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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진중공업 노동자 신동순 Ⓒ문양효숙 기자 |
노동자로 살아온 30여년,
산재신청에 대한 회사의 보복으로 노조활동 시작
강원도가 고향인 그는 열일곱에 자동차 정비를 시작했다. 스물한 살이 되던 해 현대중공업 수송부에 입사해 5년간 일했지만 작업 중 허리를 다쳐 회사를 나왔다. 서른다섯 살까지 일일공으로 용접을 하며 돌아다녔다. 첫째 아이가 자라면서 안정된 직장을 찾아 서류를 낸 곳이 울산 한진 중공업이었고, 그곳에서 15년을 일했다. 울산 한진중공업에 입사하던 1995년에 처음으로 노동조합에도 가입했다.
입사한 다음 해인 1996년, 작업 중이던 동료가 대형망치로 신동순 씨의 무릎을 내려치는 사고가 일어나 심하게 다치고 말았다.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몸을 추슬러 3개월 후 복직 했을 때 회사에서는 그를 원래의 보직으로 보내주지 않았다.
“지금도 잘 때 무릎이 욱신거려요. 심하게 다쳤었거든요. 그런데 복직했을 때 회사에서 깡통을 주면서 담배꽁초를 주우라는 거예요. 풀이 자란 곳에 가서 풀을 베라고도 하고 고철장 가서 분리수거 시키고 녹슨 곳에 페인트칠을 하라고도 했어요.”
산재신청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러나 신 씨는 3개월간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 가족들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저 견뎠다”고 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후 그는 바로 노조에서 ‘산업안전부장’을 맡았다. 노조에서 산재를 신청한 사람들을 사측과 협의해 보호해주는 일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때부터 신 씨는 조금씩 노조 활동을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노조 대의원이 되어 교섭 자리에 들어가 회사와 동등한 입장으로 조합원들을 대변하면서 이런 게 노동조합이구나 싶었다. 간혹 의견이 모아지지 않거나 노조 간부들이 조합원들의 편에 바로 서지 못할 때엔 힘이 빠지기도 했다.
“지회장들에게 늘 똑바로 해야 한다고 말해요. 국민이 대통령을 나무랄 수 있는 것처럼, 노조 지회장들에게도 그렇게 했어요.”
신 씨가 노조에서 활동하던 당시 김주익 지회장은 울산, 마산, 다대포, 영도의 한진중공업 공장 네 곳을 통합한 노조의 첫 번째 지회장이었다. 2003년에 김 지회장은 김진숙 지도위원이 올랐던 바로 그 85호 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였다. 그리고 회사 측과의 협상이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교착상태에 빠지자 농성 129일째가 되던 날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사건을 겪으며 ‘2003년’은 신 씨에게 고유명사가 됐다. 그에게 2003년은 지나온 시간 가운데 하나, 추억할 수 있는 한 해가 아니라 ‘2003년’이라는 사건이 됐다. 신 씨는 자연스럽게 ‘2003년처럼’, ‘2003년은’, ‘2003년을 겪은’이라는 표현을 썼다.
▲ 한진중공업 측에서 85호 크레인을 철거한 후 기존의 벽 위에 콘크리트로 2M의 벽을 올렸다.Ⓒ문양효숙 기자 |
노조와 함께 일하고 싸워온 20년, 그에게 노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했다.
“제가 뭐 깊이 아는 사람도 아니고...” 그는 한참을 먼 산만 바라봤다. “갑갑한 것만 봐 와서요. ‘노조’자만 들어도 저는... 사실 노조가 있다고 해서 얻은 게 뭐겠어요? 단 하나, 노조가 없었다면 이 정도 싸워보지도 못했을 거예요. 만약에 노조가 없었다면 ‘내일부터 나오지 마’이러면 노동자들은 아무 소리 못하고 바닥에 나 앉아야 하는 거죠. 그렇지만 노조 때문에, 노조원들 살려보겠다고 사람이 크레인에서 외롭게 목을 메고...” 다시, 2003년 고(故) 김주익 지회장 이야기다.
담백한 그의 회고에는 어쩔 수 없는 노조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그러나 그의 노조인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는 지금 반으로 쪼개지다 못해 회사 측과의 교섭권마저 잃은 상태다. 회사의 지원 하에 새 노조인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이 설립되면서 많은 이들이 새로 생긴 노조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2012년 5월 민주노총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와 별개로 기업별 노조가 출범되면서 조합원의 80% 가까운 550여명이 넘어갔다.
▲ 부산시 영도의 한진중공업 본사. 천막농성장 앞에 올해 설립된 새 노조가 내 건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있다. Ⓒ문양효숙 기자 |
"바로 밑에서 나에게 기술을 배우고 그랬던 친구가 복수노조로 가면서 ‘형님은 손재주가 좋으니 얼마든지 먹고 살수가 있지 않느냐. 너무 미안하다’며 술 한 잔하고 펑펑 울었어요. 그런데 정말 한명, 한명 새 노조로 넘어갈 때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화가 나더라고요. 어떻게 싸워왔는데, 어떻게 지켜왔는데... 게다가 회사 측 노조에 가입해도 사실 달라지는 건 없거든요. 당장 너무 불안하니까 그런 거죠. 다들 알고는 있을 거예요.”
