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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린 두 사람을 고치시다
마 8:28-34
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마 8:28-34 / [귀신과 돼지 떼;막5:1-20,눅8:26-39]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도착하셨을 때 귀신 들린 두 사람이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무덤에서 살고 있었는데 너무도 사나워서 아무도 그 근처를 지나다닐 수가 없었다. 29) 그런데 그들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아직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찾아와 우리를 괴롭히실 작정입니까?' 30) 그때 마침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돼지 떼들이 모여 있었다. 31) 귀신은 `만일 당신이 우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에게 들여 보내 주십시오' 하고 애걸하였다. 32) 예수께서 `들어가라' 고 명령하시자 귀신들은 그 사람들에게서 나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는 모두 비탈을 내리달려 물속에 빠져 죽었다. 33) 돼지 치던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마을로 달려가 일어난 일을 알렸다. 34)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다 달려 나와 예수를 보고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을 지나실 때에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를 만난 사나운 귀신(28-29) 가다라 지방에는 해변으로 이어지는 몇 개의 길이 있고, 그 길이 끝나는 지점에 산으로 연결되는 언덕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고대의 돌무덤들이 흩어져 있으며, 이 무덤들의 일부는 귀신 들린 자들의 거처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사나운 귀신이 들린 두 사람들을 만나십니다. 이때 귀신들린 자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근본 목적, 사탄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을 알고 매우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귀신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왜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공동번역)라고 항변합니다. 여기서 ‘때’는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주로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을 심판하여 영원한 불 못에 던지실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계 20:10).
예수께서 귀신을 돼지 떼에 들어가라고 명하심(30-32) 예수님을 만난 귀신들은 이미 자신들이 쫓겨날 것을 알고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에 들여보내달라고 합니다(막 5:13). 이처럼 귀신들이 예수님께 간구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한 것과, 사탄과 그 추종자들의 활동 역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증거 한 것입니다(욥 1:12). 그러면서도 자신들을 돼지 떼에 들여보내달라고 하는 것에는 가다라 지방의 돼지 떼를 몰살시켜 그 지방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게 하려는 숨은 목적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서 떠나기 원하는 주민들(33-34)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 몰살하는 것을 본 돼지 치는 자들은 시내로 달아납니다. 그리고 소식을 전합니다. 소식을 전해들은 돼지 떼 주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들이 입은 경제적 손실로 인하여 안타까웠을 뿐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의 물질적 손해를 입는 것이 두려워 예수님께 그 지방을 떠나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물질적인 욕심으로 채워지면 영혼은 병들 뿐 아니라, 결국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악의 문이 됩니다(잠 1:19; 행 5:1-6; 딤전 6:9; 약 1:15; 5:3). 이처럼 물질적 이해타산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진정 생명의 구주를 영접할 수 없습니다.
적용: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마 6:24). 지금 당신의 마음이 가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입니까? 물질입니까?
우리들은 주님께서 소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이 죄사함 받고 구원 받는 것이며 정상적이고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매일 매일을 죄 가운데서, 그리고 죄로 인한 여러 고통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이러한 인생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우리가 주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겸손하고 간절한 자세로 주를 바라고 그의 도우심을 기다린다면 주님은 창조의 능력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 설 교 >
가다라 지방의 광인
마 8:28-34 / 박인걸 목사(수주중앙교회)
근래 하루에 1건 꼴로 길거리에서 흉기를 든 남자가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을 해치는 일들이 일어나 국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습니다. 서울 광진구에서는 전과 11범이 성폭행을 일으켰고, 며칠 뒤에는 전과 22범이 연쇄 성 폭행 사건을 일으켰으며, 14일에는 강원도 양양에서 방씨라는 사람이 한 주점에 들어가 술을 시켜 놓고 마지막 손님이 나가자 여 주인을 자기 옆에 앉게 한 후 괴물로 변하여 성폭행을 하려 하자 반항하는 여주인을 맥주병으로 가격하여 실신 시킨 후 성폭행하고 달아났습니다. 인천에서는 지나가던 여성들과 어깨가 맞닿았다고 힘없는 여성을 범인들이 두둘겨 패고 달아났습니다. 지난 21일 밤 울산에서는 27세 된 윤 모 씨는 중구의 동네 슈퍼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여주인을 흉기로 찌른 혐의로 23일 구속되었습니다. 22일 퇴근길에 서울 여의도 한복판에서 30세 된 김 모 씨가 사람 여섯을 칼로 찔렀습니다. 이 사람은 신용 평가회사에서 일했는데 동료들이 ‘실적도 올리지 못하면서 월급만 많이 받아간다.’며 왕따를 시키자 그 회사를 그만 두고 1년 동안 직장 없이 빚만 4,000만원으로 늘자 자신을 왕따 시켰던 전 직장 동료들, 6명을 죽이기 위하여 싯칼을 사서 숫돌에 갈아 철저하게 준비한 후 자신이 다니던 직장 정문 맞은편에서 퇴근할 때를 기다리다 마침 나오는 동료를 연거푸 찌르고 도망치면서 아무나 닥치는 대로 4명을 또 칼로 찔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사람들이 무서워서 밖에 나다니기가 두렵습니다.
이렇게 미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직장이 없습니다. 직장이 없으니 당연히 생활이 어렵고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습니다. 둘째, 외톨이입니다. 이런 사람을 사회학과 사회 복지학에서‘은둔형 외톨이’라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히키코모리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을 만나지 않거나 친구 관계에 끊어져 숨어 지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가족들과도 연락을 끊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실은 아주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셋째, 약자를 공격합니다. 피해자들을 조사한 결과 여성이거나 나이가 많은 분들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넷째, 정신과적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주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묻지 마 살인, 혹은 묻지 마 범죄를 저지르는데 성격적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극한 분노와 증오심으로 가득합니다. 둘째, 스스로를 비관합니다. 셋째,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남에게 돌립니다. 넷째, 세상을 미워합니다. 다섯째, 최후 자살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혼자 죽기는 억울하니 누군가를 죽이고 죽자고 생각합니다. 여의도의 광란 사건의 주범도 여섯 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겠다고 결심하고 그 장소에 간 것입니다.
범죄 심리학자들의 의견을 빌리면 이런 사람들은 극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격적으로도 보통 사람들과 다른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근래에 일어난 사건들은 날씨와도 연관을 짓는 분들이 있습니다. 너무 덥거나 또는 비가 많이 와서 짜증스러울 때 정신과적 질병을 가진 사람들은 발작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사회적인 문제이면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기 때문에 우리 각자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지 않는 것이 좋으며, 처음 보는 사람과는 임계거리(팔을 뻗어 닿지 않는 거리)를 두고 활동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가다라 지방에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났는데 너무나 사나워서 누구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두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 두 광인(狂人)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광인은 비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마8:28)
두 사람은 집에서 나왔습니다. 무덤 사이에서 삽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집이 있습니다. 가정이 있습니다, 직장이 있습니다. 사업장이 있습니다. 학교를 다니거나 일을 합니다. 자녀를 양육하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기 광인들은 일반들과 같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무덤이 자신들의 집입니다.
다시 은둔 형 외톨이들의 삶은 말 그래도 은둔해 삽니다. 주로 PC방이나 자신의 깊은 골방에 처 박혀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울산에서 붙잡힌 범죄자는 컴퓨터도 없고 집에서 텔레비져만 보다가 쓰러져 자고, 이웃과 전혀 교류가 없었으며 전화번호부에 달랑 두 세 개의 연락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농경사회와 1차 산업사회에서는 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농경사회에서는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한 공동체였습니다. 씨앗 심을 때 함께 심고, 곡식을 가꿀 때 함께 가꾸고, 거두어들일 때 함께 거두어 들였습니다. 마을에 결혼식이 있으면 동네사람들, 모두가 축제였고, 초상이 나면 어려운 일에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습니다. 또한 누가 아프면 동네 사람들이 모두 병문안 가서 위로해 주고,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내가 다친 것처럼 돌봐주었습니다. 제가 살던 마을에 어떤 집에 불이 나서 모두 탔습니다.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사람들만 도망쳐 나왔습니다. 숟가락 하나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나무를 베어다 집을 지어 주고 양식을 가져다주고, 그릇을 사다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 집은 금방 일어섰습니다. 이것이 사람 사는 정입니다.
현대사회의 광인들은 꼭 그 사람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여의도 광인의 사건을 보면 30세 청년이 회사에서 직장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했습니다. 견디다 못해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이 후 누구도 그를 찾아간 사람도 없고 연락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도 그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주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현대 사회의 단면입니다. 내 혼자 살아가기도 힘들고 버거운 세상인데 누구를 돌아볼 여유가 없이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표명하였다가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이웃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 믿는 우리에게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기울일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많이 맞았습니다.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하여 사람들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제사장과 레위 인이 못 본채 하고 지나갔습니다. 자칫 했으면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사람에게 가서 응급처치를 해서 주막(병원)에 태워다 주고 치료비까지 대 주고 돈이 더 들면 돌아 올 때 갚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의 교훈에서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만나기를 꺼리는 가다라의 광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와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예수님처럼 신통력이 있어서 병든 자에게 손을 대면 낫고, 귀신을 명하면 떠나가고, 물 위를 걷고, 5병 2어로 5,000명을 먹이는 표적을 나타내는 것만이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내 이웃에 집을 나온 사람, 떠도는 사람, 배고픈 사람, 병든 사람, 외로운 사람, 약한 사람, 우울증에 걸린 사람, 삶에 지쳐 힘들어 하는 사람을 돌아보고 그들의 이웃, 그들의 친구, 그들의 위로 자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근래에 일어난 사건의 주범들은 누구로 부터도 그런 사랑과 위로를 받지 못했습니다. 한국에 교회는 많고, 교인은 많은데 이웃에 이런 사람들을 찾아가지 못했고 보살피지 못했습니다. 내 주변에 어두운 그늘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 돌보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가다라의 광인은 또 어떤 모습입니까?
