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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아들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한평생에 걸친 화두는 두 가지였습니다. 죄와 은총.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더 풍부하게 내리고 있음을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죄는 나쁜 것이고, 우리를 힘겹게 하는 것이지만 죄는 다른 한 편으로 우리 인간 각자의 나약함을 알게 하고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회개 과정에서 어머니 모니카의 역할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요즘으로 치면 극렬 여성, 교육열이 엄청난 극성 어머니, 자식을 위해 뭐든 다 하는 어머니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심하기 전까지 약 10년 세월동안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졌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신천지에 완전히 빠져든 것입니다. 더구나 모니카의 남편은 신앙심은 빵점이고 출세욕구나 야심으로 가득 찼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모니카는 언젠가 가족 모두가 하느님께로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죽기 살기로 기도했습니다. 남편의 구원을 위해 16년 동안 꾸준히 기도해서 응답을 얻었습니다. 아들을 위해서는 3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해서 마침내 응답을 얻었습니다.
유학 떠나기 전에 아우구스티누스와 모니카는 북아프리카 지역, 요즘으로 치면 모로코 정도 되는 곳에서 사셨는데, 모니카가 어느 날 아주 좋은 특급 정보를 얻어왔습니다. 밀라노에 가면 암부로시오라는 아주 좋은 주교님이자 교사가 있다는 정보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그쪽으로 유학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뿐 아니라 모니카는 아들 유학길에 같이 따라나섰습니다. 요즘 우리 극성 부모님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마니교도인 아들을 자연스럽게 암브로시오 주교와 접촉하도록 은근슬쩍 기회를 자꾸 만들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본의 아니게 주교님의 강론을 듣게 되고 조금씩 조금씩 회개의 기회를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들의 회개를 위해 지극정성을 다 하는 모니카의 노력에 암브로시오 주교는 탄복합니다. 그리고는 열심히 아들을 도와줍니다. 그러면서 모니카에게 이런 유명한 위로의 말씀을 남겼습니다.
“눈물의 아들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회개는 절대로 아들 혼자 이뤄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들과 어머니, 그리고 좋은 교사 암브로시오 성인, 그리고 하느님 네 사람이 만들어낸 합작품이었습니다. 네 명이 합작해서 만들어낸 향기롭고 찬란한 명품이 바로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부이자 신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님인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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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8.27 수요일 성녀 모니카(332-387) 기념일, 2테살3,6-10.16-18 마태23,27-32
진실한 삶
삶은 여정입니다.
참 나가 되어가는, 참 나를 발견해가는 여정입니다.
애당초 진실한 사람은 없습니다.
양면성을 지닌, 표리부동의 사람입니다.
이게 인간의 실상입니다.
주님의 복음 말씀은 우리 모두를 보게 합니다.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부단한 회개를 통해 안과 밖이 같은, 속과 겉이 같은 참 나의 진실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회개는 자신을 보는 것이요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가장 쉬운 것이 남 판단하는 것이요, 가장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일입니다.
부단한 회개를 통한 깨달음의 은총이 우리를 정화하여
속과 겉이 같은 같은 참 나의 진실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진실한 삶은 질서있는 삶입니다.
무질서한 삶보다 영성생활에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바오로와 그 일행은 진실한 삶의 모델입니다.
"형제 여러분,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을 따르지 않는 형제는 누구든지 멀리 하십시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바오로의 진정성 넘치는 고백입니다.
무질서한 삶이 안팎으로 우리를 무너뜨려 거짓과 위선의 혼란한 삶으로 이끕니다.
질서있는 삶에 항구할 때 참 나의 진실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하여 제가 늘 강조하는 '중심과 질서'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균형과 조화의 질서있는 삶입니다.
가능한 기도와 노동이 균형잡힌 질서있는 삶입니다.
저절로 자유가 아니라
이런 질서있는 삶의 영적훈련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어 가게 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네 손으로 벌어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을 받으리라."(시편128,1-2).
오늘 화답송 시편 첫부분의 말씀이 참 은혜롭습니다.
오늘 말씀을 요약합니다.
진실한 삶의 비결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경외하여 질서있는, 기도와 노동이 균형잡힌 단순한 삶에 항구할 때 진실한 삶입니다.
