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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짊어지신 이
마 8:5-17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 설 교 >
백부장의 큰 믿음
마 8:5-13 / 최영기 목사
성경에는 믿음이 적으므로 예수님께 책망을 들었던 사람과, 믿음이 좋으므로 예수님께 칭찬을 들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1)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두려워 할 때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시는 주님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2)베드로는 주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 오시는 것을 보고,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라고 하여, '오라'는 말씀을 듣고 물위로 걸어 가다가, 바람과 물결을 보고 무서워 빠져들어 가게 되었고, 그 때 주님께로부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는 책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본문의 백부장은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주님께 나왔다가 큰 칭찬을 받았습니다. 복음서 중에 가장 매력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떻게 믿는 믿음이 좋은 믿음인가를 묻기도 하고, 또한 그러한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이 물음에 대한 정확한 답변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믿음일 것입니다. 히 12:2에 보면 우리 주님을 '믿음의 주'시라고 했는데, 믿음의 주 되시는 바로 그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믿음은, 분명히 좋은 믿음이요, 큰 믿음이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이 시간에는 주님께 칭찬을 들었던 백부장의 좋은 믿음, 큰 믿음을 상고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백부장의 신분과 그의 인격
가버나움에는 분봉왕 헤롯의 궁이 있었고, 갈릴리 지방 사람들이 곧잘 반란을 일으켰기에 로마 제국은 그곳에 군단급의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그 로마 군단은 이탈리아 본토인들이 아니라 시리아나 레바논인들 같은 용병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장교급들은 대부분 로마 출신이었습니다. 로마 군대는 한 군단이 6000명인데, 이것을 100명씩 60단위 부대로 하여 그 지휘권을 백부장에게 주었습니다. 이같은 로마의 장교들은 마치 유대교의 산헤드린 공회원처럼 그 출세 가도가 열린 행운아들이요 엘리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위가 대단했습니다. 부자였습니다. 세도가 높았습니다. 여하튼 그가 유대인이 아니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눅 7:5에 보면 유대인들이 가버나움의 백부장을 가리켜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고 했습니다. 로마인은 유대인을 경멸하고, 유대인은 로마인을 증오하며, 서로 적대감을 품고 살아가던 그 당시에 이 백부장만은 달랐습니다. 그는 유대인을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적대 관계에 있던 유대 민족을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는 로마인이었지만 유대 나라에 와서 지내는 동안, 본래 천품이 선하고 구도심이 강한 사람인지라 유대교로 개종했을 것으로 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을 한다고 하는 속담이 있듯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그 사랑이 백부장으로 하여금 유대인을 사랑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 증거로 백부장은 유대인을 위하여 회당도 지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백부장을 유대인들도 자연히 흠모하고 존경하게 되었겠지요!
사람이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최고의 인격적인 대접을 받는 것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신자가 되었으면 우리 모두가 이 백부장처럼 존경받을 수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비난 거리가 되고, 교회의 trouble maker 되고, 문제 인물이 되고, 목사의 속이나 썩히는 사람이 되지 말고,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처럼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인물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백부장의 믿음
1)간구하는 신앙이었습니다.
5절에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 와 간구하여"라고 했습니다. 간구라는 말은 어떤 목적이 성취될 때까지 간절하게 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땀과 눈물을 흘려 가면서 간절히 간절히 매어 달리는 것을 뜻합니다. 백부장은 고급 장교였지만, 나사렛 예수 앞에 나와서 '주여 주여' 하면서 겸손히 부르짖으며 간구했습니다. 간구하는 기도에는 힘이 있습니다. 약 5:16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2)사랑을 겸전한 믿음이었습니다.
6절에 보면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 하나이다"고 했습니다. 본래 중풍병은 사실상 그렇게 대단한 진통이 있는 병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백부장의 눈에는 하인이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으로 비쳤졌습니다. 백부장은 하인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아픔처럼 느꼈기 때문입니다. 몹시 아팠던 하인은 다른 사람의 관심과 동정을 얻기 위해 '아이구 아파, 아파 죽겠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뭘 그래, 중풍병은 그렇게 통증이 심한 병이 아니야. 아프다고 소리친다고 낫나? 엄살부리지 말고 참아라 참아!'라고 했을 것입니다. 속담에 '내 고뿔이 다른 사람의 염병보다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내 고통은 크게 생각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은 적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이란 괭이나 호미 등과 같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단지 말할 줄 아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명이 없는 물건에 대해서는 우정도 정의도 있을 수 없다. 실로 말이나 소에게도 그러하며, 노예를 향해서도 우정이나 정의는 있을 수 없다. 주인과 노예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도구가 생명이 없는 노예인 것과 꼭 같이, 노예는 살아 있는 도구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예수님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노예를 물건으로 취급했습니다. 노예의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있었습니다. 더구나 병든 종은 무가치한 도구였을 것입니다. 몹시 귀찮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빨리 죽기만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종을 위하여 주님께 간구하는 백부장의 믿음은 사랑을 겸전한 귀한 믿음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참으로 사랑과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겸한 사랑의 사람, 사랑을 겸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겸손한 믿음이었습니다.
백부장의 간청을 듣고 주님께서는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선뜻 승낙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라는 말을 사용하여 치유의 주체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다른 인격의 권위나 능력을 빌어서 병을 고치시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이름의 권세로 행하실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암시한 것입니다. 그러자 백부장은 "주여 내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습니다"고 하면서 사양을 했습니다. 이것은 백부장이 얼마나 겸손한 사람인가를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는 점령국의 장교였습니다. 군대 장교는 교만하기 쉬운데도 그는 환경과 처지와 지위의 유혹을 극복한 겸손한 덕의 소유자였습니다. 인간은 환경과 처지에 유동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 때문에 왕으로서 겸손한 자 많지 않고, 부자로서 방탕하지 않은 자 별로 없으며, 군인으로서 포악하지 않는 자 또한 많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수있는 위세 높은 로마의 백부장은, 나사렛 촌에서 자란 무명의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으니, 이것은 그의 놀라운 겸손을 보여 줍니다. 또한 '내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과, 죄인을 구원하시기를 갈망하는 주님과의 관계는 가장 아름답고 놀라운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시원하게 하는 찬송의 제목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는 말일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즉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의롭게 되고, '나는 의롭습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죄인이 됩니다. 이렇게 신앙과 겸손은 불가분리적인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백부장의 겸손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그의 집에 맞이할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동안에, 그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맞이할 자격을 갖춘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어거스틴에게 그의 제자들이 찾아 와서 '가장 크고 놀랍게 변화되는 축복의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다는 말은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산은 물을 배척하지만, 계곡은 물로 채워져 있다'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만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구원해 주십니다. 겸손한 자는 명예를 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4)말씀만을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주여 내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주님의 말씀 한 마디로 자기 하인의 중풍병이 나을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는 만병의 의사되신 주님과 환자인 그의 하인이 만나지 않아도, 능히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백부장은 어떤 느낌이나 안수나 징표를 의지하는 신앙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의 권위와 능력을 인정하여, 주님의 말씀 한 마디면 공간을 초월해서, 시간을 초월해서 하인의 병이 나을 것을 믿는 놀라운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히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영적 치료, 정신적 치료, 육체적 치료등 세 가지 방면으로 우리를 치료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9편에 여호와의 말씀은 (1)영혼을 소생케 하며 (2)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3)마음을 기쁘게 하고 (4)우리의 영안을 밝게 한다고 했습니다. 유명한 부흥사 무디는 말하기를 '참 믿음은 창 1:1-계 22:21까지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고난과 위기 가운데 있을 경우 주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 문제의 해결 방법이 오직 주님의 말씀 안에 있고, 또 그 말씀으로만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과 삶의 근거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다만 두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고 했던 백부장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사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종들이나 부하들에 대해서는 명령을 내려 복종시킬 수 있겠지만, 자신의 종이 겪고 있는 질병이나 더 나아가서 이 세상 만물의 원리에 대해서는 자신이 아무런 권세를 행할 수 없으므로, 세상 모든 만물에 대해 진정한 권세를 가지고 계심으로 질병까지도 복종시킬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그분의 권세를 인정하고 도움을 청하였던 것입니다. 즉 그는 자기가 직속 상관으로서 부하에게 명령하면 군사들은 순종하지만, 하인 속에 있는 병마에게 명령하는 일은 자기의 영역이 아닌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병마에게 명령할 수있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같은 백부장의 말을 듣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고 크게 칭찬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기이히 여겨'로 번역된 헬라어는 '감탄하다'는 뜻입니다. 우리 나라 말로 '최고다!'라는 뜻이요, 영어권의 사람들이 감탄할 때 쓰는 '원더풀!'과 같은 의미입니다.
정작 하나님을 가장 잘 공경한다고 자부한 유대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큰 믿음을 백부장에게서 보신 주님께서는 몹시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네 믿은 대로 되리라'는 단서가 붙은 명령이었으니, 만일 백부장의 믿음이 입술에 붙은 거짓 믿음이었더라면,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의 믿음은 하인의 병이 즉시 나으므로 그 믿음이 참된 것임을 증명하게 되었습니다.
'네 믿은 대로 되라!'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정 하십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편의 믿음의 분량을 따라 주어집니다. 그러나 '네 소원대로 되라'는 아닙니다. 만일 그랬던들 복음은 불의한 욕심에 오용되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화된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믿음대로'란 원어 성경을 통해 보면 '네 믿었던 대로'라는 뜻임을 알 수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백부장의 믿음이란, 말씀만으로도 능히 질병을 다스리실 수 있는 권세가 예수님께 있음을 믿었던 백부장의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 우리는 치유의 능력은 주님께 있지만, 치유의 동인은 사람의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믿는 것만큼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믿음에 비례해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먼저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어느 곳,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무리 크신 능력을 준비하고 계셔도, 우리가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그만큼 큰 믿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은 주님의 능력을 확신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기왕에 주님을 믿을진대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는데, 오늘은 주님께로부터 "이스라엘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고 칭찬을 받은 백부장의 믿음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1)간구하는 믿음이었고 2)사랑을 겸전한 믿음이었으며 3)겸손한 믿음이었고4)말씀만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주님의 말씀의 신적 권위와 그 전능성을 절대로 믿는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곧잘 어떤 신비적 체험을 한 사람만을 좋은 신앙, 큰 신앙인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어린 아기는 꼭 엄마가 곁에 있어야 안심합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어머니가 멀리 있어도 사랑하고 믿고 행동합니다. 주님께서는 때로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인들에게 시청각 교육을 통해서 은혜를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도마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면서 부활의 확신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신비로운 체험이 없을지라도,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교훈과 언약을 확신하는 성도가 일등 신자입니다. 성숙한 신앙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베푸신 모든 표적과 기사와 은혜는, 결국 그 말씀을 믿게 하려는 목적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신비로운 체험 없이도 그 말씀을 확신하는 성도가, 보고, 듣고, 체험하여야만 믿는 성도보다 성숙한 성도요, 또 이와 같이 성숙하고 온전한 신앙을 지닌 성도를 주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백부장과 같은 큰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서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시는 축복을 다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만한 믿음(1)
마 8:5-13 / 김동호 목사
전에 어느 기독실업인회에서 몇 년 동안 성경공부를 인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함께 성경공부를 하시던 어느 교회 장로님께서 저에게 질문 하나를 하셨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마술사 한 사람이 왔었는데 텔레비젼에서 쇼를 하면서 시청자들에게 숫가락 하나 씩을 가지고 오라 하더랍니다.
그 방송을 보시던 장로님 내외 분이 그 마술사의 말대로 숫가락 하나 씩을 가지고 텔레비젼 앞에 앉았는데 그 마술사가 시키는대로 기압을 주었더니 당신들 보는 앞에서 숫가락 두 개가 모두 U자로 구부러지더라는 것입니다. 하도 신기해서 그것을 통에 담아 보관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와 같은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를 질문하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두 가지로 대답을 해 드렸습니다. 첫째 대답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적인 세계와 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물리적인 세계와 물리적인 힘만을 과학이라고 이야기하고 인정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적인 세계와 힘이 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U자로 구부러진 숫가락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대답이 더 중요했는데 두 번째 대답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다 쓸데 없는 짓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답을 드리면서 제가 장로님에게 '숫가락 구부러져서 나라에 보탬 된 일 있습니까?' '괜히 잘 쓰는 숫가락 못 쓰게나 만들었구먼'이라고 농담처럼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장로님이 하도 신기하여 그것을 통에 잘 보관 하셨다기에 장로님에게 그 통 앞에 이렇게 하나 써넣으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쓸데없는 짓>
하나님의 은혜로 유럽 코스타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11년째 코스타를 섬기고 있는데 한번도 후회를 해 본 일이 없습니다. 특별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11년째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것은 참으로 지겨운 일 중에 하나입니다. (갈수록 꽤가 나고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스타를 섬기는 기쁨 때문에 그런 고생과 지겨움은 정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코스타를 마치고 이태리를 다녀왔습니다. 밀라노에서 나흘 그리고 로마에서 사흘을 지냈습니다. 이태리에 있으면서 참으로 많은 성당들을 돌아보았습니다. 밀라노의 두오모(D.O.M) 성당과 베네치아의 성 마가 성당 그리고 로마의 베드로 성당들을 돌아보면서 도저히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엄청난 규모와 크기 그리고 아름다움을 정말 말로는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성당들을 돌아보고 난 후 제 결론은 단 하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쓸데없는 짓>
저를 정말 감동시킨 것은 그 엄청난 성당들이 아니었습니다. 저를 정말 감동시킨 것은 마지막 날 비행장에 나오기 직전 들렀던 카타콤베와 그리고 사도바울이 갇혔다가 목베임을 당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수도원이었습니다. 그곳 수도원은 바티칸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수도원이었는데 건물들은 지극히 평범하였고 평범 하였다기 보다는 초라하다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바울이 목 베임을 당하였을 때 사용되었던 대리석 돌 원주가 있었습니다. 그 돌 위에 목을 놓고 칼로 참수를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이태리 여행의 클라이막스는 그 수도원이었습니다. 어떻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람과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이 이번에 이태리의 밀라노와 로마를 여행하면서 다시 한번 확인한 매우 중요한 교훈이었습니다. 그것은 감동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감동은 역사로 이어져 왔습니다.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한 것은 로마도 아니었고 로마의 성당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 교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오순절날 성령을 받음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의 역사이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성당이라고 하는 성 베드로 성당이 세워져 있는 바티칸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바티칸은 옛날 점쟁이들이 모여 살던 곳이랍니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미아리와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 점쟁이들을 바티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곳의 이름이 바티칸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바로 그곳에서 베드로가 순교를 하게 되고 그것을 기념하여 바로 그곳에 성 베드로 성당이 세워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라는 말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고백을 하였을 때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에는 바로 그 말씀이 온 건물을 돌아가며 모자이크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들도 아시는 바와 같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고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기초가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남다른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세워진 이 터는 일제 시대 때 신사참배를 하였던 바로 그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남산은 지금 미아리보다도 더 우상숭배가 심한 곳입니다. 여기는 온갖 귀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본거지입니다. 여기가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바티쿠스들이 몰려있는 바티칸입니다.
