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좋은 글
⚘️사람 그리고 사람
한 순간을 만났어도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매 순간을 만났어도
잊고 지내는 사람이 있다.
내가 필요할 때
날 찾는 사람도 있고
내가 필요할 땐
곁에 없는 사람도 있다.
내가 좋은 날에
함께했던 사람도 있고
내가 힘들 때
나를 떠난 사람도 있다.
늘 함께 할 때 무언가
즐겁지 않은 사람도 있고
짧은 문자나 쪽지에도
얼굴에 미소 지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 이름을 생각하면
피하고 싶은 사람도 있고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못내 아쉬워
눈물짓는 사람도 있다.
서로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내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란 걸
가끔은 잊을 때가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
너무 가까이 있기에
그 소중함을 모르고 지나쳐
버리고 있는 이 시간들
그 시간을 낭비하지
말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생각보다 그리 넉넉치 않으니...
사람의 관계란
우연히 만나 관심을 갖으면
인연이 되고 공(노력)을
들이면 필연이 된다.
3번 만나면 관심이 생기고
6번 만나면 마음문이 열리고
9번 만나야 친밀감이 생깁니다.
우리는 좋은 사람으로 만나
착한 사람으로 헤어져 그리운 사람으로 남아야 합니다.
얼굴이 먼저 떠오르면
보고 싶은 사람
이름이 먼저 떠오르면
잊을 수 없는 사람
눈을 감고
생각나는 사람은 그리운 사람
눈을 뜨고도 생각 나는 사람은
아픔을 준 사람
외로움은
누구인가가
채워줄 수 있지만
그리움은 그 사람이 아니면
채울 수 없다.⚘️
- 좋은 글 중에서 -
⚘️🌴🌷🌱🌻☘🌼🌲🌺🍀💐🌾
⚘️가곡 '바위고개' 이야기
칼럼니스트, 문효주
바우와 순이는 소꿉놀이 친구로,
순이는 건너마을 공장에 다녔는데,
순이가 공장에서 산길로
돌아올 때면, 바우는 나무를 다하고 바위 뒤에 숨어 있다가,
불쑥 나타나서 둘은
나란히 바위고개를 넘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바우는 머슴살이하러 고향을 떠났고, 순이는 혼자 남아 계속 공장에
다녔는데,
혼자 돌아오는 고갯길은 너무나
외롭고 쓸쓸했습니다.
(1절)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님이 그리워 눈물 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는 님/
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2절)
바위고개 핀 꽃 진달래꽃은/
우리 님이 즐겨즐겨 꺾어 주던 꽃/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바우는 머슴살이 10년간 정말
열심히 일을 하여,
돈을 모아 순이를 만나러 고향에
돌아왔는데,
순이가 시집을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위에 걸터앉아
진달래꽃을 안고서 하염없이
울고 울었답니다.
(3절)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님이 그리워 하도 그리워, 십여 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진달래꽃
안고서 눈물집니다"
한국의 슈베르트라 불리는 "이흥렬(1909~1980)"이,
작곡한 노래가사로,
그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양음악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귀국 후인 1932년에
이 곡을 만들었는데,
"10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라는 가사로, 일제치하의 민족의 울분을
이 노래에 담았기에,
이 곡은 일종의 애국가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우리나라의
중학교, 고등학교 음악교과서를
만들었으나,
그가 과거에 친일행적이 있다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갔는데,
이러한 예술의 영역까지
우리나라의 극단적인 친일판단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일본월간지 "문예춘추"를 매달 빠지지 않고 봤었는데,
항상 하는 말이,
"일본을 이길려면,
일본말을 할 줄 알아야 하고,
일본사람들이 무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극일극일 하면서,
말로만 해서는 안된다"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하는 말,
"일본사람들 정직하고 부지런한 것은 꼭 배워야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저는 일제 강점기 때의 한국가곡 중, 이 "바우고개"를 가장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서글픈 가사와
서글픈 멜로디가, 그때의 우리나라의 입장과 너무 같았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그리고 이 노래가 워낙 유명한 노래인지라,
수많은 성악가들이 이 노래를 불렀으나, 저는 중앙대음대 성악교수였던 "메조소프라노 정영자(1946~ )"가, 이 노래를 가장 잘
불렀다고 생각합니다.
듣고 있으면 저절로 눈물이
나는 것 같습니다.
