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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체 게바라님의 플래닛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체 게바라
(펌) 어느 낮, 대추리에 가다
진보평론 제28호
박수정 • 극작가⁄ <연극 전태일> 공동창작,
길에서
6월이다. 낮은 벌써 한여름 날씨다.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바뀐 가리봉전철역에서 천안 급행 전철을 탔다. 1시간 걸려 평택역에서 내려 평택극장을 찾았다. 코앞에 두고 빙 돌아 물어물어 평택극장 앞에 섰다. 극장 간판엔 순 싸우는 영화들이다. 누군가 그것이 현실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불편하다. 다시 저 영화들이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르치지는 않을지, 폭력은 일상이고 평화는 먼 곳에 있는 것은 아닌지, 극장 간판 아래에서 불편했다.
버스는 쉬이 오지 않았다. 안정리 가는 20번 버스는 5분에 한 대씩 그리도 자주 오건만 대추리 가는 16번 버스는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다녀오곤 했는데 혼자 대추리에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10분, 20분, 1시간… 시간이 지나간다. 기다리는 수밖에. 기다리다 영영 16번 버스가 안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래도 기다리는 방법 밖에는 없다. 정거장 의자에 앉거나 서 있는 사람들 모두 가는 곳 다르고 타야 할 버스는 다르지만 기다리고 있다. 더위에 지쳐가면서, 견디면서, 기다린다. 가난하거나 힘이 없거나 약한 사람은 늘 기다려야 했고, 더 많이 기다려야 했다. 기다림을 강요당해 온 삶이었다. 기다림이 부당하고 더 길어져도 이유를 따져 묻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 묵묵한 기다림이, 지독한 기다림이 어느 순간 모든 걸 휩쓸어버릴 만큼 커다란 저항의 파도가 되지 않을까, 대추리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해 본다.
생각에 빠져 있다가 아는 사람을 만났다. 아무도 아는 이 없는 평택에서, 그것도 평일 한낮에 아는 얼굴을 만나니 참 반갑다. 대추리에서 문학예술인들이 차린 들사람들 모임에 함께 하는 미술 쪽 사람이었다. 그이는 평택에서 살면서 서울로 출퇴근하는데 쉬는 날 집에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 대추리로 간다고 한다. 그렇게들 대추리에 한번쯤 들어갔다 온 사람들은 대추리 밖에서 지내는 일상이 불편하다. 도대체 대추리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무엇이 마음속으로 파고들어왔기에 대추리 밖에서 불편할까. 대추리는 지도에 새겨진 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이제 그 지도를 뚫고 나와 우리에게 어떤 한 상징이 되었다.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말한다면 외면할 수 없는, 비껴갈 수 없는 상징이 되었다.
1시간 20분쯤 기다려 16번 버스를 탔다. 대추리로 들어서자 너른 들판 곳곳 바닥이 파헤쳐진 논이 눈에 들어온다. 물이 고이고 그곳에 둥근 철조망이 몇 겹으로 쳐져 있다. 논길을 끊어 놓았다. 함께 가는 이가 말한다. 중요한 것은 저런 것을 보는 것이라고. 그렇다. 누구든 와서 보았으면 좋겠다. 안보니, 전략이니, 유연성이니, 동맹이니, 약속이니, 국익이니 하는 말들을 다 집어치우고 와서 보면 좋겠다.
나는 본다. 말라가는 논, 파헤쳐진 논, 철조망 쳐진 논, 논 한가운데 세워진 초록색 이동식 화장실, 논 한가운데 쳐진 검은 막사, 굴삭기로 논을 파고 있는 모습, 논 한가운데 서 있는 전경들, 농부 없는 논을. 모내기를 끝내고 어린 초록빛으로 물들어야 할 논이 지금 말라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 위를 낮게 날며 소리로 위협하는 헬기를 본다.
빈 집
비어있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집에 들어가 보았다. 집에 들어서자 오른쪽 벽에 ‘농기구 정리대’라고 쓴 나무판이 붙어 있다. 그 아래로 나무판에 굵고 큰 못 일곱 개가 나란히 박혀 있다. 그곳에 걸렸을 농기구들은 지금 없다. 드나드는 집 첫머리에 나란히 걸어놓았을 농기구들. 따로 광이나 뒤란이 아니라 살림집 첫발을 딛는 곳에 농기구 정리대를 만들어 놓고 이름까지 적어 붙여둔 것은, 그만큼 가장 소중하고 이들에게 밥과 생명을 주는 것이 호미며 낫과 같은 농기구들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이제 손때 익은 농기구들은 없고, 다른 벽에 작업복 하나가 걸려 있다.