이곳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교회의 기초로 삼으려고 하는 높은 뜻 숭의교회가 세워진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로마 바티칸에 성베드로 성당이 세워진 것은 참으로 근사한 일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저들은 베드로의 그 신앙고백을 순수하게 지켜나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이 카토릭의 맹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마저도 형상화하였습니다. 그것이 지나쳐서 우상화하였습니다. 반석과 같은 신앙고백은 없어지고 신앙 없는 반석들만 잔뜩 남아 바티칸은 다시 그냥 바티칸이 되어 버린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귀신들을 섬기던 바티쿠스들이 득실거리던 그 곳에 정말 반석 위에 세운 교회를 세우시고 싶으셨습니다. 엄청난 피의 대가를 치루시고 정말 그곳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셨는데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믿음의 반석이 아닌 그냥 반석으로 교회를 세우고 말았습니다. 그냥 반석은 그냥 돌입니다. 돌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돌입니다. 저들은 손도 대지 않은 숫가락이 구부러지는 것과 같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쓸데없는 짓>을 해 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기대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참으로 부족하고 능력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와 교인들인 우리들에게 기대를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다시 이곳에 반석 위에 세운 진정한 교회를 세우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일본 신사 자리 위에 그리고 아직도 온갖 귀신을 섬기고 있는 이 남산 위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교회의 모토로 삼은 높은 뜻 숭의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저는 필요한 예배당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배당을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무조건 예배당을 짓지 않는 것이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잘못하면 또 하나의 극단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는 훌륭한 예배당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느 정도의 건물과 시설이 우리 교회에도 필요할 것입니다. 가장 큰 부분을 학교와 공유하겠지만 학교는 학교의 특성이 있고 교회는 교회의 특성이 있기 때문에 서로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이 생길 것이고 그것을 위하여 필요한 교회의 전용 공간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교회와 목회의 생명을 예배당과 건물에 걸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들의 같은 생각과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회의 숫적인 성장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교회가 숫적으로 성장하여 큰 교회가 되었다고 그것을 악하게 보는 것은 건강한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위적인 성장은 반대하지만 자연적인 성장은 반대하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성장까지 부인하면 아주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교회의 사이즈만 놓고 목회와 교회의 성공 실패를 논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사이즈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허락하신 대로 할 것이지만 저는 목회와 교회의 성공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찾으시던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찾으시던 믿음의 의인 몇 사람에게 걸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찾아와 교인이 되신 여러분들의 같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높은 뜻 숭의교회를 개척하기 전 섬기던 교회에서 매 주일마다 마태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차례대로 설교해 왔습니다. 마태복음 7장까지를 설교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개척하고 새로 시작하는 교회에 꼭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되어지는 부분을 몇 달 동안 설교해 오다가 코스타를 떠나기 전 주일부터 다시 이어서 그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8장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앞으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한 설교를 차례대로 해 나갈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와 같은 차례에 의하여 주어진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와 우리가 이 말씀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을 선택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바로 백부장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백부장에 주목하신 것은 그의 계급과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이 크신 것을 보고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믿음이 좋았으면 예수님이 '이만한 믿음'이라고 하셨겠습니까?
사랑하는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 여러분 '이만한 믿음'이 강당으로 들어와 첫 예배를 드리고 본격적으로 교회의 설립을 공식적으로 교계와 사람들에게 알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를 한 주 앞둔 우리들에게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저는 이와 같은 일을 늘 당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기가 막히곤 합니다.
지금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이만한 믿음'이라고 예수님께 칭찬을 받은 백부장과 같은 사람입니다. 돈이 아닙니다. 건물이 아닙니다. 목사가 아닙니다. 장로가 아닙니다. 목사는 목회가 전문인 직업인 일 뿐이고 장로와 권사와 집사는 교회 봉사를 위한 직분일 뿐입니다.
물론 훌륭한 목사와 장로 그리고 권사와 집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말 필요한 것은 백부장과 같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한 주일에 이 설교를 다 하기가 벅차서 다음 주일까지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다음 주일에는 도대체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어떤 면을 보시고 그렇게 칭찬하셨는가를 자세히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그와 같은 면을 다루기 이전에 먼저 백부장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욕심 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스스로 생각해 보건데 유능한 목회자는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행정과 심방에 별로 은사가 없습니다. 사람을 관리하고 조직하는데도 전혀 은사가 없습니다. 교회를 건강하고 바르게 하는데 있어서 그와 같은 면도 매우 중요한 면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그와 같은 은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제가 목회 하는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그와 같은 면에서의 허물과 부족함을 많이 찾아내시게 될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조심은 하고 노력은 하겠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장점을 그와 같은데서 찾으려고 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의 관심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백부장과 같은 믿음의 사람에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읽으면 신이 납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설교를 해도 신이 납니다. 저 자신이 백부장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여러분들은 그와 같이 사람이 되도록 격려하고 훈련하고 싶습니다. 도전을 드리고 싶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설교 때마다 기도의 제목을 얻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간절한 기도의 제목을 얻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번 저의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은 '하나님 깨끗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였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일 설교를 통하여 우리가 새로 받아야 할 기도의 제목은 '하나님 저를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백부장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이와 같은 믿음이 사람들로 인하여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바티칸 교회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정말 우리 교회가 믿음의 반석 위에 세운 교회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입니다.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 큰 믿음의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만한 믿음(2)
마 8:5-13 / 김동호 목사
2001년 10월 7일 숭의여자대학 소강당에서 99명이 참석하여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드디어 오늘 교회 밖의 손님들을 청하여 사랑하는 우리 교인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설립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지난 5개월 동안 하나님은 외형적으로 볼 때 거의 완벽한 준비를 하게 해 주셨습니다. 벌써 출석교인들이 천명을 넘어서서 꼭 창립 5주년이 되는 지난주에는 주일 출석이 1,300명을 넘어섰고 우리가 예배당으로 사용할 대강당도 거의 완벽한 준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대대적인 수리를 통하여 완벽한 조명과 냉난방은 물론이고 최고 수준의 음향과 영상을 준비하여 어떠한 예배와 집회도 가능한 집회 시설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너무 좋은 사람들을 보내주시고 붙여 주셔서 그 많은 일들과 시설들을 정말 쉽게 준비하고 장만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복 주시기 위하여 사용하신 동안교회와 숭의학원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위에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받은 복과 같은 복을 내려 주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축복합니다. 창립 5개월만에 저희 교회만큼 모든 것을 갖추고 준비한 교회는 아마 이제껏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힘들게 고생하며 교회를 개척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분들을 생각하면 송구스럽고 죄스러운 마음까지 들 정도입니다.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개척과정을 보면 이것은 정말 틀림없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심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몰아 주시지 않으신다면 이렇게 단 시간 내에 이런 교회를 이룰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 메추라기를 몰아 주시듯 만나를 내려주시듯 그냥 쏟아 부어 주시는 은혜와 복 가운데 오늘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설립감사를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무엇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복을 주신 후 우리 사랑하는 높은 뜻 숭의교회와 교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백부장과 같은 '이만한 믿음'이었습니다. 사실 믿음이 없다면 수 천명 수 만명의 교인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완벽한 시설과 공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설립감사를 예배를 드리는 오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은 내가 다 공급해 주고 준비해 줄 터이니 너희들은 그냥 예수만 열심히 믿어 백부장과 같이 나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는 사람이 되거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성경을 깊이 읽어보면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 뿐 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 외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제사는 기뻐하셨지만 믿음 없는 제사는 기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제사를 통하여 표현되는 우리의 믿음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그 믿음 위에 복을 부어주십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복을 받았고 다윗이 믿음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이 믿음으로 복을 받았고 욥이 믿음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믿음으로 복을 받았고 베드로가 믿음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부어주시는 복은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복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의 일관된 주장과 가르침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서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오직 믿음'이라는 단호한 표현이 좋습니다.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한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시며 네가 땅에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의 열쇠란 형통함의 상징으로 분명한 하나님의 은혜와 부어주시는 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믿음으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사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이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다하였으며, 시편 92편에 보면 의인 즉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전에 심기운 종려나무처럼 번성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편 128편에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며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면 '이만한 믿음'이라고 칭찬을 하신 백부장에게 예수님은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은대로 되는 삶과 천국의 열쇠 그리고 시냇가 심기운 나무는 다 같은 컨셉의 말씀들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저는 인생과 목회의 전반전을 끝내고 후반전을 뛰는 심정으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전반전도 중요하지만 후반전이 중요합니다. 저는 전반전도 비교적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인생과 목회의 후반전을 더욱 열심히 뛰고 싶습니다. 인생과 목회의 후반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가를 저는 압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력과 이력에 승부를 겁니다. '얼마나 큰 교회를 하였느냐?' '어떤 지위와 자리에 올랐느냐?'를 중히 여기고 거기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큰 교회를 목회하고 높은 지위와 자리에 오르는 것으로 자신의 삶과 목회가 성공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스스로 속는 일입니다. 사탄에게 속는 것입니다.
큰 교회를 목회 할 수도 있고 훌륭하고 높은 지위와 자리에 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큰 교회를 목회 할 수도 있고 훌륭하고 높은 지위와 자리에 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공적인 삶과 목회를 하였다면 그것은 큰 교회를 목회하고 훌륭한 자리와 지위에 올랐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다 큰 교회를 목회하고 훌륭하고 높은 지위와 자리에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도 얼마든지 작은 교회를 목회 할 수 있고 낮은 지위와 자리에서 평생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대로 실패한 인생이 아닙니다. 그는 그 높지 않은 자리와 지위 그리고 크지 않은 교회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드릴 아름다운 열매들을 풍성히 맺어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절대로 실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의 성공은 작은 교회를 목회하고 낮은 지위와 자리를 지켰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큰 교회와 높고 훌륭한 지위와 자리가 성공의 척도가 될 수 없듯이 작은 교회와 낮은 지위와 자리 그 자체가 성공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뿐입니다.
저는 믿음에 인생과 목회의 승부를 걸겠습니다. 큰 교회를 목회하느냐 작은 교회를 목회하느냐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높고 훌륭한 자리에 오르느냐 오르지 못하느냐에 관심을 갖지 않겠습니다.
큰 교회와 높고 훌륭한 자리도 자랑하지 아니하고 작은 교회와 낮고 천한 자리도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저의 자랑은 오직 믿음 뿐 이었면 합니다. 한결같은 믿음으로 인생과 목회의 길을 걸어가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은혜와 복을 주셔서 성경에 약속하신 말씀들이 목회와 인생에 열매로 맺힐 것이라고 저는 믿어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는 더 잘 먹고 살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저는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저는 더 좋은 옷 입고 살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저는 더 큰 교회 목회하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저는 세상적으로 더 유명해 지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높아지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인생과 목회의 전반전을 끝내고 이제 막 후반전을 시작한 저의 관심은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아직도 부족한 믿음과 믿음의 생활을 연마하여 하나님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받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시설이 아닙니다. 건물과 시설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것들만으로는 교회가 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교인입니다. 교인들의 믿음입니다. 교인들의 좋고 큰 믿음이 훌륭하고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 갈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으로 주신 높은 뜻 숭의교회를 우리와 우리의 가족 그리고 후손 그리고 우리 한국교회와 나라를 축복하는 교회로 세워나가십니다. 우리의 남은 인생을 썩을 육신과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통하여 확장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십니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의 믿음이 진보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기도하십시다. 믿음 없는 반석으로 교회를 세우려고 했던 사람들의 전철을 밟지 아니하고 반석과 같은 믿음으로 아름다운 주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십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큰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일까요? 예수님의 백부장의 어떤 면을 보시고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백부장에게 예수님께서 하인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만한 믿음'은 될 수 있었을는지 몰라도 '이만한 믿음'은 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그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들이 최소한 '그만한 믿음'은 기본적으로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믿음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시시하게 믿거나 건방지게 믿으면 그런 기본적인 믿음도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만 한 믿음'은 '그만한 믿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건강을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사업을 위하여, 자녀를 위하여 늘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기도에 대하여 체험과 간증이 있는 교인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각해 보면 '그만한 믿음'도 가진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만한 믿음'이 '이만한 믿음'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백부장의 믿음은 '그만한 믿음'이 아니라 '이만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백부장의 무엇을 보시고 '이만한 믿음'이라고 하셨을까요?
저는 본문을 통하여 백부장의 믿음이 단순히 예수님의 능력과 기사를 믿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의 삶과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믿다보면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단계를 벗어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단계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부부가 사랑하여 함께 살면 생각도 닮고 외모도 닮는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닮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반드시 예수님을 닮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생각을 닮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과 삶을 닮아 사는 것이 저는 진정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믿음이 바로 '이만한 믿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본문의 백부장에게서 그와 같은 경지의 믿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백부장에게서 그 믿음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과 삶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이 가버나움에서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간구의 내용이 참으로 특이 하였습니다. 자기 하인이 중풍병에 걸려 몹시 괴로워하니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인과 종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기르는 가축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와 같은 일은 지금까지도 몇 나라에 남아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 우리 나라도 불과 몇 십 년 전 까지 있었던 전통이었습니다.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이 노예제도를 폐지한 것이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할 당시 로마 장교의 하인이었다면 전쟁 포로였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단순히 하인이 아닌 노예였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설령 그가 전쟁포로나 노예가 아니었다고 하여도 당시 하인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바와 같이 집에서 기르는 가축 이상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같은 하인이 중풍에 걸렸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주인들을 알지도 못했을 수 있고 안다고 하여도 그것이 주인의 관심사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쓸모 없는 존재로 여겨져 버림 받고 폐기 당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백부장은 그 가축 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하인이 중풍으로 고생하고 괴로워 하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친히 예수님께 나아가 그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구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예수님과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차원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믿는 단계를 벗어나 사랑하는 단계에 이른 사람이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마음과 가슴을 닮은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낮고 천한 자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백부장을 향하여 '이만한 믿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 백부장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 기도하면 중풍병도 나을 수 있다고 믿는 것도 귀한 믿음이지만 그와 같은 믿음만으로는 '이만한 믿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그만한 믿음'입니다. '이만한 믿음'은 '그만한 믿음'을 지나 단순히 예수님의 기사와 능력을 믿는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믿고 기도하는 차원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을 닮아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단계에 이른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그와 같은 믿음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교회에는 예수님의 기사와 능력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능력과 기사를 체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기적들을 체험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믿음이 끝이나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는 거리가 먼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의 단계를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만한 믿음'에서 졸업을 하고 백부장이 가졌던 '이만한 믿음'의 단계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믿음이 단순한 능력과 기사가 아니라 믿음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삶으로 나타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이 설교를 듣고 보시는 모든 분들에게 '이만한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단계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단계로 발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생각과 마음 그리고 그 행동과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며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어떻게 살 것인가(3)
마 8:5-13 / 김명혁 목사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오늘 아침 세 번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칭찬하며"입니다. 어떤 기관에서 남자들 수백 명에게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남자들이 살아가는 동안 살 맛나는 때가 언제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살아가는 동안 제일 신나고 제일 살 맛 나는 때는 아내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때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두 번째는 직장에서 일이 잘 되고 동료와 상사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는 때라고 대답했습니다. 칭찬은 사람들을 신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합니다.
