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을 삶으며
공유숙
쌀이 떨어졌다.
어쩌다 쌀조차 떨어트렸을까? 어이없는 웃음과 함께 준비 없이 살아
온 내 삶의 단면 같다는 생각에 또 반복할 지도 모를 자책이 앞선다.
불 피우는 도구로 부싯돌을 쓰던 옛 여인이었다면 아마도 불을 꺼트
려 소박이라도 맞았을 것이다. 다행히 현대를 사는 나는 살림을 소홀
한 죄의 대가를 치르기보다는 오히려 언제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쉽게 구할 수 있는 덕에 살림에 대해 옛 여인들보다도 안이해지는 경
우가 많다.
라면을 집으려다 TV에서 본 내 나이쯤 되 보이는 젊은 엄마가 생각
나 영양가 면에서 위인 계란을 삶기로 했다. 자신의 편안함을 추구하
기보다는 아이들의 건강을 먼저 생각하는 그녀는 쉽게 구하고 간편하
게 요리하는 인스턴트음식 대신 간식거리인 과자며 음료수까지도 손수
만들어 주고 있었다. 또한 제품을 구입할 때에도 대충 뒷면의 날짜만
확인하는 게 아니라 어떤 유해 물질이 없는지 일일이 따져보고 구입하
는 것이었다.
요즘은 흔한 게 계란이지만 내가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반찬으로 치
자면 계란만큼 으뜸가는 반찬이 없었다. 그 시절 어머니는 똑같은 '꼬
꼬댁' 소리도 닭이 알 낳는 소리인지 아닌지를 금방 구분하시고 종종
내게 달걀 꺼내오는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셨다. 닭장이 없었던지라 닭
은 사람 손이 안 닿는 곳을 찾아 헛간 구석진 곳이나 집 더미 속에 알
을 낳았기 때문에 이곳저곳을 살금살금 뒤져 꺼내오던 기억이 난다.
갓 낳은 달걀의 따끈따끈한 생명체의 온기를 통해 어미 닭의 산고를
알리 만무한 초등학생 작은 계집아이는 그저 꼭꼭 숨어 낳은 계란을
찾았다는 것만으로 즐겁고 신이 났었다.
무엇이든 짝이 맞아야 기분이 좋은 나는 냉장고에서 계란 네 개를 꺼
냈다. 어디하나 모나거나 각지지 않은 둥글둥글한 계란을 만지며 어쩌
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모를 계란을 물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
곤 계란 프라이를 할 때 작은 핏자국을 보았을 때처럼 시선을 돌렸다.
이세상의 많은 단어 중 나는 둥글다는 말을 참 좋아한다. 둥글다는
것은 사람을 참 편안하고 여유 있게 한다. 엄마의 자궁이 둥글고, 새
의 둥지가 둥글고,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가 둥글다. 둥글다는 말속에
는 엄마 같은 깊은 사랑과, 새의 둥지 같은 포근함과, 지구를 닮은 넓
은 포용력과, 만남과 이별이 하나이듯 시작과 끝이 하나인 오묘한 진
리까지 담고 있는 것 같아 참 좋다. 계란을 닮은 미인의 얼굴형을 사
람들이 좋아하는 것도 모나 보이지 않기 때문이리라.
어릴 적 작은아버지 댁을 방문했을 때 숙모께서 내온 계란을 얼마나
욕심을 내서 먹었는지 입에서 역겨운 냄새가 나도록 먹은 적이 있다.