집안 바닥에는 온갖 신발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나뒹굴고 있었다. 학생이 신었을 실내화, 구두, 운동화, 슬리퍼. 베게도 있고, 아이를 키웠을까 유모차도 있다. 씽크대도 그대로고, 찬장도 그대로다. 쟁반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방에 들어서자 옷장이며 서랍장이 남아 있다. 커튼이 떨어져 있었고, 지갑, 통장도 빼내어진 서랍 속에 있다. 두껍고 딱딱한, 어두운 쑥색 표지에 영어로 ‘INDIVIDUAL MILEAGE BOOK RECORD’(개인기록장, 장부)라고 쓰인 공책을 펼치자 1부터 191까지 번호를 매겨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이름 옆에는 회비로 걷었을 성 싶은 돈의 액수가 적혀 있다. 모두 만원씩이다. 드물게 5천원도 적혀 있다. 계를 묻은 건 아닌 것 같고, 뭔가 좋은 일에 돈을 모았을 것 같다. 특별히 어떤 일이라는 건 적혀 있지 않았다. 공책에는 딱 이 기록 뿐 다른 기록은 없다.
방바닥에 있는 큰 스케치북 한 권을 들춰보니 아이가 물감으로 그린 그림들이 있다. 스케치북이지만 영어 공부를 한 흔적이 여러 장에 남아 있다. “Hi! My name is Amy. What’s your name?”이라는 문구를 앞, 뒤, 중간 반복해서 적어놓았다. ‘Amy’라는 걸 나는 자꾸 ‘Army’로 왜곡해서 읽었다. 몇 번을 읽으면서야 내가 잘못 읽었음을 알았다. 내 눈에는 왜 ‘Army’로 보였던 것일까.
방에 걸려 있는 달력이 2005년 9월에서 멈추었다. 장수건강연구원에서 준 달력이다. 화장실에 걸린 햇쌀마을에서 준 달력도 2005년 9월이다.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이 대추리를 떠난 날은 2005년 9월 어느 날이었던가 보다.
보통 이사하면서는 물건들을 가져가고 깨끗이 쓸지는 않더라도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 어지간히는 치우는 법인데 이곳은 다시 살러 올 사람이 없는 곳, 사람들은 모두 버리고 떠났다. 새집으로 들어가면서 살림도 새로 장만한 건지 큰 살림살이들을 모두 남겨놓고 떠났다.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본다는 것, 그이들이 이제껏 살내음 새기며 산 물건들이 먼지 속에, 흙속에 나뒹구는 모습을 보는 것이 편안하지만은 않다. 살림살이들을 버리고 가면서 함께 버린 것도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남겨놓고 간 것들이 밤마다 떠오르지는 않을까. 버려진 이 물건들은 밤이면 가버린 주인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의 훈김이 빠진 집은 금방 늙어버린다. 당장이라도 집이 무너질 것만 같다. 버려진 집, 사람이 떠나간 집들 옆에서 사람들이 산다.
빈집에서 나와 황새울 영농단 건물이 보이는 들판으로 나왔다. 하얀 표지판에 ‘야만을 멈춰라 -논 일동’이라고 쓰여 있다. 표지의 경고를 무시하고 국방부는 여전히 논을 파헤치고 있다. 농부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전경들과 군인들이 있고, 이동식 화장실 6개가 서 있다. 논을 바라보고 있는 집 문에는 ‘올해도 농사짓자!’라고 쓴 펼침막이 붙어있다. ‘미군막기 대장부’, ‘땅지킴 여장부’ 장승들이 외롭게 서 있다. 그 들 위로 헬기가 낮게 난다. 국방부는 자신들이 파헤치고 있는 것이 논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지금 자신들이 파헤치고 있는 것이 사람들의 심장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 끝에 무엇이 올지 정녕 모르는 것일까.
대추리 집들에는 ‘국방부(평택시․토지공사․한국감정원․주택공 사) 우편물 수취거부․감정평가 거부’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마을 집 담벼락에 걸린 ‘RESIST’(저항하다)라는 펼침막처럼 이곳 대추리 주민들은 지금 저항하고 있다. 국가의 권위주의에, 국가의 폭력에, 생명을 죽이는 그 모든 움직임에.
