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를 바라보며
김정자
오늘은 남편과 결혼 한 지 34주년이 되는 날이다.
마침 일요일이기에 아침상을 마련하고자 이른 새벽 주방으로 들어섰
다.
남편이 좋아하는 야채튀김. 무국. 장남이 좋아하는 장 떡. 며느리는
짭짤한 무장아찌, 깻잎을 좋아한다. 사위는 갈비찜, 돼지고기 구이등
주로 육식을 좋아하고, 우리 고명딸은 입이 짧아 언제나 무엇을 해 주
면 잘 먹을까? 고민을 하게 된다. 아직 미혼인 막내아들은 아버지의
식성을 닮아서 조금은 까닭을 피우는 편이다.
우선 야채튀김을 하려면 감자 채. 피망 채. 당근 채를 같은 길이로
썰어야하고 얼큰한 무국도 무를 채 썰고 고기를 곱게다져 준비를 해야
한다. 빨갛게 고추장을 섞은 장 떡을 하려면 풋고추도 곱게 채 썰고
깻잎채 와 함께 밀가루반죽에는 들기름을 듬뿍 넣고 얇게 부쳐야 모양
있고 구수한 맛이 난다.
요리를 하려니 몇 년 전 새로이 장만한 도마가 눈에 보인다. 어느새
무수한 상처가 다시 아로새겨져 있다. 오랜 세월을 나와 함께 해온 도
마는 사정없이 남겨진 상처를 남긴 체 애처로운 모양새로 지금도 한켠
에 보관되어있다.
몇 년 전 새 도마를 장만하면서 한쪽으로 치워지는 도마가 왜 그리
안쓰러웠던지. 그 도마만은 나의 눈물어린 젊은 시절의 애환을 알고
있다는 듯 늘 그렇게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옛날부터 우리나라는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면 도마는 큰 몫을 해 내
야 했다. 오늘따라 도마 위에 남겨진 무수한 흠집들이 안쓰럽게 느껴
진다. 나의 지난날의 아픈 상처들이 아로새겨져 한눈에 들어오는 듯
가슴이 저려옴을 느낀다. 조용한 새벽을 요란한 도마소리를 내며 또다
시 입혀야하는 흠집들을 생각하며 잠시 도마 위를 어루만져본다.
시집 온지 5개월만에 겪은 일이다. 시어머님의 환갑을 맞이하게 되었
다.
그 때는 남편 따라 서울 이문동에서 신접살림을 하고있었다. 가깝게
지내는 친척들이 서울에 많이 산다는 이유로 나의 신혼살림 하는 전세
방에서 어머님의 회갑 상을 차리게 되었다.
그 때 나는 24세의 나이, 막내며느리인 나로서는 너무도 큰 잔치였
다. 시부모님을 위시한 시어른들. 사촌들... 신혼 방은 물론 부엌 위에
위치한 다락방. 주인집의 안방 마루까지 손님들이 온 종일 찾아들었
다.
그 나이를 먹도록 한번도 치루어 본 적이 없는 큰 행사를 갓 시집온
새댁이 치르기에는 버거운 일 이었다. 지금 와서 그때 일을 생각하면
나 자신이 기특하기만 하다. 그때 나는 잔치를 잘 치르고 시부모님께
칭찬을 받으려고 얼마나 긴장을 하였던가......
회갑 상은 비싼 돈을 지불하고 준비했지만(사진을 찍기 위하여 만든
상)다른 갖가지 음식들은 손수 장만을 하게 되었으니 시댁 친척들은
한마디씩 칭찬의 말들을 아끼지 않았다.
몇날며칠을 밤잠도 자지 못하고 메뉴를 짜고 요리 책을 들여 다 보
고 연구하였다. 밤이면 칼 도마 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깨기도 하였다.
그때부터 정들었던 도마를 버리지 못하고 30여 년을 보관하고 있다.
아마도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함께 재가 되어 사라지겠지.
내가 시집 올 때만 해도 시골에 땅은 많았지만 현금이 귀했다. 남편
의 작은 월급으로 매월 시부모님의 용돈만은 빠지지 않고 부쳐드리며
살림을 꾸려 나가던 나로서는 정말 이 들었었다.
