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계신 여러분, 그리고 타지에 있으면서도 늘 고향을 마음에 품고 계신 여러분께
지난 4월 26일 저희 아버지(항농)가 변고를 당했을 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고 위로해 주심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제 아버지는 해방이 되던 해 성송면 계당리의 농가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가끔씩 해 주셨던 말씀, 그리고 이번에 유품을 정리하면서 발견한 옛 수첩을 통해서 짐작해 보건대 아버지는 청년기부터 "조국 농업의 근대화"에 기여하리라는 꿈을 꾸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울대학교 농대에 진학하여 농촌지도학을 공부하셨고, 1975년에 도미하여 미네소타대학에서 Agricultural Extension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1980년도에 귀국한 후에는 잠시 교육개발원 연구원직을 거쳐 그 이듬해부터 2010년 은퇴하실 때까지 서울대학교 농업교육학과(현 농경제사회학부 지역사회개발학 전공)에서 봉직하셨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자신의 출생이나 성장 이력이 자기 공부와 관계가 없는 경우도 많지요. 하지만 아버지의 경우에는 당신이 하시는 일이 늘 고향에 대한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컴퓨터나 인터넷 사용이 상대적으로 능숙하지 않은 세대에 속하면서도 고창 사람들 카페에 늘 오신 것도 바로 그런 사랑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아버지가 쓰시던 컴퓨터를 정리해 보니 즐겨찾기 탭이 다섯 개가 있었는데 그중 두 개가 고창 사람들 카페더군요. 아마도 하나는 중복으로 설정이 되었지만 삭제하는 방법을 모르셨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두 배의 애정을 가지고 계셨기에 굳이 삭제하지 않으셨던 것 같기도 하고요.
아버지의 유학 시절 저는 외가(전주)와 친가(성송면 계당리)를 오가며 자랐습니다. 이번에 아버지가 쉬실 자리를 정돈하면서 방문했던 고향은 많이 바뀐 듯 하면서도 옛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자주 올라가 놀던 등 굽은 감나무, 집 마당에 있던 석류나무는 사라졌지만 논 뒷켠에 보이는 산 능선이나 문중 제각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자라오면서 지켜본 아버지는 식구들, 동료들, 제자들에게는 무척이나 너그러우셨지만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늘 엄격하셨습니다. 특히 검소함과 근면함은 고창에서 자라나던 시절부터 몸에 밴 미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채찍질해가며 많은 일을 하셨지만 따로 취미나 여가를 즐기시지는 않았습니다.
유일한 예외는 술과 담배였습니다. 그런 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가족들은 아버지의 음주와 흡연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했습니다. 작년 가을 아버지 폐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들었을 때, 곧이어 심장과 담낭에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들었을 때, 저와 가족들은 너무나 큰 자책감에 빠졌습니다. 이렇게 돌아가시고 나니 상실감 못지않게 후회의 감정이 너무나 크게 다가오네요.
그래도 여러분들의 위로에 힘입어 이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있습니다. 오프라인, 온라인을 막론하고 위로해 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 말씀을 올립니다.
2016년 5월 6일
항농아들 김용진 올림
첫댓글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그저 먹먹하기만 합니다
위로 감사합니다..
세월이 약이라지만
지금 심정 얼마나 힘들겟어요
성님 가고나서
(고향과 ) 인연이 끊어진줄 아랏는데
이렇게 방문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 고향인 셈이기도 하니 계속 이어가야죠.
고창사람들 하면 맨 먼저 떠오르던 분 이셨습니다.
네, 아버지도 고창사람들을 가슴 속에 제일 크게 품으셨던 것 같습니다.
