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m 높이의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고대문화 보물창고
요르단 관광의 얼굴은 페트라다. 페트라는 요르단 남서부 내륙 사막지대의 해발 950m 고원 바위산에 남아 있는 고대 도시유적.기원전 6세기께부터 이 일대를 장악했던 아랍계 유목민인 나바테아인의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영원의 절반만큼 오래된,장밋빛 같은 붉은 도시'라고 노래한 존 버건이란 영국 시인의 감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이름 높다.
◆바위산 협곡길 끝의 보물창고
페트라는 최고 300m 높이의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닫힌 공간이다. 페트라와 페트라가 아닌 곳은 협곡길로 연결돼 있다. 까마득히 높은 수직절벽이 하늘까지 가리는 협곡길은 좁고도 길다. 마치 끝이 정해진 갑갑한 동굴 속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밖에서 보기에는 울퉁불퉁 커다란 바위산일 뿐이다. 전쟁이 일어나 적이 쳐들어왔다고 하더라도 그냥 지나칠 수 있겠다. 용감한 전초병이 어찌어찌 협곡 입구를 찾아 들어섰어도 곧 막다른 길이 나올 것이란 생각에 되돌아 나갔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할 정도다.
1㎞ 정도의 협곡길은 그 끝에서 '천년의 신비'를 폭발시킨다. 어두컴컴한 협곡길 깊숙이 파고드는 진홍의 빛내림이 장엄하다. 그 뒤로 보일 듯 말 듯 우뚝한 '알 카즈네'의 모습이 그렇게 신비스러울 수 없다.
수직의 붉은 사암절벽을 조각칼로 깎아 만든 듯한 알 카즈네는 2층 구조.아래 위 6개씩 총 12개의 굵은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신전의 모습이다. 매끈한 기둥 위 장식들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실제로 손으로 깎아 만든 것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알 카즈네는 보물창고란 뜻.파라오의 보물이 묻혀 있는 곳이라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겉모습만 보면 그런 이름으로 불릴 이유가 충분하다. 그러나 화려한 외부와 달리 내부는 텅 비어 있다. 알 카즈네는 사실 대부분의 페트라 유적과 같이 무덤이라고 한다.
페트라 유적의 주인공은 아랍계 유목민인 나바테아인이다. 나바테아인은 기원전 600년부터 페트라에 정착했다. 페트라 일대는 성경 속 이삭의 장남인 에서가 이끌던 에돔족의 땅이었다고 한다. 신바빌로니아왕국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이스라엘 유다왕국에 침입해 사람들을 바빌론으로 잡아갔는데,에돔족은 이 틈을 타 유다왕국으로 이주했다. 이후 페트라는 나바테아인의 땅이 됐다. 나바테아인의 페트라는 무역으로 번성했다. 실크로드와 왕의 대로 등 동서남북을 잇는 교역로가 모두 페트라를 통과했던 것.그러나 2세기께 이곳을 점령한 로마가 교역로를 다른 데로 돌리면서 급속한 쇠퇴의 길을 걸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페트라가 역사에 다시 등장한 것은 1812년이다. 스위스 탐험가 요한 루드빅 부르크하르트가 페트라를 유럽에 소개하면서 1600여년의 긴 어둠에서 벗어났다.
알 카즈네 뒤로 이어지는 길에서도 페트라 유적을 볼 수 있다. 굵은 기둥이 늘어선 열주로,바위를 깎아 33층의 계단식 의자를 만든 원형극장 등 로마시대의 흔적도 남아 있다.
바위절벽 길을 1시간 이상 걸어 올라야 만날 수 있는 대사원도 웅장하다. 알 카즈네처럼 사암절벽을 깎아 만들었다.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페트라는 기원전 7세기부터 2세기까지 이 지역에 살던 아랍계 유목민 베두인의 조상 나바테안 사람들에 의해 해발 950m에 건축된 산악도시이다. 이곳에 처음 정착한 그들은 특유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중국, 인도, 남아라비아와 이집트, 시리아, 그리스, 로마 등과 향신료 중개무역을 하며 번영을 누렸다.
붉은 바위를 나무처럼 자유자재로 깎아 만든 페트라는 6세기 때 지진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흙으로 묻혀 있다가 1812년 스위스의 작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발견됐다. 현재 우리가 여행할 수 있는 페트라는 나바테안인들이 건설한 도시 전체 중 4분의 1에 해당한다.