1. 담임 목사는 신자들을 칭찬합니다.
저는 지난 주일 새가족 성경공부반에서 두 사람을 칭찬했습니다. 한 사람은 지난 1월에 등록한 새 신자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정말 새 신자입니다. 그런데 그 새 신자는 성경공부 예습을 어느 사람보다도 잘 해옵니다. 그래서 저는 대부분의 질문을 그 새 신자가 대답하게 했습니다. 대답을 너무 잘한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 새 신자는 또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누구보다도 많이 합니다. 얼마나 착하고 예쁜 사람인지 모릅니다. 여러분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예, 지난 1월부터 우리 교회에 새로 나오는 채연옥이란 사람입니다. 어디 계세요? 한번 박수로 칭찬과 격려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한 사람은 지난 주에 처음으로 우리 교회에 나왔고 새신자 성경공부반에 처음으로 들어온 부부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소개하는데 아주 솔직하게 자기를 소개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신앙생활을 해 오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신앙이 뒤로 쳐져 있는 형편이라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강변교회에 나오는 자기 친구 부부를 보면 그들이 자기들보다 훨씬 신앙이 앞서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솔직한 고백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자세라고 말하며 그들을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인상이 아주 순수하고 부드럽다고 그들 친구 부부에게 그들을 칭찬했습니다. 그들 부부는 지난 수요일 두 아이들을 데리고 등산까지 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네, 김 한씨와 정승연씨 부부입니다. 아이들은 아론이와 진수입니다. 어디 계십니까? 한번 박수로 칭찬과 격려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난 화요일 새벽기도회 시간에 두 사람을 칭찬했습니다. 지난 월요일 오후 9 가정을 잠간씩 심방했는데 심방을 하면서 두 분 구역장들의 구역 식구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고 뜨거운 것을 느꼈습니다. "한 집 더 할 수 없어요" 이렇게 조르는 오정석 집사님과 임춘여 권사님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얼마나 많은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두 분은 새벽기도회도 빠지지 않고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고 구역 식구들도 정성껏 돌아보는 너무나 귀한 분들입니다. 그래서 화요일 새벽 그 분들을 칭찬했습니다. 한번 박수로 칭찬과 격려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죄인들을 칭찬했습니다.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칭찬하신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마태복음 8장에 백부장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군인 백 명을 거느린 로마 사람 장교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를 점령하고 있던 로마 사람들을 멸시하고 미워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들어 오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아주 더러운 이방 사람들이라고 단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로마 사람 백부장을 인정하고 칭찬했습니다. 보통으로 인정하고 칭찬한 것이 아니고 최고로 인정하고 최고로 칭찬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물론 백부장에게 칭찬 받을 만한 착함과 믿음이 있기는 했습니다. 자기 하인이 병들었을 때 불쌍히 여기는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이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 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착한 마음과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축복을 선언했습니다.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예수님의 칭찬을 들은 백부장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칭찬은 한 사람의 삶을 변화 시킵니다.
마태복음 9장에 열 두 해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온 몸에서 피가 흐르는 수치스러운 병을 가진 불쌍한 여자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저주 받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가까이 하기를 싫어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자를 인정하고 칭찬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들은 그를 돌이켜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에게 관심을 두려고도 아니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던 발 걸음을 멈추시고 돌이켜 그 여자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물론 그 여자에게 칭찬 받을 만한 믿음이 있기는 했습니다.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그 여자를 가리켜 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를 인정한 것입니다. 그 여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의 칭찬을 듣고 고침을 받은 그 여자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칭찬은 한 사람의 삶을 변화 시킵니다.
누가복음 7장에 죄인인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던 부도덕한 여자였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그 여자를 아주 멸시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부도덕의 잘못을 범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정죄합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에 나오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자를 인정하고 칭찬했습니다. 물론 그 여자에게는 눈물의 회개가 있었고 사랑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눈물의 회개와 사랑의 헌신을 보시고 예수님은 이렇게 그 여자를 칭찬했습니다. "여자를 돌아 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예수님은 우선 그 여자를 돌아 보셨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보시면서 그 여자를 인정하신 것입니다.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게 부었느니라 이는 저의 사랑이 많음이라." 이렇게 길게 칭찬하신 다음 축복을 선언했습니다.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그 여자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칭찬은 한 사람의 삶을 변화 시킵니다.
요한복음 4장에 수가성에 살던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던 부도덕한 여자였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살던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불행한 여자를 찾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와 대화를 하면서 그 여자를 인정하고 칭찬했습니다. 굉장한 칭찬은 아니었지만 그 여자의 말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 여자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자기의 죄를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그 여자를 향해서 부도덕한 나쁜 여자라고 정죄하는 대신 그 여자의 말이 옳은 말이고 그 여자의 말이 참된 말이라고 칭찬했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 말이 참되도다." 사실 그 여자의 말이 그렇게 굉장하게 옳은 것도 아니었고 굉장하게 참된 것도 아니었지만 예수님은 그 여자를 격려하시기 위해서 그 여자를 밑 바닥에서 끌어 올리시기 위해서 그 여자가 한 말이 옳은 말이고 그 여자가 한 말이 참된 말이라고 말하면서 그 여자를 인정하고 칭찬했습니다. 그 한 마디 말에 그 여자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주여 라는 말을 처음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했고 조금 후에는 메시야로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은 그 여자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주님을 증거하는 사마리아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칭찬은 한 사람의 삶을 변화 시킵니다.
3. 칭찬 받고 칭찬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칭찬은 참 좋은 것입니다. 칭찬은 받아도 좋고 칭찬은 해도 좋습니다. 칭찬은 받아도 기분이 좋고 칭찬은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칭찬을 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도 칭찬을 받고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칭찬을 받으려면 칭찬을 받을 만한 무엇이 조금은 있어야 합니다. 고넬료는 하나님께도 칭찬을 받았고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았습니다. 기도와 구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10:1-4).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행10:22). 고넬료는 하나님께도 칭찬을 받았고 하인들에게도 칭찬을 받았고 유대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들도 칭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믿음과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믿음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행6:4). 디모데도 칭찬 받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과 친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행16:2). 다메섹에 있던 아나니아도 칭찬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행22:12,13). 여러분들 모두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기도하는 믿음과 남을 돕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잠언 31장 28절 이하에 남편과 하나님께 칭찬 받는 여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덕행과 믿음이 있는 여자가 칭찬 받는 여자라고 했습니다.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31:28-30). 하나님의 칭찬을 자꾸 받으면 우리는 그런 사람으로 되어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헵시바라 쁄라라고 칭찬하시면 우리는 기쁨의 사람이 되어가고 사랑의 사람이 되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충성된 종이라고 자꾸 칭찬하시면 우리는 점점 충성된 종이 되어갑니다. 칭찬은 사람을 만듭니다.
성경에는 칭찬을 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칭찬을 받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칭찬을 받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데마도 칭찬을 받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세상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모두 칭찬 받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 저와 여러분들이 칭찬을 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내는 남편을 칭찬하고 남편은 아내를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목회자들은 신자들을 칭찬하고 신자들은 목회자들을 칭찬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사는 믿지 않은 불신자들도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람을 칭찬해야 하는 이유 두 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사람은 누구나 자연적인 선함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데 우리가 그 자연적인 선함과 아름다움을 칭찬할 때 그 선함과 아름다움이 발전하고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람은 누구나 믿음을 가지기 시작할 때 영적인 선함과 아름다움이 피어나는데 우리가 그 영적인 선함과 아름다움을 칭찬할 때 그 영적인 선함과 아름다움이 더욱 더 발전하고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린 애기 이례를 예뻐하고 칭찬합니다. 이례는 자연적으로도 예쁘고 영적으로도 예쁘기 때문입니다. 이례는 자연적으로도 착할 뿐 아니라 주일 아침 저녁 예배는 물론 새벽 기도도 빠지지 않고 연합구역 예배도 빠지지 않는 모범적인 신자입니다. 그러니까 담임 목사가 이례를 예뻐합니다. 이례를 자꾸 예쁘다고 칭찬하면 이례가 자연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더욱 더 예뻐집니다. 선희도 예쁘고 재우도 예쁘고 민우도 예쁘고 박범순씨도 예쁘고 원춘미씨도 예쁘고 김정숙 김병원 정삼례 권사님들도 예쁩니다. 그래서 저는 강변의 성도들을 칭찬합니다. 여러분들 서로 서로 칭찬하십시다. 칭찬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못난 것들을 보시고 황송하게도 예쁘다고 사랑스럽다고 아름답다고 의롭다고 충성스럽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들을 칭찬합니다. 우리들도 서로 서로 칭찬하면서 사십시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큰 믿음의 사람
마 8:5-13 / 남 호 목사
유고슬라비아에 한 여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소녀시절에 성경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에 불타는 열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소녀는 선교사로 지원을 했고, 카톨릭 교인이었기에 수녀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수녀가 된 그녀는 인도 캘커타로 갔습니다. 그녀가 간지 얼마 안 되어서 그녀는 거리를 지나다가 우연히 병든 여인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병든 여인은 엎어져 있었는데 그런 자세로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 여인은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어 몸의 한쪽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길거리의 쥐들이 그 썩은 부위를 파먹고 있었습니다.
이런 참담한 모습을 바라보며 수녀는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녀는 그 순간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이 힘없는 연약한 여자를 한탄 아녀자인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이런 생각 끝에 그냥 지나가려다가 무엇인가 그녀의 마음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습니다.
“네가 도와주어야 한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못해요,,, ”“내가 도와도 못하겠느냐”“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가능합니다”
그녀는 그냥 지나가려던 발걸음을 돌이켜서 이 여인을 들쳐 업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그녀의 곁에는 불쌍한 사람이 한사람, 두 사람 계속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점점 늘어나자 이제 더는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 도시 행정 관리를 찾아갔습니다. 그녀의 숙소 옆에 비어있는 힌두교 성전을 빌려달라고 해서 그곳을 치료실로 만들었습니다. 수많은 가난하고 병든 자를 자기 몸같이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다가 간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삶의 감동을 남기고 떠나간 마더 테레사의 이야기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영국 BBC 뉴스의 기독교 언론인이었던 멀컴 머코리치라는 사람이 켈커타에 있는 테레사 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가만히 병원을 관찰해 보니까 사람들이 병원에서 봉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행복해 보였습니다.
멀컴 머코리치는 그런 모습을 보며 그때만 해도 거동이 가능하고 대화가 가능했던 테레사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힘들지 않으십니까?”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힘들지요. 힘들지요. 그러나 즐겁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무척 힘이 듭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졌다고 해도 힘든 것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과 우리가 다른 것은 인생이 즐겁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함께 계시다는 믿음을 가지고 산다면 엄청난 일이라도 해낼 수 있습니다.
본문은 로마 백부장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하인이 중풍 병에 걸려서 몹시 고생했습니다. 여러 의원에게 가보았지만 치료되지 못했고,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 나와서 하인의 중풍 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저의 집에 오심을 감당키 어려우니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낫겠습니다” 라는 신앙의 고백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도 이만한 믿음의 사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네 믿음대로 될지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백부장의 믿음을 살펴보며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Ⅰ.예수님을 문제 해결자로 믿었습니다.
하인의 중풍 병을 고칠 분이 예수님인 것을 믿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 앞에 와서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중풍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믿고 인정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해결 자가 누군지 잘 몰라서 당황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물질일까, 권력일까, 사람일까 우왕자왕할때가 있습니다. 2004년 한해도 여러 가지 문제를 만날 것인데 문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백부장은 하인의 중풍 병을 고쳐보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세상방법으로 안되니까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백부장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찾아왔으면 하인도 고생을 덜했을 테고, 시간도 그만큼 절약되었을 테고, 물질허비도 없었을 테고, 마음고생도 덜했을 것입니다. 삶의 문제 해결자가 예수님이신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믿고 산다면 더욱 빨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15:- 흉악히 귀신들린 딸을 가진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처음에는 듣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부탁해도 거절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 중 잃어버린 자를 위해 왔다고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부탁하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거절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은“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말하며 예수님께 사정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딸이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행12:1- 베드로가 감옥에 갇히게 되어 내일이면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초대 교인들은 마가의 집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천사가 베드로를 깨우고 쇠사슬을 손에서 풀고, 옷을 입고, 신을 신고, 천사를 따라갔더니 첫째문, 둘째문을 통과해서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구출할 자가 예수님이신 것을 확실히 믿었기에 초대 교인들은 전심으로 기도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의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정문제, 경제문제, 직장문제, 건강문제, 사업문제, 신앙문제... 이런 문제의 해결자가 예수님이란 것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다가 빚더미위에 올라앉게 되었습니다. 빚을 갚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는데 그래도 계속 망하기만 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 무엇이 잘못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자기가 하는 사업에 주인이 자기가 아닌 주님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모든 일의 계획부터 결재까지 모두다 주님께 의뢰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주님과 의논하고 사업을 주님께 맡기고 주인이 맡겨주신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다른 주위 사람들은 미친 사람이라고 비난하면서 사업에 전력을 다해도 될까 말까인데 모두 다 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업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시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시37: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밷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잠28:25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또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 피 흘려 대속을 이루어주신 분이시기에 그분이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백부장은 자기 하인의 질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라고 분명히 믿었습니다.
Ⅱ.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인간 예수로 보지 않고,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백부장은 로마군대 장교인 반면에 예수님은 로마의 지배 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장로들에게 무시 받고 천대 멸시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은 서민이었기에 백부장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사람인데도 백부장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권위와 권세를 가진 자로 믿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치료할 수 있는 권세자로 믿었던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 때문에 하인이 고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8:14-15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마8:1-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마12:9- 손 마른 사람도 고쳐주셨고, 막5:1- 귀신도 물리쳐 주셨고, 혈루병자, 앉은뱅이, 소경도 고쳐주셨습니다.