💗바•위•고•개 💗
이흥렬 작곡/ 메조 소프라노 정영자
https://m.youtube.com/watch?v=v9-K6lTtxfI&pp=ygUj66mU7KGw7IaM7ZSE652864W4IOygleyYgeyekCDrsJTsnIQ%3D
🌴 그때 그 시절 이야기
⚘️ 가난 ⚘️
내가 소싯적 시절 6-70년대 시대 상황은 지금처럼 양극화니 진보니 보수니 이런 말은 없었습니다. 오직 입에 풀칠하기 바쁜 가난의 연속 이었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파 오죽했으면 먹거리가 부족하여(나도 잘은 모르지만) 보릿고개(보리가 완전히 익기 전 베어서 말리어 개죽처럼 쑤어서 먹었음)라는 말이 있었겠습니까?
내 바로 앞 세대까지는 잘 아는 시대 상황입니다. 그러니 그 이전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세대는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5000년 가난의 역사 눈물의 역사인데 지금은 대부분 깡그리 잊고 있습니다.
방송을 통하여 소말리아나 아프리카 일부 빈민국의 굶주림을 보노라면 이런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우리들도 당시에 보통 집짚마다 아이들이 6~7명 8남매 9남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대가족이다 보니, 맏이는 할머니 할아버지 방에 막내 갓난아기는 엄마 아빠방에 결혼 안한 삼촌이나 고모 큰누나 큰형은 건넌방에 나머지 조무라기 아이들은 큰 방에서 기거하였습니다.
겨울이면 가운데 무겁고 커다란 솜이불 하나 방 가운데 놓고 꾀 많은 녀석은 따스한 아랫목에 가로 누워 자다가 발길에 차이기도 하고 새벽녘 방이 식어 오면 서로 이불 잡아 당기다가 실밥 터지면 다음날 엄마에게 큰놈은 뒈지게 얻어 맞습니다.
어린 동생들이 창호지 문 찢어 놓으면 문틈으로 들어 오는 엄동설한 황소바람을 양말짝 끼워서 막았지만. 윗목에 물사발이 얼고 방안은 입김이 서립니다.
재래식 화장실이 멀어 겨울에는 윗목에 요강단지도 놓아둡니다.
먹거리야 김치와 무국이 태반이고 주전버리는 삶은 고구마나 생무우를 깎아 먹으니 이런 음식 먹고 나면 방귀는 왜 그리 많이 나오는지?
여러 명이 한 이불 덮고 자다가 구들장 무너질 듯한 방귀를 끼면 이불 들썩거릴 때마다 쾌쾌한 지독한 무 방귀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지요.
아침에 일어나 내복바람으로 양쪽 문 다 열어 이런 공기 환기시키며 둘이서 큰이불 양쪽 맞 잡아서 개고 다른 녀석은 베게 쌓고 좀 더 큰 녀석은 요강단지 비우고 이렇게 문 열어 놓고 방 정리하며 쓸고 닦을 때, 어린 녀석은 내복만 입고 오들오들 떨다가 춥다고 다시 개어 놓은 이불 덮어 쓰고 아랫목으로 들어가다가 형 한테 얻어 맞고 아침부터 울고불고 난리가 납니다.
그때 겨울은 왜 그리 추웠던지 목욕은 늦여름 개울에서 한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가을 겨울 내내 낀 때가 눌어붙어 있습니다. 특히 다리 팔꿈치 등 관절부위는 때 자욱이 더 선명하게 나지요, 손등이나 발등에도 시커멓게 눌어붙은 때는 찬바람에 터져 피가 나기도 하지만 그 흔한 약도 화장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매주 수요일은 용의검사 날인데 검사를 대비하여 소죽 끊이고 난 다음 가마솥에 부어 놓은 꾸정물이 뜨뜻해지면 거기다 손발의 때를 불려서 씻어 내었습니다. 목욕은 음력설 대목 밑에 물을 끓여 커다란 다라.이나 옹기(버지기)그릇을 동네 부자집에서 빌려다가 온 식구가 돌아가며 딱 한번 하고 나면 다음해 늦봄이나 초여름이 되어야 마음껏 합니다.
이러다 보니 이가 득실거리고 아침에 이불 개다가 벼룩도 잡고 이도 잡고 어떤 아이는 학교 와서도 옷 밖으로 기어 나오면 옆 친구가 잡아 주었으며 밤에는 호롱불 켜 놓고 배 넙적 깔고 공부하다가 눈썹이나 앞머리 태우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가 가려우면 내복 벗어 호롱불 앞에서 이 잡다가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