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권세 아래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서 여기서 권세란 것은 로마 황제의 권한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은 황제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국가 질서 체계를 지적한 것입니다. 군인으로서 황제로부터 권한의 일부를 위임받아 자기 수하에 백 명의 부하를 이끌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이 같은 명령체계와 개념은 너무도 분명한 것입니다. 백 명의 부하를 자기 뜻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최고 통수권자인 황제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국가 체계라는 인위적 차원에서의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의 명령과 복종의 관계를 예수님께 적용시킨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결국 백부장이 예수님을 인본주의적 통치자인 황제 이상의 존재로, 자연과 우주를 복종시킬 수 있는 인본주의적 최고의 통치자로서 인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현상을 비유로 눈에 안 보이는 세계의 영적 현상의 원리를 꿰뚫어 본 백부장의 신앙의 지혜는 매우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을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크게 칭찬하시고 ‘네 믿은 대로 될지니라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최고의 칭찬과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병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어떤 말씀이라도 순종하겠다고 고백했을 때 크고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백부장처럼 순종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부부 중에서 누가 가정의 재정을 관리할 것이냐의 문제로 갈등하는 가정이 늘어나고 있는 요즈음입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겠지요.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이 재정 문제에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라시기 때문일 겁니다. 따라서 현재 남편이 재정문제를 맡고 있다면 조금 부족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아내는 꾸준히 인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아내의 고백입니다. 하루는 남편이 이제부터는 자기가 집안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겠다면서 통장과 서류들을 다 가져 오라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과거에도 그렇게 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가정의 신용은 떨어지고 재정은 바닥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있었기에 이번에도 믿음으로 남편에게 순순히 순종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 동안 남편은 아무런 실수도 없이 가정의 재정을 잘 관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가지고 있던 통장을 모두 챙겨가지고 부엌에 있는 아내에게로 다시 왔습니다. 그리고는 “여보, 이제는 당신이 다시 살림을 맡아서 해봐요. 이거 아주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아서 내가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우리 하나님께서는 “순리를 따라 나아갈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시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해결 방법이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이처럼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은 부끄러운 굴종이 아닙니다. 아내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거룩한 방법입니다.
명령과 거역과 반항의 열매는 비참하고 파괴적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순종의 함량이 너무 떨어집니다. 때로는 불순종으로 일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순종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순종할 수 있습니다. 순종의 백부장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번동의 순종하는 백부장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백부장은 사랑과 겸손의 순종의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백부장처럼 삽시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100명의 몫을 감당합시다. 이 시대 그리고 번동의 믿음의 백부장이 바로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이 만한 믿음
마 8:5-13 / 배영진목사
오늘은 이만한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주님이 한 사람의 믿음을 굉장히 놀라면서 칭찬하십니다. 이만한 믿음! 이라고 할 때, 그걸 다른 말로는 대단한 믿음, 영어로는 great faith, 위대한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이렇게 놀라워하신 경우가 거의 없어요. 딱 두 번 있어요. 그런데 두 번 다 이방인입니다. 오늘 로마인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이만한 믿음, 내가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15장에 가나안 여인을 보고 여자야 네 믿음이 대단하다, 이렇게 칭찬하셨어요.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하죠. 두로 시돈지방인데 지난 주일 엘리야에게 마지막 음식 드렸던 사르밧과부, 그 동네여인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유대인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받은 경우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다. 믿음을 키운다, 이 영적문제는 대단히 개인적인 것이다. 그 사람 마음중심의 문제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나안여인의 간청을 한번 거절하셨는데 가나안 여인이 물러서지 않고 말합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 여기에 뭐라 했죠? 그것 맞습니다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나요?
왜 제가 이 두 사람의 믿음에 주목하는가 하면, 주님이 놀라워하신 믿음에 공통점이 있어요. 백부장의 믿음이나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보고, 네 믿음이 크다! 위대한 믿음이다 칭찬하셨거든요. 그리고 네 믿음대로 되리라. 이 두사람의 간청은 완전 응답을 받습니다. 백부장의 종이나 가나안여인의 딸이 고침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이상하리만치 열두제자들 믿음은 잘 안 자랐습니다.
주님이 열두제자들 데리고 다니실 때마다 이들의 믿음을 주로 뭐라고 하십니까? 어찌하여 믿음이 적으냐? 아직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느냐? 답답해 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문제는 유대인인가 이방인인가 문제가 아닙니다. 모태신앙인가? 나이먹은 후에 예수믿었는가? 이게 아닙니다. 교회다닌 햇수는 더욱 아닙니다. 오늘 로마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중에 이만한 믿음을 본적이 없다! 하셨으니, 우리가 지금 이만한 믿음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 방향으로 가보면 우리 믿음도 커질 수 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 갈 수 있다. 가보자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만한 믿음은 무슨 믿음인가? 두가지, 경외와 권세입니다. 경외는 이분의 존재가 얼마나 높으신 분인가를 알아서 황송해하는 자세입니다. 권세는 이분의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알아서 그 말씀을 붙잡는 자세입니다.
주님의 높으심을 알아요. 주님의 강하심을 알아요. 이것이 큰 믿음입니다.
첫째, 주를 경외하는 믿음을 키우자는 것입니다.
다같이 8절을 한번 읽어봅니다. 백부장이 주님앞에 뭐라고 말하는가를 보세요. 뭐가 없어요? 내가 자격이 없어요. 무슨 자격이 없다는 말일까요? 예수님 저분을 감히 내 집으로 모셔들일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집 지붕아래 주님을 감히 모실 수가 없다. 어떻게 주님이 내 집에 들어오실 수가 있어? 이것입니다. 이것이 경외심입니다. 여러분 이 백부장이 가진 느낌을 공유해보면 좋겠습니다. 이 백부장의 이 태도를 보시고 예수님을 놀라십니다. 이 정도로 나를 경외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는데? 이것입니다. 그것도 유대인도 아니고 모세오경도 모르는 이 로마인 백부장이? 어떻게 이런 믿음의 태도를 가질 수가 있었을까? 예수님은 이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개역성경은 백부장의 말을 좀더 멋지게 표현합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감당이 안된다 이거예요.
예수님이 우리 집에 들어오신다? 너무 좋긴 한데, 너무 황송하고 몸이 떨려요. 아냐 그건 안될 말이야! 이게 생각만 해도 감당이 안된다는 겁니다. 왜 그래요? 이미 백부장은 저 예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가를 그 마음에 깨달아버렸어요. 이게 동박박사 급입니다. 바벨론에서 별을 보는데 왕별이다 하고 4개월 광야여행을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왔다가 베들레헴에 도착해서 아기 예수님을 보고곧바로 경배하고 절을 하고 자기 가져온 귀한 것을 드리고 어쩔줄 몰라 합니다. 이 백부장의 경외심이 거의 구약선지자 이사야 급입니다. 이사야가 성전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보좌에 안으신 것을 봅니다. 주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데 이사야가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나는 망했네 내게 재앙이 왔어. 이걸 어떡하냐? 정신을 못차립니다. 여러분 이것이 경외감의 본질입니다. 주님이 내 앞에 서시면 마치 너무나 눈부시고 찬란한 빛 가운데 나의 모습이 너무 비천함을 깨달아요.
5월 아침에 우리 집에 강한 햇빛이 비추면 우리 집 거실과 소파에 얼마나 먼지가 많은지를 금방 압니다. 와 정말 겨울내내 이 먼지구석 소파에서 뒹굴었구나! 이 현타가 옵니다. 빛 가운데 딱 나가면 내가 얼마나 더러운 먼지인지 알아요.
문제는 이거예요. 어떻게 로마사람 백부장이 이 차원의 경외심을 알았는가 하는 겁니다. 로마사람 이방인, 언제 어떻게 예수님이 이렇게 높으신 분이심을 깨닫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도 동일한 기록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본문에는 백부장이 직접 주님께 나온 것이 아니라 유대인 장로들에게 부탁해요. 장로들이 예수님께 이 백부장의 종을 고쳐달라고 간곡히 청원했어요. 이 백부장은 유대인 회당까지 지어준 사람입니다. 백부장은 현직 로마장교인데 로마에서 이스라엘로 파견나왔다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조금씩 생긴 상태이고 호감을 갖고 하나님을 믿어보려 애쓰는 중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의 그때까지의 상태는 예수의 소문을 들은 정도입니다. 무슨 소문일까요? 모든 질병을 다 고치시는 분, 귀신을 쫒아내시는 분, 그런 소문을 듣고, 백부장은 마음에 믿음이 싹이 납니다. 아 저분이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아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구나! 누가복음에 의하면 백부장이, 저는 주님을 우리 집에 모실 자격조차 없습니다. 이 말이 장로들에게 전달한 워딩일 가능성이 높아요. 그렇다면 백부장의 이 말은 예수님 얼굴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에 대한 소문만 듣고 이같은 믿음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높으신 예수님을 내 집에 들어오신단 말인가? 나는 감당할 수 없어! 너무 떨리고 너무 황송해서 주님앞에 직접 서지도 못해요. 주님앞에 서기에 나 자신은 너무 미천하고 누추한 자가 아닌가 이 마음입니다.
스가랴 3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앞에 죄짓고 더러워진 채 남의 나라 포로가 되어 70년을 삽니다. 그 이스라엘의 대표로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앞에 서있습니다. 그런데 스가랴가 보니 대제사장이 냄새나고 더러운 옷을 입었어요. 본래 대제사장의 옷은 에봇이죠. 보석이 박힌 화려하고 아름다운 예복이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죄와 불순종으로 얼룩져 바벨론포로 70년간 남의 종살이를 합니다. 하나님앞에 이스라엘 모습은 다 찢어진 누더기와 같아서 그게 대제사장 이 입은 더러운 옷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의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라 하십니다. 그 머리에 정결한 면류관을 씌워주라 하십니다. 그 시간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앞에 느끼는 감정이 이것입니다. 주님 내 모습이 누추합니다. 너무나 황송합니다. 저 이것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여러분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신 이만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믿고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어요. 우리에게 이런 고백이 있나요? 나같이 누추한 인생안에 성령님이 들어오셨네요. 이런 황송함, 나의 누추함,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심을 내가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우리가 예배드리려고 하나님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더러운 옷을 입고옵니다. 그러면 높으신 주님이 내 누더기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십니다. 매번 예배때마다 이게 반복됩니다. 이것이 예수앞에 나올 때 흰옷을 입으며 밝고 빛난 내집에 길이 살겠네. 황송한 마음, 이게 경외심입니다. 오늘도 내 더러운 옷을 주님이 벗겨주시고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혀주십니다. 보혈로 내 죄를 씻으시고 내 예배를 받아주십니다. 주님 내게 자격이 없습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믿음, 이것이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이것이 이만한 믿음입니다.
둘째, 주의 말씀의 강력하심을 붙잡는 믿음입니다.
다시 8절을 다같이 읽어봅니다. 그저 뭐 하나만 간청합니까? 한마디 말씀입니다. 한마디만 해주시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말씀한마디면 내 종이 낫겠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의 전능하심, 강력하심을 확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저는 백부장이 어떻게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과 동급이라는 것을 깨달았을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이 창조주이시다. 이것은 부활이후 성령이 오시고 제자들이 요한복음쓸 때, 더 나중에 사도바울이 골로새서 1장에서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이런 믿음을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쳤던 믿음입니다. 그런데 로마장교가 이런 믿음, 주님 말씀 한마디면, 내 종이 즉시 나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정말 놀랍습니다. 누가복음 기록으로 말한다면백부장은 직접 주님 보지도 않은 상태로 이 놀라운 말을 한 것입니다. 말씀 한마디만 하시면 내 종이 나을 것을 믿습니다.
이 백부장의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똑같은 분, 창주주이시다. 저분 말씀에 엄청난 권세와 권능이 담겨있다, 말씀 한 마디면 모든 것이 그대로 된다, 이것입니다. 천지창조때 하나님이 첫째날 빛이 있으라 한마디 하십니다.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더라. 둘쨋날 하늘이 되라, 셋째날 땅이 되고 바다가 되라, 넷째날 해가 낮을 비추라. 달이 땅을 비추라! 그대로 되니라! 이게 뭡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말씀대로 모든 만물이 즉시 순종했습니다. 백부장이 지금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 한마디면 내 종 질병이 낫지않을 가능성이 있나? 없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진심으로 놀라서 하신 말씀이 10절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이 정도의 믿음을 내가 본적이 없다. 주님 진짜 감동받으신 것 맞습니다.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중에는 이만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런 기록이 없습니다. 열두 제자도 이런 믿음이 없습니다. 내일 본문 26절에 가보면, 제자들의 믿음은 이 백부장의 믿음에 갖다 대지도 못합니다. 주님이 풍랑이는 바다에서 주무시다가 깨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라 꾸짖었다고 했습니다. 영어로 calm down! 그때 바람과 바다가 복종해요. 예수님의 말 한마디는 바람과 바다가 복종하고, 귀신들도, 나오라! 한마디면 나옵니다. 죽어 무덤에 있는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면 나사로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 맞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마디에는 우주만물이 즉시 순종할만큼 엄청난 권세가 있는 줄 믿습니다. 아멘!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더라. 이 믿음이 복음서 공생애 3년동안 제자들에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서 온 백부장에게는 이 믿음이 있었습니다.
바람과 바다가 주님말씀에 복종하니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립니다. 뭐라고 했죠? 이분이 누군데? 바람과 바다가 복종하는가? 제자들은 주님이 누군지 잘 몰라요. 그래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어떻게 그리 믿음이 작냐? 너희 믿음이 너무 없다! 그런데 9절 보세요. 백부장은 한걸음 더 들어갑니다. 저는 이 말이 주님을 진심으로 놀라게 했다고 봅니다. 같이 9절을 읽습니다. 나도 상관이 있고 나도 부하가 있습니다. 내 상관이 오라! 명하면 내가 갑니다. 내가 부하들에게 가라! 명령하면 부하들이 즉시 갑니다. 이게 군사문화 상명하복입니다. 대한민국의 군대도 그렇지만 2천년전 로마제국의 군대는 이게 확실했습니다. 명령불이행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상관의 말에 불복종 있을 수 없습니다. 로마제국 황제가 명령한 것이 이행되지 않는다?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자신의 로마군대와 군사조직의 권위와 복종의 문제를, 예수님의 권세에 적용합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다.
그러니까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만한 믿음이라고 하신 것이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이 백부장을 보고 너무 놀라셨을 뿐 아니라 너무 기뻐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제 13절입니다. 주님이 한마디 하십니다.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각 종이 나았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 주님은 이만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오늘 원하십니다. 오늘 로마백부장이나 가나안여인은 오래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도 아닙니다. 3대 4대째 믿음의 족보를 자랑하는 신앙가정에서 자란 게 아닙니다. 그냥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주님앞에 왔고 부하의 병을 갖고와서 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백부장의 마음중심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생각해봤습니다. 오늘 내 마음중심에 백부장의 이만한 믿음이 싹이 났는가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첫째, 주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자라나고 있는가? 이 경외심을 키우면 내 일상이 달라집니다. 우리 예배가 달라집니다. 주님이 우리의 그 믿음에 놀라실 것입니다. 예배때마다 높으신 하나님앞에 나의 누추함을 고백하면, 내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십니다. 주님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제가 감당이 안됩니다. 황송함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한마디의 권세를 내가 고백합니다. 주님 말씀 한마디에 만물이 복종하는데 우리도 이 말씀 붙들고 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백부장의 믿음, 이만한 믿음입니다. 믿는 자에게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회복의 십자가를 질 때
마 8:5-13 / 이정익 목사
본문을 보면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가버나움은 베드로의 고향으로 군사 요충지입니다. 그래서 로마군 사단급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한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병졸 100여명을 인솔하는 지휘관으로 오늘로 말하면 대대장급입니다. 이 백부장이 하루는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와서 “내 하인 한명이 중풍으로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데 내 하인을 고쳐 주십시오.”하고 탄원을 하였습니다. 당시 하인은 파리 목숨과 같았습니다. 인격도 인권도 기대하기 어려운 대상이었습니다. 거기다 그 하인이 중풍에 걸려 누워있습니다. 회복이 불능입니다. 주인이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때 주인 백부장이 예수께 직접 쫒아와 “내 하인을 고쳐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좀처럼 없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장 가자, 내가 고쳐주마”하고 흔쾌하게 승낙했습니다. 보통 일이 아니니까 예수님도 마음에 감동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백부장이 “우리 집까지 가시는 것은 너무 죄송한 일이니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고쳐지리라 믿습니다”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또 감동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어지간하면 예수님을 모시고 가서 자기 집도 자랑하고 종이 많음도 과시하고 자기의 권세를 과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생하며 가실 것까지 없습니다,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낫을 줄 믿습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백부장의 말에는 두 가지 믿음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직접 가서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하고 안수하지 않아도 낫을 줄 믿는 믿음입니다. 오늘 산으로 기도원으로 안수 받으러 몰려다니는 신자들에게 아주 좋은 교훈을 주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말씀 속에 절대 능력이 있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직접 가지 않고 고치신 경우가 두 번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4장46절에 기록된 왕의 신하 아들을 고치신 경우이고 두 번째는 본문에 나와 있는 백부장의 경우입니다. 백부장은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고쳐질 줄 믿었습니다. 참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감동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놀랍게 여겨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10)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많이 천국에 갈 것”(11)이지만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12)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택함 받은 유대인들은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백부장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믿은 대로 되라”(13)고 보내셨는데 그 하인이 곧 나았다고 했습니다. 여기 본문이 말씀하는 의도가 몇 가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믿음 없음 고발”
이 본문의 의도는 먼저 된 유대인들의 믿음 없음을 고발하려는 말씀입니다. 즉 “이 이방인인 군인의 믿음이 얼마나 깊고 철저하고 투철 하냐, 그런데 왜 먼저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런 믿음 있는 사람이 없느냐“하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참 분노스러웠을 것입니다. 이웃집 아이는 늘 100점을 맞아 옵니다. 그런데 우리 집 아이는 늘 60점을 맞아옵니다. 그러고도 대견한 것처럼 시험지를 들고 오면서 큰 소리로 “나 60점이나 맞았다”고 떠들며 옵니다. 그때 어머니는 참 속이 상할 것입니다. 이웃집 애는 늘 100점을 맞아오는데 왜 우리 애는 60점만 맞아오는가 속상해서 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예수님 마음도 그랬을 것입니다. 저 이방인 군인도 저런 믿음이 있는데 왜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저런 믿음 있는 사람이 없는가 한탄스러웠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 그런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자손들에게 술을 마시지 말라는 교훈을 따라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왜 내 백성들은 내 말을 듣지 않느냐“(렘 35:14)고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향에, 벳새다에, 가버나움에 가셔서 전도했을 때 듣지 않고 배척을 하였습니다. 그때 경고하시기를 “이 모든 권능과 기적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눈물로 회개하였을 것”(마 11:20-24)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여기 두로와 시돈은 바알숭배 중심지로 예부터 이방문물의 중심을 이루던 곳입니다. 본문은 이 이방인도 저렇게 믿음이 좋은데 왜 내 백성들은 이렇게 무지하고 믿음도 없고 고집스러우냐는 말씀입니다.