바로 바오로는 물론 오늘 축임을 지내는 모니카 성녀가 바로 그 모범입니다.
주님을 믿고 경외하여 항구히 기도한 열매가 그분의 아드님, 성 아우구스티노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새 하늘, 새 땅의 진실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을 믿고 경외하는 이들에겐 매일이 새 아침, 새날입니다.
아멘.
와이파이 사정이 좋지 않아 매우 늦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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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에서 하느님의 고민에 대한 글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들을 일일이 다 찾아다녀야 하는 일이 늘 고민인 것입니다. 솔직히 문제가 단 하나도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래서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하느님을 부르고 있으며,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그 부름을 외면하지 않기에 늘 바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에게 만들어 준 사람이 하나 있으니 바로 ‘어머니’라고 합니다. 당신의 사랑을 그대로 자녀에게 전해줄 수 있는 사람, 바로 ‘어머니’인 것이지요.
‘어머니’라는 단어만 봐도 먹먹해지는 기분을 많이 느낍니다. 사실 어렸을 때에는 어머니의 사랑을 잘 몰랐었습니다. 오히려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었지요. 친구들은 주산, 미술, 태권도, 피아노 등등의 학원을 열심히 다닙니다. 그런데 제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사교육을 시킨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와도 ‘잘 했다’, ‘못 했다’ 등의 별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시험공부를 하겠다고 아침 일찍 깨워달라고 해도 충분히 자야 건강하다면서 깨워주시지도 않습니다. 이러다보니 어렸을 때에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 온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참 많이 했었습니다.
공부를 잘 하지 못해도, 또 다른 것을 배우지 않아도 어머니께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성당에 가지 않으면 엄청나게 화를 내시고 혼을 내셨지요. 그리고 자녀들에게 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지요. 묵주가 반질반질 해질 정도로 많이 기도하면서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늘 강조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사제로 살아가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 있다면 바로 ‘어머니’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아주 잘 살지 못해서 늘 죄송한 마음이지만,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기억하면서 다시금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오늘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어머니이신 모니카 성녀 기념일입니다. 방탕한 아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희생하셨기에 아들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교회의 학자가 되어 하느님의 일을 충실히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워낙 능력 있었던 아들이기에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세상 안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니카 성녀는 이러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전부가 아님을 자신의 삶을 통해 직접 보여주었고, 그 결과 아들을 회심시킬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것에 속해 있으면 오늘 복음에 나오듯 위선과 불법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것에 속해 있으면 사랑과 기쁨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할까요?
성녀의 모습을 보면서 세상의 어머니들을 생각합니다.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어머니, 참 사랑을 전해 주는 어머니, 세상의 것이 아닌 주님과 함께 하는 길로 이끌어 주는 어머니들이 가득한 세상 안에서 그 자녀들은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참 좋은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거울은 최고의 친구이다. 내가 흐느낄 때 비웃지 않기 때문이다.(찰리 채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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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간 수요일>(2014. 8. 27. 수)(마태 23,27-32)
(성녀 모니카 기념일)
<회칠한 무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7-28)."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은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나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집처럼 보이지만"입니다.
'회칠한 무덤'은 겉모습은 사람이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집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살 수 없는 곳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 더 강하게,
"겉은 천당으로 보이지만 속은 지옥이다." 라고 표현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무덤의 외부에 회칠을 한 것은
무덤이라는 것을 표시해서 사람들이 부정 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곳이 무덤이라는 것을 감추려고 회칠을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회칠한 무덤이 아무리 아름답게 보여도
사람들은 누구나 그게 무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곳을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 착각하거나 속는 일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회칠한 무덤'이라는 표현은
"무덤이 아닌 것처럼 위장한 무덤,
사람들을 속이려고 겉모습만 바꾼 가짜"를 뜻합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에서 빌려온 표현이지만, 뜻은 조금 바꾼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는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면서도
자기들은 의인이라고 사람들을 속인다."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의인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는데, 그것은 속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악인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실체를 폭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회칠한 무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강도들의 소굴'이었기 때문입니다(마르 11,17).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때의 헤로데 왕의 궁전도 회칠한 무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신심 깊은 왕으로,
또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는 왕으로 행세했지만,
속으로는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학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그 계획을 실행했기 때문입니다(마태 2,16).
