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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을 잔잔케 하시다
마 8:18-27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마 8:18-27 / [예수를 따르려면;눅9:57-62] 예수께서 군중이 떼지어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셨다. 19) 바로 그때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20)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21) 제자 한 사람이 말하였다. `선생님, ㄷ)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ㄷ. 헬라어 원문은 `먼저 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해 주십시오') 22)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 23) [풍랑을 잔잔케 하시다;막4:35-41,눅8:22-25] 예수께서 바다를 건너가려고 배를 타시자 제자들도 따라 탔다. 24) 그런데 갑자기 폭풍이 일더니 물결이 배보다 높이 치솟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25)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소리쳤다. `주님, 우리를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을 것 같습니다' 26) 그제야 예수께서 일어나시며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그렇게도 겁을 내느냐?' 하며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자 폭풍이 그치고 사방이 잔잔해졌다. 27) 제자들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순종하는가?' 하고 모두들 놀라워하였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능력 행하시는 것을 본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과,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으신 예수(18-20) 여러 가지 이적을 보고 찾아온 무리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건너편인 갈릴리 바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시키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눅 5:32). 이때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며 거절하십니다. 이 말은 단순히 가난하다는 뜻을 넘어, 예수님의 전체적인 형편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유대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고(요 5:18) 가다라 지역에서는 떠나기를 간청했으며(34), 사마리아에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했습니다(눅 9:53). 또한 온 땅이 예수님을 용납지 않으려 했고(마 27:23), 마침내는 하늘에서까지 버려졌습니다(27:46).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21-22)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면 세상의 어떤 가치와도 병합될 수 없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릅니다(눅 14:25-33). 그런데 제자 중 하나가 “부친을 먼저 장사지내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자녀가 부모의 장례에 참석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창 25:9; 35:29; 49:28-50:3).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영에 속한 자가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영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10:37).
풍랑을 잔잔케 하신 예수(23-27) 갈릴리 바다는 기온 변화가 심하고, 때론 강풍이 자주 불어 어부들조차 배를 타고 건너가기를 조심스러워 하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육지를 통해 가는 길도 멀지 않은 요단 강 동쪽, 가다라 지방을 갈릴리 바다로 건너기를 원했습니다(18). 이때에 제자들은 풍랑을 만났고,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무시고 있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주무시게 하면 풍랑을 만나게 되고, 믿음 없는 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도 두려워합니다.
적용: 믿음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인생의 바다를 건너는 동안 삶의 여러 가지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이 풍랑을 잠잠케 하기 위해 어떻게 예수님을 깨웠습니까?
멸망의 문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다닙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 길을 걸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삶의 목적도 목표도 없는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목숨이 붙어 있으니 살아간다는 대답이 고작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멸망의 문은 입을 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인생의 두 갈래 길에서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을까요? 생명의 길입니까? 멸망의 길입니까? 영생의 길입니까? 영벌의 길입니까? 잠시 서서 뒤돌아봅시다. 그리고 좁은 길이거든 하나님께 감사하고 열심히 걸어 생명의 문에 도달해야 되겠고, 넓은 길이라면 얼른 돌이켜 좁은 길로 돌아서서 함께 영생의 문으로 돌진해야 하겠습니다.
< 설 교 >
에워싸는 무리와 따르는 제자
마 8:18-27 / 석기현 목사
대중문화가 점점 더 발전되면서 현대사회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는 경우가 흔히 생깁니다. 시즌이 되면 야구를 구경하기 위해 잠실경기장에 수만 명의 팬들이 모여들고, 멋진 공연이 열리면 치열한 경쟁 끝에 겨우 그 입장권을 구입한 관중들이 연주회장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그 경기와 공연 도중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나 연주자에게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내면서 마음껏 즐기지만, 일단 그 시간이 끝나면 마치 썰물처럼 그 자리를 떠나고 맙니다.
반면에 경기나 공연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운동과 연주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야구선수 지망생들과 음악 학도들입니다.
이들은 물론 선배나 스승들의 경기와 연주를 관람하는 자리에도 빠지지 않지만,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그들을 따라다니며 그 가르쳐 주는 것을 잘 배워서 자신의 실력을 연마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시던 당시에도 그처럼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큰 대중 즉 ‘허다한 무리’가 있었으며, 또한 그들과 구별되는 ‘소수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그 양자를 아주 분명하게 구별하셨던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산상보훈 설교를 하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갈릴리 사역의 본거지에 해당되었던 “가버나움”(5절)을 떠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28절)으로 가시게 됩니다.
그 여행 도중에 예수님께서는, 과연 어떤 사람은 ‘무리’ 가운데 그냥 남게 되고 어떤 사람만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시간 저는 오늘날 역시 그저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는 ‘무리 교인’과 그 주님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 ‘제자 신자’가 어떻게 다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무리는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끝나지만,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고난까지도 기꺼이 받습니다.
18절부터 20절에 기록하기를 “18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서기관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대적하던 자들이었지만, 본문에 나타난 “한 서기관”은 일단 칭찬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 즉 자기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고 하면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라고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마도 예수님의 산상보훈 등의 설교에 큰 감명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서기관은 율법학자이기도 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처럼 정식으로 교육을 받지 않은 분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율법의 깊고 참된 의미를 오묘하게 설파하시는 것을 보고 스스로 두 손 번쩍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어쨌든 유대 사회에서 율법에 있어서는 최고 전문가라 자처하던 사람이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머리를 숙이고 찾아온 것은 대단한 결단을 요하는 일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겸손하고도 열정적인 제자 지망생을 향하여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일견 동문서답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서기관에게 주시는 하나의 테스트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서기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유대 사회의 다른 유명한 랍비의 제자가 되는 것과 비슷한 것인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듣고 ‘내가 이 분을 스승으로 모시면 율법에 대해 더 깊은 진리를 배울 수 있겠구나.’라는 정도의 동기에서 예수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것을 예수님께서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랍비였다면 그 정도만으로도 그를 자기 제자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겠지만 예수님에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딴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을 흠모하면서 제자가 되기를 자원하는 그 서기관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나는 어디를 가도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몸이다.’라는 말씀으로 테스트를 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집이 없다는 것은 이미 ‘고생길이 뻔한’ 인생입니다.
즉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자면 ‘네가 내 제자가 되려면 아예 처음부터 고생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 고생이란 단순히 의식주의 불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은 안정된 거처가 없다는 뜻 외에도, 항상 대적들로부터의 공세 때문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는 의미 또한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육체적 고난뿐 아니라 사방의 원수들로부터 핍박과 박해를 당하면서 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그 서기관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그는 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예수님 말씀에는 은혜를 받았지만 예수님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걷는 것은 그 서기관뿐 아니라,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중에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무리의 대부분이 다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역시 대부분의 교인들은 신자가 된다는 것을 그 서기관이 생각하는 정도의 수준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목사의 설교도 가끔 듣고 살면 좀 더 교양인이 될 수 있을 것 같고, 내 자녀도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성경을 배우게 하면 좀 더 훌륭한 사람 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자’의 자세가 아니라 ‘무리’의 자세입니다.
주일 하루 정도 교회에 출석하면 내 인생을 보다 더 풍요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멀찌감치 따라다니면서 떡만 배부르게 받아먹고 자기 귀에 듣기 좋은 말씀만 몇 마디 즐기겠다고 하는 구경꾼의 속셈인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선생이라면 자기의 말만 흠모해 주어도 족하게 여기겠지만, 우리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로 받아 주시는 수준은 그 정도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너는 나의 가르침에 감동 받는 정도가 아니라 나의 걸어가는 고난의 길을 너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올 각오가 되어 있느냐?’라고 반드시 먼저 물어 보시는 스승이십니다.
사실 예수님 같은 스승께서 우리같이 못난 제자들에게 당신과 같이 고난을 나누자고 말씀해 주시는 자체가 이미 황공무지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고마운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디베랴 언덕에서 산상보훈에 고개만 끄덕이다가 돌아간 무리같이 되지 말고, 그 귀한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함께 고난 받으며 자기 십자가까지 기꺼이 지고 주님을 좇아가는 참된 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무리는 자기 인생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지만,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만 항상 최우선순위를 둡니다.
21절과 22절에 “21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나타나는 사람은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열두 제자 중의 하나라기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의 제자, 즉 풀타임으로 예수님과 같이 다니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있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예수님께 요청한 것은 두 가지 상황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예수님께서 다른 곳으로 떠나가시려 하는 바로 그 즈음에 자기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 제자는 ‘예수님, 제 아버지께서 지금 막 돌아가셨다니 일단 장례식에 다녀와야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른 민족도 그렇지만 유대 사회에 있어서도 자식이 돌아가신 부친을 장사지내는 것은 최우선 중의 최우선에 해당되는 의무였으며 또한 사망한 지 24시간 내에 꼭 치러내어야 할 일이기도 했습니다.
둘째 해석은, 자기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기는 한데 예수님을 따라서 여러 지방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현재로서는 부모를 모셔야 하는 형편 때문에 곤란하니, 일단 지금은 작별하고 부친이 돌아가실 때까지만 기다렸다가 그 후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풀타임 제자가 되겠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즉 자식으로서의 의무에서 해방되면 그때 가서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전념하겠다는 약속입니다.
하지만 전자나 후자 중 어느 쪽 해석을 택하더라도 근본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좋은데 당장 급한 일부터 먼저 처리해 놓은 후에 오겠습니다.
’라는 말이나 ‘정말 예수님 제자 되기를 바라고 함께 고생할 각오까지 되어 있지만 지금은 곤란하고 일단 보류해 두었다가 나중에 시작하겠습니다.’라는 말이나 오십보백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요청하는 “제자 중” “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참 이상한 말씀 아닙니까?
사실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일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장사지내는 사람들을 가리켜 “죽은 자들”이라고 표현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분명히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뜻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제대로 효도하지 않다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 시신 처리하는 일을 두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는 사람은 실로 영적으로는 죽은 자나 다름없습니다.
어떤 식으로 장례를 치르더라도 어차피 곧 썩어 없어질 시체에 대하여 가지는 열성이 예수님을 따라서 천국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보다 더 큰 사람이라면 그 자신도 이미 죽어 있는 자와 방불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도대체 무엇이 아쉬우셔서 그런 사람까지 자기 제자를 삼으려고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자기 인생의 최우선 순위는 다른 데다 두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제2지망쯤으로 여기는 ‘무리 교인’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워낙 장사가 잘 되어서 바쁘니까 주변 일이 좀 정리되고 차분해지면 그때 가서 열심히 교회 나오겠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글쎄요, 사업이 잘 될 때에 교회에 나올 ‘시간’을 못 내던 사람이라면 사업이 망할 때라고 해서 교회에 나올 ‘마음’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일단 입시 공부에 전념하게 하고 나중에 대학에 붙고 나면 자녀도 주일예배에 데려오겠다고 하는 부모들도 꽤 자주 봅니다.
글쎄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보다 자기 부친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 더 급하다는 사람을 가리켜서도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라고 책망하셨는데, 살아 있는 자기 자식을 예배에 참석시키는 것보다 공부 몇 시간 더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부모를 가리켜서는 도대체 무어라고 하시겠습니까?
한번 여러분께서 스스로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르기는 하지만 ‘죽은 자’라는 말 정도로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랄 것 같지 않습니까?
일단 돈부터 벌어 놓고 보는 일이, 우선 내 자녀를 대학교에 입학시켜 놓고 보는 일이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되고 그의 제자가 되는 일보다는 더 중요한, 그것보다는 분명히 한 단계 더 급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이미 ‘영적으로 죽은 자’처럼 취급하고 계십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평생토록 죽은 자들이 하는 일에만 매일 바삐 좇아다니다가 인생을 끝내고 말 것이 틀림없습니다.
항상 자신의 육신적 생활에만 마음이 바쁘고 일단 그것부터 먼저 해 놓고 예수를 믿겠다는 사람은, 농사짓느라고 바쁘고 추수하느라고만 바빠하다가 미처 자기 영혼을 위해 예비할 시간도 없이 죽게 되었던 한 ‘부자’처럼 그 인생의 끝 날이 도적같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도 먹고 사는 일, 자식 키우는 일, 노후대책 세우는 일에 더 마음이 급한 사람은 제자 입문에서 탈락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죽은 자’나 마찬가지라고 아예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부고(訃告)를 내시는 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인생에만 급급해하는 ‘살았으나 죽어 있는 무리’와 함께 바삐 다니지 말고 오직 예수님 뒤만 바짝 좇으면서 그 분을 섬기는 일만을 최우선으로 하는 신실한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무리는 잠시 모였다가 곧 흩어지지만, 제자는 예수님과 끝까지 동행하면서 신앙이 계속 자라게 됩니다.
23절 이하 27절에 “23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무리들과 헤어지고 제자들만 데리시고 배에 올라 예정하셨던 건너편 ‘가다라 지방’을 향해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23절에 “제자들이 따랐더니”라고 기록된 것은 아까 18절에서 언급된 ‘예수님을 에워싼 무리’와는 의미심장하게 대조됩니다.
디베랴 언덕에서 산상보훈을 들었던 무리의 대다수는 이미 다 흩어졌지만, 오직 예수님의 제자들만 이미 앞에 나온 두 가지 예비 시험을 통과하고서 지금 이 배에 예수님과 같이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이 타고 가던 배에 갑자기 폭풍이 불어 닥쳐왔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사실 큰 호수이지만 갑작스런 폭풍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처럼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자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었던 제자들까지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태평스럽게도 뱃전에서 “주무시고” 계셨는데, 아마도 계속되는 전도사역으로 몹시 피곤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급해진 제자들은 ‘예수님, 이러다가는 우리가 다 죽겠습니다.’ 하고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왜 그것이 믿음 없는 일이었겠습니까?
지금 자기네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갈 수 있는 바람과 파도가 세차게 몰아치고 있는 것이 어엿한 현실인데, 그것을 보고 걱정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믿음 없는 일에 해당되는 것이겠습니까?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기네 주변의 모든 상황을 완전히 주장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 마음의 발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상, 그 배는 결코 뒤집혀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아직도 살아서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그 배에 타고 계신 한에는 절대로 그 배가 침몰할 수는 없는 일이었는데, 제자들은 그런 믿음을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믿음이 없는 제자들을 위해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고” 즉시 “아주 잔잔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면서 “놀랍게” 여겼습니다.
제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사람으로서는 자연을 마음대로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제자들에게도 너무나 명백한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 사건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그저 좋은 말씀만 가르쳐 주시는 훌륭한 랍비 정도의 스승이 아니라, 모든 만물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고 믿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디베랴 언덕에 모였던 무리들과는 달리 오직 당신의 제자들에게만 이런 기적을 행해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앞으로 그 어떤 일을 당해도 당신만을 철저히 의지하고 따라오도록 특별교육을 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그 갈릴리 바다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역시 그래도 예수님을 좀 가까이 따라가겠다고 애쓰는 신자에게도 인생의 폭풍은 닥쳐오기 마련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때로는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기고 사고도 나고 병에도 걸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면 우리에게도 ‘예수님, 제게 이런 큰 시험이 닥쳐오는데 왜 주무시고만 계십니까?’ 하고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고 싶은 생각까지 들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이미 예비 테스트를 다 통과한 신자가 이제 예수님의 완전한 제자가 되기 위한 최종 테스트를 받고 있는 순간인 줄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상,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를 깜빡 잊고 계시는 시간이라는 것은 단 한순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위험이나 환난이 닥치더라도 예수님께서 우리 제자들과 같이 동행해 주시는 한에는 우리가 탄 배가 절대로 뒤집혀질 수는 없습니다.
아직도 당신의 제자들이 전도해야 할 생명들, 아직도 당신의 제자들이 세우고 지켜야 할 교회들, 아직도 오직 당신의 제자들만이 할 수 있는 세계선교의 사명이 남아 있는 한, 주님께서 그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하실 분이 결코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찌되었든지 간에 그 배에만 타고 있으면, 즉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몸 된 이 교회라는 방주 안에 타고 있기만 하면, 때때로 풍랑을 만나고 개인적으로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좀 생긴다 하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그것이 다 제자 훈련이요 성화의 과정이 되는 것을 깨닫고 체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쉽게 끓어오르다가 또 금세 식어버리고 흩어지는 무리가 아니라, 한번 따르기 시작한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는 가운데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오히려 그 때문에 주님만 의지하는 믿음이 더욱 새롭고 굳건하게 성장하는 원숙한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첫 절을 다시 보시면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도 일견 의아스러운 일입니다.
당신이 좋다고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어서 당신의 주위를 가득 에워싸고 있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 무리를 피해서 떠나버리셨습니까?
연예인 같으면 그런 인기를 못 누려보아서 안달할 것이고, 정치인이었다면 ‘박사모’ ‘문사모’ 따위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입이 벌어질 일인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런 대중의 열성적인 추종을 오히려 회피하셨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어디까지나 ‘무리’에 불과했지 당신의 ‘제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은혜 받았다는 말은 할 줄 알지만 예수님의 뒤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손을 내젓는 무리인지라 예수님께서도 피하셨던 것입니다.
항상 자기 할 것 먼저 다 해 놓고 그 다음에 시간이 좀 나고 힘이 좀 남아돌면 그때 가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무리 역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로 받아 주지 않으십니다.
공짜 떡을 나누어 줄 때는 좋아하면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사 하면서 쫓아다니다가도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는 그 얼굴색이 싹 바뀌어 버리는 표리부동한 무리가 당신을 에워싸기 이전에 예수님 편에서 먼저 몸을 빼어서 건너편으로 떠나버리시는 것입니다.
오직 그 무리 중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뽑힌 자들만이 예수님과 한 배를 탈 수 있습니다.
아무나 다 쉽게 될 수 있는 것이 예수 제자라면 별로 자랑스러울 것도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무리 가운데서도 실제로는 떨어지는 사람들과 도중탈락하는 사람들은 많고 반면에 합격된 후 끝까지 제자의 길을 걷는 사람은 아주 적은 까닭에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름과 자격은 실로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성경을 좀 안다는 머리만 가지고 제자 노릇하려 하지 않고 오직 스승이 먼저 가신 십자가 고난의 길을 몸으로 본받으려 하는 제자, 아무리 급하고 중요한 일들이 있다 해도 늘 예수님 제자로서의 사명에만 최고 우선권을 두는 제자, 쉽게 표리부동하지 않고 꾸준히 주님을 따라감으로써 계속 진보하여 결국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그 믿음이 성장하는 제자 - 오직 이런 성도들만 우리 주님과 동행하는 제자의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도 대부분의 교인들이 주일 아침에만 우르르 모여들었다가 또 쫙 흩어지는 ‘무리 교인’ 중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처럼 잠시 모여서 당신을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면서 그저 찬송 몇 곡을 부르고 아멘 몇 번 하고는 집에 돌아가기에 바쁜 ‘구경꾼 무리’에게 둘러싸이는 것은 우리 예수님 편에서도 조금도 반가워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고난과 핍박 받는 것을 감수하고 당신께로부터 배우는 일에 모든 시간과 힘과 물질까지 최우선으로 투자하고 늘 당신과 동행하면서 희로애락 간에 믿음이 계속 성장하고 있는 ‘내(內)제자’들과는, ‘풍랑에 흔들리는 배’ 안이라도 끝까지 동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실로 ‘무리’와 ‘제자’는 얼마나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 된 교회에 그런 구경꾼 무리의 숫자만 늘어가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시고 오직 철저히 교회중심으로 당신의 참된 제자로서 사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너무나 흔하고 가치 없는 ‘예수 무리’ 가운데 남지 말고, 스승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제자, 스승 예수님 모시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하는 제자, 날이 갈수록 스승을 더 사랑하고 더 신뢰하고 더 의지하고 더 잘 믿는 ‘예수 제자’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올리고 끝까지 함께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마 8:18-22 / 김창인 목사
오늘은 마태복음 8장 18절에서 22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나는 누구입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라는 말에 단어 하나를 더 넣어서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라고 해도 좋습니다.