“백부장의 전인적 믿음 보여줌”
이 백부장은 이방인이고 군인이고 백부장입니다. 당시로서는 얼마든지 거드름을 떨고 교만하고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군인이 전인적 인격과 신앙을 갖춘 사람으로 나옵니다. 이 사람이 예수께 찾아와 “내 종이 중풍 병에 걸려 누워있으니 고쳐 주소서”하고 청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 집으로 가자”고 하니까 “말씀만 하소서, 그러면 낫을 줄 믿습니다”하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감탄하십니다. 그때 감탄하신 내용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백부장의 모습에서 감탄하십니다. 여기 백부장은 자기의 하인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당시 하인은 주인의 재산입니다. 가치가 없으면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이 하인의 병을 위해서 예수께 찾아와서 고쳐 달라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감동받을 일입니다. 또 백부장의 믿음에서 감탄하십니다.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내 종이 나을 줄 믿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니까 감탄을 받으신 것입니다. 또 백부장의 겸손한 모습에서 감탄을 받으십니다. 지배자가 한낱 하인의 건강을 위해서 예수께 찾아와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다고 다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일은 종합적 인격 즉 전인적 인격의 신앙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백부장은 진정으로 양질의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이 백부장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믿는 사람들 중에도 상당한 이기주의자들이 많습니다. 인격이 미성숙한 신앙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도 자기 유익을, 자존심을, 체면을 따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세계에도 있을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문제들 하나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나누이고 찢기고 반목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마태가 여기서 이 백부장의 모습을 장황하게 열거하고 있는 이유는 오늘 현대인들에게 전인적인 신앙인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 싶어서 기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 백부장은 믿음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당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전인적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
이 일은 단순한 인격이나 믿음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십자가를 지는 용기의 삶이 필요함을 메시지로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매사 불화하고 갈등하고 다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불화와 갈등과 다툼이 해결되는 곳에 가 보면 누군가 용기 있게 십자가를 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하인 중풍병자가 마침내 고침을 받게 됩니다. 그 하인 중풍병자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중풍병자 하인이 고침 받은 것은 순전히 주인 백부장의 믿음과 용기와 수고 때문입니다. 이런 수고와 용기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는 곳에 이런 기적이 일어나고 화해가 이루어지며 회복이 일어납니다. 여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오늘 이 시대의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거기에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신앙의 삶은 회복의 삶입니다. 예수께서 가신 곳 마다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가정이 회복되었습니다. 몸이 회복되었습니다. 영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삶이 회복되었습니다. 목마른 사람들이 해갈하게 되었습니다. 눈먼 자들이 시력을 회복하였습니다. 앉은뱅이들이 회복되어 일어났습니다. 멸망 받을 사람들이 천국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두 회복의 역사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회복의 사역을 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회복되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이 세상은 다 어그러지고 뒤틀리고 찢어지고 불화되고 있습니다. 가정들이 다 뒤틀리고 찢어지고 있습니다. 관계들이, 신앙들이, 감정들이 다 뒤틀리고 찢어지고 상해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 한 우리의 삶에 천국도 조화도 행복도 회복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화해자로 회복자로 나서라고 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늘 이 시대의 화해자이고 회복 자들입니다. 그 일을 하려면 거기에 십자가를 지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백부장처럼 자신이 직접 예수를 찾아가는 용기와 노력과 수고와 진지한 마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십자가는 가장 어려운 짐입니다. 십자가는 용기가 있어야 질 수 있고 수고가 있어야 질 수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 이 십자가가 주어진다면 주저하지 않고 용기 있게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내 주변에서 회복이 일어나고 화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이런 십자가가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십자가를 회피하면 기회를 잃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내가 회피한다고 섭리를 포기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다른 사람이 지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영광도 그 사람에게 주어지게 하십니다. 우리는 내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용기 있게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의가 이루어져서 그 시대를 향한 메시지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백부장이 예수께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그 종은 영원히 고침 받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 백부장이 예수께 찾아가는 수고 때문에 고침을 받고 그 하인은 천국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백부장이 십자가를 짐으로 한 사람의 인격이 회복되고 삶이 회복되고 영혼이 회복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용기 있는 사람이 지는 것입니다.
지난 아프칸 사건 때 20여명이 인질로 잡혔습니다. 온 나라가 걱정하고 비난하고 왜 그곳에 갔느냐 하고 난리를 떨었습니다. 그때 기독교 지도자들 모여 의논하면서 “기독교가 무너진다”며 우려하고 걱정하며 방안을 강구하였습니다. 그 때 우리 중 누군가가 가서 대신 인질로 잡히고 저들을 풀려나게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자 하고 말했습니다. 참 좋은 방안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가자고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러면 누가 가서 인질로 잡혀 있을 것입니까. 제안은 좋았는데 누가 그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그런데 놀란 것은 서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분위기에 나 자신도 떠밀려 가야할 사람으로 인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면서 속마음으로 “내가 가야 한다면 가야지“ 하고 다짐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나 자신이라도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가서 십자가를 지면 많은 사람들이 풀려난다면 갈 수 밖에 없지 않느냐 하고 자신에게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물어 보았습니다. “내가 가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랬더니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더니 하는 말이 “왜 하필 당신이냐” 고 물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이렇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큰 십자가는 물론이고 오늘은 작은 십자가도 서로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자기의 부모 모시는 일도 하기 싫어합니다. 자식이 몇이 있는데도 서로 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노부모들이 거리를 헤매다 죽거나 노인 요양시설로 보내어지거나 노숙자로 살아가고 있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교회건축도 십자가를 지는 일일 수 있습니다. 당장 헌금해야 하고 고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슬그머니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는 동안 오늘은 그렇게 좋던 것, 중요하던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덜 중요한 것 때문에 이 난리를 떨고 있고 돈 몇 푼 때문에 자기가 다니는 직장의 건물을 부수고 불 지르고 자기를 낳은 부모를 모른 체 내다 버리고 형제간에 돈 때문에 원수가 되고 아이들은 어른을 구별하지 못하고 버릇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누구도 이 십자가를 지려고 안합니다. 그래서 오늘 가정들이, 관계들이, 도리가 없어지고 온갖 불화와 갈등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엊그제 저는 어느 가정 때문에 한참동안 마음에 천국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62세 된 아버지가 간암 말기로 빨리 간을 이식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한 지경에 있는 분이 있습니다. 가족으로는 부인과 두 아들 그리고 며느리 하나가 있습니다. 그중 누군가가 간을 내 놓아야 아버지가 소생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 내 간을 내 놓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누가 내 놓아야 하겠습니까. 그런 경우가 발생하면 오늘은 다 회피합니다. 서로 안하려고 합니다. 한 아들이 용기 있게 하려고 하면 며느리가 한사코 반대합니다. 어떤 며느리는 간을 떼어주려고 하자 차라리 이혼하고 하라고 막무가내로 반대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때 누가 십자가를 져야하겠습니까. 누가 내 간을 떼서 아버지에게 주어야 합니까. 그 일은 어쩌면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이런 경우는 서로 회피합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의 생명은 자꾸만 꺼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죽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죽고 난 다음에 그 가정은 산산이 부서지게 됩니다.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참 건강한 가정이었습니다. 지난주 새벽기도 때에 그 부인 권사가 찾아와 어쩌면 좋으냐고 와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난주일 예배드리고 온 가족이 모여서 의논하던 중 한바탕 싸워 난리를 피웠다고 합니다. 왜 싸움이 일어났는가 하면 서로 자기의 간을 떼어 내겠다고 싸운 것입니다. 부인은 내가 부인이니까 내가 해야 한다고 하고 큰 아들은 내가 장남인데 내가 해야 한다고 나섰고 작은 아들은 자기도 할 권리가 있다고 했고 며느리는 자기 남편이 해야 한다고 서로 한바탕 싸움이 일어나 난리를 피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부인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목회하면서 이런 일들만 있다면 얼마나 재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 일은 하나님이 무엇인가 기적을 주시려고 이러시는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이 가정은 완전히 회복된 가정입니다. 아주 건강한 가정입니다. 생각해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 같지만 오늘 이 시대는 이 일이 가장 어려운 시대입니다. 오늘은 서로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백부장에게는 하인이 병을 고친다고 해도 아무 이익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앞으로 진급하는데, 출세하는데 아무런 유익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예수께 찾아가 하인을 고쳐달라고 애원을 해서 고침 받게 해 주었습니다. 이 본문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상당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뜻이 상실된 시대입니다. 진정한 헌신과 수고와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기적이 없는 것입니다. 있다면 원망과 불평만 있는 세상입니다. 오늘 이런 일을 회복하려면 누군가 십자가를 질 때만 가능합니다. 내가 조그만 십자가를 지면 모든 것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악화된 관계도 내가 십자가를 지는 용기만 있으면 다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모두가 회복의 십자가를 질 때입니다.
감동을 주는 인생
마 8:5-10 / 김근중 목사
여러분은 어떤 인생이 성공 인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이 열망하는 권력과 재력과 지력을 많이 가진 인생이 성공 인생일까요? 그래서 유력한 정객이 되고, 재벌이 되고, 석학이 된 사람이 성공 인생일까요?... 누가 제게 '성공 인생이란 어떤 인생을 가리키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성공 인생은 감동을 주는 인생'이라고... 이 땅에 한평생 살면서 남에게 감동을 끼칠 수 있는 그런 인생이라면 그는 생을 성공적으로 산 사람이라고 단언해도 좋다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난 한 주간의 삶을 떠올리면서 이 물음에 한번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그 누군가를 감동시킨 적이 있으십니까? 누군가가 여러분으로 인해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느냐 말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정말 후회않을 뿌듯한 삶을 사신 겁니다. 성공적 인생을 살아가고 계신 겁니다.
그러나 만약 지나온 한 주간, 한 달, 1년, 지나온 한 평생 동안 나로 인해 감동한 사람이 없다면 그 삶은 재고해 보아야할 삶입니다. 감동은커녕 짜증만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실망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런 인생은 주님이 가룟 유다에게 한 말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생'인 것입니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은 감동케 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물질이 넉넉해서나 보이는 것이 다채로워서 세상이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물론 감동은 인위적이거나 작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게 바로 감동이 선동과 다른 점입니다. 그러기에 타인을 감동시켜야겠다는 생각은 더러운 겁니다. 감동은 강요로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감동은 인위적인 향수처럼 풍기는 게 아니라 자연적인 향기처럼 그렇게 우러나는 겁니다. 그것은 두 사람의 가슴이 열려 공감의 아름다움이 일어날 때 피어나는 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감동이 있는 인생이 바로 복된 인생인 것입니다.
나로 인하여 누군가가 감동한다고 하는 것, 참으로 기분 좋은 일 아닙니까? 목회의 기쁨도 바로 이런 겁니다. 많은 교우들 속에서 감동을 주는 교우들을 만납니다. 그 기쁨, 그 즐거움을 무엇으로 맛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참 묘해서 냉수 한 그릇으로 감동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금덩어리로도 감동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정말 감동은 아무나 끼칠 수도 없고 아무나 경험할 수도 없는 하늘의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동을 주는 것이 어렵고 감동을 받는 것 또한 어려운 겁니다.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시대는 점점 감동은 없고 자극만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편리하고 화려하고 넉넉하지만 감동을 맛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좀 불편하고 수수하고 가난했던 옛시절에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세대가 '집으로'라는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인생들이 감동을 잃어버리고 선동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고도, 유행도 사실은 모두가 다 선동입니다. 그런 선동에 휩쓸려 살다보니 자기를 잃고 점점 더 삭막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이 바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감동이 있어야 하고 감동을 서로 나누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는 우리는 한 '감동 인생'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로 가버나움에 주둔하던 로마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가버나움을 찾은 주님 앞에 나아가 자기 하인의 병낫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제 하인이 중풍병으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좀 고쳐주시기를 청하옵니다...' 그의 간청에 주님이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대답하자 그는 '자기 집에 주님 모시기를 감당할 수 없사오니 다만 여기서 말씀만으로 자기 종을 낫게해 달라'는 믿음을 피력합니다.
바로 여기서 주님은 요즘 말로 하면 감동을 먹습니다. 10절에 보면 주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건 깜짝 놀랐다는 말이요 신기해 하셨다는 말이요 감동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건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했노라...' 이것은 주님의 처녀 경험이라는 말입니다. 전에 이런 믿음의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고 이런 놀라운 감동을 맛본 적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백부장은 주님을 깜짝 놀라게 한 것입니다.
주님은 평소에 두 가지를 놀라워했습니다. 하나는 당연히 믿음을 가져야 할 선민 유대인들이 믿음을 갖지 않는 것에 놀랐고, 또 하나는 믿음을 갖기 어려운 이방인들이 오히려 믿음을 갖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이방인이면서도 주님을 향해 갖는 믿음이 너무도 엄청났던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놀랄 수밖에요, 감동을 받을 수 밖에요...
이 사람은 두 가지 감동을 주는 인생이었습니다. 첫째는 사람 곧 이웃에게 주는 감동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생략되고 있습니다만은 병행 본문인 눅7장에 보면 유대 장로들이 발벗고 나서서 이 백부장의 청을 주님께서 들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이건 매우 이례적이고도 드문 일입니다. 어디 유대인 그것도 장로들이 경멸하는 이방인을 두둔하고 높입니까? 그것은 백부장이 저들을 사랑했고 존중했고 배려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회당을 지어주었던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해 유대 장로들이 감동을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저가 주님을 감동시켰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의외로 손쉽게 감동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속아서 감동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감동시킬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을 감동케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요 또 그렇기에 그런 삶을 산다면 그는 진짜 성공 인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이 주님을 감동시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감동시킨 것일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것은 오로지 당신을 향한 인간의 믿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정말 오늘 본문 10절 말씀이 그 사실을 증거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 어디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바로 그 백부장의 믿음이 주님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관계에서 믿음만큼 감동을 주는 게 없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믿어준다는 것만큼 감동스러운 일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감동은 물질의 차원이 아닙니다. 그건 믿음의 차원입니다. 신뢰하고 믿어주는 거기에 감동이 있는 겁니다. 모두가 다 나를 안믿어줘도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감동 있는 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럼 주님을 감동시킨 이 백부장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백부장은 자기 하인이 병든 것을 안타까와하며 주님께 그 하인의 병낫기를 간구합니다. 이것은 그가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자신의 병낫기를 위해 간청하지 않습니다. 자기 가족의 병낫기를 위해 간청하지 않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당시 물건처럼 취급받던 비천한 종을 위해 주님을 찾아와 무릎을 꿇습니다. 무가치한 것을 위해 자기의 체면과 위신을 다 접습니다. 여기에 진정 타인을 사랑하는 애틋한 정이 있습니다. 하잘 것 없는 것을 향한 깊은 연민과 사랑의 정이 그에게 있었다는 말입니다.
중풍병이 어떤 병입니까?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풍병은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치료하기 어려운 난치병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쉽게 그 하인을 포기하는 게 현명했습니다. 종이 일을 해야지 밥만 축내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면 그건 아무 쓸모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회복한다고 해야 이젠 일꾼 노릇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긍휼히 여기는 백부장의 이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것을 향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저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주님을 감동케 한 것은 주님이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시자 그가 나타낸 반응입니다. '주님, 주님을 어찌 저희 집에 모실 수 있겠습니까? 감히 주님을 맞을만한 처지가 아니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그냥 여기서 말씀만 한 마디 해 주옵소서. 그러면 제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저도 상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또 제 밑의 부하들도 제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데 그러니 굳이 수고롭게 누추한 저희 집까지 오실 필요없이 여기서 한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제 하인의 병이 낫겠나이다...'