붉은 빛의 왕국이자 고대 도시인 페트라는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서남쪽으로 150㎞ 떨어진 곳에 있다.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일 정도로 자연과 인간의 오묘한 조화가 스며 있는 신비로운 곳이다. 중국 둔황 동굴처럼 300m에 이르는 험난한 붉은 바위를 깎고 파내어 궁전ㆍ보물창고ㆍ무덤 등이 들어섰다.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의미를 지닌 페트라는 오래전부터 바위가 많은 곳으로 유명했던 지역이다.
페트라로 들어가려면 좁고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협곡 '시크'를 통과해야 한다. 1㎞ 남짓한 시크 옆으로는 거대한 붉은 사암이 요새처럼 가로막는다. 하늘에서 보면 거대한 바위 틈새로 뱀이 꿈틀대는 모양이다. 이렇게 좁은 협곡 사이에 길을 낸 것은 적으로부터 안전하게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외적들의 침입 시 협곡 위에서 돌을 굴리거나 화살을 쏘면 적은 영락없이 덫에 갇히게 된다. 이처럼 나바테아인들은 페트라의 자연적인 지형을 고려해 도시를 건설했고, 그 이유로 현재까지 페트라가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페트라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알 카즈네는 너비 30m, 높이 43m의 부조 건물이다. 기둥이나 벽을 세우지 않고 오로지 바위를 정교하게 다듬고 파내서 만든 알 카즈네는 페트라의 상징이자 요르단의 문화 아이콘이다.
이 외에도 거대한 바위산을 깎아서 만든 로마극장은 나바테안 사람들의 기발한 독창성과 그들의 건축 기술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사람의 손에 의해 하나씩 깎인 계단은 33층이고, 좌석은 7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곳에서 페트라에서 행해지는 각종 행사, 회의, 종교 의식 등이 열렸다.
페트라는 수백 년 동안 아랍문화와 로마 가톨릭 문화가 어우러져 사막에 독특한 문화의 꽃을 피워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 이것만은 알고 떠나요
△항공ㆍ현지교통=현재 요르단까지 운항되는 직항편이 없으므로 카타르 도하나 두바이, 인도 델리를 경유해야 한다. 총 비행시간은 두바이를 경유하면 약 13시간, 도하를 경유하면 약 13시간30분, 델리를 경유하면 16시간 정도 걸린다.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페트라 관문 도시 와디무사까지는 버스로 3시간 정도 소요.
<영상 기행> 장밋빛 붉은 도시 페트라
시리아와 아라비아 반도에서 번성한 아랍계 유목민 나바테아인이 건설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2천년전 사막 한가운데 붉은색 사암으로 이뤄진 바위 틈새에 바위를 깎아 현대에 못지 않는 도시 문명을 이룩했다.
영국 시인 딘 버건은 페트라를 두고 '영원의 절반 쯤 되는 장밋빛 붉은 도시'(rose-red city)라고 칭송했는 데 이는 페트라의 별칭이 됐다.
우리에겐 영화 '인디애나 존스-마지막 성배'의 촬영지로 잘 알려져 있다.
구약 성경에선 이곳을 '에돔의 셀라'라고 불렀는데 히브리어로 셀라는 바위라는 뜻이다.
페트라 역시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이다. 이름만큼이나 기암괴석과 그 안에 구약에선 애굽(이집트)을 탈출해 가나안으로 가던 유대민족에겐 이 곳이 그 통로가 됐다고 한다.
페트라가 위치한 지역 이름이 '와디 무사'(모세의 계곡)인 만큼 구약과 연관이 깊은 유적지다.
기원후 106년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정복됐고 6세기 일어난 지진으로 도시가 멸망했다는 가설도 있다.
역사속에 뭍혔던 페트라는 1812년 스위스의 탐험가 요한 루드히 부르크 파르트에 의해 1천200년 만에 다시 세상에 그 유구하고 웅장한 모습을드러냈다.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으며 이집트의 피라미드 등과 함께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불린다.
페트라
탁월한 보편적 가치
나바테아의 수도였던 페트라는 홍해와 흑해 사이에 있으며,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에는 아라비아의 향료와 중국의 비단, 인도의 향신료를 거래하는 대상들의 중심지였다. 바위를 반쯤 깎아 만든 건물들은 좁은 통로와 수많은 협곡이 있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독창적인 치수(治水) 체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나바테아와 로마, 비잔틴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도 건조한 이 지역에서 사람들이 대규모로 정착할 수 있었다. 페트라는 붉은 사암 경관이 지배적인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풍부하고 드넓은 고고학 유적지다.
