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군산에 살고 있는 옆지기 친구한테 오늘 어머님이 운명하셨다는 전화가 왔다.
오늘 오후2시에 졸업식도 있고, 그 보다 더 긴박한 일이 눈 앞에 펼쳐져 있으니 어쩐다?
사정을 모르는 동창들은 장례식장에 모여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오라고 계속 전화한다.
옆지기는 새벽 3시가 넘어서야 자고 있는 나를 흔들어 깨워 빨리 출발하자고 재촉한다.
나오니 밖은 캄캄하고 비는 부슬부슬 뿌려 꼭 가야만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먼길을 가려니 우선 기름은 가득 넣어야지 하고, 우선 가까운 동네 주유소로 향했다.
옆지기는 볼멘 소리로 이 곳에서 넣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넣는다며 중얼중얼....
춘천은 새벽에 대부분 주유소가 문을 닫아서 급한대로 가까운 데를 찾을수 밖에..
가득 채워 달라는 주문을 하고 '딸가닥'하는 소리를 확인하고야 대금을 지불했다.
옆지기는 가득 넣었으면 유류 게이지가 위로 올라가야 되는데 고장이 났나 이상하단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달리다 보면 올라가겠지 했는데 한 20분을 달려도 변동이없다.
장거린데 고장이라도 나면 기름이 떨어져도 표시가 안돼 큰일날텐데 어쩌나?
그래서 둘이 내린 결론은 다른 주유소를 찾아 기름을 넣어보기로 했다.
기우이길 바랬는데, 어이없게도 1만 5천원이나 기름이 더 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그럼 기름은 안 넣고 기름 값을 받았다는 결론인데.......
우선 영수증에 있는 전화 번호로 전화를 해서 주유한 분과 통화를 했다.
조금전 그 곳에서 기름을 가득 넣은 사람인데 어떻게 된 거냐?
가득 넣은 것을 확인하고 돈은 지불했는데, 게이지가 맞지 않아 확인하니 이러하다.
주유원은 그럴 리가 없다며 이런 저런 변명만 계속 늘어놓는다.
한참 이야기를 한후 전화를 끊었는데 속았다는 느낌이 들어 몹시 불쾌했다.
비가 종일 와서 그런지 서해안 고속도로는 군산까지 뻥뚫려 있어 달리기 좋았다.
달리다 간간이 휴게소에 들러 커피도 마시고, 맑은 공기와 맨손 체조를 했다.
너무 졸릴 때는 휴게소에 차를 대 놓고 차안에서 30분씩 단잠에 빠지기도 했다.
쪽잠이 왜 그리 달고 맛있는지,깨면 몸이 가뿐하고 정신이 맑아 질주를 계속했다.
이야기 하던 중 옆지기가 서평택을 지날때쯤 친구 어머님에 대한 회상을 했다.
태어난곳은 순천이지만 국민학교부터 군산에서 자랐기에 군산을 고향이라 생각한다.
국민학교 친구중 지금까지 연락이 끊기지 않고 오는 친구가 여러명있다.
그 중에 한 3명의 친구 어머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첫 번째는 이번에 돌아가신 인자한 어머니...생각만 해도 좋고 포근하단다.
부부 금슬도 좋았고,아들이 넷에 딸 하나를 두셨다
언제나 그 집에 찾아가면 당신 아들 같이 반겨주시고 밥을 한상 차려 주셨다.
비록 아들이 공부는 못했지만 나무라는 법도 생전 없이 그냥 웃기만 하셨다.
무조건 그냥 다 인정해 주고 전적으로 감싸주신 어머니!
학교가 파 하면 많이 가서 숙제도 하고 점심과 저녁까지 먹고 어두 컴컴할 때 집에 왔다
친구가 미도파 건설에 입사해서 퇴직하기 전까지 한 달이면 몇 번씩 집으로 전화가 온다.
첫마디가 "뭣혀요?""제수씨 별일 없어요?"
전화 받은 나는 "ㅎㅎㅎ 왜 옆지기랑 통화가 안되나요? 지금 전화 받고 있잖아요."
별 내용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지만 오래 전화가 없으면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해진다.
지금은 서산에서 부인과 식당을 크게 하고 있다는데 가본다 하면서도 아직까지...