(2) 몹시 사나웠습니다.(마8:28)
광인의 특징은 사납습니다. 사람뿐만 아닙니다. 광견도 무섭고, 광우도 무섭고, 광돈도 무섭고, 광풍도 무섭습니다. 미쳤기 때문입니다. 미쳤다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 이 사람이 제정신이 아닙니까? 귀신이 그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악한 영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창1:26) 하나님은 선한 분입니다.(눅10:18) 거룩하신 분입니다(벧전1:16) 의로우십니다.(롬3:26) 진실하십니다.(롬15:8) 사랑이십니다.(요일4:7)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이런 인격을 소유하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이런 성품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미워합니다. 악한 생각과 행동을 합니다. 질투와 시기를 합니다. 싸우거나 남을 때립니다. 방화를 저지르고, 사람을 죽입니다. 아주 사납습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은 사납습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1999년에 시인 구상 씨가 “가장 사나운 짐승”이란 제목의 시를 지었습니다. 한 번 들어 보세요.
“내가 다섯 해나 살다가 온/ 하와이 호놀룰루 시의 동물원/ 철책과 철망 속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짐승과 새들이 길러지고 있었는데/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은/ 그 구경거리의 마지막 코스/ “가장 사나운 짐승”이라는 팻말이 붙은 한 우리 속에는/ 대문짝만한 큰 거울이 놓여 있어/ 들여다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찔끔 놀라게 하는데/ 오늘날 우리도 때마다/ 거울에다 얼굴도 마음도 비춰보면서/ 스스로가 사납고도 고약한 짐승이/ 되지나 않았는지 살펴볼 일이다.” 고 했습니다. 깊은 성찰을 하게 하는 시입니다.
가다라의 광인은 사나웠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계속 소리를 질렀고, 둔기로 자신의 몸을 자해 하였고, 옷을 벗었고, 쇠줄로 묶어 놓아도 끊었고, 누구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막5:4) 여의도의 광인, 수원의 광인, 울산의 광인도 사나웠지만 사실 나 자신도 사납지 않은가 자신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이 세상에는 사나운 짐승, 사나운 새, 사나운 강아지, 사나운 수탉이 있지만 사실은 나 자신도 사나운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요? 사나운 아버지는 아닌가요? 사나운 어머니는 아닌가요? 사나운 시어머니는 아닌가요? 사나운 사장님은 아닌가요? 사나운 시누이, 사나운 올케는 아닙니까? 직장에서 사나운 과장, 부장, 전무, 상무는 아닙니까? 사나운 선배는 아닙니까? 혹시 교회에서 사나운 교인, 사나운 권사, 집사는 아닌가요? 우리 자신들을 한 번 살펴봅시다. ‘사나운’ 이란 말은 “성질이나 행동이 모질고 억셈”을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사나운 모습을 찾아내서 고쳐야 합니다.
사납다는 말은 잔인하다는 말과도 비슷한 말입니다. 짐승들은 먹잇감을 만나면 사정없이 덤벼들어 으르렁 대다가 잔인하게 잡아먹습니다. 인정사정없습니다. 오직 상대방을 먹잇감으로만 생각합니다. 피도 눈물도 없습니다. 오직 양육강식만 있습니다. 무참히 상대방의 숨통을 끊어 놓습니다. 이것이 사나운 짐승들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손톱만큼의 배려도 없이 다른 사람을 짓밟지는 않았는지 살펴 볼 일입니다.
인류 역사에 히틀러, 피노체트, 이디아민, 폴포트, 카다피, 북한의 김일성,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 같은 사람들은 사나운 사람들 가운데 몹시 사나운 사람들이었습니다. 2차 대전 전범인 일본 역시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적반하장도 여분수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국제 재판소서 재소하겠다고 하며, 한국 대통령에게 자신의 천왕한테 사과를 하라고 하는 무례하기 짝이 없고, 사납기 짝이 없는 자들입니다.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이 떠나가고 귀신이 들어가면 사납습니다. 무섭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마음이 사라지고 귀신의 영이 그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지배하는 인간은 호랑이나 사자보다 훨씬 사납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타인에게 사나운 사람이었다면 오늘 주님을 만나 내 안에 있는 사나움이 사라져야 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가다라의 광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 정상적인 인간이 되었습니다.(마8:31-32)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보내 주소서 하니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예수님은 귀신을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귀신들린 두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모두가 정상이 됩니다. 새사람이 됩니다.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치료가 이루어집니다. 회복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가다라의 두 광인이 정상이 되었습니다. 거사사의 광인도 정상이 되었습니다.(막5:4) 앉은뱅이나 일어나 걸었습니다.(행3:7-8) 눈 먼 사람, 귀먹은 사람, 말 못하는 사람, 중풍병자, 손 마른 사람, 열병환자, 각색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이 정상인이 되었습니다. 귀신은 인간을 비정상적인 존재가 되게 하는 영이지만 예수님은 인간은 정상인이 되게 하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개인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됩니다. 가정이 변하여 새 가정이 됩니다. 사회와 국가가 변하여 새 나라가 새 국가가 됩니다. 새로운 인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죄에 빠진 영혼이 예수를 믿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영생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오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사람다운 사람, 가치 있는 사람, 사람 속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장 인격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태를 성경은 새 사람, 새것, 새 피조물(고후5:17),이라고 합니다. 교회사의 위대한 인물인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에는 방탕한 시간들을 보냈으며, 결혼도 하지 않고 한 여자와 동거하여 아데오다투스라는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거스틴이 32세에 밀라노에서 유명한 암브로스의 설교를 듣다가 회심하게 됐습니다. 회심한 후 성경도 부지런히 읽고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날, 길가에서 옛날에 드나들던 술집의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어거스틴에게 “왜 요즘은 저희 집에 들르지 않나요?”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러자 어거스틴은 “옛날의 어거스틴은 죽었고 나는 새 사람이 됐소.”라고 대답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1900년대 초 한국교회를 부흥시킨 위대한 부흥사입니다. 본래 그는 깡패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행패를 부리고 다녔던지 사람들이 장에 갈 때 제발 김익두와 마주치는 일이 없게 해 달라고 성황당에 빌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신앙을 가진 후 완전히 변했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은 김익두가 죽었다는 부고장을 받았는데 며칠 후 살아있는 그를 만났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사람들이 묻자 김익두는 말했습니다. “과거의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저는 주 안에서 새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새사람, 정상적인 인간이 됩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무서운 것은 악한 세력이 득세하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사회문화를 타고 악한 사단의 영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정치, 복지, 교육, 사회 안전망 시스템, 유능한 지도자, 모두 중요하겠지만 완전한 세상을 만들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악한 영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저들이 만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우리의 책임입니다.
도움이 안 되는 예수
마 8:28-34 / 이정선 목사
마태는 왕이신 메시야를 선포하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그 왕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세계를 포함한 온 우주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각종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고, 심지어는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순종하였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귀신을 쫓아내시는 능력과 귀신들도 그분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과 그의 능력을 다시 한 번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를 건너 동쪽에 있는 거다라 지방에 가셨다고 했는데, 여기서부터 요단강에 이르기까지의 넓은 지역은 당시 행정구역상으로 시리아의 한 도였습니다. 물론 유대인들도 많이 살고 있었지만, 이방인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방인의 땅에 가셨다가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무덤이란 바위를 파서 만든 동굴입니다. 이 지역에는 석회암으로 된 언덕들이 많아서 무덤을 파기가 쉬웠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귀신들린 사람들이 그런 무덤에 들어가 살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도 무덤은 늘 공포심을 자아내는 장소로 인식되었습니다. 옛날에는 도깨비불도 많이 있었고, 귀신이 나오는 이야기나 여우가 둔갑하는 이야기 등은 주로 무덤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밤에는 무덤 근처를 지나가는 것이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실제로 귀신들린 사람들이 무덤에 살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해쳤기 때문에 아무도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곳을 지나게 되셨습니다. 누군가가 그것을 보았다면 예수님을 말렸거나 또는 큰일이 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귀신들린 사람들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정신병을 앓는 것과 다릅니다. 정신병에도 정도의 차이와 종류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정신분열증이나 해리성 장애가 귀신들린 것과 혼동될 수 있는 정신병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해리성 장애라는 것은 인격의 분열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한 사람 안에 둘 이상의 인격이 발견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이 사람으로 행동하다가 갑자기 딴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이 두 인격 사이에는 사로 아는 경우도 있고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원인이 있고 치료가 가능한 정신적 질환입니다. 옛날 같으면 딱 귀신이 들렸다고 말하기 좋은 상태이겠습니다만, 귀신이 들린 것과는 다릅니다. 물론 마귀가 사람들을 해치는 과정에서 이러한 정신분열적 질병을 이용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귀신들렸다는 것은 악령의 지배와 영향력 아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자신의 의지나 사고가 심하게 귀신의 영향에 따라 좌우되거나 혹은 귀신의 대리인처럼 행동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 상황에서는 예수께서 질병을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귀신을 제어하시고 쫓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이 귀신들이 제 발로 걸어 나와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여!” 라고 부릅니다. 참 놀라운 일이지요? 지금 마태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말하기를 그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이 인간을 구원하려고 오셨는데 인간들은 그를 믿지도 않고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귀신들은 첫눈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모를 리가 없지요.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귀신들의 운명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 다음 말을 보십시오.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즉 우리한테 무슨 볼 일이 있어서 왔냐는 것입니다. 귀신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면서도 그를 예배하고 찬양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용서받고 구원을 얻는 것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귀와 그에게 속한 귀신들은 영원히 저주를 받고 멸망하는 것만이 그들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끝까지 반항하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우리 인간의 운명은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하여 저주 아래 놓이게 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셔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사랑입니다. 이 은혜가 시행되기 위해서 물론 하나님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 안에 있는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축복 받은 사람들이지요.