요한 모리츠라고 하는 젊은이가 세계 제2차 대전 때 징집을 당해서 독일 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얼마를 지내고 난 후에 유대인이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 독일 정부로부터 유대인들은 학살을 당하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할 때입니다. 얼마나 핍박과 온갖 고난을 다 당했는지 눈뜨고 볼 수 없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독일 군의관을 만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이 군의관이 요한 모리츠에 대해서 전부 진찰을 하고 검사를 하더니 독일 게르만족의 순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날로부터 그는 영웅으로 높임을 받았습니다. 밑바닥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가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 할 정도로 높이 올라갔습니다. 어리둥절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심사관이 포로들을 하나 하나 심사해 나가는데 서류를 보니 요한 모리츠는 두 가지로 적혀 있습니다. 어떤 서류에는 유대인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고 어떤 서류에는 독일 사람 즉 게르만족의 순종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심사관이 “도대체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사람이 그 동안 사실상 얼빠진 사람처럼 멍청해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으로 핍박을 받다가 영웅으로 높임을 받으면서 내가 도대체 누구냐? 라고 자문자답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심사관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 ‘도대체 나는 누구지?’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는 재판을 받고 무죄 석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부모와 처자식이 그렇게 반겨주어도 전혀 기뻐할 줄을 몰랐습니다. 자기를 이미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이야기를 끝이 납니다.
이 이야기는 게올규라고 하는 사람이 25시라고 하는 제목으로 써낸 작품의 내용입니다. 하루는 24시간이 아닙니까? 그런데 24시간이 지나고 25시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세계도 종말을 향해서 뛰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종말에는 인간들이 전부 자기를 상실해 버리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한번 자문자답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하고 말입니다. 목사의 경우에는 ‘내가 목사 맞어?’ 장로인 경우에는 ‘내가 장로 맞어?’ 권사인 경우에는 ‘내가 권사 맞어?’라고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나는 누구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훈련을 잘 받은 신자인가?(18-)
나는 훈련을 잘 받은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 교인은 아닌가? 한번 자문자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 아들이 논산 훈련소에 입대할 때 함께 갔었습니다. 전부 자기 친구들 그렇지 않으면 자기 부모 형제들이 따라왔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있던 장병들이 “집합”이라는 호령이 들리자 전부 연병장으로 모여듭니다. 수천명이 모여드는데 훈련이 하나도 되어 있지 않기 까닭에 오합지졸입니다. 통솔이 잘 되지를 않습니다. 훈련소에 들어가면 한달이고 두달이고 철저하게 훈련을 시킵니다. 훈련을 마치고 훈련소를 떠나는 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명령 한마디에 질서정연하게 움직입니다. 담벽을 차고 나가라하면 차고 나아갑니다. 그 막강한 힘을 누가 당하겠습니까? 훈련으로 강한 강군이 된 그 군대를 누가 당하겠습니까?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훈련을 잘 받은 군인이기 때문입니다. 훈련이 이처럼 귀한 것입니다. 군인이 전부 흩어져서 집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분명히 처자식을 거느린 사랑하는 남편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나이 많은 분들에게는 귀한 아들이기도 합니다. 그 전에는 어리광도 피우고 제멋대로 살고 내 좋을 대로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만 모아 놓으면 오합지졸이라 써먹을 데가 없지만 모아 놓고 훈련시키니 그렇게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정예부대가 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훈련을 잘 받은 신자인가?’라는 말은 ‘훈련이 잘 되어 있습니까?’라는 말입니다. 군대가 얼마나 훈련이 잘 되어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이 군대의 생명이 아닙니까? 훈련을 잘 받은 군대라면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생명같이 여기고 공동체를 위해서 내가 희생할 줄도 압니다. 명령 하나에 죽고 살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입니다. 그 군대가 가는 앞길은 누구도 막을 재간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정신으로, 예수님의 생활로 완전 무장하고 훈련이 잘 된 그리스도인을 누가 당하겠습니까? 일당백, 일당천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이면 모일수록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전혀 훈련이 안된 교인들은 아무리 많이 모인들 써먹을 데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데리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훈련을 잘 받은 그리스도인인가?’에 대해서 자문자답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8절을 보면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안식일을 지키셨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신 후에 베드로의 집에 심방을 가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얼마나 열병이 심한지 헛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고쳐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중보기도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꾸짖듯이 열병을 꾸짖으시니 열병이 나갔습니다. 열이 완전히 내렸습니다. 열병에 걸렸다가 열이 내리면 병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 여인이 곧 일어나 언제 아팠었느냐는 듯이 수종을 들었습니다. 소문이 나니까 각색 병든 자들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이 고쳐 주시고 또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계속 몰려드는 병자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밀고 밀리는데 감당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몰려 에워쌌습니다. 전혀 훈련이 안 된 군중이었습니다. 즉 말씀으로 전혀 훈련이 되어 있지 않고, 주님 앞에 나아와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병고침만 받으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합지졸들이 아닙니까? 많이 모여 봐야 어디에 쓰겠습니까?
주님께서 모두 바다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하시고 다 건너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뒤 따라 가셔서 일대 일 양육에 힘쓰셨습니다. 바다 건너편에 가서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 일대 일 양육을 하고 훈련을 시켰습니다. 중풍병자 하나를 네 사람에게 메어 가지고 왔는데 그 사람을 고쳐 놓고 일대 일로 양육을 합니다.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불러서 그 집에 가서 유하면서 일대 일로 훈련을 시키고 제자로 양육을 합니다. 잘 훈련을 시켰다는 말입니다. 그네들이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요, 일꾼이 되었습니까? 훈련이라는 것이 이렇게 귀하다는 것입니다.
1960년도 이태리 로마에서 열렸던 올림픽 대회에서 금메달 3개를 한꺼번에 취득 한 삼관왕 아가씨가 있습니다. 윌마리를이라고 합니다. 이 아가씨는 가난한 집에 열일곱번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데 왜 그렇게 아이는 많이 낳았습니까? 아이 엄마는 돈을 벌어야 되고 먹을 것이 부족하여 제대로 돌봐 주지도 못하고 먹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4살이 될 때까지 걷지를 못했습니다. 5살이 되었을 때는 의사도 치료하기를 거부할 정도의 열병에 걸렸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70Km 떨어진 곳에 유명한 의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습니다. 의사가 “앞으로 내가 시키는 대로 일주일에 한번씩만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매일 매일 어머니가 아이의 관절이 굳어지지 않도록 운동을 시키십시오. 운동을 안 하고 가만히 있었기 까닭에 근육이 뭉쳐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속적으로 맛사지를 해서 풀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돈을 벌러 나가겠으니 너는 죽으라고 내 버려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루 밥 세끼를 겨우 먹으며 말며 할 수밖에 없었으나 계속해서 운동을 시키고 맛사지를 해서 굳어진 근육을 풀어주었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일과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에 걸음마를 시작했습니다. 벌써 중학교에 가니까 오빠와 함께 농구를 합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달리기 선수로 발탁되었습니다. 그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 학생들만 참가하는 대회에서 메달을 땄습니다.
1960년이 되어 올림픽에 나갈 미국 대표 선수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올림픽에 출전하여 100m, 200m 4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삼관왕이 되었습니다. 걸음마도 제대로 못하고 완전히 폐인이다 싶이 했던 어린아이가 삼관왕이 되는 위대한 업적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물론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어머니가 자기의 딸을 생명같이 여기고 사력을 다해 훈련 시켜 일대 일로 양육을 하고 키워주셨기 때문에 이런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일대 일 양육, 일대 일 훈련이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과 더불어 일대 일로 만나시고 말씀으로 훈련을 받아 어디에 내 놓아도 자랑거리요, 정말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훈련을 잘 받은 일꾼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는 훈련을 잘 받은 그리스도인인가? 그렇지 않으면 천방지축으로 노는 그런 쓸모 없는 인간인가? 자문자답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세를 바로한 신자인가?(19-20)
여기에 칼이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칼 자체는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습니다. 강도의 손에 그 칼이 잡혀지는 날에는 살 사람도 죽이고 남의 것을 빼앗습니다. 그러나 의사의 손에 그 칼이 잡혀지는 날에는 죽을 사람도 수술하여 살려내는 것입니다. 똑같은 칼인데 왜 그렇습니까? 정신적인 자세가 즉 사람을 죽이려는 정신자세를 가진 사람과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 정신자세를 가진 사람에게는 똑같은 칼이지만 결과는 천양지차라는 말입니다. 정신적인 자세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생활의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의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일에 나와서 예배 드리는 자세를 보면 여러분들의 믿음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자세를 정중히 하고 이목을 집중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찬송을 불러도 뜨겁게 부른다면 알아 볼 만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팔짱을 끼고 절반쯤 돌아서서 다리를 꼬고 앉아 째려보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하나님은 외모를 안 보시고 중심을 보시지요?”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배할 때 우리의 중심이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그 사람의 자세에 다 나타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시아버지 앞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째려 볼 수 있습니까? 시아버지 앞에서 못하는 일을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의 신앙의 자세가 삐딱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자세가 삐딱한 사람은 남을 보아도 바로 보지 않고 삐딱하게 봅니다. 말을 해도 삐딱하게 합니다. 일을 해도 삐딱하게 합니다. 생각을 해도 삐딱하게 합니다. 자세를 바로 해야 합니다. 자세를 바로 가진 사람은 남을 보아도 바로 봅니다. 말을 해도 바로 합니다. 생각을 해도 바로 합니다. 일을 해도 바로 합니다. 자세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자세를 바로 가진 그리스도인인가? 자문자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9절에서 20절을 보면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한번은 서기관 한 사람이 나타나서 “주님!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에는 흠을 잡을 데가 없지 않습니까? “주님 내가 영광 받는 자리만 가겠고 주님을 위해서 밟히고 낮아져야 하는 자리는 못 가겠습니다”라고 하면 흠잡히지 않습니까? “주님 내가 성공하고 복 받는 자리에는 가지만 내가 주님을 위해서 실패해야하고, 내가 주님을 위해서 손해를 보아야 하는 그 자리에는 못 가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주님께서 그런 사람을 용납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서기관은 어디든지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그 말에 흠을 잡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래 나는 너 같은 사람을 찾고 있었노라”고 하셨어야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루 종일 들판과 산을 뛰어 다니는 여우를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그러면 밤에 들어갈 굴이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하루 종일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를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밤이면 들어가서 잠잘 거처가 있느냐?” “예 있습니다” 그 때 “나는 베개 하나도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은 베개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깔고 자는 요는 말해 볼 것도 없고 덮고 잘 이불도 없고 베고 잘 베개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나는 알거지라는 말입니다. 대화가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서기관은 속으로는 아주 엉큼한 생각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감추고 말만 멋지게 한 것입니다. 주님이 그것을 모르시겠습니까? ‘너 같은 인간의 말에 대한 대답은 할 필요가 없다. 네 속에 대한 대답을 하리라’ 하여 그 마음에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 마음속과 말이 다른 만큼 대화가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들 마음속에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품고 나오셨습니까? 이 서기관은 저 예수라는 분이 이스라엘을 독립을 시키고 왕으로 등극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정치적인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내가 좀 고생이 되더라도 끝까지 또 어디든지 따라다니면서 시중을 든다면 저 분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때 나는 한자리를 톡톡히 할 수 있다라는 계산을 하고 나온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을 이용해서 내 욕심을 채우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주님이 그 심보를 모르시겠습니까?
주님의 대답은 너 같은 인간에게 나는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내용입니다. 이 사람은 삐딱한 믿음의 자세, 삐딱한 정신적인 자세, 삐딱한 생활의 자세를 가지고 나와 예수님을 이용해 먹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예수님께 이용을 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 욕심을 채우다니요?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삐딱한 자세를 갖고 아무리 믿어봐야 받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바로 믿어야 합니다. 잘 믿는 것과 바로 믿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돈을 많이 벌어 흥청거리면서 산다면 그 사람을 잘 산다고 할런지는 모르나 인생을 바로 사는 것만은 아닙니다. 큰부자가 되어 잘 살면서도 인생을 바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가난해도 바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잘 살기에 앞서 바로 살아야 되는 것처럼 우리는 잘 믿기에 앞서 바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신앙의 자세를 바로 가진 신자인지 자문자답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자세를 바로 가진 사람에게 주님이 왜 줄 것이 없겠습니까? 천상천하가 다 주님의 것인데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자세를 항상 바로 가지어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오늘에 충실한 신자인가? (21-22)
우리의 과거가 아무리 찬란하게 빛난다 할지라도 오늘이라고 하는 현재가 엉망인 사람은 과거의 빛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이 엉망인 사람에게는 내일 즉 미래가 절대로 약속되지 않습니다. 과거가 빛났습니까? 오늘에 충실하십시오. 미래를 약속 받고 싶으십니까? 오늘에 충실하십시오. 오늘이 있는 자에게 과거가 빛나고 오늘이 있는 자에게 미래가 약속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그러면 우리가 항상 오늘 오늘 하면서 오늘만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까? 백년 앞을 바라보면서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렇게 ”오늘“이라는 소리만 하십니까?”라고 하실 분들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백년 앞을 바라보기에 오늘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에 충실함이 없는 사람은 내일이 절대로 보장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늘에 충실하고 있습니까?
본문으로 돌아가서 21절과 22절을 보면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제자 중에 하나가 이야기합니다. 이 제자는 열두 제자가 아닌 제자입니다. 즉 열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좀 오래 따른 사람입니다. “주님, 저 서기관과 같은 심보를 가지면 안되지요?” “ 그러면 너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내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세상을 떠나기까지 내가 잘 모시다가 세상을 떠나면 장례를 치르고 와서 그 다음에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래? 저희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대화는 간단하게 끝납니다. 이것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두 번째 사람 즉 제자는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일을 하기는 하는데 내 가정 일이 더 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일을 먼저 다 해 놓고 그 다음에 시간이 있으면 그 때 주님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대답하시기를 “그렇게 하라” 하셨으면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되는데 주님께서는 가정 일 보다 더 하나님의 일이 더 먼저라고 하셨습니다. 가정 일을 핑계 대고 하나님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말씀은 믿지 않는 사람의 식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보다 가정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 가정에서 부모 형제와 함께 사는 대학교 학생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대학교 학생이 가정에 얽매여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 공부가 안되고 대학교에 다닌다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가정 일은 학교 갔다 온 다음에 하고 학생이기에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제의 핵심은 우선 순위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순위를 하나님 먼저, 하나님 나라 일 먼저라고 분명히 정하고 우리가 가정 일 때문에 하나님을 등한히 하고 소홀히 하고 내일로 미루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에 충실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의 일을 위해서 오늘에 충실하십니까? 주의 일을 내일로 미루면 주께 합당치 않습니다.
한번은 톨스토이에게 “선생님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입니까?”라고 제자가 물었습니다. “네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면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또 나에게 있어서 어느 때가 가장 중요한 때입니까?” “네가 나와 함께 말하고 있는 이 때가, 즉 오늘이라고 하는 이 시간이 너에게는 가장 중요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제가 중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내일도 중요합니다만은 오늘이 더 중요합니다. 내일로 미루지 마시고 핑계대지 마시고 오늘에 충실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현재라고 하는 오늘에 충실하게 살고 또 믿고 있는가를 스스로 자문자답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첫째로 훈련을 잘 받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전혀 훈련이 안되어 천방지축으로 노는 쓸모 없는 오합지졸은 아닌가를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나는 믿음의 자세를 바로 가진 그리스도인인가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삐딱한 자세로 30년 믿었다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 하루를 믿어도 믿음의 자세를 바로 해야 합니다. 셋째로 오늘에 충실한 그리스도인인가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제는 충실했으나 오늘에는 엉망이라고 한다면 어제는 의미가 없습니다. 내일을 바라본다고 하면서도 오늘을 엉망으로 살아간다면 미래가 약속되지 않습니다. 항상 현재, 오늘이라고 하는 시간에 충실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
마 8:18-22 / 김영규 목사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18)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19-20)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21-22)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예수님의 추종자들을 가리키는 명칭도 다양합니다. 교인, 신자, 크리스천, 제자, 성도 등등.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도 다양합니다. 소문을 듣고 따르는 사람, 이적을 목격하고 따르는 사람, 병을 고치려고 따라다니는 사람, 무언가 새로운 교훈을 기대하고 따라다니는 사람, 자기를 나타내고 과시하기 위해서 다니는 사람, 논쟁하고 꼬투리를 잡으려고 따라다니는 사람, 정치적 목적에서 따르는 사람, 제자가 되려고 따라다니는 사람 등등.
주님의 추종자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참 신자와 거짓 신자입니다. 참 신자와 거짓 신자는 믿음의 크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봉사나 열심의 정도로 구분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준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을 참 신자라 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거짓 신자입니다. 믿음이 크든지 작든지, 봉사를 많이 하든지 적게 하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사실을 먼저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점이 중요합니다. 오늘 어찌 됐든지 우선 예수님을 내 인생의 구주로 모셔 들이기 바랍니다. 즉,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으세요. 주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풍성한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주님을 따르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첫째는 많은 무리들입니다. 둘째는 서기관입니다. 셋째는 제자입니다. 우리는 매주 귀중한 시간을 내서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과연 나는 어떤 신앙에 속하는지 자신을 잘 점검해 보세요. 그리고 참다운 믿음의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신앙과 상관없이 따르는 무리들
첫 번째 추종자들은 군중들입니다. 신앙과 별 상관없이 몰려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 18절에 보면 “무리”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신약 성경에 200 번도 더 나오는 말입니다. o[clo" 란 단어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고 부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긍정적으로는 “군대”나 “백성”과 같은 집단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 나타난 무리들은 주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뚜렷한 목적이나 의도가 없이 모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충성심이 없습니다. 이해상관에 따라서 이리 저리 몰려다닙니다. 좋으면 따르고 싫으면 떠나갑니다. 때로는 말썽을 피우고 소란을 떠는 집단입니다. 요즘 아이들 말로 하면 아주 “쿨”합니다.
군중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어느 사회학자는 군중은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무리들은 결코 현명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점에서 군중은 어리석습니다. 첫째로, 총체적인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지도자가 없으면 아무데로나 가버립니다. 갈 데 까지 무조건 가다가 망합니다. 모세를 따르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던 무리들이 열흘도 못 되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요즘 세상 여론을 보세요. 어떤 개인이나, 정치 집단, 혹은 사회의 움직임에 대해서 어떤 때는 하늘을 찌를 듯이 좋아하다가 말 한 마디만 잘못하면 하루아침에 곤두박질합니다. 중심의 판단으로 움직이지 않고, 풍조나 조류에 따라 왔다 갔다 합니다. 둘째로, 간사한 지도자에게 쉽게 이용당합니다. 독재자는 언제나 군중을 앞에 내세웁니다. 히틀러의 대중 선동이 그랬고, 스탈린의 군중집회가 그랬고, 모택동의 홍위병이 그랬습니다. 오늘날의 북한 체제도 그렇습니다. 심심하면 군중집회입니다. 군중들은 저수지의 물과 같습니다. 힘은 있으나 사용자에 따라서 선하게도 악하게도 사용됩니다. 셋째로,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입니다. 사소한 일에도 흥분을 잘합니다. 정의냐 불의냐 깊이 생각지 않습니다. 이해상관에 따라 쉽게 요동합니다. 이치를 따지지 않고 힘만 믿고 움직입니다. 군중 속에서는 지성인도 없고, 도덕군자도 없고, 현자도 없습니다. 그것이 무리들입니다.