한진중공업 영도공장의 작업라인은 크게 일반 배를 만드는 상선 라인과 군함을 만드는 특수선 라인으로 나뉜다. 이 중 군함은 법적으로 국내에서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현재 특수선 라인만 가동 중이다. 이마저도 전체 인력 700여 명 중 150여명만이 라인에 투입되어 있다. 현장에 일이 없는 까닭이다. 회사는 12월 1일부터 6개월간 정부보조를 받는 유급휴직을 실시하였고 휴직이 끝난 노동자들 중 회사측 노조에 가입한 이들만 십여 명씩 현장으로 불러들였다.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의 조합원 중 회사 안으로 들어간 이는 단 한 명뿐이다. 한진중공업은 휴직인 노조원들에게 ‘만약 밖에서 회사의 명예를 회손 시킨 경우, 재취업에 불이익을 준다’고 으름장을 놨다. 회사는 노조원들이 한진 작업복을 입고 거리를 다니거나 다른 집회에 참여해서는 안된다는 공문을 보내고 트위터를 감시하기도 한다. 현재 정리해고자와 휴직자들은 대부분 일용직 일을 하고 있다.
공장 앞 농성 천막은 지난 6월 7일 설치됐다. 회사가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와 민주노총 부산본부를 상대로 낸 158억의 손해배상소송 철회와 영도 조선소 정상화, 업무 복귀 약속 이행을 요구하고 있다.
“이게 최선일까 싶어요. 교섭권도 잃어버린 우리에게 천막 농성이 최선일까. 우린 정말 맨 몸뚱이 밖에 없는 노동자고 이건 죽기 살기로 싸워야 끝날 싸움인데, 모든 걸 걸지 않으면 안 되는데, 사람 목숨을 가지고 크레인에서 싸웠던 게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는 1년 전 크레인에 올라 40일 동안 단식을 한 후 병원에 실려 갔을 때에도 “그렇게 내려오면 안 되는 거였다”고 말했다. 크레인에서 단식하는 중에 그는 늘 죽음이 바로 옆에 와 있다고 생각했다.
▲ 천막농성장 앞에서 신동순 씨. Ⓒ문양효숙 기자 |
그런 신 씨에게 희망버스는 가슴 벅찬 기억이다. 희망 버스가 “생명을 연장시켰다”고 했다.
" ‘두 개의 문’ 보셨어요?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경찰들이 옆 크레인에서 시시때때로 컨테이너로 접근 훈련하고 그랬거든요. 희망버스가 아니었다면 김 지도위원도, 저도 살아 있을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돼요.”
도무지 그런 ‘쎈’ 투쟁을 해가는 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그에게 우회하지 않고 정공법으로 모든 걸 거는 개인의 힘은 뭐냐고 물었다. “갑자기 머리가 띵 하네요...” 라면서 한참을 생각에 잠기더니 “남에게 억압받는 게 싫은 모양이예요, 내가” 라고 답한다.
“지나가면서 서로 같이 인사할 수 있는 거, 그런 거요. 그게 사람이 사는 모습인데, 관리자라고 해서 위에 군림하려고 하고, 노동자라고 해서 쓰다만 휴지처럼 대하고, 그런 게 싫어요. 경영권을 공유하면 왜 안 된다는 건가요?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어요. 누구에게 억눌려 사는 게 싫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그는 조용히 후배들에게 다른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고도 했다.
“술을 한 잔하거나 회의를 할 때 젊은 후배들을 보면 ‘생각이 참 바르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진짜 지켜주고 싶은 후배들이예요. 어떨 땐 배울 점도 많고요. 그 중 ‘2003년’을 겪은 친구들도 있어요. 그 일 겪었던 친구들은 저보다 더 의식이 강했으면 강했지... 크레인에 있을 때 그 친구들한테 그 좁은 공간에서 ‘너희들은 아직 젊다’고 하면서 안 내려간다는 걸 강제로 내려보내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어쨌든 저야 뭐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까 젋은 사람들이 문제죠”
가족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 그러나 후배들에게 조금 다른 세상을 물려주고 싶어
4년제 대학 조선학과를 다니던 그의 아들은 "어려부터 무엇을 봤는지" 군대 제대 후 대학을 그만두고 전문대로 간다고 했다. 신 씨는 "그러라"고 했다. 신 씨의 바램은 "아들이 공부를 더해서 자신 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이지만, 아직 젋은 사람들을 위한 다른 세상은 열리지 않았고 보다 혹독해지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해고자들, 투쟁을 일상으로 사는 모든 이들이 그렇듯, 그도 가족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어제는 저 대신 일하는 아내에게 ‘집에만 있는 내가 싫어진다’고 투정했더니 신변에 변화가 생긴 줄 알고 갑자기 잘해주더라고요. 미안하게끔. 소파에서 자면서 아래에서 자는 아내를 내려다보는데 맘이 짠했어요.”
신 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는 노동가요는 하나도 없는데 가끔 노래를 부르면 가슴이 울컥한다고 했다.
“‘흩어지면 죽는다’ 이런 노래 구절이요. 만인이 다 아는 건데- 흩어지면 정말 끝이거든요. 내가 한이 맺혀서 그런가? ‘임을 위한 행진곡’ 이런 노래도요. 2003년이 떠올려지기도 해요. 지금도 그렇게 살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요.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로 산다는 것 자체가 참.”
신 씨의 낮은 한숨에 노동자로 살아온 그의 오랜 인생이 함께 실려 온다.
309일을 크레인 위에서 버틴 김진숙 지도위원을 살린 희망버스는 우리 시대 새로운 연대와 열정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상황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렇기에 희망버스가 남긴 것이 무엇인가, 열정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아직 이르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회사는 복수노조를 만들고 해고자들을 감시하며 손해배상 소송을 거는 등 더 치밀하게 더 거대한 힘으로 노동자들을 압박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중간 페이지를 넘긴 이 싸움의 이야기가 “그래서 자본이라는 괴물에 맞서 싸운 용감한 해고자들은 수많은 역경을 넘기고 승리해 마침내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지고 볶고 살았더랍니다”라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려면, ‘연대’라는 마법의 힘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