이 귀신들이 하는 말을 보세요.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때가 이른다는 것은 최후의 심판의 때가 온다는 것이고, 그 이전에 한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귀의 존재가 두렵고 위협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이 싸움의 결말이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마귀의 시험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하고, 영적으로 허약해져서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이미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고, 최후의 심판에서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깐 놓여 활동하는 마귀를 크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마귀를 만만하게 생각하고 안이하게 대처해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는 결국 승리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전쟁을 치르고 있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마귀를 대적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좀 복잡한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이 귀신들이 하는 말이 “만일 우리를 쫓아내시려면 저 돼지 떼에라도 들어가게 허락해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귀신들은 예수께서 자기들을 그 사람들로부터 쫓아내시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에 보면 예수께서 이미 귀신들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귀신에게 사로잡혀 파괴된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귀신의 권세와 악한 능력으로부터 해방시키시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것일진대, 그렇게 귀신에 들려 무덤에 살면서 난폭하게 다른 사람들을 해치며 사는 인간성 파괴의 현장을 보시고 우리 주님께서는 몹시 언짢으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셨는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 귀신들이 호락호락 쫓겨가는 것이 아니라 돼지 떼에라도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십니다. 귀신들이 돼지 떼에라도 들어가겠다고 하는 것은 아직 때가 남았으니 더 못된 짓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께서 안 된다고 거절하셨으면 못 들어갔겠지만, 최소한 여기서는 귀신들의 행동까지도 왕이신 예수님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마귀의 파괴적인 공격도 하나님의 지배와 통제 밖에서 일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잠언 기자는 말하기를 심지어는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죄 없는 돼지들은 몰사를 당해야 했을까요? 우리 입장에서는 돼지들이 죄가 없다고 하겠지만, 당시의 상황에서 돼지를 키우는 것은 문제가 있는 일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돼지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그래서 돼지를 키우거나 먹거나 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곳은 이방인의 지경이라서 돼지가 대규모로 사육되고 있는 것 같은데, 돼지를 치는 사람들이 이방인인지 유대인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당시의 가치관으로 본다면 돼지라는 부정한 짐승과 그것을 사육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징계라고 할 수도 있겠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돼지들을 희생시켰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처럼 영혼을 구원하는 데는 공짜가 없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두 사람의 영혼이 돼지 떼보다 훨씬 소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쓸모없는 폐인 두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수천 마리나 되는 돼지를 희생시켰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돼지 떼가 귀신들린 두 사람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보는 것도 다르고 행동도 다르게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돈이 가장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도 살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소중한 가치를 희생해가면서 돈을 벌지요. 그러고 나서 잃어버린 그 가치를 돈으로 다시 사려고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 일어난 사건의 소문을 듣고 온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떠나시기를 간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거기 더 계시다가는 얼마나 더 많은 손해가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인생에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인생이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떠나시기를 간구함으로써 무엇을 잃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들을 기회를 놓쳐버렸고, 결국 생명을 얻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분 계십니까? 교회 가면 헌금이나 내라 하고 그래서 경제적 측면에서 손실만 발생하는 일인가요? 교회 출석하는 것 때문에 취미활동에 큰 지장을 받습니까? 왜 예수 믿는 것이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일까요? 그것은 매우 잘못된 가치관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논리에 따라 예수님을 떠나보내버린 이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예수를 믿는 것이 이 질그릇에 보배를 담는 일임을 깨달아 늘 복되고 감격스러운 신앙생활을 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과 귀신
마 8:28-34 / 김영규 목사
귀신이 온 세상에서 활동합니다
오늘은 귀신들린 사람의 얘기입니다. 예수께서 가다라(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에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가운데서 나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마가복음에는 한 사람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 두 명 중에 한 사람이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귀신 얘기 하면 생각나는 게 있지요? 동화에 나오는 마귀할멈이나,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처녀귀신을 연상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귀신은 그렇게 낭만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인생 전반에 관여하면서 온갖 불행을 만들어 내는 불행의 원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귀신은 어떤 존재일까요? 귀신은 헬라어로 daivmwn(다이몬)인데 주로 複數형으로 나타납니다. 영어로 “demon”이란 단어가 바로 여기서 온 말입니다. 귀신은 사탄이 부리는 영들입니다. 타락한 천사의 우두머리가 바로 사탄이요, 그 사탄에게 복종하는 타락한 천사들이 바로 귀신들입니다. 사탄은 히브리말로 @f;c;(사탄)이며, 그 뜻은 “대적, 대항자”를 의미합니다. 신약 성경에는 diavbolo"(디아볼로스)란 單數형으로 나타나는데, 그 뜻은 사탄과 마찬가지로 “중상자, 비방자, 대적자”를 의미합니다. 사탄의 주된 임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고, 대적하게 만듭니다. 사탄, 혹은 디아볼로스란 말의 법정적 의미는, 법정에서 피고에 대항하는 고소인의 역할을 말합니다. 사람들의 죄를 들춰내고 정죄하고 고발하는 것이 사탄의 역할입니다. 사탄은 욥의 신앙과 행실을 하나님 앞에서 깎아내리고 고소했습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이간시키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 대적하고, 싸우게 하는 일도 사탄의 업무입니다. 이 사탄의 하수인들이 바로 귀신들입니다. 그러므로 귀신을 이기려면 그 우두머리인 사단을 이겨야만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1-12) 귀신의 활동 배경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로, 귀신이 활동하는 장소입니다. 귀신들은 어디에서 활동할까요?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고목나무에 살지는 않습니다. 동굴이나 산이나 바위에 살지도 않습니다. 귀신이 주로 활동하는 장소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12:43-45) 마음에 거주한다는 것은 마음을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귀신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게 만듭니다. 좋은 방면으로 작용하는 일은 없습니다. 주로 악한 일, 죄 짓는 일을 생각하고 행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의심하게 합니다. 불안에 빠뜨립니다. 미워하고 시기하게 만듭니다. 음란한 생각을 하게 합니다. 남을 해치고, 악한 일을 꾸미게 만듭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말입니다. 정말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귀신들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귀신이 상관하는 사람들입니다. 귀신들은 어떤 사람들에게 작용할까요?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작용할까요? 예를 들면 마음이 약한 사람, 병든 사람, 고난에 처한 사람 등등.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귀신은 오늘 우리와 같이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작용합니다. 귀신은 이스라엘의 총명한 임금 다윗을 움직여서 간음 살인에 빠지게 했습니다. 귀신들은 바빌로니아의 위대한 정복자 느부갓네살 임금을 미치게 만들어서, 소처럼 풀을 뜯어먹게 만들었습니다. 변화산 아래의 나이 어린 아들에게 작용하여 간질병을 일으켰습니다. 일생을 경건하게 살고자 힘썼던 욥을 시험했습니다. 심지어는 마귀를 멸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도전하기도 했습니다. 귀신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상관없이 간섭합니다. 오늘 바로 내 자신도 귀신의 활동 대상임을 기억하세요.
셋째로, 귀신의 숫자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본문에 나오는 귀신들이 자신의 정체를 “軍隊”(막5:9)라고 표현했습니다. 군대란 말은 헬라어로 legewvn(레게온)인데, 로마의 군대 편제로 “軍團”을 표시합니다. 로마의 일개 군단은 약 6000명의 보병과, 120명의 기병, 지원 특수부대들로 구성됩니다.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귀신들이 작용했다면 얼마나 많은 귀신들이 존재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귀신들의 숫자는 무수히 많습니다.
넷째로, 귀신이 활동하는 시기입니다. 귀신은 특정한 때에만 작용할까요? 아니면 항상 활동 할까요? 귀신은 인류 역사의 종말까지 항상 활동합니다. 물론 귀신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세상 종말에 멸망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는 귀신은 항상 활동할 것입니다. 모든 시대에 활동하지만 특히 어떤 시기, 어떤 대상자들에게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회적 혼란기나 심리적으로 불안한 시기에 더욱 많이 움직입니다. 세상 종말이 가까울수록 더욱 기승을 부리고, 대환란기에는 세상을 압도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귀신들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어두운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의 세속적인 신앙,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신앙, 로마 사람들의 미신과 우상 숭배 등, 모든 종교가 영적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이 없고 심성이 잔인했습니다. 노예들에게 격투기를 시켜서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고 보면서 즐겼습니다. 도덕적으로 보면, 동성애를 비롯하여 남녀 관계가 문란했습니다. 국가적으로 보면 로마는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고,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어서 무사태평하고 무료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하고 바랄 것이 없는 영적 절망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귀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상황입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귀신들이 활동하기에 딱 맞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이념 대립이 사라졌습니다.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최대 약점은 배금사상과 도덕적 방임입니다.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는 약간은 고상한 점이라도 있었는데, 돈이 지배하는 사회는 완전히 동물적인 생존 방식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형이상학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육체적입니다. 육체의 평안, 육체의 미모, 육체의 건강! 육체에 필요한 돈을 버는 것이 직업의 정신입니다. 전혀 영적인 면이 없어요. 그래서 그런지 요즘 사람들은 유독 귀신 얘기 좋아하고, 환타지 스토리를 좋아합니다. 생활이 육체적이고 동물적이니까, 얘기나마 영적인 것들을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명심하세요. 귀신은 낭만적 존재가 아닙니다. 인류를 타락시키고 불행하게 만드는 장본인들입니다. 귀신은 지능이 낮은 사오정이 아닙니다. 인간보다는 한 수 위에 있는 인격체들입니다. 지혜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영성으로 보나, 귀신들은 인간보다 월등합니다. 이 세상에 귀신과 겨루어서 이길만한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 이스라엘의 가장 신실했던 다윗왕, 가장 경건했던 욥까지도 사단의 세력 앞에 죄에 빠지거나 시험에 들었습니다. 귀신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체를 알고 대적하면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귀신을 제대로 알고 영적 싸움에 이기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귀신의 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귀신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몇 가지 단서들이 있습니다. 귀신의 성격, 귀신이 추구하는 것이 뭘까요?