마을 사람들
논에 나가 일을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맥 놓고, 맥없이 있을 수만도 없다. 밭에 나갔다 돌아오는 할머니. 숨이 가빠 몇 걸음 걷다가 멈추고, 잠시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쉬시기도 한다. 잡풀을 뽑고 돌아오는 길이시라고 한다. 언젠가 들렀을 때도 이 할머니는 밭에 나가 풀을 뽑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채 열 걸음도 못 걷고 멈추어 쉬고, 앉아 쉬고 하셨다. 숨 가쁘게 하는 길이지만 거르지 않고 밭에 나가시는 건, 거기 살아있는 생명들이 할머니 손길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겠지. 평생 사람을 먹여 살린 푸성귀들이 숨 쉬고 있기 때문이겠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할머니, 숨이 더 가빠오기 때문이리라.
마을 둘레에 있는 밭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간간이 눈에 띈다. 한 아저씨는 트랙터로 밭을 간다. 한참 마르고 잡풀 우거졌던 땅이 속살을 드러낸다. 붉은 흙으로 뒤바뀐 밭에 그 무엇이라도 뿌리고 심으면 그대로 쑥쑥 자랄 것만 같은 흙이다. 흙을 뒤집는 아저씨는 그렇게 잘못되고 거꾸로 된 세상을 뒤집어 순수한 속살 그대로 보이게 하고 싶지 않을까. 군사보호시설이라는 이곳에서, 어서 나가라는 이곳에서 저렇게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는 것은 농부가 할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이제 그것은 가장 큰 저항의 몸짓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사는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늘 해오던 대로 올해에도 농사를 짓겠다고 하는 것을 정부는 가장 무서워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저렇게 논을 파헤치고 물이 고이게 하고 논길을 끊어놓는 것이겠지.
미군기지 철망 앞에서
K-6 미군기지 철망 앞에 가 보았다. 대추리 표지가 붙어 있다. 마을 들머리인 것이다. 그 철망에 마을 지도가 걸려 있다. 주민들이 예전 기억들을 더듬어 지도를 그려놓았나 보다. 지도에는 그림도 그려져 있고 글도 써 있다. 거기에 적힌 글들을 옮겨 보았다(맞춤법과 띄어쓰기가 틀려도 쓰인 그대로 옮긴다.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은 말줄임표로 표시).
“내가 어린시절”
6.25 전쟁 당시 미군비행기가 부락주변인 황새울(산) 일원에 기관총을 발사하였쓸시 어린 마음으로 탄피를 주섰으며 탄피를 주을 당시 탄피가 뜨거워 손을 딘 적이 있씀을 상기됨니다.
미군으로부터 무단 철거된 후 집을 짓기 위하여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도 없고 섵가레도 없어 할수없이 일본군이 사용하던 뇌로도 사용하고 섵가레라고 하는 것도 겨우 부지갱이 같은 것으로 쓰고 바침대도 할수없이 부지갱이로 사용 그것도 모자라 뻐침대를 몽당 사용하다가 다 지은 집조차 잃어버린 허무한 경험을 잊지 못하… 집을 짖던 목수마저 도망쳐버린…
1944년 당시 아버님께서 일본군에 강제징용 당하여 일터로 끌려가시며 어머님께서 아버님에게 점심을 갔다 주시라 하여 도시락을 가지고 갔더니 200명 정도의 강제징용 되신 분들이 흙손을 일을 하시기에 무었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비행장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기억으로는 팽성초등학교 1~2년 다닌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후 미국 비행장으로 철거되며 폐쇄된 것으로 알고 있다.
6.25라는 국민의 슬픈 기억 속에서 누구나 격은 참상 속에서 살아왔다. 기억. 기억 또 기억해본다. 무참하게 폭격하는 상황을 본 그 당시 비팔같이 쏙아지는 총탄과 폭탄으로 보리밭 꼴랑으로 숨던 기억과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 그 속에서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모습 아무 죄없이 총에 맞고 아무 말 항의 할 수 없는 그 시절 지금도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피을 토할 지경이다.
마을은 흔적 없이 탄피만 남아 그것도 주어 팔아 살겠다고 몸부림 친 시절 기억하기 실다.
대추리 소년단. 당시 2년여(1949-1950) 짤분 기간이였지만 활기찬 소년들은 박선생님의 지도로 공차는 연씁을 잘하였다. 이웃 부락과 시압도 여러 번 하였으며 우승을 많이 하고 돌아오는 잊이 못할 추억이 있었습니다. 당시 박선생님은 6.25 전쟁이 발발하여 이곳에서 떠나게 되었고 대추리가 미군기지 확장으로 현재 위치에 … 되면서 대추리 소년단은 자연히 해체되게 되었습니다.