페트라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는 대규모 고고학 유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점에 있다. 공들여 만든 대규모의 무덤과 사원 건축물, 고지대의 종교 유적, 수로의 자취, 터널, 계절성 빗물을 저장하고 관리할 수 있는 집수지와 물탱크들을 방대하게 연결한 우회 댐, 구리 광산, 사원, 교회, 기타 공공건물을 포함한 유적들이 바로 그것이다. 알카즈네 신전(Khasneh)과 우른(Urn) 무덤, 궁전 무덤, 코린트식 무덤, 수도원을 포함하여 바위를 깎아 만든 나바테아의 전통적인 신전과 무덤들은 헬레니즘 건축 양식의 파사드(facade, 정면)와 융합되어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1세기 사이의 건축 양식의 총체를 대표하는 독특한 예술적 업적으로 남아 있다. 선사시대부터 중세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고학 유적과 건축 기념물들은 지금은 사라진 문명을 훌륭하게 증명하고 있다.
베이다(Beidha)의 신석기 시대 정착촌 유적, 움알비야라(Umm al Biyara)의 철기 시대 정착촌, 움알아마드(Umm al Amad)의 금속 병용 시대의 광산 유적, 열주가 늘어선 길과 3중 아치를 이룬 출입문과 극장과 수로의 출구와 목욕탕 등을 포함한 그리스 및 로마의 민간 건물 유적, 3중 애프스(apes, 교회당 동쪽 끝에 튀어나와 있는 부분)가 있는 바실리카 성당과 우른 무덤에 건설된 교회를 포함한 비잔틴 흔적, 하비스(Habis)와 우에이라(Wueira)의 십자군 요새의 잔해, 전통적으로 예언자 아론(Aaron)의 매장지인 제벨아룬(Jebel Haroun)의 이슬람 사원의 토대, 이상의 모든 것들이 페트라 지역의 과거 문명을 특별하게 증언하고 있다. 움알아마드의 구리 광산과 지하 갱도는 기원전 4세기 광산 건축물의 탁월한 본보기다. 우회 댐과 무트림(Muthlim) 터널, 수로, 수도, 집수지, 물탱크는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1세기 사이의 치수 기술을 보여주는 탁월한 유적이다.
완전성
거대한 바위를 깎아 만든, 독립적으로 서 있는 모든 주요 기념물들과 대규모 고고학 유적들은 붉은 사암 절벽과 협곡들이 즐비한 건조한 경관 안에 들어와 있다. 이 유적들은 유산의 경계 안에 있는 동시에 페트라 국립공원(Petra National Park)의 경계 안에 있다. 기념물들은 바람과 비 때문에 계속 침식되고 있으며, 지표를 없애는 초식동물들 때문에 강해진 모래바람으로 이미 오래 전에 많이 파괴되었다. 20여 년 전 베두인족을 재정착시킨 것과 그들의 가축을 페트라 분지에 있는 계절 거주지에서 움사이운(Umm Sayhun)의 새 마을로 이주시킨 것도 부분적으로 이와 같은 파괴를 막기 위해서였다. 건축물들은 나바테아의 치수 체계가 지속적으로 관리·보수·유지되지 않으면 ‘시크(Siq, 바람 골짜기)’를 거쳐 와디무사(Wadi Musa)에 이르는 돌발적인 홍수에 취약 할 수 밖에 없다.
이곳은 등재유산이 된 이후 크게 증가한 관광객들의 방문으로 시달리고 있고, 특히 도시의 동쪽 주요 출입로인 ‘시크’가 매우 붐빈다. 지역 공동체와 관광객을 위한 기반 시설도 취약하다. 새로운 하수 처리장은 인접한 세류(細流) 관개 농장 프로젝트를 위해 쓰이는 재사용한 물을 북쪽의 유산 안쪽으로 공급해 왔다. 유산 내부에 앞으로 갖춰야 할 계획된 기반 시설만 해도 전력 공급 시설, 변전소, 공동체 센터와 방문객 센터, 지역 행사를 위한 노천극장, 소풍 구역, 캠핑장, 카스르 알 빈트(Qasr al Bint) 사원 근처의 새 식당 등 아주 많다. 이 모든 것이 문화유산의 보전에 잠정적인 영향을 준다.
