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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파이프를 정밀하게 그려놓고 그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고 적었다. 대상의 재현이 곧 그 대상 자체는 아니라는 역설이다. 스포츠약학의 세계에도 이와 유사한 위험한 역설이 존재한다. 바로 WADA 금지목록 'S0 비승인약물'이다.
S0에 속한 물질들은 캡슐, 정제, 주사제 등 우리가 흔히 아는 ‘의약품’의 형태를 띠고 유통되지만, 실상은 인체 치료용으로 규제기관의 승인을 받지 못한 ‘실험실의 화합물’에 불과하다. 임상 시험이 중단된 후보 물질부터 동물용 의약품까지, 안전성이 담보되지 않은 이 물질들은 ‘기적의 약’이라는 마케팅의 탈을 쓰고 선수를 유혹한다. 특히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널리 퍼져 있는 BPC-157과 DNP는 그 유혹의 크기만큼이나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1. BPC-157: ‘재생과 회복’이라는 가면에 숨겨진 불확실성
BPC-157(Body Protection Compound-157)은 인간의 위액에서 발견되는 단백질을 모방하여 합성한 15개의 아미노산 펩타이드이다. 근육과 인대 부상으로 고통받는 선수들에게 이 물질은 ‘부상 회복의 지름길’로 인식되며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① 약리학적 기전과 기대 효과
BPC-157은 단순한 영양 공급원이 아니라, 우리 몸의 신호 전달 체계에 직접 개입한다. 핵심 기전은 혈관신생의 촉진이다. 이 화합물은 VEGF/VEGFR2 경로를 상향 조절하고, Src-Caveolin-1-eNOS 축을 통해 산화질소(NO) 시스템을 활성화한다. 결과적으로 손상된 조직 주변에 새로운 혈관을 촘촘히 만들어 산소와 영양소 공급을 극대화하며, ERK1/2 경로를 통해 섬유아세포의 이동을 도와 조직 수복을 가속화한다.
② 전임상과 임상의 거대한 간극
문제는 그 ‘근거’의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다. 쥐를 대상으로 한 전임상 모델에서는 골격근 혈류량 증가와 조직 회복력이 입증됐으나, 인간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무작위 대조군 연구(RCT) 데이터는 현저히 부족하다. WADA가 2022년부터 이를 금지목록에 포함한 이유는 이 불확실성 때문이다. 강력한 혈관신생 촉진 효과는 역설적으로 체내 숨어있던 종양 세포의 증식을 도울 수 있다는 이론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연구용(Research Use Only)’이라는 라벨 뒤에 숨어 유통되는 이 물질을 섭취하는 것은 선수를 스스로 실험실의 쥐로 전락시키는 행위와 다름없다.
AI생성이미지.
2. DNP: 에너지를 태우다 못해 목숨까지 앗아가는 ‘지옥의 불’
BPC-157이 ‘회복’을 미끼로 한다면 2,4-Dinitrophenol(DNP)은 ‘완벽한 몸매’를 미끼로 던진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폭발물 공장에서 사용되던 이 화학물질은 노동자들이 극심한 체중 감소를 겪는 것을 본 의사들에 의해 1930년대 ‘기적의 다이어트 약’으로 팔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처참했다.
① 치명적인 ‘짝풀림(Uncoupling)’ 작용
DNP의 기전은 미토콘드리아 내막의 양성자 농도 구배를 파괴하는 ‘산화적 인산화의 짝풀림(Uncoupling)’을 유도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세포 호흡은 양성자의 흐름을 ATP로 바꾸지만, DNP는 이 흐름을 차단하여 모든 에너지를 ‘열’로 방출하게 만든다. 신체는 지방을 폭발적으로 연소시키지만, 체온은 통제 불능 수준으로 치솟는다.
② 실제 사례와 비가역적 손상
실제로 영국, 아일랜드, 독일 등 유럽 전역에서 DNP가 함유된 ‘Arnold Iron Dream’과 같은 보충제를 섭취하고 고열과 탈수, 불규칙한 심장박동 등으로 사망한 사례가 10건 이상 보고됐다. 국내 식약처 역시 이에 대해 긴급 통관 금지 조치를 내린 바 있다. 운 좋게 목숨을 건지더라도 대가는 혹독하다. 수정체 내 ATP 고갈로 인해 며칠 만에 시력을 잃는 급성 백내장이 발생하거나, 신경 말단이 파괴되는 비가역적인 신경 손상을 입을 수 있다. 인터폴(Interpol)이 전 세계에 ‘오렌지 경보’를 발령하며 경고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DNP는 치료제가 아니라 ‘The Inferno Drug’라는 별명 그대로 인체를 안에서부터 태워버리는 ‘지옥의 불’이다.
*오렌지 경보: 사람이나 물체 또는 공공 안전에 심각한 위협이 될 사건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할 경우 통보
AI생성이미지.
S0 물질이 무서운 진정한 이유는 ‘성분표의 부재’와 ‘정보의 왜곡’에 있다. 해외 직구 사이트에서 유통되는 다이어트제나 근육강화제 속에 BPC-157이나 DNP가 몰래 혼입되어 있더라도, 선수를 포함한 일반 소비자는 이를 알 길이 없다.
여기서 우리 약사들의 역할이 시작된다. 스포츠 현장에서 약사는 단순한 조제자를 넘어, 검증되지 않은 물질의 위험성을 과학적 근거로 경고하는 ‘게이트키퍼(Gatekeeper)’가 돼야 한다.
- 첫째, 선수에게 ‘규제기관의 승인이 없는 물질은 독성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물질’임을 명확히 인지시켜야 한다.
- 둘째, 해외 보충제 구매 시 성분표를 꼼꼼히 대조하고 모호한 이름 뒤에 숨은 물질을 식별해내야 한다.
- 셋째, 도핑 방지는 공정성뿐 아니라 선수의 건강 보호와도 직결됨을 알려야 한다.
이것은 약이 아니지만 이 두 물질뿐 아니라 운동능력 향상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수많은 비승인약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무관심과 선수의 순간의 선택이 선수의 건강을 해치고 공정한 경쟁을 해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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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INTERPOL issues global alert for potentially lethal illicit diet drug. 2015.05.04. World Anti-Doping Agency (WADA). https://www.wada-ama.org/en/news/interpol-issues-global-alert-potentially-lethal-illicit-diet-dru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