@항농아들 김감독님이 아래 동영상을 찍어 올리신 김전일님이십니다. 당시엔 영등포촌놈 닉네임이었구여. 작년에 새로 바꿨네요^^^
다른 동영상도 많겠지만 길이 보관해둘 영상을 기록해주셨습니다.
http://durl.me/827hiq
PLAY
@민의회 네. 영상 고이 잘 간직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너무나 큰 상실감에 뭐라 위로를 더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취미 생활도 여가 시간도 즐기지 않으셨던 분이기에
넓은 품으로 안아주셨던 사랑이 깊고 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고창에 내려 올때는 꼭 연락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머니께도 그렇게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민의회 김식
네. 꼭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졸지에 상을 당하시고 아버님을 유택에 모시느라 애 많이 쓰셨구랴..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린들 위안이 되지 않을거 같아 더 말씀 드리지 않겠으나
기왕 먼길 가신분은 마음속에나 담아 두시고,,,
금슬 좋게 지내시던 분들 한분을 먼저 보내시고 나면 상심이 많이 크시다 들었고 또 보아 왔기에
말씀드리니 누구 보다도 어머님이랑 같이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시면 하는 마음을 전해 드립니다..
고향 분들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항농 아들....
김용진 ~조카님..
너무 애통한마음 아직도
감출수 없어 눈물이 핑...
고향사람으로 먼 일가
친척도 아닌 그냥 바람과 지기를 같이 한 인연으로도
항농님의 따스한 음성을
생각하면 절절 해옵니다.
부디 ~ 가끔씩 어머니
소식이라도 ~ 아버지기억이 나거들랑~방문해주세요.
항농 아들은 정말이지 우리들 공동 조카님 입니다.
네. 조사도 감사하게 간직하겠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위로의인사는 드렸지만 각설하고,춘부장은
나의 중학교 5년 선배님이고
내큰놈 결혼주례의 특별한 관계
로 상면하는날에는 바늘과실
처럼 내가늘 경호팀처럼 각별
했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사이인데, 받은 충격은 유가족
보다 강도는 낮을지언정 지금도
누군가한테 뒤통수 맞은듯 충격
이 십여일 지났어도 먹먹하다오 ·
용진씨 자당, 나의 형수님께서
조금 차분해 지시면 다시한번
정중한 예갖추겠다고 보고해
주시게나 ‥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큰 위로 감사합니다.
어머님 더욱 많이 챙기시길 요 ~ ><
네, 후회하지 않도록 더 잘 해야겠어요. 감사합니다.
가능 하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한 5년쯤 전으로 되돌리고 싶네요… 더 일찍 발견하고 대응했으면 하는 후회가 큽니다.
용안을 뵐일은 별로 없었지만,
향촌을 위해 Cafe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하신
아버님을 보내신
영식군과 가족에게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한국의 최고 대학에 계시면서도 단 한번도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항상 낮은 자세로 우리와 눈높이를 같이 해주신 큰형님이며, 우리의 지도자 였습니다. 장지를 다녀온 날 밤에 항농님과 같이 했던 동영상을 보며 아직은 떠나지 않으신 것 같은 기분은 지금도 똑같습니다. 그 수많은 까페 회원들과 수많은 시간들을 같이하며 차별없는 언행과 행동은 제가 두고두고 배워야할 덕목입니다. 나의 영원한 친구 항농님의 몸은 떠나 셨어도 정신은 그대로 남아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항농님처럼 늙어가고 싶은 소망입니다.
동영상은 시간 날때마다 메일로 보내드리리다.
저도 조금이나마 아버지를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올립니다.
향농님께서 저의 생생연에도 오셨는데
같이 온 사람들에 이끌리어 바로 가시는 통에 차도 한잔 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됩니다.
위로 감사합니다..
항농오라버뉠 다시 만난듯 방갑고 고마운 글이네요.
절대 잊지못할 사랑을 주고가신 오라버뉘~
그곳에서도 느을 평안하시길 빕니다.
고맙습니다~
때 늦은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영식에게 위로를 드립니다.
카페에서 유일하게 동창이고 친구로 짧은 시간이나마 같이했던 추억 고이 간직하고 떠나서나마 영면하시길 빕니다.
항상 온화한 얼굴과 말씀으로 곁을 챙겨주시던 친구였는데 그리고 늦은 수도권 생활에서 마음 든든히 지켜주리라 믿었는데 홀연히 떠나버렸으니 언제 어디서 그 모습 서로 마주 할지 막막합니다.
떠난 친구 안심하시게 부디 가족들 마음 추스리고 삶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위로의 말씀 감사합니다. 글로 올려주신 아버지와의 일화도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