만약 제가 주님이었다면 참 헷갈렸을 것 같습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어떻게 생각하면 '장난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버나움에 저만큼 유력한 자가 또 어디 있을까요? 로마 백부장이면 그 사는 정도가 꽤 부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맞을 수 없을 정도로 누추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하지만 본문과 누가복음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사람의 말이 결코 가식적이거나 즉흥적인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정말 주님을 너무도 크게 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그분 앞에 자기가 너무도 작게 여겨지는 겁니다. '그대 앞에만 서면 왜 나는 작아지는가'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정말 백부장은 주님 앞에서 그런 자신을 느낀 겁니다. 자기가 세상에서야 좀 산다 싶겠지만 주님은 너무도 크신 분으로, 너무도 귀한 분으로 자기 집에 맞아들이기에는 송구스럽다는 얘기겠습니다.
이 마음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사람이 좀 살면 과시적이기 쉽지 않습니까? 이참에 뭔가를 좀 보여주려고 굳이 데려다가 은근히 과시하고픈 마음도 없지 않은 게 인간심사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말 더없이 아름답고 순수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정말 백부장의 집이 검소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유대인들을 위한 회당을 지어주었다고 했는데 그 건축비를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허리띠를 졸라맸을 수도 있는 겁니다. 아무튼 이렇게 생각하나 저렇게 생각하나 그의 믿음은 놀라운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칭찬하신 겁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신앙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자기만 복받고 살겠다고 열렬히 하나님을 찾는 자입니까? 신앙인이란 적어도 이웃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에게 어울리는 말입니다. 보면 평생 자기 문제만을 붙들고 씨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단 한번도 남의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러 나오지 않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렇게 점점 이기화되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변질되어가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자기가 병들고, 자기가 어려움만을 위해서 기도할 뿐 남의 아픔과 고민을 위해 함께 마음을 모을 줄을 모릅니다. 바삐 살아서만은 아닙니다. 사랑이 식어가고 믿음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믿음과 사랑으로는 주님도 그리고 이웃도 감동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평안의 나날을 주시는 것은 불안 속에 사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하라고 주신 은총이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화목을 주시는 것은 어려움 당하는 이웃을 위해 마음을 나누며 살라고 주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그런 수고가 있습니까? 오늘 이웃 초청 생명열매 맺기를 위해 여러분은 얼마나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살피고, 찾아가셨습니까? 나만 예수 믿고 나만 예수 안에서 맛보는 은총을 누리면 되는 겁니까? 만약 누군가를 위해 이 백부장처럼 간절함으로 주께 나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런 신앙을 부끄러워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아주 약하고 여린 철부지 신앙의 모습일 뿐입니다. 이웃을 위해 주님 앞에 나가 저를 위해 간구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갈 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감동을 주는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이 감동한 그의 믿음은 약한 이웃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귀한 것을 드릴 줄 아는 믿음이었습니다. 눅7:4-5절에 보면 유대 장로들이 주님께 백부장의 청을 들어줄 것을 요청할 때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의 청을 들어주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백부장이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좀 비판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식민지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한 하나의 사탕발림일 수도 있지 않느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도였다면 유대 장로들이 감동을 먹고 주님 앞에 저를 추천하러 왔겠습니까? 유대 장로들이 주님께 그를 위해 청하는 것이 쉽지 않듯이 그 또한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짓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것은 식민지의 얼을 키워주는 것으로 로마의 얼을 새겨넣어야할 로마의 입장에서는 탐탁한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리고 회당을 짓는다는 건 뭐니뭐니해도 금전적 뒷받침이 따르는 문제입니다. 그는 분명 회당 건축을 위해 많은 것을 드렸을 겁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100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백부장이라는 직위는 많은 돈을 만지는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가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기에 합당치 않다 한 것은 실제로 그가 근검절약적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식민지 백성을 위해서 회당을 지어준 것은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 이 백부장의 처신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께 드림이 아까운 사람은 하나님을 감동시키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 이 봉헌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 집사들 가운데도 교회 건축에 부담을 갖고 안나오는 분들이 몇 됩니다. 정말 제직은 아무나 세워서는 안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단호한 말씀은 재물이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세상에 집착하게 하고 주님을 등지게 하는가를 단적으로 짚어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백부장의 믿음은 겸손한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이 '가서 고쳐 주겠다'고 했을 때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다"는 백부장의 고사에 대해 어거스틴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맞이할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동안에 그는 그리스도를 그의 마음에 맞이할 자격을 갖춘 것이다..."
주님을 높이고 자신의 무가치성을 분명히 자각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신앙과 겸손은 나눌 수가 없는 겁니다. 믿음 좋다면서 겸손하지 못하다면 그건 가짜입니다.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었기에 백부장의 신앙은 상승하고 있었던 겁니다. 비록 그의 집은 누추하지도 않았고 초라하지도 않았겠지만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자각할 때 자기 집이 주님을 모시기에는 누추하고 초라하다는 그의 판단은 겸손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정확성인 것입니다.
백부장은 우리가 겸손하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할 수 없음을 교훈합니다. 겸손으로 자신이 작아질수록 하나님은 커지고, 교만으로 자신이 커질수록 하나님은 작아지십니다. 하나님이 왜 모세를 들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습니까? 그건 그의 가장 큰 자질이 겸손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보다 그의 겸손이 뛰어났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그런 모세가 평생에 딱 두 번 혈기를 냅니다. 한번은 애굽의 왕자로 있던 젊은 시절에, 그리고 또 한번은 물을 달라고 투정하는 백성들 앞에서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친 것입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께서 달가와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지녀야할 겸손은 얼마나 완벽한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우리같이 거듭나지 못한 성정으로 혈기를 부린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마11:29절에 보면 주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이게 중요한 겁니다. 아무리 남에게 잘하고 하나님께 헌신적이어도 교만하면 그 모든 것은 없느니만 못한 겁니다. 주님을 감동케 한 이 믿음의 사람은 바로 겸손으로 무장한 사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힘좋은 사람, 능력있고, 재주 좋고, 돈 많은 사람이 흔드는 게 아니라 바로 겸손한 사람이 흔드는 겁니다.
그리고 이 백부장의 믿음은 '무엇보다 말씀을 붙드는 믿음'이었습니다. 백부장이 '여기서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할 때 주님이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 하자 그는 그대로 그 말씀을 믿었고 그 하인은 나음을 얻습니다. 말씀을 믿으면 믿는대로 될 것입니다. 크게 믿으면 크게 될 것이고, 정확하게 믿으면 정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하면 의심대로 될 것이고, 작게 믿으면 작은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주님이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했는데 그리 되지 않았다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있는 것입니까?...
무엇보다 말씀을 붙드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말씀을 여러분의 감정과 지식과 체험보다 앞세우시기 바랍니다. 감정과 체험은 내 것이지만 말씀은 하나님의 것이고 또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 이방 백부장이 바로 주님을 감동시켰고 그로 인하여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백부장은 결코 믿음을 갖기에 좋은 위치나 조건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감동케 했습니다. 남을 돌아볼 줄 아는 긍휼의 사람이었고, 겸손했고, 하나님께 부요했고, 말씀을 붙들었던 그였기에 그는 감동을 끼치는 성공 인생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이 이와 같이 감동을 주는 인생이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감동케 하고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긍휼과 헌신과 겸손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런 인생을 주님은 아름답다 하실 것이고 잘 살았다 하실 것이고 승리했다 하실 것입니다. '내가 그 어디에서도 이런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노라...' 참된 믿음으로 감동을 주는 인생으로 살아가시는 우리 모든 권속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됩시다
마 8:5-10 / 최창훈목사
지난 한 주간 동안 그 누군가를 감동시킨 적이 있으십니까?
만일 누군가가 여러분으로 인해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면 정말 후회 않을 뿌듯한 삶을 사신 것입니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은 감동케 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물질이 넉넉해서나 보이는 것이 다채로워서 세상이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감동은 인위적인 향수처럼 풍기는 게 아니라 자연적인 향기처럼 그렇게 우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가슴이 열려 공감의 아름다움이 일어날 때 피어나는 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감동이 있는 인생이 바로 복된 인생인 것입니다.
목회의 기쁨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 속에서 감동을 주는 교우들을 만납니다.
사람이란 참 묘해서 냉수 한 그릇으로도 감동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금덩어리로도 감동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감동은 아무나 끼칠 수도 없고, 아무나 경험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동을 주는 것이 어렵고 감동을 받는 것 또한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시대는 점점 감동은 없고 자극만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편리하고 화려하고 넉넉하지만 감동을 맛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좀 불편하고 순수하고 가난했던 옛시절에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는 "감동을 받게 하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로 가버나움에 주둔하던 로마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가버나움을 찾은 주님 앞에 나아가 "제 하인이 중풍병으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고쳐달라"고 병낫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그의 간청에 주님이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대답하자 그는 "자기 집에 주님 모시기를 감당할 수 없사오니 다만 여기서 말씀만으로 자기 종을 낫게해 달라"는 믿음을 피력합니다.
바로 여기서 주님은 요즘 말로 하면 감동을 먹었습니다.
10절에 보면 주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건 깜짝 놀랐다는 말이요, 신기해 하셨다는 말이요, 감동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건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지금까지 이런 믿음의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고 이런 놀라운 감동을 맛본 적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백부장은 주님을 깜짝 놀라게 한 것입니다.
주님은 평소에 두 가지를 놀라워했습니다.
하나는, 당연히 믿음을 가져야 할 선민 유대인들이 믿음을 갖지 않는 것에 놀랐고
다른 하나는, 믿음을 갖기 어려운 이방인들이 오히려 믿음을 갖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이방인이면서도 주님을 향해 갖는 믿음이 너무도 엄청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놀랄 수밖에 없었고,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됩시다"라는 제목으로 본문에서 소개하는 백부장이 주님에게 어떤 감동을 주었는가를 조명하여 하나님 앞에서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은혜 받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사람 곧 이웃에게 주는 감동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생략되고 있습니다만은 눅7장을 보면 유대 장로들이 발벗고 나서서 이 백부장의 청을 주님께서 들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왜냐하면 백부장이 저들을 사랑했고, 존중했고, 배려했으며 저들의 회당을 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인해 유대 장로들이 감동을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백부장이 주님을 감동시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감동시킨 것일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믿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10절을 보면 "내가 그 어디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백부장의 믿음이 주님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관계에서 믿음만큼 감동을 주는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뢰하고 믿어주는 거기에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다 나를 안 믿어 줘도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감동 있는 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주님을 감동시킨 이 백부장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1)백부장은 자기 하인이 병든 것을 안타까와하며 주님께 그 하인의 병낫기를 간구합니다.
이것은 그가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자신의 병낫기를 위해 간청하지 않습니다.
자기 가족의 병낫기를 위해 간청하지 않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당시 물건처럼 취급받던 비천한 종을 위해 주님을 찾아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무가치한 것을 위해 자기의 체면과 위신을 다 접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잘 것 없는 것을 향한 깊은 연민과 사랑의 정이 그에게 있었다는 말입니다.
중풍병이 어떤 병입니까?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풍병은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치료하기 어려운 난치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쉽게 그 하인을 포기하는 것이 현명했습니다. 종이 일을 해야지 밥만 축내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면 그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복한다고 해야 이젠 일꾼 노릇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긍휼히 여기는 백부장의 이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것을 향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저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2)주님을 감동케 한 것은 주님이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시자 그가 나타낸 반응입니다.
백부장은 말하기를 "주님, 주님을 어찌 저희 집에 모실 수 있겠습니까? 감히 주님을 맞을만한 처지가 아니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그냥 여기서 말씀만 한 마디 해 주옵소서. 그러면 제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저도 상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또 제 밑의 부하들도 제 명령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니 굳이 수고롭게 누추한 저희 집까지 오실 필요없이 여기서 한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제 하인의 병이 낫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만약 제가 주님이었다면 참 헷갈렸을 것 같습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어떻게 생각하면 "장난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시 가버나움에 저만큼 유력한 자가 또 어디 있을까요?
로마 백부장이면 그 사는 정도가 꽤 부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을 맞을 수 없을 정도로 누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과 누가복음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사람의 말이 결코 가식적이거나 즉흥적인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백부장은 정말 주님을 너무도 크게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자기가 너무도 작게 여겨지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세상에서야 좀 산다 싶겠지만 주님은 너무도 크신 분으로, 너무도 귀한 분으로, 자기 집에 맞아들이기에는 송구스럽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사람이 좀 살면 과시적이기 쉽습니다.
이참에 뭔가를 좀 보여주려고 굳이 데려다가 은근히 과시하고픈 마음도 없지 않은 것이 인간심사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말 더없이 아름답고 순수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3)또한 주님이 감동한 그의 믿음은 약한 이웃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귀한 것을 드릴 줄 아는 믿음이었습니다.
눅7:4-5절에 보면 유대 장로들이 주님께 백부장의 청을 들어줄 것을 요청할 때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의 청을 들어주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백부장이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좀 비판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식민지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한 하나의 사탕발림일 수도 있지 않느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도였다면 유대 장로들이 감동을 먹고 주님 앞에 저를 추천하러 왔겠습니까?
유대 장로들이 주님께 그를 위해 청하는 것이 쉽지 않듯이 그 또한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짓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식민지의 얼을 키워주는 것으로 로마의 얼을 새겨 넣어야 할 로마의 입장에서는 탐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당을 짓는다는 건 뭐니뭐니해도 금전적 뒷받침이 따르는 문제입니다.
그는 분명 회당 건축을 위해 많은 것을 드렸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100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백부장이라는 직위는 많은 돈을 만지는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가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기에 합당치 않다 한 것은 실제로 그가 근검절약적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오늘 이 백부장의 처신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께 드림이 아까운 사람은 하나님을 감동시키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2. 이 백부장의 믿음은 겸손한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이 "가서 고쳐 주겠다"고 했을 때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다"는 백부장의 말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맞이할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동안에 그는 그리스도를 그의 마음에 맞이할 자격을 갖춘 것이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높이고 자신의 무가치성을 분명히 자각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신앙과 겸손은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좋다면서 겸손하지 못하다면 그건 가짜입니다.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었기에 백부장의 신앙은 상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그의 집은 누추하지도 않았고 초라하지도 않았겠지만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인식할 때 자기 집이 주님을 모시기에는 누추하고 초라하다는 그의 판단은 겸손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정확성인 것입니다.
백부장은 우리가 겸손하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할 수 없음을 교훈합니다.
겸손으로 자신이 작아질수록 하나님은 커지고, 교만으로 자신이 커질수록 하나님은 작아지십니다.
하나님이 왜 모세를 들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습니까?
그건 그의 가장 큰 자질이 겸손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보다 그의 겸손이 뛰어났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그런 모세가 평생에 딱 두 번 혈기를 냅니다.
한번은 애굽의 왕자로 있던 젊은 시절에, 그리고 또 한번은 물을 달라고 투정하는 백성들 앞에서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친 것입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께서 달가와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지녀야할 겸손은 얼마나 완벽한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우리같이 거듭나지 못한 성정으로 혈기를 부린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마11:29절에 보면 주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남에게 잘하고 하나님께 헌신적이어도 교만하면 그 모든 것은 없느니만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감동케 한 이 믿음의 사람은 바로 겸손으로 무장한 사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힘좋은 사람, 능력있고, 재주 좋고, 돈 많은 사람이 흔드는 게 아니라 바로 겸손한 사람이 흔드는 것입니다.
3. 이 백부장의 믿음은 무엇보다 말씀을 붙드는 믿음이었습니다.
백부장이 "여기서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할 때 주님이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라고 하자 그는 그대로 그 말씀을 믿었고 그 하인은 나음을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믿으면 믿는 대로 될 것입니다.
크게 믿으면 크게 될 것이고, 정확하게 믿으면 정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하면 의심대로 될 것이고, 작게 믿으면 작은 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말씀을 붙드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말씀을 여러분의 감정과 지식과 체험보다 앞세우시기 바랍니다.
감정과 체험은 내 것이지만 말씀은 하나님의 것이고 또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 이방 백부장이 바로 주님을 감동시켰고 그로 인하여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백부장은 이방인으로서 결코 믿음을 갖기에 좋은 위치나 조건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감동케 했습니다.
남을 돌아볼 줄 아는 긍휼의 사람이었고, 겸손했고, 하나님께 부요했고, 말씀을 붙들었던 그였기에 그는 감동을 끼치는 성공 인생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와 같이 이웃을 감동케 하고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긍휼과 헌신과 겸손의 사람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이 칭찬한 믿음
마 8:5-12 / 민경설목사
기독교 작가로 유명한 죤 레이밀즈가 쓴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믿음은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삶을 지탱해주며 천국으로 이끌어주며 우리를 하나님 앞에 활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믿음은 하나님이 역사하는 길을 내어주는 것이다. 우리 힘으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믿음이 커져야 은혜도 커집니다. 이 믿음은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다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구원받은 자에게 주시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이 땅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누리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크게 책망하고 야단치신 것은 믿음이 없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믿는 자라도 시험들고 죄짓고 타락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막4:40) 믿음은 생명입니다. 믿음을 크게 자라게 해서 믿은 만큼 승리하고 기적이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성경은 믿음을 강조합니다. 잘 하려고 하지 말고 잘 믿으려고 하시기 바랍니다. 잘 믿으려고 하면 다 잘할 수 있습니다. 못 배운 사람도, 무능한 사람도 믿음이 있는 자는 소망이 있습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백부장은 주님이 칭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상적인 힘이 있으면 교만할 수 있는데 백부장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인인데 유대인을 잘 보살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고문을 담당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제일 먼저 증언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하인이 죽게 되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마8:5)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마8:13) 살아있는 믿음은 즉시로 역사가 일어납니다. 백부장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이기에 예수님이 칭찬을 하십니까?
