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넘긴다 종이의 얇음을 넘긴다 앞면과 뒷면이 다르게 적히는 세계를 넘긴다 넘겨지지 않는 것들이 남아 있어서 위치를 표시할 수가 없다 돌아갈 수 있을 것도 같았는데 매번 다른 곳이었다’
- 심지아 詩『책장 넘기기』
- 시집〈신발의 눈을 꼭 털어주세요〉
며칠 전 밤, 노트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스스로 쓴 글씨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악필까지는 아니어도 내세울 만한 필체는 아니었던 데다, 상황이 급하면 휘갈겨 적는 나쁜 습관이 있다. 분명 판매한 시집 제목이다. 계산하다 대충 적은 모양이다. 읽어내 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동료를 붙들고 이 글씨가 무엇 같으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질문을 하고 말았다.
그는 몇 가지 그럴듯한 추측을 내놨으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퍼뜩 설치해놓은 방범용 카메라가 떠올랐다. 녹화본을 살펴보면 어떤 시집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접속해보니, 지난 몇 시간의 내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영상 속 내 모습은 믿기지 않을 만큼 한 가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스마트폰 들여다보기. 나는 글씨가 가리키는 시집을 찾을 생각은 까맣게 잊고 그저 부끄럽기만 했다. 평소 과하다 싶게 많이 들여다보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정작 스마트폰 화면만 들여다보는 모습을 보자니 망연해지고 말았다. 시인이며 서점지기라는 사람이 어쩜 이럴 수가 있는가.
나는 이 작은 화면에 의존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어느새 삶의 대부분을 이 안에 담아둔 것이다. 스마트폰 없이 살던 시절을 기억해보려 해도 어땠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질 않는다. 다만, 지금 내 생각과 행동의 근거는 그 시절 습관처럼 읽던 책에서 가지고 온 것만은 분명하다. 만약 화면 속 내가 책장을 넘기기만 하고 있었다면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책을 넘기는 감각이 그리워 퇴근길엔 가방에 스마트폰을 넣고 대신 책을 손에 들고 나섰다.