교회 안의 o[clo" 들도 교회 밖의 군중들과 비슷합니다. 첫째로, 총체적인 방향 감각이 없습니다. 요즘 교인들 가운데 집시 교인들이 많아요. 어느 교회에도 정착하지 않고, 기분에 따라 옮겨 다닙니다. 충성심이 별로 없습니다. 축복만 받고, 책임은 이행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고 교회 생활을 합니다. 둘째로, o[clo" 들은 그릇된 지도자들에게 쉽게 넘어갑니다. 이단 사이비에게 잘 넘어갑니다. 대한민국처럼 단시간에 부흥된 교회도 세계사에 별로 없습니다. 반면에 대한민국처럼 이단 사이비가 부흥하는 나라도 별로 없어요. o[clo" 들에게는 분별력이 별로 없습니다. 남들 가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강남에도 가고 지옥에도 갑니다. 주님을 보고 따르지 않고, 남의 뒤통수만 보고 따라 가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o[clo" 들은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에 좌우됩니다. 말씀을 표준으로 믿지 않고 느낌이나 감정으로 믿어요. 기분이 좋으면 행하고, 기분 나쁘면 아무리 옳은 일도 행하지 않습니다. 설교도 느낌으로 듣고, 기도도 느낌으로 하고, 예배도 느낌으로 참석합니다.
무리들은 숫자는 많지만 감화력이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능력도 없습니다. 배부르게 해 주면 좋아하고, 힘든 일을 맡기면 원망 불평하고 대드는 것이 재주입니다. 교회 안의 o[clo" 들도 그래요. 주님에게나, 사람들에게나 별다른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주님은 이런 무리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시면서 다른 곳으로 떠나가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 가운데 주님이 떠나가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다수가 모인다고 하면 눈 감고 따라갑니다. 숫자에 약합니다. 방향 감각이 없습니다. 현자도 지혜자도 없이 다 우매한 종노릇을 합니다. 감각적이며 맹목적인 열심을 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 진을 칠지라도 나는 안연히 거하리로다. 다수의 무리에 휩쓸려 다니지 말고, 성도의 본분을 지켜 가시기 바랍니다.
이기적 판단으로 따르는 신자들
두 번째 추종자는 서기관입니다. 한 마디로 이기적인 추종자들입니다. 주님을 믿든지 안 믿든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만 믿습니다. 본문에 보면 어떤 서기관이 자신 있게 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끝까지 따라가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o[clo"들에 비하면 이 서기관은 꽤 괜찮은 사람입니다. 주님이 다른 곳으로 가실 때에 감히 따르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서기관은 당시의 서기관들이 대개 주님을 배척한 것에 비하면 상당한 열의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판단은 매우 이기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의 목적이나 계획과는 상관없이 자기 이익만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신자들 중에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상관없이 오직 자기만을 위해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 서기관에게 짤막한 말씀으로 교훈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20절) 얼핏 보면 동문서답 같습니다. 주님을 끝까지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아마 이 서기관의 마음에는 예수님을 따르면 뭔가 특혜를 받고, 특권을 누리리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혹시 주님이 왕이나 대통령이 된다면 자기는 장관 한 자리는 할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열 두 제자들도 한 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주님을 따랐던 야고보나 요한도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목에서 좌우에 앉혀 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이런 서기관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신 겁니다. “나를 따르기 때문에 세상에서 출세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 나는 빈 털털이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자만심이 많습니다. 세상이 다 망해도 내 신앙만은 끄떡없다! 베드로 사도 역시 한 때 그런 자만심을 가졌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주님은 무엇을 챙기러 오신 분이 아니라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재물도, 건강도, 명예도, 권력도, 육체도, 생명까지도 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 자기 소유를 챙기지 않으셨습니다. 실상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천하의 모든 것이 다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복종합니다. 주님은 우주의 소유자시오 주인이십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 소유를 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비천한 모습으로 감추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 주님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려고 자신의 것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석가 벵겔은 이것을 “거룩한 가난”이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인간을 위한 양도요, 둘째는 모든 피조물을 위한 양도입니다. 주님이 주신 축복을 여우나 새들까지 누리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전혀 모르면서 우선 자기 몫을 챙기려는 이 서기관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 힘든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하나님 자녀로서의 모든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혜택만을 바라고 믿는다면 반쪽 믿음입니다. 아직도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야 됩니다. 주님께서 모여드는 무리를 떠나셨지만, 그 무리를 버리시기 위함은 아닙니다. 또 다른 무리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 자신만 복을 받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나 한 사람이 믿을 때에 가족과 집안이 복을 받습니다. 나 하나로 인하여 친구들, 친척들이 복을 받습니다. 나 하나로 인하여 회사 동료들, 사장님까지 복을 받습니다. 나 하나로 인하여 이웃이 복을 받습니다. 그렇게 믿으십니까? 그렇게 믿어야 하고,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도록 하는 것이 내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2-3)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려고 부르신 것은 사실이지만 아브라함 홀로 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복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는 명령입니다. 나만을 위해서 믿지 말고, 이웃을 생각하면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구원 받게 해 주세요. 내가 평안을 누리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누리게 해 주세요. 내가 풍족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풍족하게 해주세요. 나만을 위해서 믿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믿으세요.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게으른 제자들
세 번째 추종자는 제자입니다. “제자”(maqhthv" , disciple)라는 칭호는 특별합니다. 분명히 그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앞선 무리들이나 서기관에게 따르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제자에게는 따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왕에 믿을 바에는 “교인”(church goer)이 되지 말고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제자에게 큰 문제점이 있습니다. 적극적이지 못합니다. 소극적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게으른 신앙입니다. 참 제자가 되려면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게으르다고 해서 인생 전반이 게으르다는 말은 아닙니다. 신앙 문제에만 게으릅니다. 예배드리는 일, 기도하는 일, 하나님 말씀 보는 일, 전도하는 일, 교회 봉사 하는 일 등등, 주님을 섬기는 일에만 게으릅니다.
게으른 자들에게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핑계가 많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을 보세요. 그는 자기 부친을 장사하고 나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부친이 정말 돌아가셨는지? 아니면 돌아가시려고 하는지? 몇 년 후에 돌아가실는지? 확실치 않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사람의 부친이 아직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말은 아직 생존해 계시는 부친이 돌아가셔서 홀가분해지면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단지 핑계일 뿐입니다. 잠언에 보면 게으른 자의 재미난 변명이 나옵니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잠26:13) 사자가 숲속에 있지 왜 길에 있고 거리에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핑계입니다. 세상일에는 별 핑계가 없어요. 오직 신앙에 대한 것에서만 핑계가 많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자고 하면 변명의 구실이 생깁니다. 10년 동안 나타나지 않던 친구가 찾아왔다든지, 갑자기 동창 모임이 있다든지, 등산 낚시회에서 전갈이 옵니다. 다른 공부는 다 열심히 합니다. 오직 성경 공부만 게을러요. 다른 모임은 다 열심히 참석합니다. 기도회만 참석 안 해요. 성경에 보면 복 받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시122:1,9)
둘째로, 좀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잠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잠19:24) 밥그릇에서 입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요. 그래서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 합니다. 그래서 게으른 자의 활동 무대가 어딘지 아십니까? 바로 침상입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잠26:14) 침대는 나의 고향, 침대는 나의 친구, 나는 언제나 침대에 살리라! 믿음은 행함으로 완성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성경을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성경대로 사는 사람들이 되세요.
셋째로, 삶의 우선순위가 뒤죽박죽입니다. 게으르다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항상 뭔가 하기는 합니다. 다만 일의 순서가 틀렸을 뿐입니다.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가리지 못합니다. 주님의 제자이면 주님의 뜻을 우선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꾸로 합니다. 내 일을 먼저 하고 주님의 뜻은 나중에 행합니다. 주님은 이 사람에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불효자가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은 십계명에서 분명히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섬기는 것을 빙자하고 부모에게 할 도리를 하지 않은 자는 악한 자라고 하셨습니다.(마가복음7장) 사도 바울도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을 장사시키라는 말은 신앙 없는 사람들, 즉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시신을 맡기라는 뜻입니다. 부친 장사는 시급한 일은 아니니 일단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배경으로 보아서 이 제자에게는 부친을 부양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제자가 부친 임종을 핑계한 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을 따르는 일을 부차적이며 가벼운 일로 여긴 결과입니다.
여기서 강조된 것은 우선순위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을 제2차적인 업무로 보지 말고 최우선의 과제로 알고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에게 신앙은 몇 번째 서열에 놓여 있습니까? 회사일, 가정 일, 취미생활 다음의 여가 선용 정도로 여기는 분은 없습니까? 날씨 좋으면 소풍 가고, 날 궂어서 오갈 데 없으면 교회입니까? 주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신앙은 인생의 본분입니다. 최우선의 과제요 제일의 업무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는 일은 생명을 얻는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선 행하시고자 하신 것은 생명 구원입니다. 지옥에 떨어질 사람들을 당장 구하시는 일입니다. 사람마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릅니다. 당장 죽으면 지옥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야 말로 시급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생명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을 살리는 소망적인 일이 있고, 생명과 무관한 죽은 일들이 있습니다. 장례식이란 죽음의 일입니다. 별 소망이 없는 일입니다. 그 일에 매달릴 시간에 차라리 생명을 살려내는 일을 해야 합니다. 세상을 보면 항상 떠들썩합니다. 이벤트 행사가 많아요. 그런데 그 많은 일들 가운데 정말 영혼을 살리고, 영생을 주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데모, 시위, 정치적 집회들, 술 파티, 연예 행사들이 다 그렇습니다. 영혼을 살리는 일보다 더 급한 과제들은 아닙니다.
참 제자라면 장례식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장례식은 죽음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음의 일에 매이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이번 주에 설날 연휴가 끼어 있습니다. 설날의 중심은 전통적인 제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효도의 일환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효도법은 성경적인 효도법과 많이 다릅니다. 성경의 효도법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살아 계신 부모님, 살아 계신 친척, 살아 계신 어른들에게 효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제사법은 주로 죽은 조상들을 위주로 합니다. 돌아가신 부모님, 몇 대조 조상님들! 살아 계신 부모님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굴도 모르는 몇 대조 조상을 얼마나 공경하는 마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산 사람들도 제대로 섬기지 않으면서 죽은 사람들에게 매달리는 것은 방법상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위주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망의 일에 매달리지 말아야 될 이유가 더 있습니다. 우선, 죽은 일에 매달릴 시간적인 여유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풋볼 선수가 골수암의 진단을 받고 내 뱉은 탄식의 첫 마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렇게 일찍 내 인생의 종말이 올 줄 알았다면....” 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길지 않습니다. 언제 종말이 올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루라도 빨리 생명 구원에 매달려야 합니다. 가족, 친구, 친척, 이웃 빨리 구원하세요. 다음으로, 죽은 일에 매달리는 것 자체가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시체를 밤에까지 놔두지 않습니다. 특히 안식일에는 세상없는 일이 있어도 죽음과 관련된 일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오, 생명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매달리는 것은 밝은 일이 아니며 우울하고 어두운 일이며, 소망이 없는 일입니다. 더 유익한 일들을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빼앗아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망의 일보다는 생명의 일에 매달려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가되 군중들처럼 조류에 따라 몰려다니지 마십시오. 주님을 따르되 서기관처럼 나만 아는 이기심에서 따르지 마세요. 주님을 따르되 어떤 제자처럼 게으르게 미적미적 핑계 대면서, 죽음의 일에 매달려 따르지 마세요. 신앙에는 적극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인생의 최우선 과제로 여기고 만사를 제쳐놓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 삶은 결코 길지 않습니다. 될 수만 있다면 시간 낭비 하지 말고 생명의 일에 앞장서서 나가는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어떤 제자입니까?
마 8:18-22 / 이정선 목사
인기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볼까요? 여러분은 각자 자신이 얼마나 인기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 가운데서 인기투표를 하면 몇 점이나 받을 것 같습니까? 인기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기를 추구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생명과도 같습니다. 가령 연예인들은 인기를 먹고 산다고 할 만큼 인기에 웃고 인기에 웁니다. 정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들로부터 인기가 없으면 하고 싶은 일을 소신 있게 추진할 수도 없지만, 인기가 많으면 어떤 일이라도 별로 방해를 받지 않고 밀고 나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기는 권력이나 자기 정당성, 혹은 돈의 근거가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는 인기를 얻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아무나 많은 인기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대중에게 어필하는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배용준은 잘 생긴 얼굴로 많은 인기를 얻었고, 박찬호는 야구공 하나로 인기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이처럼 군중을 만족시켜주는 재주가 하나라도 있어야 인기를 얻을 수 있는데,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은 하루 만에 폭발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병이든지 고치시는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호수를 건너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이 군중은 한없는 존경심과 경외심을 가지고 예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말 한 마디면 이들은 충성스러운 군대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나이가 갓 서른을 넘긴 청년으로서 이러한 인기를 누린다는 것은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그 인기를 피해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기로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왕에게는 백성이 있어야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몰려드는 군중을 피해서 떠나셨다는 것이 일견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왜 군중이 몰려들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 예수님이 병 고치시는 것을 보고 몰려왔습니다. 분명한 것은 병 고치는 것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 고치는 능력으로 인한 인기는 전혀 예수께서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능력을 나타내고 놀라운 퍼포먼스로 사람들을 사로잡아 구원을 베풀라는 것은 마귀의 시험이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하나도 다치지 않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놀래켜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받아 그들을 구원하라고 마귀는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놓는 것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것은 자칫 마귀의 시험에 휘말리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께서 서둘러 그곳을 떠나려고 하시자 사람들은 분명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한 서기관이 나와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선생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라가겠습니다.” 혜성처럼 나타나 놀라운 가르침과 능력을 보여주신 분이 다른 곳으로 떠난다니까 섭섭해서 따라가겠다고 한 것일까요? 아니면 짧은 시간이지만 진정으로 감화를 받고 제자가 되기로 작정을 한 것일까요?
서기관은 원래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인쇄술이 없던 시대에 중요한 기록을 보존하고 제작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펜으로 기록해야 했습니다. 성경이 전수된 것도 모두 이러한 서기관들의 필사에 의한 것인데, 글씨를 예쁘게 잘 쓴다고 서기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학문을 익힌 권위 있는 학자들이 이 일을 합니다. 그러니까 서기관은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백성의 선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서 서기관들은 대체로 예수의 대적자들로 나옵니다. 이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내용과 예수께서 선포하시고 시행하시는 것들이 많은 면에서 충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서기관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한 동기가 무엇인지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어지는 예수님의 반응에서 부정적인 측면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그는 제자가 되기에 아직 적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새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제자들을 불러모으시던 예수님의 입장에서 서기관과 같은 유력한 사람을 제자로 둔다면 든든한 배경이 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이 사람을 돌려보내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구나.”
예수님의 이 말은 ‘너 지금 내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이 서기관은 무슨 병이든지 간단히 고쳐버리는 예수님의 화려한 겉모습을 보고 제자가 되기로 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만 따라다니면 모든 존경과 인기를 함께 누릴 수 있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탁월한 성경해석까지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하며, 심지어는 많은 고통까지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진 이 서기관의 성급한 결단은 예수님에 의해 보류되었습니다.
빨리 끓는 냄비는 빨리 식습니다. 아직 믿음이 깊지 못한 사람이 큰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 가장 열심 있게 주를 섬기며 헌신하는 경우가 있는데, 늘 그렇지는 않지만 다시 실망하고 신앙의 슬럼프에 빠지는 것을 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회의 감독을 세울 때 새로 입교한 사람은 곤란하다고 충고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펄펄 끓었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목사의 입장에서 교회의 일꾼들을 찾을 때 가장 적합하지 않게 생각되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은혜를 받고 성령이 충만할 때는 무엇이라도 하겠다고 달려듭니다. 그것을 믿고 중요한 일을 맡겼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싸늘하게 식어가지고 자기가 맡은 책임도 나 몰라라 하고 나자빠집니다. 정말 난감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은 신앙의 조울증 환자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조울증은 감정의 기복이 매우 심한 상태입니다. 영어로는 bipolar disorder라고 합니다. 극과 극을 왔다갔다 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이 이처럼 기복이 심하면 믿음이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성급하기 때문에 은혜도 잘 받고 삐치기도 잘 하는 거지요. 조금만 섭섭해도 교회 안 나와버리고...
예수님은 그런 사람에게 제자가 된다는 것은 때로는 추위도 겪어야 하고, 어떤 때는 손가락질도 당해야 하는 고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신실하고 믿음직한 일꾼이 되려면 자기 성질대로 말하는 것도 참아야 하고, 마음에 안 드는 것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지요.
이처럼 너무 성급해서 좋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신중하거나 또는 소극적이고 미온적인 자세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자 중의 하나가 말하기를,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만, 먼저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루고 오게 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제자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당장 장례식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연로하신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겠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자식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만일 그런 경우라면 예수님께서 흔쾌히 허락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제자에게도 예수님은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예수님이 가정의 윤리를 부인하시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얼마나 강조하셨습니까? 이 말씀에서의 포인트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일의 시급성과 우선성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하나님나라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초월성은 인륜이나 도덕과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께서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족 간의 사랑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우선성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우 합당한 일을 핑계로 하나님나라에 충성하기를 주저하는 수가 많습니다.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겠다는 것, 얼마나 합당한 핑계입니까?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겠다는 것, 얼마나 타당한 핑계입니까? 그러나 그런 일들에 우선순위를 두느라고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일이 뒤로 밀쳐진다면, 그것은 부름받은 제자의 삶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는 것, 중요하지만 그것은 죽은 자들, 즉 하나님나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해도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뒤로 미루고 기어이 죽은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에 가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돈도 벌어야지요. 그렇지만 그 돈 버는 일이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일보다 먼저 할 일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제자의 삶을 살고 있는지 한번 돌이켜봅시다.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이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몇 번째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보세요. 또 얼마나 성실하고 꾸준히 주님의 일을 수종들고 있는지, 내 감정의 기복에 따라서 신앙생활도 들쑥날쑥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세요.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셨습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기분에 따라 우리를 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셨다면 우리 가운데 살아남을 사람이 아무도 없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도 기분에 따라 하나님을 대하지 말아야지요.
예수께서 베드로나 요한을 부르신 것처럼,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고 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가 주님 뒤를 잘 따라오고 있는지 뒤돌아보실 때, 그 주님은 어떤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되실 것 같습니까? 정말 믿음직하고 신실한 제자가 뒤따르고 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는지, 하나님의 일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사는 그리스도인입니까? 바로 그것이 주님이 보시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되기를 소원하고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교육
마 8:18-22 / 박세갑 목사
산에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주님의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주님께서 그 놀라운 가르침을 마치셨을 때, 성경은 (마7;28~29)에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침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군중들이 그를 따랐고, 주님은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가버나움은 주님께서 초기 사역을 하신 곳입니다. 이방인들이 많이 살았고 특히 로마의 군대가 상주하는 곳으로 이방 문화가 많이 들어와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받기도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그 성읍으로 돌아오시며 문둥병자를 치료 하셨고 백부장의 하인을 말씀만으로 고치시기도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집에서 그의 장모를 일으키셨고 저물어 어두울 때에는 많은 무리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무리는 주님께서 행하신 모두를 알고 있었습니다. 날이 바뀌고, 직접 보지 못했더라도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통하여 자세히 전해 들은 사람들 까지 무리는 점점 더 많아져 갔습니다. 이때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해하기에 난해한 행동입니다. 그 때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병 등으로 마음이 모두 주님께로 향하고 있는 때입니다. 이들을 선동하여 주님이 뜻하시고 이루려하시는 그 일을 위한 행진을 시작하기에 모든 여건이 무르익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주님은 그들을 떠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우리가 생각하고 예측하는 것같이 하지 않으실 것을 나타내심입니다. 사람들이 가지는 물질적인 가치에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으며 주님의 사역을 조금 더 세심하게 살피면 주님께서 자신의 이적의 가치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심을 발견합니다. 주님께 있어서 이적의 가치는 그것 자체의 목적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14;8~11)을 읽어 보면 잘 나타납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내가 전하는 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행하는 그 일로 인하여 나를 믿으라’ 입니다. 행하시는 그 이적은 결국 이차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납득시키기 위하여 이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또 다른 이적을 원하는데 그들을 위하여 이적을 베풀지 않으십니다. 그리고는 배를 타시고 그들을 떠나가셨습니다.
