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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 문태준
새떼가 우르르 내려앉았다
키가 작은 나무였다
열매를 쪼고 똥을 누기도 했다
새떼가 몇발짝 떨어진 나무에게 옮겨가자
나무상자로밖에 여겨지지 않던 나무가
누군가 들고 가는 양동이의 물처럼
한번 또 한번 출렁했다
서 있던 나도 네 모서리가 한번 출렁했다
출렁출렁하는 한 양동이의 물
아직은 이 좋은 징조를 갖고 있다
은하수와 소년 / 문태준
푸른 수초 사이를 어린 피라미떼가 헤엄치고 있었다
그걸 잡겠다고 소매를 걷고 손을 넣은 지 몇핸가
가만가만 있어라,
따라 돌고 따라 흘렀으나
거기까지 가겠거니 하면 조금 더 가서 알을 슬고
알에서 갓 태어난 것은 녹을 듯 눈송이같이 눈이 맑았다
영원(永遠) / 문태준
어릴 때에 죽은 새를 산에 묻어준 적이 있다
세월은 흘러 새의 무덤 위로 풀이 돋고 나무가 자랐다
그 자란 나뭇가지에 조그마한 새가 울고 있다
망망(茫茫)하다
날개를 접어 고이 묻어주었던 그 새임에 틀림이 없다
수련 / 문태준
작은 독에 더 작은 수련을 심고 며칠을 보냈제
얼음이 얼듯 수련은 누웠네
오오 내가 사랑하는 이 평면의 힘!
골똘히 들여다보니
커다란 바퀴가 물 위를 굴러가네
빈집 / 문태준
주인도
내객(來客)도 없다
겨울 아침
오늘의 첫 햇살이
흘러오는
찬 마루
쪽창 낸 듯
볕 드는 한쪽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린
들고양이
여객(旅客)처럼
지나가고
지나가는
집
마루 / 문태준
먼 곳 수평선 푸른 마루에 눕고 싶다 했다
타관 타는 몸이 마루를 찾아, 단 하나의 이유로 속초 물치항에 갔다
그러나 달포 전 다솔사 요사채, 고요한 安心寮(안심료)의 마루는 잊어버려요
대팻날을 들이지 않는, 여물고 오달진 그런 몸의 마루는 없어요
近境(근경)에서 저 푸른 마루도 많은 날 뒤척이는 流民(유민)일뿐
당신도 나도 한 척의 격랑이오니 흔들리는 마루이오니
구순의 입과 입술에는 / 문태준
내 옆집 구순(九旬)의 입과 입술에는 작은 언덕이 하나 느릿느릿 움직여갔습니다
구붓하게 걸어갈 때 큰 귀가 풀잎처럼 떠 있었습니다
숨이 가쁘고 지난해 풀벌레 소리가 났습니다
가끔 어떤 속말에는 잔물결처럼 웃고 이내 허물어지듯 손을 내저었습니다
앉아도 꽤 여럿이 앉을 긴 의자에 혼자 앉았습니다
흐릿한 빛이 지나가는지 슬며시 눈을 감았다 떴습니다
두어번 물어도 그렇지, 그렇지, 라고만 나직이 말했습니다
구순의 입과 입술에는 저 먼 계곡처럼 무른 구름더미가 가득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찬 염주를 돌리며 / 문태준
어느날 어머니는 찬 염주를 돌리며 하염없이 앉아만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머리를 숙이고 해진 옷을 깁고 계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꽃, 우레, 풀벌레, 눈보라를 불러모아서, 죽은 할머니, 아픈 나, 멀리 사는 외숙을 불러모아서, 조용히 작은 천조각들을 잇대시는 것이었습니다. 무서운 어둠, 계곡 안개, 타는 불, 높은 별을 불러모아서. 나를 잠재울 적에 그러 했듯이 어머니의 가슴께서 가늘고 기다란 노래가 흘러나 오는 것이었습니다. 사슴벌레, 작은 새, 여럷살 아이와 구순의 할머니, 마른 풀, 양떼와 초원, 사나운 이빨을 가진 짐승들이 모두 다 알아온 가장 단순한 노래를 흞조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부르는 노래는 찬 염주 속에 갇혀 어머니가 불러모은 것들을 차례로 돌고 돌다 명명(明明)한 겨울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울고 간다 / 문태준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낼 수 없는
