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진보주의자를 똑바로 모시자!
김갑수동기님.
북괴군이 일요일 새벽 기습 남침(1950.6.25.)으로
서울을 함락한 며칠 후 서대문 네거리에 나갔는데,
한쪽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있어 비집고 들어가 보니
긴 승마장화를 신은 북괴군 장교 하나가 대중연설 중이었다.
“여러분, 리승만의 국방군이 왜 패퇴했띠요?
우리 인민군대는 우리가 짠 광목을 물감 들여 군복을 만들어 입고 있는데,
38선을 지키는 국방군 장교들은 미제 싸지 군복(sarge모직) 칼날같이 줄 세워 다려입고
미제 구두 파리가 미끄러지게 반짝반짝 광내 신고 무슨 전투를 함네까? 8월15일 까진 부산을 함락 합네다...
우리는 ‘진보적’ 민주주의입네다.” 73년 전에 ‘진보’ 소리를 처음 들었는데,
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한다는 주사파가 20년 정권을 쥐고서도 자기들 뱃속 채우는 일은 잘했어도
‘진보’는 이룬게 아무것도 없다.
이승만은, 조선왕조 3대 태종의 첫째아들 양녕대군(세종의 형)의 16대손인데,
개혁진보주의자가 되었다.
① 독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왕조폐지, 입헌군주제를 주장, 반역자로 찍혀
한성감옥에 수감(1899-1904) 5년 7개월 수감생활 중 고문 후유증(손끝에 입김을 후후 부는 버릇)까지 얻는 고난을 당했다.
종신형에서 특별사면, 선교사 언더우드 추천으로 도미(1904), 조지워싱턴대(국제법학), 하버드대학원 석사(국제정치학.1908),
프린스턴대 박사(철학.1910)가 되어 미국이 지도자로 키웠다.
② 무지렁이 무학의 백성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가르쳐
대한민국 국민을 민주시민으로 양성했다.
③ 대한민국 건국 즉시 지주×소작인 구조개혁을 위해 지주들로부터 국채로 농지를 구매,
소작인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모스크바 대학 출신 진보사회주의자 조봉암(농림부장관)을 시켜
추진 성공했다.(耕者有田원칙)
남노당 수령 박헌영(평양정권 부수상)이 김일성에 의해 미제간첩으로 몰려 총살당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수천 년 소작농들이 자기 토지를 갖게 되는 개혁으로 전통적인 양반계급제도의 뿌리를 뽑아버린
대개혁의 역사적인 쾌거였고, 인민군 남침에 대항, 농촌 청년들이 기꺼이 국군으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④ 6년 의무교육제를 시행, 문맹율 80%를 무너뜨리는 교육개혁을 실행했다.
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의 보호, 후원으로 확고한 국가안보체제를 세워
향후 경제발전을 통한 국가발전의 기반을 세웠다.
⑥ 이승만은, FIFA스위스월드컵(54) 출정 축구대표팀 선수들에게
“만약 한일전에서 지면 현해탄에 몸을 던져야 하네,” 장택상을 시켜 대통령의 뜻을 전했다.
이승만을 친일파라 하는 좌파들은 문맹들이다.
박정희의 부친 박성빈은, 무관직(武官) 정9품 효력부위를 지냈으나 동학접주 출신으로 연좌되어
가정경제가 어려워 박정희 형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경북관찰사를 지낸 칠곡군의 갑부
장승원家(미군정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父)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매관매직 당사자인 장승원은 후에 대한광복단(독립운동단체) 단원에 의해 사살당했다.
(후에 김영삼이 장택상 국무총리의 비서관)
① 박정희의 사회적 출신은, 무산자(Proletariat)로 잠시 사회주의자이기도 했지만
반공주의자로 전향, 확실한 보수우익 지도자로 국가를 발전시켰다.
박정희가 소학교 교사 시절 선생들이 다 일본어로 수업했지만 박정희는 한국어로 수업했고,
칠판에 태극기를 그려 가르쳤다.
② 박정희가 만주 군관학교, 일본육사를 나와서 일본군 장교가 된 것을 친일파로 보는 좌파들은 무지(無知)하다.
중국 신해혁명 참여, 국민당을 이끌었고, 중화민국 총통인 장제스(蔣介石)가 일본 육사 예비학교인
진무학교(振武)에 들어갔고(1908), 니가타현 다카다(高田) 육군포병부대에서 사관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은 후
중국 정치/군사 지도자로 중국을 이끌었는데, 친일파로 매도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선진지도자 수업을 받은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③ 김종필중령(당시35세)들이 참모총장(송요찬중장)에게 소장급 이상 장군들 모두 은퇴 요구 연판장을 올렸다가
강제 퇴역당한 사건 후, 청년장교들에 의해 박정희소장은 가장 청렴한 장군으로 인정받아
5.16혁명지도자로 추대되었다.
박정희의 지도자관(觀)은 이랬다.
“토지가 국민이라면, 지도자란 비료에 지나지 않는다.
