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대 경제 선진국, 필리핀에 대한 소고(小考)
'양극화'의 궁극적인 해답을 보여주는 나라
대한민국의 성공신화가 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
국내외적으로 필리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저렴한 비용으로 갈 수 있는 어학연수와 은퇴자들의 이민지로 각광 받고 있으며, 밖으로는 1000 여명의 사상자를 낸 ‘레이테 섬 산사태’와 아로요 대통령의 ‘국가 비상사태 선포’ 때문 일 것이다. 국내외적으로 필리핀에 이목이 집중된 시기에, 필리핀 수도 마닐라 근교에 체류하면서 느낀 바가 적지 않았다.(또한 지난 4월 30일에는 아로요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노동절 시위를 앞두고 필리핀 정부가 ‘적색 경계경보’를 발령하였다고 한다.)
많은 나라를 다녀보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국제공항 주변은 무척이나 잘 정돈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필리핀의 이미지 즉, 관광, 휴양지, 신혼여행의 나라라는 고정관념에 가까운 생각을 가진 채, 필리핀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새벽에 도착한 나의 필리핀 이미지는 무참하리만큼 깨졌다. 영화에서나 보던 슬럼(slum)가를 옮겨놓은 듯 했다. 판잣집, 거리에 넝마를 메고 가는 사람들, 신호등이 없어 새벽인데도 무질서한 거리, 여기저기서 울리는 경적소리, 경찰들의 검문, 숨 막힐 듯한 공기.. 여기가 사람 사는 곳이 맞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리핀의 첫인상은 "what the heck..." 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은 지경이었다.
여기서 한 달 동안 지내다가 무사히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그래도 내가 지내는 곳은 아니겠지 라는 기대로 억누를 수 있었다. 때마침 공항에 마중 나온 분의 조심스런 설명이 이어졌다. “여기서 혼자 다니지 마세요. 강도는 흔하고요. 총 맞을 수도 있습니다. 택시도 혼자 타시지 마시구요. 백화점 화장실도 결코 안전하지 않습니다.” 보여 지는 것과 실제 생활하는 것이 일치하는 나라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3일이 지난 2월 17일 필리핀 레이테 섬에서 참사가 발생했다. 현지 언론은 산사태로 주민 973명이 진흙더미 속에 묻혀 희생됐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었다. 참사가 발생한지 13일 후에 아로요 대통령을 겨냥한 ‘제3차 피플 파워’ 기도로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각국의 외신들은 쿠데타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고 연일 뉴스에서 소식을 전하기에 바빴다.
별다른 탈 없이 소요는 진정되었지만, 비상사태 선포 이후 아로요 정권은 언론사에 대한 압수수색 등을 잇달아 실시하며 보도를 통제하고 있어서 인지, 아니면 필리핀 국민들이 관심이 없어서 인지는 모르지만 필리핀의 중대한 두 사건에 대해 필리핀 국내 언론은 별 관심도 없어 보였고 관심이 있다하더라고 단순 가십(gossip)거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참고로 ‘국경 없는 기자회’가 발표한 2005년 `언론자유 세계 순위`에서 조사 대상 167개국 중 태국은 107위, 필리핀은 139위에 그쳤다.
경제 상황은 더욱 심각해 보였다. 최근 우리 사회에 유행처럼 돌고 있는 ‘양극화’란 무엇인지 궁극적인 해답을 보여주는 나라라고 할 수 있겠다. 필자가 현지에서 생활했던 곳은 필리핀 현지에서 치안상태가 그나마 좋고 부자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 거리에서도 구걸하는 사람들과 판자촌을 너무나 쉽게 볼 수 있었다. 판자촌에서는 도대체 몇 명이나 그 안에서 생활을 하는지 현지인들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필리핀 8600만 명 인구 중 3분의 1이 절대빈곤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 필리핀은 19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아시아에서는 일본 다음의 경제를 자랑하는 국가였다. 박정희 대통령시절 경부 고속도로도 필리핀의 고속도로를 모델로 지어졌다. 또한 서울 광화문의 쌍둥이 빌딩(광화문에 쌍둥이 빌딩이 있었나하고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문화관광부와 미국 대사관 건물이 쌍둥이 빌딩이라고 한다. 이 건물 역시 당시 상당한 기술력을 보유했던 필리핀의 엔지니어들에 의해서 지어졌다고 한다.