산 그림자와 나비 / 문태준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왕성해지는
산 그림자의 내면을 나비가 폴락폴락 날고 있습니다
얇고 하얀 낱장을 넘깁니다
산은 창문 너비의 검은 커튼을 치고
나비는 쪽창 같은 하얀 깨꽃에 날개를 세워 접고 앉고
눈초리에
시린
모색(暮色)
망인(亡人) / 문태준
관을 들어 그를 산속으로 옮긴 후 돌아와 집에 가만히 있었다
또 하나의 객지(客地)가 저문다
흰 종이에 떨구고 간 눈물자국 같은 흐릿한 빛이 사그라진다
나는 돌아가 惡童처럼 / 문태준
멀리 가서 멀리 오는
눈을 맞는다
만 섬 그득히 그득히
무 밑동처럼 하얀 눈이네
밟으면
무를 한입 크게 물은 듯
맵고 시원한
소리가 나네
나는 돌아가 惡童처럼,
둘둘 말아 사람을 세워놓고
나를 세워놓고
엉덩이 살을 베어
얼굴에
두 볼에 붙이고
모자를 얹어
나는 살쪄 웃는다
내가 눈 속으로 아주 다 들어갈 때까지
먼 곳 / 문태준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움큼, 한움큼, 호흡한다
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 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슴을 세워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나목은 다 벗고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
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곳에 앉아 있다
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老母 / 문태준
반쯤 잠긴 눈가로 콧잔등으로 골짜기가 몰려드는 이 있지만
나를 이 세상으로 처음 데려온 그는 입사 사방에 골짜기가 몰려들었다
오물오물 밥을 씹을 때 그 입가는 골짜기는 참 아름답다
그는 골짜기에 사는 산새 소리와 꽃과 나물을 다 받아먹는다
맑은 샘물과 구름 그림자와 산뽕나무와 으름덩굴을 다 받아먹는다
서울 백반집에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그는 골짜기를 다 데려와
오물오물 밥을 씹으며 참 아름다운 입가를 골짜기를 나에게 보여준다
水平 / 문태준
단 하나의 잠자리가 내 눈앞에 내려앉았다
염주알 같은 눈으로 나를 보면서
투명한 두 날개를 水平으로 펼쳤다
모시 같은 날개를 연잎처럼 수평으로 펼쳤다
좌우가 미동조차 없다
물 위에 뜬 머구리밥 같다
나는 생각의 고객를 돌려 좌우를 보는데
가문 날 땅벌레가 봉긋이 지어놓은 땅구멍도 보고
마당을 점점 덮어오는 잡풀의 억센 손도 더듬어보는데
내 생각이 좌우로 두리번거려 흔들리는 동안에도
잠자리는 여전히 고요한 수평이다
한 마리 잠자리가 만들어놓은 이 수평 앞에
내가 세워놓았던 수많은 좌우의 병풍들이 쓰러진다
하늘은 이렇게 무서운 수평을 길러내신다
바깥 / 문태준
장대비 속을
멧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彈丸처럼 빠르다
너무 빠른 것은 슬프다
갈 곳이 멀리
마음이 멀리에 있기 때문이다
하얀 참깨꽃 핀 한 가지에서
도무지 틈이 없는
빗속으로
소용돌이쳐 뚫고 날아가는
멧새 한 마리
저 全速力의 힘
그리움의 힘으로
멧새는 어디에 가 닿을까
집으로?
오동잎같이 넓고 고요한 집으로?
中心으로?
아,
다시 생각해도
나는
너무 먼
바깥까지 왔다
일가(一家) / 문태준
귀뚜라미 한마리가 내 방에 찾아왔네.
사실은 내가 귀뚜라미를 불러들였지.
과일이 썩으면서 벌레를 불러들이듯이.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어제보다 훨씬 커졌지.
내 이가 다 시릴 정도였으니.
새벽녘 한참을 울 적엔
서로에게
마치 엉성하게 쌓인 돌담이라도 되어
너도 나도
더는 갈 곳 없어
더는 갈 곳 없이
서로에게
받친 돌처럼 앉아서.