그 후론 계란 근처에만 가도 역한 냄새가 나는 듯해 냉면이나 쫄면 혹
은 샌드위치 속에 든 계란까지도 빼놓고 먹었다. 누군가와 같이 먹게
되면 인심이라도 쓰듯 상대에게 건네주었고 그렇지 않을 경우엔 상 옆
에 슬며시 건져놓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호되게 당하고 나면 그가 싫어지는 것처럼 한번 체했던
음식도 다시는 먹고싶지 않은지 그 후로 오랫동안 계란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 나이가 들면 입맛도 변하는지 보기
만 해도 몸에서 거부할 것 같던 계란이 이제는 약방의 감초처럼 식탁
한 구석을 차지한다. 값도 싸고 조리하기도 편리할 뿐 아니라 탄수화
물과 비타민 C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영양소를 골고루 갖추고 있는
완전식품이기에 상차림이 부실해 보일 땐 계란하나가 부족한 영양소
를 채우데 커다란 구실을 한다. 모양을 내고 싶을 때는 실파 썬 것을
넣고 예쁜 달걀말이를 만들 수도 있고, 마땅히 끓일 찌개가 없을 때는
파나 양파 당근 등 남은 채소들을 이용해 계란찜을 해도 훌륭한 반찬
이 된다. 또한 계란 노른자에는 레시틴이라는 유화(和)물질이 있어
영원히 화합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름과 물까지도 부드럽게 융화(融化)
시키는 이 있다.
사람의 마음속에도 레시틴 같은 역할을 하는 기관이 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얼음장같이 차가운 마음도 녹일 수 있을 테고 여야 간의 싸
움도 두 동강난 남과 북도 허물지 못한 동서간의 이데올로기도 따뜻하
게 화합할 수 있었을 텐데...... 뿐이겠는가. 인간의 오욕칠정이 빚은
때묻은 인간사로 얼룩진 슬픈 역사를 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혼돈
과 무질서 속에서 도덕적 해이와 편협한 이기주의가 난무하지도 않았
을 것이다. 주관적인 잣대로 편가르기를 하거나 그 동안의 나처럼 멍
드는 게 무서워 마음속에 울타리를 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
여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마음의 눈까지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
을까?
계란이 이리저리 냄비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들썩거린다.
채워지지 않는 끝없는 욕망의 몸부림으로 조바심하는 내 속의 나처럼,
그리고 내 삶에 여름이 시작될 때 사랑만 있으면 저절로 살아질 것 같
던 격정의 몸짓 같은 모습으로 부글대며 끓어오른다.
인구지리 강의시간, 인간생활에 가장 필요한 요소를 묻는 질문에 모
두들 의(衣). 식(食). 주(住)라고 대답하는데 나만이 사랑이라고 대
답하는 바람에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은 왜 웃었을
까?...... 지금도 역시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난 또다시 사랑이라고 대
답하고 싶다. 계란처럼 둥근 세상에서 날카로운 감정으로 다른 사람
가슴에 상처 내는 일없이 둥글둥글 살고싶다.
계란을 덮었던 물이 밑바닥에 내려와 있는 걸 보니 다 익었나보다.
따끈따끈한 계란 네 개를 꺼내 단단한 껍질을 벗겨냈다. 아기 엉덩짝
처럼 말랑말랑한 계란이 접시 위에서 이리저리 춤을 춘다. 아이들이
쉽게 반기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갓 낳은 계란을 꺼내 들고 미리부터 점심시간을 기다리던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해준다면 또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2001 10집
첫댓글 계란이 이리저리 냄비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들썩거린다.
채워지지 않는 끝없는 욕망의 몸부림으로 조바심하는 내 속의 나처럼,
그리고 내 삶에 여름이 시작될 때 사랑만 있으면 저절로 살아질 것 같
던 격정의 몸짓 같은 모습으로 부글대며 끓어오른다.
지금도 역시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난 또다시 사랑이라고 대
답하고 싶다. 계란처럼 둥근 세상에서 날카로운 감정으로 다른 사람
가슴에 상처 내는 일없이 둥글둥글 살고싶다.
계란 노른자에는 레시틴이라는 유화(和)물질이 있어 영원히 화합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름과 물까지도 부드럽게 융화(融化)시키는 이 있다.
사람의 마음속에도 레시틴 같은 역할을 하는 기관이 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얼음장같이 차가운 마음도 녹일 수 있을 테고 여야 간의 싸움도 두 동강난 남과 북도 허물지 못한 동서간의 이데올로기도 따뜻하게 화합할 수 있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