첫째로, 귀신이 추구하는 것은 죽음이란 점입니다. 오늘 말씀에 귀신들린 사람들은 공동묘지에 살고 있었습니다. 공동묘지는 죽음의 장소입니다. 귀신의 목표는 사람들을 죽게 하는 겁니다. 인간에게 두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적 죽음이요, 둘째는 영적 죽음입니다. 육체적 죽음이란 육체에서 영혼이 떠나는 겁니다. 마귀는 아담을 타락시켰습니다. 육체적으로 흙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인생은 이 육체적 죽음의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영적 죽음입니다. 영적 죽음은 하나님과 결별되고 분리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죽지 않는 不死的 존재입니다. 결코 사라지거나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죽는다는 것은 소멸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영영 결별함을 의미합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 죽음입니다. 그런데 귀신들은 우리에게 육체적 죽음을 더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일생 한 번 죽으면 되는 데도, 평생 죽음의 종노릇을 하게 만들어요. 죽음을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병드는 것 두렵고, 강도 두렵고, 사고 두렵고, 천재지변 두렵고, 다 두려워요. 귀신들이 작용하는 정말 두려운 죽음은 영적 죽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의심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짓게 만들어요. 귀신이 있는 곳에 죽음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세요. 이 사람의 비극은 육체적으로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 죽은 겁니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격리되어 죽은 사람들이 누워 있는 공동묘지에 매여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도 보면 몸은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몸은 화려한 집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오두막 집에 살고 있습니다. 몸은 좋은 음식으로 배부르지만, 영혼은 굶주려 있습니다. 만족이 없고, 평안이 없습니다. 몸은 좋은 옷으로 감쌌습니다. 그런데 영혼은 헐벗고 궁색합니다. 사랑이 없고, 기쁨이 없고, 장래 소망이 없습니다. 몸은 권력의 자리에 있는데, 영혼은 마귀의 하수인이요, 죄의 하수인입니다.
로마 시대 부자들은 배불러서 더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위장을 늘릴 길은 없고 할 수 없이 먹은 음식을 토해내고 새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세상이 그래요 먹을 것이 너무 많아서 위장을 비우고 다시 먹어야 합니다. 네로 황제는 새로운 로마를 만들고 싶어서 멀쩡한 도시에 불을 질렀습니다. 어디 더 맛있는 것은 없는지? 어디 더 즐거운 것은 없는지? 어디 새로운 물건은 없는지? 육체를 즐겁게 하기 위한 온갖 퇴폐적인 문화가 거리에 가득합니다. 육체는 젊어지고 탄탄해지는데, 영혼은 썩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영혼들의 공동묘지입니다. 몸만 살아 있고 영혼은 죽었어요. 겉으로는 행세하는 것 같은데 영적으로는 마귀의 종노릇만 합니다. 오늘 말씀에 공동묘지에 묶여 있는 사람은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둘째로, 귀신들은 더럽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귀신들이 돼지 떼로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돼지입니까? 소도 있고, 말도 있고, 다른 짐승도 많은데? 가장 더럽게 보이는 짐승이 돼지입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부정하게 여겨서 먹지 않습니다. 회교도들을 돼지고기는 절대로 먹지 않습니다. 돼지는 온갖 더러움의 상징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에 돼지를 길러봤습니다. 집 마당에 돼지우리를 해 놨는데, 온 집안이 다 돼지 냄새입니다. 새 지푸라기를 넣어주면 하루도 못 갑니다. 밥그릇에 앞발을 담그고 뒤로 볼 일 보면서 식사를 합니다. 전혀 품위가 없어요. 마귀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성경에 보면 “귀신”이란 말 앞에 항상 붙어 다니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더러운”(ajkavqarto")이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육체적 더러움을 표시하기도 하고, 도덕적인 더러움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나아가서 종교적인 더러움 영적인 더러움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귀신이 하는 일이 더러운 일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이 귀신들린 사람은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 늘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했습니다. 성질이 사나와서 아무도 가까이하기 힘들었어요. 귀신은 사람에게 질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간질병을 일으켜서 넘어져서 거품을 물고 기절하게 만듭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게 만듭니다. 말 못하는 병, 듣지 못하는 병을 일으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귀신이 들려서 소처럼 기어다니고, 소처럼 울고 풀을 뜯어 먹었습니다. 귀신은 육체적으로 사람을 추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시킵니다. 마귀의 별명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사람으로 거짓말을 하게 합니다. 어두운 삶을 살게 합니다. 악한 범죄를 일으킵니다. 의심하게 하고, 원수 맺게 합니다. 음란하게 만듭니다. 다윗은 사단의 역사 때문에 불필요한 인구조사를 하고, 밧세바 사건에 빠졌습니다. 마귀는 가룟 유다의 마음을 자극해서 배신자로 만들었습니다. 마귀가 있는 곳에 더러운 죄가 있습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미워함, 능욕, 교만, 자랑, 음모, 부모 거역, 우매함, 배신, 무정함, 무자비함... 바울의 말처럼 우리가 원하는 바 선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하게 만듭니다. 돼지는 사람의 육체를 더럽히고, 영혼을 더럽힙니다.
셋째로, 귀신들은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본문 28절에 보세요. 귀신들린 사람들은 너무나 힘이 셌습니다. 아무도 제어할 수 없어요. 쇠사슬에 묶어 놔도 쉽게 끊어버립니다. 밤낮 무덤이나 산으로 다니면서 소리 지르고 자기 몸을 돌로 부딪쳐서 피를 흘리며 상하게 합니다. 그래도 멀쩡한 게 참으로 이상합니다. 정신 병원에 보면 창마다 쇠창살로 막아 놨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통제하기 힘들어요. 마귀가 가진 육체적 힘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영적인 힘, 정신적인 힘입니다. 공산주의가 다 망했습니다. 하지만 한 때는 인류의 절반을 지배했습니다. 그들은 그럴싸한 이론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마르크스는 경제적으로 평등한 지상낙원을 주장했습니다. 누구나 함께 일하고 필요한 만큼 나눠 쓰는 지상 낙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망한 이론일 뿐입니다. 실제로 공산주의는 제일단계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망했습니다. 마르크스 최대의 잘못이 뭡니까? 그것은 바로 근본적으로 사람을 잘 못 본 데 있습니다. 인간은 본성이 악합니다. 어떤 이론대로 움직일 만큼 순진하지 않습니다. 총칼로 다스린다 해도 죄악 된 본성은 고칠 수 없습니다. 마귀는 바로 그 부패한 본성을 최대한 자극하고 이용합니다. 부패한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마귀요 귀신들이란 점을 잊지 마세요. 마귀는 철학, 과학, 심리학, 의학, 생명과학, 문학, 예술 등등, 온갖 수단을 가지고 세상을 지배합니다. 마귀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모택동, 카스트로, 김일성을 하수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 철학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지상낙원을 만들겠다고 떠들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수 많은 사람들을 죽고, 영혼들이 도적질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빼앗았습니다. 영생을 빼앗았습니다. 천국 소망을 빼앗았습니다. 마귀는 강한 능력으로 우리의 영혼을 도적질하고 있습니다. 그 마귀의 세력에서 아무도 자력으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귀신을 이기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귀신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때에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세요. 귀신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엎드려 절합니다. 두려워 떨었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다 알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세요. “하나님의 아들이여”하고, 주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알고 있습니다. 귀신들이 예수님께 멸망당하리라는 것은 이미 아담이 범죄한 직후에 성경에 계시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세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여자의 후손이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뱀은 사탄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세상을 이기었다는 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마귀를 이겼다는 뜻이요, 죄를 이겼다는 뜻이요, 사망을 이겼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사단의 정죄와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지옥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마다 마귀는 굴복하고 쫓겨 갑니다.