주님께서 배를 향하여 나아가실 때에 한 서기관이 주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그런데 주님의 답변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중의 한 사람도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했습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도 난해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두 사람이 주님을 따라 갔는지 안 갔는지는 성경이 침묵하기 때문에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주님과의 선문답 같은 대화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먼저 서기관의 경우입니다. 그는 당시의 교양 있는 지도층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무리를 떠나 배를 향하여 가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을 헤치고 주님께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이것은 충동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 속에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열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이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제까지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으셨던 비밀인 자신이 집도 절도 없는 가난한 떠돌이라는 사실을 그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가르침에 매료되고, 행하시는 모든 이적에 감동한 서기관을 바라보시며 “왜 나를 따르려느냐? 인자는 이 세상에 집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리고 네가 나를 따르려면 너도 나의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해야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되신 주님께서 자신은 현세의 상황에서 아무 집도 한 칸 가질 수 없음을 말씀하심으로 자신의 십자가와 자신을 따르려는 그 사람의 십자가를 계시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이 져야하는 십자가였습니다. ‘네가 나를 따르려면 모든 것을 잃어야 한다. 나와 같은 떠돌이가 되어야 한다. 너를 묶어 속박하는 모든 세상의 끈을 끊어버려야 한다. 내가 이루고 나아가려고 하는 그 나라에 이르러 안주할 때까지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누가는 병행 구절인 (눅9;59)에서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했다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마태가 이 사람을 “제자”라고 부르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는 오래 동안 주님께 배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주님은 이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봉사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그에게 주님을 따르는 봉사자의 길을 가도록 요구하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대답입니다.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그의 아버지는 지금 죽음이 임박한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버려두고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모시고 살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면 주님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대단히 아름답고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그 부르심이 만일 예수님의 부르심이 아니고 세상의 어떤 부름이라면 그것은 옳은 판단입니다. 그러나 이 부르심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항상 세상의 도덕을 뛰어 넘는 최상의 주장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주장은 언제나 절대적입니다. 주님은 “나보다 부모를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의 경우에도 이 원칙을 적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입니다. 이 상황을 더 이해하기 쉽게 말씀하신 구절이 (눅14;25~27)에 나옵니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부모, 처자와 형제자매까지 미워하라는 것은 예수를 믿는 신앙이 반인륜적이고 윤리와 도덕을 거스르는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윤리와 도덕이 인간 사회의 높은 질서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자기를 치장하고 자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동양의 대표적 윤리를 보면 부모님께 효도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것을 근본으로 합니다. 그러나 이런 충효도 결국은 자신의 자존심과 우월감을 만족시키고 자랑하는 것을 내용으로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기를 나타내고 자랑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상대를 위하고 그래서 희생하고 사랑하는 것을 내용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된 것은 내가 남과 다르고 잘나서 세상적인 어떤 보상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모르면 교회 안에 자기자랑과 치장이 가득해집니다.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을 심판하러 가실 때 아브라함과 만나시고 그의 기도를 들으셔서 그곳에 의인 열이 있으면 심판하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롯은 의인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알고,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극심한 범죄의 세상에 살며 신앙 양심에 고통 받으며 거룩하고 의롭게 살지만 세상은 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가 천사들을 영접하여 자기 집에 있을 때 거기 사는 사람들은 그들을 해치려고 내어놓으라고 행패를 부립니다. 롯이 의인이고 그 땅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지만 그들은 롯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시하고 해치려 합니다. 그곳에는 롯과 같은 사람이 열이 있어야 심판을 면하고 복을 받습니다. 결국 그들은 롯의 가치를 모릅니다.
세상 앞에 우리들 신자의 위치가 이와 같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먹던 개떡 같이 취급합니다. 언제나 무시하고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로 인하여 세상이 복을 받는 존재요, 우리로 인하여 하나님이 심판을 참으시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는 길이 힘들고 고달픕니다. 세상의 보상은 없습니다. 이것을 모르기에 내가 믿는 보상이 무엇인가? 불평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상황을 정리해 봅시다. 제가 앞서 말한 서기관의 말을 충동적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한 것은 분명히 충동적이지만 저는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이 모두 그와 같은 감정의 세례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고 예수를 믿는 것이 세상의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되어야 합니다. 부모를 모시려는 제자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륜과 윤리 도덕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음을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눅14;33~35)에서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보상을 끊지 못하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요 세상 사람도 아닌 이상한 사람일 뿐입니다. 소금이라는데 짜지 않은 소금입니다. 이상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사람이요 예수님의 사랑받는 온사랑 교회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자가 되려면 대가를 지불하라!
마 8:18-22 / 전순기 목사
오늘 본문 말씀은 ‘제자도’라는 상당히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신앙생활을 시작하신 지 얼마 안 되시는 성도들에게는 마음에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와는 너무 거리가 멀어! 너무 어려워!’라고 마음을 닫아 버리지 말고, 내가 앞으로 성장해 가야 할 신앙의 목표지점이 어디인지를 확인하는 마음으로 들으시고 그렇게 되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환경이 좋은 해외에 살던 교포들이 조국을 찾아와서 인천공항에 내리면, 내리자마자 숨이 탁탁 막히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캐나다에 사는 교포가 마중 나온 사람에게 “좁은 땅 덩어리에서 이 많은 사람들이 뭘 해 먹고 사나?”라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마중 나온 사람이 대답하는 말이 “사기 쳐 먹고 살지”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스개로 한 말이지만, 그 말에는 우리의 아픈 현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땅에 가짜들이 너무 많고 사기 사건이 너무 많이 일어납니다. 쌀 직불금 불법 수령 문제로 나라 전체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가난한 농부들, 소작농들에게 돌아가야 할 보조금이 부자들의 주머니로, 심지어 공무원들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비상식적고 비양심적인 일이 수년 동안 벌어졌습니다. 수천억 원이 허투루 쓰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까? 오직 물질만능의 가치관, 외형 중심의 가치관이 온 나라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한 때는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리며 정신적인 가치관이 이끌어 가던 이 나라였는데, 이제는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져 짓밟힘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대한민국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까?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겠으나, 반만년 역사 속에서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하던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려고, 해방 이후의 현대사 60여 년 동안에, 온 나라가 오직 경제 발전만을 추구해 왔던 탓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경제 몸집은 세계 11위까지 오를 만큼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정신세계가 발달하지 못한 탓에 우리 사회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런 폐단이 일반 사회에만 나타나는 게 아니고 한국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는 데에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 동안 교회가 세상과 발맞추어 외형적인 성장과 부흥을 추구하며 정신없이 달려왔습니다. 교회가 하나님께 구한 복이나 세상 사람들이 우상에게 구한 복이나 다를 게 별로 없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영향력은 상실되고 만 것입니다.
지금 한국의 개신교회는 이제껏 격어 보지 못했던 최고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요즘처럼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어 본 적은 없었습니다. 핍박을 받는 것과 욕을 먹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교회는 핍박 받을 때는 힘들기는 하지만 오히려 순수해지고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욕을 먹기 시작하면 교회는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요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릅니다. 세상은 더 이상 기독교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목회자나 성도들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현실을 바라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경고하신 주님의 말씀이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마5:13).
어떻게 하면 다시 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다함으로 존경과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본문에는 주님을 따르는 일에 실패한 두 사람의 제자 지망생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실패한 두 제자 지망생을 거울삼아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볼 수 있고, 두 사람에게 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에서 오늘 우리들을 향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에게 주신 말씀에서 배워보겠습니다.
세속적, 이기적인 욕심을 버려야!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이적기사를 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았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점점 불어나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명하여 갈릴리 호수 건너편 마을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피신하시는 겁니다. 왜 주님은 무리들을 피하려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 기사 때문에 주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예수님께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배우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진실하게 따르는 제자가 되려고 온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목적을 가지고 찾아 온 것입니다. 이들의 삶의 목적은 자신의 행복과 만족입니다. 예수님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다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얻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주님을 찾고 따르는 사람들은, 주님을 따르는 동기와 목적을 근본적으로 고치기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나가는 일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은 이런 이들도 사랑하시기는 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욕심을 계속해서 채워주실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무리들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한 서기관도 그런 부류의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서기관이라는 직분은 성경을 필사하고 또 연구하여 가르치는 사람들로서, 유대 사회에서는 지식 계층에 속한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서기관들 중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한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세속적인 야심을 가지고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다면, 지지기반이 약했던 서기관 계층에서 자신을 따르겠다고 나선 이 사람을 크게 환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가 따르겠다고 하자, 20절에서 동문서답을 하는 것과 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서기관의 마음속에 있는 동기를 읽으시고 거기에 맞는 대답을 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서기관은 지금 방금 말씀드린 무리들과 같이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의 그런 속마음을 읽으시고 20절의 말씀, 곧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뜻의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따르면 성공하고 출세할 줄 아는 모양인데, 나는 오늘 밤 당장 어디에서 잠자리를 얻어야 할지도 모르는 가난한 사람이다. 진정 네가 나를 따르려고 한다면, 나처럼 고생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서기관은 ‘안 되겠다.’ 싶어서 그냥 돌아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믿고 따르는 동기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본문에 나오는 무리들이나, 이 서기관과 같지는 않습니까? 우리 중에 아무도 100% 순수한 동기로만 주님을 따른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친히 제자로 선택하시고 불러 삼년 반 동안이나 교육과 훈련을 시키신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속적인 야심을 다 버리지 못했었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야 말할 게 뭐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주님을 찾아 나오는 무리들에게, 처음에는 한두 번 기적을 베풀어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어 온전케 해 주십니다. 그렇게 해 주시는 이유는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주님의 의도와는 달리, 여전히 자신의 소원 성취에만 관심을 두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기적을 구하고, 영원한 천국에는 관심이 없고,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주님을 찾을 때에, 주님은 더 이상 표적을 베풀어 주시지 않았고, 그런 세속적 욕망을 채우려고 자신을 찾는 자들을 피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시면 상당히 부담을 느끼게 되는 성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 나는 아직도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주님께서 나를 피하시겠구나!”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본문 말씀을 설교하고자 하는 의도는 여러분들을 낙심케 하고 좌절케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로 하여금 분발하여 성장과 성숙에로 도전케 하려는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는 여러 종류의 신자가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기 같은 신자”가 있습니다. 아기들은 예쁘기는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볼 때 지극히 이기적입니다. 자기 밖에는 모릅니다. 엄마가 피곤한지 고단한지는 전혀 안중에 없습니다. 배고프면 젖 달라고 울고 기저귀가 젖으면 기저귀를 갈아내라고 웁니다. 누워있기 싫으면 엄마야 피곤하건 말건 업고 안으라고 울어댑니다. 신자들 중에는 이런 아기 같은 신자들(초신자들)이 있습니다. 아기 울음소리가 요란한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듯이, 교회에도 영적인 신생아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신자들 중에는 “어린아이 같은 신자”들도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놀이입니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도 하루 종일 놉니다. 노는 아이들은 행복하고, 아이들이 행복하게 노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모든 사람이 다 아이가 되어 놀기만 한다면 그것은 큰 일일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아이처럼 교회 안에서 노는 것만 좋아합니다.
어린아이 같은 신자는 이제 초신자 수준은 넘어서서 교회 생활에 제법 익숙해진 성도들에 해당할 것입니다. 교회가 즐거운 곳이 되어야 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놀기만 하고 일할 생각,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는 어린아이는 부모의 근심거리가 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어린아이에 해당하는 신자들은 이제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는 일에도 열심을 내야 합니다.
성도들 중에는 “환자 같은 신자들”도 있습니다. 환자들은 늘 치료를 받아야 하고, 위로를 받아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환자가 없으면 의원이 필요 없다는 말씀을 하심으로 자신의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가 세상에서 병들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서 지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와서 위로를 받고 치료를 받는 병원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병원으로만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상처가 치료되지 않아서 마음이 아픈 성도들은 열심히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면서, 기도하면서 은혜를 받아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치료 받고 건강해졌으면 이제 나보다 더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신령한 기쁨과 만족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그의 신앙과 인격이 성숙해져 갈 것입니다.
또한 마음의 상처는 공동체 안에서 그것을 나누고 공감해 주고 격려해 줌으로 치료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상처를 가리고 괜찮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조심스럽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는 아픔과 상처를 드러내는 성도를 따뜻한 마음으로 공감하며 받아주어야 합니다. 힘들게 드러낸 아픔과 상처를 가십거리로 삼아서는 결코 안됩니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또 신자들 중에는 “프로선수와 같은 신자”들도 있고, 전선에 나가 용감하게 적을 무찌르는 “전투병과 같은 신자”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일당백의 “특전대원과 같은 신자”도 있습니다. 이런 성도들은 신실한 주님의 제자요 좋은 일군들입니다.
우리 안양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병원 같은 교회? 아니면 유치원 같은 교회?” 물론 교회는 유치원과 같은 역할도 감당하고, 병원과 같은 역할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유치원으로, 병원으로서의 기능만 감당한다면, 그런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니며, 빛과 소금의 사명을 결코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안양 교회 모든 성도들의 신앙과 인격이 날로 성장하고 성숙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정직하게 자신을 평가하여 자신의 신앙의 수준을 파악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서 도우심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제게는 아직도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이 너무 많은 것이 발견됩니다. 헛된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게 해 주십시오. 나를 버리고 이웃을 섬기는 삶을 배우겠습니다. 잘 안되더라도 연습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나아갈 때에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화) 미국의 남북 전쟁 당시에 어느 무명의 병사가 드린 기도라고 알려진 기도문이 남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이 기도문은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에 빠져 있는 우리를 주님께서 어떻게 가르치시고 치유하시는 지를 잘 보여줍니다.
“해낼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주님은 내게 연약함을 주어 겸손히 복종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더 훌륭한 일을 하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했더니, 병약함을 주어 보다 선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행복해지도록 부유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빈곤함에 처해 지혜로워지도록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칭송을 받도록 권력을 달라고 기도했더니, 연약함을 주어 하나님의 필요를 느끼게 하셨습니다. 인생을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달라고 했더니, 생명을 주어 있는 것을 즐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내가 요구한 것은 아무 것도 얻지 못했지만, 내가 바라던 모든 것이 이루어 졌습니다. 내 자신의 보잘것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언의 내 기도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 중에 나는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을 이기고, 자신을 희생하며 섬기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그렇게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더 적극적으로 섬기는 일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점차 세상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다시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어야!
두 번째 제자 지망생에게 주신 말씀에서 배워보겠습니다. 그는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지망생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고, 주님은 왜 이렇게 대답하시는 겁니까? 지금 이 사람은 방금 부친이 돌아가셔서 당장 장례를 치러야 할 상황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지만, 돌아가시고 나면, 그 때부터 주님을 따르겠다는 겁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주님 먼저”가 아니고 “나로 먼저”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삶의 우선순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 아버지 장례를 핑계 삼아 지금 당장 주님을 따르며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있습니다. 필리핀 속담에 “하고 싶은 일은 방법이 보이고, 하기 싫은 일은 핑계가 보인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 사람처럼 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일보다 우선적이고 시급하게 여겨지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업이 성공한 뒤에 하겠습니다.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건강이 회복된 뒤에 하겠습니다.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이들 대학에 합격한 뒤에 하겠습니다.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라고 핑계를 댄 적이 많을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러면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장례 치르는 일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너는 핑계 대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아버지 장례 치르는 일을 맡기고, 나를 따르는 일에 전념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랍비들은 토라를 배우는 학생은 비록 부모의 장례가 나더라도, 토라 배우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된다고 흔히 가르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은 이들에게 과한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나를 위해서 죽기까지 하신 나의 구주와 주님이시라면, 내게서 절대적인 신앙과 사랑과 순종과 헌신을 받으셔야 마땅합니다. 결코 “내가 먼저”일 수가 없고, 어떤 경우라도 “주님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 주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서 가장 소중한 분으로 여김 받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사랑해야 할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어야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질서 있게 돌아가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우리의 삶에서도 진정한 행복과 만족의 열매를 맛보게 됩니다. 주님이 우선순위를 차지하지 못하면, 첫 단추를 잘 못 꿴 사람처럼,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될 것 같으면서도 자꾸 틀어져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예화) 이런 의미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강사가 커다란 유리 항아리를 탁자 위에 놓고, 그 안에 큰 돌 몇 개를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청중에게 “항아리가 가득 찼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즉시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강사는 다시 유리 항아리 안에 자갈을 넣어 입구까지 가득 채우고는 다시 묻습니다. “이제 다 찼습니까?” 이번에도 청중들은 다 찼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강사는 이번에는 모래를 항아리에 부어 아구까지 채웁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제는 정말 가득 찼지요?” 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다시 강사가 항아리에 물을 붓자 상당량의 물이 더 들어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놀랍니다. “드디어 유리 항아리가 큰 돌과 자갈과 모래와 물로 가득 찼습니다. 지금 제가 뭘 말하려는 것일까요?” 라고 강사가 묻습니다.
그러면 청중들의 반응은 언제나 똑같이 나온다고 합니다. “항상 뭔가를 더 집어넣을 수 있다는 거지요 가득 차 있을 때에도 얼마든지 더 쑤셔 넣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면, 강사는 정중히 고개를 저으면서, “아닙니다. 이 실물교육의 요지는 큰 돌은 맨 처음에 넣지 않으면 영영 넣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라고 가르칩니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삶의 우선순위가 얼마나 중요하냐? 가장 중요한 일부터 하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에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지 않으면 주님은 항상 뒤로 밀려나고야 맙니다. 할 일이 없고, 시간이 남아서 교회 나오고, 물질이 남아서 헌금하고, 건강과 체력이 남아서 봉사하게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잘 해 보고 싶은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이라는 삼대 중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문제가 없습니다. 모든 일이 주님 안에서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도를 따라가는 자가 받는 상급
제자도를 순종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고 고생스럽기만 할 것처럼 생각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도를 따라가는 자는 경험해 본 자만이 아는 영육간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막10:29-31).
주님께 절대 믿음, 절대 사랑, 절대 순종, 절대 헌신을 바치는 제자는 비록 핍박을 받기는 하지만, 현세에서도 자기가 버린 것들을 다시 백배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세에 가면 영생을 확실하게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예화) 호텔 중개인으로 일하던 오르브 크리거라는 사람은 워싱턴 주 스포케인 시를 내려다보는 전나무 숲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홀리데이 인 호텔을 매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홀리데이 인 호텔의 술을 파는 바는 한 달 평균 1만 달러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는데, 진실한 신자였던 오르브는 이 바를 운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호텔 지배인은 그렇게 되면 손님들이 곧장 다른 경쟁업소로 가 버릴 것이라고 주장하며 호텔의 수지를 맞출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통계자료까지 제시했습니다.
오르브는 정중하게 그 의견을 들었지만 결국 바의 문을 닫았습니다. 오르브는 자기 계획을 계속 밀고 나갔습니다. 호텔 로비를 개조하고 바 대신 푸른 식물로 둘러싸인 안락한 커피숍을 경영했습니다. 이 호텔업을 시작한 지 5년 만에 음식 매상고는 20퍼센트, 객실 매상고는 30퍼센트가 증가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만약에 술을 파는 바까지 열었다면, 이 호텔은 정말 돈을 찍어 내는 기계가 되었을 거라고 말하며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 오르브는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이란 그 신앙대로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며, 순종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이익에 배치될 때에도 순종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은 두 사람의 실패한 제자 지망생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신앙생활의 중요한 원리를 교훈하고 계십니다. 처음 주님 앞에 올 때는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목적으로 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번이라도 주님의 은혜와 권능을 경험하고, 주님의 사랑을 맛보았다면, 이제는 자기가 주인 되는 삶을 버리고,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대접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이타적인 삶을 우선 한 가지만이라도 실천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하지 않던 일을 한 가지 더 해 보십시오. 단 한걸음도 양보하지 않았다면, 이제부터 한 발자국만 양보해 보십시오.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십시오. 항상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천하는 일인가?” 의 관점에서 모든 일을 선택하고 결정하십시오. 이렇게 살아갈 때에 우리는 진실한 신자로서의 삶을 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땅에 떨어져 짓밟힘을 당하는 소금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식탁에 올라 귀하게 대접을 받는 소금이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이 땅의 교회들은 다시 부흥하고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부디,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욕심을 넘어서고,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심으로 진실한 신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당부합니다.
