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이승만 모셔라” 특명 받은 JP, 하와이 요양원에서 목격한 것 (58)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1875~1965)은 1960년 4·19혁명으로 하야한 뒤 미국 하와이로 망명해 호놀룰루에서 5년을 살았다. 65년 7월 19일 마우날라니 요양원에서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양자 이인수(당시 34세)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쓸쓸히 여생을 마감했다.
박정희와 이승만의 ‘역사적 만남’. 1955년 11월 3일 이승만 대통령(오른쪽)이 강원도 인제군의 3군단을 찾아 예하 5사단장이던 박정희 준장과 악수하고 있다. 2015년 중앙일보가 김종필 증언록을 연재하며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발굴, 신문 지상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사진 대한뉴스 캡처
62년 11월 중앙정보부장이던 나는 국무부와 중앙정보국(CIA)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할 때 하와이에 들렀다. 호놀룰루 공항에 내리자마자 태평양사령부의 안내를 받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때 침몰한 전함 애리조나호에 가서 헌화하고 이승만 전 대통령을 찾아갔다. 그는 호놀룰루 동쪽 산기슭에 있는 요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와이키키 해변이 멀리 보이는 핑크빛 3층 건물의 2층 끝 방 202호실이었다.
이 대통령은 내 가슴께까지 닿는 높은 철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은 채 신음를 내고 있었다. 양팔은 깁스를 한 채 끈으로 묶여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평소 검소했던 프란체스카 여사는 10~20달러만 주면 살 만한 원피스를 입고 눈물을 글썽이며 옆에 서 있었다. “대통령께서 왜 이렇게 되셨느냐”고 물으니 이 대통령이 바로 전날 “내가 여기 왜 있어. 서울 가. 서울에 갈 거야”라고 하면서 침대에서 일어나려다 낙상(落傷)했다는 것이다.
🔎인물 소사전: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Rhee·1900~92)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부인. 1933년 스위스 제네바 여행 중 국제연맹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러 온 이승만과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34년 미국 뉴욕에서 결혼했다. 신랑이 59세, 신부는 34세였다. 45년 10월 이승만과 함께 귀국했고, 48년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경무대 안주인이 됐다. 60년 4·19혁명 이후 하야한 이 대통령과 함께 하와이로 떠났다. 65년 남편과 사별 뒤 잠시 오스트리아에 돌아갔다가 70년 귀국, 양자 이인수 내외와 이화장에서 여생을 보냈다. 한때 ‘호주댁’으로 불렸는데 출신 국가를 오스트레일리아로 혼동한 탓이었다.
1962년 하와이 마우날라니 요양원 병실의 이승만 박사(오른쪽)와 프란체스카 여사. 중앙포토
나는 이 대통령의 얼굴을 한참 동안 지켜봤다.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아픔을 참느라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참을 서 있다 호주머니에서 현금 2만 달러를 꺼냈다. 서울을 떠나기 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챙겨준 돈이었다. 그는 “이거 열 배를 해드려도 모자랄 텐데 아쉬우나마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가져다 드려라”고 내게 지시했다. 그때 2만 달러는 한국에서는 대통령이나 만질 수 있는 큰 금액이었다. 돈을 받아 든 프란체스카 여사가 울먹이더니 눈물을 터뜨렸다. 새까만 눈이 아닌 새파랗고 큰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그때 처음 봤다. 가슴이 아팠다. 아직도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이 대통령 부부의 하와이 시절은 어려웠다. 생활비가 나올 곳이 없었다. 일제시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뒷바라지를 해오던 월버트 최라는 교포가 대통령 부부를 돌보고 있었지만 충분치 않았다. 일국의 대통령 부인이었던 프란체스카 여사가 그런 처지에 놓여 있었다.
사실 2만 달러는 그냥 가지고 간 게 아니다. 박 의장은 출국 전 나에게 “하와이에 가서 우남의 환국을 추진해보라”는 특명과 함께 돈을 주었다. 박 의장은 “이 박사가 돌아오시겠다고 하면 정중히 모셔라”고 말했다.
나는 미국인 요양원장에게 “이 대통령을 서울로 모셨으면 좋겠다. 본인도 가고 싶어 하시고 한국의 지도자도 이 대통령을 모시길 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요양원장은 난색을 표시했다. “지금 비행기를 타면 그 자리에서 돌아가신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 여기 누워 있어야 한다.” 숙소에 돌아와 박 의장에게 전화를 드렸다. 내가 본 상황을 전해주니까 한참 동안 아무 말을 않고 계셨다. 박 의장은 “그렇게 위독한가. 어쨌든 잘 모셔라. 내가 이 박사를 꼭 환국하게 해드리겠다고 전해라”고 당부했다. 이후 이 박사의 병세는 더 악화됐다. 돌아가신 다음에야 그의 유해(遺骸)를 한국에 모실 수 있었다. 65년 7월 23일 오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유해를 실은 미군 수송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효상 국회의장, 조진만 대법원장, 정일권 국무총리 등 3부 요인을 대동하고 공항에 나가 이승만 박사의 유해를 영접했다. 그때 나는 미국에 있었다.
