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배를 타고 섬으로 향하는 길, 아민은 난간을 꼭 쥐고 맑기만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침에 본 뉴스에서도 13년만에 만나는 청명한 하늘이라고 떠들었었다. 마음이 편하고 기쁘지 못해서, 맑은 하늘이 전혀 에뻐 보이지 않았다. 싫었다. 질투가 나서 그랬다.
선유는 그와 대조적으로 온 세상을 다가진듯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긴 기장의 원피스가 바닷 바람에 거칠게 휘둘 렸다.
"언제 쯤 도착하지?"
그녀가 들뜬 표정으로 선장에게 달려가 물었다.
"1시경이면 도착할겁니다 아가씨."
"그래?"
그녀는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듯한 모습이였다.
"바다 향기가 너무 좋지 않아?"
그녀가 바람에 휘날리는 치마를 부여잡고 넓은 보폭으로 달려와 그에게 물었다. 아민은 그녀에게 무례 할 수 없었다. 솔직한 감정을 급하게 숨기고 밝은 표정을 만들어낸 후에야 그녀를 보았다.
"응, 좋아"
그녀는 그의 대답이 만족스러운듯 입가에 웃음을 그려냈다. 그녀가 주머니에서 갈매기 먹이를 꺼내 배의 가까히 날고 있던 새들에게 먹이를 주었다. 새들은 넙죽넙죽 잘도 받아 먹었다.
"이것 봐. 먹이 채어가는 것 좀 봐!"
그녀가 신기한듯 환호성을 질렀다.
"아가씨가 좋은가 봐요. 미인은 알아본다고 새들이 아가씨 주변에서 떠나질 않네요."
뱃사람 중 하나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시경이면 아직도 40분 이나 남았네, 여기 계속 햇볕맞고 서있으니까 졸립다, 너 계속 여기 있을꺼야?"
그녀가 햇볕을 맞고 서있는 아민에게 물었다.
"아니."
"그럼 같이 들어가자."
그녀는 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민도 그녀를 말없이 쫓았다. 그녀는 배안 넓다란 방에가 자리를 잡고 누웠다. 아민이 그녀에게로 다가가 앉자 그녀가 몸을 슬금 슬금 옮겨 그의 무릎을 베게 삼았다.
"나 잠시 이렇게 누워있어도 되지?"
"응."
"도착하면 깨워줘."
그녀가 그렇게 당부하고는 눈을 붙였다. 아민은 잠든 선유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았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으로 전과 같지 않게 야위어진 얼굴. 산산히 조각난 그 마음으로도 웃고 있는 그녀가 지금 그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칼날을 본다면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것인가, 괜시리 쓴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의 그릇된 선택으로 그녀가 병처럼 품은 집착이 끊어질수 있다면 몇번이고 그리할 것이다.
몇 분을 그렇게 앉아있었을까... 지루한 시간이 지나가고,
"도착 했습니다."
선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녀를 깨울까 하다가 너무나 곤히 자는것 같아 뱃사람 중 하나를 불러, 그녀를 자신의 등에 업히도록 도와달라 했다.
몸을 움직이는 동안에도 깨지 않는것으로 보아, 선유는 많이 피곤했던게 틀림이 없었다. 떠난다는 설레임에 어제 잠을 꽤나 설쳤던 모양이었다. 배가 육지에 닿고 아민은 그녀를 업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작은 언덕 위의 익숙한 집 앞에서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나란히 서서 그들을 내려다 보고 서있는것이 보였다. 준서는 뱃사장 까지 마중 나와서는 특히 심경이 복잡한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가까히 다가온 준서가 아민에게 말했지만 아민은그의 성의를 잔잔한 웃음으로 거절했다.
집 대문 앞에 다다르자, 주인이 없는 동안 섬 위의 외딴 집을 충실히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숙여 그들을 맞이 했다.
"이쪽으로.."