마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10:1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님은 치료의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분에게 여러분들의 질병을 부탁해 보십시오. 치료의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Ⅲ. 큰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의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창22:15 하나님께서 아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줄 알았다고 말씀하시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셨습니다.
마15:- 가나안 여인을 보고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백부장의 믿음의 형태
1. 말씀만 하옵소서.
백부장은 예수님을 절대자로, 전능자로 믿음과 동시에 그의 말씀 속에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2.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 초월성 앞에 죄로 인한 무가치한 자신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 앞에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겸손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설 수도, 만날 수도 없는 자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3. 나도 남의 수하에 있습니다.
남의 수하에 있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권세아래 있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로마군대는 황제에게 속해 있어서 백부장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황제의 명력을 거역하 는 것과 같았습니다. 로마의 군대와 그 예속된 사람들은 반드시 황제에게 복종해야 했습니다. 백부장은 내가 황제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듯이,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가 있기 때문 에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렇기 때문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세로 인정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하인의 질병이 치료될 수 있다는 믿음이 백부장의 믿음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질병 문제이든지, 경제적인 문제이든지, 직장, 사업, 가정, 가족, 자녀문제들이 쉴 새 없이 연속적으로 생길 때 문제의 해결 자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계시며, 치료의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주님께 의지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백부장과 믿음
마 8:5-13 / 이필재 목사(갈보리교회)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라고 하는 동네에 가셨을 때 로마의 군대 지휘관인 백부장이 나와서 자기의 소원 하나를 간구하고 예수님은 그 소원 하나를 들어주시는 과정의 기록을 오늘 읽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나라는 로마인의 정치 구속력 아래 있었으므로 성경에 로마 군인이 자주 등장합니다. 백부장이라고 하는 이름은 로마 군인 장교로서 당시에 대단히 세력이 있었던 직책이었습니다. 로마의 군대 조직은 6천명이 한 여단을 이루고 그것을 60으로 나누어서 100명 단위의 소부대를 편성하는 조직이었습니다. 아마 지금 우리나라 군대 조직의 중대 정도의 조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백부장들은 전쟁시 최일선에 있기 때문에 군대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고 이 로마의 정책은 군대 우선순위 정책이었습니다. 지금 북한이 선군 정치를 하는 것과 똑같이 전 세계를 정복해야 되니까 군인들의 대우를 파격적으로 잘했는데 그 중에서 백부장들에게 아주 잘했습니다. 백부장들이 가지고 있는 고난이 몇 개가 있는데 우선, 전투 부대의 규율과 전투 능력을 통솔할 수 있는 모든 정책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전쟁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언제 할 것인가?” 이런 모든 문제를 백부장들이 모여서 정합니다. 또, 군기를 훼손하는 자에 대한 처벌의 집결 심판 고난이 주어져서 백부장이 명령해서 죽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훈련과 병기 검열, 병창에 대한 모든 책임을 백부장들이 지고 있습니다. 전투시에 제일 위험부담이 많은 직책이기 때문에 대우도 고난도 많이 준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높은 직책을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백부장 출신이어야만 로마에서 출세가 되는 직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이 중요한 사건의 책임을 백부장들이 지고 있는 기록을 많이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27장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 현장 책임을 백부장이 지휘하고 있습니다. 또, 예루살렘 폭동 때 바울을 체포하는 책임을 역시 백부장이 명령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다른 죄수를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호송하는 책임도 백부장이 지고 갔던 것을 사도행전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이 자리는 뇌물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자리라서 백부장들은 아주 윤택한 생활을 했고, 20년 이상 근무할 수가 있고 군단의 지휘관이나 보병대의 대장이라든가 혹은 행정관이나 근위대 대장 같은 높은 직책은 백부장 출신이어야 가능한 정치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반 병사들이 제일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 직책 때문에 매우 교만하고 포악스러운 것이 특징이고 우직스러운 군인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위치에 있는 한 백부장과 예수님이 지금 가버나움이라고 하는 시골 길가에서 만난 것입니다. 이 만남의 결과는 예수님이 그 백부장에게 엄청난 선물을 주셨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많은 사람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 이 사람은 사실 로마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 아닌 외국 군대의 이스라엘 주둔군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백성,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는 이 국민들 가운데 이 로마 사람 백부장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면 무엇이 예수님의 마음을 그토록 감동시켰을까? 로마 군인의 신분을 가진 자가 예수님께 도저히 기대할 수 없을 만큼의 믿음의 발표를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깜짝 놀라신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백부장이 예수님한테 이렇게 길가에서 엎드려서 무엇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유대 민족보다 훨씬 겸손하고 좋은 신앙을 가진 자를 내가 만났다.” 이렇게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백부장 이 두 사람을 놓고 보면 두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각자의 신분 때문에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거리의 사람인 것을 우리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 두 사람은 민족적 원수 관계에 있는 적대감의 신분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일본에 살고 있는 많은 재일 교포들은 아직도 일본에 귀화하지 않고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심지어는 일본에서 태어났고 일본에서 교육을 받아서 평생 살면서, 그리고 한국말도 못하고 한국에 와보지도 않았으면서도 그냥 한국의 국적을 가지고 귀화하지 않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가 뭔가? 한때 원수 관계에 있었다는 역사의 아픔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제는 세계가 다 국제화 시대가 되어서 다인종 문화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재일교포들은 그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삼일절 설교 때 한번 예화 말씀 드린 적 있는데, LA에서 어느 청년이 화젯거리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 청년은 애국심이 아주 강한데 성격도 다혈질적이어서 아무나 보고 소리도 지르며 “한국인들의 역사를 잊었느냐?” 약간의 난동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집사님이나 장로님을 보고 1대 1로 맞서서 “장로님! 장로님은 교회 장로라는 평신도 지도자 자격이 없습니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 왜 이러는 거야?” 그러면 “왜 일제 차를 타시는 겁니까?” 투덜대는 것입니다. “우리 할머니들이 20대 시절에 위안부로 끌려가서 그렇게 무수하게 일본 군인들에게 성폭행당한 그 수난의 역사를 모르십니까? 나중에 우리 언어까지 다 빼앗기고 나라를 잃어버린 과거의 역사의 아픔을 잊으셨습니까? 왜 현대 차를 타고, 대우 차를 타야지, 일제 도요타를 타고 다니십니까? 그런 사람을 우리 한인 교회의 지도자라고 볼 수 있습니까?” 무섭기도 하고 그럴 듯하기도 하고…. 나중에도 쇠몽둥이를 들었습니다. “일제차를 내가 다 때려 부술 테니까 빨리 차를 바꾸든가 어떻게 하십시오.” 목사님께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일제 차를 타지 말라고 왜 설교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민족 공동체입니다.” 무섭게 말해서 ‘저 청년한테 잘못 걸렸다가는 큰일 나겠다.’ 이런 생각도 났는데 그 청년이 일본 아가씨와 연애를 하면서 괜찮아졌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친구들이 반대로 놀리는 것입니다. “일제 차를 타는 것과 일본 여자와 사는 것! 어느 것이 매국노냐?”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만남은 즐거움이 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피차 만나기 싫어합니다. 아주 분명한 일이 있습니다. 로마인들이 보는 유대인은 “너희들은 식민지야.” 유대인들이 보는 로마인은 “너희들은 이방인이야.” 이것은 정치적, 종교적 차별이 분명한 관계입니다. 사실 우리 여러 가지 모양의 차별이 있지만 정치적 차별이나 종교적 차별은 절대 화합이 될 수 없는 관계입니다. 무엇보다 큰 차이가 지금 두 사람 간에 나타나는데 한 사람은 정치적인 군대 장교와 종교적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극과 극의 이데올로기 차이가 두 사람에게 존재합니다. 군대 장교라면 우리가 다 알지 않습니까? 장교의 임무는 다른 사람의 목숨을 죽이는 일에 자기 목숨을 건 사람이 군인입니다. 가장 처참하게 사람을 많이 죽여 없애는 방법을 전공해서 그 분야에 인정을 받은 사람이 장교란 말입니다. “전쟁을 이렇게 해야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이 사람을 죽이면 살인범이 되지만 이 군인은 많이 죽일수록 빛이 나고 영웅이 되는 합법적인 세계 공인의 윤리적 권세를 부여받게 됩니다. 화려한 로마 장교의 뒤에는 세계를 제압하는 로마 제국이라고 하는 막강한 세력이 후원하고 있으니까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왜 시골구석 가버나움 길에 찾아와서 먼지 나는 길바닥에서 부하들의 시선도 의식하지 아니하고 로마제국의 위신도 떨어뜨리면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갈릴리 촌사람 31살의 청년 앞에 애원하고 있습니까?
신약 성경에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감동시킨 사건이 몇 군데 있는데 그때마다 보면 유대인이 아닙니다. 이방 사람들입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이 이방 사람이라고 무시하고 멸시하고 혹은 짐승 취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5장에 가나안 여인을 보십시오. 이 여자는 헬라 혈통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자라고 했습니다. 유대 민족이 개 같이 취급을 했기 때문에 개만도 못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예수님의 일행을 자꾸 따라오면서 귀찮게 한단 말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제자들은 속으로 ‘저런 여자가 왜 자꾸 창피하게 따라 다니는 거야?’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가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마음에 약간 짜증스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예수님! 우리 일행이 창피합니다. 저 수로보니게의 개만도 못한 여자가 저렇게 우리를 따라오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을 왜 보내지 않고 그냥 두시나이까? 저 여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꾸짖어 보내소서.” “그러니?” 그래서 제자들의 생각을 반영시켜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 그러면 개 취급을 받은 이 여자는 여자의 자존심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게 제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말하지 않습니까? “주여! 옳소이다. 그렇지만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사나이다. 본래 나는 수로보니게 여자로 유대인들에게 사람 취급을 받고 산 적이 없나이다. 지금도 새로워진 것은 아무것도 없나이다. 그럴지라도 나는 오늘 주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이렇게 대답했을 때 예수님은 “봐라. 자존심이 강하기로 소문난 아브라함의 후손들보다 낫지 아니하느냐?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 시로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런 일이 이방 여인에게 일어났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길바닥에 엎드린 백부장의 관심을 보십시오. 이 사람의 관심은 자기라든가 자기 아들이라든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하인이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이라고 했으니까 부하 병사 중에 한 사람입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100명 중에 한 사람 즉, 100분의 1에 해당하는 부하 병사의 괴로운 고난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이 장교는 이런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그 부하 병사는 이런 상관을 둔 것이 행복일 것입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 벨기에의 젊은 왕 알베르가 부대 지휘관 사무실에 들렀을 때 그 지휘관 책상 위에 “페르디난드”라는 평사의 이름이 적힌 편지 한 장을 보았습니다. 보니까 그의 아내에게서 온 편지였습니다. 이 왕이 즉석에서 생각하기를 ‘아! 지휘관들이 이런 소소한 편지를 사병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쓰레기통에 그냥 버릴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서 왕이 지휘관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편지에 적힌 페르디난드의 소제가 어디냐?” “지금 매우 위험한 장소에서 보초를 서고 있나이다.” “그러냐?” 그래서 왕이 그 편지를 챙기고 펜과 봉투를 준비하고 그 병사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그 병사를 만나서 “자, 병사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의 편지가 왔다. 혹시라도 지휘관들이 무시할까봐 걱정이 되어서 내가 가지고 왔으니 너는 막사로 돌아가서 읽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답장을 쓰고 이 자리로 돌아와라.” 그래서 이 병사는 왕의 명령이니까 시키는 대로 다 하고 그 자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 왕이 그 자리에서 그 병사의 총을 들고 보초를 대신 서주고 있었습니다. 일이 다 끝나고 총을 다시 들러주고 “지금 우리나라가 전쟁 중에 이만큼 평안하게 살 수 있는 이유는 네가 이 자리를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오늘 너를 심방을 왔다. 너 때문에 나도 편안한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격려를 해주고 갔습니다. 병사는 돌아와서 일기장을 썼습니다.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알베르 왕의 부하로 싸우다 죽는 것을 내 생애 가장 큰 영광으로 여기노라.” 이게 발표가 된 겁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는 그런 장교 하나가 나타난 겁니다. 100분의 1에 해당하는 병사 하나의 고난을 자존심을 다 무시하고 길바닥에 엎드려서 “예수님! 살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왜 감당하지 못하겠는가?” 장교의 집은 비교적 잘 삽니다. 보초들이 있고 모든 것이 잘 정리되어 있고 손님을 대접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준비가 모자라지 아니하게 잘되어 있는데 무엇이 우리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입니까? 바로 영적 분위기입니다. “우리는 아직 믿음이 없어서 메시야를 우리 집에 모실 만큼 준비가 전혀 안되었나이다. 주님이 우리 집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너무나 큰 실례를 범할 수가 있으니 이 자리에서 말씀만 해주셔도 되겠나이다.” 이런 겸손을 보였을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에게서 이만한 믿음 있는 자가 없다.” 우리가 잘 알기로 전 세계에서 아브라함의 혈통 후손이라는 유대인들이 자존심이 가장 강합니다. 사람이 다른 것은 몰라도 자존심을 건드리면 사람은 참지 못합니다. 마치 짐승이 자기가 먹는 먹이를 건드릴 때 생명을 건드리는 것과 똑같은 반응을 인간들이 보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자존심을 부렸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지금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내가 유대인에게서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 모습이 오늘 여기서 보았다.” 성 어거스틴은 예수를 믿고 변한 인간의 가장 훌륭한 모습이 뭐냐고 질문을 했을 때 하나도 둘째도 셋째도 모두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절대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 앞에 자존심을 부리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 친구 하나가 20년 이상 군목 생활을 했는데 이 군목들은 대장이 크리스찬일 경우 아주 좋고 그렇지 아니할 경우 고난스럽습니다. 우리가 군부대 얼마나 세례 많이 주러 갑니까? 다 똑같은 말을 합니다. “목사님! 이번에 대장이 크리스찬인 집사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는 신학교 졸업하고 바로 군목으로 나가서 군목생활 20년을 했는데 대장과 자꾸 마찰이 생깁니다. 대장이 자꾸 젊은 군목에게 비아냥거리면서 “야, 군목! 이리 와봐! 오늘 우리 작전 나가니까 너는 비 오지 말라고 기도해, 알았지? 이건 명령이야! 만약 비 오면 너 가짜 군목이야! 네가 믿는 하나님은 틀린 거야!” 이렇게 비아냥거리는 겁니다. 어떤 때는 “군목 이리 와봐! 우리 부대가 대통령 표창 받도록 빨리 기도해!” 이런 것을 얘기하니까 화가 났습니다. 잘못하면 군목 이미지를 대장의 명령에 쩔쩔 매는 군목으로 사병에게 알려질게 걱정되어서 마음을 단단히 먹었습니다. 여러분! 이 군목은 사병들 상담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군대 생활의 어려운 점이 뭐냐?” 대장들의 비리 같은 것도 사병들의 의견도 다 들을 수 있는 권한을 군목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병들이 아버지, 어머니도 안 계시니 화나면 군목에게 와서 막 이야기할 거 아닙니까? 그러면 그것을 다 기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보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대장이니까 그 부대에서 사병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군목 일기장에 다 나와 있단 말입니다. “군목! 그것을 다 가지고 와! 어떻게 된 거야? 사병들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한 거 있어? 군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이리 가져와 봐! 내가 좀 읽어볼게.” 그래서 “못합니다.” “뭐라고? 아니, 대장이 가져오라는데!” 대장은 별이 2개입니다. 