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은 우리 한민족을 동이족(東夷族)이라 하였다.











중국인들이 고대 중국의 임금이라 하여 <삼황오제三皇五帝>를 받들고있다.
삼황(三皇)은 <태호복희> <염제신농> < 황제헌원>을 말하고
오제(五帝)는 <소호금천> < 전욱고양> <제곡고신> <제요도당(요임금)> <제순유우(순임금)>을 말한다.


배달국 "1대 거발환 환웅 천황에서 5대에 태우의 환웅천황이 있었다. 아들을 12명 두었는데 장자는 다의발 환웅(배달국 6대 환웅)이라 하고 막내는 태호(太昊)복희라 한다." -태백일사-






밀기密記에 이르기를, 태호복희는 배달국 신시(神市)에서 태어나 우사(雨師)의 직職을 세습하고 뒤에 청구(靑丘)와 낙랑을 거쳐 진으로 옮겨갔다. 그의 후예들이 풍산에서 나누어 살았으므로 풍씨(風氏)로 성(姓)을 삼았다.
지금 산서성의 제수濟水에 희족羲族의 옛 거처가 남아 있다.”












































“대변경(大辨經)에 이르기를, 복희는 신시(神市)로부터 나와 우사(雨師)가 되었다. 신룡의 변화를 보고 복희팔괘도를 만들고 신시神市의 계해로 시작되는 역법(曆法)을 갑자로 시작되는 것으로 고쳤다. 태호복희의 무덤은 지금 산동성 어대현 부산鳧山의 남쪽에 있다.” -태백일사-











<태호복희씨>와 <염제신농씨>가 동이족(東夷族)이라는 증거가 자꾸 발견되자 이제는 중국 역사는 <황제헌원씨>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하고 있다.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오제(五帝)는 모두 <황제헌원>의 후손이다. 그런데 중국의 고전 <초사>를 보면 황제(黃帝)는 백민(白民) 에서 태어나고... 그는 동이(東夷)족에 속한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순임금(舜)은 동이인(東夷人)이다"라고 하였다.
황제헌원의 아들이 창의(昌意)다. 창의(昌意)로부터 7세가 순임금(舜)이다. 황제헌원으로부터는 8대가 된다.
그리고 <황제헌원>은 유웅씨(有熊氏)이다. 즉 '웅(熊)'씨이다. <황제헌원씨>가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웅족(熊族)'의 후예라는 것이다.
위에서 보듯이 <황제헌원>과 <순임금>이 동이족이고
<소호금천씨> <전욱고양> <제곡고신> <요임금> 등도 모두 황제헌원의 자손이니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고대 임금이라 받드는 <삼황오제>는 모두 동이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염제신농씨는 배달국 8대 환웅 안부련(BCE 3240)의 신하인 소전(少典)의 아들이다.
신농씨는 농업 ·의약 ·음악 ·점서(占筮) ·경제의 시조(始祖)로 알려져 있다.
소전(少典)과 소호금천(少昊金天, BCE 2598 ~ BCE 2514)은 함께 모두 배달국의 高矢氏(고시씨)의 傍系(방계)이다.
高矢氏(고시씨)는 BCE 3897년에 桓雄天王(환웅천왕) 때 農官(농림부장관)을 지낸 분이다. 즉 우리 상고사 역사에 처음으로 농사를 시작한 분이다.
산이나 들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고시례(高矢禮)하는 풍습은 고시씨(高矢氏)에 대한 예의를 표하는 풍습이다.
염제신농의 아버지인 소전의 후손 지파중에 공손公孫이라고 있는데 공손의 후손중에 황제헌원黃帝軒轅(BCE 2692~BCE2592)이 나왔다.
배달국의 고시씨高矢氏 ->소전少典(염제신농의 아버지) -> 공손씨公孫氏(소전의 후손) -> 황제헌원(공손씨의 후손) -> 전욱고양(황제헌원의 손자) -> 제곡고신(황제헌원의 증손자) -> 설(제곡고신의 아들; 은나라를 건국한 성탕의 선조)
위에서 보듯이 <황제헌원씨>와 <순임금>이 동이東夷인이고 <소호금천씨> <전욱고양> <제곡고신><요임금> 등도 모두 황제헌원씨의 자손이니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고대 임금이라 받드는 <삼황오제>는 모두 동이족이라는 사실을 알수 있다.