52년 8월 10일… 미군이 불도저로 밀고 들어와 담뒤에 공회장 산밭 흙을 밀어놓고 다음날 저녁에 집까지 밀고 들와 주민들은 밀여나왔다.
왜놈들이 비행장을 하기 위… 산을 깍아버리고 간…
지금 60, 70대가 되실 어르신들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대추리 마을이 만들어지기까지 있었던 일들을 지도 위에 새긴 글들이다. 다시 떠올리기 싫은 전쟁의 기억, 쫓겨나던 기억,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야 했던 기억들이다. 쫓기고 빼앗기고 밀려나면서도 땅을 붙잡고 살았던 어르신들, 이제 살만하다 싶은 게 얼마 되지 않는다는데 그나마 살만해지니 다시 나가라고 한다. 빼앗겠다고 한다. 그 어느 땅보다 흙심이 좋아 밥 지어놓으면 기름기 잘잘 흐르는 평택쌀 만들어낸 이 땅에 미군기지를 확장하겠다고 한다. 봄이면 초록빛으로 물들고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물들던 땅을, 그 빛에 잘도 어울리던 노을빛마저 이제 내놓으라고 한다.
미군기지를 둘러싼 철망을 본다. 그 위에 다시 가시철조망이 죽 늘어서 있다. 다시 그 위로 둥근 철조망이 쳐져 있다. 몇 겹의 철망들. 그것이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평화는 열려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막고, 치고, 가리는 것이 아니라 활짝 열려 있는 것 아닐까. 철망위로 풀들이 기어오른다. 철망을 이기려고 한다. 평화는 가시 돋친 철망처럼 뾰족하고 상처 내게 하고 피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니다. 평화는 저 철망을 기어오르는 풀처럼 부드럽고 연약하다. 딱딱하고 차갑고 날카롭고 생명 없는 것을 저 부드럽고 연약하고 생명 있는 것이 결국 이겨내리라.
철망에 ‘제한구역 출입금지’라고 쓴 판이 붙어 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까맣게 칠해 글씨를 가렸다. 평화는 제한하지 않는다. 출입금지 시키지 않는다. 평화는 그 모든 것에 열려 있을 것이다. 이 땅에 전쟁기지를 두고, 전쟁기지를 확장시키려 하면서 ‘평화’를 말하지 말자. 미국이 말하는 평화는, 정부가 말하는 평화는, 가진 자들이 말하는 평화는 무력으로, 돈으로, 위선으로 조작하는 평화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원하는 평화는 그것이 아니다. 다르다.
담벼락 밑에서
미군기지 철망을 바라보다 다시 마을 쪽으로 몸을 돌려 세우니 한 할머니께서 모퉁이 담벼락 아래 쭈그려 앉아 계신다. 대추초등학교 동창회 천막이 쳐진 곳에 소파도 놓여 있는데 왜 그곳에 앉으시지 불편하게 계시냐고 했더니 그늘진 곳을 찾아 앉아계신다고 한다. 할머니는 올 2월에 30여 년 살던 집을 두고 이곳을 떠나신 분이다. 안정리에 새로 지은 아파트에 사신다고 한다. 갑갑하다고 한다. 새장에 갇혀 사는 것 같다고 하신다. 마을에서 살던 사람들이 함께 이사가 있기는 하지만 찾아가 보려고 해도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다고 한다. 이곳이 좋지, 하신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곳을 떠나 같은 아파트로 이사한 할머니와 집 텃밭에 심은 쌈거리와 파를 뜯으러 오셨다고 한다. 마침 이사 나간 사람이 차를 가지고 마을에 들어와 태워주겠다고 해서 그 차를 기다리는 중이신 게다. 지나가는 마을 분을 만나자 인사를 건네지만 여간 불편해 보이지 않는다. 남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볼까 걱정하는 눈빛이다. 떠나긴 했지만 시원하지 않은가 보다.
가까이서 새가 운다. 이곳에 올 때마다 듣는 새 울음인데 그 새가 무슨 새일까 궁금했다. 할머니께 여쭈어보니 ‘구국새’란다. 그 울음 소리는 “지집(계집) 죽고 꾹꾹 / 자식 죽고 구국국”하고 우는 것이란다. 알려주시고는 “그럴 듯 하잖여” 하신다. 저 구국새도 이곳의 60여 년 세월을 함께 했으리라.
마을엔 이제까지 떠나간 사람들 말고도 앞으로 떠날 사람들과 끝까지 남아 이 땅을 지키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 일본군과 미군에 두 번씩 쫓겨나면서 갯벌을 일궈 옥토로 만들고 그 어느 마을보다 화합한 마을이 되어 살만한 마을로 만든 사람들이지만 지금 이 시련 앞에서 아무래도 상처가 크지 않을까 싶다.