극빈 / 문태준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 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돌과 포도나무 / 문태준
옆에서 포도나무 넝쿨이 뻗고 있다
돌 위로 포도나무 넝쿨 그림자가 내리고 있다
내리는 공간이 보슬비 내리는 때처럼 가볍다
나는 너에게서 온 여름 편지를 읽는다
포도나무 잎사귀처럼 크고 푸른 귀를 달고 눕고 싶다
이런 얇고 움직이는 그림자라면 얻어 좋으리
오후에는 돌 위가 좀더 길게 젖었다
포도나무 잎사귀처럼 너는 내 속에서 자란다
극빈 2 / 문태준
-獨房
칠성여인숙에 들어섰을 때 문득, 돌아 돌아서 獨房으로 왔다는 것을 알았다
한 칸 방에 앉아 피로처럼 피로처럼 꽃잎 지는 나를 보았다 천장과 바닥만 있는 그만한 독방에 벽처럼 앉아 무엇인가 한 뼘 한 뼘 작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흘러 나가는 것을 보았다
고창 공용버스터미널로 미진양복점으로 저울집으로 대농농기계수리점으로 어둑발은 내리는데 산서성의 나귀처럼 걸어온 나여.
몸이 뿌리로 줄기로 잎으로 꽃으로 척척척 밀려가다 슬로비디오처럼 뒤로 뒤로 주섬주섬 물러나고 늦추며 잎이 마르고 줄기가 마륵고 뿌리가 사라지는 몸의 숙박부, 싯다르타에게 그러했듯 왕궁이면서 화장터인 한 몸
나도 오늘은 아주 식물적으로 독방이 그립다
벌레詩社 / 문태준
시인이랍시고 종일 하얀 종이만 갉아먹던 나에게
작은 채마밭을 가꾸는 행복이 생겼다
내가 찾고 왕왕 벌레가 찾아
밭은 나와 벌레가 함께 쓰는 밥상이요 모임이 되었다
선비들의 亨子모임처럼 그럴듯하게
벌레와 나의 공동 소유인 밭을 벌레詩社라 불러 주었다
나와 벌레는 한 젖을 먹는 관계요
나와 벌레는 무봉(無縫)의 푸른 구멍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노동은 단단한 턱으로 물렁물렁한 구멍을 만드는 일
꽃과 잎과 문장의 숨통을 둥그렇게 터주는 일
한 올 한 올 다 끄집어내면 환하고 푸르게 흩어지는 그늘의 잎맥들
서리 / 문태준
겨울 찬 하늘 한 켜 살껍질을 누가 벗겼나
어느 영혼이 지난밤 꽃살문 같은 꿈을 꾸었나
갓 바른 문풍지 같고 공기로만 빚은 동천産 첫물
사락사락 조리로 쌀을 이는 소리가 난다
어느 저녁에 / 문태준
독의 뚜껑을
하나하나씩 덮는
저녁은
저녁은
깊이깊이
들어간다
나는 예닐곱
뚜껑을
덮고
天蓋(천개)로 나의
바깥을 닫고
미처 돌아오지 못한 것이 있다.