첫 번째, 백부장은 예수님 앞에 우주를 깨뜨릴만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8:5-9) 백부장의 신앙은 보이는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따라 환경이 움직인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백부장은 하인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하인이 낫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 속에 주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주의 질서가 주님께 순종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환경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요12:50) 말씀이 명령으로 믿어질 때 환경은 열립니다.
두 번째, 백부장은 예수님 앞에 자신을 깨뜨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나를 깨뜨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마8:6) 백부장은 예수님에게 주여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주님이 되어야 위치와 환경에 상관없이 예수님께 무릎을 꿇게 됩니다.
세 번째, 백부장은 예수님 앞에 신분을 깨뜨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8:5-8) 당시 하인은 물건 취급받는 존재였습니다.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든지 사고 팔고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자기의 하인을 위해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백부장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이 백부장에게 있었기에 하인을 위해 무릎을 꿇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우리는 멸망될 자였으나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하나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성령이 오셔서 그 사랑이 내 안에 있기를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VIP(2) 한 백부장
마 8:5-13 / 이동원 목사
한 저널리스트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가르쳐 3무의 시대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무관심의 시대, 둘째는 무책임의 시대, 셋째는 무감동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 빼놓고 관심가질 일도 없고, 책임질 일도 없고, 감동 받을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극도의 이기적이고 냉소적인 시대를 me-generation(자기 중심 세대)의 시대라고 일컬은 사회학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대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가장 보편적인 영어 표현이 있다면 “I do not care"라고 말합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난 몰라’입니다.우리 부모들이 특히 사춘기에 들어선 자녀들에게 대화를 시도하여 말 걸기를 하면 자녀들로부터 유일하게 되돌아오는 답변이 무엇입니까? ‘몰라요’-아닙니까?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이 소위 파괴와 해체로 상징되는 오늘의 포스트 모던 시대의 가장 전형적인 현대인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여러분의 자녀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대인일 뿐입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는 이 세 가지 시대의 특성 중에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이 무감동입니다. 남이 나에게 관심을 안 가져 주어도 어느 정도 견디겠고, 내 인생을 누군가가 책임져 달라고 요청할 생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감동받을 일 없이 소위 무료와 권태로만 몇 주를 지내야 한다면 저는 정말이지 못 견딜 것 같습니다. 제가 인생을 사는 아니 목회를 감당하는 유일한 에너지의 원천은 인생의 길에 주께서 계속해서 감동 받을 일을 준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그런 감동을 체험했습니다. 아니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늘의 본문에는 예수님의 감동체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예수님의 감동체험이 저를 또한 감동시킨 것입니다. 자, 도대체 무슨 일로 우리 예수님이 감동을 받으셨나요?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을 감동시킨 인물은 한 백부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기쁨으로 만나주신 그분의 VIP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이 사람을 만나 그와의 대화 중에서 그가 대답하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의 소감을 본문이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주의 깊게 청취해 보십시오. 10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자, 감동먹으신 예수님의 느낌이 전달되어 오십니까?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을 감동시킨 이 사람의 믿음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 우리 주님을 놀랍게 하는 믿음-도대체 어떤 믿음인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1. 자신을 초월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의 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자신을 초월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초월해야 이웃들이 우리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도무지 이웃들에 대하여 손톱만큼의 관심도 갖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만 함몰되어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 오늘 본문에 소개된 백부장은 지금 하인의 문제로 예수님께 나아와 그의 도움을 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당시의 백부장은 군인 100명을 거느린 로마 군대의 장교였습니다. 아마 꼭 로마인은 아니어도 로마에 의해 고용된 용병이었을 가능성이 큰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자신의 노예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노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주석학자 윌리암 바클레이는 당시 로마 사회에서 주인은 종의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었고 노예들은 물건이나 짐승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존재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짐승과 노예의 유일한 차이는 노예는 말이 통한다는 것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이 이런 노예를 위해 예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이 시작하는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그냥 도움을 구한 것이 아니라,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절에서 백부장은 자신의 하인이 ‘몹시 괴로워하나이다’고 그의 병세를 묘사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최근에 우리 주변에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 진실한 연민을 가지고 중보해 보시거나 도우려고 애쓴 일이 계십니까? 마지막 심판의 광경을 묘사한 대목에 보면 예수님은 내가 아플 때 네가 나를 돌아본 일이 있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아니 주님이 언제 아프셨습니까?” 묻지 않으십니까? 주님의 대답을 기억하시나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니라” 건강한 자아상은 내가 나 자신에게 인생의 초점을 두고 살 때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초월하여 고통 받는 이웃들을 돌아보고 섬길 때 내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순회할 때 한 여인이 자기는 온갖 상담을 다 받았지만 도움이 안 되었고--“이제는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테레사는 조용히 그러면 내가 제안을 하겠다고--“기왕에 죽을 결심을 하셨다면 자살을 연기하고 내가 일하는 인도에 와서 나를 한달만 도와주고 그 다음에 죽으시라”고 했답니다. 그대로 했답니다. 한 달 후에 테레사가 이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환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웃으며 묻습니다. “언제 돌아가시겠느냐?”고. 그녀의 대답을 들어 보십시오. “죽다니요?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는데요. 전에 나만을 생각하던 시절 나는 나를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웃을 돌아보면서 내가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됩니다. 살고 싶으시면 이웃을 바라보십시오. 나보다 더 고통 받고 나 보다 더 외로워하는 이웃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보십시오. 그들을 위해 중보해 보십시오. 그들을 섬겨 보십시오. 당신이 살 것입니다.
저는 지난 목요일 저녁 영동 세브란스 암 환자를 위한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거기서 저를 제일 감동시킨 분은 암센타 의사이신 이희대 소장님이셨습니다. 암 환자 치유센타의 소장이신 이분은 자신도 암 환자이셨습니다. 이 분은 2003년 직장암 진단을 받고 간과 골반까지 퍼진 암과 투병하며 대장 절제, 간 전이암 수술등을 세 차례나 받으시며 투병을 계속해 오고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암 4기이면서도 병원에 정상 출근을 하고 여전히 환자들을 돌아보셨다고 합니다. 그날 저녁 2시간이상 프로그램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제 옆에 앉아 계셨던 그분은 꼼짝도 않으시고 계속 찬양하고 계속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 날 그분이 암 4기에도 그렇게 건재하며 버티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섬김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살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이분의 아름다운 믿음에 감동을 느끼면서 계속 제 마음에 떠 오른 생각은 “예수님이 얼마나 이런 분을 좋아하실까?”였습니다.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자신을 초월하는 믿음입니다.
2. 공간을 초월하는 믿음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마침내 백부장에게 감동을 받으시고 “내가 고쳐 주리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8절입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비록 그의 하인이 아파 누운 자기 집과 지금 예수님을 만난 그 곳 사이에 공간적인 거리가 있어도 예수님이 역사하시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공간을 혹은 지역을 초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놀라운 문명 이기의 발달로 떨어져 있는 가족들과 전화로 이 메일로 끊임없이 통신하며 살아가고 거리를 초월하여 나라와 나라사이에, 도시와 도시사이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면서 혹은 유학차 해외로 사랑하는 자녀들을 떠나보내며 끊임없이 안타까워하며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도 우리는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성경에 등장하는 이 백부장은 그 옛날 벌써 공간을 초월하는 믿음의 사례를 선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으로 이 공간을 초월할 수 있었습니까? 말씀과 기도의 능력이었습니다. 주님께 구하면 기도하면 어디서나 그 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공간을 초월하시어 역사하심을 믿었습니다. 또한 그가 한번 말씀하시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일하시던 그분의 말씀은 공간을 초월하시어 역사하심을 믿은 것입니다. 지금 누군가와 떨어져 있어서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현실 때문에 곤혹스러워 하십니까? 엎드리어 중보의 기도를 하십시오. 떨어져 있는 자녀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일일이 함께 다니며 함께 할 수 없는 믿기지 않는 남편을 인하여 걱정이십니까? 걱정할 시간에 기도하십시오. 감시할 생각 말고 차라리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주장하십시오. 이 백부장처럼 고백해 보십시오. 제 남편에게, 저의 아이들에게 “다만 말씀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삶에 장에 일하도록 선포하십시오. 공간을 초월하여 일하시는 주님의 기적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3. 민족을 초월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백부장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로마 군대 소속이었습니다. 로마인이었거나 아니면 로마의 용병이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는 이스라엘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족이 다르다는 편견 혹은 선입견을 깨트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는 로마의 장교이어서 더욱 이런 결단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사회적 신분이 높을수록 사람은 자신의 신분을 의식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분보다 그가 아끼는 하인이 치유받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에 감동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이스라엘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10절)고 하십니다. 이어서 12절에서는 그 나라의 본 자손들 즉 처음 선택되었던 이스라엘은 오히려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방인 선교-혹은 세계 선교의 비전이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스라엘인이 아닌 한국인으로서 예수를 믿고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살게 된 것--이 백부장의 믿음과 무관하지 않은 것을 기억하십시오. 바로 이 백부장 같은 이방인들이 민족을 초월하여 믿음의 지평선을 열므로 저와 여러분도 예수 믿고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것-누군가가 자기 민족만 생각지 않고 민족을 넘어서는 믿음의 여행을 결심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으로부터 120년전 미국의 성도들이 혹은 영국, 카나다, 호주의 성도들이 우리나라에도 아직 봉사할 일, 전도 할일이 많은데-저 동방의 작은 나라-코리아까지 관심을 가질 이유가 무엇이냐고 생각했더라면 우리가 복음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쯤 우리가 예수 못 믿고 살고 있을 자신의 모습이 연상이나 되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빚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번 여름 우리 교회 많은 성도 들이 백부장의 믿음을 갖고 동서남북, 국내외로 나아가 선교하고 봉사하는 일에 헌신하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여름철 휴가 대신 단기 선교에 참여해 주셨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참여하시는 경우도 적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아예 선교지에 교회당을 지어 주시고 오신 케이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나이 많으신 시니어부의 어르신들도--이제는 가만히 계셔 대접 받아야 하실 분들이 여러 곳으로 가셔서 땀 흘리시고 봉사하시고 전도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좀 놀라시지 않으셨을까 생각됩니다. 그분이 모르셔서가 아닙니다. 그분이 기쁘셔서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내가 한 교회가 이런 일을 한 것을 보지 못했는데--나는 지금까지 이만한 공동체의 헌신을 보지 못하였노라”
저는 일찍 1970년대초 미국 신학교에 유학을 하면서 어느 여름 카나다 토론토의 people's church라는 곳을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선교를 많이 하는 교회로 소문나 있었습니다. 제가 방문했던 주일 그 교회 목사님은 당시의 제가 듣기에는 꿈같은 일이었던 한 교회가 150명이 넘는 장기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일, 그리고 여름철 단기선교에 200명 이상이 다녀오신 것을 감사하는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그 교회 구석에서 “주님, 언제인가 한국 교회에 그리고 제가 목회할 교회에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그 날 카나다 토론토의 피플스 교회 의자에서 드려진 한 한국 신학생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오늘 이 주일의 시점에서 우리 교회는 이미 71명의 우리 교회 파송선교사 그리고 협력선교사 223명을 합하여 총 294명의 장기 선교사를 파송 지원하고 있고(우리가 2010년 목표로 한 300명에 거의 도달한 수), 이번 여름에만 국내외 합하여 단기 선교와 사회봉사에 총 108팀 3,031명(해외:866명)이 참여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국내 신문에도 안나오는 일이지만 저는 천국 뉴스에는 반드시 나왔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감동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감동의 역사를 만들어온 지구촌 교회 모든 성도들을 저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가진 부족함이 많고, 약점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한국 교회가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교회가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중에 백부장의 믿음을 가진 많은 아름다운 평신도 리더십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안에 아름다운 일을 이루신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한 이런 감동의 사역, 감동의 선교가 계속되기를 기도하십시다. 할렐루야!
참된 신앙을 가지셨습니까?
마 8:5-13 / 권오서목사
참된 신앙이란...
1. 간절한 (간구)의 신앙입니다.
“5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백부장은 로마인이었습니다. 백부장이라 함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장교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이 중풍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는 하인을 위해 예수님께 직접 나왔습니다. 이는 자존심 다 내려놓고 나왔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누가복음에서는 백부장이 장로들을 보내 종을 고쳐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백부장이 직접 갔든 사람을 보냈든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가 이 하인의 병을 고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이러한 간절함을 보셨고, 그래서 그의 종을 고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신앙은 간절함 속에서 진정한 신앙으로 성숙되어갑니다. 하나님은 간절히 찾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주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을 모른 척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간절히 구하는 자를 만나주시고 만져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간절한 사람은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일을 이룹니다. 설사 이루지 못한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간절한 사람은 실패를 겪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그 순간을 자신을 담금질 하는 계기로 삼습니다. 그래서 간절함은 사람을 진실 되게 합니다.
2.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8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는 백부장의 말은 ‘욱 히카누스’라는 말로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나타낼 때 쓰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백부장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저는 무가치한 존재이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문제를 초월하시는 분입니다.’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할 때 참된 신앙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에 관한 사상이나 이론을 습득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자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유케 하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인정하십시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습니까?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신앙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께 최상의 가치를 두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예배는 교회에서만 행해지는 종교의식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예배는 삶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교회에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어느 때든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자세로 예배를 드려보세요. 그러면 은혜가 넘칩니다. 자유함이 있습니다.
3.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신앙입니다.
8절에 보면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이 하인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하인을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능력이며 권능이며 하인의 병을 치유하는 유일한 길임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며 인정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참된 신앙이란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내가 어떠한 경험을 하고 살아왔는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어떠한 배경을 가지고 살아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주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고, 그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유명한 사람이 남긴 명언이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는다고 한다면, 성경의 말씀은 인생을 바꿔놓데 완전히 바꿔놓음으로써 영생하게 합니다. 성경은 죽은 언어가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금도 우리를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이 성숙한 신앙의 단계로 우리를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 위에 신앙의 뿌리를 내린 성도는 시련이 닥쳐오고 고난이 몰려와도 쓰러지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주님 말씀을 신뢰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그 말씀이 내가 믿기만 하면 내 삶속에 열매로 맺혀질 것을 고백함으로써 성숙한 신앙을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감탄하게 한 믿음
마 8:5-13 / 문기태 목사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디아나주의 작은 마을에 뇌종양으로 고통받고 있는 15세의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계속된 방사선 치료와 화학요법으로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부끄러워 학교를 다니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때 그 사실을 알게 된 그 반의 학생들은 그를 돕기 위해 모두 삭발을 하였습니다. 뇌종양을 앓고 있는 브라이언만이 유일하게 머리카락이 없는 학생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반의 아이들 모두가 머리를 삭발 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오늘 우리는 감정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데 감동은 메마른 시대, 감동 결핍증에 걸려 정서가 유산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기를 초월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세상에 살면서 감동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주위 사람들에게도 크고 작은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삶을 살뿐 아니라 예수님께 감동을 안겨드리고 저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의 아름다운 믿음을 소유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을 감탄케하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로마의 한 백부장이 에수님께 나와 엎드려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에 걸려 누워지내는데 몹시 괴로와합니다." 예수님께서 선뜻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으니 다만 말씀으로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슴하시기를 "내가 아무에게서도 이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백부장에게는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하셨습니다. 그러자 하인이 그 즉시 나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놀라게 한 믿음을 소유한 백부장이 부럽지 않습니까? 도대체 백부장은 어떻게 예수님까지 감탄하게 한 것일까요? 왜 예수님께서 '야, 이 사람의 믿음이 훌륭하다.' 하시지 않고 "난 이렇게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처음 본다." 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1. 사랑이 담긴 믿음이기 때문에 감탄하셨습니다. (6)
이 백부장은 로마인입니다. 당시 가버나움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 로마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군인 통치시대의 백부장의 위치는 대단히 높습니다. 그런 백부장에게 많은 하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중풍병에 걸렸습니다. 하인은 말이 하인이지 실제로는 천한 노예였을 것입니다. 로마인인 백부장이 천한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직접 예수님을 찾아와 간청한다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하인이 중풍병이라는 몹쓸 병에 걸리면 아무 쓸모도 없게 되었다고 내 쫓아 버리기 쉽상입니다. 사무엘 상 30장에 보면 다윗이 가족들과 재물을 약탈자들에게 빼앗기고 그들을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에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을 하나 만납니다. 물을 마시우고 먹을 것을 먹인 후 물어보니 자신은 아말렉 사람의 종으로 지내던 이집트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병들었다고 3일 전에 주인이 죽도록 버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말렉사람이 병들었다고 죽도록 버려둔 종을 살려서 그의 도움을 받아 전쟁에 크게 승리하고 잃었던 것을 모두 찾아왔습니다.
