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一植 前 고려대학교 총장 저서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에서 拔萃 "우리의 조국 조선왕조"
지금 우리 자신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얼마나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비근한 예로 이런 것을 들 수 있다. 즉, 오늘날 고등교육을 받은 우리 지식인 중에 조선왕조를 자신의 조국으로서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거의 없다고 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거의 대부분이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고 있다. 왕실의 임금들은 하나같이 무능하고 부도덕하였으며, 주지육림에 빠져 있지 않으면 비빈(妃嬪)들의 치맛지락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민생을외면했던 것으로만 여긴다. 또 당시의지식인 지배계층, 즉 사대부에 대해서는 서민들 등이나 쳐먹은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 그리고 당파싸움이나 하면서 국력을 낭비한 사람들로만 인식한다. 또 그런 가운데 망한 나라라해서 조선왕조 그 자체를 증오에 찬 시선으로 바라본다. TV의 사극을 보아도 늘 그런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과연 조선왕조가 그런 나라였던가? 그 해답을 얀간 다른 각도에서부터 찾아 보기로 하겠다. 이 따금 일본의 지식인들을 만나 대화하다 보면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자기들의역사 속에서 가장 멋지고 낭만이 있었던 시대로 자랑스럽게, 긍지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다름아닌 에도시대(江戶時代), 곧 도쿠가와 바쿠후(徳川幕府) 시절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학교교육을 정상적으로 받은 일본인이면 누구를 붙들고 물어 보아도 그렇게 대답한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에도시대라면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조 중기 이후에 해당하는데, 그 시대 일본의 문화라는 것은 당시 조선의 문화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낙후된 후진문화였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 한 가지만을 예로 들어도 분명해진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면서 일본의 요청에 따라 파견하기 시작한 우리의 문화사절이었다. 그 당시 7년에 걸친 대전란으로 인해 일본은 조선에게 원수의 나라가 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국교가 단절되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불과 9년 만에 국교가 재개된다. 그때는 서울과 에도, 즉 지금의 동경을 왕복하는 데 아무리 빨라도 석달 이상이 걸렸던 시대였다. 4시간이면 왕복할 수 있는 오늘날에도 8.15광복 이후 20여 년 동안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았던 사실에 비교하면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옛날에도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는 어떤 나라도 살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본은 우리에게 끈질기게 교섭의 재개를 요청해오고, 그요청에 응하여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하기 시작함으로써 양국은 다시 통교하게 된다. 그 이후 통신사는 일정하지는 않지만 평균 평균 12년 만에 한 번꼴로 파견된다. 이 통신사가 도래한다는 것이 당시 일본인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느가는 우리측 기록이 아니라 일본측 기록으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각계 각층의 사람으로 구성된 300~500명의 통신사 일행이 도착하면 에도 정부는 재정이 바닥날 정도로 그야말로 '칙사대접'을 하였다. 그 이유는 상국(上國)이요 선진국인 조선의 문화사절을 자기들이 받아들인다는것을 주변에 과시함으로써 에도 통치권의 권위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선진의 문물과 세련된 예의범절을 배울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통신사 행렬이 지나가는 길목에는 일본의 지식인들이 구름 모이듯 모여들었다, 그리고는 지난 10여 년 동안 궁금히 여겨 왔던 것들을 모두 적어 놓았다가 그때 일제히 물어 보곤 하였다는 것이다. 이번에 놓지면 또 10년 이상의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절박함마져 보이면서 말이다.
그 질문과 대답이 대개 필담(筆談)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지금까지도 별의별 희한한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 그 중에는 멀리 도야마 현(富山縣)에서 찾아온 의원(醫員)과 약재상 들이 통신사의 수행원으로 온 의원을 붙들고 갖가지 증세에 대한 처방을 물어 보는 기록도 있는데, 심지어는 '딸만 자꾸 낳고 아들을 못 낳는데 이럴때는 어떻게 합니까? 하는 난센스 같은 질문을 하기도 한다. 그럴 정도로 존선에서 온 의원이라면 무엇이든지 무불통지로 알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조선은 그런 환상을 빚어낼 만큼 아득한 문화의 선진국이었다.
이 에도시대의 지배층이라면 무사계급인데, 그들의 무사도가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들 하지만 그 잔혹성을 보면 도저히 문화인의 그것으로는 볼 수가 없다. 그 당시 우리 조선의 경우는 아무리 사대부로서 막강한 세도를 지니고 있는 자라 하더라도 자기 집에서 부리는 사노(私奴)조차 함부로 죽이지는 못하였고 반드시 관가에 그 처리를 넘기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본의 무사 앞에서는 백성의 목숨이 파리 목숨과도 같았다. 일반 평민은 길 가다가 사소한 트집만 잡혀도 무가가 그 자리에서 칼로 찍 베어 버리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처럼 원시적이고 포악한 시대였는데도 오늘의 일본 지식인들은 그 시대를 자기 역사의 찬란했던 한 시대로 생각하여 애정과 긍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반면, 조선은 그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문화국가였는데도 우리의 지식인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는 커녕 오히려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이러한 부정적 시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는 앞에서 개괄적으로 살펴본 바 있지만, 바로 저 에도시대를 찬미하는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심어 준 비뚤어진 역사관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인의 모순이기도 한 동시에 한국인의 모순이기도 하다.