발을 씻고
몇 걸음 앞서
봄마루에 앉으면
너는 내게
아주 가까이는 아니게
산마루까지만 와
길고 긴
능선으로
돌아눕는다
언제 또 여러번 / 문태준
왼 손목의 맥을 짚으며 비를 보네
물통을 내려놓고 비를 보네
이 비 그치면 낙과(落果)를 줍게 되리
천둥 우는 소리는 처음엔 높고 나중엔 낮아지네
계곡물은 비옷을 입고 급하게 내려오네
오늘 잎ㄱ넝쿨같이 뻗어가는 구름 아래를 지나며
언제 또 소낙비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네
쏟아짐이여,
여러번의 오후는 여름 위에
여러번의 여름은 일생(一生)위에
이처럼 쏟아진다 할밖에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이 질펀하네
자루 / 문태준
자루는 뭘 담아도 슬픈 무게로 있다
초봄 뱀눈 같은 싸락눈 내리는 밤 볍씨 한 자루를 꿔 돌아오던 家長이 있었다 그 발자국 소리를 듣고 일어나면 나는 난생처음 마치 내가 작은댁의 자궁에서 자라난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입이 뾰족한 들쥐처럼 서러워서 아버지, 아버지 내 몸이 무러워요 내 몸이 무러워요 벌써 서른 해 전의 일이오나 자루는 나를 이 새벽까지 깨워 나는 이 세상에 내가 꿔온 영원을 생각하오니
오늘 봄이 다시 와 동백과 동백 진다고 우는 동박새가 한 자루요 동박새 우는 사이 흐르는 銀河와 멀리와 흔들리는 바람이 한 자루요 바람의 지붕과 石溜꽃 같은 꿈을 꾸는 내 아이가 한 자루요 이 끊을 수 없는 것과 내가 한 자루이오니
보리질금 같은 세월의 자루를 메고 이 새벽 내가 꿔온 영원을 다시 생각하오니
묽다 / 문태준
새가 전선 위에 앉아 있다
한 마리가 외롭고 움직임이 없다
어두워지고 있다 샘물이
들판에서 하늘로 검은 샘물이
흘러들어가고 있다
논에 못물이 들어가듯 흘러들어가
차고 어두운 물이
미지근하고 환한 물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물을
섞이면서 아주 더디게 밀고 있다
더 우두워지고 있다
환하고 어두운 것
차고 미지근한 것
그 경계는 바깥보다 안에 있어
뒤섞이고 허물어지고
밀고 밀렸다는 것은
한참 우에나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도록 너무
늦지는 않아 벌써
새가 묽다
흘러넘치네 / 문태준
낮에 논둑에 가 풀을 베어
풀짐을 지고 돌아와
풀더미를 부려놓고
오늘은
저무는 내내
울안에 동실한 풀냄새
풀냄새
두 팔에
안아도
안아도
흘러넘치는
훌냄새
구유에도
목매기송아지에게도
그맘때에는 / 문태준
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졌다
빈손이다
하루를 만지작만지작하였다
두 눈을 살며시 또 떠 보았다
빈손이로다
완고한 비석 옆을 지나가보았다
무른 나는 金剛이라는 말을 모른다
그맘때가 올 것이다. 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듯
그맘때에는 나도 이곳서 사르르 풀려날 것이니
어디로 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후두둑 후두둑 풀잎에 내려앉던 그들은
정야(靜夜) / 문태준
창호에 대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나는 바람에 떨리는 너의 잎사귀를 읽는다
이처럼 면(面)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 오래 곁에 있으니 우묵하거나 불룩하다
엎어질 듯이 서두르거나 망설이는 때가 있다
들추는데 냄새, 소리, 맛이 단숙하지 않다
이리저리 위와 아래로 흔들리지만
깊거나 두껍거나 슬프거나 높거나 멀고 멀다
돌의 배 / 문태준
강가에 가 둥글둥글한 돌을 보네
물의 큰 알들
살찐 보름들
강가에 가 돌의 배를 만져보네
햇살도 둥글둥글하게 뭉치는 맑은 날
세월은 흘렀으나
배가 아프면
이런 욱욱한 돌로
배를 분지르던 날이 있었네
길 / 문재준
배꽃이거나 석류꽃이 내려오는 길이 따로 있어
오다가 익듯 마을에 천천히 여럿 빛깔 내려오는 길이 있어서
가난한 집의 밥 짓는 연기가 벌판까지 나가보기도 하는 그런 길이 분명코 있어서
그 길이 이 세상 어디에 어떻게 나 있나 쓸쓸함이 생기기도 하여서
그때 걸어가본 논두렁길이나 소소한 산길에서 봄 여름 다 가고
아, 서리가 올 때쯤이면 알게 될는지
독사에 물린 것처럼 굳어진 길의 몸을