우리가 죽겠나이다
마 8:18-27 / 김춘섭 목사
죽는 소식도 들려오고 죽게된 형편에 놓인 사람들도 많습니다. 살아있지만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소리도 쉽게 나오고 있습니다. 아이들마저 "그러면 죽을 테야"하고 엄포를 놓습니다.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도 죽겠다는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듣습니까?
믿는 이들의 입에서도 쉽게 이 소리가 나옵니다. 신앙인들은 이 소리를 안됩니까? 너무 힘이 드니까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까? 성경에도 죽겠다는 소리를 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냥을 다녀온 에서는 동생 야곱에게 말합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창 25:32)" 광야에서 고난을 당하던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에게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다 망하게 되었나이다(민 17:12)" 하며 부르짖습니다. 시편 시인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니(시 88:5)"하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다녔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죽겠다'는 소리를 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랬으니 우리도 '죽겠다'는 말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말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정말 죽겠다는 표현은 예수님처럼 죽음 직전에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풍랑 만난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시는 도중 갑자기 파도가 일어나며 물결이 요동치며 배에 덮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다급해진 제자들은 주무시는 주님을 깨웠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힘껏 외쳤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파도요, 요동치는 배 안에서 어느 누구라도 '죽겠다'는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일어나시어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해 주셨습니다.
1. 제자들이 좇았더니
오늘 본문은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하는 자들에게 매우 큰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죽게 되었다"고 소리치는데, 과장을 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당하는 일입니다. 어느 누가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풍랑이 심하게 치기 때문에 두려워져서 죽게 되었다고 소리치고 있지만, 죽게된 더 근본적인 원인 곧 풍랑을 만난 원인은 한 마디로 예수님의 뒤를 좇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을 좇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면 풍랑을 만날 이유도 없고 괴로워할 까닭도 없었는데, 오직 하나 예수님의 뒤를 좇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죽게 된 것입니다.
23-24절 말씀은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하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좇았다'는 단어는 바로 앞의 이야기에서 계속되는 표현입니다.
예수께서 가시는데 한 서기관이 나와서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19절)"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20절)"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제자는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21절)" 했더니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22절)"고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예수를 좇는 길'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대단한 각오로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좇은 것입니다. 그런 각오를 가지고 좇았고, 그러다가 만난 것이 풍랑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을 때는 아무 일 없었는데, 예수님을 따르다가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차라리 가만 히 있었으면 괜찮았겠는데 어찌하여 따라왔던가?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까? 교회 안나갔으면 되었을 것을 어찌하여 교회 다니다가 그렇게 되었느냐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주님 따르면 새로운 일들이 있어져야 하지 않습니까? 선한 목자는 당연히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뒤를 따랐는데 이 엄청난 풍랑이 웬 말입니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엄청난 결단 속에서 따랐는데 이 어쩐 일이란 말씀입니까?
2.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래서 제자들의 입에서는 저절로 '죽겠다'는 소리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따르다가 죽을 지경이 되어서 소리 치는데 주님은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무서워하는 것은 믿음이 적기 때문이라는 해석까지 하셨습니다. 죽게 된 지경에 이르러 무서워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인데,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의 풍랑을 만나게 되면, 그 원인을 깊이 생각도 해봐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원인을 찾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더 열심히 하다가 환난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는 자꾸 그 원인을 찾고 이유를 물을 것이 아니라, 잔잔하게 해 주시는 주님의 능력만을 믿을 일입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에는 '죽겠다'고 소리치는 자들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병들어 죽게 된 자, 죽은 아들로 인하여 상심하여 죽게 된 자. 간음하다 그 자리에서 끌려나와 졸에 맞아 죽게 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죽겠다'는 말을 거부하셨습니다.
지난 주간에 고 채희동 목사님 식구들이 다녀갔습니다. 지방에서 열리는 성가대회에 가기 위해 집에서 나와 큰길로 진입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오던 대형 유조차가 다른 차 급정거를 하면서 중앙선을 넘어서 정면을 바로 친 것입니다. 이제 서른이 된 아내와 다섯 살과 세 살의 남매를 두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만나 목사의 아내가 되었고, 남매를 낳아서 살아가던 한 여인에게는 정말 죽겠다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오늘 주보에 나타난 세 식구의 사진을 보십시오. 저들은 죽게 된 상황을 멀리 떠나보냈습니다. 엄마는 남편의 뒤를 이어 목회를 시작하면서 맑은 미소로 두 아이에게 힘찬 삶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물었습니다. "윤기야 아빠 어디 계시냐?" "아빠는 하늘에 계셔요. 그리고 내 맘에도 계시고요" 이제 말을 배우는 율미가 화답합니다. "나한테는 안 물어? 아기한테는 안 물어?"
우리는 풍랑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풍랑을 잔잔하게 해주시고 새롭게 삶을 살아야 한다는 주님의 요구와 그 삶을 향하여 용기를 주시며 함께 하시는 주님은 알 수 있습니다.
3.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주님은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기 전에 '죽겠다'고 외치는 제자들을 먼저 책망하셨습니다. 풍랑이 잔잔해지는 것보다 믿음이 바로 서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런 후에 곧 일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제자들은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습니다.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27절)" 그렇습니다. 죽게 되었다던 제자들은 확실히 믿음이 적은 자들이었습니다. 잔잔해지고 난 뒤에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지 못하고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하고 의아해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믿음이 부족하여도 예수님을 누구신지 몰라보아도 주님께서는 권능을 베푸셨습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에도 불구하고 찾아오시는 주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죽게 되었습니까? 사업이 망했습니까? 병으로 인하여 사형선고를 받았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습니까? 섭섭한 말로 인하여 참을 수 없는 억울함이 있습니까? 자식들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습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습니까?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처럼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습니까?
김재호 교우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삶을 포기한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음주운전에 여섯 번이나 걸려 이제는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재판을 지난 수요일에 받았습니다. 남선교회원들이 많이 격려하고 도움을 주었지만, 일정 형기를 마치고 추방당하는 절차만 남았습니다. 다시 포기하고 있는 그였고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재판 결과가 나왔습니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제 남은 몫은 그의 결단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열심히 사는 길입니다. 그의 풍랑을 한순간에 주님께서 잔잔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힘차게 그의 새 출발을 박수로 격려하십시다.
예수님은 언제나 희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절망의 십자가 위에서 죽음마저도 삼키셨습니다. 부활의 언덕을 바라보셨습니다.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외치고 싶은 순간 정말 죽게 된 것인지 다시 살펴봅시다. 그리고 다시 우리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예수, 그는 어떤 사람인가?
마 8:23 / 김양인 목사
오늘은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잠케 하신 이적을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그 날 예수님께서는 이른 아침부터 많은 무리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다보니 어느덧 해질녘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을 읽어 보면, 하루 동안에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그처럼 많은 일을 하시다보면 주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셨으므로 무척 피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휴식을 취하려 하지 않으시고 배에 오르셔서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호수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흉악히 귀신 들려 무덤 사이에서 지내는 두 사람을 구해 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두 귀신 들린 사람은 무덤 사이에서 지내며 돌로써 자해하였으며 심지어 쇠사슬로 묶어 놓아도 곧장 사슬을 깨뜨렸으므로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 하신 주님의 말씀과 같이 그들은 귀신들에게 사로잡혀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피곤하신데도 불구하고 귀신들에게 포로 되고 눌린 그들을 자유케 하시려고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에 모시고 노를 저어 나아갔고, 예수님께서는 배의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잠이 드셨습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고 큰 물결이 일어 배를 덮쳤습니다. 유대인들은 갈릴리를 바다라고 불렀으나 실은 호수입니다. 그것도 우리나라의 소양호와 비슷한 면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어항처럼 사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조건으로 인해 북쪽의 헐몬산에서 거세고 찬 바람이 밀어닥치면 호수 위에 바람막이 형성되어 물을 끌어올리게 되어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풍랑이 일어납니다. 아주 잔잔한 상태에서 물결이 대작하게 되는 데 반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그 날 저녁에 경험한 풍랑이 그런 종류였으니,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곤히 주무셨습니다. 풍랑이 대작하는 가운데서 주무시다니 우리로서는 상상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다를 지으신 창조주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는 노한 풍랑이 주님을 두렵게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주님께서 타고 계신 배를 침몰시킬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 같은 이치를 알지 못했으므로 겁을 먹고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을 쳤던 것입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이 세상을 괴로움이 가득한 바다 곧 고해(苦海)라고 했습니다. 바다는 항상 풍랑이 거센 것이 아닙니다. 잔잔할 때도 있고, 풍랑이 일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때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비슷합니다. 잔잔한 바다처럼 평온한 시절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러다가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시련의 광풍이 불어 닥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자기의 미래에 무슨 일이 생길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미래는 고사하고 당장 한 시간 후도 알지 못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지금 형통할지라도 내일 역경을 만날 수 있고, 지금 역경 중에 있더라도 내일 형통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말하기를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고 한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장래 일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장래를 알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엄위하신 권위 아래 복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험이 말해 주듯이, 사람은 자기의 잘못이나 실수로 시련을 자초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원인을 알 수 없이 고생을 하기도 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요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았던 사람이지만, 불시에 무서운 재앙을 만났습니다. 전 재산을 다 잃어버렸고, 열 자녀가 몰사했으며, 온 몸에 불치의 피부암이 발했습니다. 그때 욥은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욥이 당한 고난보다 그를 더 괴롭게 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난의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욥 뿐 아니라 우리도 경험하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를 공포 속에 몰아넣은 코로나 역병 사태가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이 같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을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요즘은 백신과 관련해서 정부의 방침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국자들이 게을렀거나 사태의 심각성을 몰라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 보다는 코로나의 확산세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바른 정책을 세우려면 예측을 잘해야 하는데 이 점에서 실수를 하여 국민들의 불안감을 가중시켰습니다. 코로나 역병사태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예상하지 못했던 경제적인 시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건강상의 위기를 만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잔잔하던 갈릴리 바다가 갑작스레 광풍으로 뒤집어진 것과 비슷합니다. 이 외에도 인간관계에서 갈등과 어려움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이것 역시 광풍을 만난 배처럼 우리 인생을 위태롭게 만듭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미워한 나머지 들에서 쳐 죽였습니다. 가인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미움의 풍랑을 억제하지 못하고 형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돈에 대한 욕망, 쾌락에 대한 욕망 때문에 풍랑을 만난 배와 같이 마음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하신 대로, 마음속에 일어나는 광풍을 제어하지 못하면 결국은 자멸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위기는 영적인 풍랑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풍랑을 제어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좇아 살아가게 되고 맙니다. 그런 신자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의심하고 마음속에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의심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심하면 결국 믿음의 길에서 완전히 파선하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생항해에서 여러 가지 풍랑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최선의 방책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씀해 줍니다.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갑작스런 광풍을 만났을 때, 그들의 경험에 근거해서 배를 어거해 보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 가운데 어부 출신이 네 사람이나 있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저녁 만난 풍랑은 어찌나 거세든지 제자들로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산더미 같은 파도가 쉴 새 없이 배를 덮치니 배 안에 물이 가득했습니다. 물을 퍼내고 퍼내도 소용이 없습니다. 드디어 제자들은 기진맥진해 졌고 파선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정신을 차리고 예수님께서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예수님께 나아가 깨우며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하고 외쳤습니다. 이 같은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제자들의 절박한 심정을 보는 듯합니다.
그들이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며 구원해 달라고 외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바로 이점이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점입니다. 또는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의 차이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위기를 만나면 먼저 자기 역량을 다해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힘이 부쳐 해결할 수 없게 되면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주님을 찾지만, 불신자들은 절망합니다. 이것이 성도와 불신자의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위기 상황에서 주님을 깨우고 구해 주시기를 구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부르짖은 것은 믿음이 적음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더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인즉, 광풍이 배를 덮어 파선할 것처럼 위태로웠으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본다면 그들이 탄 배가 침몰할 수 없는 이유를 알고 그처럼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선 풍랑으로 배가 요동치는 중에도 주님께서 편안하게 주무시고 계신 것이 그들의 배가 무사할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제자들의 믿음이 적었으므로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는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평소에는 믿음이 좋은 것처럼 생각하지만 정작 어려움을 만나면 당황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두려운 그 때 우리는 제자들처럼 기도로 주님을 깨워야 할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주님께서는 고물에서 주무시는 중에도 제자들이 처해 있는 사정과 형편을 환히 알고 계셨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그러한 수준이 못될지라도 그들이 주님께 나아가 도우심을 간구한 것은 잘 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큰 풍랑을 만난 까닭이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광풍을 통하여 그들의 믿음을 더욱 온전하게 세워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3)…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고 하신 대로, 우리는 시련을 통하여 믿음의 성숙을 이루게 됩니다. 만약에 우리 생애에 시련과 고초가 없다면 당장은 편하겠지만 실은 연단의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어 아무런 믿음의 성장이나 인격의 성숙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순금을 만들려면 용광로에 던져져서 정련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듯이 우리의 믿음도 시련의 용광로를 거쳐야 정금 같이 순수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풍랑을 겪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제자들을 통하여 기도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무서운 풍랑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며 구해 달라고 간구하지도 않았을 것이요, 결과적으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위기를 만났을 때 기도를 통하여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기도야말로 성도들에게 주신 위대한 특권임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언제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간구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아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특권입니까! 그러므로 이 귀한 사실을 알고 기도에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b)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아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깨우며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구했을 때, 주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웬만큼 잔잔해 진 것이 아니라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그토록 사납게 불던 광풍과 거센 물살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능하신 창조주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혹 삶에 큰 위기를 만났습니까? 주님께 간구함으로 해결 받으시기 바랍니다. 누가 보아도 제자들은 파선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만드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면한 문제가 아무리 어렵고 크다 할지라도, 혹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주님께서는 얼마든지 해결해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성도님들 가운데는 코로나 역병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만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가 기도로써 여러분의 사정을 고하고 도움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님들 가운데는 건강상에 광풍을 만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성도님들도 기도로써 주님을 깨우시고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부르짖으십시오. 불치의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셨던 주님께서 그 크신 권능으로 성도님들의 질병을 고쳐주실 것입니다.
마음속에 미움의 광풍이 일고 있습니까? 욕심의 풍랑 때문에 힘들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깨우며 부르짖어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광풍과 물결을 명하시어 잔잔케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주님과 함께 영원한 천국을 향한 항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주님께서 인생 배에 임하여 계시므로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과 상관없는 세상 사람들은 인생의 모든 광풍을 혼자서 견뎌내려 하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부자가 되었어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인생은 무의미하며, 장차 심판의 광풍이 불면 초개처럼 날아가고 맙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땅에서의 성공과 실패, 부자가 되건 가난하게 되건 상관없이 인생여정을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면 성공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 배에 항상 동승해 계시며 모든 악한 자들과 시험과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어떤 위기를 만날지라도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가 부르짖을 때 즉시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서 붙들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의 기도에 지체 없이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시므로 응답이 늦어서 낭패를 당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되 가장 적합한 때에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해 같은 인생바다를 항해할지라도 주님과 함께라면 아무것도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감사할 것은,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광풍을 만남으로써 처음 한 동안은 고생을 했으나 결국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올바로 알게 되는 은혜를 받았듯이, 우리도 역경과 시험을 통해서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유익한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온할 때에는 주님의 권능을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위기를 만나면 그것도 우리의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무서운 위기를 만날 때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언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장 극심한 고난을 받을 때였지 않습니까? 언제 홍해를 가르셨습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 가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을 때였지 않습니까? 언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까? 광야에서 양식을 구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을 때였지 않습니까? 언제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보내 호위해 주셨습니까?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던 출애굽 때와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가 엄습하던 광야에서 지낼 때였지 않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위기와 역경을 만났을 때 위대한 구원을 베풀어 주셔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크신 권능과 자기 백성을 향하신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광풍과 물결이 잔잔해지자 기이히 여기며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하고 탄성을 발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가르침을 받고 많은 기적을 목격하면서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못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보내심 받은 훌륭한 랍비정도로 알았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행하시는 많은 기적을 보았으나 그것은 그들이 직접 체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곁에서 보는 것도 우리 신앙에 도움이 되지만 우리가 직접 주님의 이적을 체험하는 것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구경꾼처럼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주님의 기적을 직접 체험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은혜 받는 것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우리 자신이 직접 은혜를 받고 주님의 능력을 맛보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이론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알게 됩니다.