또한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고 버리지는 않더라도 일반적으로 다른 하인을 보내 치료방법을 찾아주도록 지시하는 정도 였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 밑에 병사가 백 명이나 되니 부하를 보내어 청원을 하는 정도의 아량을 배푸는데 만족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종이 병들어 쓸모가 없어졌으나 버리지 않았습니다. 버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하인을 살리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그 하인을 살리려고 직접 예수님께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앞에 나아가 간청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천한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직접 주님께 간청하는 경우는 아주 드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그런 행동을 보시며 그 안에 참된 사랑이 넘치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감탄하셨습니다. 진실한 사랑이 예수님을 감동시키십니다. 오늘도 우리안에 사랑이 충만하면 예수님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가족간에 서로 사랑하고, 직장안에서 서로 진실한 사랑으로 배려해줄 때 감동이 솟아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중보기도팀이 두 개가 있습니다. 기도정병단과 기도동역단이 있습니다. 기도동역단은 주로 담임목사인 저를 위해 중보기도해주며 기도로 동역하는 중보기도팀입니다. 기도정병단은 주로 교인들의 기도제목을 수시로 받아 한주일에 한 시간씩 돌아가며 기도실에 와서 집중하여 기도해주는 중보기도팀입니다. 이 중보기도로 인해 풍성한 기도응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4-5십명의 중보기도대원들의 성실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이분들이야말로 사랑이 담긴 믿음을 소유한 분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자신과 가족들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과 직접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을 위해 매 주 또는 매일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께서도 여러분의 그런 사랑이 담긴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시리라고 믿습니다.
2. 겸손한 믿음이기 때문에 감탄하셨습니다.(9)
백부장의 간구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친히 '내가 가서 고쳐주마'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으니 다만 말씀으로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삭개오는 주님이 그 집에 유하시겠다고 하니 신이 나서 모셔들였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의 집은 가버나움에서 가장 크고 좋은 집이었을 것입니다. 많은 종들이 있어 지시만 하면 힘 안들이고 잘 접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이방인인 자신의 집에 예수님이 오실 때 자신은 영광이고 좋지만 예수님께 혹 누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시기심많은 바리새인들이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가서 함께 교제하였다고 비난하고 공격하면 예수님께서 곤경에 처하실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사양한 것입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신분과 지위와 부를 생각하였다면 누구에게도 별로 꿇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크게 교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 앞에 한없이 낮아지고 겸손하였습니다. 세상적으로 높은 위치에 오른 백부장이 예수님앞에서 낮은 모습으로 겸손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을 보며 예수님은 크게 놀라며 감탄하셨습니다.
캐나다 로키산에 무릎 꿇은 나무가 있답니다. 오랜 세월 폭풍우를 견뎌내며 자라온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마치 무릎 꿇은 것처럼 자세로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무가 명품 바이올린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겸손한 모습으로 시련을 이겨낸 나무로 만든 바이올린의 소리가 워낙 고와서 고가로 팔립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좌절하고 낙심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인생이 끝납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은 명품 인생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고난의 폭풍우를 견뎌온 사람들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냅니다. 역경 앞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낙타는 짐을 실을 때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낙타는 짐을 내릴 때도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부활의 기쁨이 우리의 삶 속에서 활짝 꽃피게 될 것입니다.
필리핀의 유명한 부자 사업가의 아들 카풍카우 라는 청년이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학교에 가보니 화장실과 욕실이 너무나 더럽고 불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학장에게 직접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수님, 이렇게 더러운 곳에서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 좀 치워주시고 깨끗하게 해주십시요."
"알았네. 내가 다 알아서 조치할 테니 가 있게."
교수님의 대답을 듣고 잠시후 그 학생이 다시 화장실로 가 보았을 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씻는 소리, 닦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랍게도 학장님이 기쁘게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들어오게. 이제 깨끗해질 테니 염려하지 말게."
"학장님, 청소부를 데려다가 시키면 될텐데 왜 직접 화장실 청소를 하십니까?"
놀란 학생이 학장님에게 말을 건네자 "천국은 그런곳이 아니라네. 교회나 신학교는 일을 보는 사람이 먼저 하는 걸세.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네. 힘으로 하는것도 아니지. 불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쓰레기를 보는 사람 하나하나가 청소를할 때 우리 삶의 주변은 깨끗해질 수 있는 걸세. 자네가 부잣집 아들로 여기에 와서 보니 좀 불결하게 보인걸세.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별로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네. 그러니 먼저 느끼는 사람이 일을 하면 이 학교는 깨끗해질 수 있는 거라네."
예수님은 백부장이 많은 부하를 거느린 것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백부장의 지휘솜씨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의 겸손함에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감동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겸손한 자세로 나아갈 때 주님께서 감동하실 것입니다.
3. 확신에 찬 믿음이기 때문에 감탄하셨습니다.(9)
일반 상식으로는 의사가 가서 진찰을 하여 질병의 원인과 상태를 확인을 하고 처방을 주어야 맞습니다. 능력많은 종교지도자라도 직접 가서 보고 안수기도를 해야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집에 까지 가시지 않고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병이 떠나가고 깨끗이 치료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아래사람이 있어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이것을 하라 하면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명령이면 만물이 순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백부장에게는 거리를 초월하는 믿음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실제 백부장이 중품에 걸린 하인을 예수님께 데려올 수도 있었습니다. 데려오려면 그까짓거 쉽습니다. 집에 하인이 많이 있고 부하들도 많습니다. 한 마디 지시만 하면 하인들이 떠메고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멀리에서도 예수님이 말씀만 한 마디 하시면 반드시 낫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직접 예수님께 나아와 말씀해 주실 것을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백부장에게는 한계를 초월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인의 병명이 무엇입니까? 중풍병입니다. 그것도 상태가 중하여 집에 누워지내고 있습니다. 중풍병은 뇌 혈관이 막히거나 터져서 신체의 전부 또는 일부가 마비되는 병입니다. 당시 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병입니다. 누워서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병입니다. 이런 불치의 병이지만 예수님께서 고치실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못할 것이 없으리라는 확신에 찬 믿음이 있어서 이렇게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말씀만 해 주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확신으로 가득찬 믿음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놀라며 내가 이만한 믿음을 처음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어설픈 믿음으로는 예수님을 놀라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오락가락하는 믿음으로는 예수님께 감동을 드릴 수 없습니다. 남들 눈치보면서 적당히 흉내내는 믿음으로도 주님을 감탄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확신으로 가득찬 믿음을 표현하며 나아가야 예수님께서 놀라십니다. 그리고 칭찬하십니다.
로마가 온 세상을 지배할 때의 일입니다. 스코트란드 설교자였던 존 웰치 목사님이 로마의 신이 아닌 예수를 전하다가 붙잡혀 투옥되었습니다. 지하 감옥의 습기와 불결함에 웰치 목사님은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 메리 부인은 남편의 석방을 왕께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번번히 거절당했습니다. 어느날이었습니다. 어둠속에서 로마왕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메리부인은 왕앞에 엎드려 다시 남편의 석방을 요청했습니다. 그때 왕은 "만일 너의 남편이 다시는 예수를 전하지 않게 하겠다고 한 마디만 약속하면 석방하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메리부인은 왕앞으로 다가가 치마를 두손으로 들어올리며 "왕이시여 그와 같은 약속을 하느니 차라리 이 앞치마에 남편의 머리를 바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왕은 그렇게 확신에 찬 모습을 보며 감동을 받고 웰치목사님을 석받했습니다.
우리 주님도 이처럼 확신에 찬 성도가 없는가 찾으십니다. 우리에게서 확신으로 가득찬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예술가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킬만한 걸작을 만들려고 영감을 찾고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표현함으로 우리를 감동시키십니다. 사랑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아름답게 변화됩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켜 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을 표현할 때 감동하십니다. 사랑이 담긴 믿음, 겸손한 믿음, 확신에 찬 믿음을 주님앞에 드러냄으로 크게 감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큰믿음
마 8:5-13 / 김영규 목사
저는 가끔 성도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일까요?”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하면 뭐라고 답하실까요? 예수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믿음을 세 등급으로 평가 하셨습니다. 첫째는, 믿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 믿음이 없는 자들아!”(막9:19) 둘째는 믿음이 적은 자들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마8:26,14:31, 16:8, 17:20) 셋째는 믿음이 크다고 칭찬 받은 사람들입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마15:28,본문)
오늘 백부장의 믿음이 바로 큰 믿음에 속합니다. 백부장은 그의 믿음을 인정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믿음 때문에 하인의 병을 고쳤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인정받는다면 그런 사람은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그러면 이 백부장의 믿음은 어떤 면에서 큰 믿음으로 인정받았을까요? 세 가지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표준삼는 믿음입니다
첫째로, 말씀을 표준삼는 믿음입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8절) 백부장은 하나님 말씀을 신뢰했습니다. 집에까지 와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환자에게 손을 얹어 달라는 요청도 안했습니다. 그냥 말씀으로만 명하셔도 된다고 했습니다. 말씀 중심의 신앙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표준입니다. 바로 이점이 중요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삶의 토대를 둡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믿음을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하나님은 이들을 시내산 아래로 부르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새로운 율법을 주셨습니다. 과거 애굽에서 살 때에는 애굽의 법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새로운 삶의 표준이 필요했습니다. 애굽의 법은 하나님의 표준으로 본다면 너무나 타락한 법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방임하는 타락한 법이요, 인간 권력자들을 위한 법이요, 우상과 미신의 법이요, 노예의 법입니다. 이런 법대로 산다면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합니다. 복을 받기는 커녕 다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 법을 주셨습니다. 새 법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참 예배의 법이 중심이 됩니다. 거기에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사회법, 재판법, 혹은 양심을 제어하는 도덕법들을 담아 주셨습니다. 모세가 받은 시내산의 법은 광야생활의 법인 동시에 장차 들어갈 가나안 땅의 법이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본다면 영원한 천국 생활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현세를 살아가는 법인 동시에 장차 들어갈 천국의 규범입니다. 신구약 66권의 성경을 “정경”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canon이라고 하는데, 헬라어로 “자”(尺), 또는 “표준”이란 뜻입니다. 성경은 성도 생활의 유일한 표준이요 척도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토대를 두지 않으면 잘못된 신앙에 빠집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표적주의 신앙입니다. 기적을 따라다니는 신앙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이렇게 책망 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12:39) 유대인들은 기적을 좋아했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만나를 내리고, 반석의 물을 냈던 것처럼, 이적을 보아야만 믿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중풍병을 고치고, 귀신이 쫓겨 가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게 되고,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여전히 새로운 기적을 보아야만 믿겠다고 합니다. 고약한 습성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집니다. 기적을 보아야만 믿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누가 병을 고쳤다고 하면 우르르 몰려갑니다. 생수 마시러 몰려갑니다. 명당 자리 찾아 몰려갑니다. 누가 천국을 봤다고 하면 또 우르르 몰려갑니다. 내가 본 천국, 네가 본 천국! 정말로 천국이 그렇게 궁금하시면 일찍 세상 떠나세요. 천국에 가면 다 알게 됩니다. 기적 신앙은 마치 “욘사마” 팬들과 같습니다. 서울에 온다 하면 우르르, 부산에 온다하면 우르르... 믿음은 기적에서 오는 게 아니라 마음의 신뢰에서 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둘째는 신비주의 신앙입니다. 기독교 자체는 신비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그 神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잘못된 신비주의자들이 많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이런 경고를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신13:1-3) 사도 시대에 사마리아성 사람들은 마술사 시몬의 요술에 팔려서 큰 선지자라고 따라다녔습니다.(사도행전8장) 예수님께서는 말세에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타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들은 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이며 유혹하여, 택하신 성도들까지도 넘어지게 만듭니다.(마24:23-24) 몇 년 전에 자칭 “참 종”이란 자가 저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내용을 보니까 예수님이 한국에 오셨는데 알고 있으라는 겁니다. 영으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데 자기만 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도 음력으로 1월 17일이라고 합니다. 여기저기 성경을 끌어다가 신령한 해석을 한다고 했는데, 앞뒤 문맥도 맞지 않고, 한글 맞춤법부터 엉망진창입니다. 한글 성경도 제대로 모르는 자가 자칭 선지자입니다. 편지 봉투를 봤더니 태극기를 그려놓고, 그 옆에 “천국복음전도회”라는 직함이 찍혀 있습니다. 사람이 보통 모르면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압니다. 그런데 아주 무식하면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모릅니다. 이런 것을 강무식이라고 합니다. 강무식한 신비주의자들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이런 사람들에게 재산 팔아 바치면서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또 뭡니까? 예수님을 빙자한 점쟁이들에게 속지 마세요. 누구를 위해 예언을 해 준다는 둥, 장래 일을 말해준다는 둥, 속는 것은 자유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져야 됩니다. 성덕중앙교회의 영적 지도자는 김영규 목사입니다. 어디 산속에서 점쳐주는 사람들 좇아다니지 마세요.
기독교의 진정한 신비가 뭡니까? 사도 바울은 “비밀”이란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그 비밀의 내용을 보면 주로 천국(마13:11), 복음(롬16:26,고전2:7,골1:26,계10:7), 부활(고전15:51), 교회(엡5:32), 그리스도(골1:27,2:2,4:3), 등에 적용됩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신비한 일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이 신비한 일이요, 삼위일체 하나님이 신비한 일이요, 죄인들이 복음으로 거듭나고 의롭게 되는 것이 신비한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신비의 핵심입니다. 오늘 백부장을 보세요. 그는 예수님께 만져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가까이 오시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다만 말씀만을 부탁했는데 말씀대로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오늘 특별히 말씀의 신비를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은 신비의 핵심입니다. 주님께서는 수많은 사역을 말씀으로 이루셨습니다. 말씀으로 영혼들을 회개시키셨습니다. 말씀으로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 맹인, 나병환자, 손 마른 사람, 38년 된 병자, 귀신들린 사람, 모두를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말씀으로 풍랑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말씀으로 무덤에 장사된 나사로를 살리시고, 관 속에 실려 가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창1장, 요1:1-3) 말씀으로 성도를 다스리시고,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위경에서 구하십니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107:20) “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그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그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시147:15,18)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19:7-8)
말씀은 과거적인 기록이지만 그 효능은 초역사적이요, 영원한 현재형입니다. 말씀을 과거의 음성으로 듣지 마세요. 이 말씀은 현재의 음성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하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 앞에 여전히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자신을 봅시다. 하나님 말씀이 내 생활에 어떤 역사를 일으키고 있습니까? 설교는 한 주간에 한 번씩 듣는 감미로운 연설입니까? 성경을 단지 문명인이 읽는 필독서 나, 혹은 지혜자의 교훈 정도로 생각하십니까? 그것 가지고는 죽도 밥도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히4:12) 우리 영혼을 수술하는 칼입니다. 인생을 요리하는 칼입니다. 성도의 신앙을 바로잡는 칼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하는 칼입니다. 죄를 이기는 칼이요, 병을 이기는 칼이요, 마귀를 이기는 칼이요, 허영심을 이기는 칼이요, 환경을 이기는 칼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 말씀을 표준 삼고 사세요. 말씀으로 내 인생을 비춰보고, 말씀에서 길을 찾고, 말씀으로 치료하고,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말씀 중심의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 받습니다.
그리스도를 절대 명령권자로 믿었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를 절대 명령권자로 여기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를 우주의 사령관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알고 계십니까? 물론 베드로가 대답한 것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세례문답식의 대답은 다 하실 줄로 믿습니다. 제가 드리는 질문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 삶에 어떤 위치에 계시는지, 어떤 위상을 갖고 계시는지, 바로 그런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의 실제사령관입니까? 아니면 명목상의 주님입니까? 말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하면서, 실제로는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니” 하면서 살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내 인생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데 얼마나 큰 결정권을 가지고 계십니까? 사업 문제, 직장 문제, 자녀 문제, 진로 문제, 인간 관계, 집안 문제...등등. 혹시 주님은 천당 가는 문제만 빼고는 전혀 관여치 않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주님이 내 인생의 들러리입니까? 결정권자입니까? 내가 주님께 명령을 합니까, 주님이 내게 명령 하십니까?
오늘 백부장은 주님과 자신의 위상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군인답게 군대식으로 주님을 모셨습니다. 주님은 사령관이시고 자신은 철저한 졸병의 자리에 있습니다. 우선 신분상 주님과 자신을 다른 위치에 놓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그는 꽤 괜찮은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백부장이면 군대에서 백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직책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백부장은 당시에 갈릴리를 지배하던 분봉왕 헤롯의 용병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훌륭한 집도 가지고 있고 어떤 손님이든지 떳떳하게 맞을 수 있는 살림살이도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오시는 것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노라고 사양했습니다. 그 당시 주님은 비록 많은 이적을 행하고 유명인사가 되었을지라도 신분상 높은 분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평범한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요, 랍비요 선지자 정도로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주님을 단순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메시야로 구주로 인정했습니다. 절대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겸손과 상통합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철저히 자각하는 것이 참 겸손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백부장의 믿음이 훌륭했던 것은 주님의 명령이면 무엇이든지 그대로 된다고 믿은 점입니다. 사람만이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게 아니라, 짐승도, 귀신도, 자연만물도 주님의 명령이면 다 듣는다고 믿었습니다. 주님의 명령이면 풍랑도 잔잔해집니다. 주님의 명령이면 귀신도 쫓겨 갑니다. 주님의 명령이면 병도 고쳐집니다. 주님의 명령이면 죽음까지도 물러갑니다. 생물이든지 무생물이든지, 영적인 존재든지, 물질적 존재든지, 인격체든지 비인격체든지 주님의 명령이면 다 듣습니다. 주님은 우주 만물의 사령관이십니다. 그것이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기적으로 응답되었습니다. 백부장이 집으로 돌아가서 확인해 보니까, 주님이 명령하신 시각, 정확히 그 시간에 하인의 병이 나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세요. 그러면 그 말씀대로 됩니다. 베드로는 직업적인 어부였습니다. 그러나 어부가 아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에 고기를 그물이 찢어지도록 가득히 잡았습니다.