처음부터 무덤이었는데도 무덤이 아닌 것처럼 속이는 경우도 있고,
원래는 무덤이 아니었다가 무덤이 되어버렸는데도
여전히 무덤이 아닌 것처럼 속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사이비 종교였는데도 사이비가 아닌 것처럼 속이는 경우도 있고,
원래는 진짜였다가 중간에 변절해서 사이비가 되어버렸는데도
여전히 진짜인 것처럼 속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떻든 그런 것들은 전부 다 회칠한 무덤입니다.
똑같은 그릇이라고 해도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고,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고, 보석을 담으면 보석 그릇입니다.
밥그릇에서 밥을 비우고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으로 바뀌는 것이고,
쓰레기통을 깨끗하게 씻어서 밥을 담으면 밥그릇으로 바뀌게 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곳은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이고,
반대로 생명력을 잃어버리면 그곳은 죽은 사람들만 모여 있는 무덤이 됩니다.
그런데도 "이곳은 교회다." 라고 우기면 '회칠한 무덤'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믿음, 즉 살아 있는 믿음이 있어야 살아 있게 됩니다.
실천하지 않는 믿음, 즉 죽은 믿음으로는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아무런 실천도 하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이고,
회칠한 무덤이 될 뿐입니다.
그 다음에는 '희망'입니다.
희망을 잃은 상태, 즉 '절망'은 사실상 죽은 것과 같습니다.
(천국은 희망이 완성된 곳이고, 연옥은 희망을 하는 곳입니다.
지옥은 희망이 전혀 없는 곳, 완전한 절망만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지옥에는 생명력이 전혀 없습니다.)
개인의 경우도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는 교회,
또는 희망이 없는 교회는 지옥과 같은 죽은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살아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사랑이 없다는 것은 죽었다는 표시가 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이고, '사랑이신 분'입니다.
'살아 있음'과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사랑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고,
그저 모여서 복이나 빌고 있는 교회라면,
그곳을 예수님의 교회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지금 회칠한 무덤으로 전락한 상태라고 해도 회개하면 됩니다.
악인도 회개하면 의인이 되고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람도 회개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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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하는 목적 >
오늘 수원교구 어떤 본당의 한 보좌신부가 이번에 교황님이 오시는 것을 계기로 자신의 성당에서 4백 명이 넘는 입교자를 받았다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요즘 같은 때에 그렇게 많은 입교자를 받는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몇 달 전에 그 본당 주임신부님이 교황님이 오시는 것을 계기로 무언가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 한 적이 있었는데 저는 그저 한 귀로 듣고는 한 귀로 흘려버렸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부님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 소공동체와 레지오 두 파트로 나누었다고 합니다. 소공동체 각 구역별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현수막을 설치하고 전단지를 돌렸습니다. 물론 그 성당 이름이 새겨진 물티슈도 함께 나누어 주었습니다. 레지오는 상가나 가정을 다니면서 현수막과 전단지, 물티슈 등을 돌렸습니다. 이렇게 사용된 돈이 천만 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신자들 모두에게 물티슈 세 개씩을 주고 각자 선교할 것도 권했습니다.
그리고는 교황님이 며칠 동안 한국에 머무실 때 본격적으로 입교자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입교신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언론에서 교황님이 대서특필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도 가톨릭에 대한 관심으로 크게 기울었던 것입니다.
교구 복음화국에서 일하고 있는 저로서는 ‘이 운동을 전 본당에서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크게 남았습니다. ‘그 신부님처럼 조금만 더 부지런하게 뛸 마음이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까!’라고 생각하니 주님께도 죄송스러웠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게으름으로 주위의 많은 영혼들을 잃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바오로가 게으름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합니다. 일중독이란 말이 생각나게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바오로가 ‘일하는 것’만 강조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항상 기뻐하십시오”라고 하며,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가끔 동료 사제들과 이야기하다보면 사목을 위해 많은 일을 하는데도 ‘기쁨’을 못 느끼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사제의 길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과연 가정을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하며 살아왔는데 정말 기쁘고 보람스럽습니까? 기쁨이 없는 노력이란 열매가 없는 나무와도 같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돈을 쓰며 흥청망청 놀았고 큰 아들은 일만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게 된 것은 아버지를 위해 쉬지 않고 일했던 큰 아들이 아닌 놀기만 했던 작은 아들이었습니다. 과연 큰 아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불교에서 가장 어리석은 여인을 표현할 때 물동이를 이고 땀을 흘리며 어디론가 계속 걸어가는 여인이라고 합니다. 일은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목적지를 모른다고 합니다. 계속 돌아다닐 뿐인 것입니다. 그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을 합니까? 그 목적이 명확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신이 한 모든 일이 헛수고였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작은 아들은 일을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버지를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집에 머무는 것이 더 행복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큰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를 원망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을 더 사랑하는 자녀를 원하시지 그렇게 일만하는 사람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일은 하인을 시키면 그만입니다. 우리가 일 하는 목적은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그래서 더 행복해지려는 목적이어야 합니다. 작은 아들은 행복했고, 큰 아들은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아들이 큰일을 한 것입니다.