어릴 때 뛰어 놀다보면 배도 많이 고프고 먹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고인이신 어머님이 밥을 많이 주셔서 지금 건강하다고 조의금도 많이 내야한단다.
두 번째 친구는 군산 시내에서 전파사를 하고 있는데 어머님은 올해 97세 되셨다.
아들이 많아 봉당엔 아들 친구 사내들 신발로 언제나 가득했다.
농사도 많이 짓고 부유해 쌀가마니를 쌓아놓고, 어려운 보릿고개도 없이 지냈다.
천성이 워낙 무뚝뚝 하셔서 반기시지는 않지만 무엇을 먹던지 하던지 참견하지 않으셨다.
배고픈 친구들이 몰려와 큰솥에 남아있는 밥을 다 해치워도 별 말씀이 없이
녀석들이 놀다 들어와 배고파서 먹었나보다 하셨다.
25년 만에 만난 어머님은 우리가 누군 지도 몰라보시지만 큰절을 올렸다.
나오면서 옆지기가 미리 준비한 용돈을 주니 "이런 건 뭐" 하시며 봉투를 꽉 잡으셨다.
작별 인사를 하고 나오며 옆지기가 "돈이면 다들 좋아해" 해서 한바탕 웃었다.
봉투를 손으로 꽉 ^^*
세 번째 어머님은 늘 불만이 가득 하셔서 미간을 찌푸리고 짜가당 짜가당 하셨다.
아들 친구들이 집에 오는 것도 싫어 하셔서 맘놓고 오랫동안 그 친구 집에서 놀지 못했다.
놀다 쫓겨나기 일쑤니 친구들이 자연히 모여 노는 것도 어머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농사를 졌는데 친구가 일을 안 한다고 욕을 하시고, 친구들까지 못 마땅해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무섭고, 인색한 어머님이셨다는 생각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다보니 나는 우리 아이 친구들에게 어떤 어머니로 기억될까?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왔을 때 반갑게 맞이하고 먹거리라도 챙겨줬나?
말이라도 곁에서 따뜻하게 해주고, 어깨라도 토닥거려 용기를 준적이있나?
내 성격중 칼로 자르듯이 딱 잘라 냉정하게 말을 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생각해 보면,상대방이 차갑게 느낄수도 있고,더불어 마음에 상처를 입힐수도 있다.
항상 누구에게라도 따뜻하고 먼저 손 내미는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야겠다
태양처럼 뜨거운 사랑이 아닐지라도..별처럼 빛나는 사랑이 아닐지라도..
은하수 같은 은은한 불빛으로 어둡고 험한 길을 헤메일때 내 두손을 내밀어
따뜻하게 잡아줄수 있는 마음이 평화로운 아름다운 어머니가 되기를 나는 소망한다.
★ 나이든 여자를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은
나이든 여자를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은 '마음 다스리기'이다.
자신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야 표정 역시 그윽하고, 부드럽게 만들어져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진다.
오십이 된 영화배우 재클린 비셋은 한 인터뷰에서.
'젊은 시절에는 그저 용모로 평가되지만 나이든 여자는 폭넓은 경험,이해심,포용력,
인내심등..스스로를 어떻게 길들이고 주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여자,혹은 심술궂은 여자로 평가되죠.'라고 했다.
젊음을 잃는게 아니라 더 많은 체험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고,
날마다 새로운 도전을 하기 때문에 나이드는 재미도 쏠쏠하다.
어릴 때 좋아하던 떡볶이도 계속 먹지만 청국장의 깊은 맛도 이해하게 되었고
젊을 땐 느끼하게 들리던 나훈아의 노래도 절절히 들린다.
청바지도 가끔 입을 수 있고,모피 코트를 입어도 어울릴 나이라는 게 행복하다.
식욕이나 호기심은 줄지 않았지만,웃는 시간은 젊을 때보다 훨씬 많다.
아마도 수많은 삶의 얼굴 가운데 밝고 유쾌한 면만 가려서 볼 줄 아는 지혜를
얻어서일 것이다.
그건 교과서나 학원에서 배우는게 아니라 연륜,그야말로 밥그릇 수의 힘에서 나온다.
거울에 비친 자신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남에게로 시선을 돌려 자신의 따스한
손을 내밀어줄 수 있을 때 '잘 늙어 간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 얼굴의 주름도 고단한 삶의 증명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공들여 만든 고아한 작품처럼 보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