갈릴리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오늘 동일한 질문을 드립니다. 그러나 교리적인 대답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과연 내 삶에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계시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주님은 과연 목자의 자리에 계십니까? 내 생활을 간섭하시고 주장하시는 자리에 계십니까? 주님은 내 중요한 인생 문제에 결정권을 갖고 계십니까? 주님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주님을 과연 우리의 사령관의 자리에 모셨느냐가 중요합니다. 좋은 믿음이란 주님을 인생의 사령관 자리에 모시고 사는 신앙입니다.
사랑의 믿음입니다
셋째로, 사랑의 신앙입니다. 신앙은 두 종류의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는 사람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항상 병행되어야 하고, 또 병행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부장의 하나님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 백부장은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을 사랑하여, 회당을 지어줬습니다.(눅7장) 유대인들에게 선한 일을 많이 한 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하인이 중풍에 걸린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주님을 찾아 왔습니다. 당시에 하인은 노예(dou'lo")였습니다. 당시의 노예는 짐승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사고팔고 주인의 마음대로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백부장은 노예를 사랑했습니다. 더구나 병명은 중풍병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중풍병은 잘 낫지 않는 병입니다. 평소에 미운 짓 하던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미움 받기 딱 좋은 병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노예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군인의 신분으로 많은 일을 제쳐두고 멀리 주님을 찾아 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그 관계를 실천하는 장소는 바로 인간 세상입니다. 성경 말씀의 절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사람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시고, 우리의 신앙을 평가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이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4:20) 야고보 사도는 형제가 헐벗고 주린 것을 방치하면서 믿음이 있노라 한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약2:14) 주님께서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고 말씀하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란 나이가 어린 자나 키가 작은 자를 말한 게 아닙니다. 세상에서 작게 여기는 자, 보잘것없는 자,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사야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배는 잘 드렸습니다. 그러나 욕을 바가지로 먹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1-13) 오늘날 신자들도 마찬가집니다. 예배를 안 드려서 욕먹지는 않습니다. 헌금, 금식기도, 철야기도, 산상기도 다 좋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대로 사람에게 할 도리를 안 하는 것 때문에 책망 받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이 뭘까요? 사랑 없는 사람들, 이기적인 사람들, 나만 아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요즘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물질은 풍요로워서 살맛이 나는데, 사람들 때문에 살맛이 나지 않을 때가 많아요. 특히 교양 없는 사람, 부도덕한 사람, 몰염치한 사람들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잠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지요?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 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잠30:21-23) 도대체 돼지 같은 사람이 자기는 잘났다고 행세하는 것을 뭐라고 해야 될까요? 잘못을 지적해 주면 대들고, 그냥 놔두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잡아 족치면 인권 운운하고... 골치 아픕니다. 아무튼 우리의 책임은 사람을 사랑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은사를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합니다.(고전14:1) 사랑의 실천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도 나타납니다.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 것까지도 상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백부장이 칭찬 받은 것은 그의 믿음이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하는 사랑의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비천한 한 사람에게 사랑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좋은 믿음으로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주님을 사랑한 사람으로 여기십니다. 최고의 신앙은 對神關係와 동시에 對人關係에서 이루어집니다.
결론입니다
좋은 믿음은 결과가 좋습니다. 신속하게 효과가 나타납니다. 백부장의 하인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이 받은 더 큰 복은 하인의 병을 고친 게 아닙니다. 11절과 12절 말씀을 보세요.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백부장은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는 복을 약속받았습니다. 반면에 나라의 본 자손인 유대인들은 천국 밖에서 슬피 울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오직 믿음입니다. 주님을 참다운 메시야로 믿는 믿음,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표준 삼는 말씀 중심의 믿음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실천적인 믿음입니다. 큰 믿음으로 인정받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인정받으면 모든 삶에 풍성한 기적의 열매들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놀래킨 믿음
마 8:5-13 / 이정선 목사
산에서 내려오신 후 문둥병자를 고치심으로 왕적 권능을 나타내 보이신 예수께서 이번에는 백부장의 종을 고치시는 사건이 이어집니다.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사시던 동네입니다. 원래 예수님의 고향은 나사렛이었지만, 거기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한 후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오셨습니다. 그 후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백부장은 팔레스타인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대의 장교입니다.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식민지입니다. 그러니까 점령군으로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대의 권세와 횡포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입니다. 그런데 그 로마 군대의 장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요청했고, 그래서 예수께서 왕적 권능으로 백부장 하인의 병을 고쳐 주셨다는 것은 그 왕적 권위가 로마 제국을 능가하는 것이라는 근거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만나는 이 백부장은 매우 특이한 사람입니다. 로마의 군대는 한 군단이 6000명인데, 이것이 다시 60개의 소부대로 나뉩니다. 그 100명의 소부대를 지휘하는 사람이 백부장입니다. 실제적인 전투나 작전은 백부장의 지휘와 책임 하에 수행됩니다. 요즘 군대로 치면 중대장에 해당되겠습니다. 갈릴리 가버나움 같은 시골 동네에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라면 그 위세가 보통 당당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 백부장이 피지배민의 군중 지도자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부터 흔히 있는 일이 아닙니다. 군대는 명령에 의해 유지되는 조직입니다. 말하자면, 그 조직 속에서는 상관의 의도가 중시되는 반면 부하의 의견은 주목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나 존중은 군대조직의 문화가 아닙니다.
특히 점령군에게 있어서 피지배민의 존재는 멸시와 착취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백부장의 이야기가 누가복음 7장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 보면 이 사람이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또 회당까지 지어준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청을 들어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유대 장로들이 말합니다. 점령군이라는 우위에 있으면서도 피정복민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특별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유대교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본래 성품이 온유하고 인간을 존중하는 인격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또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간청을 하는 것은 자기 하인을 위해서입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 말 속에 그 하인을 위한 애정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묻어나오지 않습니까? 명령체계와 상하조직 속의 사람이 자기 하인을 위해 이처럼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이 상당히 주목할 만하고 생각됩니다. 이 사람이 유대교 신앙을 갖고 있었는지와 상관없이 아랫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했던 훌륭한 인격자였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훌륭한 인격을 가졌고 마음이 착하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 해도 그 착함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구원을 이룰 만큼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성질은 좀 못됐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저에게 예수는 안 믿는 인간성 좋은 사람과 친구 할래, 아니면 인간성을 더럽지만 예수 믿는 사람과 친구 할래 하면, 저는 예수는 안 믿지만 인간성 좋은 사람과 친구 하고 싶습니다.
같이 예수를 믿어도 인간성 좋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정말 좋은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 믿은 지 오래 되고 믿음이 좋다 해도 그 본래의 인간성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험담하기 좋아하고 분쟁 일으키던 사람은 예수 믿고 나서도 교회 안에서 험담하고 분쟁 일으킵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을 뿌려도 땅이 좋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 백부장의 요청에 예수님은 흔쾌히 가서 하인을 고쳐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그 백부장의 성품에 감동이 되셨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다음에 터졌습니다. 가서 하인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하시니까 백부장이 그렇게 하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솔직히 이 부분에서 이 백부장과 의견이 다릅니다. 물론 백부장이 잘못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집에 오시겠다는 예수님의 제의에 춤을 추며 기뻐하고 잔치를 벌였던 삭개오의 반응과 매우 대조적입니다. 저는 삭개오의 반응이 더 마음에 듭니다.
삭개오 역시 모든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받고 사는 세리였습니다. 돈은 많았지만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괴로움을 가슴에 안고 있었습니다. 아마 나쁜 짓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인생을 잘못 살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습니다. 그런 자신의 형편없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시겠다고 했을 때 삭개오는 기쁨과 감격으로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러한 삭개오를 받아들이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비록 자기가 그런 자격이 없는 줄은 알지만 예수님의 초대를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예수님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이 너무나 황송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어달라고 하셨을 때 요한이 기겁을 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입니까? 당신이 저에게 세례를 베푸셔야지 어떻게 제가 당신께 세례를 베푼단 말입니까? 저는 당신의 신발끈 묶을 종이 되기에도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너에게 세례를 베푸마.” 그러셨습니까? “잔소리 말고 하라는 대로 해라. 우리가 이렇게 해서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그래서 요한은 아마도 벌벌 떨면서 하나님의 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라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면 이 백부장처럼 황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무가치함과 죄악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배를 잠깐 빌린 대가로 시몬에게 고기를 엄청 많이 잡게 해 주셨을 때, 시몬 역시 그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시몬을 떠나셨습니까? 예수께서 시몬의 배에 타시고 그를 부르신 것은 그가 죄인인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허물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로 삼으셔서 사람 낚는 어부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이 백부장처럼 하나님을 어렵고 두려운 분으로 생각하기보다 삭개오처럼 같이 모시고 함께 어울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하나님과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제가 깨지고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죄가 들어오고 난 후입니다.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종의 영이 아니라 사랑하고 친밀하게 대하는 아들의 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 집에 찾아오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고 오시지 말라고, 그냥 멀리 계시는 것이 더 편하겠다고 한다면 우리의 믿음이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야,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대우해 주시는구나. 그래도 내가 좀 괜찮은 사람인가 보다.” 이렇게 우쭐하고 교만했다가는 어렵게 얻은 하나님의 초대장을 다시 뺏겨버릴 지도 모릅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 백부장의 대답을 기이히 여기셨습니다. 매우 놀랐다는 것입니다. 비록 백부장이 예수님을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분으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가 어떤 분인지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내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말씀으로만 해 주십시오. 나도 내 상급자의 권위에 복종해야 하고, 내 부하는 내 권위에 복종해서 내가 하라는 대로 합니다. 하오니 당신이 가지신 권위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내 하인의 병이 나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도 놀란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군인으로서 명령에 복종하고 권위에 굴복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하는 말은 예수께서 누구보다도 큰 권세를 가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중풍병조차도 복종할 수밖에 없는 초자연적인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 백부장의 증언은 예수께서 온 우주의 왕이시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왕으로서 왕의 권능을 나타내시려는 예수님의 의도와 가장 잘 부합하는 믿음을 예수께서 만나게 되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던 이스라엘은 그렇게 오신 왕을 몰라보고 배척하는데, 이 이방인 백부장의 입에서 예수의 왕 되심이 증거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놀라셨습니다. 그래서 이 백부장은 예수님을 놀래킨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기록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마음이 통했던 문둥병자, 예수께서 손을 대시며 만지셔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놀래킨 믿음을 가진 이 백부장에게는 그 소원대로, 또 그의 믿음대로 리모트 컨트롤 방식으로 그 하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의사가 진찰을 하고 무슨 약을 처방하거나 다른 치료행위를 할 때 신뢰가 되고 안심을 합니다. 눈으로 보거나 눈 앞에서 뭐가 일어나야 믿을 수 있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문둥병자였는데, 이스라엘에 가면 선지자가 있어 자기 병을 낫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사가 종을 보내서 하는 말이 요단 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목욕을 하면 나을 것이로 하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아만은 몹시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각에는 지가 나한테 와서 하나님 이름을 부르면서 내 몸에 손을 얹어 병을 고칠 줄 알았는데, 뭣이 어째? 나와서 코빼기도 비치지 않으면서 가서 목욕이나 하라고?” 마찬가지로 백부장도 믿음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하인을 만져주셔야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말하기를 말씀만 하시면 하인이 낫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놀라버리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놀래킬 수 있을까요? 고집 센 것으로 하나님 놀래키지 말고, 말 안 듣는 것으로 놀래키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놀래켜 드릴 수 없을까요? 하나님을 놀래켜 드린다고 무슨 큰 사건을 터뜨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 백부장이 무슨 사건 터뜨려서 예수님 놀라신 게 아닙니다. 거짓말 하던 사람이 거짓말 안 하게 바뀌면 하나님 놀라실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늘 지각하던 사람은 조금만 열심 내면 하나님 놀래켜 드릴 수 있겠습니다. 성경책만 펴면 졸음이 쏟아지던 사람이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게 느껴질 때, 하나님은 놀라실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그 믿음의 열매가 맺힐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놀래켜 드리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
마 8:5-13 / 장경준 목사
성경의 주인공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읽으신 본문의 백부장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1. 확신 있는 믿음이었다.
백부장이란 당시 이스라엘 지역 전체의 지역 사령관이었습니다. 그는 휘하에 있는 종의 병이 고칠 수 없는 것을 알고 예수에게 찾아와 고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는 집에 가서 고쳐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 8:8은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했습니다. 이것은 확신에 찬 믿음의 말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인 것을 확신 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 창조의 능력과 지혜가 있는 것을 믿었습니다. 백부장은 창조주이신 하나님 예수님이 무어라 말하기만 하면 그대로 될 줄 믿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확신입니다. 자신의 내적에 있는 힘으로서의 확신입니다.
막2장에 중풍병이든 사람을 그의 친구들이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둘로 쌓아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합치된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해 주시기만 하면 그들의 친구가 낳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들은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집의 지붕을 뜯어내고 그의 친구를 예수님께 달아 내렸습니다. 남의 집 지붕을 뜯을 때에 그 집 사람들이 야단을 쳤을 것입니다. 집 안에서 말씀을 전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뛰어 나와 집회가 방해 된다고 난리를 쳤을 것입니다. 이런 저언 파생하는 반대에도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밀고 나간 것입니다.
한 권사님이 정성껏 천 번제를 시작 끝 마침. 그 다음날 아내가 뇌동맥 파열로 쓸어졌다. 주변 사람이 수근 거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심하고 본인도 의구심을 품을 만한 상황... 심방하여 예배를 보는데.... "목사님 염려 마세요... 내 아내는 분명이 일어 납니다". 확신에 찬 고백. 그러나 석달 후 아내가 완벽한 모습으로 가정과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믿음의 확신을 갖고 있을 대에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우리 현장에 이룰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확신이 없으면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확신이 있으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능력에 절대 귀의하는 결단입니다. 믿음의 확신은 기적을 나타낸다. 큰 믿음을 큰 능력을, 큰 능력은 큰 일을 이룹니다.
2. 겸손과 순종하는 믿음
백부장은 로마황제의 신하로서 한 지역 사령관을 할 정도로 군사적 능력과 함께 정치적, 외교적, 문화적 소양을 철저히 교육 훈련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로마 황제를 향해 신적 충성을 서약한 사람입니다. 그는 시민권자로서 세계 최고의 자긍심을 갖은 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자시의 하인을 위해 예수에게 나와 주여라고 부릅니다. 이 ‘뀌리에’ 라는 단어는 종이 주인에게 칭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을 부를 때에 쓸 수 있는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랍비’라는 단어입니다. ‘뀌리에’보다는 격이 훨씬 약합니다마는 그래도 존경을 표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통치하는 지방 사령관이 목수의 아들인 예수에게 ‘랍비’라고 부르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하물며 ‘뀌리에’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예수님 앞에 극단의 겸손을 표하는 말입니다.
이런 겸손은 자신을 내어 놓고, 순종하는 자세를 갖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서’의 뜻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는 순종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겸손에 대해 상고 합니다. 시편 10:17은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했습니다. 잠언 22:4은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했습니다. 마태복음 11:29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말에 귀 기울이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보응으로 재물과 영광과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겸손히 사셨고 본이 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백부장을 보시고 감탄하시며 칭찬하시고 그의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3. 이웃에 대한 관심의 믿음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을 갖고 이방인들은 사람같이 여기지 않고 짐승과 같은 취급을 받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이방인이요 로마 통치권자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에게 칭송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유대인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이웃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깊은 인품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삶을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삶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이웃들에게 관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계명 하나님 사랑,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강령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입니다.
뉴욕의 역대 시장 중 가장 존경 받는 라가디아라는 사람이 너무 배가 고파 빵을 훔치다가 잡힌 한 노인을 재판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0불의 벌금형을 내린 후 자신의 주머니에 돈을 꺼내 그 벌금은 자신이 내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토록 배고픈 사람들이 뉴욕 거리를 헤메고 있을 때에 자신은 너무 잘 먹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방청석에 자신과 같은 마음을 느끼는 사람은 모금하자고 모자를 돌렸습니다. 47불이 모아졌습니다. 그는 그 돈을 노인에게 주며 “굶지 마세요 배고프게 살지 마세요”라고 했습니다. 재판정이 눈물의 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를 위해 기도하고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남을 위해 산다는 것이 큰 복입니다. 위대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감동적인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 겸손과 순종의 사람 그리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능력을 베푸시며, 삶을 고치시고, 인도하시며, 영광 되게 하십니다. 매일매일은 하나님을 감동 시키는 믿음으로 사십시다.