이 후 마르코스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와 연이은 부정부패 그리고 정치 불안으로 국내외 투자자들은 떠났다. 이때부터 필리핀의 경제는 '아시아의 병자(A sick man of Asia)'로 전락 했다. 일본에 이어 아시아 2위의 경제 선진국이던 필리핀의 1980년 당시 1인당 국민소득(GDP)는 608달러,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0년의 소득은 988달러, 여전히 1000달러 미만을 밑도는 수준이며,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퇴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필리핀에서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생각은 어떠할까? 체류 중에 만난 필리핀의 현지인은 지극히 소수에 불과했지만, 현지 사정에 대해서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필리핀의 중산층 정도의 생활수준과 대학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이였다. 주로 교사들, 대학에서 컴퓨터, 디자인, 언론 등을 공부한 재원들이었다.
이들과 대화를 하게 될 경우, 대부분 나타나는 공통점은 필리핀에서 떠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간호사 자격증이나 외국 교사 자격증, 외국 인증 컴퓨터 자격증 등을 따서 미국이나 캐나다로 취업을 해보겠다는 생각들이 강했다. 로마제국이 쇠약해진 징조를 보일 때, 로마를 둘러싼 종족들은 이제 더 이상 제국에 얹혀살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 중 몇몇은 한국에서 생산직 노동자로 공장에라도 취직할 수만 있다면 가고 싶어 했다.
기회만 된다면 이민이나 취업으로 해외로 나가고 싶어 하지만 필리핀의 중산층인 이들로는 언감생심(焉敢生心) 여권이나 비자 조차 만들 여력이 되지 않는다. 여권을 받는다고 해서 필리핀 국민들은 여행을 우리나라 국민들처럼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몇몇 나라를 제외하면 세계 어느 나라든지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지만 필리핀의 경우 홍콩 등을 제외한 모든 나라의 비자가 필요로 하는 나라이다. 특히나 미국 비자는 이들로서는 무척 어렵다.
우리나라도 필리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장기화된 실업과 외화를 벌어들일 목적으로 젊은이들이 해외로 나간 적이 있었다. 1963년에 파독(派獨) 광부 500명 모집에 4만6000명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상당수가 대학졸업자와 중퇴자들이었다. 70년대 중반에는 서베를린에만 한국 간호사가 2000명이 넘었다. 66-76년 독일로 건너간 한국 간호사가 1만30명, 광부들은 63-78년까지 7800여명이 건너갔다.
당시 남한 인구 2400만 명에 정부공식 통계에 나타난 실업자 숫자만도 250만 명이 넘었다. 이런 시절이니 매월 600마르크(160달러)의 직장에 지원자가 밀려드는 게 당연한 일이다. 이들의 송금액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GNP의 2%대에 달했다.
대한민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가 놀라는 경제발전을 이루어냈다. 60-70년대 독일로 광부들과 간호사들 같은 분이 희생이 없었다면 필리핀 젊은이들이 힘없는 눈동자로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는 없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성공 신화가 이들에게는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인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닮은 설움과 빈곤을 경험했던 아시아의 형제국이라 그런지 필리핀에 대한 마음은 약간의 측은함과 우리나라에 국민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감사함, 두 가지가 공존한다. 외국에 가면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그들에게 이런 느낌을 받을 때마다 가슴에서는 ‘대한민국’을 외치고 있었다.
Together Tour
필리핀 클락, 앙헬레스, 수빅 기타 지역에서 Together Tour로 여행업을 하고 있습니다. 골프, 관광, 호텔, 풀빌라 많은 문의 부탁 드립니다.
[출처] 1970년대 필리핀은 경제 선진국이었다.|작성자 GT Tou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