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늦가을 어느 날이었지 싶다. 당시 육군일등병이었던 나는 15일간의 꿀맛같은 첫 휴가를 마치고 귀대를 서두르고 있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었지만, 추상같은 고참병들의 얼굴들을 떠올리며 휴가기간동안 느슨해졌던 마음을 스스로 다잡았다.
당시, 휴가 귀대 시에는 동료전우들을 위한 먹거리를 준비하는 것이 관례였기에, 어머니께서는 지극 정성으로 시루떡과 백설기를 만드셔서, 거북선 담배 다섯 보루와 소주 다섯 병을 꼭꼭 여미어 두 개의 보따리로 나누어 준비해주셨다. 혹여 선물이 부족해서 아들이 고참병들의 눈밖에라도 날까봐 과분한 양의 떡을 빚어 아들의 두 손에 꼭 쥐어 주셨다.
당시 나는 전주시의 외곽에 위치한 모 부대에 배속 받았기에, 대구-전주를 오고가는 고속버스를 이용했다. 어머니께서 준비해 주신 보따리들을 화물칸의 구석자리로 밀어넣고 지정된 좌석에 올라 앉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앞으로의 군대생활을 떠올리며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어느새 전주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는 안내양의 멘트가 흘러 나왔다. 곧 바로 버스에서 내려 귀대 꾸러미를 찾느라 화물칸을 살폈다.
하지만, 이게 왠일인가. 내가 찾는 그 꾸러미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눈을 부릅뜨고 찾아 보았지만, 있어야 할 보따리가 그 자리에 없었다. 첫 휴가 후, 말단 사병이 아무런 보따리도 없이 귀대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그림이었다. 너무나 황당하고 심각한 일이라 눈앞이 캄캄해지고 현기증이 나서 넘어질 것 같았다.
어머니가 주시는 용돈도 뿌리치고 온 터라, 아무리 주머니를 뒤져봐도 천 원짜리 두 장만이 잡힐 뿐이었다. 담배 한 보루를 사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말단 사병이 첫 휴가 귀대하면서 달랑 담배 몇 개피씩만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도 부족했다. 귀대시간은 이제 불과 1시간 남짓... 나로선 무엇을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초조함과 당혹감에 발을 굴리며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본 고속버스기사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이보오, 군인양반"
"예"
"시방 나도 군대생활을 해봤당게. 당신 심정 알만혀어. 내가 시방 어떠코롬 좀 해볼 참인게 너무 걱정하덜 말어"
얼마나 반가운 말인지, 마치 하늘에서 들려오는 구세주의 음성이 아닌가 싶었다. 이판사판이라 체면이니 염치니 따질 겨를도 없었다. 아저씨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입에선 말이 튀어 나왔다.
"아저씨 정말입니까"
"그랴, 시방 중앙시장에 함 가보잔게. 내가 거시기서 떡집을 본 것 같응게."
"그란디 시방 몇 시까지 부대에 돌아가야 혀어"
"이제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이런 증말로 큰일이 나부렀네이"
기사 아저씨도 워낙 다급하셨던지 고속버스에 나를 태우고 전주의 한 시장통으로 내달렸다. 다행히 아저씨의 말처럼 그곳엔 떡집들이 여럿 있었다. 떡집앞에 닿자마자 기사 아저씨는 대뜸 들기름 냄새가 구미를 돋구는 송편 다섯 되와 금방 찐 팥 고물떡 다섯 되, 그리고 고추튀김 50인분을 주문하신다.
"아저씨, 그렇게 많이 필요 없심다, 반 만있어도 충분합니더."
"기왕지사 사는 겅게 내가 인심 한번 확 쓰부릴텐게, 군인양반은 그냥 잠자코 있어랑게."
아니 휴가 귀대하면서 떡 열되에 고추튀김이 50인분이라니...
여태까지 이토록 많은 떡과 음식을 장만해서 귀대하는 병사를 본 적이 없었다. 거기다 슈퍼마켓에 들러 담배와 소주도 넉넉히 장만해주셨다.
"군인양반, 시방 내가 지인짜로 미안허게 됐당게."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미안하게 됐습니더."
넉넉한 선물꾸러미가 마련되자 기사아저씨는 지체없이 고속버스를 몰아서 부대 입구까지 태워다 주면서, 먹고 싶은 것 사 먹으라고 만 원권짜리 지폐 한 장을 내 전투복 바지주머니에 쿡 찔러주셨다. 사양할 틈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기사 아저씨는 멀리서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나의 귀대를 지켜보고 계셨다. 아마도 속으로는 자신의 일인 양 가슴을 쓸어내고 계신 듯 했다.