가재미 /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적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 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허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가재미2 / 문태준
꽃잎, 꽃상여
그녀를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벌의 옷을 장만했다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옷, 꽃상여
그녀의 몸은 얼었지만 꽃잎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
두꺼운 땅거죽을 열고 독 같은 고요 속으로 천천히
그녀가 걸어 들어가 유서처럼 눕는다
울지 마라, 나의 아이야, 울지 마라
꽃상여는 하늘로 불타오른다
그녀의 몸에서 더 이상 그림자가 나오지 않는다
붉은 흙 물고기
상두꾼들이 그녀의 무덤을 등 둥근 물고기로 만들어 주었다
세상의 모든 무덤은 붉은 흙 물고기이니
물 없는 하늘을 헤엄쳐 그녀는 어디로든 갈 것이다
개를 데려오다
석양 아래 묶우니 한 마리 개가 늦가을 억새 같다
털갈이를 하느라 작은 몸이 더 파리하다
석양 아래 빛이 바뀌고 있다
그녀가 정붙이고 살던 개를 데리고 골목을 지나 내 집으로 돌아오다
가재미 3 / 문태준
- 아궁이의 재를 끌어내다
그녀의 함석집 귀퉁배기에는 늙은 고욤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방고래에 불 들어가듯 고욤나무 한 그루에 눈보라가 며칠째 미리며 밀리며 몰아치는 오후
그녀는 없다, 나는 그녀의 반집에 호로 들어선다
물은 얼어 끊어지고, 숯검댕이 아궁이는 퀭하다
저 먼 나라에는 춥지 않은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이제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끌어낸다
이 세상 저물 때 그녀는 바람벽처럼 서럽도록 추웠으므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식은 재를 끌어내 그녀가 불의 감각을 잊도록 하는 것
저 먼 나라에는 눈보라조차 메밀꽃처럼 따뜻한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저 먼 나라에서 그녀는 오늘처럼 밖이 추운 날 방으로 들어서며 맨 처음 맨손바닥을 쓸어볼지 모르지만, 습관처럼 그럴 줄 모르지만
이제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모두 끌어낸다
그녀는 나로부터도 자유로이 빈집이 되었다
젖 물리는 개 / 문태준
어미 개가 다섯 마리의 강아지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서서 젖을 물리고 있다
강아지들 몸이 제법 굵다 젖이 마를 때이다 그러나
서서 젖을 물리고 있다 마른 젖을 물리고 있는지 모른다
처음으로 정을 뗄 때가 되었다
저 풍경 바깥으로 나오면
저 풍경 속으로는
누구도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동천(冬天)에 별 돋고 / 문태준
저 하늘에
누가 젖은 파래를 널어놓았나
파래를 덮고 자는 바닷가 아이의 꿈같이
별이 하나 둘
쪽잠 들러 나의 하늘에 온다
그 아무것도 없는 11월 / 문태준
눕고 선 잎잎이 차가운 기운뿐
저녁 지나 나는 밤의 잎에 앉아 있었고
나의 11월은 그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무덤에 불과하고
오로지 풀벌레 소리여
여러번 말해다오
실 잣는 이의 마음을
지금은 이슬의 시간이 서리의 시간으로 옮아가는 때
지금은 아직 이 세계가 큰 풀잎 한장의 탄력에 앉아 있는 때
내 낱잎의 몸에서 붉은 실을 뽑아
풀벌레여, 나는 다시 짜다오
너에게는 단 한 타래의 실을 옮겨 감을 시간만 남아 있느니
떼 / 문태준
송사리들이
송글송글
떼지어 몰려다니는데
바람이 일지도 않는다
축축한 그림자를 끌고 다니고 있다
그림자들은
우수수 빗방울 처럼 떨어져
열 지은 기차를 닮았다가
열여덟 량 장대 열차가 되었다가
대통처럼 직선으로 내뻗었다가
등뼈가 흰 곡선이었다가
주먹밥처럼
돌 밑
한군데 모여들기도 한다