그리고 군목은 중위입니다. “너 군대의 명령이다. 가져와!” “이것은 제네바 협정입니다. 상담 기록은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게 제네바 협정입니다.” ‘어? 이게 뭘 좀 알고 있네?’ “앞으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비아냥되는 거 하지 마십시오. 내가 다 기록하겠습니다.” 대장이 ‘이 놈이 제법인데?’ 그리고 약간 경계하는 경각심을 가질 때 이 친구 목사가 말했습니다. “대장도 빨리 세례 공부하고 세례 받으십시오. 사병들에게는 하라고 하시고는 대장이 안하면 군기가 서겠습니까? 대장이 먼저 솔선수범해야지 그러면 이 군대에서 왜 군목제도를 선택하고 왜 나를 군목생활을 하라고 명령하셨습니까? 세례 받으십시오.” “그게 어떻게 하는 거야?” 책을 주면서 “이게 세례 공부입니다. 이것을 다 외우십시오.” 그랬더니 “내가 세례 받겠다.” 그래서 그 대장이 세례 받을 때 보통 손을 물에 담가 머리에 얹어 세례를 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얼음을 넣어가지고 와!” 아주 넓은 양푼에 물을 잔뜩 잠아서 군복 다 버리게 물을 흠뻑 들어부어서 머리를 힘껏 눌러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대장이 세례 받은 다음에 묻더랍니다. “군목! 왜 사병들은 간단히 주고 나는 그렇게 세게 주느냐?” “네! 대장과 사병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별4개 되었습니다. 내가 이름 대면 아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제대하고 나서도 항상 간증하는 말이 “내가 세례 하나 만은 아주 화끈하게 받은 사람이다.” 이 군인 사회는 여러분이 다 경험이 있으니까 아시지 않습니까? 백부장은 지금 아주 좋은 위치에 로마 정부라고 하는 세계적인 힘이 자기를 밀어주는 위치인데 빌라도가 지금 총독으로 와 있지 않습니까? 총독의 말을 거역했다가는 하루아침에 직결 심판의 결재권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 놈 죽어라!” 하면 죽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백부장이 못 박으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감동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권위란 크게 믿으면 크게 이루어지고 작게 믿으면 작게 이루어지고 안 믿으면 안 이루어지는 겁니다. 우리 사람들은 저마다 높은 대우, 자존심, 그리고 성공하고 잘 살고 이 세상에서 성취한 거기에만 우리가 마음을 쓰고 있지 정말 주님 앞에 이 백부장과 같은 태도를 취하기에는 너무나도 힘듭니다. 만약 “내가 갈보리교회에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본 일이 없노라.” 주님이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내가 대한민국에서 갈보리 교회 같은 이런 교회를 본 일이 없노라.” 그러시면 우리가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이 세계에서 이런 국민들은 처음 봤다.” 백부장은 그 칭찬을 받아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의 믿음과 예수님을 우리가 비교해야 합니다. 여기 수로보니게 여인이나 백부장의 믿음에서 확실하게 나타난 것은 그들이 그렇게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님 앞에 간구했던 그들의 소원은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나 백부장의 하인은 다 회복되었습니다. 만약 그들의 소원이 회복되지 아니하고 죽었다면 그들의 신앙 반응은 어떻게 나타났겠습니까? 그게 백부장과 예수님의 믿음의 차이입니다. 만약 여기에서 요청을 했을 때 예수님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정하신 생명의 기한이 다 된 것이라서 죽는 것이다. 죽는 사람을 죽게 하라. 가라!” 그러면 백부장이 어떤 믿음의 고백을 했겠습니까? 수로보니게 여인더러 “어린 시절에 죽는 사람도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무슨 그런 문제를 가지고 나한테 이렇게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느냐? 죽는 사람은 죽게 하라. 네 딸이라고 했는데 나가라!” 그랬을 때 어떤 고백을 했겠습니까? 바로 거기에 우리들의 신앙의 갈등과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자존심을 상해가면서 밤새도록 기도하고 일 년을 두고 기도하고 “하나님 아버지! 이 문제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내가 필요로 합니다. 나를 굽어 살펴주셔서 이 문제의 해결을 하나님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토록 기도를 했는데도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아니하고 다 죽거나 실패를 했을 때 내 신앙 고백은 무엇인가? 기도를 하면 기도대로 이 사람들처럼 다 이루어진다면 길바닥 아니라 진흙 속에라도 들어갈 수가 있지만 안 이루어졌을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여기에 예수님을 보십시오. 성경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목에 피를 토할 정도의 간절한 기도를 드렸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여! 내가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어야 되겠습니까? 그냥 지나갈 수만 있다면 그냥 지나가게 하옵소서.” 밤새껏 그렇게 간절한 기도를 드렸는데도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어떻게 들으셨는지 아무소리도 안하시고 그를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백부장은 그의 소원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기도한 보람과 기쁨이 충만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나님! 내가 그렇게 처절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렸는데 어찌하여 이런 결과를 나에게 주시나이까?”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미국에 갔다가 어제 왔는데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 기도를 열심히 드려야 되겠다.’ 타자마자 몸을 뒤를 젖히고 기도를 하면 거만하지 않습니까? 몸을 구부리고 앉아서 엎드려서 “하나님 아버지! 지금 나는 목사의 신앙으로서도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두 가지 문제를 미국에 와서 보고 갑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성경 해석을 하고 아무리 기도를 하고 아무리 마음을 넓혀 봐도 이 문제의 결과의 방향은 지금 얻어진 결과와 제 마음은 정 반대입니다. 이런 때는 목사인 내가 어떤 문제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이 비행기가 인천에 도착하는 12시간 중에서 이 문제가 내 마음에 해결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랬더니 내가 구부리고 있으니까 스튜어디스가 아픈 줄 알고 “목사님! 아프세요?” 내가 목사인 것을 스튜어디스는 금방 압니다. 왜냐하면 내가 비행기를 많이 타고 다녀서 그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다 아는 것입니다. “목사님! 아프세요?” 그러니까 기도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더 구부렸습니다. 그랬더니 와서 나를 잡았습니다. “목사님! 약 드릴까요? 여기 구급약 있습니다.” “기도한다, 기도해! 이 비행기 인천까지 무사히 가라고 기도하는 거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내 뜻대로 안되었을 때 “하나님! 왜 내 아들을 그렇게 데려가셨나이까? 내 딸이 왜 흉하게 귀신 들리게 하셨나이까? 고쳐주소서.” “그 시로 나으니라.” 그러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런데 낫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는 십자가에서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즉,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결론의 기도 속에서 ‘아! 내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하는 이 과정도 하나님의 섭리다. 어떠한 형편과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는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믿음을 가질 수 있을 때 그 사람을 성령이 충만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잘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집안이 모든지 성공하고 부자 되고 아들딸 다 잘되고 거기에만 우리의 목표를 둔다면 날마다 실망합니다. “내 인생의 눈물 나고 피나는 가시밭길 속에도 하나님의 뜻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며 처참한 야유와 조소를 다 받으시면서 운명하시는 바로 그 현장에 인간 구원의 완성의 마침표가 이루어진 것을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거 아닙니까? 백부장의 믿음은 아주 좋았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자존심이 강한 유대인들에게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모습을 이방인 로마 장교에게서 내가 봤다.” 그런데 백부장의 믿음도 예수님에 비교하면 아주 어린이입니다. 그의 소원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안 이루어지는 부분에 대한 신앙 고백이 무엇인가? 그래서 히브리서 12장에 뭐라고 했습니까?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 히브리서 11장, 12장을 “믿음장”이라고 하는데 “믿음의 주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 믿음을 바라보자. 십자가 위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말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 예수의 믿음을 바라보자.” 이렇게 한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순종할 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백부장을 넘어설 수 있는 믿음의 결과가 여러분에게 주어지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자존심이 강한 유대인들에게서 아무에게서 찾아보지 못한 겸손한 믿음을 로마 사람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렇게 칭찬을 받은 백부장의 믿음조차도 그의 소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신앙고백을 그렇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돌아가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바라보면서 우리 삶의 모든 고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주어지게 해주시옵소서. 이 한 주간을 그렇게 우리가 살 수 있게 해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주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을 사모하라!
마 8:5-13 / 전순기 목사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어떤 할머니 한 분이 버스를 타셨는데 짐을 올려놓고 지갑을 뒤지니 돈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버스기사에게 “기사양반 미안한데 돈이 없구려...”라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할머니는 계속 미안하다고 하시는데도, 버스 기사는 차도 출발시키지 않고서, 화를 내면서 “돈도 없는데 왜 타요! 내리세요.” 무뚝뚝하게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무안해서 계속 “미안하다!”고만 하고 있었고, 마침 출근길인지라 손님들도 많았는데, 손님들 중에는 화를 내며 그냥 출발하라는 사람도 있었고, 할머니더러 내리라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사가 계속 뭐라고 하니까, 한 고등학생이 만원을 꺼내 요금함에 넣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이걸로 할머니 차비 하시고, 또 이렇게 돈 없는 분 타시면 아까처럼 화내지 말고 남은 돈으로 그분들 차비 해 주세요.” 순간 버스 안은 조용해지고 기사는 말없이 차를 출발시켰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슴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학생의 미담은 우리의 가슴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한 저널리스트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가르쳐 3무의 시대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무관심의 시대, 둘째는 무책임의 시대, 셋째는 무감동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자기 일 빼놓고는 관심가질 일도 없고, 책임질 일도 없고, 감동 받을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는 극도의 이기주의, 물질주의가 판을 치는 지극히 냉소적인 시대입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예전과 비교하면 물질적으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함을 누리고 문명의 편리함을 누리고 살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기에 행복하지 못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감동을 받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예전에는 비록 오늘날과 같은 물질문명의 혜택은 받지 못했지만 훈훈한 삶의 감동은 있었습니다.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들이 어떤 나라들입니까? 네팔이나 부탄과 같은 가난한 나라들이 서구 유럽의 나라들이나 대한민국 국민들보다 행복지수가 더 높습니다. 행복 지수가 높은 나라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저것 없는 가운데서도 서로 훈훈한 감동을 주고받는 일은 많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감동을 주고받는 일이 없다면, 도대체 그 인생은 무슨 맛으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인생의 행복이 무엇이며,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크고 작은 감동을 주고받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동안 그 누군가를 감동시키거나 감동을 받은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상이 삭막하다는 것은 감동케 하는 사람이 적다는 뜻이요.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은 감동케 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요즘 대심방을 하면서 저는 참 많은 성도들에게 감동을 받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정말로 어려운 삶의 형편 가운데서도 굳건한 믿음으로 이겨내며,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가슴에 진한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다보면 가슴이 먹먹해지며 저절로 눈물이 납니다.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시대는 점점 감동은 없어지고 강렬한 자극만 난무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대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가슴을 훈훈하게 하는 감동을 주고받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저는 우리 안양 교회 모든 성도들의 자주 감동받고 또 감동을 주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을 사모하라”는 제목으로 주님께서 감동 받으신 백부장의 믿음을 주목해 보면서 우리도 감동을 받고, 백부장과 같은 믿음을 갖게 되기를 사모하는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감동적인 인생을 살아간 백부장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감동적인 인물을 한 사람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로 예수님의 전도 활동의 주 무대였던 가버나움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대의 한 백부장입니다.
본문에 보니까, 그가 예수님 앞에 나아와서 “주님, 제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라고 고하며, 고쳐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백부장이 대답하기를 “주님, 저의 집은 너무 누추해서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습니다. 어찌 수고스럽게 저의 집까지 오시겠습니까? 그냥 말씀 한 마디만 해 주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저도 군인이기 때문에 제 윗사람이 저더라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섭니다. 그리고 제 부하들도 제 명령에 살고 죽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될 줄로 저는 믿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의 말을 들으신 주님은 “기이하게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깜짝 놀랐다는 말이요. 신기해 하셨다는 말이요. 감동하셨다.”는 말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이런 믿음의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고, 이런 놀라운 감동을 맛본 적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백부장의 믿음이 주님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백부장의 믿음은 관념적인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한 것처럼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었고(갈5:6), 또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믿음이었습니다(갈5:13).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갈5:14). 또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이 최고의 법이며, 사랑 없이 하는 모든 행위들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이 바울이 한 말씀들을 알았을 리가 없으나, 백부장이 하는 행동을 보면, 이런 말씀들을 그대로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식민지 백성인 유대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7장 본문에 보면, 유대인 장로들이 함께 예수님께 나와서 백부장을 위해서 대신 간구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정복자들인 로마인들을 증오했습니다. 열심당원이라고 불리는 유대의 독립투사들은 기회만 있으면 로마 군인들을 살해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의 지도자들인 장로들이 백부장을 위해서 발 벗고 나서서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백부장이 먼저 유대인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장로들의 하는 말을 들어보면, 백부장이 유대인들을 위해서 회당을 지어주었다고 했습니다. 회당이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이 모여서 율법의 말씀을 배우기도 하고, 기도도 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게 회당입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회당에서 각종 회의도 하고, 결혼식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로 말하자면 마을 회관 또는 교회당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회당은 역사적으로 볼 때에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또 지켜나가는 일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집회소입니다. 식민 통치를 하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식민지 백성을 위해서 회당을 지어준다는 것은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건 마치 일제시대에 일본군 헌병 대장이 민족혼을 지키고, 독립의지를 고취시키는 일을 하는 학교나 교회당을 지어주었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정말로 백부장이 유대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회당을 지어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백부장 자신에게 엄청난 손해를 가져올 수 있는 일입니다. “로마 당국이 이 사실을 안다면, 과연 잘 했다고 할까요?” 문책이나 당하지 않았으면 다행일 것입니다. 또 회당을 지어 주려면 상당히 많은 물질이 들어가야 했을 겁니다. 백부장은 자기 이익을 챙기는 본능을 초월해서 식민지 백성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런 백부장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유대인들을 감동시켰습니다.