준서가 집안에 들어서자, 아민을 안내했고, 아민은 그를따라 그녀를 침실로 옮겼다. 이곳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것이 없었다. 항시 불을 때고, 청소를 하였는듯 마치 어제까지 사람이 살았던 것처럼 실내가 따뜻했다. 심지어 고풍스러운 가구들하며, 이불들까지 하나도 변하지않고 관리가 되고 있었다.
선유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준 후, 아민은 그녀의 방 창문으로 다가가 바깥 풍경을 내다 보았다.
어딜 봐도 사방이 바다뿐인 섬.
아민은 문득, 섬안에서 나가지 못한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빠져나갔다 생각했는데, 여전히 몸은 이곳에 있다.
가서 제인을 보고, 재회했던것도 그곳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도 모두 꿈(夢) 인 듯 느껴졌다.
아민은 그곳에서 멀어져 이 외딴 섬에 혼자 뚝 떨어져 버린 것 같은 환각에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준서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인상을 찌푸리는 그에게 걱정스러운듯 물었다.
"아가씨는 제게 맡기시고 쉬시는게 좋겠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아민은 부축을 하려는 준서를 손을 들어 말리고 그 방에서 빠져 나갔다. 한걸음 한걸음 집안에서 걷는 걸음이 편치가 않았다. 두발에 무거운 추라도 달고 걷는듯한 느낌이였다. 곳곳의 고풍스런 가구들,고가의 장식품, 벨벳 커튼, 금장으로 장식된 꽃장식, 잘닦이어진 바닥까지도 답답스럽기 짝이 없었다. 화려하기만한 색체들은 쳐다보기도 싫었다.
"이쪽으로.."
준서는 아민을 방으로 안내 했다. 그가 전에 머물던 방이었다.
아민은 방에 들어가 그 어느데도 자리 잡지 못하고 서있었다.
준서의 의미심장한 눈길에 그가 떠밀려 선택한 곳은 그곳의 모든 가구물품과 떨어진 구석진 바닥이였다.
뒤돌아 나가려던 준서가 그자리에서 멈춰섰다.
"왜 돌아왔는지 묻지는 않겠습니다."
"... ..."
"나는 생각 했습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아가씨와 함께 이곳에 다시 온다면 이 사람이 모든걸 체념하고 오겠구나 하고, 여길 떠나는 당신의 모습 죽어도 다시 여기 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이었으니까요."
아민은 불편한 기색을 나타내며 몸을 움추렸다.
"그럼 쉬십시요."
준서가 침통한 한숨을 내쉬며 문을 닫았다.
부엌에서 향긋한 내음이 나고 있었다. 쇼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던 선유의 마음은 행복하기만 했다 그가 자신만을 위한 요리를 해주다니 꿈만같았다.
요리를 하는 뒷모습을 보게 되다니, 막 도착한 신혼부부 같아 기뻤다. 아민은 부엌에서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가정부 유희가 몇번을 거들려 했지만, 그는 음식은 물론 식기구까지 손도 못대게 했다.
"도대체 무슨 굉장한 요리를 만들려고 그래?"
그런 일련의 장면들을 재밌는듯 바라보며 선유가 물었다.
"기다려봐, 맛있게 요리해줄테니까."
"아가씨 기다려 보세요. 정말 맛있는 냄세가 나요.모양도 되게 이쁘고요."
아민의 요리를 가까히서 지켜보던 유희도 들뜬듯 아민의 말을 거들었다.
"들었지? 너희집 최고의 가정부도 인정하잖아."
그가 고개만 살짝돌려 선유를 바라보며 꾸밈없이 웃었다.
"정말 좋다."
"뭐가?"
아민이 브로 컬리를 칼로 손질하며 물었다.
"네가 앞으로 메일 메일 그 부엌에서 요리해줬음 좋겠어."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다. 고르던 그의 칼질이,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삐뚤빼뚤해져 버렸다는걸. 그 집안의 사람들도...모두.
단지, '주인집 아가씨와 아민의 관계가 이만큼이나 발전해서 온걸까?' 생각하며 묘한 이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메일메일 요리' 라는 말은, 그들 사이가 묘한 관계로 발전했다는 뉘앙스로 들렸기에.