진정성
사원과 무덤 기념물의 특성과 위치, 주변 경관은 명확하게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가진다. 사암 건축물의 자연적인 침식은 장기적으로 유산의 진정성을 위협한다. 카스르 알 빈트 사원 을 포함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념물들과 우른 무덤의 비잔틴식 앞마당을 지지하는 아치형 천장 구조의 보강은 문화유산 등재 이전에 진행되었다.
본문
나바테아인이 건설한 이 사막의 대상(隊商) 도시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홍해와 흑해 사이에 있다. 이곳은 이집트와 아라비아, 시리아와 페니키아 사이의 중요한 교차로였다. 고대 동방의 전통과 헬레니즘 건축 양식이 혼합된 페트라는 사라진 문명을 훌륭하게 증언하고 있다.
페트라는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Amman)의 남쪽, 산이 많은 와디 아라바(Wadi Araba) 사막의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이 도시를 둘러싼 우뚝 솟은 사암 언덕들은 침입자들을 막아주는 천연 보호막 구실을 했다. 이곳은 수세기 동안 지중해와 근동, 아프리카, 인도를 오가며 향신료를 수송하는 낙타 상단이 이용했던 교역로들이 만나는 교차점이었다. 페트라는 나바테아 인들이 기원전 6세기에 처음으로 건설했고, 셈족이 시리아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상업 제국의 토대를 만들었다. 서기 106년,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Trajanus)는 나바테아 왕국을 아라비아의 일부로 합병했다. 지진이 여러 차례 페트라를 강타하여 도시가 서서히 사양길에 접어들었지만, 그에 아랑곳없이 대주교의 관할구로 지정되었다.
636년에는 아랍인이 도시를 정복했다. 그러나 메카로 향하는 순례길과는 거리가 멀었다. 12세기에 십자군이 이곳에 요새를 건설하여 페트라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다. 그 뒤 그들은 곧 철수했고, 페트라는 스위스 탐험가 부르크하르트(Burckhardt)가 이곳을 탐사했던 19세기까지 지역 주민들의 차지가 되었다.
알카즈네 신전의 북쪽에 제벨 쿱타(Jebel Khubtha)라는 단층 지괴가 있다. 이것은 ‘왕의 벽’이라 알려진 바위의 정면에 조각이 되어 있는 세 개의 거대한 구조물(왕의 무덤들)이다. 첫 번째는 우른 무덤으로, 정면에 2열의 둥근 천장이 있는 노천 테라스가 잘 보존된 기념물이다. 열주가 있는 회랑은 테라스의 북쪽으로 뻗어 있고, 공들인 파사드는 꾸미지 않은 하나의 간소한 방을 향해 있다. 또 벽들은 매끄럽고 내부의 모서리는 빈틈이 없다. 현재 확인되는 유일한 장식은 벽과 천장, 방바닥에 있는 다양한 색깔의 아름다운 사암 소용돌이 문양이다.
알카즈네 신전의 축소판인 코린트식 무덤은 궁전 무덤(비단 무덤)의 옆에 있으며, 바위의 독특한 색채 효과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왕의 무덤에서 약간 떨어진 북쪽에 130년에 건설된, 하드리아누스(Hadrianus) 황제가 다스리던 시절의 로마 총독 섹스티우스 플로렌티누스(Sextius Florentinus)의 무덤이 있다. ‘파라오의 보고(寶庫)’라는 뜻을 가진 카즈네 엘 파룬(Khazneh el Faroun)은 대략 40m 높이의 인상적인 파사드가 있는데, 산허리의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 낮은 층에는 6개의 기둥이 떠받친 현관 지붕이 있다. 그 기둥들은 꽃무늬 기둥머리를 얹고 박공을 떠받치고 있다.
3층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가운데는 원뿔 모양의 지붕이 있는 둥근 천장식 분묘이다. 이곳에 유골 단지가 놓여 있다. 나머지 양쪽에는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반(半) 박공이 있다. 높은 수준을 자랑하는 건축, 조각 장식들이 건물의 각 요소들과 정면을 꾸미고 있다. 알카즈네 신전은 페트라에서 바위를 깎아 만든 유일한 건물로, 어떠한 나바테아적 요소도 없으며, 알렉산드로스의 세계와 헬레니즘 예술 전통 간의 배타적 유대를 보여준다. 인상적인 정면 뒤에 깎아지른 절벽의 바위를 깎아 만든 넓은 직사각형 방이 드러난다. 이것은 전형적인 페트라의 무덤이다. 외부만큼이나 평평한 내부는 복잡하다.