제자들이 사경에서 건짐 받았을 때 비로소 그들이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올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믿음이 아니라 체험에 근거한 산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생의 풍랑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인생의 풍랑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가슴 졸이는 불안의 순간을 맛보게 하고, 뼈를 녹이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전에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던 위대한 영적 승리와 은혜를 체험하게 합니다. 평소에 건성으로 주님을 섬기던 사람에게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기도를 올리게끔 이끌어 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을 한 단계 성숙시켜주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을 깊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풍랑 자체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다가오는 시련은 어느 것 하나 우연한 것이 없으며 모두 다 주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에는 반드시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그 뜻을 알지 못해서 답답해 할 때가 있지만, 그런 때에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주님의 뜻이 선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범죄와 잘못으로 풍랑을 자초할 때도 있지만, 그럴 때라도 주님께서는 징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있는 찌끼를 제거하시고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일하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신 대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면한 모든 곤고함과 역경에 대하여 합력성선이 되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의 인생 항해에 주님과 동행하시면 “아멘!” 하십시다. 삶에 위기와 시련의 풍랑을 만났을 때, 불안해하거나 두려워 마시고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시련의 파고가 아무리 높고 위협적일지라도 겁먹지 말고 주님께 나아가 부르짖어 간구함으로 위대하신 구원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체험함으로 믿음의 성숙을 이룰 뿐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깊이 알고 고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면돌파
마 8:23-27 / 김동호 목사
저는 지난주간 어느 교단이 운영하는 대학병원에 가서 직원 수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직원이 1,300명 가까이 되고 일년에 약 1,000억 원 정도의 재정을 사용하는 큰 병원이었습니다. 병원도 환자가 많아서 제법 운영이 잘 되는 병원이었습니다. 침대 수가 약 1,100개정도 되는데 입원 환자가 약 90% 가까이 되어 입원을 하려면 2인 실 병실이 아니면 입원이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알지 못하는 어떤 문제들이 있어서 병원이 매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빚도 몇 백 억 원 정도 되었는데 그로 인해 직원들 월급도 제 때 주지 못하고 있었고 그 부채가 점점 늘어나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목회하는 저로서는 그 어려움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년에 1,000억 원 정도의 재정을 사용하는 병원이 몇 백 억 원 때문에 그렇게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목회를 해 보면 보통 교회는 어렵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교인들이 일년 재정의 몇 배 정도는 헌금을 하여 그 일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일년 재정의 절반 정도 되는 액수 정도는 교인들이 어려움을 감당하려고 하거나 그 일의 중요성만 인식한다면 한 두 번의 설교와 한 두간의 기도만으로도 쉽게 감당하는 것을 저는 여러 번 경험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경험은 이번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개척하면서도 거의 날마다 경험하는 일상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병원은 일년 예산의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빚을 해결하지 못하여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일에 대하여 깊이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기관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에는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목회자와 교회의 직원들 외에는 교회에서 월급을 받지 않습니다. 교인들은 교회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 교회는 세계의 그 어느 교회보다도 그 훈련이 잘 되어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 병원은 모두가 다 그 병원에서 월급을 받는 직원들이었습니다. 그 병원을 위하여 헌금을 하는 교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병원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하는 마음들은 모두 있었으나 병원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바칠 수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좀처럼 잘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거기서 조금 거창하지만 십자가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병원에서 손해를 보지 않고 내 이익을 챙길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정당한 생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당한 생각이 어려움에 처한 병원을 구하는데는 아무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 병원에는 다만 몇 사람이라도 병원을 위하여 손해를 보고 희생을 하고 최소한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그 손해와 희생을 통한 십자가를 집회에 참석한 믿음의 사람들이 감당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제나 십자가는 믿음의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 중에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별 것 아니지만 내가 받게 될 강사료를 오병이어처럼 먼저 내어놓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 다음 시간 집회가 끝난 후 병원의 원목 목사님이 광고 시간에 자기도 우선 이번 달 월급을 병원을 위해 내어놓겠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병원 집회에 참석하였던 어떤 교인 한 분이 병원의 직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100만원을 그 자리에서 헌금해 주셨습니다. 병원의 의사 교수님도 그 동안 병원으로부터 받지 못했던 여러 달 분의 봉급 중 많은 부분을 우선 포기하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적지 않은 직원들이 그와 같은 일에 감동을 하여 눈을 붉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할 일이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그 병원의 직원들이 병원을 위하여 교인들이 교회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헌신하듯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는 운동을 벌인다면 오늘의 문제는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없는 곳에는 언제나 사망이 있고 실패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구원이고 생명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문제는 그것을 누가 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 십자가를 지고 누가 그 십자가의 열매를 딸 것인가 하는 것이 언제나 어렵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에게나 십자가는 가급적 다른 사람이 감당하고 자기는 그 십자가의 열매는 딸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뜻 십자가를 지지 못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서서히 함께 멸망해 가고 파멸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그 십자가를 질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우리에게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이번 한 주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고 기념하는 고난주간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고 기념하는 것만이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높으신 뜻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을 묵상하고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하여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위한 고난과 십자가를 함께 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와 제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후손들에게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주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려면 누군가가 그것을 위하여 져야 할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식과 뜻보다 세상의 꾀를 좇아 하나님과 다른 식과 방법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거스리는 것이며 그 잘못된 관행과 싸우는 것이며 그것과 싸우다가 손해보고 다치고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편할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힘듭니다. 그것은 저보다도 여러분들이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래도 목사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물론 오늘 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뜻과 식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와 교계 안에서도 세상에서 격는 것과 진배없는 어려움들을 격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래도 여러분의 세상에서 격는 어려움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의인 즉 믿음의 사람 즉 하나님의 식과 뜻을 고집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은 사는 것이 편치 않습니다. 오히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의 꾀와 식을 가지고 살아가면 도리어 편하고 쉽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그 식과 삶을 고집하며 산다는 것은 보통 힘들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의인이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함께 타고 있는 배에 큰 물결이 일어나 덮이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바다에서 배와 씨름하며 살던 어부들이 대부분인 제자들이 죽음의 공포를 느낄 만큼의 파도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바다에는 언제나 큰 풍랑이 있습니다. 보통 풍랑이 아닙니다. 죽을 것만 같은, 침몰할 것만 같은,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풍랑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풍랑이 언제나 있습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려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어 보이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있는 이 세상이라고 하는 바다입니다. 세상 식으로 살면 잔잔한데 하나님의 식대로 살려면 언제나 풍랑이 일어납니다. 나의 온 삶을 삼켜 버릴 것과 같은 풍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풍랑과 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망하지 말라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풍랑은 언제나 만만치 않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만만치 않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골리앗만 하고 나는 언제나 다윗처럼 어립니다. 싸울 수 없습니다.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싸우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정탐을 하였습니다. 12 정탐꾼을 보내었습니다. 10 정탐꾼을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보고를 합니다. 저들은 다 장수들인데 우리들은 저들에 비하면 메뚜기와 같다고 보고를 합니다. 여러분 그 보고는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군사적인 면에서만 보면 아주 훌륭하고 정확한 보고였습니다. 여러분 그 10 정탐꾼이 보고 느끼고 보고한 것은 100% 다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저들이 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큰 소리를 치며 나아가 싸우자고 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기뻐하셨습니다.
10 정탐꾼의 보고는 인간적으로 볼 때 100% 사실이었지만 신앙적으로 볼 때 100% 거짓이었습니다. 저들의 보고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었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의 군대를 바다에 처넣으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고 체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민족적으로 볼 때 악한 일이었습니다. 이길 수 있는 전쟁을 도망하자 한 것은 역적이나 하는 짓이었습니다.
10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의 거인들만 눈에 보였습니다. 그래서 무서웠습니다. 자신들이 꼭 메뚜기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거인들도 보았지만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보니 거인들이 무섭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메뚜기처럼 보인 것이 아니라 저들 거인들이 자신들의 밥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아가 싸우자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었던 10 정탐꾼들에게는 그와 같은 용기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싸우지 말고 도망하자 하였던 것입니다.
풍랑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깨운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꾸짖으셨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바다를 잠재우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나중에 보고는 알았지만 먼저 믿지는 못했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여 세상과 싸우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오늘도 꾸짖고 계십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세상과 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매우 중요한 인생철학과 목회철학이 있습니다. 그것은 '싸우면 일주일 도망가면 40년'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따라 믿음으로 정면돌파하였으면 넉넉잡고 일주일이었으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10 정탐꾼의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마땅히 싸워야 할 싸움을 싸우지 않았음으로 저들은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40년 후에 비로소 가나안에 들어가기는 하였지만 믿음 없었던 저들은 광야에서 다 죽고 오직 그때 그 믿음 없는 자리에 없었던,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직 예외는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저는 기독교가 어떤 면에서 볼 때 전투적인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전투적입니다. 그 어느 종교와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종교가 바로 우리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의 생명은 그 피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볼 때 잘못된 생각과 판단으로 인하여 엉뚱한 순교와 피를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흘리게 한 과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기독교의 생명을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식과 뜻이 통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세상과 싸우다가 흘린 의로운 피와 그 정신에 우리 기독교의 생명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오히려 우리 한국의 교회에는 그와 같은 정신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순교자를 내었지만 그 순교자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교회가 부흥하고 기독교의 수가 전체 인구의 1/4이 넘었다고 하는 요즘 우리는 그 중요한 순교의 정신, 전투의 정신을 상실하였습니다. 피둥피둥 살만 찐 힘없는 돼지 같은 되었습니다. 세상과 자신을 구원할 그 어떤 힘과 능력도 가지지 못한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을 묵상만 하는 교회가 되지 말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에 동참하는 교회와 교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식과 뜻을 고집하다가 풍랑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죽기까지 피흘리며 싸우는 교회와 교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손해를 보면서도 피를 흘리면서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과 믿음의 배짱을 가지고 세상과 싸워나가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는 죽어야 사람들이 살고 누군가는 손해를 보아야 사람들이 이익을 본다면, 누군가를 죽이고 그 덕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를 손해 보이고 그 덕에 내가 이익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죽음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고 내가 손해를 봄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끼치는 삶을 삽시다.
"세상과 사람들은 내 덕보게 해 주시고 나는 오직 하나님 덕만 보고 살게 해 주십시요"라고 기도하면서 세상과 사람들을 축복할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근사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 고난주간을 앞둔 우리 높은 숭의교회와 교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높으신 뜻과 말씀이라고 확신합니다. 아멘.
인생 항로와 풍랑
마 8:23-27 / 김영규 목사
풍랑 만난 제자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한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났습니다. “놀”(seismov")이란 말은 “흔들림, 동요”를 의미하고, 신약성경에서 종종 “지진”이란 말로도 번역됩니다. 바다 가운데 큰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배가 함께 요동쳤습니다. 요동치는 바다와, 흔들리는 배, 그리고 거기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인생은 항해와 같습니다. 이 세상은 풍랑 이는 바다입니다. 우리는 이 바다를 건너야만 합니다. 인생 항로는 결코 평탄하지 않습니다. 놀이 있고 파도가 있습니다. 순풍에 돛 단 듯이 즐겁게 가는 인생은 거의 없습니다. 예외 없이 풍랑 속을 지나게 되어 있습니다.
풍랑을 만났을 때, 사람들의 모습은 어떨까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세상 풍파는 불행 그 자체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빠집니다. 낙심합니다. 좌절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 왜 인생의 풍파를 불행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라고 했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풍랑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풍랑을 주실까요?
첫째는 연단, 혹은 성숙의 목적입니다. 아브라함은 고난을 통해서 믿음이 커졌습니다. 요셉과 다니엘은 고난을 통해서 젊은 나이에 한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성숙된 안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고난을 통해서 형제 우애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야곱 자신도 연단을 통해서 경건한 신자로 성숙되었습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만일 어린 시절을 평탄하고 풍요롭게 자랐다면 지금의 목회를 할 수 있을까? 가난한 피난민의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가난을 이해합니다. 아버지 없이 유복자로 자랐기 때문에 결손 가정의 외로움을 압니다. 젊은 시절에 큰 병을 앓았기 때문에 병든 자의 고민을 이해합니다. 바다가 있고, 산이 있는 시골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연의 풍요로움을 감상할 줄 압니다. 가난, 외로움, 병드는 것, 시골 생활...결코 좋아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 없었다면 폭넓은 사색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사람들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을 겁니다. 고난은 성숙에 이르는 必要 不可缺한 방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깊이 아는 기회가 됩니다. 영적인 눈을 뜨는 계기가 됩니다. 욥은 중년에 엄청난 시련을 겪었습니다. 수 천 마리의 가축이 다 죽었습니다. 열 명의 자식이 한 날에 죽었습니다. 살이 썩는 고약한 병이 들었습니다. 어느 하나 감당하기 힘든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련 속에서 욥이 얻은 최대의 소득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사도 바울을 태우고 가던 알렉산드리아 배가 지중해에서 폭풍을 만났습니다. 276명의 승객들이 무려 14일 동안이나 파도에 휩쓸려 다녔습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철저히 보여주신 겁니다. 바울은 폭풍 가운데 일어나서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1-25) 요나는 풍랑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깨닫고 회개했습니다.(욘2장)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써 풍랑을 만났다면 당연히 좋을 결과를 기대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감당하지 못할 시련은 절대로 주시지 않으십니다. 감당하는 것은 물론 좋은 결과를 주십니다. 성경은 풍랑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선척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영업하는 자는,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바다에서 보나니,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저희가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107:23-30) 하나님께서 소원의 항구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십니다.
어찌 되었든지 문제가 되는 것은 풍랑 자체가 아닙니다. 풍랑을 대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세요. 제자들의 모습 속에는 풍랑 만난 성도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가 나아갈 해답이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인생의 파도를 이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배에 타고 계신 주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풍랑을 해결하는 첫 번째 열쇠는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도입니다. 제자들은 급히 주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하든지 가장 먼저 할 일은 주님을 찾는 일입니다. 주님을 찾는 일보다 다른 수단을 먼저 찾는다면 결단코 풍랑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병들어 병원을 찾기 전에 먼저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세요.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직장을 구하기 전에 먼저 주님을 찾으세요. 시험을 보기 전에, 승진을 힘쓰기 전에 먼저 주님께 요청하세요. 사람과 다투기 전에, 논쟁하기 전에 먼저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세요. 주님을 찾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주님을 찾지는 않습니다. 꼭 풍랑을 만나 다 죽게 되어서야 비로소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한 배를 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주님을 의식한 것은 풍랑 때문입니다. 적어도 풍랑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주님이 곁에 계시다는 사실을 별로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어느 시점에서 주님을 깨웠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아마 분위기로 봐서, 한참 애를 쓰다가 배에 가득히 물이 차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니까 주님을 깨운 것 같습니다.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25) 우리는 만사가 잘 되어갈 때에 주님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배에 왜 선장이 필요한지, 선장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요. 학생 시절에 제주에서 부산까지 카페리 호를 타고 밤중에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수 천 톤 급의 대형 여객선이기 때문에 흔들리지도 않고 평안했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자유로이 얘기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밤늦게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부산항에 도착하여 짐을 챙겼습니다. 배에서 내리면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하얗고 멋진 제복을 입은 선장과 승무원들이 내리는 손님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내 생명을 맡아서 인도해 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선장과 승무원들은 승객들을 목적지까지 인도했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 항해에 예수님은 선장이십니다. 항해가 아무리 순조롭고 평탄해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 인생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평소 주님께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경험이나 지식을 지나치게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 대부분이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입니다. 그들은 20년, 혹은 30 년을 갈릴리 호수에서 자랐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기후와 풍랑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일등 항해사들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조난당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내 지식과 경험은 인생살이의 원동력입니다. 사업하는 데 대학에서 배운 경제원론이나 경영학을 의지하면 됩니다. 직장 일에 경험적 지식이 최고입니다. 굳이 직장 일이나 사업에 주님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문제는 풍랑입니다. 바람과 파도 앞에는 어떤 경험이나 지식도 무용지물입니다. 내가 가진 신념이나 결단도 재앙을 당할 때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사기꾼 앞에서 경제 원론이 도움이 됩니까? 불의의 사고 앞에서 최신 의술이 소용이 있습니까? 기상이변이나 천재지변 앞에서 항해술이 도움이 됩니까? 문제가 터지면 그 때서야 비로소 내게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평안한 항해에도 선장은 필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식이 많고 경험이 많아도 인생의 선장은 꼭 있어야만 됩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선장이십니다. 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다 죽게 되어서 비로소 주님을 깨우지 마시고 일찌감치 주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님께 모든 삶을 맡기세요. 항상 도움을 요청하세요. 주님은 우리 길을 평탄케 해 주십니다.
믿음을 크게 해야 합니다
풍랑에 대처하기 위해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믿음을 크게 키우는 일입니다. 제자들이 두려움 때문에 소동을 벌일 때에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26절) 믿음이 적은 것이 문제입니다.
믿음과 두려움은 반비례합니다. 믿음이 크면 두려움이 줄어듭니다. 믿음이 줄어들면 모든 것이 다 두려워집니다. 예수님은 평안히 주무시는데 제자들은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믿음의 차이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믿음이 적을 때에, 어린 하녀 앞에서도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충만할 때는 전혀 달랐습니다. 공회원들 앞에서 당당히 항변했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 그런가 하면, 감옥에서 단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쇠사슬에 묶여 차가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입니다. 군사 두 명이 곁에서 무장하고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깊이 잠이 들었는지 천사가 와서 옆구리를 쳐서 깨울 때까지 세상모르고 잤습니다. 엘리야는 믿음이 클 때에 아합이나 이세벨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하게 850 명의 우상 선지자들을 제압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해질 때에 아합과 이세벨이 두려워졌습니다. 외딴 곳으로 도망쳐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하소연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이 클 때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해질 때에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딴 소리를 했습니다.
세상만 바라보면 믿음은 졸아듭니다. 믿음이 졸아들면 세상일이 너무 크게 보입니다. 제자들의 눈에 풍랑은 크게 보이고, 자신들은 너무 작게 보였습니다. 요즘 自暴自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취직이 안 되어서, 공부를 못해서, 돈 떨어져서, 외모가 부족해서, 갈등 때문에... 이런 저런 사유로 삶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런 일들이 과연 우리 인생을 포기할 만큼 심각한 일입니까? 저는 어렸을 때에 머리에 흉터 때문에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갓난 아이 시절에 驚氣를 한다고 가마에다 뜸을 떴습니다. 그래서 정수리에 동그란 흉터가 있습니다. 학교에 들어가서 머리를 빡빡 깎고 다니니까 더 크게 드러났습니다. 사춘기 때는 너무나 고민이 됐어요. 이 상처 때문에 여자 애들이 싫어하면 어떻게 하나? 장가를 못 가면 어떻게 하나?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서 머리를 기르면서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삼십 년이 넘도록 내 머리에 상처가 있는 것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최근에 머리를 짧게 깎으면서 비로소 생각이 났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왜 그렇게 고민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만 바라보고, 환경만 바라보면 錯視 現狀이 일어납니다. 착시현상이 일어나면 큰 것이 작게 보이고, 작은 것이 크게 보입니다. 갈리버 여행기를 보세요. 갈리버의 몸이 갑자기 커지거나 줄어들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몸은 항상 같은 크기였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나라에 가면 거인 대접을 받고, 어떤 나라에 가면 소인 대접을 받았습니다. 세상과 우리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커졌을 때, 우리는 세상 풍파를 이기는 거인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해졌을 때, 우리는 풍파에 묻히는 소인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믿음을 크게 할 수 있을까요? 유일하고 첫째 되는 방법은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시야를 바꾸세요. 세상을 보지 말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세요.
주님을 바라보면 인생이 제대로 보입니다. 우리 인생이 얼마나 크고 소중합니까? 세상문제에 가로막혀서 중단 될 만큼 값없는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모든 피조물의 지배자로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크고 가치 있는 인생들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내가 크게 생각하던 세상일이 그렇게 큰 일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내가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던 문제도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요즘 머리털이 자꾸 빠져서 대머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머리가 큰 문제는 아닙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발소에 자주 가지 않아도 되고, 머리 감고 말리기도 좋고! 갱년기가 지나면서 건강도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남들이 아프다고 하면 나도 아픈 것 같습니다. 심장이 아픈 것 같기도 하고, 혈압이 오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까지도 느낄 만큼 예민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현대인들에게 특이한 마음의 병들이 있지요? 무슨 무슨 공포증이라고 하는 병명들입니다. 대인 공포증, 광장 공포증, 공황 장애, 우울증 등등. 병도 아닌 공포증도 많아요. 가난 공포증, 외모 공포증, 출세 공포증... 이런 병세가 없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다 있어요. 이런 병을 이기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세요. 주님을 바라보면 문제가 문제로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이 내 곁에 계십니다. 그냥 계신 것이 아니라, 나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담대히 주님을 의지하세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9) 삶의 모든 순간마다 주님을 바라보세요.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세요. 그럴 때에 내 마음의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두려움의 자리에 큰 믿음이 채워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풍랑의 가장 큰 목적입니다. 즉, 풍랑을 통해서 주님을 알게 됩니다. 본문은 자연계에 나타내신 주님의 이적입니다. 이 기적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확실하게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은 창조주시요, 섭리의 주님이십니다. 내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내 인생을 설계하셨습니다. 내가 인생길을 지켜보십니다. 내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십니다. 내 삶을 간섭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섭리하십니다. 내가 속한 가정, 내가 속한 이웃, 직장, 국가 사회를 주님이 주관하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자연계의 복종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자연 환경까지도 다 주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 만물도 주님의 명령에 따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풍랑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바람과 바다는 생명이 없는 무생물입니다. 자연물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주님의 명령 앞에 복종했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27절) 주님이 누구신지 올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을 단순히 인간으로 알고 믿는다면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로 알고 믿으십니까? 예수께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16:13)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지, 알고 믿어야지 모르고 믿으면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이런 저런 대답이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그 때에 주님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3년이나 주님을 따라다닌 제자들은 주님을 누구로 알고 있었을까요? 베드로 사도가 주님께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 주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셨습니다. 복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신앙은 아무나 가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만이 가지는 특별한 복입니다. 교회를 10년, 20년 다녔으면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단순히 모범을 보이신 도덕 선생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 천국도 없고,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도 없습니다. 껍데기 신앙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내게 어떤 분입니까? 도덕 선생입니까? 모범을 보이신 철학자이십니까? 다소간의 위로를 주는 교주입니까? 그것 가지고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바람도 순종하는 예수! 어떤 병이든지 말씀 한 마디로 치료하시는 예수! 귀신이 놀라서 쫓겨가며 고꾸라지는 예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한 손에 가지신 예수!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예수! 5000명 뿐만 아니라, 전 인류를 먹여 살리시는 예수! 창세 이후의 모든 인류를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 분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나를 축복하시고 하나님 자녀로 부르신 구주십니다. 예수님의 신분을 가장 먼저, 가장 확실하게 알아차린 자들이 누군지 아세요? 바로 사탄이요, 귀신들입니다. 가다라 지방에서 만난 귀신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하소연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8:29) 귀신들은 예수님을 잘 알아요. 참 제자들이 누군지 알고, 거짓 제자들도 알아요.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행19:15)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믿으세요. 귀신들이 알아차린 예수를 제자들은 부활승천 하실 때까지도 제대로 몰랐어요.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신 후에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처럼 “저가 과연 누구신가?”하면서 믿음 반 의심 반으로 따라가지 마세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따라갑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종교는 있으되 신앙은 없습니다. 인격 수양은 있으되 생명은 없습니다. 현세는 있어도 내세는 없습니다. 물질 축복은 있어도 영적 풍요로움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고 믿는 사람과 모르고 믿는 사람은 천지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 생명의 구주십니다. 나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내 인생의 목자십니다. 나를 모든 환난에서 구해내십니다. 내 평생에 평안을 주시고,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도록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내가 만난 풍랑, 고난과 시련이 오히려 주님을 깊이 알게 되는 계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인생 행로에는 풍랑이 많습니다. 풍랑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불행이지만 성도들에게는 오히려 유익한 기회입니다. 낙심치 말고 풍랑에 대처해야 됩니다. 첫째로, 한 배에 타고 계신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됩니다. 둘째로, 믿음을 크게 해야 합니다. 풍랑 이는 세상을 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셋째로, 주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고 믿어야 됩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 만물이 복종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만난 풍랑을 통해서 오히려 주님을 깊이 알게 되고, 신령한 안목을 갖게 되시기 바랍니다.
