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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17장 11~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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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예수님이 이곳저곳 전도 여행을 다니시는데, 그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예루살렘으로 정하고, 그 곳만을 향해 줄기차게 전진해 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누가 복음의 진행 곳곳에는 지금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를 자세하게 밝혀 줍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까지 어느 정도 거리에 와 있는지 예수님의 동선을 짐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거리감을 계속 설명함으로써, 독자가 누가복음을 읽을 때 긴장되는 고조감을 계속 가질 수 있게 합니다. 물론 지명들이 지도상에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으실 때, 특히 누가복음을 읽으실 때, 지명이나 인명이 나오면, “아 몰라”하면서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인터넷에 검색해 보십시오. 어느 지명, 어느 인물이라도 기초적인 설명은 다 찾아보실 수 있는 고급 정보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수고를 곁들이면, 성경을 보는 눈이 높아지고, 글을 이해하는데도 굉장한 도움을 줍니다. 물론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은혜는 더욱 커집니다. 열심을 내서 자가 학습이 필요한 책이 성경입니다.
오늘 말씀 11절에서도 최종 목적지와 위치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셨다” 라고 합니다. 사마리아 땅과 갈릴리 사이에는 자연적인 경계가 그어졌는데,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이스르엘 (The Vally of Jezreel)”골짜기 였습니다. ‘사이’라는 단어는 영어성경에서는, “the border between Samaria and Galilee”라고 번역하면서, 그곳이, ‘border’, 즉 경계지역이었음을 잘 번역 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까지는 대략 150km 정도의 거리이고, 이스르엘 골짜기는 그 중간쯤 됩니다. 예수님은 북쪽인 갈릴리에 남쪽인 예루살렘을 향해서 점점 내려오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한(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려는 중에 나병환자 10명을 만납니다. 나병환자가 10명이나 모여 있던 이유는, 그들이 정결하지 못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사람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격리되어, 집단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 나병환자 무리 중에는 서로를 견원지간(犬猿之間, 개와 원숭이)처럼 여기며, 극도의 거부 감정을 품고 있는 유대인과 사마리아 인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한 때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던 같은 민족이었는데, 갈라지고 나니, 다른 민족보다도 더 원수지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애증(愛憎, 사랑과 미움)’의 감정은 좋을 때와 나쁠 때가 마치 정지하지 못하고 폭주 하는 기관차와 같습니다. 우리 한 민족도 분단 70년간 원수처럼 지내왔는데, 이제는 평화와 번영의 초석을 만드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10명의 나병환자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아마도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다는 소문들 듣고, 이 곳을 지나가신다는 정보를 얻은 후에, 기다리다가, 찾아 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고 준비했으면서, 이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마을의 집들이 있는 곳에 계셨기 때문에 그들이 더 이상 그 곳으로 다가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부릅니다. “예수 선생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13절, 표준새번역, 우리말성경).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호칭합니다. 딱히 뭐라고 부르기도 애매합니다. 서기관이나 제사장처럼 직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적으로 인정받은 유명인사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선생님 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만한 신앙적인 메시지를 두 가지만 살펴봅니다.
첫째는, 소리와 소문이 들렸으면 반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이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무시해버렸으면 오늘과 같은 만남도, 고침 받음도, 그리고 성경에 기록될 일도 없었을 겁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소리를 잘 듣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의 소문을 목격하는 주인공이 되려보아야 하겠다는 의지와 결단을 세우는데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소리와 소문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 나아가려는 반복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목사인 저도 이 자리에서 말씀을 전하지만, 저는 단지 주님이 말씀 하시는 소리와 소문을 전해주는 전달자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절대 소리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 소리에 반응해서 몸과 마음을 움직일 것인가, 무시할 것인가는 듣는 분의 자의적인 선택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00교회 성도들은, 강단에서 들리는 소리, 성경에 기록된 여러 가지 소문을 잘 듣고, 그 소리와 소문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께 무한 반복적으로 나아가려는 믿음의 반응을 재빠르게, 그리고 많~이 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는, 소리와 소문에 대해서 몸이(혹은 마음이) 움직이도록 반응했으면, 그 다음으로는 주저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러야 합니다. 나병환자가 소리와 소문에 잘 반응해서 예수님을 찾아가기는 했는데, 부끄러워서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면 예수님을 못 만났을 겁니다. 나병환자들은 지금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절박한 심정이었기 때문에,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결과는 좋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인해 열매들이 맺힙니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우리각자가 입을 열어,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학수고대 하십니다. “언제 불러 주나, 언제 불러주나” 매일같이 소리가 들려오기를 원하시며, 우리들의 삶의 자리를 맴돌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실망 시키지 마시고, 용기를 내서, 큰 소리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나병환자들은 큰 소리로,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기도가 잘 안 되시는,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모르시는 분들은 두 가지만 계속 반복해 보셔도 효과가 있습니다. “①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②예수님, 제가 주님을 눈으로 뵙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반복하시면서,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만 집중해 보십시오. 어느 순간 주님이 내 마음에 확 들어오시는 감동을 받게 되실 겁니다. 제가 해봐서 나름대로 터득한 방법이니 속는 셈치고 한 번 해보세요.