시크는 급류에 의해 만들어진 협곡으로, 나바테아인은 그곳을 막아 댐이나 수로를 만들어 도시에 식수를 공급했다. 시크의 돌 벽을 따라서 일련의 비문과 벽감, 소원을 비는 작은 제단뿐만 아니라 교역에 나선 인간과 낙타를 묘사한 돋을새김과 조각들이 있다. 시크의 폭은 5m가 안 되지만, 반면에 양쪽 벽면은 높이가 수백 미터에 이른다. 원래 포장되었던 바닥은 현재 부드러운 모래로 덮여 있다. 그렇지만 나바테아 건축양식은 여전히 몇몇 장소에서 볼 수 있다.
이곳에는 또한 로마 시대의 주목할 만한 유산이 남아 있다. 계곡의 남쪽 끝에 바위를 파내어 만든 서기 1세기의 극장이 그것이다. 이 극장은 8,000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시크의 끝에 있는 폐허는 열주로 된 길로 연결된다. 알 데이르(al-Dayr)는 페트라 계곡을 굽어보는 서쪽 벼랑에 서 있는데, 바위를 깎아 만든 신성한 돌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다. 알 데이르의 간소함과 단순함에서 헬레니즘의 전통적 요소들이 초기에 이 지역에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내부에는 장례 시설이 전혀 없다.
보존 및 관리체계
요르단 법에 따라 문화유적은 문화재국이 보호할 책임을 갖고 있다. 이 부처는 문화관광부 산하의 독립 조직이다. 유산은 문화관광부가 관리하는 페트라 고고학 공원 안의 보호 구역에 있다. 하지만 전반적인 설계와 기반 시설의 확충에 대한 책임은 주로 페트라 지역 당국(PRA)이 가지고 있다. 과거에는 페트라 지방 계획 위원회(PRPC)이 책임을 졌지만, 페트라 지역 당국은 현재 지역 공동체의 사회경제적 발전까지 책임지고 있는 실정이다. 관리 직원이 증가하여 유적의 점검과 통제를 위한 캠페인도 가능하게 되었고, 상점의 임대와 공동체가 관리하는 상점의 디자인을 포함해서 관광객 수요와 지역 주민의 참여를 관리하기 위한 전략 또한 발달했다.
페트라 고고학 공원(Petra Archaeological Park) 관리 계획에 따른 규칙과 정책을 보면 페트라 고고학 공원의 전기화 작업, 나무 심기를 포함한 물 재활용 농장 계획 등 페트라 지역 당국이 추진하는 기반 시설 계획을 포함하고 있다. 그 계획에는 공원 내부의 공공사업과 활동뿐만 아니라 공원 조명, 관광로, 안내판, 식당, 상점, 공동체 위락 지구, 수익 사업도 포함되어 있다.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장기적인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으며, 방문객의 증가로 발생하는 피해로부터 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관리 지침도 필요하다. 관광 수입의 증가는 지역의 경제적, 사회적 생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등재기준
기준 (ⅰ) : 나바테아적이면서 헬레니즘적인, 감동을 주는 사원과 무덤들은 천연의 꾸불꾸불한 바위 틈새길(시크)을 통해 갈 수 있다. 시크는 한때 번영했던 무역 도시로 향하는 동쪽의 주요 출구이자 독특한 예술적 업적이다. 이것은 19세기 초 이래 방문객들을 매료시켰던 사라진 도시의 걸작이다. 출입로와 거주지는 창의적이고 천재적인 거대한 치수 및 저장 체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준 (ⅲ) :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들이 밀집되어 있는 무덤군은 헬레니즘 기념물을 통해 받은 아시리아의 건축적 영향을 반영한다. 제벨 마드바(Jebels Madbah)와 메이스라(M’eisrah), 쿱타(Khubth), 하비스, 알 마드라스(Al Madras) 등 제의적이면서 종교적인 고지대의 종교 유적, 방대한 치수 체계의 흔적, 도시의 벽들과 독립해서 서 있는 사원들, 정원 테라스, 무덤 비석과 현판, 북쪽 통로(바리드(Barid) 또는 리틀 페트라)와 남쪽 통로(사브라(Sabra))에 있는 무덤·사원·물탱크·집수지를 포함한 외곽의 상인들의 정기 숙영지는 기원전 4세기에서 서기 1세기까지 존속한, 지금은 사라진 나바테아 문명을 훌륭하게 증언하고 있다.