사마리아 성에서 마술을 행하면서 자칭 위대한 자라고 큰 소리 치던 시몬이란 자가 있습니다. 그는 마술과 눈속임으로 많은 사람들을 굴복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시몬이 사도 베드로 앞에서 굴복했습니다. 베드로에게 굴복한 게 아니라, 예수님 앞에 굴복한 겁니다. 빌립보 성에서 점치던 여인도 그렇습니다. 귀신 때문에 신통력을 발휘하던 그가 귀신이 쫓겨나가자 점을 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에게 붙어 있던 귀신이 바울을 쫓아다니면서 한 말이 뭡니까?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행16:17) 사도 바울은 그 귀신에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행16:18) 귀신은 즉시 쫓겨갔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귀신의 지배는 끝장입니다. 오늘 말씀 29절에 보세요. 귀신들이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때가 이르기 전에 왜 나타나셨습니까? 무슨 뜻일까요? 마귀는 세상 종말에 영원히 심판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자신들의 운명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종말이 이르기도 전에 왜 자신들을 괴롭게 하느냐는 겁니다. 귀신들은 종말이 오기까지 최대한 인간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마귀는 쉴 새 없이 온 세상을 두루 돌아다닙니다. 삼킬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런 반면에 예수님은 성도들 속에서 귀신들의 뿌리를 뽑아 버리십니다. 오늘 우리는 귀신들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사람에게 귀신들은 절대로 자리 잡지 못합니다. 잠깐 유혹할 수는 있겠지요? 그렇지만 영혼을 아주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계시고, 주님의 성령이 우리 마음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예수님이 계신 곳에 마귀는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습니다. 담대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오늘 사건의 결말이 어떻게 났는지 자세히 보세요. 이상한 결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귀신들려 미쳤던 사람이 깨끗이 고쳐졌으면 당연히 예수님을 믿고 영접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가다라 지방 사람들이 예수님께 뭐라고 했습니까?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34절) 이유가 뭘까요?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돼지 떼가 죽은 겁니다. 그 아까운 돼지가 죽다니!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것은 안중에 없고, 오직 돼지 죽은 것만 크게 느껴집니다. “아이구, 아까운 내 돼지!” 오늘 날도 마찬가집니다. 영혼이 살아나는 것에 별 관심 없어요. 그저 돈 벌이 안 되는 것만 문제입니다. “예수 두 번 만 믿었다가는 재산 다 날아가겠구나!” 오늘 이 자리에도 그런 분이 계십니까? 예수 믿고 영혼이 살고, 마음이 살고, 인생이 살아나는 것보다, 돈 손해날까봐 걱정입니까? “적당히 믿어야지, 깊이 믿다가는 큰 손해 볼지도 모른다! 멀찍이 따라가자!” 성경에 나오는 부자 청년처럼 재산 다 팔아 구제하라고 할까봐 걱정입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다가 경제적으로 망한 사람 보셨습니까? 복을 주시려고 부르신 하나님이 못 살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신28:,612-13)
확실하게 믿으세요.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 잡듯이 예수님만 꼭 붙잡으세요. 한 겨울에 외투를 입듯이 믿음으로만 푹 뒤집어 쓰세요. 그리고 그리던 사람을 만나듯이 주님을 영접하고 환영하세요.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모든 인생을 맡기세요. 그런 사람만이 귀신을 이깁니다. 그런 사람이 마귀의 유혹을 이깁니다. 죄를 이깁니다. 시험을 이깁니다. 이 세상 끝 날까지 마귀와 그 하수인들인 귀신들을 이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적 물질관으로 무장하십시오!
마 8:28-34 / 전순기 목사
요즘은 신문을 보면 온통 경제 위기 문제로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읽어서 신 나고 살맛나게 하는 이야기는 없고,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걱정스러운 이야기들로만 가득합니다. 사람이 자꾸 부정적인 말만 들으면, 점점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 갑니다. 부정적인 마음의 자세와 삶의 태도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사태를 더욱 더 악화시키게 됩니다.
“경제가 어렵다. 어렵다.” 하니까, 사람들이 자꾸 움츠러들어서 기업들은 투자를 안 하고, 은행은 대출금을 회수하고 더 이상 대출을 안 해주고, 또 소비자들은 소비를 안 하니까, 물건이 안 팔리고, 안 팔리니까, 공장이 멈추고, 공장이 멈추니까, 회사가 부도나고, 일군들이 거리로 내 몰리고, 돈이 없으니 소비를 할 수가 없고…, 악순환이 됩니다. 신문에 보니까, 이제는 전 세계가 디플레이션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너도나도 경제 문제에 집착한다고 해서 경제가 금방 살아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이 필요하고, 내일에 대한 밝은 소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긍정적인 믿음과 밝은 소망을 가지려면, 성경이 물질 문제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 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물질 문제에 대해서 아주 많은 교훈들, 적실한 교훈들로 가득합니다. 성경은 물질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면서도 동시에 위험한 존재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두 본문 말씀에서도 그런 경고와 교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질 때문에 주님을 밀어내지 말라!
오늘 말씀에는 주님께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온전케 해 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실 때에 귀신들의 요구대로 귀신들이 돼지떼에게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돼지 떼가 미쳐 날뛰며 물에 빠져 죽게 될 것을 모르셨을까요?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주님은 그렇게 하심으로 돼지 2천 마리보다, 다시 말해서 물질보다 한 영혼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천명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다라 지방 사람들은 돼지 떼를 잃은 것, 다시 말해서 경제적인 손실을 입은 것 때문에 속이 상해서 예수님에게 제발 우리 마을에서 떠나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을 마을 밖으로 밀어내 버린 것입니다. 저들에게는 귀신들려 무덤 사이에 살면서,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던 불쌍한 영혼이 구원받은 사실은 안중에도 없고, 또 그를 치료해 주신 생명과 능력의 주님도 안중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사람이 물질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세우지 못하면, 물질이 우리의 삶에서 인간 영혼의 존엄한 가치도 밀쳐내 버리고, 또 생명의 주님도 밀쳐내 버리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대가 바로 우리가 이런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람이 주머니가 가벼워지면, 마음에 여유가 사라집니다. 돈이 걸린 문제가 되면, 인륜도 천륜도 저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요즘 경제가 어려워지니까, 사기행각, 도둑질 등 온갖 범죄가 더욱 더 많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돈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참으로 말로 다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질은 보통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임을 경고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 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6:24).
재물과 하나님을 동등한 위치에 두고 말씀하고 계신 것은 사람들에게 물질이 하나님만큼이나 힘을 가지는 존재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재물이라는 신을 섬기며, 이 땅에다 보물을 쌓는 삶을 살게 되면, 염려에 빠지게 될 것임을 경고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에서 바울 사도도 같은 경고를 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했습니다(딤전6:5-6).
오늘날처럼 온통 경제 문제가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우리 마음을 몽땅 경제문제에 뺏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일부러 주님을 떠나시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경을 써서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은 온통 경제 문제로 가득 차 버려, 주님은 구석으로 밀려나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대신에 물질 문제가 마음을 차지하게 되면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근심 걱정, 염려의 풍랑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마음을 신랑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믿음으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3장 16절 이하에서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라고 기도했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이 마음에 계시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이 마음 중심에 계시도록 의식적으로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주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의식적으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끊임없이 바라보아야 할 것이며, 예수님을 더욱 더 깊이 생각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머니가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라!
히브리서 13장 5절에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를 받는 1세기 당시의 성도들도 돈을 사랑했던가 봅니다. 그러니까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돈을 사랑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돈은 성도가 사랑할 대상도 의지할 대상도 아니라는 겁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얼마가 있든지 있는 만큼으로 족한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안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도 족한 줄 알기 쉽지 않고, 반대로 가진 게 너무 적거나, 아예 없는 사람은 더더욱 족한 줄 알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점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주신 말씀이 바로 다음에 따라 나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온 천하 만물의 소유주가 되시는 주님께서 친히 함께 하시면서 책임져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필요할 때마다 구하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구하는 대로 다 받으신 분들이 있습니까? 원하는 만큼 충분히 받았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습니까? 아마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거나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늘 부족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물질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가 원하는 만큼 물질을 주시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많이 주시면,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베풀며 살고 싶고, 하나님 앞에도 넉넉하게 헌금도 드리고 싶은데, 왜 안 주시는지 모르겠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그릇이나, 인격의 그릇, 사명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을 어떤 사람에게 둘, 어떤 사람에게 하나를 주시는 것은 주인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을 넉넉하게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이 먹고 살기에 꼭 맞는 정도만 주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며, 나의 사명의 문제입니다. 내 먹고 살기에 빠듯하게만 주셨다면, 나에게는 물질을 관리하는 사명은 주지 않으신 것으로 알고 그 부분에서 자유함을 누리면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자들입니다. 언제나 필요한 것이 있어 아버지께 구하면, 주실 것이고, 찾으면 찾아질 것이고, 두드리면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아들이 떡을 먹고 싶다는 데 돌을 줄 아버지가 없으며, 생선이 먹고 싶다는 데 뱀을 줄 아버지가 없기에,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하면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생각하는 것이나 구하는 것에 넘치게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염려에 사로잡혀 있거나 두려움에 떨지 않습니다. 성도는 날마다 아버지 손을 붙잡고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그럴 때에 히브리서 가지처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라고 외치게 되고(히13:6), 바울 사도처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확신을 노래하며 살아가게 됩니다(롬8:32).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시고, 내 아버지께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채워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라!
바울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지 말고 지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비유컨대, 신앙을 부자 되는 도깨비 방망이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면 부자가 되는 줄로 알고, 부자 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하는 태도를 말합니다(기복 신앙).
지금까지 한국 교회 안에 이런 식으로 가르치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아직도 그렇게 설교되고 가르쳐지는 강단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제가 확신하기는 그건 복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에 그렇게 약속한 곳이 없습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왜곡된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했기 때문에 그런 설교나 가르침이 가능했을 뿐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과 부자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부자 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도구로 삼아 물질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벌고, 부자가 되는 것은 신앙생활의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살다보니, 부수적으로 부자 되는 축복이 따라올 수는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신앙의 인물들이나, 또 교회사에서 발견하는 수많은 성도들 중에는 신앙도 좋으면서 많은 부를 가지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한 부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은 결코 그들이 부자 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는 않았다는 점일 겁니다. 매일 매 순간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고, 열심히 땀 흘려 정직하게 일하다 보니까 결과적으로 부가 따라왔을 뿐입니다.