평화예술동산에서
평화예술동산에서 노을을 바라보는 한 할머니를 만나 나무 의자에 앉았다. 할머니도 몇 달 뒤에는 떠나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이사 나간 아파트에 가 보았단다. 넓고 깨끗하지만 도저히 그곳에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고 한다. 딸이 살고 있는 안성에 터를 사서 지금 집을 짓고 있다고 한다. 집이 다 지어지면 할머니는 여기에서 떠날 것이다. 몇 년 동안 함께 이곳을 지키기 위해 싸워오고 음력 10월전까지는 촛불집회에 함께 해 왔지만 지금은 그 촛불집회에 나가지 않고 있다. 땅을 팔고 난 뒤부터였다.
철없던 열일곱 살에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와 이곳에서 다섯 남매를 낳아 키우셨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갯벌을 일구고, 새벽 4시면 일어나 일을 시작하고 해가 져 어두컴컴해질 때까지는 집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 모두 허리띠 졸라매가며 일했다고 한다. 여기 돈은 절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자고 다른 마을에 품을 팔러 갈 때도 꼭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고 한다. 남편이 예순 넘었을 때도 농사짓는 틈틈이 막노동을 나가 돈을 벌었다고 한다. 제법 살만 한 집을 지은 지 이제 십년이 조금 넘는다. 그러니 살만 해진 게 사실 얼마 안 된 것이다. 젊어서는 가난과 싸우느라, 자식들 키우느라 그 시절을 다 보냈는데 이제 살만 해지니 다시 나가라고 한다. 논길도 어디로 가든 다 통할 수 있게 잘 내었는데 그 길을 다 못 가게 끊어놓았다고 속상해 하신다. 비록 땅을 팔기는 했지만 할머니는 논이 파헤쳐지기 전에는 그래도 남은 사람들이 이겨서 농사를 다시 지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셨다. 그런데 파헤쳐진 논을 보면서 불안한 생각이 든다고 한다. 하지만 끝까지 싸워 이긴다면야 논 속에 쳐 놓은 철망 다 걷어내고, 파헤쳐진 흙들 다시 덮어 너끈히 농사지을 수 있을 것이라 하신다.
떠나기로 결정하고부터 가슴에 품은 희망은 사라지나 보다. 남은 사람들이야 이기리라는 희망을 갖고 싸우지만 떠나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의심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낙담이 마음에 자리하고 있다. 떠나더라도 있는 동안에는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닌가보다. 자주 가던 노인정도 발걸음 하지 못하고, 저녁을 먹고 다들 촛불집회가 열리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때, 할머니는 그 사람들을 멀리서 바라본다.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지 못한 시간이 꽤 된 것 같다.
지배세력이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일 거다. 하나였던 사람들을 여럿으로 찢어놓고, 불신하고, 의심하고, 반목하게 하는 것. 전쟁기지가 원하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일 거다. 하나로 뭉쳐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것.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 것. 자신을 의심하고 남을 의심하게 하는 것. 믿음을 버리게 하는 것. 지금까지 지녀온 것들을 버리게 하는 것. 가치를 흔들리게 하는 것. 서로 싸우게 하는 것. 저 논에 깊게 골을 내어 물이 들어차게 하는 것처럼 사람들 가슴에 골을 내어 서로 건너지 못하게 하는 것. 스스로 상처에 맘껏 휘둘려 메말라버리게 하는 것. 자신을 파괴하는 것.
그래서 지금 대추리는 싸우고 있다. 대추리에 살면서 이 땅을 결코 미군기지로 내 줄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 이곳에 살지 않지만 틈만 나면 달려오고, 오지 못해도 먼 곳에서 마음을 함께 하는 사람들은 누군가 만든 구호처럼 ‘평화를 택하’기 위해서 지금 싸우고 있다. 삶의 권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파괴당하지 않기 위해서, 아름다운 노을빛 아래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치기 위한 군사기지로 이 땅을 내주지 않기 위해서, 평화를 폭력으로 대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저녁 8시 무렵만 해도 밝더니 늦게 해가 떨어지는 대신 해 떨어지자마자 깊은 어둠이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바람이 분다. 하루 종일 덥더니 밤바람이 더위에 지친 땅도, 사람도 시원하게 쓸어준다. 바람에 소리 내는 나뭇잎들이 무언가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그동안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사람들의 마음을 나무들은 다 알고 있다는 듯 말이다.
첫댓글 참 마음아픈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