기준 (ⅳ) : 전체 건축물에는 알 카즈네 신전과 우른 무덤, 궁전 무덤, 코린트식 무덤, 수도원 등 소위 페트라의 왕릉이라 불리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유적들은 동양적 전통과 헬레니즘 양식의 독특한 혼합을 보여 주며, 서기 1세기 말에 이 지역에서 이루어진 동양과 서양의 중요한 만남을 대표한다.
도시 자체가 거대 바위, 암벽도시 페트라
바위를 통채로 깎아 만든 도시, 페트라는 어떻게 몰락했을까.
1812년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요르단 수도 암만 서남쪽에 위치한 페트라가 발견됐다. 페트라는 기원전 4세기 아랍계 유목민 나바테아인들이 상인들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에 도시를 건축한 것이다. 이들은 통행세를 받아 부를 축적했다.
페트라의 입구는 잘 보이지 않는 절벽 암석으로 가려져 있었다. 지각 변동으로 찢긴 바위 틈새를 통해 발견된 페트라에는 주거시설, 목욕탕, 극장, 시장, 무덤, 상수도 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더 놀라운 건 이 모든 건물이 건축이 아닌 조각이라는 것이었다.
높이 39m 너비 28m 알카즈네 신전은 바위를 정교하게 다듬고 파내서 만든 것이었으며 너비 40m의 원형극장 역시 모두 바위를 다듬어 조각했다. 수도원, 집 목욕탕, 무덤 역시 바위를 깎아 만든 것이었다.
나바테아인들은 바위를 평평하게 깎아 설계도를 그린 뒤 그림 그대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파고 들어갔다. 이들은 바위 자체를 신으로 숭배했다. 현재 발굴된 것 건물만 800여개이지만 페트라 전체의 1/4 불과하다고 한다. 이집트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하지만 정확한 과정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들은 3만명이 마실 식수를 어떻게 공급했을까. 이 지역은 연중 강수량이 10~15cm에 불과했다. 나바테아인들은 바위를 오목하게 깎아 빗물 저장고를 만들고 25km 이내 모든 샘을 끌어들였다. 이렇게 저장된 물은 실핏줄 같이 연결된 수로를 거쳐 각 가정에 이어졌다.
번창하던 이들도 2세기 무렵 로마의 눈에 들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로마는 페트라의 식수를 차단했고 결국 서기 106년 트라야누스 황제에 의해 점령됐다. 또 두 차례 지진으로 인해 사람들은 페트라를 떠났다.
6세기 파피루스 뭉치에서 582년 혼례 기록을 끝으로 페트라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80% 이상이 모래 속에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페트라는 여전히 신비에 휩싸여 있다.
사막과 협곡 끝나는 곳, 신기루 같은 장밋빛 신전
중앙일보·라푸마 공동기획 해외 국립공원을 가다 │ ⑦ 요르단 페트라 국립공원
영화 ‘인디애나 존스-최후의 성전’에서 고고학자 인디애나 존스(해리슨 포드)는 예수의 성배를 찾아 사막 한복판의 고대 신전으로 향한다. 말을 타고 협곡 사이를 얼마나 달렸을까,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장밋빛 신전이 나타난다. 사암 절벽을 정교하게 파내어 지은 석조 건물이다. 이 붉은 신전은 SF 영화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사진)’에도 등장한다.
외계 로봇 종족의 운명을 가를 열쇠가 신전 암벽 뒤에 감춰져 있었다. 이 신전이 바로 고대도시 페트라(Petra)의 대표 건축물 ‘알카즈네(Al Khazneh)’다. 페트라는 고산지대 바위산을 일일이 깎아 만든 고대 도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요르단을 대표하는 국립공원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다. 그러나 이 모든 화려한 수사(修辭)는 경이로운 옛 도시를 마주하는 순간 부질없은 허사가 되고 만다.
왜 고대의 비밀을 추적하고 외계인의 흔적을 쫓는 영화마다 사막 한복판 페트라까지 찾아 들어와 촬영을 하는지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해야 이해할 수 있다.