또한 백부장은 하인을 감동시켰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인이 누굽니까? 노예입니다. 당시에 노예는 사람은 사람인데, 짐승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백부장의 집에 하인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하나쯤 없어져도 아무 지장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비록 하인이지만, 그를 존엄성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대했습니다. 그는 약한 자를 향한 연민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인의 고통을 해결해 주려고 예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고침 받은 하인이 얼마나 감동을 받았을 것인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 하인은 진심으로 주인을 사랑하고 존경했을 것입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그의 섬김을 받는 자를 감동시킵니다. 그리고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자들도 감동시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자기 자신의 삶에 감동을 불러오고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말씀하실 때에 백부장의 하인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충분히 보상을 받았습니다. 백부장의 소원은 성취되었습니다. 그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예화)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순회할 때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한 여인이 자기는 온갖 상담을 다 받았지만 도움이 안 되었고 “이제는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고 테레사 수녀에게 말했습니다. 테레사는 그녀에게 제안하기를 “기왕에 죽을 결심을 하셨다면 자살을 연기하고 내가 일하는 인도에 와서 나를 한 달만 도와주고 그 다음에 죽으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녀가 그대로 했답니다. 한 달 후에 테레사가 이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환히 빛나고 있었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웃으며 묻습니다. “언제 돌아가시겠느냐?”고. 그랬더니 그녀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압니까? “죽다니요?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는데요. 전에 나만을 생각하던 시절 나는 나를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웃을 돌아보면서 내가 살아났습니다.”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됩니다. 사는 것처럼 살고 싶으시면 나보다 더 고통 받고 나 보다 더 외로워하는 이웃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조그만 일이라도 행동으로 실천해 보십시오. 당신이 더 많이 행복해질 것입니다. 참 인생의 행복과 보람은 자신을 초월하여 고통 받는 이웃들을 돌아보고 섬길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의 마음이 백부장의 마음 같아지고, 백부장처럼 자신을 초월하여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주님께서 상한 마음과 몸을 만져주셔서 온전케 해 주셔야 할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며 주님께 나와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태신자 초청 주일에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말씀만으로 족한 줄 아는 믿음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집에 가서 하인을 고쳐주겠다고 하자, 백부장이 보인 반응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백부장의 말에서 우리는 참으로 좋은 믿음! 최고로 성숙한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항상 기적을 경험하는 믿음이 좋은 믿음인 줄로 압니다. 뭔가 남이 보지 못하는 신비한 것을 보고 듣고 경험했다면, 그것을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믿음을 가진 증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복음서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주님께서 기적을 구하는 자들을 칭찬하신 적이 한 번도 없고, 오히려 기적을 구하는 자들을 책망하시는 말씀만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는 오직 말씀만으로 족하게 여기는 믿음을 기뻐하시고 칭찬하신 사실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최고로 영화롭게 해 드리는 믿음은 다른 아무 증거도 요구하지 않고, 주님이 하신 말씀을 백 퍼센트 신뢰하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백부장은 이렇게 말씀만으로 만족하는 신앙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본문을 잘 보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하자면, 백부장의 믿음은 생각하고 추론할 줄 아는 데서 온 것입니다.
산상보훈 말씀에서 주님은 항상 근심과 걱정에 매여 있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시며, 들에 피는 백합화를 생각해 보고, 공중에 나는 새를 생각하여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깨달아지지 않느냐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먹이고 입히지 않느냐? 그렇다면 들꽃도 입히고, 공중의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자녀들을 먹이지 않겠느냐? 틀림없이 먹이고 입혀주실 게 아니냐?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적은 것이고, 생각하면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커지니까 생각을 하며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백부장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군대의 장교로서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추론을 해 냈습니다. 권세라는 게 무엇입니까? 교통경찰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가 자신의 육체적인 힘이나 지혜로 차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통경찰에게는 도로와 차량을 통제할 수 있는 권세가 국가로부터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손짓 하나, 호루라기 한 번에 수많은 차량들이 움직입니다.
백부장은 자신이 로마 군대의 장교로서, 가이사 황제가 부여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권세가 어떻게 역사하는 지를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가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역사하는 지를 추론해 내었습니다. 자신은 백부장으로서 백 명의 부하들에게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말 한 마디에 부하들이 움직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윗사람의 권세에 의하여 움직입니다. 이런 추론에 의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의 권세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어떤 권세입니까? 마태복음 28장 18절에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부터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 망라해서 모든 것 위에 권세를 가지고 있는 분”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만물이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이십니다.
백부장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권세를 깨달았고, 권세는 말로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권세 있는 사람은 직접 움직이지 않습니다. 명령합니다. 그러면 그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이 그 명령대로 움직여서 일을 이루어 냅니다. 그게 권세입니다. 백부장은 그것을 몸으로 경험하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백부장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그 분이 명령하시면 그대로 되는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권세가 모든 질병을 향해서 명령하면 질병이 떠나가고, 귀신을 명하면 귀신이 떠나가고, 죽은 자를 향하여 명하면 죽음이 물러가는 것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바다와 바람도 주님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백부장은 가버나움에 살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수많은 이적 기사에 대해서 보고 들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만 하시면 자기 하인의 병이 나을 줄로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백부장처럼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권세에 대해서 절대적인 복종의 자세를 취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의 권세가 역사해서 우리에게 구원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백부장과 같은 칭찬 받는 큰 믿음을 가지고 싶다면, 우리도 백부장처럼 생각할 줄 알고 추론할 줄 알도록, 연습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말씀을 근거로 생각하는 훈련을 부지런히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 묵상 훈련이 되는 만큼 믿음은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추론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을 알아가는 참된 지식이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믿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344장). 하나님은 성경 66권 말씀 안에 당신께서 우리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을 다 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가기만 하면,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필요한 모든 가르침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가르침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주님은 말씀에 기록된 대로 어김없이 우리에게 영육 간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감동 받으라!
주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먼저 주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부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사랑으로 감동을 받아 불이 붙어야 비로소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보일러가 가동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훈훈해집니다.
사도 바울 만큼 감동적인 삶을 산 사람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의 감동적인 삶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는 말씀에 그 비결이 나타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온 몸에 진물이 줄줄 흐르는 흉측한 나병환자를 손을 내밀어 만져주시는 자비로운 주님의 손길을 묵상하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정말로 우리들의 상한 마음과 몸을 만져서 깨끗케 해 주시는 은혜를 경험했다면, 우리는 이미 그 사랑에 감동을 받아 가슴이 뜨거워져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시키는 대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아감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자신의 삶을 점검해 보십시오. 삶에 감동이 있습니까? 마음에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있습니까? 가슴 뭉클한 감사가 있습니까? 온갖 세상 풍파속에서 상처받고 고통하며 신음하는 이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까? 그래서 무슨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고,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사는 게 재미가 없고, 신앙생활도 재미가 없고, 예배를 드려도, 찬송을 해도 감동이 없어졌다면,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에 상한 마음을 치료하시는 주님께로 나아가서 고침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오늘 이 시간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시 한 번 우리의 마음에 부어주시기를! 구원의 감격과 감사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구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현대인들은 감동을 잃어버린 삭막한 세상을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안타깝게 여기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감동시키시는 분입니다. 또한 우리에게서 감동 받고 싶어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서로를 감동시킬 때에 행복할 수 있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감동시키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또 주님을 감동시켜 보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백부장처럼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먼저 감동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사랑에 강권함을 받으시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과 말씀만으로 만족할 줄 아는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심으로 이웃을 감동시키고, 주님을 감동시키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칭찬한 사람
마 8:5-13 / 김영준 목사
예수님의 사상이 진보적이냐 보수적이냐 하는 토론은 이보다도 불필요한 토론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처럼 우리 사회가 분열돼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이 진보적이냐 보수적이냐 하는 것은 편 가르기 용으로 쓰일 것이 뻔합니다. ‘거 봐라 .예수님도 우리처럼 생각하시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이용하라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쪽 편도 아니고 저쪽 편도 아니고 예수님은 당신 편이고 하나님 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편을 드는 법을 배워야지 예수님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처럼 모자라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공부한다면 다음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사상에는 매우 급진적인 생각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도 급진적이어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용도를 찾지 못합니다. 대충 급진적이라면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올 법도 한데 하도 급진적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건 우리의 생각과 같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너희 오른손이 너희를 범죄케 하면 찍어 내어버리라’는 말씀. 이것은 죄와 유혹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 사상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건 굉장히 급진적인 말씀이지만 이건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고 어느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 예수님만의 사상입니다. 자본주의 국가든 사회주의 국가든 만일 이 말씀대로 실천한다면 잘라버려야 할 것이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썩은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에요. 만일 이 말씀대로, 문자 그대로 실천한다면 우리 가운데에서 손도 없고 눈도 없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누가 네 오른뺨을 때리면 왼 뺨을 돌려대라’ 잘 아는 말씀이지요. 이보다도 급진적인 말씀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충격 그 자체입니다. 이건 어느 누구도 끌어다가 자기의 용도대로 인용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이대로 실천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이것을 요구할 때가 많이 있어요.
그리고 또 있습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그리고 너는 나를 좇으라’ 이 말씀을 들은 부자 청년이 근심하면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소유가 많았기 때문에. 그런데 그걸 보고 제자들이 ‘역시 부자는 천국에 못가.’ 이렇게 말한 게 아니고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이것이 부자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어려운 말씀이라고 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만 말씀하신 게 아니고 그리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어요. 인간의 수많은 자선활동이 예수님을 좇는 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선한 일도 해야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야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참고로 예수님이 네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현금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시장을 전제한 것입니다. 시장이 있어야 소유를 팔고 살 수 있을 게 아닙니까.
그뿐만이 아니에요. 이보다 더 급진적인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는 자가 있다’ 이 말씀은 주일 설교 본문으로 자주 인용되지 않는 성경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받아들일 수 있는 자는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성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건 강요하신 것이 아닙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자는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인데 어느 누구도 이 말씀에 즉시 할렐루야로 화답하지 않습니다. 즉각 지지의 입장을 표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 내에서도 저마다 짝을 찾지 못해 야단이고 저마다 결혼이 최고의 행복이요 최고의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독신으로 사는 것과 스스로 고자가 되는 것을 생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급진적인 생각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진보로 분류할 수도 없고 보수로 분류할 수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는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추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예수님의 말씀이에요.
반대로 예수님의 사상에는 보수적인 생각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히 하려 함이로다’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전통이요 과거요 유산입니다. 개혁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과거와의 단절을 외치고 전통과의 단절을 외치고 과거는 나쁘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자 이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신앙적인 전통과 율법과 선지자를 부인하지 않았어요. ‘내가 그것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율법과 선지자 중에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거나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 개인의 운명의 궁극적인 책임이 개인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이건 남을 탓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를 탓할 수 없고 부모를 탓할 수 없고 하나님을 탓할 수 없고 운명이나 팔자나 운을 탓할 수 없습니다. 사람 하기 나름이에요. 며칠 전에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어느 고등학교에 가서 이와 비슷한 연설을 했는데 오바마가 믿음의 관점에서 말한 것은 아니지요. 그런데 예수님 말씀 중에 개인의 역할과 책임을 제일 강조한 말씀이 뭐냐면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는 말씀입니다. 위대한 말씀이에요.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네 능력대로 될지어다’도 아니고 ‘네 팔자대로 될지어다’가 아니에요. ‘네 운대로 될지어다’도 아니에요.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위대한 말씀이에요. 인간의 운명이든 팔자든 가난이든 질병이든 과거든 실수든 그의 타고난 얼굴색이든 인종이든 이것이 믿음의 위력을 막지 못한다는 사실이에요. 심지어 하나님도 사람의 믿음을 막지는 못합니다. 어패가 있는 말처럼 들리지만 하나님도 인간의 진지한 믿음은 존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오직 나의 의는 믿음으로 살리라 ’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날 우리가 바로 이해하고 적용하고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지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입장을 가지고 자기의 관점대로 예수님을 해석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서 자기의 의견을 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범하는 가장 큰 실수입니다. 그래서 미국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미국적인 가치를 전하고 또 해방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인용하면서 해방신학이라는 엉뚱한 것을 전하고 또 기복신앙을 가르치는 사람도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서 사람의 욕심에 어필하는 그런 가르침을 전합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경험과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의견을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서 전하는데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놓아드려야 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것을 우리가 이용하려고 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이해할 때 그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되는 것이지 예수님이 세상 나라를 이루려 오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지 이 세상의 영광이나 이 세상의 인간적인 개혁을 가르치신 것은 아니에요. 하도 세상을 탓하고 남을 탓하고 미국을 탓하고 부자를 탓하고 이런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민들과 같이 사셨고 예수님 자신이 서민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가난한 자를 위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 자신이 가난하셨어요.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사회의 가장 힘없고 돈 없고 건강이 없고 심지어 의가 없는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천국을 말씀하시고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자였어요.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울분을 자극한다든가 그들의 상처를 자극한다든가 심리적으로 그들을 움직여서 인기를 얻으려고 한다든가 사회 개혁을 이루고자 한다든가 계급투쟁을 하려고 한다든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파퓰러즘을 가르치지 않으셨고 미움을 가르치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위하셨지만 가난이라는 문제를 극복하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예수님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세상을 좀 더 잘 살게 만드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어떻게 하면 좀 더 세상을 공평하고 더 민주적인 사회를 만드느냐에 예수님의 관심사가 있지 않았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된다고 말씀하셨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말씀하시고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지 이 세상을 좀 더 잘 살게 하고 바르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예수님의 관심사였다면 삼년 반은 너무 짧은 것입니다. 삼십 오년을 해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삼년 반 공생애를 사시고 십자가를 지셨어요. 여기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이루고자 오셨느냐를 발견해야지 그러지 않고 예수님을 인용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은 그건 모든 사람이 범하는 실수이고 예수님을 동네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사람들이 멸시하지는 않지만 이용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이용당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하시고 당신의 일을 하시고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하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중에, 예수님의 정신 중에 우리가 본받아야 되는 것 중의 하나는 절대평등주의입니다.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어요. 부자든 가난한자든, 죄인이든 의인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믿음이었어요.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 믿음입니다. 절대적인 평등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믿음이 있을 때 예수님은 칭찬하시고 유대인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셨어요. 유대인이라고 해서 팔이 안으로 굽은 것이 아니고 이방인이라고 해서 예수님이 차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기이히 여기셨다는 말씀이 나와요. he marvelled-놀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다 파악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아십니다. 우리가 가진 어떤 것도 하나님을 놀래시게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서 하나님이 누구 보고 어쩜 이렇게 잘생겼냐, 이렇게 놀라신 구절이 없고 어떻게 너는 그렇게 머리가 좋으냐, 이런 성경 구절도 없고 어떻게 이렇게 음악을 잘하니, 이렇게 칭찬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칭찬에 인색하십니다. 세상에는 칭찬에 인색한 사람들이 많지요. 저도 그 중에 하나인데 그게 그거죠.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예의상으로 칭찬하지요. 결혼식에 가서 신부가 예뻐요, 예쁘다고 해야죠. 그 자리에서 신부화장이 왜 저래요, 그랬다가는 얻어맞습니다. 연주회에 가서는 정말로 잘했어요, 이래야지 더 잘한 것도 내가 들었거든, 그러면 얻어맞습니다. 집에서 식사한 후에 정말 맛있어. 정말 당신처럼 잘하는 사람이 없어 그래야 앞으로도 얻어먹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웬만한 것은 보고 놀라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누구네 집에 심방 가셔서 집이 왜 이렇게 좋아요 이런 말씀 하신 적 없습니다. 이런 것이 예수님을 놀라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단 하나 예수님이 믿음을 보고 놀라셨어요. 그래서 이 백부장의 한 말을 듣고 ‘예수님이 기이히 여기시며 내가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 백부장이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없는 사람들의 위선과 이중성과 그들의 나약함과 게으름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이방인이 믿음을 가지니까 순전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음을 키우겠다고 교회를 찾아가고 믿는 사람들을 만나서 믿는 사람들과 대화하다가 내가 가진 믿음조차도 까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문화에 익숙해지는 과정에서 우리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열심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왜냐하면 교회생활을 어느 정도 하다보면 경건의 모습은 자라나는데 경건의 능력이 생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적당히 믿고 적당히 신앙 생활하는데 익숙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다가 오히려 믿음을 까먹어 버립니다. 교회에 깊이 들어갔다가 오히려 순수함을 잃어버립니다. 목회자가 노회 정치와 총회 정치에 관여하다가 목회자의 순수함을 잃어버립니다. 이건 목회자나 평신도나 마찬가지에요. 이 백부장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한 믿음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본 적이 없다 놀라셨어요.