<황제헌원> <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요임금> < 순임금>으로 이어진다.
전욱고양 (BCE 2513 ~ BCE2436) ; 황제헌원의 손자
제곡고신 (BCE 2435 ~ BCE2365) ; 황제훤원의 증손자
요임금 (BCE 2357 ~ BCE2258) (요임금 25년에 단군왕검 고조선(단군조선) 건국.
순임금 (BCE 2255 ~ BCE2208)
요임금 시대에 이르러 <배달국>을 이은 고조선(단군조선)이 건국되고(기원전 2333년) 순임금을 거쳐 우임금 시대에 이르러 나라 이름을 '하(夏)'라고 붙인다.





































약 6천년 전, 환웅천황께서 신시(神市)에 도읍하고 배달국을 세울 무렵, 중국의 시조라 일컫는 5천년 전,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역사도 시작되었다.
고사변(古史辯)>은 전7권으로 된 방대한 문헌으로 중국의 사학자들이 공동으로 편찬한 책이다. 바로 이 책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동이東夷는 은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
태호(太昊), 제준(帝俊), 제곡(帝嚳), 제순(帝舜), 소호(少昊), 그리고 설(契) 등이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의 사람들이 이미 명확히 증명하는 바이다.』
<東夷與殷人同族 其神話亦同源 如太昊호之卽帝俊帝嚳帝舜少昊之卽契 近人旣得明證>
설[契]>은 은나라를 세운 <성탕(成蕩)>의 선조이다.
삼황오제 시대가 끝나고 우(禹)가 세운 하(夏)나라도 멸망한 뒤 들어선 나라가 은(殷)이다.
일명 상(商)나라 라고도 하는데 은나라는 저 유명한 갑골문(甲骨文)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고사변>은 고대 중국의 문헌과 근래에 발굴된 유물 등에 근거하여 은나라가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은나라는 그 시조가 알에서 깨어났다는 난생설화(卵生說話)를 갖고 있는데, 난생설화는 동이족의 공통된 특징이다.
중국의 정사(正史)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있는 사마천의 <사기史記>도 삼황오제는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제黃帝로부터 순임금, 우禹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동일한 성姓이며, 그들이 세운 나라의 호칭만 달랐을 뿐이다.』 <自黃帝至舜禹 皆同姓而其國號>
이와같은 기록들을 종합하면 결국 고대 동이족들이 중원으로 들어가 큰 세력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역사도 시작되었다는 말이 된다.
태호복희는 배달국 제5대 태우의 환웅의 막내 아들로서 배달국의 우사(雨師)를 지내고 나중에 진제국(震帝國, BCE 3528- BCE 3218 )의 시조가 되었다.
유웅국(有熊國)의 시조는 소전(少典)으로 염제신농의 아버지이다. 후손 공손씨(公孫氏)가 이었다. 공손씨는 황제헌원의 선조로 유웅국은 배달국의 제후국이다.
염제국(炎帝國, BCE 3218- BCE 2698)의 시조는 염제신농(神農)씨로 강(姜)씨의 시조이다. 배달국의 우가(牛加)였으며, 나중에 염제국을 세웠다.
BCE 2697년에 염제국의 후계국으로 단웅국이 세워져 BCE 2357년에 단군왕검이 비왕으로 섭정하다가 BCE 2333년에 고조선(단군조선)을 개국하여 배달국을 이었다.
웅국(熊國 또는 有熊國), BCE 2698- BCE 2357)의 시조는 황제헌원(黃帝軒轅)으로
공손씨의 후손이다. 원래 공손씨였으나 나중에 희(姬)씨로 바꾸었다.
황제헌원은 치우천황과 탁록에서 전쟁을 벌인 인물로 중국 역사의 기록상 실질적인 시조로 받들고 있는데 배달국의 제후국의 하나이다.
소호금천(少昊金天, BCE 2598 ~ BCE2514) 씨는 김(金)씨의 시조이다. 소호(少昊)는 소전(少典)과 더불어 웅족(熊族이다.
전욱고양(顚頊高陽), 제곡고신(帝嘗高辛), 제지(帝摯), 요(堯), 순(舜)으로 이어졌다.
당(唐, BCE 2357- BCE 2284)나라의 시조는 요(堯)이다. 요임금은 제곡고신씨의 아들이고, 소호금천씨의 증손자이며, 황제헌원의 현손자다. 성씨는 이기(伊祈)씨이다.