예화) 설교 자료를 찾다가 재미있는 인터넷 사이트를 발견했습니다. 영국 런던에 있는 포크(Pork)사에서 글로벌 리치 리스트(http://www.globalrichlist.com/)란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 사이트에서는 1년 수입을 기준으로 전 세계 인류 중에서 몇 번째 부자인지를 알려 줍니다. 몇 가지 예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세계 인구를 60억으로 잡고 계산을 해 내는데, 연봉 1천만원(약 1만 달러)인 사람은 60억 중에서 798,928,823 번째 부자이며, 상위 13.31%에 속합니다. 연봉 2천 5백만원인 사람은 605,000,000번째 부자이며, 상위 10.08% 안에 들어갑니다.
포크사가 이 사이트를 운영하는 목적은 단순히 흥미 때문만은 아니고, 오히려 계몽의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1천만 원만 벌어도 그만 못한 사람이 세상에 50억 명도 넘는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너무 불평 원망하지 말고 살라는 겁니다. 또 웬만한 사람이 하루 수입만 내놓아도 가난한 사람 수십 명을 살릴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우고 있었습니다.
흥미로워서 저도 한 번 이 사이트에 들어가서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제가 대충 계산을 해 봐도, 우리들 대부분은 아무리 못해도 세계에서 10%안에는 다 들어가는 부자들로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조사를 해 보지 않아도 항상 감사한 마음이었지만, 이 사이트를 방문해서 조사를 해 보고 나서, 정말로 더 많이 감사하고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얼마나 물질을 가지고 있느냐? 부자냐 부자가 아니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마음대로 써도 좋다고 허용된 물질은 일용할 양식뿐이고, 그 외에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청지기 사명을 감당하도록 맡겨진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맡겨진 물질을 잘 관리하면,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칭찬을 받을 것이지만,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낭비한다면,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받는 물질이 많거나 적거나 자랑할 일도, 서운해 하거나 부러워할 일이 아닌 겁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진리입니다. 오늘 굶지 않고 먹었다면, 입었다면 족한 줄로 알고 감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내려 먹이시던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용할 양식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내일은 어떻게 합니까?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시기를 축복합니다.
돈은 정직하게 땀 흘려 벌어라!
“개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쓴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성경적으로 지지받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십중팔구는 개 같이 번 돈은 개 같이 쓰여지게 마련입니다. 우리 사회의 큰 병폐가 무엇입니까? 정직하고 성실하게 땀 흘려 돈을 번 부자들 보다 부정직하고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돈을 번 부자들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정직한 부자는 존경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부자들 대부분이 존경 받지 못하는 부자들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부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부자에 대한 경멸 내지는 적개심이 사회 전반에 팽배합니다.
정직하지 못하게 부자가 된 사람들 때문에 이 사회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간의 갈등의 골이 깊이 파였습니다. 그리고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와의 반목과 대립은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게 우리 모두의 불행입니다.
성경적인 물질관은 정직하게 땀 흘려 돈을 벌라고 가르쳐 줍니다.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잠16:8).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10:4)고 했습니다. 바울은 좀더 심하게 말했습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
세상이 험해지고 살기가 어려워지니까,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벌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쉽게 돈을 벌고자 하는 유혹도 받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땀 흘리지 않고 버는 돈은 결코 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정직하게 땀 흘려 번 돈을 아껴서 저축을 하거나, 보험을 드는 일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돈을 빨리 그리고 많이 벌고 싶은 욕심에 이끌려 합당한 투자가 아니라, 투기하는 일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은 일용할 양식은 책임져 주신다고 약속하셨지만, 우리가 돈을 더 많이, 더 빨리 벌 욕심으로 투기하는 일까지 축복하시고 책임져 주시지는 않습니다. 혹시라도 그런 유혹에 빠졌었다면, 철저히 회개하고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절제하며 빚지지 말고 살라!
이제 마지막으로 돈을 쓰는 문제에 대해서 성경적인 가르침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미 앞에서 우리가 상고한 교훈들, 자기 주머니를 신뢰하지 말고 주님을 신뢰하고,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또 정직하게 땀 흘려 돈을 버는 삶을 배우고 실천한다면,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는 사실 말할 필요도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공짜로 얻은 돈은 거의 대부분 허투루 쓰입니다. 그러나 내가 땀 흘려 번 돈은 함부로 쓰지 못합니다. 성도는 돈을 아껴 쓸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며,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청지기의 자세로 돈을 사용해야 합니다.
주어진 물질 중에서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온전한 십일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온전한 신앙이며 그런 신앙이 물질적인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온전한 십일조에 대해서는 말라기에 축복의 약속을 주시며 시험해 보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 십일조 드리는 일은 멈추지 마십시오. 그게 축복의 비결입니다.
먹고 살기 빠듯한 성도들에게는 아껴 쓰라는 말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원리를 말씀드리는 것인데, 성도는 무엇을 사든지, 여러 번 심사숙고하며 지출을 결정해야 합니다. ‘아나바다’ 운동이라는 게 있는데, ‘아나바다’ 운동은 성도의 삶에서 늘 실천되어야 할 운동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물질은 한정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함부로 낭비하고 허비하면, 우리 후손들이 쓸 것이 없어집니다. 가능한 욕망을 절제하고 모든 물건을 아껴 써야 합니다. 종이 한 장이라도 낭비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요즘엔 신용카드라는 게 있어서 참 편리합니다. 당장 현금이 없어도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 수도 있고, 또 병원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카드로 구매할 때에 자칫 과소비에 빠지기 쉽습니다. 자신의 수입 범위를 넘어서는 카드 사용은 빚을 지는 것인데, 성도가 빚을 지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에 사랑의 빚 외에는 빚을 지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 빚지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걱정스럽습니다. 들어오지도 않은 수입을 예상하고 빚을 내어 물건을 사고, 또 어떤 일을 성큼 성큼 저지르는 걸 보면, 참 놀랍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옛 어른들 말씀도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빚만 안지면 산다고 하셨습니다. 빚지는 삶은 대부분 무절제한 욕망에서 기인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없고, 사고 싶은대로 다 살 수는 없습니다. 지출은 각자에게 허락된 수입 범위 안에서 결정되어야 합니다. 빚을 지면서까지 물건을 사는 것은 성도가 취할 합당한 자세가 아닙니다.
어릴 적에 저의 가정은 너무도 가난했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어야 하는 형편이었는데, 너무 어려우니까 부모님들이 장리쌀을 내다 우리 자식들을 먹이셨습니다. 장리쌀은 일년 이자가 5할이나 되는 무서운 쌀입니다. 장리쌀을 빌려 먹으면 다음 해에는 이자 갚고 나면 다시 원금은 그대로 남거나, 아니면 다시 이자까지 합쳐진 장리쌀에 대한 이자를 물어야 했습니다. 장리쌀 이자를 갚으시면서 늘 푸념하시던 어머니의 음성이 지금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한번 빚을 지고 나면 그 이자 갚느라고 평생 빚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저는 어린 마음에도 빚지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성한 후에도 빚지는 일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서 성경을 보니, 성경에 빚지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돈이 없으면 안사고 안 쓴다. 없어도 절대로 사람에게 손 벌리지 않는다.”는 신조가 생겼고, 그 신조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빚지지 않고 살았습니다. 교육 전도사 시절에 아이 병원비가 없어서 부득이해서 결혼반지를 맡기고 전당포에서 돈을 빌려 쓴 적이 한 번인가 두 번인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다음 달에 돈이 생겼을 때에 얼른 갚았습니다. 때로 쌀독에 쌀이 떨어진 적도 있었지만, 한 번도 굶기신 적이 없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려운 경제 위기라는 터널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세상의 풍조를 따라 이리저리 흔들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도는 성경적인 물질관으로 철저히 무장해야 합니다. 물질 때문에 주님을 밀어내지 마십시오. 주머니가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자족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돈은 정직하게 땀 흘려 버십시오. 절제함으로 빚지지 말고 살아가십시오. 이 말씀들을 지켜 나간다면, 우리는 어려운 경제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며, 비록 어려운 현실이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쓴 것인지는 모르지만, 은혜가 되는 기도시 한편을 읽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감사하게 하소서. 중략 …, 나를 남과 비교하는 경쟁심보다/이미 받은 은혜를 헤아리게 하소서./끝없는 욕망의 우물을 파며 인생을 마치지 말고/감사함으로 기쁨을 찾게 하소서./ 주머니를 채우는 노력보다는 오히려/감사가 충만한 주머니를 주소서./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그 둘보다 더 값진 생애가 있겠습니까!/붉게 피었다 조용히 지는 단풍잎처럼/열렬히 사랑하고 조용히 감사하는/나의 인생이 되게 하소서. 아멘.
사람을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
마 8:28-34 / 김동호 목사
복음 중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려고 하시는 내용도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 관심은 우리 인간에게 있으십니다. 우리가 잘 알고 좋아하는 말씀 중에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 이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깨닫고 느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게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온 관심은 우리 인간에게만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해야만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오로지 우리 인간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해야만 드디어 행복해 하십니다. 하나님의 행복은 오로지 우리 인간의 행복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슬픈 데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없고 우리가 불행한데 하나님께서 행복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쁜데 하나님이 슬퍼하실 수 없고 우리가 행복한데 하나님께서 불행하거나 외로우실 수 없습니다.