우리가 뭣 하러 하나님을 놀라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을 끌고 관심을 끌 필요는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있는 사람을 보실 때는 멈추셨습니다. 혈루병 걸렸던 여인이 몰래 옷에 손을 댔는데 예수님이 멈추고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찾으셨습니다. 왜요? 누군가 믿음이 역사하는 것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보실 때는 멈추셨어요. 바디매오가 다윗의 아들 예수여 라고 외치기를 멈추지 않으니까 예수님이 가다가 멈추셨어요. 주님을 멈추게 할 만한 것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인간의 믿음입니다. 얼마나 세상에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참됨 믿음을 보실 때 멈추시겠습니까. 누가 나를 만졌느냐, 그 말은 누가 믿음으로 나를 만졌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 믿음이 있느냐 그걸 찾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시선을 끌기를 원하시면 다른 비결 없어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우리는 다른 것은 다 쌓으려고 하지요. 지식 ․ 실력 ․ 경험 심지어 인격까지. 다만 쌓으려고 하지 않는 게 믿음입니다. 지식과 인격과 교양은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습니다. 명문학교에 가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문학교도 가르칠 수 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어떻게 키우느냐. 믿음을 키우려면 때로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없는 사람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별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너무 익숙한 사람들을 흉내 내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들의 제스처를 흉내 내면 안됩니다. 믿음은 우리의 외적인 행위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내면적인 것입니다. 믿음은 어디서 오느냐. 들음에서 옵니다. 들음은 어디서 오느냐.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우리가 밥을 먹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제도 밥을 먹고 오늘도 밥 먹고 아마 내일도 먹을 겁니다. 밥을 먹는 유일한 이유는 배가 고프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먹었는데 왜 또 먹느냐. 배고프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어제도 들었는데 왜 또 듣느냐. 영적으로 배고프니까. 들으면서 믿음이 오는 것입니다 .이미 아는 말씀이지만 웃으면 복이 오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들으면 믿음이 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움직일 줄 아는 사람
마 8:5-13 / 박찬길 목사
어떤 분이 잠이 안 와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처방해 준 수면제를 먹고서는 잠을 잘 잤답니다. 어느 날 이 환자가 수면제가 다 떨어져서 의사를 또다시 찾아갔습니다. 수면제를 달라고 했더니 의사가 하는 말이 수면제를 자꾸 먹으면 중독이 되어서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환자가 막무가내인 겁니다. 그래 의사가 지혜를 내서 수면제라고 이야기하고는 소화제를 처방해 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날 밤에 의사가 수면제라고 준 소화제를 먹고 잠을 잘 잤답니다.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약효가 없지만 환자의 정신적인 효과를 얻게 하기 위해서 주는 약이지요. 환자가 의사의 처방을 굳게 믿고선 약을 먹으면 어느 정도의 효과를 얻는다는 겁니다. 의사들이 종종 이런 처방을 한다고 하는데, 이 플라시보가 광범위한 증상들을 완화시킬 수가 있다고 합니다.
믿음에는 대단한 힘이 있습니다. 소화제를 수면제로 먹고선 편안하게 잠을 자니 얼마나 대단한 믿음이에요. 우리가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믿음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성경에 보면 믿음을 통해서 많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멀리 갈 것 없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다음 장인 마태복음 9장에 가면... 어떤 사람의 친구가 중풍에 걸려서 꼼짝하지 못합니다. 그래 친구들이 들것을 만들어서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어요. 예수님이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을 고쳐주시지요.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심방을 가시는데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고 있는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어요. 예수님이 이것을 아시고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시면서 고쳐주십니다. 믿음이 혈루증을 낫게 한 겁니다.
27절에 가면 눈먼 사람 둘이서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예수님이 집안으로 들어오셨는데도 눈먼 사람들이 예수님을 계속 따라오는 겁니다. 그래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예, 주님. 하시고 말고요 믿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너희 믿음대로 되어라' 하시면서 고쳐주십니다. 눈먼 이들이 믿음으로 눈을 뜬 겁니다.
성경에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믿음 외에 다른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중풍병에 걸린 사람에게 언제부터 병에 걸렸느냐?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에게 하루에 출혈량이 얼마나 되느냐? 눈먼 사람들에게 혹시 부모님은 눈이 멀지 않으셨냐? 이런 것을 물어보지 않으셨어요. 예수님이 보신 것은 그들의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믿음이 있으면 치료해 주셨고 믿음이 없으면 역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믿음이 없으면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의심하느냐?' 야단하시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기록된 믿음 있는 사람들에게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셨지만 아무 사람에게나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아무에게나 역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병자가 얼마나 많았어요. 그림을 그려보세요. 예수님이 한 두 사람 고쳐주시면서 소문이 났겠지요. 그 소문을 듣고 이 동네 저 동네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몰려왔겠지요. 중풍병자가나 혈루증으로 앓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인가요? 셀 수 없이 많았겠지요. 그럼에도 고침 받은 사람은 소수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고쳐주셨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만 다녔지 예수님을 움직일 줄 몰랐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겁니다.
저는 우리 좋은교회 모든 교우들이 예수님을 움직일 줄 아는 믿음을 가진 교우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혈루증을 앓는 여인처럼, 눈먼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철저하게 믿어서 예수님을 움직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믿는 대로 될찌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는 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영적인 진리를 알아야 예수님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을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은 어떤 믿음이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을 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백부장은 100명의 군인을 거느린 로마 군대의 장교를 말합니다. 이 백부장에게는 종이 있는데 그만 중풍을 맞아서 고생하고 있어요. 백부장은 종을 고쳐보려고 예수님께 찾아온 겁니다.
생각해 보시겠어요. 당시의 종이 사람인가요? 물건입니다. 종은 사람이 아닙니다. 종은 재산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짐승과 종의 유일한 차이는 짐승은 말이 통하지 않고 종은 말이 통한다는 겁니다. 고대 기록에 보면 로마시대에는 농사짓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농사기구이고, 다른 하나는 소와 말과 같은 가축이고, 세 번째는 노예, 종이었답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난 6월에 미주리주의 세인트루이스라는 곳에 집회를 갔었잖아요. 다운타운을 도는데 목사님이 그래요. '박 목사님, 저기가 노예 시장이 섰던 곳입니다.' 남부 지역에서 노예를 기차로 실어와서 거기에서 사고 팔았다는 거예요. 언제까지 있었냐고 물었더니 1850년대까지 있었답니다. 150년 전이에요. 링턴 대통령이 노예 해방령을 발표한 것이 1863년인데 그때까지 미국에 노예가 300만 명의 있었답니다.
인권을 강조하는 미국에서도 불과 150여 년 전에 노예가 소나 돼지와 함께 거래되었는데, 2000여년 전의 종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의 물건에 불과합니다. 당시에는 종이 병에 걸려서 죽는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종이 병들었다고 주인이 죽였을지도 모릅니다. 종이 중풍에 걸렸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주인들을 알지도 못했을 것이고, 안다고 해도 주인의 관심사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종은 쓸모 없는 존재로 여겨져 버림받고 폐기 당하는 물건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종의 문제로 예수님께 나아와서 도움을 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이 백부장의 아들도 아니고 백부장의 비서도 아니고 백부장의 종도 아니었습니다. 백부장 자신이었습니다. 이 백부장은 가축 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종이 중풍으로 고생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괴로웠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고쳐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온 겁니다. 백부장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오늘날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할 때에 예수님이 움직이시는 겁니다.
요한1서 5장 21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믿음의 공동체나 세상에서 만나게 해 주신 사람은 그 사람이 누구든지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들든지 내 마음에 들지 않든지, 나와 생각이 같던지 다르던지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자신의 능력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백부장은 로마 군대 소속의 장교인데, 이만하면 사회적인 신분도 있고 해서 예수님께 나오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왜 사회적인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잖아요. 그래서 웬만한 일에는 크게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괜히 신경을 썼다가 자신의 자존심이나 체면을 구기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 됩니까? 종만 해도 그렇잖아요. 사람도 아니고 당시에 고칠 수 있는 병도 아니기 때문에 백부장이 모른 척 하거나 그냥 죽게 놔두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야기 거리가 되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권위나 체면에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백부장은 자기가 하인의 병을 낫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백부장은 병원 의사의 진료나 자신의 정치 능력이나 돈으로도 안 된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겁니다. 자신이 비록 백부장의 장교이지만 병든 하인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고 예수님께 달려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에게 움직이십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움직이십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다니고 믿음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믿음이냐가 중요합니다. 자신의 자존심이나 체면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 자신에게는 영적인 능력과 세상의 능력이 없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움직이십니다. 자신의 믿음이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움직이시는 겁니다.
전에 저와 함께 신앙 생활했던 어느 형제는 자신에게 믿음의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루는 저를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요청해왔습니다. '박선생님' 제가 신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입니다. "박선생님 신앙과외를 시켜주시지요." 깜짝 놀라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홍릉에 있는 카이스트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는데, 이 형제가 예수를 믿으면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겁니다. 자신은 그래도 열심히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지나온 생활을 돌이켜보니까 그렇지가 못하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과 영적인 대화를 나눌 때에 부족하기도 하고 갈등이 생긴다는 겁니다. 솔직한 고백이었습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합니다. 제가 담임목사도 아니고 신학교 3학년인데, 박사 과정에 있는 사람이,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그 형제는 자신의 인격이나 자존심이나 체면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생각했던 겁니다. 자신에게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겁니다.
저는 우리 모든 교우들이 여러분의 사회적인 지위나 자리나 자존심이나 체면 이전에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복이 아니고 능력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복입니다. 똑똑하다고 확신을 갖는 것이 복이 아니고 똑똑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이 복입니다. 이런 복과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심령 속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백부장의 말을 들으시더니 가서 고쳐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백부장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의 모습을 보십시오. 8절에 보니까 엄청난 말을 합니다. "주님, 나는 주님을 내 집으로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마디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
백부장은 군대의 경험을 통해서 말씀의 권위를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군대 생활해 보신 분들은 아시지만 군에서 명령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은 거의 절대적인 힘을 가집니다. 특별히 전쟁터에서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처형될 수밖에 없는 절대적 위력을 발휘합니다. 백부장은 이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의 능력은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다고 믿었던 겁니다. 조금 전에 읽어드렸던 8절과 9절의 말씀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백부장을 만나시면서 너무나 좋아하셨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집에 가시겠다고 하는데, 백부장은 오실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잖아요. 말씀만 하셔도 내 종이 나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백부장이 사회적인 지위가 있기 때문에 하는 립 서비스가 아닙니다. 신앙고백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벌써 알고 있어요. 백부장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주님이라고 고백하잖아요. 예수님은 백부장이 자신을 주로 고백하는 신앙을 보시고 종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에게 움직이십니다. 백부장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원격 치료해 주시잖아요.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모든 사람에게 역사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많은 사람에게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믿고 받아드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움직이셔서 하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헛 그물질했잖아요. 예수님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물을 내릴 때에 예수님은 움직이셨습니다. 두 배에 가득 잡히게 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 어느 교회의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깜짝 놀라는 기도를 들었습니다. 기도를 담당한 분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말씀을 증거해 주시는 목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목사님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에 순종할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과 같은 기도였습니다. 제가 그 기도를 듣고는 오늘 어떻게 설교를 해야 하나 고민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하겠다고 하잖아요.
저는 목회하면서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설교하는 목사를 쳐다보는 교인만 쳐다보면서 설교한다는 겁니다. 여러분처럼 저를 잘 쳐다보면 얼마나 좋아요. 제가 전에 미션 스쿨에 가서 설교를 했는데, 앞에 앉은 사람이 설교 시간이 되니까 다른 행동을 하는 거예요. 그 이상합니다. 처음에 찬양하고 기도할 때는 멀쩡하다가 설교가 시작하니까 다리가 올라가는 겁니다. 신문을 딱 펴는 겁니다. 제 마음이 얼마나 좋지 않던지, 설교하는 시간 내내 입 따로 머리 따로 였습니다. 저 친구는 왜 그럴까? 무슨 사연일까?
그 때에 깨달은 것이 있어요. 그 친구를 쳐다보니까 설교가 은혜가 안 돼요. 설교자를 쳐다보지 않는 사람은 소수이고, 쳐다보는 사람은 다수인데, 설교자는 은혜를 끼쳐야 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 제가 그 다음부터 결심했어요. 설교 시간에 쳐다보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쳐다보지 않으리라. 쳐다보는 사람만 쳐다보리라. 그리고 설교하니까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몰라요.