어머님의 환갑날이 다가 왔을 때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온 밤을
새운 채 서툰 칼질이며 마른 음식들을 매만졌다. 그 때는 수도가 부엌
에 없어서 수돗물을 주인집 마당에서 공동으로 쓰고 있었다. 손님들
이 몰려올 시간은 가까워왔고 준비는 미쳐 안되어 신발도 신지도 못
한 채 마당으로 부엌으로 허둥대며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그 날을
생각하면 너무도 부끄러워 지금도 홍당무처럼 붉어지는 얼굴을 주체
할 수가 없다.
손님을 치르는 이틀동안 칼질을 하다가 손도 베이고 온 다리에는 여
기 저기에서 부딪힌 상처들이 며칠이 지난 후에야 아파 옴을 느꼈고
그 나이에 뼈 속까지 아픈 몸살이란 고통을 처음 경험했다.
큰일이 끝난 후에야 철없이 살아온 젊은 새댁은 우뚝 어른이 되어있
음을 느꼈다. 그리고 시아버님과 어머님께서 흐뭇한 표정으로
“새 아가 너 정말 애썼다. 고맙구나!"
하시는 말씀은 며칠동안 쌓였던 피로가 싹 가시는 듯 개운하고 행복
했었다. 지금도 그분들의 다정한 모습과 고우신 목소리가 이렇게 잊지
못하는 값진 보물로 내 가슴속에 남아있다.
오늘 나는 기계문명의 이기로 도마를 쓸 일 이 별로 없어진 현실이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다. 백화점에 가 보면 힘들여 다지지 않아도, 팔
목이 아프도록 칼질을 하지 않아도 자동기계가 해결해 주니 말이다.
또다시 정이 들어가는 도마 위의 칼자국들을 다시 한번 손바닥으로
보듬는다. 지나온 나의 인생도 이 도마 위의 흠집처럼 많은 상처를 입
으며 살아 왔다. 작은 상처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자연적으로 치유가
되어 사라지지만 깊은 상처는 도마 위의 흠집처럼 내 마음속에 남아
잊혀지지 않는다.
이제 시부모님은 멀리 떠나시고 이젠 그이가 회갑이 훨씬 지난 육십
대 중반에 이르렀으니 무정한 세월이 원망스럽다. 몇 해전 남편의 회
갑행사를 카나다 여행으로 대신 했다. 남편과 나는 시어머님의 환갑날
의 내 분주했던 때를 이야기하며 그 날을 회상하기도 하였다.
내년 결혼기념일은 35주년인 산호(珊瑚)혼식, 혹은 비취(翡翠)혼식
이라는 이름이 있는 날이라니 금년보다는 좀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어야겠다.
푸짐하게 차려놓은 아침 상위로 며느리가 준비해온 화려한 케이크에
햇수를 상징하는 서른 네 개의 빨간 촛불이 타오른다. 나머지 나의
인생을 촛불처럼 봉사하며 살라는 듯 나풀거리고 두 손녀딸들이 고사
리 같은 손바닥을 모으고 축하 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2001. 10집
첫댓글 서른 네 개의 빨간 촛불이 타오른다. 나머지 나의 인생을 촛불처럼 봉사하며 살라는 듯 나풀거리고 두 손녀딸들이 고사리 같은 손바닥을 모으고 축하 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서른 네 개의 빨간 촛불이 타오른다. 나머지 나의
인생을 촛불처럼 봉사하며 살라는 듯 나풀거리고 두 손녀딸들이 고사
리 같은 손바닥을 모으고 축하 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정이 들어가는 도마 위의 칼자국들을 다시 한번 손바닥으로
보듬는다. 지나온 나의 인생도 이 도마 위의 흠집처럼 많은 상처를 입
으며 살아 왔다. 작은 상처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자연적으로 치유가
되어 사라지지만 깊은 상처는 도마 위의 흠집처럼 내 마음속에 남아
잊혀지지 않는다.
먕월님. 춘자님. 이현자님. 변변치 못한 글읽으시느라 고생하셨네요.
댓글 달아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