세간에 ‘박정희 대통령이 이승만 박사의 환국을 막았다’는 얘기들이 있는데 이는 과장됐거나 잘못이다. 박 의장은 그와 반대로 이 박사의 환국을 원했고, 추진했다. 그때 정부 내부뿐 아니라 4·19 세력과 언론 등에서도 이 박사의 귀국을 반대하는 의견이 강했지만 박 의장과 나는 그렇지 않았다. 박 의장은 우남 이승만 박사를 건국의 아버지로 생각했다. 적당한 때에 이 대통령을 서울로 모실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가 62년 말이었다.
1934년 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할 당시의 이승만 박사. 당시 임시정부 외교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대통령은 근대화된 사고로 어떻게 하면 이 나라를 자유민주국가로 성장시킬 수 있느냐를 고심하던 애국자였다. 해방되던 해인 45년 이미 70세(당시 한국 남자의 평균 수명은 43세)의 노구로 귀국해 48년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흔히 이 대통령을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 선생과 비교해 평가하곤 한다. 조국의 미래에 대한 우남의 생각은 백범과 달랐다. 단적으로 얘기해 김구 선생은 낭만적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김일성하고 만나 얘기하면 왜 통일이 안 되겠느냐”고 주장했다. 실제로 백범 선생은 5·10 총선을 앞둔 48년 4월 북한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 김일성을 만났다. 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곧이어 북한은 남쪽에 공급해 왔던 수풍발전소의 전기를 끊어버렸다. 당시 북한은 남한 전기의 70%를 공급하고 있었다. 또 그해 모내기철을 앞두고 38도선 바로 아래 황해도 연백평야의 논에 대던 물길도 막아버렸다. 반면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부터 “김일성과 같은 공산주의자와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힘이 있어야 한다. 남한에 이북보다 더 강력한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우남이었기에 김일성이 남침했을 때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그를 막아냈던 것이다.
6·25전쟁이 끝나갈 무렵 유엔군 사령관인 클라크(Mark Wayne Clark·1896~1984) 대장이 휴전협상을 하기 위해 판문점으로 간다며 인사차 경무대에 들렀다. 78세 노인이었던 이 대통령은 클라크 대장에게 다가가더니 손으로 어깨에 붙어 있는 별 넷 계급장을 들썩거리며 “이건 싸워서 이기라고 달아준 건데, 항복하는 데 서명하라고 달아준 건가”라고 쏘아붙였다. 클라크 대장은 굳은 얼굴로 “나는 군인이라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뿐”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통령은 번쩍이는 별 네 개를 달고 와 휴전협상에 나서는 클라크 대장이 보기 싫었던 것이다. 이 대통령은 반공포로를 석방해 미국을 놀라게 했고,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57년 얘기도 인상적이다. 백선엽(당시 37세) 장군이 이 대통령의 호출을 받고 경무대로 올라갔다. 거기엔 육참총장을 지낸 정일권(1917~94) 합동참모본부 의장도 있었다. 제1야전군 사령관으로 있던 백 장군은 전투복을, 정일권 의장은 정복을 입고 대통령 앞에 섰다. 정 의장 앞으로 다가간 대통령은 그의 어깨 별을 가리키며 “하나, 둘, 셋, 넷…. 별 네 개면 뭔가?”하고 물었다. 대통령의 예기치 못한 질문에 바짝 긴장한 정 의장은 “대장입니다”라고 답했다. 대통령과 정 의장의 문답이 이어졌다. “이 위는 없어?” “있습니다. 다섯 개를 붙이면 원수가 됩니다.” “원수는 누구야?” “각하십니다.” “내가? 음… 그래?”
이 대통령이 이번에는 백선엽 장군 앞으로 다가가 비슷하게 물었다. “누구 지시를 받나?” “작전지시는 유엔군사령관으로부터 받고, 행정지시는 참모총장에게 받습니다. 옆에 있는 분은 제 상관입니다.” “그래? 자네보다 이 사람이 높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제야 이 대통령은 두 사람 주변을 한 바퀴 빙 돌더니 백 장군에게 “그럼 그거(육참총장) 해봐. 이제 됐어. 알았어? 나가들!”하고 말하더니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육군참모총장 인사를 단칼에 끝내버렸다. 국군 통수권자인 이 대통령이 군 수뇌부를 어떻게 장악했는지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는 일화다.
이승만 박사는 그늘도 있었다. 자유당 독재와 부정 선거, 학생 시위와 희생…. 4·19는 그의 정치의 그늘이다. 하지만 현재의 입장에서 덮어놓고 과거를 전부 부정해서는 안 된다. 지난날에는 지난날의 논리가 있고, 오늘은 오늘의 논리가 있다. 지난날은 그때의 논리로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것을 오늘의 잣대로 비난할 순 없다. 어제는 오늘의 어머니다. 어제의 어머니가 없었으면 오늘의 나도 없다. ‘공칠과삼(功七過三)’이란 말도 있잖은가. 과거의 잘못은 교훈으로 삼고 배울 것은 뽑아서 오늘을 살찌워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