여러분, 이 제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에 여러분은 어떠한 권위로 받아드리십니까? 예수님은 아무에게나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역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격적인 분이에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움직이십니다. 이 땅에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라고 받아드리는 사람들에게 움직이십니다. 내가 예수님께 대하는 것만큼 예수님이 나에게 역사하시는 겁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잖아요. 뿌린 대로 걷는다고 하셨잖아요. 예수님을 목석같이 대우하면 예수님도 그 사람에게는 목석으로 역사해 주시고, 예수님을 절대자로 대우하시면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절대자로서 대우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내가 왕 같은 대우를 받게 되는 겁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네가 나를 이렇게 대우했으니 내가 너를 그렇게 대우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대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삶의 방향과 질이 달라지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모시느냐에 따라서 예수님이 움직이기도 하시고 가만히 계시기도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승부를 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많이 버느냐? 얼마나 출세하느냐?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되느냐? 거기에는 예수님이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믿음이 예수님을 움직이는 겁니다. 여러분의 자랑은 오직 믿음뿐이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역사를 이루어주시는 겁니다. 성탄의 계절에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드리셔서 예수님을 움직일 줄 아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예수님 말씀의 의도를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움직일 줄 아는 저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서 하나님의 역사가 날마다 순간마다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로써 주님을 감동시킨 사람
마 8:5-13 / 조상호 목사
지난 주 주중에 카드와 편지 몇 장을 받았는데, 너무 기뻤습니다. 다 소개할 수는 없고, 그 중에 두 개를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한 중고등부 학생으로부터 받은 카드입니다. 제목이 <해피 벌스데이 목사님>입니다. “축하드려요~ 잘 생기신 목사님, 언제나 기도해주시고 말씀 전해주시는 거 감사해요! 저도 언제나 목사님의 사역을 위해서 기도할 께요. 파이팅!! 생일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사랑합니다. 목사님. OO 올림.” 또 한 청년 형제로부터 받은 편지를 소개하겠습니다. “To 목사님, 할렐루야! 목사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목사님 생신 꼭 챙겨드리고 싶어서 몇 달 전에 재윤이(저의 큰 아이입니다)한테 물어봤었어요. 오늘은 더더욱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목사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고 저의 너무도 든든한 목자로 세워 주셨으니까요. 제가 뉴질랜드 와서 하나님 만난 것 다음으로 가장 큰 축복은 좋은 교회와 목사님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라고, 또한 저와 모든 성도님들을 인자한 미소로 대해주시고 악수해주실 때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임은미선교사님의 책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 당신입니까?’에 써져있는 간증처럼, 목사님께서 지금의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순복음교회의 담임목사님이 되신 것, 그것에 저는 ‘You came here, because of me'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닌 저를 OOOO 봉사 자리를 권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리를 맡고 있는 동안 기도 많이 해주세요. 특별히 요즘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더더욱 사모하고 있습니다. 저의 목자이신 목사님의 많은 기도 부탁드릴께요! 그리고 여러 가지 면에서 목사님의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또한 요즘은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목사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아서 여러 가지 은사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항상 저의 좋은 Role Model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저와 성도님들을 사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알파 수료만찬 때 놀러왔던 제 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순복음교회 사람들은 왜 이렇게 행복해보여?“ 저는 ”예수님 믿으면 행복해져~“라고 대답했는데, 사실 이거를 목사님께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목사님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사랑합니다! 항상 파이팅입니다! From OOO“
어떻게 알았는지 제 생일을 알고 많은 분이 카드와 편지와 꽃, 케익, 등을 전해주셨습니다. 그 동안 저는 제가 태어난 생일을 제대로 기억한 적도 없고, 생일상을 제대로 받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대신에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3월 셋째주 목요일을 저는 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는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은 텍스트(문자)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생일날 가장 기억나는 카드와 편지를 받았던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정성스럽게 직접 손으로 그린 카드와 정성스럽게 쓴 편지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오죽하면 집사람이 실수로 Recycle Bin에 집어넣은 그 카드와 편지들을 제가 다시 찾아낸 후 제 서고로 가져와서 몇 번이나 읽었겠습니까? 그 카드와 편지들이 제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섬기라고 붙여주신 학생들과 청년들과 성도님들을 위해 더 열심을 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할 만큼 그 카드와 편지들은 저에게 많은 힘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잠언 16장 24절에서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시 한 번 ‘말의 힘(Power)’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콤합니다. 지혜롭고 소망이 되는 말은 마음을 즐겁게 하고 육체에 힘을 공급해줍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옛날 속담처럼 말로서 용기를 주고 격려가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한마디의 말이 갈등을 극복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싸움의 불씨가 되기도 합니다. 말 한마디가 마음에 기쁨을 주기도 하고, 반대로 증오의 씨를 뿌리기도 합니다. 한 마디의 말이 열을 받게도 하고, 반대로 마음에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열 받게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감동을 주는 사람입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고 고민을 주고 혼란을 주는 사람이 아닌, 격려하고 위로하고 칭찬하고 축복하고 복음 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열 받게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옆에 계신 분들과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됩시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을 감동시킨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로마의 어느 백부장입니다. 성경에 그의 성과 이름이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유대지방에 파견된 로마의 초급장교로서 이방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가버나움에는 헤롯왕의 궁궐이 있었고, 갈릴리 지방 사람들이 때때로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로마 제국은 그곳에 군단급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그 로마 군단은 로마인들이 아닌 시리아나 레바논 출신 용병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장교들은 대부분 로마 출신들이었습니다. 로마 군대는 한 군단이 6,000명인데, 이것을 100명씩 60개 부대로 나누어 백부장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했습니다. 따라서 로마군대의 백부장쯤 되면 미래가 환하게 보장된 엘리트들로서, 프라이드가 대단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 나라를 무력으로 지배하고 있는 로마 사람들을 증오했고, 로마 사람들도 피지배 계층인 유대인을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이 백부장은 달랐습니다. 본문과 같은 내용이 누가복음 7장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복음 7장 5절에 보면 그에게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이것은 유대인 장로들이 주님께 고백한 말인데, 유대인 장로들이 인정할 만큼 그는 유대인을 사랑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같이 6절을 보겠습니다.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지금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와 누가 집에 중풍병으로 누워 있다고 합니까? 그의 아내입니까? 아니면 그의 아들입니까? 아닙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와 중풍병에 걸려 집에 누워있다고 한 사람은 그의 아내도 아들도 형제도 친척도 아닌, 그의 하인이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쟁을 치르는 군인은 적을 죽이기도 하고, 또 옆에서 죽어가는 동료들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군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그리 두려운 일도 아니고, 죽어가는 사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 당시의 하인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 취급을 했습니다. 당시의 하인은 소나 말이나 돼지처럼 시장에서 사고팔았습니다. 따라서 하인 하나가 죽는다 해도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자기 하인이 중풍병에 걸려 고통 받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이처럼 그에게는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얼마 전 서울 영등포 길거리에서 좌판을 깔고 물건을 팔던 40대 아주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사고로 아주머니의 허리띠에 찬 전대에 들어 있던 돈들이 아스팔트 도로 위에 흩어져, 바람에 날아갔습니다. 그때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바람에 날아가는 돈을 줍기 위해 마치 생선 냄새를 맡고 몰려든 파리 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할 것 없이 허리를 굽히고 1,000원짜리 한 장이라도 더 줍기 위해 소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어느 한 사람 쓰려져 신음하고 있는 아주머니를 들쳐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동차에 치인 아주머니는 병원도 가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돈을 줍느라 난리를 벌이는 틈에 그 아주머니를 친 자동차는 뺑소니를 쳐 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사람보다 돈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시대입니다. 영혼보다 물질을 더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시는 줄로 믿는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거라사 지방에 가신 주님께서 더러운 귀신들린 한 사람을 고쳐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님은 귀신을 쫓아내어 주위에 있는 2,000마리의 돼지들에게 들어가게 하심으로 귀신들려 고생하던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2,000마리의 돼지 떼를 죽게 하셨다는 이유로 그 동네에서 빨리 떠나실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2,000마리의 돼지보다 한 영혼을 더 사랑하셨는데, 동네사람들은 한 영혼보다 2,000마리의 돼지들을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거라사지방 사람들은 돈을 더 소중하게 여겼지만, 주님은 한 영혼을 더 소중하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백부장에게는 주님처럼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개처럼 여기는 이방인인 자기 하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하인을 고치기 위해 주님께 와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영혼 사랑하는 백부장의 모습을 보시고 감동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처럼 백부장처럼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백부장에게는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백부장으로부터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도 배워야 하지만, 그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6절)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우리는 백부장의 이 간청을 통해 그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그는 지배계층인 로마의 백부장이었고, 반대로 예수님은 피지배계급인 유대백성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형편없는 목수 출신이요, 변변한 공부조차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볼 때 얼마든지 예수님을 깔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향해 뭐라고 불렀습니까?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를 수 있고, ‘나사렛 예수여’라고 부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부르지 않고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명칭입니다. ‘주’(Lord)를 히브리어로는 ‘아도나이’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큐리오스’라고 하는데, ‘주인’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아무나 ‘큐리오스’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죄인들을 구하러 오신 구세주가 되심을 믿을 때 고백되어지는 단어가 ‘큐리오스’입니다. 그런데 그 백부장은 예수님을 향해 ‘큐리오스’ 즉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시며, 구원자가 되심을 분명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6절)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7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백부장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주님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가면 됩니다. 그런데 그는 전혀 예상치 않은 말을 합니다. 다같이 8절과 9절을 보겠습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주님께서 ‘내가 가서 병을 고쳐주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오시지 말고, 그냥 말씀으로만 하시지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자기 집에 심방오시는 것이 부담이 되어 거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집안이 엉망이어서 혹은 대접해드릴 것이 없어서 주님을 자기 집에 오시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그렇게 말씀드린 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주님이 자기 집에 오셔서 직접 안수하지 않으시고 그냥 말씀만 하셔도, 하인의 중풍병이 고쳐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이 오셔서 안수기도를 해야 낫는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던 제자들조차 주님이 직접 나서야만 역사가 일어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광풍이 불고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자,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주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도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사람을 보내어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말하며 빨리 오시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늦게 오시자, ”주께서 어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주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주님께서 직접 오셔만 역사가 나타나고, 혈루병에 걸린 여인처럼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아야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말씀만으로도 낫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 황제보다도 더 큰 권세가 예수님께 있음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인 자기가 명령만 내려도 부하들이 그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셔도 하인의 병이 치료될 것을 믿었습니다.
다같이 1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여기 ‘놀랍게 여겼다’는 말을 원어로 ‘다우마조’라고 하는데, ‘이상히 여기다’ ‘감탄하다’ ‘감동을 받다’는 의미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감동짱’이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놀라고 감탄하실 만큼 감동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인 그를 보고 놀랄 만큼 감동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시고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그가 어떻게 했길래 주님을 감동시킬 수 있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 감동을 받으셨을까요?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인 백부장을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칭찬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칭찬하신 것은 백부장의 선행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군인다운 용맹스러움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믿음 때문에 그를 칭찬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의 믿음이 주님을 감동시킨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믿음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18장 8절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은 누구보다도 믿음 있는 자를 찾으시고,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주위에 보면 이적과 표적이 부족해서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보여주면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이적과 표적을 보았습니까? 그들에게 표적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수많은 역사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신앙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모세에게 불평했습니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보여준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1장 40절에서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고 합니까? ‘믿으면‘ 그러니까 보면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 중의 하나는 ’믿음‘입니다. 신약성경에서만도 헬라어로 ’피스토스‘ 믿음이란 말이 600번 이상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을 없애버리면 텅빈 책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무엇보다도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믿음 있는 자를 찾으시고 믿음을 따라 역사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을 때는 꾸중을 하셨지만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는 그 믿음을 통해서 권능을 체험케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칭찬하셨고,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고 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하시는 즉시 하인은 낫게 되었습니다(13절). 여기에서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통해 백부장에게 믿음이 있다고 여기셨습니까? 백부장이 어떻게 해서 주님으로부터 믿음을 인정받았습니까? 주님께서 깜짝 놀라시며 그를 향해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는데,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앞에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어떻게 표현되었습니까? 말로서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백부장은 말로써,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믿음의 말’로써 주님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말로 인해 하인의 중풍병이 고침을 받는 역사를 체험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말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주님께서 두 맹인을 고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맹인이 주님을 따라가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님께서 어느 집에 들어가셨는데 그곳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라고 질문을 하시자, 두 사람은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의 눈들이 밝아졌습니다. 두 맹인은 믿음의 말을 함으로써 눈이 떠지는 역사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가복음 11장 23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하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선포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믿음의 고백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 36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가 욥바라는 곳에서 죽은 다비다를 향해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믿음으로 선포했더니, 그가 살아났습니다. 또 사도행전 14장 8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가 루스드라에서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네 발로 일어서라”고 믿음으로 선포했더니, 그가 일어나 걷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6절 이하에 보면, 바울은 귀신 들린 여종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게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고 선포했더니, 귀신이 즉시로 그 여종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이처럼 말로서 믿음을 선포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믿음을 소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음으로 선포하는 입술도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원로목사님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조목사님이 처음 “1만 명이 들어가는 성전을 세우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교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믿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1963년 2월 1일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실내경기장인 장충체육관도 겨우 8,000명 밖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만 명이 들어가는 교회를 짓겠다는 말은 당시 한국의 건축 기술과 자본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조목사님이 믿음을 가지고 선포한대로 1969년 여의도에 착공되고 4년 후인 1973년에 완공하여 1만 명이 들어가는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당시의 성도수는 1,8000명이었습니다. 또한 아직 교인이 몇 십 명밖에 되지 않고, 환경이 여러 가지로 힘든 때인 1950년대 말 “나는 은빛 날개를 타고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할 것이다”라고 믿음으로 선포했습니다. 당시 한국 상황으로는 여권 만들기도 힘들고, 비행기 탈 돈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한국 사람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영어로 설교를 하고 집회를 인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2008년도 5월 현재 조목사님은 당신이 믿음으로 선포한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지구를 85바퀴나 돌만큼의 거리를 은빛 날개를 타고 다니셨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변하면 인생이 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인 입술입니다. 우리의 입술에 믿음이 담겨 있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선포한다면, 믿음의 고백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처럼, 주님을 감동시키는 복된 입술, 믿음의 입술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수 없다, 해보나 마나다, 어렵다, 죽겠다’는 부정적인 말, 원망의 말, 불평의 말 대신에 백부장처럼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믿음의 말, 긍정적인 말, 감사의 말을 함으로써 믿음의 고백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