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내리는 밤
한옥자
고요히 깃을 접은 밤하늘에 비가 내리고, 종일 가라앉았던 하늘에서 내리는
빗소리는 한 줄의 시가 되어 가슴으로 흐른다.
무작정 밤길을 나섰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작은 떨림으로 이어지
더니 어느새 먼 곳의 그리움을 찾아가듯 밤새 걷고 싶은 욕망이 인다.
비 오는 날은 누구에게나 사색의 여유를 갖게 하는 이 있나보다. 메마르고
건조한 심성의 대지에 사색의 빗물이 스미며 마음이 촉촉이 젖어든다. 시야를
가렸던 희뿌연 고뇌의 장막이 서서히 빗물과 함께 땅속으로 사라진다. 긴 호
흡을 내뿜으니 지난날 숨차게 살아온 내 모습이 겹쳐지며 비로소 내가 살아
있음이 전율처럼 다가왔다.
밤의 어둠 속을 밝히며 서둘러 차들은 달린다. 홀로 서있는 뿌연 가로등불이
빗속을 망연히 응시하고 있는 듯 하여 불현듯 함께 외로움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쯤이나 걸었을까? 서서히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벼운 던옷 이라도 걸치고 나왔을 것을......
오늘밤도 앞서가는 감성으로 자신을 다스리지 못했음을 또 후회해 본다. 이
밤 모처럼 주렸던 갈증을 적셔 보고 싶었건만 성숙된 사고와 순리를 매번 거
스르는 부족함이 드러나 이내 오던 길을 되돌려 집으로 향하였다.
가족들은 모두 잠들어 있다. 집안에는 정적만이 감돌뿐이다. 가스레인지에
찻물을 올려놓고 젖은 옷을 추슬렀다. 갑자기 손발이 시리고 저려 뜨거운 차
로 속을 달래며 온몸에 열기가 퍼지기를 기다렸다.
이제 서서히 몸이 녹아 내린다. 오늘은 어쩐지 잠이 쉬이 들것 같지 않아 책
상머리에 다가앉아 읽다만 책을 꺼냈다. 가슴을 적시는 문구가 빗소리와 더불
어 유난히 크게 들려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시계는 새벽 두 시를 가리킨다. 눈이 침침하고 허리가 아프다. 등골도 삐근
하고 다리도 저렸다. 몸이 휴식을 요구함을 모른 척 하려고 애써 보지만 머리
속은 멍해지고 뒤틀리는 듯한 몸부림에 그만 자리에 누었다.
깊은 어둠 속에서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린다. 머릿속도
한결 또렷하여 진다. 그리웠던 유년시절이 떠오르고 보고싶었던 이들의 모습
도 더욱더 생각나 잠시 지난날을 더듬기 시작했다.
함석으로 이어댄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는 유달리 소리가 컸다. 그래서
오늘처럼 밤비가 내리는 날이면 새벽녘이 되서야 겨우 잠이 들곤 했었지. 비
록 어린 시절이었지만 아마도 설레는 그리움을 제법 품고 있어서 그런 밤이면
무작정 분위기에 동화되고 젖어들어 마냥 누군가와 조잘대고 싶었다.
비 오는 날은 베개를 처마 쪽으로 향하고 방문도 조금 열어 놓는다.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에 마음은 구름위로 올라앉았다.
이윽고 머리 속에는 하얀 도화지가 준비되고 채색을 위해 빛 고운 그림물감
을 준비한다. 먼저 산을 그렸다. 내 앞에 펼쳐질 미래가 우뚝한 산처럼 의연
하고 흔들림이 없기를 기원하며 녹색과 노란색의 물감을 풀었다. 적당히 채도
를 맞춰 그리기를 마치고 나면 일곱 빛깔 중 보라색을 마지막으로 꽃을 그린
다. 우아하고 그윽한 미래가 펼쳐짐을 꿈꾸며 찬찬히 꽃이 주는 의미를 음미
하며.
안개 속처럼 비밀스럽고 희망을 주는 무지개 빛은 화사하고 고와 삶의 전율
을 느끼고 희망을 주는 색들이다. 저 혼자 따로 있을 때는 무덤덤하던 것이
더불어 빛을 발하니 모나지 않은 어우러짐을 느끼기에 충분한 색이라 생각되
었다. 마지막은 하늘과 구름을 그린다. 하늘은 무한한 소망이며 구름은 이에
부응하는 삶의 기쁨이라 여겨져 밤새 상상의 날개를 펴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
다.
안일함과 물질의 쾌락이 극도에 달해 앞이 보이질 않아 탁해진 영혼에 빗물
이 스민다. 빗물이 번져 밤새 그렸던 그림은 마침내 깊은 미로의 추상화가
되고 말았다. 밤새 꿈꾸던 삶의 수채화는 지금 욕망에 사로잡힌 나의 자화상
일 수도 있다.
오늘밤 나는 빗소리에 그 동안 잊고 있던 자신을 발견하고 갑자기 혼란스러
웠다. 무작정 걷던 비 오던 밤거리에서 문득 한기를 느꼈을 때 나약해진 자신
이 초라하여 골목길로 숨고도 싶었다.
사람은 자연 앞에서 하나의 미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고 누구나 다 벌거벗고
태어나 베옷 한 벌로 돌아가는 인생을 산다. 누가 산을 정복하였다고 말하는
가! 잠깐동안 스쳐 지날 갈 따름인 것을......
지난가을, 한 여름에도 양말을 벗고 자지 못하고 손이 시리고 저려 제법 이
름난 한의사를 찾았을 때 매사 조급함과 욕심을 버리고 즐겁게 살라는 의사의
조언이 생각났다. 혈액의 순환조차도 방해하는 과욕과 조급함을 버리란 말씀
이다. 그리하겠다고 철썩 같이 대답은 하였지만 어찌 미약하기 짝이 없는 모
자란 이의 마음대로 되는 것인가!
물 흐르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세상은 자연의 순리대로 흐른다. 순리에 맞
추어 살기가 그리 녹록치는 않지만 이 밤 또 번번이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그
간의 다짐을 애써 되새겨 본다.
뜰 안에 떨어지는 빗줄기는 점점 굵어져 어둠을 가르고 아침이 오기를 재촉
한다. 아마도 긴 봄 가뭄 끝에 단비가 될 것이다.
아침이 되어 창문으로 한아름 찬란한 햇살을 맞을 수 있기를 기도하며 곤한
잠을 청해 본다.
2000/8집
첫댓글 이 밤 또 번번이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그
간의 다짐을 애써 되새겨 본다.
뜰 안에 떨어지는 빗줄기는 점점 굵어져 어둠을 가르고 아침이 오기를 재촉
한다. 아마도 긴 봄 가뭄 끝에 단비가 될 것이다.
순리에 맞추어 살기가 그리 녹록치는 않지만 이 밤 또 번번이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그간의 다짐을 애써 되새겨 본다.
뜰 안에 떨어지는 빗줄기는 점점 굵어져 어둠을 가르고 아침이 오기를 재촉한다. 아마도 긴 봄 가뭄 끝에 단비가 될 것이다.
안일함과 물질의 쾌락이 극도에 달해 앞이 보이질 않아 탁해진 영혼에 빗물
이 스민다. 빗물이 번져 밤새 그렸던 그림은 마침내 깊은 미로의 추상화가
되고 말았다. 밤새 꿈꾸던 삶의 수채화는 지금 욕망에 사로잡힌 나의 자화상
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