글=나원정 기자
인생사에 빗댄다면 페트라는 팔자가 억센 도시였다. 2000여 년 전 아랍 민족 나바테아인이 맨몸으로 오르기도 힘든 해발 950m의 바위투성이 고지대에 도시를 건설했을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호시절은 화려했다. 나바테아인이 아라비아의 거상으로 부상하면서 페트라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교역의 중심지가 됐다. 그러나 사막 한가운데 도드라진 거점 도시는 로마제국의 표적이 됐다. 페트라가 106년 로마군에게 점령당하며 나바테아 문명은 쇠락했다. 그러나 페트라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 이유는 따로 있었다. 6∼7세기 발생한 대지진이 삽시간에 도시를 집어삼켰던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전설 속에 잠들어 있던 페트라를 다시 깨운 것은 스위스의 젊은 탐험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였다. 1812년 청년 요한은 요르단 남서부 지역을 탐험하고 있었다. 황무지와 가파른 협곡이 어우러진 도시 ‘와디 무사’에 도달한 그는 사막의 유목민 베두인족 사이에서 전해오던 전설을 듣게 된다. 와디 무사 인근에 보물이 감춰진 고대 도시의 폐허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페트라였다.
이미 페트라에 정착해 살고 있던 베두인족은 자신의 생활 터전을 침범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요한은 베두인족 가이드를 앞세워 협곡 틈새로 숨어들었고, 마침내 폐허 속에 잔존해 있던 나바테아인의 도시를 발견했다.
# 시공을 초월한 무덤가 연회
페트라 발굴 200주년을 한 해 앞두고 청년 요한의 자취를 뒤쫓아 갔다.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버스를 타고 남서쪽으로 3시간쯤 달렸다. 암만에서 멀어질수록 황갈색 바위산만 첩첩이 쌓여갔다. 용광로처럼 타오르던 태양이 기울어갈 즈음 숙소가 있는 페트라 인근 도시 와디 무사에 도착했다.
마침 일주일에 세 번 페트라의 야경을 공개하는 날이었다. 오후 8시쯤 페트라 국립공원 입구로 들어섰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을 노란 양초 불빛이 드문드문 밝혔다. 페트라 입구로 불리는 협곡으로 들어섰다. 암벽으로 둘러싸인 길인데도 왠지 모르게 푸근했다. 협곡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좁은 밤하늘에는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쏟아지는 별빛을 음미했다. 보드라운 흙길을 1㎞ 조금 넘게 밟았을 즈음 협곡이 끝났다.
양초 불빛에 물든 알카즈네가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알카즈네(베두인어로 ‘보물창고’)라는 이름 이전에 이곳은 나바테아 왕 아테라스 3세의 무덤이었다. 촛불 수십 개가 일렁이며 무덤가를 그윽하게 밝혔다. 이윽고 악사가 요르단 전통 관악기로 옛 왕가에 얽힌 곡조를 연주했다. 나바테아인은 죽은 자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 무덤가에서 자주 연회를 열었다고 했다. 민트향이 나는 요르단차로 나바테아식 풍류를 흉내냈다. 고대 왕이여, 페트라의 밤을 위해 건배! 알카즈네를 향하여 찻잔을 들었다.
# 페트라의 장밋빛 보물창고
이튿날 오전 9시. 전날 밤의 여운을 곱씹으며 다시 페트라를 찾았다. 어둠 속에서는 미처 보지 못했던 유물이 툭툭 모습을 드러냈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태양신 숭배의 상징물)를 닮은 석조 무덤과 헬레니즘 양식의 신전이 길가에 즐비했다.
협곡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나바테아의 독자적인 건축기법이 눈에 띄었다. 전날 만난 알카즈네가 대표적이었다. 너비 30m, 높이 43m의 알카즈네는 이음새가 거의 없이 견고하고 매끈했다. 사암 덩어리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일일이 조각했기 때문이다.
페트라에는 알카즈네 말고도 수십 기가 넘는 신전과 무덤이 있다고 했다. 아직 도시의 4분의 1만 발굴했을 뿐이라는 설명이 믿기지 않았다. 개중에서 가장 빼어난 것이 알카즈네였다. 알카즈네는 이집트 파라오의 보물이 감춰져 있다는 전설 탓에 뒤늦게 ‘보물창고’라는 이름을 얻었다. 일확천금을 꿈꾼 베두인족 사이에 결투가 끊이지 않아 지금도 유심히 보면 총알 자국이 남아 있다고 했다.