송사리들이 떼를 지어 다니고 있다
日常으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驛에서 저 驛으로
봇짐장사치들처럼
사원들처럼
주점에 모인 사람들처럼
가난한 가족의 저녁 밥상처럼
수많은 눈알들이 몰려 다니고 있다
번져라 번져라 病이여 / 문태준
1
개망초가 피었다 공중에 뜬
꽃별, 무슨 섬광이
이토록 작고 맑고 슬픈가
바람은 일고 개망초꽃이 꽃의 영혼이 혜성이 돈다
개망초가 하얗게 피었다
잠자리가 날 때이다
너풀너풀 잠자리가 멀리 왼편에서 바른편으로 혹은
거꾸로
강이 흐르듯 누워서 누워서
2
오늘 다섯 살 아이에게 두두가 지나가고, 나는 생각한다. 만발하는 것에 대하여 수두처럼 지나가는 꽃에 대하여 하늘에 푸른 액정 화면에 편편하게 날아가는 여름 잠자리에 대하여 내 생각에 홍반처럼 돈다 가그라드는 것에 대하여
그리하여 나는 지금 앓고 있는 사람이다
3
그리고 나는 본다. 한 집의 굴뚝에서 너풀너풀 연기가 번져 나오는 것을 그 얼룩을
그리고 나는 안다. 이 뜨거운 환장할 대낮의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한 여인을 그 얼룩을
에미가 황해도 무당이었고 남편은 함경도 어디가 고향이고 여인은 한때 소를 한때 묵뫼를 사랑했고 올여름 연기를 지독히 사랑했고 불을 때는 버릇이 생겼다는 것을 그 얼룩을
연기는 아주 굼뜨고, 연기는 무학자이고, 연기는 나부이고, 연기는 풀이 무성한 묵밭이고
연기는 아궁이 앞에 퍼질러 앉은 그 여인이고, 갈라진 흙벽의 정신이고, 미친 사람이고
나는 아니 보아도 안다. 벌써 스무 해 넘게 미쳐 지내온 저 여인이 어떤 표정으로 지금 앉아 있는지를
무얼 끓이느냐 무얼 삶느냐 물어도 여인은 손사래쳐 무심히 불만 밀어넣을 것이라는 것을
몇 통의 물을 다만 끓이고 끓이고 있다는 것을
내 눈과 마주치곤 까르르 까르르 웃던 그 검은 얼굴을
4
하늘의 밭에는 개망초가 잠자리가 연기가 수두처럼 지나가고 있다 더듬더듬거리며 옮아 가고 있다
번져라 번져라 病이여.
그래야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이다
오오 이런! / 문태준
나의 집에는 묵은 오리 한 마리가 있다 암컷이다 을을 많이 낳아 뒤가
청동 주발 같다 항우울제를 먹고 살고 자두가 익는 오늘 황혼에
눈에 늪이 괴어 있었다 눈초리로 늪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옆구리 털이 뽑히고 살이 갉혔다 그때
오리 곁으로 쥐 한 마리가 기어왔다 땅구멍을 뚫어 오리 곁으로
왔다 번들번들했다 곁말 거는 척 도리반거리다 오리곁으로
바싹 기어왔다 更紙를 갉는 소리가 났다 조금 후 구멍에서
익사한 몸처럼 부푼 쥐와 새끼 쥐가 기어나왔다 새끼 쥐는
눈망울이 또랑또랑했다 一家였다 나와 오리와 새 마리 쥐가
눈이 마주쳤다 오오 이런!
새벽에 문득 깨어 / 문태준
그 옛날 몰래 들여다본 새 둥지 속 네마리 새끼 같아서
밥 달라고 한껏 입 벌린 바알간 알몸 같아서
나나 새나 하나의 둥근 배 같기만 하여서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배 같기만 하여서
겨울 하늘 입 가득 찬별 돋은 이 새벽에는
어디 못 가본 절 법당 예불 기다리는 소종의 입이되고자
바위 / 문태준
풀리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다
새의 붉은 부리가 쪼다 오래전에 그만두었다
입담이 좋았던 외할머니도 이 앞에선 말문이 막혔다고 한다
나뭇짐을 내다 팔아 밥을 벌던 아버지도 이것을 지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덧 나도 사랑을 사귀고 식탁을 새로 들이고 아이를 얻고 술에는 흥이 일고
이 미궁의 내부로부터 태어난 지 마흔해가 훌쩍 넘었다
내가 초로를 바라볼 때는 물론
내가 눈감을 그날에도 이것은 뒷산이 마을에게 그러하듯 이 나를 굽어볼 것이다
나는 끝내 풀지 못한 생각을 들고 다시 캄캄한 내부로 들어갈 것이다
입술도 귀도 사라지고 이처럼 묵중하게만 묵중하게만 앉아 있을 것이다
집 바깥으로 내쫓김을 당해 한밤 외길에 홀로 눈물 울게된 아이와도 같이
그리고 다시 이 세계에 새벽이슬처럼 생겨난다면 이것을 또 밀고 당기며 한마리 새가 되고, 외할머니가 되고, 아버니가 되고, 마흔 몇해가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