그러나 단 한사람. 준서의 표정만은 그리 좋지 못했다. 여기 올때만해도, 다 죽어 가는 얼굴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한순간에 이렇게 바뀔수가 있는가? 백번을 생각해도 부자연 스러웠다.
자신의 아는 그는 절대로 결혼까지 약속했었다는 여인을 버릴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한자리에 뿌리박은 고목나무처럼 굳건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아가씨에게 유혹하듯 미소지을 때마다, 배로 생기는 불안감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찌 그리 둔해 눈치채지들 못하고있는가 싶었다.
"맛있는 까르보나라와 클램차우더 스프, 갖구어낸 빵이 나왔습니다."
"카스테라푸딩과, 과일화채도 있으니까 많이 먹어."
그가 눈부신 햇살같은 미소로 그녀를 다독였다.
'저렇게 높이 올려놓고, 확 추락시킬라 그러지..못된 녀석. 지독한 녀석.' 준서는 그의 거짓되고 모순된 모습이 맘에 안드는 까닭에 그자리에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부리는 마법에 자신까지 걸려들면 사단이 나도 크게 날 것 같았다.
"맛있다. 입안에서 살살 녹는게 정말 부드러워 이런건 언제 배웠어?"
선유의 들뜬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준서는 부엌에서 나왔다.
정말 그는 무슨생각을 가지고 이곳에 다시 돌아온걸까. 그렇게 그녀의 마음에서 나가달라 밀어냈으면 무슨수를 쓰더라도 이곳에 다신 돌아오지 말았어야 하는 거였다. 아가씨에게 진 빚을 평생 몸바쳐 갚으리라는 결심이 슨게 아니라면 절대로!
웃음만이 가득했던 저녁식사가 끝나고 아민은 카스테라 푸딩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는 유희의 청에 친절하게 레시피도 적어주었고, 선유가 하자는 산책도 마다하지 않고 나갔다, 또 그 집을 지키는 젊은 남자들이 권하는 축구경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늦은 밤 선유가 권하는 홍차까지 마신 후,
"잘 자. 좋은꿈 꿔."
"응, 너도."
그녀의 인사에 평소같이 대답하고, 잠자리에 들기위해 방에 들어온 아민은 무심하게 TV를 틀었다. 틀자마자 화면에 보인건..
아침에 보았던, 남현그룹의 끝도없을 듯한 주식하락 소식과 더불어 지연이 갇힌 형무소가 자료화면으로 나오고 있었다. 자신은 3년전 남현그룹 외동딸 제인의 사위로 이미 한번 언론에 공개된적이 있었기에 본명으로 거론되고 있었고, 지연과 영태는 세상에 다시는 없을 몹쓸 남매로 비춰졌으며, 선유는 이름없이 '전직 여의사' 라고만 거론되고만 있었다.
그리고 남현 본사에서, 제인의 아버지 서문혁 사장을 비난하는 시위대의 모습도 잠깐 카메라에 잡혔다.
아민은 TV를 끄고 가지고온 수면제를 한알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간이 탁자에 있는 물주전자를 통째 들어 입에 털어 놓고 삼켰다.
정신이 몽롱해지면, 두려움도, 목을 죄어오는 죄책감도, 복잡한 생각도 없어지겠지 하여 선택한 방법이였다.
그리고 몽롱해만 지는 정신을 참아내며 벽에 걸린 둥근시계를 응시했다. 대바늘이 새벽 2시를 가리키고, 3시를 가리키고, 아민이 기다렸던 4시가 되었다. 아민은 천천히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밖을 나서니 모두가 잠든 듯 넓은 집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아민은 계단을 내려가는 자신의 발소리에 주의하며 천천히 집안을 내려갔다. 그리고 대문에 다다를때까지 자신아닌 누구의 움직임도 포착되지 않는데에 대해 안심하며 대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집밖으로 빠져나갔다. 나가자 마자 싸늘한 바다 바람이 그의 몸 전신을 휘어감는 가운데 몽롱한 정신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발길은 이미 그가 향할곳을 알고 있는듯 그의 마지막 길 까지 착실히 인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