관문처럼 버티고 선 알카즈네를 지나 로마의 영향을 받은 웅장한 건축물을 돌아봤다. 돌산을 디디고 올라가 고대 왕의 무덤을 차례로 매만져 보고서는 당나귀를 타고 국립공원 끝으로 빠져 나왔다. 하루 반나절 이상 머물렀지만 자꾸 아쉬워 뒤를 돌아봤다. 전체 거리가 5㎞에 불과한 페트라 국립공원을 2∼3일씩 관람하는 관광객이 많다더니, 그제야 이해가 갔다.
당나귀는 베두인족 청년이 이끄는 대로 페트라에서 자꾸만 멀어져 갔다. 달빛이 좋은 날이면 남몰래 페트라에서 잠을 청하곤 한다는 그가 순간 몹시 부러워졌다.
세계 7대 불가사의 페트라 로마원형극장 |
【암만(요르단)=뉴시스】
“페트라가 2등입니다.”
요즘 요르단에서 페트라 이야기만 나오면 하는 얘기다.
지난 7일에 확정된 세계 7대 불가사의 선정에서 페트라가 중국의 만리장성 다음으로 많은 표를 받았다고 요르단 사람들은 한껏 고무돼 있다.
기암절벽 사이를 가로질러 나타나는 고대도시 페트라는 요르단으로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는 일등공신이다.
영화 '인디에나존스3'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알카즈네(보물창고)를 비롯해서 로마 원형극장, 모나스트리(수도원) 등은 섬세한 고대장인의 손길과 대 자연의 조화를 경험케 한다.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의 페트라는 성경에 나오는 에돔왕국과 나바티안 왕국의 수도였고, 그 후 로마와 비잔틴 문명이 지나간 곳이다.
페트라 내부를 걸으며 곳곳에 산재한 고대문명의 흔적들을 발견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이곳을 구석구석 다 둘러보려면 꼬박 하루를 잡아야 할 만큼 그 규모가 방대하다.
이제 페트라는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타이틀과 함께 요르단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되었다.
▶요르단 페트라=요르단 남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기원전 아랍계 유목민 나바티안 왕조가 건설한 고대도시다. 붉은빛 바위 절벽을 깎아 만든 산악 도시로 암석 조각과 수로 등이 유명하며 신전 극장 사원 등이 자리하고 있다.
페트라 [Petra] 요르단 고대도시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제국시대에 걸쳐 아랍 왕국의 중심지였던 고대도시.
나바테아인 암굴사원
이 도시의 유적은 요르단의 마안 주(무하파자)에 있다. 페트라는 동서방향으로 모세 계곡(Wadi Mūsa)이 관통하고 있는 해안단구 위에 건설된 도시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 계곡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바위를 칠 때 물이 용솟음쳤다는 곳 중의 하나이다. 모세 계곡은 연노란색으로 변해가는 빨간색과 보라색의 암맥을 가진 사암(砂岩)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때문에 페트라를 '빨간 장밋빛 도시'라고도 부른다.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인데 아마도 성경에 나오는 셀라가 이렇게 바뀐 것 같다. 이곳에 갈 때는 대개 동쪽에서 좁은 시크 계곡을 따라간다. 페트라에서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이후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아랍족의 하나인 나바테아인이 이 도시를 점령하고 자신들의 수도로 삼았던 BC 312년 이전에 도시가 어떠했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페트라는 나바테아인의 통치 밑에서 향료교역의 중심지로 번창했다. 106년 로마인들이 침입하여 나바테아인을 몰아낸 뒤에도 페트라는 로마 제국 치하의 아라비아 지방에 편입되어 계속 번영했으나 무역로가 바뀌자 상업이 점차 쇠퇴했다. 7세기에 이슬람 제국이 침입한 뒤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다가 마침내 1812년에 스위스의 작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여행중에 발견되었다. 1958년부터 시작된 조사에서 영국고고학대학 예루살렘 분교와 미국동양학대학의 조사단은 로마 통치 이전의 페트라에 관해 많은 것을 알아냈다. 여러 바위 유적지 중의 하나인 앗데이르는 정면을 기둥으로 장식한 모습이 인상적이며 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페트라에서 가장 볼 만한 것은 무덤인데, 많은 무덤이 정교한 겉모양을 가지고 있어 지금은 거주지로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