제가, 반응하라!, 이름을 불러라! 두 가지를 말씀드렸는데, 이를 달리 말씀 드리면, 반응은 예배이고, 이름을 부르는 행동은 기도입니다. 예배와 기도를 능동적으로 잘 하시는 분들이 가장 건강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됩니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적극적인 반응하심으로 예배드리실 거죠? 앞으로는 이 교회가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기도 하실 거죠? 아멘. 네, 앞으로 기대가 큽니다. 우리 주님도 우리의 아멘을 들으시고, “정말?” 이라고 놀라시면서, 크게 기대 하실 겁니다. 예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이 예배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우리의 입술이 큰 소리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수님과 좋은 만남, 좋은 교제를 이루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시고,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들의 몸을 보여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당황스런 상황입니다. 의사가 진찰도 안 해 보고 집으로 가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들의 반응도 재미있습니다. 무작정 가라고 했을 때, “아니, 가까이 오셔서 몸 상태를 한 번 보지도 않으시고 그냥 가라니요? 다른 사람들은 잘만 고쳐 주셨다는데, 우리는 왜 안 고쳐 주십니까? 이 흉측한 몸으로 마을에 들어가면, 맞아 죽기 십상인데, 책임지실 겁니까? 도대체 경우가 없는 분이네요...” 이렇게 투덜거리는 사람이 적어도 한두 명쯤은 나와야 정상인데, 10명 중 한 명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즉시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이과정이 진정한 믿음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말씀을 듣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로 작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든지 토 달지 말고, 즉시 순종하는 ‘예스맨’들이 되어야 합니다.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 하십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교회와, 가정과, 개인은, 상상하지 못한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우리 교회 모든 구성원들은, 10명의 나병환자와 같이, 합창으로,“네(yes),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병환자 10명은,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기도 전에 병이 다 나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 10명중 한 명, 그것도 버려진 자들이라고 외면 받았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9명은 뿔뿔이 흩어져서 제 갈 길로 가버렸습니다. 이런 경우는, 물에 빠졌을 때와 건져 냈을 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이름을 부를 때는 정말 간절함으로 전체가 다 모여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의 가장 큰, 소원이었던 나병이 거짓말처럼 깨끗하게 다 나았을 때는 흩어지기 바빴고, 병을 고쳐준 은인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큰 소리로 말씀 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 (17,18절, 표준새번역) 당시의 예수님의 마음을 상상해 보면, 뭐라고 할까요, 화가 많이 나신 것도 같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허탈해 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설마 라는 심정으로 씁쓸해 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너희들이 병을 고쳐준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라고 호통 치신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서운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진 것에 대해서 감정을 폭발하셨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예수님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마치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은혜 받고, 성령 받고, 믿음으로 살아가면서도, 세상에 나가 오히려 교회와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수많은 불량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던지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1:9의 비율에서 보듯이,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려고 애쓰며,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려는 사람들의 숫자보다, 세상에 나가 향락과 음란의 맛과 향기에 취해서, 인본주의적인 사고에 사로 잡혀 불순종과, 불경건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겁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돌아오지 않은 그들을 찾으신 이유가, 그들의 배은망덕을 꾸짖는 것이었다면, 지금이라도 제자들을 풀어서 그들을 데려오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말씀 마지막 19절을 읽어 드립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아멘. 한 줄이지만 예수님의 숨은 의도를 잘 아시겠죠. 10명이 처음에 예수님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쳤던 그 믿음의 소리를, 마지막 까지 감사와 영광의 큰 소리로 유지 한다면, 그런 사람들의 믿음은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 됩니다.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은 곧 구원해 주심을 확증 하는 증명서를 주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다 불쌍함으로 나아오는 자들은 예외 없이 그들의 아픔과 질병을 고쳐 주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더 큰 뜻은, 은혜 받고 고침 받은 자들이 믿음 안에서 계속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들이 다시는 떠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며, 진리의 말씀을 듣고,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최종 목적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선언을 내려 주시기 원하십니다. 결국은,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모든 자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원하셨던 겁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우리 예수님이 돌아오지 않는 자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저도, 여러분도, 돌아오지 않고 방황하는 자들 중에 속해있지 않다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숫자적으로도 아직 돌아가지 않고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하지만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 있을 때, 기회 주실 때, 지금 당장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머뭇거리면, 예수님은 다른 곳으로 멀리 가버릴 수 있습니다. 기회와 시간을 허락 하실 때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이 선포되는 지금이야말로 바로 다시 주님에게로 돌아갈 절호의 기회입니다.
마커스 워십의 ‘믿음과 삶’이라는 찬양의 가사의 일부입니다. “믿음과 삶을 살아내는 실력이 / 너무나 다른 내 모습을 볼 때에 / 이 모습도 주가 사랑하실까 / 자신 없는 내 모습 / 그저 주님 앞에 있네 / 나 같은 자도 사랑하여 주시고 / 한 번도 나를 떠나지 않으셨네 / 아픔 속에 주를 작게 여긴 날 / 꾸짖지 않으시고 내 손 잡아 주시네~” 이 찬양의 가사처럼, “이렇게 부끄러운 내 모습을 주님이 사랑하실까?”,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받아 주실까?” 라는 연약한 마음은 사탄이 우리를 주저앉히려는 술수입니다.
앞서 10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 선생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고 하던 말을 기억하시죠.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찾는 절박한 심정으로 큰 소리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찾으시는 음성이 들릴 때, “네 주님, 그 아홉 명 중에 하나가 여기 있나이다. 돌아오기를 싫어했던 000이 여기 있습니다. 저를 다시 받아 주시고, 제가 주님 곁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간구하십시오. 진심이면 통합니다.
인자하신 예수님은, “일어나 나를 따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구원의 기쁜 소리를 우리의 귀에, 우리의 심령이 요동치도록 크게 들려주실 겁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외면하지 마시고, 즉시 주님에게로 돌아가는 일에만 열심을 내셔서,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00교회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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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연약함과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님 곁으로 다시 돌아 갈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의 마음을 부어 주옵소서. 우리를 돌아오게 하시고, 영원토록 함께 하도록 인도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