주님을 감동시킨 사람
마 8:5-13 / 조상호 목사
오래 전에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과거 여의도순복음교회 부목사님으로 섬기시다가 지금은 성시화교회를 개척해서 섬기시는 명성훈 목사님의 책에서 모 TV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신장개업’이라는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신장개업’이라는 프로그램이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신동엽이라는 개그맨이 장사가 잘 되지 않는 가게나 음식점을 찾아가서 매출을 놀랍게 늘어나도록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한 번은 그 프로그램의 스태프에서 만두전골을 하는 식당을 선정했습니다. 그 식당은 외부 뿐 아니라 내부 인테리어도 손님이 들어가고 싶지 않을 만큼 지저분했습니다. 그리고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는 등 위생상태도 엉망인데다가, 그 식당에서 내놓는 만두전골은 얼마나 맛이 없는지 손님들이 먹다가 인상을 쓰곤 했습니다. 가게 임대료가 월 30만원인데, 한 달 매출이 30만원이 채 안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만 원도 벌지 못하는 가게였습니다. 거기다가 그 가게 주인인 아저씨와 아줌마의 모습을 보면 도저히 음식점을 운영하는 주인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가관이었습니다. 머리를 안 감아서 마치 쓰레기를 줍다가 나온 사람 같았고, 수염도 깍지 않아서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거기다가 앞니가 세 개나 부러져서 손님이 주인을 보면 만두를 도저히 먹지 못할 정도로 대책이 없는 가게였습니다. 그래서 방송팀은 먼저 그 지역의 시장조사를 실시했는데, 만두보다는 ‘돈까스’나 ‘스파게티’를 판매하는 가게로 업종을 변경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 주인들은 생전에 스파게티를 먹어본 적이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스파게티’라는 말도 잘 못해서 ‘스파게티’라는 말을 가르치는데도 하루가 걸렸습니다. 그리고 ‘돈카스’를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하는 주방장에게 가서 1주일 동안 ‘돈카스’ 만드는 법을 배우고, 또 이탈리아에 유학을 가서 ‘스파게티’에 대한 논문을 써서 석사학위를 받은 전문가를 찾아가서 철저하게 기초부터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건물 벽과 내부의 인테리어도 완전히 개조했습니다. 또 염창동에 있는 인공폭포에 가서 하루 종일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하면 된다”라고 소리 지르게 하고, 얼음물 속에 집어넣기도 하고, 산꼭대기까지 뛰어 오르게 하면서 완전히 정신개조를 시켰습니다. 방송팀에서는 주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머리도 짧게 자르고 자른 머리를 염색시키고, 수염도 말끔하게 깎고, 빠진 세 개의 치아도 치과에 가서 새로 해넣으니까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개업을 하게 되었는데, 개업하는 날 목표액이 30만원이었습니다. 원래 한 달 매출액이 30만원인데, 무려 30배의 목표를 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첫날 매출이 무려 124만원을 기록했습니다. 하루 매출이 1만원도 안 되는 가게가 124배가 넘는 매출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가게는 고객에 대한 헌장을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첫째는 고객만족, 둘째는 고객감동, 셋째는 고객졸도" 그러니까 "니들이 와서 만두전골을 먹을려면 먹어라" 는 자세에서, 자기 가게에 들어온 손님을 감동시킬 뿐 아니라, 손님을 깜짝 놀라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고객만족, 고객감동, 고객졸도’의 자세가 124배나 많은 매출을 기록하게 한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감동시켜도 망하던 가게가 잘 되는데 하물며 천지의 주재가 되시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데, 어찌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복되게 살 수 있는 비결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킬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까? 저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조목사야! 나, 너 보고 감동 먹었다. 그래 너 원하는 것이 뭐니? 네가 뭘 원하니?“ 때때로 우리 자녀가 시키지도 않는 가드닝을 한다든지, 베큠을 돌린다든지, 자동차 세차를 한다든지 하면 우리 부모들은 감동받습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용돈을 달라고 하지 않아도 “너, 필요한 것 있니? 용돈 떨어지지 않았어?”하면서 용돈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일입니다.
오늘 저는 주님을 감동시킨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을 감동시키다 못해 주님을 깜짝 놀라게 한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사람의 성도, 이름도 알 수는 없지만, 그 사람의 직업을 통해 우리는 단순히 그를 ‘백부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백부장이 주님을 깜짝 놀라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다같이 10절을 한번 볼까요?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여기 ‘기이히 여겼다’는 말은 NIV 영어성경에 보면, ‘astonished’라고 번역하고 있고, 똑같은 내용이 누가복음 7장에도 나오는데, 거기에는 ‘amazed’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두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깜짝 놀라게 하다’, ‘아연케 하다‘, ’자지러지게 하다‘라는 거의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주님께서 졸도할 만큼 깜짝 놀라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졸도할 만큼 깜짝 놀라셨다‘는 내용을 성경에서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고 언급된 곳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풍랑을 잔잔케 하신 주님을 보고 제자들이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마8:27). 주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무화과나무가 곧바로 말라버린 것을 보고 제자들이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마21:20). 군대 귀신 때문에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바다에 몰살당한 것을 보고 거라사 동네 사람들이 놀란 적이 있습니다(막5:20). 주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다시 살려내자 사람들이 크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막5:42). 이처럼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는 많이 있지만, 예수님께서 깜짝 놀랐다고 언급된 부분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졸도할 만큼 깜짝 놀라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백부장이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했을까요?
1) 백부장의 사랑
첫째로 주님이 놀란 이유는 백부장의 사랑 때문입니다. 백부장의 사랑이 주님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당시 이 백부장은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로마제국의 장교였습니다. 가버나움에 주둔하면서 그곳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아주 높은 지위는 아니지만, 100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집안일을 돕는 하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인 중 하나가 어느 날 병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다는 나사렛 예수께서 자기가 사는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백부장이 주님께 찾아왔습니다. 5절과 6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지금 백부장이 누구를 위하여 주님께 간청하고 있습니까?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주님께 간청했습니까? 아니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쁜 자기의 딸을 위해서 주님께 간청했습니까? 아닙니다. 가족이 아닌 중풍병에 걸린 하인을 위하여 주님께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로 볼 때,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당시에는 하인이나 종은 짐승 취급을 받았습니다. 주인은 종을 돈을 주고 사기도 하고, 돈을 받고 팔기도 하고, 종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엄지발가락을 자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종을 죽여도 상관없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로 볼 때, 하인이 병이 들면 밖에 버려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그 하인을 포기할 텐데 본문에 등장하는 백부장은 집안일을 도와주기는 커녕, 오히려 밥값도 하지 못한 채 누워있는 하인을 위해서 모든 체면을 버리고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하인을 고쳐달라고 주님께 요청했습니다. 원래 이 백부장은 부탁하기 보다는 부탁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아무런 지위도 없는, 그것도 로마 사람이 아닌, 식민지 백성인 예수께 나와 간청을 한다는 것은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하인의 중풍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 찾아온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백부장에게는 하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에게는 하인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백부장의 하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백부장과 같은 이 모습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도 백부장처럼 사랑을 실천할 때, 주님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어느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만찬을 드시기 전에 주님께서 두 가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첫 번째로 주님께서는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주님은 사랑을 말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직접 행함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둘째로, 자신을 팔아넘길 가룟 유다의 배신을 아시고도 끝까지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가 주님을 배신해도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주님이 모범을 보여 주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할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주님의 제자라고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소천하신 기독교 철학자로 라브리 운동을 하신 프란시스 쉐이퍼박사는 ‘사랑’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나타내는 ‘제자의 배지’라는 말을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성경지식을 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철야 기도하고 금식 기도하는 우리를 보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성경지식이나 기도의 분량이나 금식기도가 우리의 배지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사랑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사랑을 중요시 합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어떤 글에서 한 재미있는 유머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 목사님이 나체족들로부터 설교를 부탁받았습니다. 목사님은 마음이 꺼림직 했지만, 그들도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성령께 의지하고 말씀을 전하러 갔습니다. 사모님은 목사님이 나체족들에게 설교하러 간 사이에 그 목사님이 시험이 들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목사님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사모님은 궁금해서 목사님이 들오자마자 목사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여보, 말씀을 전하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목사님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글쎄, 설교하면서 보니까 그 사람들은 옷도 입지 않고 주머니도 없어서 헌금은 어떻게 할까, 좀 신경이 쓰였지.”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실 때 무엇을 보실까요? 그 목사님처럼 헌금할 우리의 지갑을 보실까요? 아니면 우리의 멋지게 차려입은 모습을 보실까요? 아니면 비디오 프로젝트나 신디 사이저와 같은 훌륭한 장비를 보실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무엇을 보실까요? 주님은 우리들이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사랑을 중요시하고 사랑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이 사랑을 실천함으로 주님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백부장의 겸손
둘째로 주님이 놀란 이유는 백부장의 겸손 때문입니다. 백부장의 겸손이 주님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중병에 걸린 하인을 사랑하는 백부장의 모습을 보시고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백부장이 이렇게 주님께 말씀합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주님께서 고쳐주시겠다고 할 때 백부장이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까? 주님께서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추한 자기 집에 주님을 들어오시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실제로 백부장의 집이 누추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의 로마제국의 장교들은 결코 가난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예수님이 이제까지 방문했던 어떤 곳보다도 훌륭한 집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로마황제보다 더 높으신 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할 만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백부장의 이러한 겸손의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감동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겸손함이 주님을 감동시키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겸손함이 우리가 이 땅에서 복된 삶을 사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기가연(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 소장으로 사역하시는 송길원목사님의 책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말에 2개월 동안 재교육 명령을 받은 중위가 전보를 쳤습니다. “소집에 응할 수 없어 유감임. 누가복음 14장 20절을 참조하기 바람.” 육군성 사람들이 성경을 찾아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이어 육군성에서도 전보로 회신했습니다. “귀하의 전문에 관하여 마태복음 8장 9절을 참조하시기 바람.“ 그 성경 구절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교만한 사람은 군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군대에서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똑같이 적용됩니다. 군대에서나 회사에서나 학교에서나 교만한 사람은 인기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 주위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전 세계에 식민지를 두고 모든 국제무역을 파운드화로 결재하여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을 들었던 영국의 번영과 몰락을 다룬 일본인 학자 니카니시 테루마사의 "대영제국 쇠망사"의 결론은 한마디로 "교만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개인도 사업체도 나라도 민족도 교회도 교만하면 망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약4:6).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지름길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잠16:18).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겸손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백부장처럼 겸손함으로 주님을 깜짝 놀라게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백부장의 믿음
셋째로 주님이 놀란 결정적인 이유는 백부장의 탁월한 믿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좀처럼 놀라지 않으시는 분이신데,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깜짝 놀라셨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친히 가서 고쳐주겠다는 데도 백부장이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하자, 주님은 깜짝 놀라셨습니다. 다시 한번 1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여기 '이만한 믿음'이란 말을 NIV 영어성경에서는 "such great faith"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주님께서 "아직까지 이스라엘 온 땅에서 백부장과 같이 이렇게 위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깜짝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백부장의 명을 받은 한 하인이 집에 가서 보니 중병에 걸려 자리에 누워 있던 하인이 이미 나은 것입니다. 서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주님께서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그 시각에 중풍병에 걸렸던 하인이 완전하게 낳았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처럼 믿음은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히브리서 11장 6절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에게 사랑이 필요하고,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랑도 있고 겸손도 있지만, 만약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봉사도 하고 열심히 물질을 드린다 할지라도, 만약 믿음이 없이 이러한 일들을 행한다면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믿음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오래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경상남도 거창고등학교의 정영창 교장선생님은 인성 교육이 부족한 대한민국의 교육계에 인격과 실력을 겸비한 인재양성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분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새로운 고등 교육을 시도해 보려는 부푼 꿈을 가지고 거창고등학교에 부임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학교에 빚이 너무 많아 아무리 갚으려고 해도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1958년 4월, 학교가 부도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성경, 찬송, 그리고 담요 한 장을 가지고 거창읍에서 40리 떨어진 웅안현 산마루 언덕에 있는 굴속에 들어가 자리를 펴고 1주일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미국 유학을 갔다 와서 이 나리에 새로운 고등교육을 해보려고 하는데, 이렇게 초반부터 부도를 맞게 되었으니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렇게 사흘 동안 주야로 매달려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사흘이 지나도 너무나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사흘째부터는 기도의 내용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 아무리 기도해도 마음이 답답합니다. 응답의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나님께 윽박지르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정 그러시다면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제가 1주일 동안 금식 기도 마치고 서울에 가겠습니다. 그리고 동아일보에다가 ‘하나님은 안 계십니다’라고 광고를 내겠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협박하며 기도를 하고나니, 다른 것은 몰라도 가슴이 펑 뚫리고 시원하더랍니다. 그리고 1주일 만에 산에서 학교에 내려 가보니 서무과에 편지가 하나 와 있더랍니다. 조우복이라는 미국에 사는 크리스챤으로부터 온 편지였습니다. 조심스럽게 열어보니 그 안에 2,050달러가 적힌 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금액은 당시 거창고등학교의 빚을 정확하게 갚을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할렐루야! 결국 거창고등학교는 부도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전영창 선생님은 1971년에 학교의 새로운 발전을 위하여 또 필사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미국의 유명한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님으로부터 22만 달러의 수표가 와서 그 돈으로 오늘날과 같이 유명한 거창고등학교를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하는 일마다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세워놓은 계획대로 되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고, 자꾸만 자꾸만 꼬여가고 있습니까? 여러분, 주님께서 백부장에게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대로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고 기뻐하시고, 우리의 믿음에 따라 역사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이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부족한 믿음이 나의 인생을 풀리지 않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반대로 내 인생이 풀리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믿음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했던 백부장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깜짝 놀라게 했던 백부장과 같은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감동에 목말라하는 시대입니다. 과거에는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들이 인정을 받는 IQ 시대였지만, 요즘에는 유머감각이 있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똑똑 튀는 개성을 중요시하는 EQ 시대가 되었습니다. 몇 년 전에 젊은이 1,000명에게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조사기관에서는 요즘 젊은이들은 자동차를 원하고, 핸드폰을 원하고, 멋있는 이성 친구를 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조사 결과는 완전히 딴판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이 원하는 것은 “나는 감동 받고 싶다”였습니다. “나도 뜨겁게 감동받고 싶다. 내 생명을 걸고 외칠 수 있는 신념이 있었으면 좋겠다. 목이 터져라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젊은이들의 바램이었습니다. 즉 요즘 젊은이들은 감동에 목말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비단 젊은이들 뿐 아니라 연세 드신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동받으면 좋아하십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감동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더구나 감동을 주어야 할 사람들이 많은 실망과 분노만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짜증나게 하는 사람들이 아닌,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감동을 잃어버린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백부장은 중병에 걸려 누워 있던 하인을 위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겸손한 믿음으로, 그리고 굳건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감동시켰고, 주님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백부장처럼 주님을 감동시키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백부장처럼 사랑과 겸손과 믿음으로 주님을 깜짝 놀라게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깜짝 놀라게 해드리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감동시키면, 주님께서도 우리의 삶의 현장에 감동을 넘치게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3)
마 8:5-13 / 윤창용 목사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라는 분이 있습니다. 유명한 소설 「좁은문」을 쓰신 분입니다. 어린 시절 연상의 사촌 알리사를 사랑하는 주인공 제롬의 애틋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이 왜 그렇게도 안타까웠는지 마치 내 이야기인양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드는 그 이야기가 자기의 자전적인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1951년, 앙드레 지드는 세상을 떠났지만 말년에서야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프랑스 신문들은 그 해 노벨 문학상을 앙드레 말로가 받기를 원했는데 지드가 받아서 항의조로 신문에 지드의 사진을 거꾸로 게재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유명한 작가인 지드는 어린 시절 법학 교수인 아버지를 여의고 기독교 신자인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 유소년기는 거의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늘 거짓말과 속임수에 능한 소년이었고 꾀병으로 3 주 동안이나 학교에 가지도 않았고 가련할 정도로 겁이 많고 심약한 학생이 앙들레 지드라는 학생이었습니다. 비전도 없고 투지도 없는 열등생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시를 낭송하도록 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평범하게 시를 읽었지만 앙드레 지드는 감정을 한껏 실어 멋지게 시를 낭송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에게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넌 아주 훌륭한 작가가 될 소질이 있다"는 칭찬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친구들로부터는 '잘난 착 하는 녀석'으로 몰려 왕따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칭찬을 생각하며 문학소년의 꿈을 키워 나가 앙드레 지드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이냐" 라는 주제로 오늘은 세 번째 말씀을 전하는 시간입니다. 부제목은 "칭찬하며"입니다.
남자 분들에게 설문 조사를 했더니 남자들이 제일 살 맛 나는 때가 아내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때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직장에서 일이 잘 되고 동료와 상사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는 때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칭찬은 사람들을 신나게 하고 즐겁게 하는 덕목입니다.
그런데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양창순의 대인 관계 클리닉 기사에 보면 사람들은 각자의 선입견과 편견이 있기 때문에 100% 칭찬은 없다는 것입니다. 10% 정도의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아도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칭찬을 100% 받지 못한다고 해서 실망하지 마시고 10%정도에 해당되는 분들에게 칭찬을 받아도 대단하다는 것을 아시면 합니다. 그러면 자기의 선입견과 편견 때문에 칭찬하지 못하는 90%가 문제입니다. 이런 분들은 오늘부터 칭찬하는 것을 연습하시길 바랍니다.
1. 목사는 신자들을 늘 칭찬해야 합니다.