종자는 민족의 이상이 될 것이다.”(자서전 ‘민족의 저력’71.)
④ 박정희는, 미래 국가설계에 온 힘을 쏟은 개혁/진보주의자였다.
“치열한 국제관계 경쟁하에서 과거에 집착하면 미래가 없다.
어제의 원수라도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면 손을 잡는 것이 국리민복 도모, 현명한 대처가 된다.”
(한일회담타결 특별담화.65.6.23.)
⑤ 박정희는 확실한 자유민주주의/실용주의 정치지도자였다.
“통일을 안 했으면 안 했지, 공산화통일은 할 수없다.
북한 땅에 자유민주주의 씨를 심을 수 있는 민주적 통일을 해야 한다.”(6대 대통령선거 유세.67.4.23.)
“북한 위정자들이 우리와 핏줄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술을 함께 마시더라도 상대방이 공산당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남북적십자 본회담 지침.72.8.)
“평화는, 무슨 협정, 조약, 종잇장 한 장에 서명하는 것으로 보장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연두기자회견.74)
⑥ 박정희는 청렴한 지도자였다. 18년을 집권했는데, 개인적 치부가 한 푼도 없었다.
김영삼, 김대중들과 그들의 식솔들은, 박정희가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에
많은 돈을 치부 했을거라는 거짓선전을 계속했다.
자기들의 집권기간, 노무현, 문재인 집권기간 동안 단 1달러도 찾아내지 못했으면
자기들의 과오를 인정했어야 하는데, 아직까지도 한 마디도 없다.
그래서 선진국 대한민국에는 향후 <불공정/부패한 수구 좌파> 정치세력은 없어져야 한다는 결론이다.
73년전 서대문 거리연설을 했던 인민군 정치장교와 함께 한국 주사파 는,
‘진보’ 사기꾼, <수구좌파>로 청산되어야할 세력이다.
냉전시기 체코슬라바키아 사회주의공화국 당제1서기 알렉산드르 두브체크에 의한 민주화운동은(68),
소련군 전차부대에 의한 무참한 참살로 무너졌고,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 바닥에 흰 십자가들로 흔적만 남기며
‘프라하의 봄’을 역사 기록에 남겼다.
‘베이징의 봄’(78.11~79,12) 민주화운동은, 천안문 6.4.항쟁이 중공군 전차에 의해
‘천안문 대학살’로 비극적으로 끝나 버렸다.
소련공산당, 지금의 푸틴정부, 중공의 시진핑 공산당들은, 민주화 진보세력을 무력으로 척살한
<좌파수구 세력>임을 역사적 실증으로 보여 주었다.
박정희에 대해 키신저, 아이젠하워, 마하티르, 리콴유, 푸틴, 딩샤오핑들이,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역사적 인물로 높이 평가했는데,
김정일도, “박정희 대통령 묘소에 참배하고 싶다.”고 했고,
노무현 대통령이 해외 순방 중 “만나는 외국 지도자들이 온통 박정희 대통령 얘기뿐이더라.”고 했다.
박정희는, “내가 살아있는 이 한 세대는 순간이다. 그러나 민족과 국가는 영원하다.”
“가난은 나의 스승이자 은인이다...소박, 근면, 정직,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 독립된 한국의 창건
그것이 나의 소망의 전부다.”(나의 갈길. 국가와 혁명과 나.63)
박정희는 호를 지어주겠다는 사람에게 “필요없다. 박정희 이름 하나로 충분하다.”
사신에는 ‘대통령’ 없이 이름만 썼다.
명예박사 학위 제의자에게, “박사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박정희에게 늘 반대만 하던 YS. DJ 대통령들은 11~19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가졌다.
우리 역사에 박정희 만한 이런 진보주의자가 있었나?
이승만은, 40년 이상을 국외의 독립운동가로 살면서도 미국국적을 갖지 않고
망한 나라 대한제국 여권을 들고 다녔고,(김구는 중국국적 취득) 독재자로 4.19후 망명했어도
노구를 쉴만한 집 한 칸이 없었다.
박정희도 18년이나 집권하면서 국가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지만
남긴 재산은 군인시절 살던 신당동의 낡은 옛집 하나뿐이었다.
우리 역사에 진정한 진보주의 정치지도자는 이승만, 박정희뿐이다.
이 둘은 <보수우파 진보주의자>로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자유민주주의국가를 만들어 주었고, 반만년 노예, 거지 국민들을
선진국 국민으로 만들어 준 하늘이 낸 지도자다.
이제 광화문 광장에 이승만, 박정희 동상을 세우고 그 지하에 기념관을 만들어
후대들이 받들도록 길을 열어야 한다.
올바른 사상이 없는 국민, 영혼이 없는 물질적 부(富)만으로는 선진국이 아니다.
모화관(慕華館)/영은문(迎恩門)의 역사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중공에 배복(拜伏), 또 치욕을 당하고 싶나?
(2023.9.1. 군사평론가 김 성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