저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에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시구나'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삶의 목적도 우리 인간에게 있으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힘써 6일만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완벽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하셨다기보다 우리 인간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창세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읽으면서 창조의 중심과 목적이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우리 인간의 목적이 하나님 당신이시기만을 원하실 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상의 목적과 중심이 우리 인간이게 하시리만큼 우리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만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만 당신의 형상을 닮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단순한 피조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처음부터 당신의 자녀로 창조하셨습니다. 때문에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면 보통 사랑이 아닌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불완전한 부모 사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완전한 부모의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시는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다라 지방에서 귀신 들려 무덤에서 사는 아주 사나운 사람을 만났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와 같은 사람을 향하여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가다라 지방은 돼지를 많이 기르던 지방이었는데 그 지방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귀신들린 사람보다 돼지 한 마리를 더 귀히 여겼을 것입니다. 그는 정말 '돼지만도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그렇게 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돼지 한 마리만도 못한 사람으로 여기는 그 귀신 들린 사람을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여기셨습니다.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대신 자신들이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예수님에게 사정을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사정 속에는 돼지 한 마리만도 못한 이 귀신 들린 인간을 위하여 수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를 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뉴앙스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망설이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즉시 돼지 떼는 귀신이 들려 몰사하였고 그 대신 귀신 들린 사람은 온전하여 졌습니다. 예수님은 귀신 들려 아무 짝에도 쓸데없어 보이는 그 사람을 위하여 돼지 떼 수천 마리를 아까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그는 천하보다 귀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우리 인간은 천하보다 귀한 존재가 아니라 당신의 생명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귀신들린 자와 같은 우리 죄인을 위하여 돼지 떼가 아니라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에게 우리 인간들은 천하보다 귀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생명보다도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우리 인간들을 귀히 여기십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극치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을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대신 죽게 하시리 만큼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우리 인간에 대한 더할 수 없는 극진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 중의 복음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것입니다. 무시하는 것입니다. 괴롭히는 것입니다. 마음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천대하고 괴롭히면 벌을 받습니다. 천벌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아벨의 핏소리를 들으시며 가난한 과부의 울부짖음과 하소연에 귀 기우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들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그와 같은 억울함과 괴로움을 끼친 자들에게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높아지고 부유해지고 강해졌을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교만하여지지 아니하고 악해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여 사람을 깔보고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억울하게 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88년도 처음 미국을 갔을 때 애트란타에 있는 마틴 루터 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사진첩 하나를 샀습니다. 지금은 그 사진첩을 잃어 버렸습니다만 지금까지 기억에 선명한 사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십대 말쯤 되어 보이는 흑인 여자가 아주 아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입을 꼭 다물고 한 줄기의 눈물을 조용히 흘리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슬퍼서 우는 눈물이라기보다는 마음이 아파서 우는 눈물이었습니다. 그 사진을 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예리한 칼에 베이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진을 보면서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아이에게 그와 같은 아픔과 억울함을 안겨준 사람은 복없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절대로 그냥 놔두지 않으셨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아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들이 귀히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귀히 여기며 저들을 돕고 섬기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와 같은 일을 보통 좋아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죽 하면 소자 한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자는 결단코 그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말씀 하셨겠습니까? 오죽 하시면 소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라고 말씀 하셨겠습니까?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람 대접하면 복을 받습니다. 큰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의 복을 기대하고 사모하신다면 무엇보다도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억울하게 하고, 사람을 마음 아프게 하고, 사람을 깔보나 업수히 여기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생각을 아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꿈도 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 텔레비젼을 보니 불법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학대하는 우리 한국 사람들에 대한 프로그램이 시리즈로 방송되고 있었습니다. 저들이 불법 체류자라는 사실을 악용하여 저들을 학대하고 착취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하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마음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와 같은 악한 사람들에게 아무 짓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에 합당한 벌을 저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극진히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미워하거나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은 곧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틴 루터 기념관에서 사온 사진첩에 또 하나 기억이 나는 사진이 있습니다. 흑인들이 자신의 인권을 위하여 침묵 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목에 'I am a man' '나도 사람이다'라는 팻말을 걸고 침묵 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위하는 흑인들을 향하여 경찰들이 검이 꼽힌 총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동적이었던 것은 20대 말이나 30대 초 쯤으로 보이는 아주 잘 생긴 전형적인 백인 청년 하나가 흑인들의 시위에 함께 줄을 서서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백인 청년의 사진을 보면서 참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부터 큰 상과 복을 받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틀림없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저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는 말씀을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축복을 믿습니다. 저는 그 하나님의 복 주심을 위하여 예수를 믿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됩니다. 다시 말해 복 받을 일을 하면 됩니다. 복 받을 일 다시 말해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반드시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사람을 사랑하고 귀히 여겨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설립한지 꼭 6개월이 되었습니다. 6개월 동안 우리는 주일 날 한번 예배 드리는 것과 등록교육을 실시한 것 외에는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일부러 모든 일을 천천히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기초가 잘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서두르다가 큰 일을 그르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지난 6개월 동안 열심히 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복 받을 일'입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첫 추수감사헌금을 전액 숭의학원의 어려운 학생들 장학금으로 내어놓았습니다. 첫 성탄헌금을 전액 남산동에 사시는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일과 베트남에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의 집을 지어주는 일을 위해 내어 놓았습니다. 여러분들이 기쁨으로 헌금해 주셔서 처음에 계획했던 것보다 곱절씩 더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산동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물질로만 아니라 마음과 사랑으로 섬기기 위하여 '이웃 사랑 궁휼회'라는 모임이 결성되어 공부까지 해가면서 저들을 구체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첫 부활절 헌금을 전액 볼고그라드에 이주해 온 고려난민들을 위하여 쓰기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그 일은 작아도 역사의 한을 푸는 일입니다. 이유도 알지 못하는 고난을 대를 이어 격고 있는 고려인들에게 아무런 이유와 대가 없이 무작정 해드린 우리들의 헌금은 저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한을 풀어주는 약이 되리라 저는 믿습니다. 지난 주 헌금하였는데 약 3,700만원의 헌금이 모여졌습니다. 우리 교인 수를 생각하면 상당히 많은 액수의 헌금입니다. 교인 여러분들이 이 일을 기뻐하시고 정성껏 헌금을 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올해 추수감사헌금도 숭의학원 내에 있는 어려운 학생들 장학금으로 내어놓을 것입니다. 숭의학원을 위한 예산을 5천 만원으로 잡아 놓았지만 헌금이 더 나오면 나오는대로 더 드릴 작정입니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일 5천 만원이 안되면 교회 예산에서 보태서 5천 만원을 만들어 드릴 예정입니다.
올해 말 성탄헌금은 북한 동포를 위하여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여러분들이 헌금을 많이 잘해 주실 것 같습니다. 그 돈을 전액 북한에 보내 어려움에 빠져 있는 우리 북한 동포를 돕는다면 너무 좋을 것입니다. 근사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왜 그와 같은 일들을 열심히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고 높은 뜻 숭의교회를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겠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잘 지켜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축복해 주실 것인가를 지켜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작부터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귀히 여기며 정말 저들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정성껏 대접하려고 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복 주시고 높히시는지 한번 지켜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복음 중의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고 쉽게 낙심하거나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 자신을 비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렇게나 막 사시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찮은 존재가 아니고 귀한 존재들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복 받습니다. 특히 사람들에게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면 복을 받습니다.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복을 받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명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람을 깔보거나 마음 아프게 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억울한 손해를 끼치거나 특히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면 천벌을 받습니다. 그와 같은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돼지 한 마리 값도 안 나가는 귀신 들린 사람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온 관심은 우리에게 있으시며 하나님의 삶의 목적도 우리 인간에게 있으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사랑하시며 귀히 여기십니다.
자신과 사람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예수님과 악령
마 8:28-34 / 최영기 목사
과학을 약간 공부한 사람들은 과학에 관하여 지나친 신뢰를 보입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것은 아예 존재조차 부인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초자연적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세계라고 하면 문자 그대로 자연 세계를 포함하되 그를 초월한 세계입니다. 과학은 자연 세계를 관찰하고 측정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세계를 관찰하고 측정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빛이 차단된 밀폐된 동굴 같은 곳에서는 우리는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적외선 안경을 쓰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있는 박쥐를 볼 수도 있습니다. 눈은 가시 광선에만 반응을 하기 때문에 동굴 속에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지만 적외선에 반응하는 물질을 바른 안경을 썼을 때에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자연 세계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초자연 세계를 보자면 안경을 써야하는데 그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히 12:1).
초자연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 천사, 악령입니다. 귀신이라는 말이 성경에는 사용되고 있으나 한국 사람에게는 귀신이라고 하면 죽은 사람과 상관 지어 생각하기 때문에 악령이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악령이 어떻게 생겼는지 성경에서는 분명히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령들은 타락한 천사일 것이라는 힌트는 성경 이곳저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악령에게 사로잡힌 사람이 예수님을 통하여 자유함을 얻는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악령에 관하여 많은 것을 배웁니다.
I. 악령에 관하여 알아야 할 일
1. 인간을 괴롭힌다
악령은 사람을 괴롭힙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악령에 들린 사람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집을 뛰쳐나와 무덤에서 산다는 자체가 맑은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막 9:22에는 귀신들린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와서 귀신이 아들을 죽이려고 물 속에도 불 속에도 던진다고를 합니다.
악령은 왜 인간을 괴롭힐까?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첫째는 본성이 그래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인간들 가운데에서도 남을 괴롭히는 데에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군대에 가본 사람들은 그러한 사람 한둘은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악마적인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증오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누구를 증오할 때에 그를 괴롭히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가 귀하게 여기는 것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악령은 하나님을 괴롭히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을 괴롭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악령과 상관을 말아야합니다. 신통한 점쟁이나 무당은 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초자연적인 존재인 악령을 받았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지식을 소유하기도 하고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점쟁이나 무당들은 거의 다 부부관계가 원만치 않거나 자손들이 정신병, 간질, 암으로 고생합니다. 자신들도 눈물에 젖어 삽니다. 박대통령 시해 사건을 미리 예측했다고 인기를 끌었던 심진송의 전기가 한 예가 되겠습니다.