그 모순이 어떻게 연장되어 오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증례로서 '이조(李朝)'라는 용어를 들수있다. 지금도 무심코 '이조시대'니 '이조백자'니 '이조실록'이니 하는 말들을 쓰고 있지만, 우리 역사상 이조라고 하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엄연히 '조선왕조'이데도 일제가 교묘한 통치 술책의 일환으로 고의적으로 '이조'라는 말로 바꿔 놓은 것이다. 그 속에 어떤 저의가 숨겨져 있는 살펴보자,
1919년 기미년 3.1 운동의 기폭제가 된 사건은 고종황제의 의문의 죽음이었다. 당시 우리의 고종황제께서 일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우리 황제를 저들이 이토록 맹랑히 시해(弑害) 할 수 있는가 하는 국민적 분노가 꽉 차 있었을 때, 거기애 불을 당겨 활활 타오르게 한 것이 바로 3.1 운동이었다. 그래서 날짜도 고종화제 인산 때를 기하여 들고 이러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당시 조선 백성들은 비록 일본의 식민지 백성이 되었으나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지난 날 자기 조국으로서의 조선 왕실에 대하여 뜨거운 애정을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미리 부터 이러한 사태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을 병탄한 직후, 왕실이 더이상 백성의 구심점이 될 수 없도록 하는 술책으로서 '이조'라는 말을 만들어 내었다. 즉, 지금까지의 왕실은 너희 조선 백성이 조국으로서 동일시할 국체(國體)가 아니라 전주 이씨의 일개 가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식의표현인 것이다. 그들은 다시 이왕직(李王職)이라는 직제를 만들고, 고종황제를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하였다. 그리고 엄연히 《조선왕조실록》인 책의 이름까지도 '이조실록'으로 고쳐 불렀다. 그러므로 온전한 주체성을 기닌 지식인이라면 이러한말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진실을 말하자면 고종황제야말로 진정 위대한 순국 선열의 한 분이시다. 고종화제는 대하제국을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로 선포하였고, 갖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을사 및 정미조약에 끝내 서명하지 않았으며,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 세게여론에 호소하여 국권을 지키려다 강제로 황제위를 양위(讓位)당하고, 마침내는 저들에 의해 독살당함으로써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였다. 그 내전(內殿)인 명성황후도 일인들의 야만적 폭거에 의해 무참히 시해당하고 궁내에서 시신이 불태워지는 참변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고종화제나 명성화후에 대해서 구국선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벼로 없다.
이러한 예를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설령 왕조시대에서 근대적 시민정부 시대로 이행하면서 국민이 왕실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고 투쟁했던 나라들이라고 해도 오늘날 우리 처럼 과거 왕조를 부정적으로 단절시켜 놓고 배척하지는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이러한 모순의 씨앗을 뿌려 놓은 일본인 자신들은 자기네 왕실에 대해서는 신성불가침 영역에 모셔 놓고 끔직이 받들고 있다.
연전에 이런 웃지 못할 사건이 있었다. MBC에서 〈분노의 왕국〉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는데, 그 첫회에 한국 청년이 일본 천황에게 총을 겨누는 장면이 나왔다고 한다. 나는 직접 보지 못하여 정확히 어떤 맥락에서 그런 장면이 나왔는지는 모른다. 어쨌든,그러자 일본에서 외교 채널을 통해 우리 정부에 정식 항의를 해 왔다는 것이 신문지상에 보도되었다. 아무리 드라마지만 남의 나라 황실에 대해 그처럼 무례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다. 저들은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남의 나라 황제와 황후를 시해하였을 뿐 아니라, 남의 나라를 36년간 이나 지배하고 착취한 사람들이다. 지금 그에 대한 사과에조차 인색한 저들이 과연 그런 가공(架空)의 극중 행위를 가지고 우릐에게 항의할 수 있는가? 이 세상의 그 어떤 나라, 그 어떤 민족도 자기 황실에 대한 그런 도발적 득라마가 나오면 다 항의할 수 있겠지만, 일본만은, 일본사람만은 우리 한국에 대해서 그럴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조선왕조는 우리 가슴 속 어디쯤에 있는가?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 가슴 속에 조국으로서의 조선왕조는 사라지고 없다. 이는 왕조시대에 대한 향수를 느껴서 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미우나 고우나 조선왕조는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뿌리요 밑바탕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그 뿌리와 밑바탕을 송두리째 부정하고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을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