목사가 해야 할 일은 제일 먼저 신자들에게 '잘했다고' 칭찬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부족한 저의 눈으로 볼 때도 부족한 부분이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적하는 것은 목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목회는 잘못을 지적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는 칭찬과 격려를 통해서 더 잘 할 수 있도록 치켜세워 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어린이가 아니기 때문에 제 경험으로 보아서 잘못을 지적해 주지 않아도 믿음 생활만 충실하게 하면 저절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도 사실은 알고 있는데 교회 목사까지 나를 보고 잘못했다고 야단을 치면' 신자들은 기댈 곳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주지 못하는 위로와 칭찬을 주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칭찬과 격려를 드리려고 노력합니다.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님의 목회 승리의 비결은 바로 '칭찬'이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별 것 아니어도 늘 예배 시간에 신자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칭찬과 격려! 그것이 우리가 지녀야 할 덕목입니다.
'잘했다고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지옥에서 지옥을 이끌어 가는 이사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사탄은 사탄이 기대했던 것만큼 경영이 잘 되지 않는다고 걱정들을 심하게 했습니다. 사탄은 최대한 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끌어들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책들을 지옥 이사들이 한 사람씩 일어나서 말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 말했습니다. "내가 지구로 가서 사람들한테 천국이 없다고 설득해 보겠습니다." 그랬더니 사탄이 그 말을 받아서 "안돼! 내가 그 말을 해 보았지만 먹혀들지 않았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이사가 나섰습니다. "그럼 내가 가서 사람들한테 지옥이 없다고 설득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또 사탄이 막으면서 "그것도 안돼!"
그러자 꾀 많게 생겨 보이는 지옥 이사 한 명이 뒤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지구로 나를 돌려보내 주면 이 곳을 꼭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 한태 그냥 서두를 것이 없다고 하면 될 것입니다. 나 봐라! 지옥에 갔다가도 다시 오지 않느냐고 이야기하기만 하면 사람들을 다 지옥으로 끌어 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시간의 차이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데릭 빙햄이라는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칭찬 받을 만하거든 지금 바로 그를 칭찬할 시간이다. 죽은 후에 그는 자기 묘비를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친구에 대한 친절하고 쾌활한 칭찬과 인정은 명예나 돈보다 소중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고 용감하게 만들며 삶에 대한 열의와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 칭찬입니다.
사랑하는 동광 성도 여러분 ! 칭찬합시다.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비난과 험담입니다. 칭찬은 하나님 나라를 넓히는데 쓰이는 말의 도구입니다. 지금 사랑한다고 말하십시오. 지금 칭찬하시길 바랍니다. 행복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우리만 칭찬하느냐? 아닙니다. 예수님도 죄인들을 칭찬했습니다.
복음서를 읽어가다 보면 예수님이 죄인들을 칭찬하신 경우가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백부장이 등장합니다. 백부장은 로마 군대 직제상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린 로마 장교입니다.
로마의 실력자인 폼페이우스가 동방정벌의 대군을 일으켜 그 판도를 넓혀가며 유대인들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 예수님 오시기 전 66년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스라엘 국내의 왕권을 잡고 있었던 하스몬 왕가는 정권 쟁탈전만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로마의 실력가인 폼페이우스의 힘을 빌어 정권을 유지하려는 괴뢰 정부가 이스라엘 사람만 만 이 천명을 죽이면 탄생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정권 탈취에만 신경을 쓰는 왕가에 의해 주권을 로마에게 빼앗기고, 이스라엘은 죽은 짐승처럼 갈기갈기 찢겨졌습니다. 로마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산헤드린을 다섯 개로 나누어 이스라엘의 구심점을 흩어버렸고, 망국의 비운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런 나라의 군대장교이니 이스라엘 사람의 미움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습니다. 로마인들은 한 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루살렘 성안으로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대로 미움이 뼈에 사무쳐 있는 사람이 로마 사람, 로마 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로마 사람 백부장을 인정하고 칭찬했습니다. 보통으로 인정하고 칭찬한 것이 아니고 최고로 인정하고 최고로 칭찬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주님은 이 백부장을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이 백부장에게는 이렇게 칭찬 받을 만한 착함과 믿음이 있기는 했습니다. 하인이 병이 들었는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 줄 수 있으시면 고쳐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자기 아래 사람을 위해서 간구하는 점령군 장교의 애원을 들으신 예수님은 지체 없이 그의 착함과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라고 하시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로 하인이 나았다고 성경은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칭찬과 격려를 들은 백부장은 그 시점으로부터 완전히 그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또 마태복음 9장에는 열 두 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혈루증이라 함은 우리 몸에 히루딘이라는 피를 분해하는 효소가 생겨나 피가 계속 흐르게 되는 병입니다. 히루딘을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동물이 거머리라고 합니다. 요즘 의학계에서는 이 거머리의 히루딘을 이용해 손가락 절단 수술 후 염증이 생기는 것을 방지해 완벽하게 봉합 수술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몸에 이 히루딘 분해 효소가 있으면 피가 멎지 않아 죽게 됩니다. 이 병을 고치려고 했지만 이 여인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레위기 15장에 보면 이 피가 흐르는 유출병이 있는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정결의식을 행하되 흐르는 물에 씻을 것이며 만진 그릇을 다 깨 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저주 받은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에수님은 그녀를 돌아보시고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물론 그 여자에게 칭찬 받을 만한 믿음이 있기는 했습니다.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딸이라고 불렀습니다.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선포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칭찬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요한복음 4장에 수가성에 살던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던 부도덕한 여자였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살던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불행한 여자를 찾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와 대화를 하면서 그 여자를 인정하고 칭찬했습니다. 굉장한 칭찬은 아니었지만 그 여자의 말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 여자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자기의 죄를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그 여자를 향해서 나쁜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네 말이 옳도다"라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 여자가 한 말이 굉장히 옳은 말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자를 격려하여 밑바닥 인생에서 끌어올리시기 위해 그 여자를 인정하고 칭찬했습니다. 그 한마디로 그 여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남강휴게소를 지나다가 목사님들과 국수를 먹기 위해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준 돈을 두 번 세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준 돈은 한번 세어보고, 나에게 줄 돈을 두 번씩이나 세어보느냐고 묻자, 옆에 계신 목사님이 저를 가리키면서 "이 분은 이쁜 여자분에게만 말을 거는 사람이라고"하자 저녁 시간에 유부국수에 큰 유부가 세 개, 작은 유부가 국수보다 더 많이 주는 것을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3. 칭찬 받고 칭찬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칭찬은 참 좋은 것입니다. 칭찬은 받아도 좋고 칭찬은 해도 좋습니다. 칭찬은 받아도 기분이 좋고 칭찬은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칭찬을 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칭찬받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께도 칭찬을 받고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자 그런데 아무 것도 없는데 칭찬을 할 수 있습니까? 칭찬을 받으려면 칭찬을 받을 만한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고넬료는 하나님께도 칭찬을 받았고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와 구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이사랴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함이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의 이야기입니다. 22절에서는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행10:22).
고넬료는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았고, 하인들에게도 칭찬을 받았고, 유대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들도 칭찬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이 믿음과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는 그들을 세울 때 "믿음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듣는 사람들을 택한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칭찬들을 만해야 합니다.
디모데도 칭찬받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과 친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사람이 디모데였습니다.
우리는 칭찬과 격려로 기쁨의 사람이 되어가고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충성된 종이라고 자꾸 칭찬하시면 우리는 점점 충성된 종이 되어 갑니다. 칭찬은 사람을 만듭니다.
그 다음 저와 동광 성도들은 칭찬을 하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내는 남편을 칭찬하고 남편은 아내를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목회자들은 신자들을 칭찬하고 신자들은 목회자들을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사는 믿지 않은 불신자들도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람을 칭찬해야 하는 이유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사람은 누구나 자연적인 선함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데 우리가 그 자연적인 선함과 아름다움을 칭찬할 때 그 선함과 아름다움이 발전하고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람은 누구나 믿음을 가지기 시작할 때 영적인 선함과 아름다움이 피어나는데 우리가 그 영적인 선함과 아름다움을 칭찬할 때 그 영적인 선함과 아름다움이 더욱 더 발전하고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서로 서로 칭찬하십시다. 칭찬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못난 것들을 보시고 황송하게도 예쁘다고 사랑스럽다고 아름답다고 의롭다고 충성스럽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들을 칭찬합니다. 우리들도 서로 서로 칭찬하면서 사십시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절대 의존의 감정
마 8:5-13 / 김흥규 목사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 Schleiermacher, 1768―1834)는 종교를 '절대 의존의 감정'(the feeling of absolute dependence)으로서 정의한 적이 있습니다. 피조물이요 유한자인 인간이 창조주요 절대자인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의식(consciousness)이 종교의 본질이라고 보았던 것이지요.
아마 이 보다 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말도 없을 것입니다. 신앙은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의식입니다.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아직도 자기 지식이나 능력이나 경험을 더 의지한다면 절대 의존의 감정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참 기독교 신앙인이 아닐 것입니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를 세 명만 꼽으라면 대개 찰스 스펄젼(Charles H. Spurgeon, 1834―1892)과 드와잇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 그리고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1918― )을 들 수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들은 그토록 위대한 설교자가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유독 그들만 특별하게 사용하셨을까요?
스펄젼은 자신의 「설교집」서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제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면, 저는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지식이나 능력도 없는 아이였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게 어떤 특별한 은사나 재주가 있어서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에게는 하늘로부터 오는 영감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저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되어버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의 영감으로 채워지게 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말할 수 없습니다!" 스펄젼이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했기 때문에 마이크도 없었던 시절에 수백만 명이 고꾸라지는 명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무디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로서 무디가 네 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겨우 중학교 7학년까지만 마쳤습니다. 더욱이 유명한 부흥사가 된 다음에도 평생토록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Mr. Moody'라고 불렀습니다. 세상적으로 아무 자랑할 것이 없었던 무디를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들어 쓰셨습니다. 무디는 평생 1백만 마일 이상 선교 여행을 했습니다. 일생 동안 전 세계 1억 명 이상에게 설교했습니다. 무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이 저보다 설교를 훨씬 더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제가 말할 수 있는 전부는 제가 설교할 때에 하나님께서 저를 쓰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무디를 쓰신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지구상에서 일찍이 빌리 그레이엄보다 더 위대한 부흥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수백만 명이 모여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레이엄은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가끔 이런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천국에 가서 가장 먼저 주님께 여쭤보고 싶은 질문은 '주님, 왜 하필이면 저를 쓰셨습니까? 주님, 왜 허구 많은 사람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노스 캐롤라이나 출신의 촌놈을 뽑으셔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하게 만드시고, 좋은 사역자들을 붙여주시고, 20세기 후반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위대한 일에 동참하도록 만드셨나이까?' 저는 이 질문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봤지만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대답을 내리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빌리 그레이엄을 쓰시는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그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② 본(本): '절대 의존의 감정'으로 가득찬 백부장
본문은 가버나움 백부장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똑같은 말씀이 눅 7: 2―10에 또 나옵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로마군의 장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동족인 유대인들도 갖지 못한 절대적인 믿음 때문에 그의 하인이 낫게 되었습니다. 이 백부장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절대 의존의 감정에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백부장은 오늘날로 치면 중대장 급에 해당되는데 로마 군대의 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간 장교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약 성경에서 백부장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언제나 좋게 말하고 있습니다(눅 23: 47; 행 10: 22; 22: 26; 23: 17, 23, 24; 24: 23; 27: 43 참조). 아마 여러분들은 행 10장에 나오는 백부장 고넬료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이방 선교의 문을 열도록 했던 것이 바로 고넬료의 경건한 믿음이었습니다. 어쨌든 간에 백부장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백부장의 믿음'은 언제나 '이방인의 믿음'을 상징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역시 예외 없이 '이방인 백부장의 신앙'과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날카롭게 대비하고 있습니다. 먼저 백부장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에게 하인이 있었습니다. 아마 이 하인 역시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인, 즉 이방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인이 중풍병에 걸려 집에 누워 있게 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중풍병은 사람의 수족을 마비시켜 큰 고통을 주는 병입니다. 그 당시 로마법으로 보면 하인은 주인의 재산이요 살아있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심지어 주인이 자기 자신이나 자기 집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할 경우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로마 문서에 보면 종이 병들고 늙어져서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때 종을 함부로 버리는 주인이 있었다는 기록들이 종종 나옵니다.
백부장의 입장으로 볼 때 중풍병에 걸려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누워 있기만 한 하인을 버릴 수도 있고 또 무관심하게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인격자였습니다. 자기 하인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인의 병을 고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각색병자들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고치신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이지요.
마태에는 백부장이 예수님께 직접 찾아와서 자기 하인이 중풍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고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누가에는 유대인 장로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서 구원을 요청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백부장이 자기 종의 일로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입니다. 하인을 깊이 사랑해서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인의 병에 대해서 들으신 주님은 백부장의 집에 직접 가셔서 그 하인을 고쳐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백부장의 믿음은 바로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뒤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의 경우 더욱이, 예수님께서 직접 자기 집에 오셔서 하인에게 안수기도를 해주시길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8―9절에 보면 이와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표준 새번역 개정판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주님, 나는 주님을 내 집으로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마디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백부장이 이와 같이 겸손한 태도를 보인 것은 실상 유대교 율법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 관습에 따르면, 경건한 유대인은 이방인의 집에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행 10: 28; 신 7: 3 참조). 백부장은 이와 같이 까다로운 유대교 율법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유대 관습을 최대한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백부장은 인격자요 타문화에 대한 이해심이 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의 이와 같은 태도는 본질적으로 그의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 감정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백부장은 군인 정신이 매우 투철한 사람이었습니다.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습니다. 상관의 명령을 어기는 군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로마군대에 있어서 백부장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역사가인 폴리비우스(Polybius)는 백부장이 될 자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부장들은 위험을 쫓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명령을 내릴 수 있어야만 하고, 행동이 흔들림이 없어야만 하며, 믿음직스러워야만 한다. 그들은 전투에 뛰어들어가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해서는 안되며 전투가 절실히 요구될 경우 진지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 역시 이와 같이 그 당시 백부장에게 요구되는 자격요건을 다 거쳐서 뽑혀진 사람이기 때문에 훌륭한 군인 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직접 오실 필요가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명령만 내리시면 자기 하인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멀리서도 간접적으로 병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실, 복음서에서 나타나는 대부분의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현장에서 직접 일어났습니다. 환자의 상처 부위에 손을 대시거나 환자에게 권위 있는 말씀을 주셔서 현장에서 주로 치료하셨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의 하인의 경우 예수님께서 환자가 있는 현장에 직접 가시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본문 13절을 보세요. "그리고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시각에 그 종이 나았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바로 그 시간에 동시다발(同時多發)적으로 하인의 병이 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놀라운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십니다.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예수님은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보시지 못했던 절대적인 믿음을 백부장에게서 발견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에 빠지게 될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날 것인가를 예언하십니다.
11―12절을 한번 보세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시민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동과 서로부터 천국에 들어가게 될 많은 사람들은 백부장이나 저와 여러분들과 같은 이방인들을 말합니다. 이방인들이 천국에 들어가고 오히려 '나라의 본 자손들,' 즉 정통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갈림길이 무엇에 근거합니까?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신앙과 불신앙의 기준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갈라집니다.
③ 결(結): 하나님께 배달된 '절대 의존의 편지'
전라남도 해남에 '등대원'이라는 6.25 전쟁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이 있었습니다. 이준목 목사님과 사모님이 이 고아원을 설립해서 많은 고아들을 길러냈습니다. 어느 날 우체부가 이상한 편지 한 통을 고아원에 가져왔습니다. 편지 겉봉에는 우표도 주소도 없이 그냥 '하나님 전상서'라는 글씨만 또박또박 쓰여져 있었습니다. 우체부는 장난 편지인줄 알고 그냥 버리려고 하다가 내용이 너무 심각하고 기특해서 등대원 이 목사님께 가져 왔습니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님 전상서. 하나님! 저는 지금 공부를 무척 하고 싶습니다. 공부하고 싶은 갈증이 나서 못 견디겠습니다. 굶어도 좋고 머슴살이를 해도 좋습니다. 누구라도 제게 공부할 길을 열어 주십시오. 그 길이 열린다면 신명을 바칠 테니 부디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처럼 도와주십시오." 얼마나 지우고 다시 쓰고 했던지 닳을 대로 닳아버린 편지에는 한 소년의 공부하고 싶은 열망이 그대로 스며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 길로 편지의 주인공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소년을 찾아 등대원에 데리고 와서 공부를 시켰습니다.
소년은 해남에서도 훨씬 더 들어간 산정리라는 산골 마을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가 술과 노름으로 전답(田畓)을 다 날리고 남의 집 머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중학교 가는 것을 막고 자기처럼 머슴이나 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어린 아들은 교회 종탑 밑에서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조건 편지를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제발 자기가 공부좀 하게 도와 달라고 무작정 편지를 띄웠던 것입니다.
마침내 소년의 기도가 응답되어서 소년은 고아원에서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를 원 없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년은 중고등학교를 장학생으로 마치더니 한국 신학대학을 입학해서 나중에 스위스 바젤(Basel) 대학교에 유학까지 가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한신대학교 제 3대 총장 오영석 박사이다.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십니다. 오영석 소년이 절대 의존의 감정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전라도 산골에서 머슴이나 살다가 쓸쓸하게 늙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전상서,' 그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한 채 눈물로 썼던 천상(天上)의 편지가 마침내 하나님께 배달되었습니다.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서 역사 하십니다!
참된 믿음은 절대 의존의 감정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얼마나 기대고 있는가 하는 '의존도의 크기'만큼 큽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하여 더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더 의존하면 의존할수록 하나님의 능력도 비례해서 더 크게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백부장과 같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시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