일을 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도 일 하는 분이시기에 행복하신 분입니다. 마치 여인이 고생하여 자녀를 출산하면 기쁨을 느끼는 것과 같이, 결국 일을 하는 목적이 결국 나의 행복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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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적이지 마라
저는 어려서 남모르게 아버지 옷 주머니에 손을 대서 돈을 꺼냈고, 불장난을 하다가 작은 댁의 사랑채를 다 태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울타리를 엮은 구리철사를 풀러 엿을 사 먹기도 했으며 길에서 주운 돈을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개인적으로 쓴 적도 있습니다. 선생님 서랍에 있던 시험문제를 몰래 보기도 했고, 교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안 그런 척 했습니다.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숨긴 적이 여러 번입니다. 지금도 여전합니다. 사람들은 속아주었고 저자신은 뻔뻔스럽게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두를 알고 기다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꾸중을 하였습니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그 회칠한 무덤이 바로 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부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한다고 성덕이 출중한 것도 아닙니다. 그에 상응하는 마음가짐과 정성을 담지 않으면 거룩한 것을 더 많이 접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불경한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알면 아는 만큼 더 잘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짐이 무거워집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사실 신부이기 때문에 더 많은 위선을 떨고 이중적으로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자들에게는 기도를 많이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최소한의 의무인 ‘성무일도’조차 거르고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성체조배는 물론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기본이거늘 일반 신자보다 더 많이 기도한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러저러한 인간적인 욕망에 대해서도 절제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 하고 목을 빳빳이 세우고 다닙니다. 이런 모습에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하면서도 몸은 여전히 육정을 따르고 맙니다. 그야말로‘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얘기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내 눈 안에 들보를 지닌 채 남의 눈의 티를 빼주겠다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 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하셨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며 위선과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에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청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허물을 용서하소서. 구원을 허락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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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삶이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시며 그들의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그런데 이 ‘회칠한 무덤’이라는 상징은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의 모습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을 적나라하게 비추어 주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이 말에서 우리는 메마른 마음, 생기 없는 일상의 삶을 아프게 떠올려야 합니다. 아픈 자각은 익숙함과 결별하고 생명력이 충만한 삶의 여정을 시작하는 용기를 선사하기도 합니다.
스위스 출신의 유명한 철학자 파스칼 메르시어는 한 나이 많은 교수를 주인공으로 한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매혹적인 소설을 썼습니다. 주인공 그레고리오는 기이한 우연을 거쳐 손에 들어온 한 포르투갈 작가의 책 머리말에 나오는 다음 내용에 홀리고 맙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는 곧바로 책을 내려놓고 시계처럼 철저했던 자신의 일상을 내버려 둔 채 불현듯 포르투갈의 항구 도시 리스본으로 가는 야간열차에 오릅니다. 처음에는 스스로도 이러한 여행을 시작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여행에서 돌아온 뒤, 이것이 메마름에 자족하는 것을 멈추고 충만한 삶을 향한 갈망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몇 년 전 흥미 있게 읽었던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올여름의 들머리에 보면서 나의 리스본은 어디인지 조용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번에도 나 자신을 돌아보는 여행, 일상의 참의미를 찾는 떠남이 필요했습니다. 익숙함을 떠나 나의 일상에서 낯설음을 발견하고 지금까지 바라던 것이 참으로 의미 있는지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 나의 리스본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나누는 기쁨의 순간들로 빛나는 내 삶의 자리임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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