우(虞, BCE 2284- BCE 2224)나라의 시조는 순(舜)이다. 순은 맹자(孟子)에서 동이족(東夷族)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순임금은 요임금으로부터 선양받았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순임금의 아버지인 유호씨(有戶氏)는 고조선(단군조선)의 중신(重臣)으로 아들 순과, 순의 동생 유상(有象) 등을 인솔하여 요임금을 치러갔던 인물이다.
순임금이 요임금의 뒤를 이어 중국의 천자(天子)가 된 후 동생인 유상과의 형제간 전쟁을 하였으며, 유호씨와 유상의 무리인 우(禹)에게 패하였다. 이어서 우禹가 하(夏)나라를 열었다.
은(殷, BCE 1766- BCE 1122)나라의 시조는 성탕(成湯)이다. 성은 자(子)씨. 제곡고신씨의 아들인 사도(司徒) 설(契)의 후손이다. 은殷을 물리친 주(周)는 서이(西夷)라 하였다.
주(周, BCE 1122- BCE 249) 성은 희(姬)씨. 희씨는 황제헌원의 성씨이므로 황제헌원의 후손이 되며, 제곡고신씨의 아들인 후직(后稷)의 후손이다. 웅족으로 서이(西夷)라고도 한다.
진(秦, BCE 249- BCE 206)은 원래 영(櫕)씨이나, 진시황은 여(呂)씨의 자손이다. 영씨는 전욱고양씨의 후손이다.
한(漢, BCE 206-BCE 263)나라 유방이다. 유방은 요(堯)임금의 후손이다.
신(新, 서기8-서기23)나라 왕망(王莽)은 한무제(漢武帝)에게 사로잡힌 흉노족의 왕의 후손이다. 흉노족 왕을 휴도왕이라 하는데 성은 김(金)씨이다.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다.
진(晉) : BCE 265-서기 421. 사마(司馬)씨.
수(隋) : 581-618. 양(楊)씨.
당(唐, 618-907)나라 이세민의 이(李)씨는 노자의 아버지가 한(韓)씨를 이씨로 바꾸었다. 한씨는 원래 희(姬)씨로 주(周)나라의 왕족이다.
요(遼 거란, 907-1125) 시조 야율아보기(阿保機)이다. 아보기는 아버지(아파오치)의 이두식 표기이다. 거란족은 설(契)의 후손이라고 전한다.
송(宋, 960-1279) 조(趙)씨. 전욱고양씨의 후손으로 영(櫕)씨이기도 하다.
금(金. 여진, 1115-1234) 시조는 아골타(阿骨打)로 김(金)씨이다. 고려 초기에 김준이라는 사람이 여진족으로 가서 세력을 잡았다.
명(明, 1368-1644)나라 시조 주원장이다. 함경도사람이라 하기도 하고, 전라도 해남사람이라고도 한다.
원(元), 1206-1368)나라 몽골족은 원래 단군조선의 갈래이다.
청(淸, 1616-1912) 애신각라(愛新覺羅)씨. 시조 누루하치의 누루는 금(金)을 가리키고, 하치는 김알지의 알지처럼 아기, 후손이라는 뜻이다. 김수로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이다.
애신각라는 신라(新羅)를 사랑하고 잊지 말라는 뜻이다. 만주족의 선조인 여진족의 금(金)나라도 김(金)씨의 나라이다.
중국대륙의 대부분을 동이족이 차지하고 살았으며 중국인들의 시조인 삼황오제가 동이족이었다는 것은 중국의 학자들 스스로 수많은 자료와 문헌, 유물 등을 검토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첫댓글
환단고기 책은 일본인이나 중국인이 발행한 책이 아니라 독립군 홍범도 장군과 오동진 장군 두 사람의 자금지원으로 30부를 간행한 책이다.
그런데 왜? 식민사학자들은 거짓말 책이라고 일본사람이나 중국사람들보다도 더 환단고기 책을 저주하다못해 오히려 원수스럽게 생각하는 것일까?
일제 식민사학 추종자들이 그들의 영달과 직결된 자신들의 아성을 방어하기 위해 뿌려 놓은『환단고기』위서 바이러스에 많은 국민들이 감염이 되어 있다.
위서론자들의 본질적인 이유는 식민사학이 붕괴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이 상실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위서론자들은 자유, 평등, 인류, 세계, 원시국가, 문화,문명, 개화, 부권(父權), 헌법과 같은 어휘가 쓰인 것을 빌미로,
환단고기를 일제강점기 때 독립 운동가들이 민족주의를 고양하기 위해 꾸며낸 책이라 한다.