잠만 주무시는 하나님
마 8:23-27 / 이정선 목사
저는 예수를 안 믿어본 적이 없습니다. 애초에 태어나기를 예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에 다닌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동의어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적어도 저는 예수를 믿지 않았던 적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과 그리스도인이 된 후의 삶을 비교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는 나중에 예수님에 대해 알고 믿은 분들도 계실 것인데, 그런 분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고 나서 속된 말로 살림살이가 나아졌습니까? 나아졌다면 어떻게 나아졌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 대한 한 가지 신화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 이런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행복해지고, 실패와 좌절만 겪던 사람도 예수 믿고 성공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입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잘 모르겠으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땠는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라는 젊은이는 그야말로 어두운 하늘에 나타난 혜성이었습니다. 그의 탁월한 가르침, 그리고 어떤 병이든지 고칠 수 있는 초능력으로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얻었습니다. 그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된 사람들은 자기들이 매우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 덕분에 자기들도 목에 힘을 줄 수 있게 되었고, 잘만 하면 성공과 출세가 보장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상한 행동과 말씀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군중이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그곳을 떠나시겠다는 것입니다. 군중으로부터 권력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군중을 피해 떠나겠다고 하니 적잖게 실망이 되지 않겠습니까? 거기다가 예수님의 발언은 충격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자기는 머리 둘 곳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사람들의 존경과 궁궐 같은 곳의 안락함이 보장될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마음 한구석에서 솟아납니다.
어쨌든 예수님의 의도대로 일행은 첫 번째 대성공을 거둔 그 땅을 뒤로 하고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해가 지고 어둠이 물 위에 내리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피곤하셨는지 예수님은 배에서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시련도 피해가고 고난도 되돌아간다는 것은 허황된 신화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예수 때문에 더 많은 고난과 손해를 각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에게도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바쁘고 피곤한 하루를 마치고 났으니까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단잠을 잤으면 좋겠지만, 예수님은 급히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배의 딱딱한 나무 바닥에 몸을 눕히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피곤한 몸이 좀 쉴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것마저 허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곧바로 사나운 파도가 배를 삼킬 듯이 덮쳐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있던 폭풍도 없어져야 할 터인데, 오히려 전에 볼 수 없었던 두려운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제자들 중 몇 사람은 바로 이 갈릴리 호수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들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꽤 큰 호수입니다. 면적이 170평방킬로미터라고 하니까 로토루아 호수의 약 두 배 정도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호수를 생업의 기반으로 삼고 살아온 사람들은 호수의 구석구석까지 모두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파도 앞에서 경악하고 있습니다. 다 죽게 되었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말하자면 이런 파도는 늘 있는 파도가 아닌 것입니다. 도대체 왜 없던 파도까지 생겨나서 예수 따르는 길을 가로막는 것일까요?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더 부자가 되고 더 출세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번지수를 잘못 찾아 왔습니다. 종교의 한 가지 기능은 마음의 평안을 얻게 해 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물론 예수 믿고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때로는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서 더 많은 갈등과 고민을 하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를 따르는 길에 전에 없던 폭풍까지 일어나 제자들을 괴롭히는데, 정작 예수님은 그 난리 통에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어디서 그런 그림을 본 기억이 납니다만, 폭풍이 몰아치고 파도에 배는 뒤흔들리는데, 예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쪽에서 주무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그림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한 단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어려움과 괴로운 일을 만나는데, 그래서 그럴 때마다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당장 나타나셔서 내가 당하는 이 괴로움을 해결해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그래서 다윗은 시편 44편에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그만 주무시고 일어나서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괴로움과 슬픔에서 구원해 주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럴 때가 없습니까? 그럴 때 그렇게 외쳐보세요.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물론 이것은 아무나 내뱉을 수 있는 부르짖음이 아닙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과 같은 절박한 위기에서 나오는 부르짖음입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절망 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부짖음입니다. 우리는 같은 인간으로서 그러한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 아무런 느낌도 없는 사람은 평안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 죽게 되었다고 절규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오히려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십니다. 아, 예수님이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 파도 속에서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당장 배가 뒤집힐 것 같은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습니까? 고통이나 위험 속에서 아무런 동요가 없어야 믿음이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제자들이 파도 속에서 두려워한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은 그 배에 예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잊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한 그들은 안전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배는 어떻습니까? 폭풍과 파도에 흔들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애가 위태롭습니까? 문제는 그 배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타고 계신 배라도 폭풍을 만납니다. 배가 뒤집힐 듯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태웠다고 해서 순풍에 돛 달고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녀도 인생이 실패할 수 있습니다. 예수 잘 믿어도 사업이 부도날 수 있고, 남편은 속 썩이고, 아이들은 반항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그 파도를 헤쳐 나가고 고통도 견뎌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최후의 궁극적인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제자들이 처음으로 당하는 시련이었습니다. 이 시련을 통해서 그들은 제자의 길이 대략 어떠할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었다고 다 잘 풀리고 잘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련을 통해서 그들은 주님을 더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주님을 의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 항로에 괴로움과 슬픔이 많지요? 짜증나고 속상하는 일도 많을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리던데 왜 나는 예수를 믿어도 되는 일이 없는지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타고 계시던 배도 파도에 뒤집힐 듯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여러분의 그 인생에 예수님이 함께 동행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여러분 삶에 함께 계시다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장 망하게 되었어도 놀라지 마십시오. 망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망한다면 오히려 축복입니다.
큰 성공을 거두고 일이 잘 되었다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을 보고 믿음이 좋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공하면 믿음이 없어도 당연히 감사해야지요. 성공했다고 감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의리입니다. 예의상으로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요. 위대한 믿음은 고난 중에 찬양하고 망했을 때 드리는 감사입니다.
오늘날 성공을 지향하고 풍요를 가치로 추구하는 세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매우 왜곡되어 전파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처럼 믿도록 강요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를 따라 우리에게 슬픔도 주시고 고난도 겪게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러한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성숙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인생의 배가 흔들리고 불확실의 파도 속으로 끌려가고 있습니까? 두렵습니까? 고통스럽습니까? 두려움과 고통은 함께 계신 주님을 잊게 합니까? 아니면 그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합니까? 믿음이 없으면 두려움 속에 주님을 잊게 되고, 믿음이 있으면 주님을 더욱 찾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시련이 다가올 때 두려움과 슬픔 속에서 주님을 잊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시련을 통해서 더 주님의 능력과 임재를 확신하고 의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나오신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풍랑을 통해서 경험하는 은혜를 감사하자!
마 8:23-27 / 전순기 목사
해마다 여름이 끝나가고 가을이 시작될 때쯤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서너 개의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상당했었는데, 올해는 태풍이 하나도 오지 않았습니다. 올 해는 태풍 피해를 입지 않아서 정말 잘 됐구나 싶었습니다. 또 올 해는 늦더위가 오래 계속되었습니다. 덕분에 올 해는 배나 사과 등의 과일이 작황이 좋아서 맛도 좋고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고 합니다. 참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하게도, 올 해는 추석이 빨라 추석 이후 소비가 줄어든 시점에서 풍부하게 수확이 되는 과일 때문에, 공급이 넘쳐 가격이 폭락하여 과수 재배 농가의 시름이 깊어졌다고 합니다. 농수산식품부에서 과일 가격의 폭락을 막기 위해서, 배를 44억어치를 사서 전량 폐기 처분한다는 신문 기사를 읽어보았습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차라리 적당하게 태풍이 왔었더라면 좋았을 뻔 했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올 해는 태풍이 오지 않는 바람에 비가 너무 오지 않아서 가뭄이 들어 논밭이 타들어가고, 식수난까지 겪는 곳들이 많았습니다. 저수지에 물이 다 말라버렸습니다. 특히 남부 지방이 극심한 가뭄을 겪었습니다. 전문가들은 내년 봄 가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연 현상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연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참으로 오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태풍이 와도 걱정, 오지 않아도 걱정입니다. 태풍은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태풍은 적도 부근의 바다에서 발생하면서 많은 양의 수증기를 포함한 구름을 몰고 와서 육지에 엄청난 비를 뿌려줍니다. 그리고 많은 비가 오면서 오염된 공기를 정화시켜줍니다. 또 태풍은 바다를 뒤집어 바닷물 속에 산소량을 풍부하게 해 주며, 적조 현상을 막아줍니다. 그래서 바닷물이 썩는 것을 막아줍니다. 태풍이 주는 유익과 태풍이 오지 않을 때에 발생하는 어려움을 생각해 보면, 태풍을 무조건 겁내고 피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올 해는 물리적인 태풍은 오지 않았지만, 초특급 경제 태풍이 휘몰아쳐 왔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미국발 금융 위기가 강력한 태풍이 되어 전세계를 강타하는 바람에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이 심각한 위기에 빠졌습니다. 금융 위기, 실물 경제 침체, 실업자 급증, 기업들의 줄도산, 대량 해고 사태가 큰 풍랑이 되어 휘몰아쳐 오고 있습니다. 며칠 전 한 신문에 보니까 “실직 공포”라는 제목의 기사가 일면 기사로 굵직하게 처리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잔뜩 겁을 먹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 돌아가는 상황만 두고 보면 도대체 감사할 조건이 하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요즘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경제 위기라는 태풍으로 말미암아 내 모든 삶의 안전과 행복이 날아가 버릴까봐 두려워하며 웅크리고만 있겠습니까? 걱정과 근심으로 밤을 지새우고, 염려와 한숨으로 한 낮을 보내시렵니까? 그래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진 성도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격려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사41:10).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기뻐하며,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범사에 경제 태풍도 포함이 되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풍랑에 휘말려 죽을 고생을 하던 제자들이 구원받은 은혜를 묵상해 보면서, 풍랑이 오는 이유와, 풍랑이 가져오는 유익을 발견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을 발견하게 되면, 오늘 우리가 당한 경제 위기라는 풍랑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유익이 무엇인지를 또한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전히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풍성한 감사를 믿음으로 주님께 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삶의 거품과 불순물 제거하기
풍랑이 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갈릴리 바다(길이 21km, 넓이 11km, 둘레 53km)는 사방이 높고 낮은 산과 언덕들로 둘러싸인 특수한 지형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고요하다가도 가끔 찬바람이 서쪽으로부터 불어오면 갈릴리 호수 계곡이 바람통이 되어서 순식간에 폭풍과 노한 파도를 일으켜 미치광이 바다가 되곤 한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배 안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광풍이 불고 파도가 몰아쳐 배에 위기가 닥쳤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해도 위기와 고통이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잘 믿고 순종하고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성도들에게도 이런 풍랑이 일도록 허락하시느냐?”하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풍랑을 막아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일반적인 성도들의 생각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신실한 성도들에게도 풍랑을 막아주지 않고 허락하시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제자들은 어떤 마음 상태입니까? 언제 어디서나 중요한 건 우리의 마음의 자세와 태도입니다. 제자들은 이 사건 전에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를 많이 경험했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일어났습니다.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귀신이 쫓겨 나가고 사람들이 건강해졌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이처럼 위대한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는 데서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이제 자신들이 뭔가 대단한 인물들이 된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헛바람이 들어갔습니다. 삶에 거품이 생겼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이나 받은 후나 여전히 연약한 죄인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헛바람은 빠져야 하고, 거품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공중에 떠서 살 수는 없습니다. 공중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정신병 환자를 공중에 집짓고 사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그 집에서 세 받아먹고 사는 사람들이 정신과 의사라는 우스개가 있습니다. 지금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겪고 있는 제자들은 헛바람을 빼고, 거품을 제거하고 있는 중입니다.
비록 믿음이 좋은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소위 성공하고 출세해서 물질적으로 넉넉해지고, 인기가 올라가고 명성이 자자해지고, 권세가 주어지면, 필경은 교만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필경은 물질 중심의 가치관, 현세 중심적인 가치관, 인간중심의 가치관으로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필경은 망하는 길로 가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들이 망하지 않게 하려면 풍랑이 밀려와서 헛바람을 빼고 거품을 제거해야 하는 겁니다.
예화) 국내 최대의 축산 전문그룹인 하림의 김흥국(51) 회장의 간증이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그는 지금 매우 어려운 현실 상황에서도 공격적인 경영으로 재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하림그룹은 지난해 2조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고 합니다. 이런 대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는 2003년도에 익산 공장이 몽땅 불에 타는 바람에 900억 원 가량의 재산 피해를 본 적이 있습니다.
모태신앙이지만 교회를 건성으로 다니던 그에게 공장 화재는 영적인 눈이 열리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그는 “불이 난 이후 삶에 화학적인 변화가 생겼다.”고 말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그 다음 장이 궁금해지고,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던 설교가 기다려졌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싶어져서, 결국 그는 새벽기도까지 하게 되면서, 어려움이 축복의 통로이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면 고민할 게 없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공장 화재 후 3개월쯤 지나, 그는 자신이 다니던 이리신광교회 건물을 새로 짓는 일부터 시작했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사태 수습에 정신이 없어 엄두를 못 낼 성전건축 일을 떠맡은 것입니다. “그 전에는 교회 직분을 맡아 달라는 얘기를 들으면 바쁘다는 핑계로 피했는데, 목사님으로부터 교회 신축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내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수집사였던 그는 나중에 장로가 된 뒤에도 건축위원장을 맡아 이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가 성전을 새로 짓는 사이에 회사는 어떻게 됐을까요? 닭, 오리 돼지고기 사료 부문에서 국내 점유율 1위로 떠올랐고, 농수산홈쇼핑을 통해 안정적 판매망까지 갖추게 되었습니다. 모기업인 하림은 지난해 3618억원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그의 공장에서는 하루에 닭 40여만 마리가 가공 처리 됩니다. 25개 계열사가 있는데 거의 대부분의 계열사들이 그 정도의 매출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과 야곱, 이삭 모두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 안에서 살면 고생도 축복이고 행복이란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고생이지만 하나님 관점에서는 축복이란 걸 깨닫게 되자 계속 도전하고 모험하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되더군요.”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하림의 김흥국 회장은 풍랑을 인하여 세상에 붙었던 마음들이 끊어지고, 형식적인 신앙이 진실한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또 이 땅에서도 더 깊고 넓은 성공을 경험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세계에서 열 번째가 조금 넘는 경제력을 가진 나라입니다. 불과 50여 년 전 세계에서 제일 가난하고 어려웠던 나라인 것을 생각하면 기적도 이런 기적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경제력은 수십 배로 커졌고, 좋은 것들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고 있지만, 행복지수는 그 때보다 더 낮아진 것 같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정말 먹을 것도 없었고, 입을 것도 없었고, 볼 것도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서라는 것을 해 오라고 할 때에 그 항목들 중에는 ‘피아노가 있는가? 라디오가 있는가? 텔레비전이 있는가?’하는 걸 조사했었습니다. 전화기 있는 집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백색전화는 더 드물었습니다. 텔레비전 있는 집이 동네에서 한 두 집도 잘 없었습니다. 진공관 라디오 하나만 가져도 괜찮게 사는 집이었습니다. 자그마한 트랜지스터 라디오 하나 갖는 게 큰 소원이었습니다. 그것 하나 가지면 천하를 얻은 것 같이 기뻐했었습니다. 저녁이면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흑백 텔레비전 있는 집에 모여 대청마루에 걸터앉고 마당에 서서 연속극 보는 것이 큰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살림살이는 어떠합니까? 그 때와 비교해 볼 때에 물질적인 환경으로만 본다면, 우리 모두는 다 부자들이고, 우리는 모두 다 행복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불평과 원망이 많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씀씀이가 너무 커져 버렸고, 낭비가 너무 심해졌습니다. 버려지고 있는 옷들이나, 가구들이나, 그릇들이나 음식들은 예전 같으면 너도 나도 갖고 싶은 값진 보물들입니다. 안식년 기간 동안 유럽 여행을 할 때,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사치하고 낭비가 심한지를 더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독일 사람들, 영국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이 매우 검소했습니다. 물건을 아끼고 또 아끼는 것을 보았습니다.
미국에서부터 밀어닥치고 있는 금융위기 때문에 전 세계가 요동하고 있고, 특히 대외 경제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더욱 심하게 요동을 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쉽게 넘어갈 것 같지 않습니다. 당분간 고난이 계속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우리가 50년 전의 경제 상황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아마 10년 전으로 돌아가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잘 해 낼 것입니다. 고통스럽지만, 이제 우리는 그 동안 우리의 몸과 마음속에 낀 군살을 빼야 할 것입니다. 헛바람, 거품을 빼야 할 것입니다.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나면, 우리 경제 체질이 튼튼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건강해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 위기라는 풍랑은 이사야 43장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물 가운데로 가는 것과 같고, 불 가운데로 통과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을 통과하게 되면 묻었던 때가 벗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이 물과 같은 시련을 통과하면, 세상을 살면서 묻었던 추하고 더러운 욕심들이 깨끗하게 씻겨 나갑니다. 불을 통과해도 새로워집니다. 놋을 다루는 장인은 녹슨 요강 단지를 불에 녹여서 밥그릇을 만들어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이 불과 같은 시련을 통과할 때에 우리 속에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기심, 병든 자존심이 다 불타 버리게 됩니다.
지금 온 세계를 휘몰아치고 있는 경제 위기라는 물 같은 시련, 불같은 시련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 정결해 질 것입니다. 사기 공화국, 음란 공화국이 되어 버린 대한민국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실 것을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금번에 경제위기라는 풍랑을 통과하면서, 이 민족 이 나라 백성들의 몸과 마음에 찌들어 붙은 교만과 아집과 쾌락주의와 이기주의의 어리석은 군살이 빠지고 건강해 지기를 소망합니다.
위기는 망하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고, 망하지 말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이 위기 때문에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경험하기
제자들은 모두 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인지라, 처음에는 자신들의 힘만으로 배를 안정시키고, 풍랑을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겪으면서 자신들의 한계를 경험했고,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제자들은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우게 됩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절박하게 주님을 찾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깨셔서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 한 마디에 잠잠해지는 바다와 바람을 보고는 더 놀래자빠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라고 외치게 됩니다. 이 순간은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새로운 발견을 하는 순간입니다. 제자들의 영안이 밝아지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자라는 계기가 마련된 것입니다.
삶에 위기가 오고, 풍랑이 몰아닥쳐야, 성도는 절실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그게 구원 받은 성도의 특징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시편 50편 15절에 말씀했습니다. 환난이 닥치면 부르짖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당신께서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응답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되면, 중심에서부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중심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시40:1-3). 깊은 수렁에서 건짐 받은 성도는 새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과 감격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압니다.
삶의 위기와 풍랑을 믿음으로 통과하게 되면 신령한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자신도 더 깊이 발견하게 되고, 영육간의 더 큰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시118:5)라는 고백했습니다.