고마운 기사아저씨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고 겨우 귀대시간에 맞춰 복귀 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아련한 추억이 되고 말았지만 그 기사 아저씨의 따뜻하고 고마운 마음씀씀이는 여전히 진한 감동으로 내 가슴 깊숙이 남아 았다.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며, 평생 교훈으로 삼고 살고 있다. 매년 늦가을 바람이 불어오는 이맘 쯤이면 꼬박꼬박 인사를 건네오는 단골추억이 되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큰 떡보따리와 술꾸러미를 양손에 들고 내무반에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나의 양손에 들려 있는 선물꾸러미에 쏠렸다. 곧 "와"하는 소리와 함께, 고참병들이 한 마디씩 건넸다. 심지어 박수를 치는 전우들도 있었다.
"어이, 저 친구 들고 오는 꾸러미가 보통이 아니여. 오늘밤 기대되는 고마이"
"그 속에 뭐시기가 들은겨"
"우짜자꼬 이렇게 큰 보따리를 들고 온겨"
"와따, 보따리들 한번 엄청나게 크더라고이."
"이러코롬 큰 보따리 들고 오는 건 처음 본당게."
"힘들구로 말라꼬 이러케 마이 들고 왔노."
귀대 신고식을 하려고 경례를 올리자, 말년 고참병들은
"아따, 신고는 머언 신고야. 어여 일루와서 보따리나 함 풀어봐아."
하지만, 매의 눈을 지닌 중고참병들의 날카로운 눈초리들이 어디에 잠복하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말년 고참병들 얘기대로 그대로 따라할 순 없었다. 일단 목청을 최대로 뽑아 신고를 올렸다. 이전에 보지 못한 뜻밖의 선물 보따리 덕분에 내무반은 금새 화기가 돌았고, 잔치가 열렸다. 전 내무반원이 어울려 술과 담배 그리고 떡을 실컷 나누어 먹었다. 후덕하신 기사님 덕분에 아슬아슬한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고 아주 근사한 복귀인사를 마칠 수 있었던 그날의 상황은 너무나 극적인 반전이었다.
거창한 복귀 신고식 덕분에 서슬퍼렇던 고참병들도 나를 전보다 살갑게 대해주었다. 이후, 고참병들은 나를 보면 "휴가 또 안가나?" 또는 “휴가 언제 갈껴?”라는 식의 우스개 농담을 곧잘 건네곤 했다.
모든 일이 그 기사아저씨의 덕분이기에, 군대생활을 하는 동안 내내 이 분에게 감사하며 제대하면 꼭 한번 찾아뵙고 싶었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은 어떻게 계실까? 살아 계실까? 요즈음도 가끔 그 아저씨가 생각나고 소식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머니가 온갖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손수 지어주신 그 따뜻한 떡을 동료 전우들과 함께 나누어 먹지 못했던 일은 아직도 큰 아쉬움과 아픔으로 남아 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사건을 돌이켜보면 내 마음 속에선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며 일합을 주고받는다.
첫댓글 동쪽에서 귀인을 만난다
이런 얘기를 몸소 체험하신거 같습니다
그토록 훌륭한 분도 계시는곤요
제대하고 갈때라도 한번 찾아뵈었음 좋을뻔 했어요 근데 그 보따리는 언제 어디서 사라졌을까요 기사분 몰래 문을 열기는 힘들었을건데
재미나게 읽었어요^^
재미나게 읽으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네, 제대할 때 기사님을 찾아뵙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아쉽고 후회가 됩니다.
세상에나 화물칸의 짐은 누가 가져갔을까요.
나쁜 사람들...
기사님이 참으로 귀인입니다.
그런 맘을 내시다니요.
연락처 받아놨다가
제대후 찾아뵈었었다면....더 좋았을 것을 ...
참 좋은 기사님입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귀대시간이 워낙 촉박하여 서로가 정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곧 외국으로 오게되어 이후엔 뵈옵지 못하여 많이 아쉽습니다.
부디 건강히 오래오래 사시길 소망해봅니다.
@빈배
외국에 사시는군요.
거긴 어느나라인가요?
@북앤커피 캐나다에 살다가
지금은 미국 텍사스에 와 있습니다.
@빈배
캐나다로 가는 사람도 있는 데
캐나다. 미국 두 곳을 다 살아보시네요.
미국이 더 좋은가요?
@북앤커피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댓글로 설명드리기 보다 게시판에 다른 글 하나 올려놓겠습니다.
아들 2명이RT로군생활을
해서 복귀할때선물같은것
해준적은 없지만 그래도
명절에는 음식을많이해서
시하호 방아다리에서
군생활할때 군인들이랑
같이먹어라고 갔다준
기억이나네요,
평생잊지못할 귀인을만나셨네요
왜 제대하고못가보셨는지요,
소설같은 예기인거같기도하고,
댓글 감사드립니다.
제대후 얼마 안있어 외국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찾아뵈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