그런데 이 어휘들은 고문헌에서도 발견되는 것들이다. 그 중에서 자유는 ‘자기가 주인이 되다’라는 뜻으로, 평등은 산스크리트어의 번역어로서 ‘차별이 없다’는 뜻으로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자유와 평등도 그러한 뜻으로 쓰인 것이다.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에 나온 시선집인 옥대신영(玉臺新詠)에 수록된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에서 “내가 마음속으로 오
@커발환
내가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분함을 품고 있었는데, 네가 어찌 멋대로 할 수 있는가(吾意久懷忿 汝豈得自由)라고 하여 ‘자유’라는 어휘가 나온다.
인도 승려 구마라습(鳩摩羅什,344~413)에 의해 한문으로 번역된 금강경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편에 이 법은 차별이 없어 높고 낮음이 없다(是法平等 無有高下 )라고 하여
‘평등’이란 어휘가 사용되었다.
장자 지북유(知北遊)편에서 “생물은 이를 서러워하고, 사람은 이를 슬퍼한다(生物哀之 人類悲之)라 하여 ‘인류(人類)라는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당나라 때 한문으로 번역 된 능엄경의 ‘무엇을 중생세계라고 합니까(何名爲衆生世界)라는 구절에 ’세계‘라는 어휘가 사용 되었다
@커발환
주역 계사하(繫辭下)의 ‘군자는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존립해 있을 때에도 멸망을 잊지 않으며, 잘 다스려질 때에도 어지러움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몸을 보전할 수 있고, 집안과 나라를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君子安而不忘危 存而不忘亡 治而不忘亂 是以身安而國家可保也)라는 구절에서
고대로부터 사용된 ’국가‘를 확인 할 수 있다.
‘문’과 ‘화’가 결합된 문화라는 말은 고대에 이미 사용 되었으며, 문으로써 가르쳐 변화시키다(以文敎化)를 뜻한다.
@커발환
전국시대의 역사서인 국어(國語), 진어(晉語)편을 보면,“선행을 상주고 간악한 행위를 벌주는 것은 나라의 법이다(賞善罰姦 國之憲法也)하고 하여
‘법’, ‘법전’을 뜻하는 ‘헌법’이 나온다. 백번 양보하여 정말 근대어가 가필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환단고기 자체가 완전 조작된 위서임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인류사의 여러 경전들을 돌이켜 보라. 수백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는 가필과 재편집을 통한 보정 작업 끝에 오늘날의 경전이 되지 않았는가.
주역(周易)은 태호 복희씨로부터 공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고, 도덕경은 왕필이 덕경과 도경의 본래 순서를 뒤집어 재구성한 것이다.
@커발환
동양의학의 성서인 황제내경은 황제 헌원을 가탁하여 전국시대를 거쳐 한 대에 성립되었고,
불교의 화엄경도 분리되어 있던 경전들이 수차례의 결집을 거쳐 후대에 합쳐진 것이다.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다섯 권의 사서가 천 년에 걸쳐 쓰인 사실과 그 중 가장 나중에 쓰인 태백일사가 나온 지 400년이 지나 환단고기가 묶어졌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원래 다섯 저자들이 쓴 원본이 무수한 전란과 외세의 사서 강탈을 무사히 피하여 전해졌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
계연수가 모은 다섯 권은 필사 과정에서 인물, 연대, 장소가 오착되기도 하고 부족한 내용에 가필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환단고기의 일부 술어와 연대
@커발환
일부 술어와 연대 표시가 사실과 다르거나 다른 사서들과 다소 어긋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민족의 국통 맥, 태곳적 한 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밝혀 주는 환단고기의
독보적인 가치가 전적으로 매도 될 수 는 없다.
그리고『환단고기』의 기록을 검토해 볼 때 그 내용이 유물로 입증된 사례도 있다.
『환단고기』에는 장수왕의 연호와 관련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 내용이 1915년에 발견된 불상에 새겨진 기록에 의해서 입증된 것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있는데 건흥 연호가 1915년 충북 충주 노온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서 나타난 것이다.
@커발환
역사기록의 진실여부는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입증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사례를 과학적 용어로 검증이라고 한다.
시기적으로 볼 때 기록이 먼저 있고 그 기록의 사실여부를 밝혀주는 유물이 발견되면 그 기록의 진실성이 검증된다.
“천남생묘지(泉男生墓誌) 비문(碑文)”도 그러한 예가 될 것이다.
천남생(泉男生)은 고구려의 재상이자 영웅인 연개소문의 큰 아들이다.