예화) 전에도 헨리 나우엔의 이야기를 했는데, 그가 데이 브레이크라는 정신 지체아 수용시설에서 봉사하던 중에 한 번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어느 겨울날 장애 정도가 심한 14살짜리 중국인 사내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는 일을 하려고 길을 나섰다가, 뒤에서 오던 승합차의 백미러에 받혀 나뒹굴면서 갈빗대가 여러 개가 부러지고, 비장이 파열되어 내출혈이 심해지는 바람에 큰 위험에 처합니다. 그는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 와 있음을 느끼면서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합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새롭게 발견합니다.
그 때에 그가 경험한 영적인 깨달음과 교훈을 기록한 ‘거울 너머의 세계’라는 책을 최근에 읽으면서 도전을 받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가 죽음 앞에 섰을 때에 그는 자신도 놀랐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걸핏하면 내적인 불안을 느끼고 마음이 동요하는 것을 심하게 느꼈고, 언제나 거절당하고 버림 받았던 일들에 대한 쓰라린 고통의 감정들이 있었고,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서 전신이 마비되어버릴 것 같은 순간들이 많았는데, 죽음 앞에 서게 되니까, 어떤 공포도, 불안도, 두려움도, 염려도 사라지고 마음이 아주 평안해지고 담담해지더라는 겁니다.
죽음이 눈앞에 와 있는데도 마음속에서 평화와 기쁨이 솟아나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을 꼭 안아주시며 “내 곁으로 오너라. 두려워 말아라.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더랍니다. 그 동안 그는 끊임없이 성경을 연구하고 경건 서적을 읽으면서 주님을 구했고, 주님을 따르려고 분투노력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위기를 겪기 전에는 예수님은 친구처럼 가까운 분이며, 동시에 멀리 계신 낯선 분이었고, 소망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최책감과 수치심의 근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음의 문턱을 거닐면서 모든 모호함과 모든 불확실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생명의 주님이신 그 분이 거기 계시며, “오라, 나에게로 오너라.”고 부르시며, 죽음 저편의 문을 열어 주시며, “여기가 네 집이란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더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생생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죽음의 목전에서 깨달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자신을 삶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분노더라는 겁니다. 진정 고통스러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과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마음이 아프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찾아온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또 부탁을 해서 “저에게 상처를 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 주세요. 제 마음 중심으로부터 그분들을 용서한다고 말예요. 그리고 저 때문에 상처 받는 사람들에게도 다 말해주세요. 부디 저를 용서해 달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자신을 얽어매던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되어 완전한 자유를 느끼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는 수술 후에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회복된 후에 그가 깨달은 것은 “인생이란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죽을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는 긴 준비의 여정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살 것만 생각하지 않고, 죽을 준비를 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남은 생애의 첫날인 오늘의 삶에서 겪는 많은 부분의 두려움이나 근심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지금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어려운 시기입니다. 경제 위기라는 거친 풍랑이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한 동안 풍랑은 더욱 더 거세질 것 같습니다. 믿음 없는 눈으로 현실만 바라보면, 거친 파도만 보이고, 미친 듯 불어대는 바람 소리만 가슴을 울릴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몰려 울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46:1-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 하리이다”(시56:3) 라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예화) 미국에 한 중년 부부가 있었는데 아내의 시력이 너무 나빠서 눈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수술이 잘못되어 실명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남편은 매일 같이 아내의 직장까지 아내를 출근시켜주고 하루 일과가 끝난 후에는 집까지 데려다 주었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아내에게 서로 직장이 너무 머니 혼자 출근하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아내는 남편에게 너무나 섭섭해 했고, 사랑하는 남편이 그런 말을 한 것에 대해 배신감까지 느꼈습니다. 그리곤 이를 악물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후, 그 다음 날부터 혼자 출근하기 시작했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버스를 타고 하면서 많이 넘어지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혼자 다니는 훈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익숙해진 2년…, 버스운전 기사가 어느 날 이 부인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아줌마는 참 복도 많소. 매일 남편이 버스에 함께 앉아 있어 주고, 부인이 직장 건물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지켜보다가, 등 뒤에 손을 흔들어주는 보이지 않는 격려를 해주니까요." 이 말을 들은 부인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남편은 2년 동안 아내 몰래 그녀를 지켜주기 위하여 동행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 남편처럼 그의 신부된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함께 하시며 지켜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굳게 신뢰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 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라고 찬송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전심으로 기도할 때입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부르짖어야 합니다. 염려와 근심을 기도와 간구로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은 모두가 다 힘들 때입니다. 뜻한 대로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수 년 내에 세계 경제에 끼어 있던 거품이 빠지고, 각 나라 경제가 건실해 지면, 다시 경기가 살아날 것입니다. 그 때를 내다보면서 착실하게 실력을 쌓으십시오.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런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잠언의 말씀대로 실천해 보십시오.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자가 되려고 노력하십시오. 글로벌 시대에 걸맞는 일군이 되기 위해서 어학 실력을 쌓으십시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일군으로서의 신앙의 실력을 쌓으십시오. 말씀과 기도의 실력이 기본입니다. 섬김과 나눔, 봉사와 헌신이 기본입니다. 잘 준비된 사람은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추수 감사주일을 보내는 안양 교회 성도 여러분! 풍랑을 보내시는 주님의 섭리를 깨달으시고, 풍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루어 주고자 하시는 축복을 믿음으로 소망하면서 풍성한 감사와 찬송을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고난
마 8:27 / 최장규 목사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고난"이라는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고난." 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셨어요? 안 당하셨어요? 네, 예수님은 고난 당하셨습니다. 누구보다 더 많이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고난 당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왜요? 죄를 한번도 안 지으셨기 때문에,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으시기 때문에 고난 당하실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오늘은 2002년 사순절 기간 중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면서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의 고난이 진실로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오게 했는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사람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어떻게 하면 고난을 피할까? 어떻게 하면 고난을 당하지 아니할까?'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또 사람들은 할 수만 있다면 고난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심지어 내 고난이 줄어든다면 다른 사람이 고난을 받아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내 고난만 없다면, 내 고난만 줄어든다면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은 고난을 받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왜 이단이 생길까요? 왜 사이비가 넘칠까요? 그것은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고난을 피하려는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피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고난 중에 가장 큰 고난이 뭘까요? 죽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한번 태어났다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을 피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난을 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고난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은 "통과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고난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은 "통과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해서" 은혜를 더 깊게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게 받고, 하나님의 복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게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약함을 통해서 강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 보니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난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도 바울만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 모두가 다 고난을 피한 사람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고난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통과했습니다. 이삭도 고난을 통과했습니다. 야곱도 고난을 통과했습니다. 요셉도 고난을 통과했습니다. 모세도 고난을 통과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가 다 고난을 피한 사람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고난이 안 찾아온 사람들이 아니라, 고난이 더 많이 찾아온 사람들인 것입니다.
은혜의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의 길을 홀로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걸어야 할 모든 고난의 길을 예수님이 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원초적 문제인 의식주부터 죄의 문제까지 모두 다 고난을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고난을 다 짊어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쉽고 가벼운 멍에 아래 있기만 하면 고난을 능히 이기면서 고난을 통과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이 뭡니까? "고난이 없다"가 아니라, "너희가 내게 오면 나와, 함께 가면 고난을 다 통과할 수가 있다", 그 말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므로 말미암아 고난을 피하지 마시고, 고난 때문에 무릎 꿇지 마시고, 고난을 통과하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아지는 어미 소가 끄는 멍에 아래 있기만 하면, 멍에 아래 있기만 하면, 절대 힘들지 않습니다. 놀고 갈 수가 있습니다. 신나게 아주 노래부르며 갈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첫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로 모두가 다 고난과 고통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을 믿고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면, 주 안에 있으면, 주님과 함께 하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생명이 오고, 구원이 오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부요와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말씀하십니다. 또 우리 주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예수님 안에 있어서, 주님과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통과하는,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더 많은 간증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이 시간, 예수님이 짊어지신 원초적 고난을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에 감사하고 주님과 함께 고난을 통과하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머리 둘 곳 없으신 예수님
첫째로, 예수님의 고난은 무엇일까요? "머리 둘 곳 없으신 예수님." 그렇습니다. "가난하신 예수님, 집 없으신 예수님, 누구도 그를 맞이해 주는 자 없으신 예수님."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창조주가 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표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2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우리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만 "머리 둘 곳"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도, 태어나실 곳이 없어서, 누구 환영해 주는 분이 없어서 빈 마구간에 누워 있었습니다. 누워 계실 자리가 없어서 빈 구유에 누워계셨습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핏덩이 같은 애기 때, 헤롯왕이 그를 찾아 죽이려고 하니까 피난길을 떠났습니다. 애굽으로 피난 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도 그랬습니다. 자랄 때도 그랬습니다. 공생애 때도 그랬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육신의 아버지 요셉이 일찍 죽으니까 그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그 목수의 직업을 또 이어받았습니다. 목수는 어느 직업보다 힘드는 직업이 아닙니까? 대우를 잘 못 받는 직업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한 생활인으로서 심한 고생, 심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창조주가 되신 예수님이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이 고난 받으신 것은 우리에게, 우리에게, 여러분이나 저에게,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에게 참된 안식처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가 구원받은 은혜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이, 부요하신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가난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대신 가난해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고난 주간에, 우리가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할 뿐만 아니라, "이제 예수님이 고난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부요할 수 있다. 우리는 건강할 수 있다. 행복할 수 있다. 부요하게 살아갈 수 있다." 하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로 우리가 부요할 수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부요해야 한다. 부요해야 한다. 따라합시다. "나는 예수 안에서 부요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의 은혜로 부요해야 한다. 부요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요할 수 있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부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믿고, 나가서 전하고, 나가서 실천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적극적인 삶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감나무 밑에서 감이 내 입에 떨어진다가 아닙니다. 내가 감을 따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을 만드신 분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따먹기는 누가 따먹습니까? 우리가 따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적극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땅의 안식처뿐만 아니라, 영원한 안식처도 예비해주십니다. 성경에 말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로 3절에 보니까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가셨습니까? 천국에 가셨습니다. 왜 가셨습니까?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습니다. 때가 되면 우리를 데리고 저 천국을 가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집과 물질은 모두가 다 예수님이 고난 받으신 결과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난 때문에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되었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울 때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요? 주님이 주실 것이니까. 또 잘 될 때 우리가 교만할 필요가 없어요. 모두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없어도 감사해야 하고, 있어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요? 없으면 있게 될 것이니까 믿고 감사하고, 있게 되었으면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감사하면 지금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내 힘과 노력으로 이만큼 이루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욥기서 1장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 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그러므로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우리가 할 일이 뭡니까? 하나님 아버지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저 감사, 감사. 구원받은 것 감사, 지금까지 먹고 사는 것을 감사, 지금까지 입고 사는 것을 감사,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을 감사하면, 우리 하나님이 그 감사를 다 받으시고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더 넘치도록 우리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다 이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세우는 일에, 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앞장서서 이 사순절 기간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둘째, 목 마르신 예수님
두 번째, "목마르신 예수님." 우리 예수님은 머리 둘 곳만 없으신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은 목 마르셨어요. 목마르셨어요. 여러분, 밥 안 먹는 것보다 더 힘드는 게 무엇입니까? 물 못 마시는 겁니다. 금식을 해서 견디는 기간보다 물을 못 먹어서 견디는 시간이 훨씬 짧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목마르신 장면, 두 장면 나옵니다. 한번은 언제입니까? 수가성 우물가 여인과의 만남에서 우리 예수님이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한번은 언제입니까?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구세주로서 그렇게 매 맞으시고, 그렇게 가시관 쓰시고, 그렇게 양손과 양발에 못 막히시고,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우리 예수님께서 "목마르다"고 그러셨어요.
이 두 곳에서 모두 다 예수님의 목마름은 무엇이냐? 영적인 목마름과 연관된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죄로 인해 목마른 인간들을 대신해서 예수님이 목말라하셨어요. 죄인된 인간은 알지 못하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다 목마른 존재였어요. 하나님을 떠나면 다 목마르다고요. 영혼이 은혜가 충만하지 않으면 다 목말라요. 그래서 예레미야서 2장 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비유에서 지옥의 고통이 곧 목마름의 고통이라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6장 24절에 보니까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육의 목마름뿐만 아니라, 지옥의 목마름까지 대신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 목마름이 얼마나 컸던지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고 외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장 28절에 보니까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대신 감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목마른 자들은 모두 나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로 38절에 보니까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생수를 주실 뿐만 아니라, 모든 죄와 더러움도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합니다. 스가랴서 13장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다윗의 족속"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더 큰 은혜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생수는 값 없이, 돈 없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5장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우리가 진실로 그 예수님의 은혜를 안다면, 생수가 없어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생수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전하면서 우리가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은혜받은 자 아닙니까? 먼저 구원받은 자, 은혜받은 자, 성령받은 자, 은혜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처럼 우리가 사순절 기간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고난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고, 예수님의 고난 때문에 내가 치료받았고, 예수님의 고난 때문에 내가 부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우리가 이 받은 은혜를 생각해서 아직 구원받지 못한 가족에게, 친척에게, 친구에게, 이웃에게, 또 우리 민족에게, 세계를 향해서 우리는 전해주어야 합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이 왜 목말랐습니까? 그는 목이 말라서 물 길러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남편을 데려 오라"(요 4:16)고 말씀했습니다. 그 여인이 "없습니다. 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요 4:17)고 말했습니다. 그 여인은 남편을 다섯 번 갈아치웠습니다. 남편을 갈아치우면 목마름이 해결될 걸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마름을 해결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니까 목마름이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목마름이 해결되니까 물동이에 물을 길러왔다가 물동이를 던져두고 동네로 달려갑니다. "나에게 목마름을 해갈시켜준, 내 배에서 생수가 터져 나오게 해 주신 예수님을 와서 보라. 와서 봐라."고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보다 먼저, 오히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남편을 다섯 번을 갈아치우고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는 그 여인이 오히려 먼저, 제자들보다 먼저 예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나를 위해 살다가 목마르지 말고, 물질 때문에 목마르지 말고, 쾌락 때문에 목마르지 말고, 명예 때문에 목마르지 말고, 주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배에서 생수가 터져 나와서 이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서 함께 은혜로 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따라합시다. "전도하자. 전도하자. 전도하자." 전도하면 목마르지 않습니다. 내가 은혜를 받았다 하더라도 전도하지 아니하고, 내 중심으로만 살면 목말라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더 목마릅니다. 권세가 있어도 목마릅니다. 명예가 있어도 목마릅니다. 아름다움이 있어도 목마릅니다. 건강이 있어도 목마릅니다. 세상 것 아무리 쌓아도 더 목이 마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을 위해서 살면, 주님을 위해서 살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면, 베풀어주면서 살면, 나눠주며 살면, 예수님이 우리 때문에 고난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나가서 이 사랑을 나눠주고 베풀어주고 살면, 목마르지 아니하고, 배에서 생수가 터져 나와서 나도 마시고 남도 마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 논에도 물을 많이 줄 수가 있으며, 남의 논에도 물을 많이 대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배고프신 예수님
세 번째, 예수님의 고난은 어떤 고난이십니까? "배고프신 예수님." 따라합시다. "배고프신 예수님", "배고프신 예수님." 여러분, 배고파보셨어요? 배고픈 건 힘들어요. 진짜 힘들어요. 예수님은 배가 고프실 이유가 없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걸 창조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배고픔의 고통을 모르실 거야" 하고 생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배가 고파도, 예수님은 기적의 예수님이시니까 기적으로 진수성찬을 만드셔서 잡수실 거야." 천만의 말씀입니다. 왜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배고프러 오셨습니다. 배고프러 오셨습니다. 왜요?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기 때문에, 죄 값 때문에 배고픔이 왔습니다. 죄 값 때문에 가난이 왔습니다. 죄 값 때문에 헐벗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대신 우리를 위해서 가난하셔야 합니다. 배가 고프셔야 되요. 왜요? 우리를 부요케 하시고, 우리를 배부르게 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참 하나님과 함께 참 인간이시거든요. 참 신이요, 참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안 잡수시면 배고프세요. 맞으면 아프세요. 그러므로 굶주림의 고통이 얼마나 얼마나 심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 21장 18절에 보니까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배고프신지라." 예수님도 참 사람이기 때문에 배고프셨어요. 왜 배고프셨어요? 배고픈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하여 대신 배고픔을 당하시려고 예수님이 그렇게 가난하시고 배가 고프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에서 이삭을 먹을 정도로 굶주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2장 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또한 예수님은 사람들을 고치시고, 돌보시느라 식사할 시간조차도 없으실 때가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6장 31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분이 왜 배가 고프실까?"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예수님의 배고픔은 인간을 잘 먹게, 인간을 넉넉하게 살게 하시고, 인간을 배부르게 하시고, 배고픈 인간들을 먹여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배고프신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배고픔보다 자녀들의 배고픔, 성도들의 배고픔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보세요. 마태복음 15장 32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3일 동안 제자들과, 예수님과, 많은 무리가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못 잡수셨죠. 그런데 누구를 걱정합니까? 자녀들을 걱정합니다. 성도들을 걱정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 부모의 마음인 줄 믿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도 우리 예수님께서 아침부터 저녁, 황혼이 될 때까지 천국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많은 병자 치료하셨습니다. 믿음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황혼 저녁이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빌립을 불러 말씀합니다. "저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주라"고 말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를 축사하시고 떼어줬더니 남자만 5천 명, 부녀자까지 수만 명이 원하는 대로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만 되기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병든 자를 치료하기 원하시고, 배고픈 자가 부요케 되기 원하시고, 가난한 자가 넉넉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 우리 예수님의 마음인 것 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배고픔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먹이시는 목자이십니다. 당신을 생명의 떡으로 내놓으셔서 영원히 우리에게 배고프지 않게 하셨습니다. 성경에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안다면, 예수님의 고난의 은혜를 우리가 안다면, 우리 주위의 배고픈 이에게 육의 양식과 영의 양식을 함께 나누어줘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난 방학이 싫어요." 궁핍한 학생들이 말합니다. 왜? 방학이 되면 급식을 제공받지 못하니까. "방학이 싫어요." 방학이 아니면 급식을 제공받아서 점심을 먹을 수 있는데, 방학이 되면 학교에서 급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점심을 굶어야 됩니다. "난 방학은 싫어요." 하는 학생이 있다는 거예요. 못 먹는 소년 소녀 가장들, 자녀 없는 생활보호 대상자, 독거 노인 할머니, 할아버지들, 어떻게 해야 됩니가? 우리는 생각해야 되요. 우리가 사순절 기사범대학 교무행정실(880-7606)간에, 고난 주간에, 예수님의 고난 때문에 우리가 배부르게 되었다면, 이 고난 주간에 이를테면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우리 주위에 나보다 배고픈 사람, 헐벗은 사람, 고통 당하는 사람, 외로운 사람, 부모 없는 소년 소녀 가장들, 자녀 없는 어른들을 우리가 찾아가서 돌봐드리는 것이, 돌보아 주는 것이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이 고난 당하신 것을 기억하며 사는 길인 것 아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긴다. 예수님을 섬긴다." 만이 아니라, 고난 주간에 우리가 할 일이 뭐냐? 예수님이 나 때문에, 우리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다면, 지금 우리 주위에 많은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대신해서 우리가 방문해주고, 내가 찾아가 주고, 내가 가서 나눠 주고, 내가 가서 베풀어 주고, 내가 가서 전해주면서 함께 사는 이것이 진정한 사순절 기간에, 고난 주간에 우리가 살아가야 길인 것 아시기를 바랍니다.
안식처가 없고, 목마르며, 배고픈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원초적인 고난의 문제까지도 우리 위해서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사순절 기간이 되야 될 것입니다. 나를 쳐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에게 고난의 은혜를 증거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려면 지금 고난 당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나눠주고, 베풀어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일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될 때, 진정한 사순절 기간이 되고 고난 기간이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