악령이 씌운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사람을 통하여 악령과 접촉한 사람들도 결국은 괴로움을 당합니다. 한국에는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점쟁이는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정치인이자 재벌들의 가족 가운데에도 점쟁이나 역술인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점쟁이나 역술인들 찾아다니는 사람들 치고 행복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항상 불안과 초조 가운데에 삽니다. 불안하고 초조하니까 점쟁이나 역술인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사람들로 인하여 악령과 접했기 때문에 삶이 더 불안하고 초조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가벼운 것이라고 악령과 상관된 것은 단호히 끊어야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 갖고 있던 부적이 있으면 태워버리십시오. 장난으로라도 사주나 관상을 보고 점을 치면 안됩니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악령의 역사에 노출되고 그 후부터 여러분들의 삶에 괴로움일 깃들기 시작할 것입니다.
2.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
귀신들린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합니다.
초자연적인 능력 가운데에 하나가 초자연적인 힘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귀신들린 사람도 너무 사나와서 아무도 그 길을 다닐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귀신 들린 여자가 그를 제어하려는 남성 서너명을 가뿐하게 들어서 내동댕이쳤다는 예도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초자연적인 능력이 초자연적인 지식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귀신들린 사람은 초자연적인 지식을 과시합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잘 모르는데 귀신들린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또 지금 시대는 사단과 악령이 활동할 것을 허락 받은 시대이고 언제인가 그 시대는 끝나리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지식 때문에 사람들은 무당이나 역술인에게 끌립니다. 제가 어떤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들었습니다. 형수님이 계셨는데 큰형수는 믿음이 좋고 작은형수는 별로였답니다. 그런데 작은형수가 큰형수에게 점을 치러 가는데 같이 가달라고 청했습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강청해서 같이 갔습니다. 점쟁이 집에 도착했을 때에 문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큰형수는 작은형수만 들여보내고 문밖에 앉아 있었습니다. 작은형수 차례가 되었을 때에 점쟁이가 말했습니다. "큰동서는 여기까지 왔으면 들어오지 왜 밖에 앉아있는가?" 같이 온 것을 어떻게 알았으면 밖에 앉아있는 것은 어떻게 알았으며 더구나 그 사람이 큰동서인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귀신같이 맞추더라'고 놀랐다는 내용의 일화를 들었습니다.
이처럼 알 수 없는 일을 족집게처럼 집어내기 때문에 무당이나 역술인들이 인기를 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의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과거나 현재를 잘 알기 때문에 미래도 잘 알리라고 생각해서 그들은 과거나 현재 일을 잘 맞추지만 미래를 예측하는 데에는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래를 하나님의 손에 달렸기 때문에 악령들이 짐작은 하지만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고 장래를 손에 쥐고 계신 하나님에게 구하고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의 권세에 굴복한다
악령은 예수님의 권세에 순종합니다. 예수님이 쫓아내겠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귀신들은 이미 벌벌 떱니다. 그리고 자원해서 떠나갑니다. 마가 복음에 보면 이 귀신들린 사람 안에 있는 악령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고 했습니다. 군대 귀신이 들었다고 했는데 군대는 legion이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legion은 6000명의 군인으로 형성되어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귀신들이 동아리를 틀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권세 앞에서는 꼼짝 하지 못합니다.
(1) 하나님의 자녀는 귀신 들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령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도 요한 1서 4:4에서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강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즈음을 제가 괴기 영화를 보지 않지만 전에는 오싹오싹하게 만드는 영화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사단이나 사단의 하수인이 주제인 영화를 보았는데 그런 영화에서는 예수님이나 하나님이 무척 무력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래야 더 스릴이 있어서 그렇겠지만 어쨌거나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을 때에 저항을 하지만 끝까지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삶이나 이웃의 삶에 악령이 역사한다고 판단이 되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를 갖고 그의 이름으로 쫓아야하는 것입니다.
(2) 성령 충만하면 떠나간다
악령의 역사에 관하여서는 이제 많은 연구가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 성령님을 모신 사람은 귀신에 들릴 수는 없다는 것이 이 방면 권위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도 악령에게 씌울 수는 없지만 영향을 받을 수는 있다는 공통적인 견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악령에게 틈을 주지 않도록 분들 품지 말라는 사도 바울의 권고가 의미가 없습니다(엡 4:26-27). 또 사도 베드로도 "사단아 물러가라"라는 꾸짖음을 들은 것을 상기할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도 악령에 들릴 수는 없지만 악령의 영향을 받을 수는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마 16:23).
악령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면 악령에게 집중하지 말고 성령에 집중하면 됩니다. 성령 충만하면 우리 삶에 역사하던 악령들은 쫓지 않아도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해서 물러가게 되어있습니다. 은혜로운 성경공부를 마친 후에 디프레션이 걷히고 자신을 억누르던 염려가 사라지며 자유함을 느끼는 것이 괴롭히던 악령이 성령 충만함으로 발붙일 곳을 잃고 떠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령의 영향을 두려워하며 살지 말고 성령 충만하다하다 추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3) 악령이 틈타는 통로를 막아야한다
떠난 악령이 다시 돌아오지 않게 하려면 악령이 나의 삶에 들어오도록 한 통로를 막아야합니다. 남에게 품은 앙심이 통로가 되었다면 회개하고 용서하여야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통로를 제공했다면 이것도 회개하고 용서해야합니다. 인터넷을 통한 음란물이 음란의 영이 삶에 들어오는 통로를 제공하였다면 그 통로를 제거해야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습니다. 많은 경우에 어렸을 적에 경험한 불건강한 성적 경험이 음란물에 끌리게끔 만듭니다. 이것을 상담이나 목장 모임을 통하여 해결하여야 음란의 영이 다시 자신의 삶에 역사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악령은 허락 없이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내가 문을 열어주기 때문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상담을 통하여 아니면 목장 모임을 통하여 이 통로를 발견하고 폐쇄해야 합니다.
일단 통로를 발견하여 차단하고 악령이 역사할 수 있는 소지를 제거하면 우리는 악령에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쫓겨간 후에도 집적대겠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면 반드시 물러가게 되어있습니다(약 4:7).
II. 예수님에 관하여 알아야할 일
귀신들이 더 이상 귀신들린 사람 속에 있을 수 없는 것을 깨닫고 돼지에게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 왜 돼지 몸에 들어가기를 원하는지 왜 예수님이 이것을 허락하였는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마태는 목격한 것을 단순히 기록해놓았을 뿐이고 설명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에 관하여 설명을 하지 않고 계십니다. 어쩌면 기생충이 사람 몸 안에서 살아야하듯이 귀신들도 들어가서 살아야할 몸이 필요하지 않은가 짐작할 뿐입니다.
그런데 귀신이 들어가니까 돼지들이 놀란 것 같습니다. 로데오에 가면 야생마에 사람이 올라타면 야생마가 놀라서 사람을 떨쳐내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돼지들에게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소 떼들 중에 한 마리가 뛰면 다른 놈들이 뛰기 시작하여 소 무리 전체가 뛰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결과적으로 돼지들은 다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돼지치기는 읍내에 가서 알렸고 읍내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떠나주실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1. 희생이나 결과를 보지 말고 예수님을 보라
어떤 주석가는 동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사람이 온전해지는 것보다 돼지가 죽는 것이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나무라지만 사실 저도 돼지 주인이라고 하면 동네 사람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 같습니다. 돼지 한 마리가 꽤 비쌀 텐데 수십마리 내지는 수백 마리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귀신 들린 사람이 고쳤으니까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올바른 태도는 아니지요.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 떠나라고 하지 않았을 수 있었을까?
돼지 떼에 집중하면 떠나달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깨끗함을 받은 귀신 들린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가짐이나 태도가 좀 낫을 것입니다. 그러나 돼지가 한 두 마리가 아니고 수십마리, 수백 마리면 역시 떠나 달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집중했으면 떠나달라고 하지 않을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가 있으면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으면 떠나달라고 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머무셨다면 돼지 떼를 잃는 손해를 보상하고도 남은 좋은 일들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섬길 때에 희생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섬기면서 지치지 않으려면 희생에 시선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희생의 결과에 시선을 두면 지치는 것이 덜합니다. 그러나 생겨지는 결과에 비하여 희생이 과다하게 느껴질 때에는 또 실망합니다. 실망하지 않고 탈진하기 않기 위하여서는 희생이 아니고, 결과도 아니고, 예수님에게 시선을 고정시켜야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주신 사역이기 때문에 충성하는 것이고 충성할 때에 결과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칭찬과 보상이 따르리라는 것을 믿을 때에 우리는 낙망과 탈진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2. 기회 있을 때에 영접하고 섬기라
어쨌든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떠나가 달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 간청에 따라 예수님은 이 지역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서에 예수님이 이 지역을 방문하셨다는 기록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거절하면 떠나십니다.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미국에 오셔서 우리 교회에 나오셔서 생명의 삶까지도 수강하시고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지 아니하고 귀국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 문을 그렇게 두드리셨는데도 끝내 거부하고 돌아가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을 볼 때에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휴스턴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돌아간 분이 영적인 분위기가 흐린 한국에 돌아가서 영접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우리 마음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나 계속하여 거절하면 어느 때인가는 떠나십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역에 초청을 하십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이유를 대고 거절하면 "오케이, 그럼 다른 사람 시키겠다." 다시는 사역의 기회를 주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이 있다고 생각되고 마음의 감동이 올 때에 예수님을 영접하기도 하고 사역에 뛰어들기도 하여서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