그의 묘비명이 1923년에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남생의 아버지 개금(蓋金), 할아버지 태조, 증조부 “자유(子遊)”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태백일사太白逸史』가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밝힌 기록과 일치한다.
@커발환
이 책은 여기에 남생의 고조부, 즉 연개소문의 증조부 이름을 “광(廣)”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다.
또 광개토태왕 비문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환지 17세손’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광개토태왕은 추모鄒牟왕의 13세손’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다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가?
『환단고기』를 보면 그 이유가 밝혀지게 된다.
『환단고기』에는 고구려 제왕의 계보가 제1세 해모수(BCE 194년에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북부여 건국)로부터 →제2세 고리국의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북부여 건국)로부터
→제2세 고리국의 제후 고진
@커발환 제2세 고리국의 제후 고진(해모수의 둘째 아들)→제3세 고진의 아들→제4세 옥저후 불리지(고진의 손자)→제5세 고추모(고주몽, 고진의 증손자) … 제17세 광개토태왕(주몽의 13세손)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주몽의 선조는 해모수이며 그로부터 치면 광개토대왕은 17세가 되는 것이다.
『삼국사기』도 광개토대왕비도 모두 정확한 사실을 담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을 『환단고기』가 해명해준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환단고기』가 후대의 창작이 아닌
진서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알려주는 여러 증거들이 『환단고기』 자체 내에 많이 들어있다.
@커발환
문제는 그 증거들을 일일이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환단고기』를 대하는 자세이다. 왜 자세히 연구하고 검토하지 않고 굳이 위서라고 낙인찍는가 하는 것이다.
민족사학자이건, 역사학계의 주류 사학자이건 누구라도 『환단고기』를 연구하는 사람은 우선 『환단고기』에 담긴 한민족과 인류의 시원 문화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열린 태도와 긍정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
『환단고기』가 편찬, 간행된 것은『환단고기』의 앞에 붙어 있는 서문에 해당하는 범례에 따르면 계연수 선생은 자신의 동지이자 벗인 홍범도 장군과 오동진 장군
두 사람의 자금지원으로 30부를 간행했다고 한다. 범례에 ‘기궐’이라는
@커발환
범례에 ‘기궐’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목판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환단고기』를 우리에게 전해준 이유립 선생은 1907년생으로서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의 제자이자 계연수 선생의 제자였다.
그는 13세 때 삭주 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배달의숙이라는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이 학교에서는 계연수를 위시하여 최시흥, 오동진 등이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유립 선생은 조선독립소년단에 참가하여 활동하는 등 소년시절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는데 특히 교육운동에 뜻이 있어 33세 때에는 신풍학원도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커발환
해방이 되자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그는 1948년 남한으로 월남할때『환단고기』를 가져왔다.
이유립 선생은 1963년 대전 은행동에 정착해서 후학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쳤는데 그 때 사용했던 교재가 『환단고기』였다.
이는 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양종현梁宗鉉 씨가 직접 증언해준 사실이다.
양종현씨는 1966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이유립 선생에게 사사했던 분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유립 선생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 초간본은 1976년경에 분실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유립은 월간 『자유』지를 운영하고 있던 박창암 장군(1923-2003)의 도움을 받아 의정부에 살고 있었는데 백내장 수술차 5일간 집을 비운 사이 집
@커발환
백내장 수술차 5일간 집을 비운 사이 집주인이 야반도주한 걸로 착각하고 집세 대신에 이유립 선생의 책들을 모조리 팔아버린 것이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환단고기』 원본이
사라지는 바람에 『환단고기』 위서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위서론자들은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의 원본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조작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환단고기』 범례에서도 나오듯이 운초 계연수가 1911년에 만주 관전현에서 스승 해학 이기의 문중에서 전해 오던 『태백일사』(8권으로 구성)와
다른 4권의 정통 사서를 한 권으로 묶어 간행하였는데, 1920년 만주 관전현, 압록강 부근
@커발환 1920년 만주 관전현, 압록강 부근의 조선인의 사설학교 배달의숙(倍達義塾)에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친다.
이 학교는 독립운동가인 석주 이상룡 선생과 송암 오동진 장군이 출연, 설립한 뒤 일대 독립군 및 그 자녀들에게 조선의 역사와 혼을 가르쳐오던 터였다.
일본 헌병들은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계연수선생을 체포하고 계연수선생과 여러 교사들이 수집하고 연구한 책과 저술, 자료 등 3천여 점을 강탈해 헌병대로 실어갔다고 한다.
“헌병대가 강탈한 온갖 자료들 가운데는 당연히『환단고기』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일본 헌병들은 운초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펴낸 바로 그 인물인 것을 알고는 온갖 고문을 가하고는
@커발환
온갖 고문을 가하고는 사지를 다 잘라서 압록강에 내다버렸다. 그렇게 토막토막 잘려진 선생의 시신을 동포들이 수습하던 장면을 직접 목격한 분이 그의 제자인 한암당 이유립
선생이다. 이유립 선생은 평안북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인 해학 이기의 제자 이관집의 아들이고 열세 살부터 배달의숙에서 계연수선생에게서 배웠다.
계연수선생과 이관집 선생은 일찍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전해오던 한민족의 고유사서들 대부분은 전란이 빈번하여 사서들이 소실된 경우가 많았고 외적에게 탈취되어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궁궐과 많은 절, 건물들이 불에 타면서 그곳에
@커발환 건물들이 불에 타면서 그곳에 있던 서적들도 소실되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유학에 물든 조선 조정은 우리 고유 사서를 민간으로부터 수거하여 궁궐에 비장하였다가
전란이나 화재로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 『진역유기震域留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고기古記』, 『밀기密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려팔관 잡기高麗八觀雜記』 등 현재 전해지지 않는 고유 사서의 이름이 나온다.
이렇게 한민족사의 참 모습을 확인시켜 줄 사서들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지금, 『환단고기』와
@커발환 『환단고기』와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등 몇 종의 책들이 겨우 전해지고 있다.
『단기고사』는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대진국을 세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발해문자로 쓴(729년) 책이다.
전수 과정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59년 국한문으로 번역되었지만, 6·25 사변 때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단기고사』는 구전되어온 자료를 토대로 복원된 것이다.
『규원사화』는 그 서문에 의하면, 북애노인北崖老人이란 인물이 숙종 2년(1675년)에 지었다. 총 다섯 부분으로 나눠져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시대를 모두 다루고
있다.
@커발환
『제왕연대력』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지은(890년경)대표적 저술 중의 하나로 신라 역대 왕력이다. 원본은 일제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홍종국洪種國이 필사한(1929년) 필사본만 전한다. 고조선의 1세, 2세 단군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이들 고유 사서 가운데서도 삼성조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역사만 아니라 상고시대 동북아 문화권의 정치, 경제, 풍속, 언어, 음악, 국제 관계 등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전하는 『환단고기』야말로 한민족 고유사서의
최고봉이라 하겠다.
『환단고기』를 조작했다고 하는 위서론을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를 하는데 첫째는 1911년에 나왔던『환단고기』의초간본이 없어졌다는 얘기를
@커발환
『환단고기』의초간본이 없어졌다는 얘기를 하고 있지만, 일본이 환국을 뿌리 뽑아서 우리민족의 환국과 배달과 단군조선의 역사를 말살시켜버린 것을 보면
『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그들이 분명히 본 것이다. 신해년 1911년은 일제에 의해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해였다.
후대 사람들한테 한민족사의 뿌리역사와 혼이 담긴 『환단고기』가 전해져야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일제에 의해서 빼앗길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계연수 선생은
1980년에 공개하라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유립 선생이 죽기 직전 책이 나왔다.
@커발환
1980년도 직전까지는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정권의 군부통치 유신체제 시절로 표현의 자유가 금지되던 시기였다.
때문에 80년 서울의 봄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 그동안 음지에서 숨어있던 민중서적과 금서들이 봇물터지듯 나왔다.
결과적으로 계연수 선생은 적절한 시기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알리라고 하는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행촌 이암(杏村 李灸,1297~1364)선생의 후손 가운데서 현손인 고려 중종( 中宗) 15년(1520년) 이맥李陌(1455~1528)선생이 찬수관(撰修官)이 되면서 자기 윗대 할아버지로부터
전수내려온 단군세기(檀君世紀)라든지, 조선 왕조에서 살아남았었던 우리의 역사서를 집대성 해서 여덟권의
@커발환
우리의 역사서를 집대성 해서 여덟권의 『태백일사太白逸史』書를 냈는데, 그 첫 번째 책이 바로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를 읽어봐야 이 동북아 역사의, 역사 정의가 바로 잡힐 수 있는 것이다.『환단고기(桓檀古記)』는 중국과 일제가 저지른 역사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서이다. 그런데도 일제 식민사학 추종자들이 그들의 영달과 직결된 자신들의 아성을 방어하기 위해 뿌려 놓은 위서 바이러스에 많은 국민들이 감염이 되어 있다.
위서론자들의 본질적인 이유는 식민사학이 붕괴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이 상실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